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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남 ‘그 事件’ 後 첫 인터뷰|新東亞

單獨

조영남 ‘그 事件’ 後 첫 인터뷰

“代作 論難, 떳떳하지만 苟且하게 解明하고 싶지 않다”

  • 송화선 記者

    spring@donga.com

    入力 2019-12-2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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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審 有罪, 2審 無罪…4年의 沈默

    • ‘조영남 事件’ 韓國 現代美術史에 重要한 일로 記錄될 것

    • 美術學院度 안 다닌 놈이 美術 얘기 한다고 밉보인 거지…

    • 世稱 ‘代作畫家’ 宋氏, ‘다시 일하자’고 連絡 왔다

    • 年末 디너쇼, 1月 유튜브 채널 開設 等으로 大衆 만날 計劃



    [홍중식 기자]

    [홍중식 記者]

    조영남 氏 집은 마치 畫室 같았다. 玄關부터 居室, 房 안에 이르기까지 눈 닿는 곳 어디에나 그림이 놓여 있었다. 壁面을 따라 겹겹이 쌓인 作品은 大部分 지난 3年餘 사이에 조氏가 完成한 것이라고 했다. 大衆의 視野에서 벗어나 있던 時間, 조氏 表現을 빌리자면 ‘流配生活’의 痕跡이다. 

    조氏는 한때 ‘畵手(畵手)’로 불렸다. ‘그림 그리는 歌手’라는 뜻이다. 花鬪를 테마로 한 그의 作品은 大衆 사이에서 큰 人氣를 모았다. 그러다 2016年 ‘그 事件’이 터졌다. 無名 畫家 宋某 氏가 조氏 그림을 代身 그려줬다는 疑惑이다. 

    조氏는 作品 製作 過程에서 宋氏 도움을 받았다고 認定했다. “畫家가 助手를 두는 것은 美術系 慣行”이라고 했다. 陳重權 東洋大 敎授 等이 조氏 意見에 힘을 실어줬다. 反面 ‘代作(代作)은 容納할 수 없는 犯罪’라는 主張을 펴는 이도 적잖았다. 檢察은 後者 便에 섰다. 조氏는 詐欺 嫌疑로 起訴됐고, 1審에서 懲役 10個月, 執行猶豫 2年을 宣告받았다. 2017年 10月의 일이다. 數十 年 間 歌手, 畫家, 放送 進行者로 大衆 앞에 섰던 그에게 그렇게 ‘詐欺꾼’ 딱紙가 붙었다.

    生産的인 時間

    [홍중식 기자]

    [홍중식 記者]

    조氏 이름이 다시 言論에 登場한 건 2018年 8月, 2審 法院이 原審을 破棄하고 조氏에게 無罪를 宣告했을 때다. 檢察이 이에 不服해 上告하면서 事件은 大法院으로 넘어갔다. 有罪 한 番, 無罪 한 番을 받으며 酷毒한 時間을 보낸 조氏는 大法院 判斷을 기다리는 狀態다. 同時에 世上을 向해 조금씩 걸어 나올 準備를 하고 있다. 2019年 12月 29日, 서울 汝矣島 63컨벤션센터에서 4年 만에 디너쇼를 연다. 



    조氏를 만나면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부터 물으려 했다. 그러나 自宅 門을 열고 들어선 瞬間 이미 答이 보였다. 군데군데 물감 묻은 코듀로이 바지를 입은 그는 인터뷰를 하면서도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 

    “그동안 그림을 많이 그렸고, 冊을 2卷 썼다. 엄청 生産的으로 보냈다. 時間이 많으니까.” 

    조氏가 放送에서 자주 보던 사람 좋은 얼굴로 씨익 웃었다. 덥수룩한 머리와 검은 뿔테眼鏡, 후줄근한 듯 보이지만 패션 센스가 느껴지는 스타일은 예전 그대로였다. 

    - 4年 만의 디너쇼 消息을 들었다. 다시 活動을 始作하는 건가. 

