•  


요하네스 베르메르 ‘眞珠 귀고리를 한 少女’|新東亞

名作의 祕密

요하네스 베르메르 ‘眞珠 귀고리를 한 少女’

그 애잔한 魅惑의 正體

  • 이광표 西原大 敎養大學 敎授

    kpleedonga@hanmail.net

    入力 2020-01-05 10:00:01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스냅寫眞처럼 動的 포즈를 捕捉한 異例的 人物化

    • 빛나는 眞珠 귀고리, ‘꼭 말해야겠다’는 哀切함

    • 稀貴 疾患인 全身 無毛症(全身 無毛症)일까…

    • 나치 괴링이 蒐集한 베르메르의 僞作 論難

    • “내가 假짜를 그렸다”는 僞造犯, ‘眞짜’라는 專門家들

    • 천경자 ‘美人圖’ 僞作 論難과 비슷

    [헤이그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

    [헤이그 마우리츠下위스 美術館]

    少女의 눈은 크고 맑다. 고개를 돌려 뒤돌아보는 瞬間, 眞珠 귀고리가 쨍하고 透明하게 빛난다. 同時에 살짝 벌린 입술에서 무언가를 꼭 말해야겠다는 哀切함이 밀려온다. 大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저 少女의 말을 꼭 들어줘야만 할 것 같다. 그런데 터번으로 머리를 동여맨 少女는 놀랍게도 눈썹이 없다. 或是 여기에 무슨 祕密이 숨어 있는 건 아닐까.

    魔法에 걸린 고요함

    네덜란드 畫家 요하네스 베르메르(1632~1675)의 1665年 作 ‘眞珠 귀고리를 한 少女.’ 이 作品을 두고 누군가는 “繪畫 歷史上 가장 아름다운 少女”라고 한다. 또 누군가는 “北유럽의 모나리자”라고 한다. 日本의 한 美術賞은 이 作品을 2000億 원 程度로 評價하기도 했다. 

    베르메르 그림은 大部分 日常의 瞬間을 아름답고 평화롭게 捕捉했다. 그 日常을 透明한 빛이 감싸 안고 있다. 그의 그림들 곳곳엔 고요와 寂寞이 흐른다. 

    ‘眞珠 귀고리를 한 少女’의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자. 라피스 라줄리(鮮明한 靑色 保釋)의 色調가 津하게 묻어나는 푸른 터번, 노란色 上衣, 반짝이는 眞珠 귀고리, 베르메르 特有의 빛의 表現…. 

    이 그림은 慇懃히 動的(動的)이다. 베르메르는 얼굴을 돌린 모습을 스냅寫眞 撮影하듯 瞬間的으로 捕捉했다. 畫家의 感覺이 빼어나다. 이러한 포즈는 이 作品의 主要 德目이다. 그렇기에 現代的이고 세련됐다. 17世紀에 이렇게 動的인 포즈를 捕捉해 人物畫로 具現한 것은 매우 異例的이다. 少女는 얼굴을 돌려 뒤를 바라본다. 맑고 커다란 눈망울에 살짝 벌린 입. 多少 憂鬱한 눈빛에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무척 궁금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 수는 없다. 베르메르는 이에 對한 端緖를 全혀 남겨놓지 않았다. 



    色感 또한 魅惑的이다. 特히 푸른色 터번과 노란옷의 對比가 두드러진다. 푸른 터번에선 라피스 라줄리의 色調가 津하게 묻어난다. ‘꿈과 같이 조용하고 신비스러운 雰圍氣’와 ‘魔法에 걸린 듯한 고요함’이 畵面에 가득하다. 眞珠 귀고리 少女의 눈망울은 ‘모나리자’ 눈빛보다 더 魅惑的이다. 

    네덜란드 헤이그에 마우리츠下위스 美術館이 있다. 그리 크지 않지만 알찬 美術館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헤이그에 가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가 마우리츠下위스 美術館에 가는 것”이라고 말하곤 한다. 여기에 ‘眞珠 귀고리를 한 少女’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베르메르는 작은 運河都市 델프트에 살면서 그림을 그렸다. 17世紀 네덜란드는 海洋文明의 黃金期를 謳歌하면서 美術도 盛行했다. 當時 암스테르담에만 畫家가 無慮 700餘 名이나 活動했고, 1600~1800年 사이 500萬~1000萬 點의 그림이 生産됐다고 한다. 貴族이나 敎皇보다는 一般 市民들의 그림 注文이 많았고, 그렇다 보니 日常의 風俗畫家 流行했다고 專門家들은 보고 있다. 

    그런 雰圍氣에서 베르메르는 日常의 모습을 畫幅에 옮겼다. 하지만 베르메르는 43歲의 젊은 나이에 婦人과 10名의 子息을 남겨두고 世上을 떠났다. 現傳하는 그의 作品은 不過 30餘 點. 베르메르는 곧바로 世上 사람들의 記憶 속에서 잊혀갔다. 

    그러나 只今은 狀況이 다르다. 베르메르는 이제 네덜란드를 代表하는 畫家다. 그가 그린 ‘眞珠 귀고리를 한 少女’는 헤이그의 자랑이 됐다. 作品도 적고 別로 알려진 바가 없어 베르메르를 “수수께끼 畫家”라고 하는데도 베르메르와 ‘眞珠 귀고리를 한 少女’는 어떻게 有名稅를 탄 것일까.

    나치를 嘲弄한 世紀의 僞作

    그리 存在感이 없던 베르메르가 關心의 對象이 된 것은 19世紀 後半 硏究가 進行되면서부터다. 이에 힘입어 20世紀 베르메르의 그림들이 조금씩 注目받기 始作했다. 1930年代엔 特히 더 話題였다. 베르메르의 새로운 作品들이 잇따라 發掘됐기 때문이다. 

    第2次 世界大戰 유럽戰爭 直後인 1945年 5月, 聯合軍은 오스트리아 아우스第 소금鑛山에서 나치가 숨겨둔 美術品을 大量 發見했다. 나치 2人者 헤르만 괴링의 蒐集品度 있었고, 거기서 ‘姦淫한 女人과 그리스도’라는 作品이 나왔다. 作品엔 요하네스 베르메르란 署名이 들어 있었다. 蒐集 經緯를 적어놓은 記錄에 따르면, 1942年 괴링이 仲介人을 통해 판 메이헤른(1889~1947)이라는 畫像 兼 畫家로부터 購入한 것이었다. 이 같은 消息이 알려지자 美術界는 “베르메르의 새로운 作品”이라며 興奮했다. 

    하지만 네덜란드 警察은 메이헤른을 나치 協力罪로 逮捕했다. 나치에게 그림을 판 것은 나치에 附逆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理由에서였다. 警察은 메이헤른이 베르메르 作品을 어떻게 入手했는지 追窮하기 始作했고, 時間이 지나면서 메이헤른은 “그 作品은 내가 그렸다”고 實吐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메이헤른은 “1930年代 새롭게 發見돼 注目받은 베르메르의 그림은 모두 내가 그린 것”이라고 덧붙였다. 衝擊的인 發說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놀라운 內容이다 보니 사람들은 메이헤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메이헤른이 나치 協力罪로부터 벗어나려 꾸며낸 말이라고 여겼다. 

    司法 當局 또한 메이헤른을 믿지 않았다. 1945年 7月 네덜란드 국립미술관은 한술 더 떠 “진작(眞作)임을 證明할 수 있다”고까지 말할 程度였다. 메이헤른은 답답했다. 메이헤른은 이렇게 主張했다. 

    “‘姦淫한 女人과 그리스도’는 내가 캔버스의 顔料를 벗겨내고 그린 것이다. 그림을 긁어내면 元來 그림이 드러날 것이다.” “그 元來 그림을 내게 판 美術賞도 다 알고 있다.” 