    “그런 셈이다. 公演企劃者들이 ‘音樂 活動은 해도 되는 거 아니냐’고 連絡을 해왔다. 放送 出演이 停止된 거지 다른 거는 制限이 없으니까 ‘그래, 해보자’ 했다.” 

    - 그럼 그동안은 부르는 곳이 없어서 쉬었나. 

    “自意 半 他意 半이라는 表現이 正確할 거다. 提案이 없지는 않았다. 조용히 지낸 건 무슨 얘기를 하기가 힘들어서다. 法的으로 걸려 있는 後輩가 있다. 나한테 ‘兄 兄’ 하던 親舊다. 그가 잘못했다는 걸 크게 떠들고 싶지 않았다. 혼자 辱 다 먹고 말았지.” 

    - 世稱 代筆畫家 宋氏 얘긴가. 

    “그렇다. 내가 가만있으니까 意外로 陳重權 같은 사람이 애를 많이 써줬다. 나 代身 辱을 엄청 먹었지. 오죽하면 그분이 인터넷 안 한다고 宣言했겠나.” 

    2016年 얘기다. 當時 진 敎授가 쓴 글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처음으로 花鬪를 그릴 생각을 한 것은 조영남이고, 花鬪 시리즈를 畫廊과 展示會에 들여보낸 것이 조영남이고, 個別 作品의 아이디어를 提供한 것이 조영남이고, 그림을 그려달라고 注文을 넣은 것이 조영남이고, 그렇게 그려진 作品에 덧漆을 한 것이 조영남이며, 그것을 製作品으로 認定하여 사인을 한 것이 조영남이라면, 그 作品은 700% 조영남의 ‘原作(original)’이다. 이것이 이른바 ‘槪念的 革命’을 통해 貫徹된 現代美術의 論理다.” 

    진 敎授는 이런 말도 했다. 

    “뒤샹은 그림을 안 그렸지만 오늘날 現代美術의 아버지로 꼽힌다. 왜? 藝術의 槪念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中略) 뒤샹이 自身은 ‘그림을 그리지 않는 畫家가 될 것’이라고 宣言한 게 無慮 100年 前이다.” 

    그러나 輿論의 叱咤는 따가웠다. 그 무렵 輿論調査 專門機關 리얼미터가 全國 19歲 以上 501名을 對象으로 한 調査 結果, “潮水가 그림 大部分을 그린 作品임을 밝히지 않고 展示 或은 販賣했다면 詐欺”라는 意見이 73.8%였다. “美術界의 通常的 慣行이므로 問題 삼을 수 없다”는 意見은 13.7%에 不過했다. 言論과 인터넷 空間에서 조氏는 이미 ‘犯罪者’였다. 이를 否定하는 진 敎授에게도 非難과 辱說이 쏟아졌다. 진 敎授는 結局 팔로어가 86萬 名에 이르던 트위터 計定을 닫고 말았다.

    이 亡할 놈의 現代美術

    - 當時 마음苦生을 좀 했겠다. 

    “그걸 뭐라고 規定하느냐에 따라 다를 텐데…. 사람들이 워낙 强하게 몰아쳐 서운했던 건 틀림없다. 안 서운했다면 거짓말일 거다.” 

    - 最近 진 敎授는 當時 事件을 整理하며 ‘現代美術에 對한 沒理解가 빚어낸 笑劇’이라고 評價한 冊을 出刊했다. 

    “그러잖아도 읽어보려던 참이다. 나도 冊을 낼 計劃이었는데 진 敎授가 먼저 했다.” 

    - 뭘 쓰려고 했나. 

    “1審에서 내가 왜 有罪를 받았는지, 2審에서는 그게 왜 뒤집혔는지. 大法院 判決 나오면 裁判 全體에 對해 詳細히 알리려 한다. 그前에 나올 冊도 있다. 내가 예전에 ‘現代人도 못 알아먹는 現代美術’이라는 冊을 썼다. 裁判을 하면서 보니 法廷에서 일하는 사람을 包含해 如前히 大多數가 現代美術에 對해 잘 모르더라. 좀 더 쉽게 다시 써야겠구나 생각했다. 쉬는 동안 그걸 썼다. 題目은 ‘이 亡할 놈의 現代美術’이다. 여기에 내 事件 얘기는 안 들어간다. 只今 마무리 編輯 段階다.” 

    조氏는 直接 그린 이 冊 表紙 그림을 보여줬다. 

    - 한동안은 그림을 쳐다보기도 싫었을 것 같은데 아닌가 보다. 집 곳곳에 그림이 무척 많다. 

    “나는 그림을 그만두고 싶다고 그만둘 수가 없다. 初等學生 때부터 繼續 그렸다. 남들은 時間 나면 낚시하고 바둑 두고 登山 가지만 나는 그림을 그린다. 一種의 習慣이다. 最近엔 일이 없으니 時間이 무척 많다. 親舊 만나고 映畫 보고 밥 먹고, 그래도 時間이 있으면 뭘 하겠나. 엄청난 생각을 갖고 그린 게 아니다. 늘 해오듯, 그냥 그렸다.” 

    - 이제 助手 안 쓰나? 

    “안 쓰지, 하나도.” 

    - 그 事件 以後로 全혀? 

    “안 썼다.”

    “美大 門턱도 안 가본 歌手가 敢히…”

    - 美術 作業에 助手를 써도 관계없다는 생각 아닌가. 

    “勿論이다. 그 생각엔 變함없다. 2審 法院도 그 말이 맞다고 했다. 陳重權 敎授도 같은 意見이다. 大韓民國에서 美學으로 陳重權만큼 工夫한 사람이 있나. 다만 이제 안 바쁘니까 助手 쓸 일이 없다. 그때는 많이 바쁠 때라 도움을 받았다.” 

    - 아직도 ‘조영남이 不正을 저질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代作畫家로 알려진 宋氏에게 못할 짓을 했다고도 한다. 

    “그 親舊 얘기를 하고 싶지는 않은데…. 이제는 좀 알려진 部分만 말하겠다. 記事도 나왔는데, 그 親舊가 내 그림을 몰래 팔았다. 그러다가 어느 言論社에 걸렸다. 일을 撫摩해보려고 이런저런 얘기를 한 게 그 事件으로 이어졌다. 當時 放送社에서 나를 많이 찾아왔다. 眞實을 털어놓으라고, 그대로 報道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입을 열 수 없었다. 그러면 동생이 나쁜 사람이 되지 않나. 남의 그림 몰래 팔면 罪가 된다. 兄으로서 ‘걔가 그랬다’고 할 수 없었다. 防禦權 抛棄하고 아무 말 안 했다. 온갖 辱을 먹고 裁判에서도 지고…. 한동안은 그때 行動을 宏壯히 後悔했다. 하지만 只今은 오히려 잘했다 싶다. 내 自身이 奇特하다.”
     
    當時 ‘代作畫家’라는 이름으로 불린 宋氏는 自身이 조氏 依賴를 받아 作品 相當 部分을 代身 그렸다고 言論에 밝혔다. 이 發言이 自己 잘못을 解明하는 過程에서 나왔다는 얘기다. 그러나 世上은 ‘그렇다면 그 作品을 조영남 것이라고 볼 수 있느냐’ 쪽에 關心을 쏟았다. 瞬息間에 ‘그림을 全혀 그릴 줄 모르는 歌手가 無名 藝術家를 雇用해 代身 作業하게 하고 마치 自己 作品인 것처럼 속여 莫大한 돈을 벌었다’는 프레임이 完成됐다. 主流 美術界 또한 이에 힘을 보탰다. 한국미술협회를 비롯한 11個 團體는 ‘助手를 쓰는 건 慣行’이라고 發言한 조氏를 名譽毁損 嫌疑로 檢察에 告訴했다. “大韓民國 全體 美術人의 名譽를 더럽히고 詐欺꾼 陋名을 씌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專門家들은 潮水를 罪惡視하는 건 現代美術 潮流와 맞지 않다고 말한다. 美術評論家 半里正 氏는 當時 앤디 워홀, 제프 쿤스, 데이미언 허스트 等 海外 有名 作家 이름을 擧論하지 않아도 助手와 일을 分擔하는 同時代 生存 作家가 數없이 많다며 美術界 反應을 批判했다. 班氏는 이른바 ‘조영남 代作 事件’의 風浪이 잦아든 後 벌어질 現象을 이렇게 豫測하기도 했다. 