    메이헤른의 實吐가 繼續 이어지자 警察은 顯微鏡 調査를 實施했고 實際로 밑그림 痕跡이 드러났다. 메이헤른의 말대로 僞作이었다. 그러나 司法 當局과 世上 사람들은 如前히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베르메르를 잃었지만 메이헤른을 發見했다”

    이런 狀況에서 메이헤른은 自身이 假짜를 그렸다는 事實을 立證해야만 했다. 그는 獄中에서 直接 새로운 僞作을 그려 立證하고자 했다. 結局 메이헤른은 2個月 만에 ‘學者들 사이에 앉은 그리스도’란 題目의 그림을 完成했다. 1930年代 새롭게 發掘됐다는 베르메르 그림과 雰圍氣, 色感, 붓 터치 等이 거의 恰似했다. 司法府는 僞作 事實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世上 사람들도 假짜임을 비로소 認定하기 始作했다. 

    稀代의 僞作 事件이었다. 世上은 美術界에 冷笑를 쏟아냈다. “우리는 베르메르를 잃었지만 代身 판 메이헤른을 發見했다”라고. 假짜를 제대로 가려내지 못한 美術界를 嘲弄하는 것이었다. 메이헤른은 나치에 附逆한 賣國奴에서 侵略者 獨逸을 감쪽같이 속여버린 英雄으로 取扱받기도 했다. 메이헤른은 詐欺罪로 懲役刑을 宣告받았지만 나치 協力 嫌疑는 無罪로 判決 났다. 

    僞作 事件의 後遺症은 만만치 않았다. 메이헤른의 僞作을 購入한 사람들은 現實을 믿고 싶지 않았다. 自身이 所藏한 作品의 값이 떨어지고, 眼目과 自尊心에 致命傷을 입었기 때문이었다. 裁判 結果에 不服해 訴訟을 提起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이헤른은 왜 이런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까. 事實은 메이헤른도 畫家였다. 그는 “世上이 나를 알아주지 않았다. 美術界는 내 作品을 過小評價했다. 나의 存在를 알리고 美術界와 世上에 復讐하고 싶었다”고 告白했다. 메이헤른은 1932年부터 베르메르의 그림을 探究했다. 作品은 存在하지 않지만 그렸을 것으로 推定되는 그림 아이템을 찾아내 批評家들의 評價를 參考하면서 熱心히 그림을 그렸다. 옛날 캔버스 그림을 찾아내 물감을 벗겨내고 거기 그림을 다시 그렸다. 그렇게 그린 뒤 오븐에 굽고 龜裂과 欠집을 내고 옛날 雰圍氣로 꾸며 ‘엠마오의 그리스도와 弟子들’ ‘엠마오의 저녁 食事’와 같은 題目으로 世上에 내놓았다. 그러자 美術史家와 評論家들은 “베르메르의 그림이 發見됐다. 놀라운 그림이다”라며 極讚했다. 메이헤른이 1935~37年에 그린 ‘엠마오의 저녁 食事’는 1938年 로테르담 步이만스 美術館이 54萬 길더에 購入해 只今도 所藏하고 있다. 괴링이 夫人과 함께 사들인 作品 中 11點도 假짜로 確認됐다. 結果的으로 나치에 附逆한 것이 아니라 나치를 제대로 嘲弄한 셈이 됐다. 이러한 騷動을 겪으며 베르메르는 大衆의 마음속에 完全하게 刻印됐고 ‘牛乳를 따르는 女人’ ‘眞珠 귀고리를 한 少女’ 等도 大衆의 注目을 받았다. 

    僞造犯은 “내가 假짜를 그렸다”고 하는데, 世上 사람들과 專門家들은 “眞짜”라고 否認한다. 베르메르 僞作 事件은 이처럼 매우 特異한 境遇였다. 그런데 國內에서도 類似한 일이 벌어진 바 있다. 천경자(1924~2015)의 ‘美人圖’ 眞僞 論難이다. 要約하면, 千鏡子의 ‘美人圖’를 두고 國立現代美術館과 美術界는 “眞짜(千鏡子가 그린 作品)”라고 主張하는데 畫家인 千鏡子와 遺族들은 “假짜” 라고 反駁하는 形局이다. 美人圖 論難의 槪要는 이렇다.