    “注文-製作이 美術界를 構成하는 儼然한 風景이건 말건, 美術家를 다루는 敎養 放送 프로그램과 미디어는 作業室에 孤獨하게 서 있는 美術家의 모습을 大衆에게 傳播할 것이다.” 

    - 當時 大衆이 잘 모르던 美術界 現實을 歌手가 世上에 알렸다는 理由로 많은 이의 미움을 샀다는 얘기가 있었다. 애初부터 美術界가 조영남을 싫어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터졌다는 말도 들었다. 

    “바로 그거지. 내가 그 사람들 處地라도 氣分 나쁠 거다. 美大 앞에도 못 가본 사람, 아니 美術學院에도 안 가본 사람 아닌가. 普通 畫家는 展示會 한番 열기 힘들다. 그런데 나는 여기저기서 展示會 한다 하지, 作品이 完販이라고 하지, 얼마나 속상했겠나. 그래서 아무 對應 안 했다. 하지만 1審에서 有罪를 받으니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되겠다 싶더라. 當時 내게 ‘執行猶豫 判決로 拘束을 면했으니 됐다. 이제 그만 ‘잘못했다’ 하고 放送으로 復歸하라’고 助言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詐欺꾼’으로 살 수는 없지 않나. 그래서 抗訴했다. 2審 裁判部도 내가 有罪라고 하면 道理 없다고 생각했다. 大韓民國 法이 그렇다면 받아들여야지. 그런데 無罪를 받았다. 우리 法 體系가 幻想的이다. 그때부터 좀 마음에 餘裕가 생겼다.”

    “宋氏가 다시 일하자고 連絡”

    [홍중식 기자]

    [홍중식 記者]

    조氏는 이 대목에서 새로운 얘기를 꺼냈다. 無罪判決을 받은 날 송氏에게서 連絡이 왔다는 것이다. “兄과 다시 일하고 싶다”는 內容이었다고 한다. 代作 論難 當時 輿論이 조氏에게 등을 돌린 건 그가 宋氏 存在를 숨기고 제대로 待遇하지 않았다는 主張이 提起돼서였다. 美術 理論的 觀點에서 조氏를 擁護한 진 敎授조차 “나는 조영남이 助手를 使用할 ‘權利’를 擁護하지, 그가 助手를 使用한 ‘方式’까지 擁護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 왜 송氏가 다시 같이 일하자고 하나. 

    “그러게. 걔가 그런 애다. 自己 罪 덮으려다 얼결에 일을 만들었지, 緻密하게 뭘 計劃하고 움직인 게 아니다. 裁判 宣告받은 날 나한테 未安하다고, 다시 같이 그림 그리면 안 되겠냐고 하기에 ‘좀 기다려봐라’ 하고 電話를 끊었다. 그 親舊가 미워서는 아니다. 다만 當場 똑바로 쳐다보기가 힘들 것 같다.” 

    - 當時 宋氏를 제대로 待接하지 않았다는 非難이 거셌는데. 