    ‘美人圖’ 眞僞 論難

    검찰은 2016년 12월 19일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소회의실에서 고 천경자 화백 ‘미인도’ 위작 논란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25년간 위작 논란이 일었던 천 화백의 미인도가 진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뉴시스]

    檢察은 2016年 12月 19日 서울중앙지방검찰청 小會議室에서 故 千鏡子 畫伯 ‘美人圖’ 僞作 論難 事件 搜査 結果를 發表했다. 25年間 僞作 論難이 일었던 千 畫伯의 美人圖가 眞品이라는 結論을 내렸다. [뉴시스]

    1979年 10月 朴正熙 大統領 弑害 事件 以後, 戒嚴司令部가 김재규의 所長 美術品을 押收했다. 여기에 ‘美人圖’가 包含돼 있었다. 押收 美術品은 1980年 國立現代美術館에 移管됐고, 1990年과 1991年 圖錄과 展示를 통해 世上에 公開됐다. 그러자 千鏡子는 “그 美人圖는 내가 그리지 않은 것”이라고 主張했다. 美術界가 발칵 뒤집혔다. 國立現代美術館은 “眞짜가 맞다”며 畫廊協會에 感情을 要求했다. 1991年 4月 畫廊協會와 感情 參與 專門家들은 세 次例 鑑定 結果 모두 “眞짜”라고 判定했다. 그러나 論難은 그치지 않았다. 生存 作家가 “내가 그리지 않았다”고 하는 狀況에서, 專門家들이 “千鏡子가 그린 것”이라고 하는 特異한 狀況이었다. 國立現代美術館은 只今까지 “眞짜”라는 見解를 堅持하고 있다. 

    그러던 中 1999年 收監 中이던 그림 僞造犯 권춘식이 “美人圖는 내가 그렸다. 그러니 美人圖는 假짜다”라고 말했다. 歲月이 흘러 2015年 千鏡子가 他界했고, 그 後 권춘식은 다시 입을 열어 “美人圖는 내가 그렸다. 作家에게 未安하다. 容恕를 求한다”고 했다. 그러나 2016年 다시 美人圖 眞僞 論難이 일었고, 그해 3月 권춘식은 “나는 美人圖를 그린 적이 없다” “減刑 받고 싶어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그러곤 한 달 뒤 다시 “美人圖는 내가 그린 게 맞다”고 橫說竪說했다. 

    2016年 4月 천경자 遺族은 국립현대미술관의 前·現職 關係者들을 獅子(死者)名譽毁損, 著作權法 違反 等의 嫌疑로 檢察에 告訴·告發했다. 問題가 된 作品의 眞僞를 다시 가리자는 것이었다. 그 訴訟의 渦中에도 見解差로 인한 論難은 그치지 않았지만, 檢察은 “천경자 그림이 맞다”며 無嫌疑 處分했다. 作家는 自身의 作品이 아니라고 하고, 專門家 그룹은 作家의 作品이라고 한다. 畫家는 自身의 作品을 모두 完璧하게 알아볼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베르메르 僞作 事件처럼 참으로 特異한 境遇였다. 

    1940年代 메이헤른 事件은 世界 美術史에서 最大의 僞作 事件으로 꼽힌다. 메이헤른은 世上을 嘲弄했고 世上은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다. 메이헤른은 特히 最高의 專門家들을 完璧하게 속였다. 獄中과 法廷에서 進行된 메이헤른의 僞作 試演은 ‘世紀의 퍼포먼스’였다는 얘기를 듣는다. 傷處와 後遺症은 컸지만, 사람들은 베르메르라는 이름을 完全히 記憶하게 됐다. 專門家들 사이에서만 膾炙되던 베르메르가 비로소 大衆化에 成功한 것이다. 

    그 가운데 가장 人氣를 끄는 作品이 ‘牛乳를 따르는 女人’과 ‘眞珠 귀고리를 한 少女’다. 두 그림의 共通點은 고요함과 寂寞한 雰圍氣, 그리고 빛의 表現이다. 사람들은 ‘眞珠 귀고리를 한 少女’를 보면서 많은 것을 궁금해했다. 저 少女는 實存 人物일까 아닐까. 이런 궁금症은 結局 小說과 映畫 ‘眞珠 귀고리 少女’를 탄생시켰다. 1999年 트레이시 슈발리에는 小說 ‘眞珠 귀고리의 少女’를 내놓았고, 이 作品은 베스트셀러로 登極했다. 2003年엔 피터 웨버 監督이 映畫를 만들었다. 이런 過程을 통해 眞珠 귀고리 少女는 大衆의 스타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푸른 터번 vs 眞珠 귀고리