    “陳重權 敎授도 그러더라. 그 潮水에 對해서 내가 ‘짰다’고. 우리가 私的으로 만난 적은 한 番도 없다. 法廷에서 진 敎授가 證言할 때 들은 말이다. 가슴에 大못이 박히는 것 같았다. 그 親舊가 擔當한 作業이 대단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大學生 助手를 쓸 때보다 費用을 더 줬다. 萬若 돈이 必要하다고 말했으면 더 올려줄 수도 있었을 거다. 일하면서 그런 말 한 마디 없었다. 나중에도 當事者가 돈 얘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인색했다, 짰다….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내가 뭐라고 하겠나. 事實대로 다 말하자면 너저분한 얘기가 많다. 내가 甘受하면 그걸로 끝나니까, 더 말하고 싶지 않다.” 

    - 宋氏와 다시 같이 일한다면 自然스레 誤解가 사라질까. 

    “글쎄. 우리가 協業해 展示를 한다면 센세이셔널할 수도 있겠다. 이 時代에. 그런데 只今은 못 할 것 같다. 3年 넘게 힘들었다. 이제와 다시 兄 동생 關係를 回復할 수 있을지…. 내가 못나서 이런 거다.” 

    - 展示는 오랫동안 못 했지만, 다른 活動은 再開하는 것 같다. 

    “時間이 흐르며 自然스레 그렇게 됐다. 年末에 디너쇼를 하고, 새해에는 유튜브 채널을 開設하려 한다. 또 冊도 나올 거다. ‘現代人도 못 알아먹는 現代美術’ 外에 ‘詩人 李箱과 5名의 아해들’이라는 冊을 썼다. 李箱과 피카소, 아인슈타인, 말러, 니체를 主人公으로 하는 픽션이다.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唯一하게 ‘꽂혀’ 있던 對象이 以上이다. 예전에 ‘以上은 李箱 理想이었다’는 冊도 썼다. 이番에 그의 偉大性을 再照明해보고 싶다. ‘우리나라에 以上이라는 人物, 셰익스피어에 버금가는 文學家이자 피카소·아인슈타인·말러·니체에 匹敵하는 天才가 있었다’는 걸 世上에 알리고 싶다. 冊을 쓰면서 이 모든 일이 하늘이 내게 준 機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平生 꿈도 못 꿨던 픽션을 쓰게 됐으니까.” 

    조氏는 이 冊에서 다섯 名의 主人公이 公演을 한다고 귀띔했다. 以上이 서태지나 조용필 같은 存在라 冊 題目을 ‘詩人 李箱과 다섯 名의 아해들’로 定했다고 한다. 이 얘기를 할 때 조氏는 이날 對話 中 가장 신나 보였다.

    “젊은 날의 잘못 反省”

    마지막으로 그에게 물었다. 지난 事件에 對해 秋毫도 거리낄 게 없는지. 그는 對答에 앞서 暫時 時間을 뒀다. 

    “내가 流配를 받아도 싸다, 그런 생각은 한다. 試鍊이 주어지는 게 맞다 하는 理由는…. 내 平生의 콤플렉스 때문이다. 어린애들 두고 家庭을 깬 것. 그것에 對한 罰이라고 생각한다. 이 얘기는 언젠가 한番 하고 싶었다. 이제 七旬度 지났고,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이런 걸 얘기할 나이가 됐다. 내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으니, 罰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이런 狀況을 잘 이겨낼 수 있었던 것 같다. 事件만 보면 분하고 원통하다고 할 수 있지만, 全體的으로는 그런 마음이 없다.” 

    인터뷰를 마치고 조氏는 피아노가 있는 房으로 자리를 옮겨 노래를 부르기 始作했다. 以上의 ‘이런 詩’를 歌詞로 삼고 直接 曲을 붙인 未公開 作品이었다. 이날 同席한 親知는 “집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을 때는 主로 노래를 練習한다. 디너쇼 日程이 定해진 뒤 노래 부르는 時間이 더욱 길어졌다”고 밝혔다. 曺氏는 最近 生涯 最初의 트로트曲 ‘깜빡깜빡’을 담은 디지털 싱글 앨범도 製作했다. ‘그 事件’에 對한 大法院 判決이 마무리되면, 大衆이 放送에서 조氏의 트로트를 듣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신동아 1月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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