    요하네스 베르메르 ‘우유 따르는 여인’, 1660년.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요하네스 베르메르 ‘牛乳 따르는 女人’, 1660年. [네덜란드 國立美術館]

    이 무렵까지만 해도 이 作品을 ‘푸른 터번의 少女’로 부르는 境遇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小說과 映畫를 契機로 ‘眞珠 귀고리를 한 少女’라는 이름이 사람들의 마음에 穩全하게 자리 잡게 됐다. 作品 이름을 둘러싼 變化는 그 作品의 一生에서 매우 重要한 過程이다. 푸른 터番移 주는 感性과 眞珠 귀고리가 주는 感性은 分明 다르다. 少女의 귀에 걸려 있는 眞珠 귀고리는 어두운 背景 속에서 딱 한 點으로 明澄하게 빛난다. 푸른 터번에 비해 凝集力과 發散力이 훨씬 더 强烈하다. 

    皮膚科 專門醫인 이성락 前 嘉泉大 總長은 그림을 매우 좋아한다. ‘朝鮮時代 肖像畫에 나타난 皮膚 病變(病變) 硏究’라는 美術史 博士 論文을 쓰기도 했다. 그 過程에서 이 前 總長은 베르메르의 ‘眞珠 귀고리를 한 少女’에 關해 놀라운 點을 하나 찾아냈다. 少女 얼굴에서 눈썹이 보이지 않는다는 事實이다. 그림을 눈여겨보면, 그의 指摘대로 少女는 눈썹이 없다. 大體 어찌된 일일까. 이는 또 다른 推論과 想像力을 誘發한다. 그러고 보니 이 少女는 머리를 터번으로 감쌌다. 그냥 터번을 걸친 것이 아니라 머리를 完全히 감싼 것이다. 왜 그랬을까. 或是 머리카락이 없는 것은 아닐까.

    사라진 눈썹과 無毛症 皮膚 疾患

    베르메르의 다른 그림에 登場하는 女性들은 모두 豐盛한 머릿결과 눈썹을 갖고 있다. 그런데 眞珠 귀고리 少女에게서만 눈썹이 보이지 않는다. 李 前 總長은 皮膚科學的으로 接近해, 少女가 難治性 稀貴 疾患인 全身 無毛症(全身 無毛症)을 앓고 있다고 봤다. 그는 이렇게 推論한다. 

    “日常生活에 큰 支障이 없다고는 하지만 成長期 少女가 겪어야 할 心理的 負擔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興味롭고 놀라운 事實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저 少女의 애잔한 눈망울은 無毛症과 關聯이 있는 것은 아닐까. 推論이지만 蓋然性이 매우 높아 보인다. 더 나아가 그 少女가 當時 實存 人物이었을 可能性도 濃厚하다. 

    사람들은 ‘眞珠 귀고리를 한 少女’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만큼이나 다양하게 變奏하고 패러디한다. 왜 그런 것일까.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면서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저 少女를 外面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저 少女에게 무언가를 答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眞珠 귀고리 少女는 보는 이를 自身의 畵面 속으로 불러들인다. 觀客이 少女를 向해 무언가 말을 하도록 呼訴한다. 그 呼訴力 德分에 그림은 늘 新鮮하고 生動感이 넘친다. 그 對答에 이제 눈썹 얘기를 追加해야 할 것 같다. 어린 少女가 겪었을 無毛症의 서글픔. 

    어느 展示 企劃者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眞珠 귀고리를 한 少女를 韓國에 招待할 수 있다면 完全 大박日 텐데….” 

    當然한 말이다.


    이광표
    ● 1965年 忠南 豫算 出生
    ● 서울대 考古美術史學科 卒業
    ● 高麗大 大學院 文化遺産學協同過程 卒業(博士)
    ● 前 동아일보 論說委員
    ● 著書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博物館’ ‘韓國의 國寶’ 等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