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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都市, 프랑스 파리|新東亞

유럽歷史紀行

빛의 都市, 프랑스 파리

文化와 革命이 共存하는 藝術의 本고장

  • 백승종 韓國技術敎育大 名譽敎授

    chonmyongdo@naver.com

    入力 2020-01-07 14: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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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如前히 進行 中인 프랑스革命

    • 歷史와 運命을 함께한 노트르담 大聖堂

    • 프랑스人의 自尊心, 베르사유 宮殿

    • 나폴레옹이 革命家인 理由

    [GettyImage]

    [GettyImage]

    사람들은 프랑스 파리를 ‘藝術의 都市’라고 부른다. 패션의 都市, 料理의 都市, 와인의 都市…. 狀況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다양하다. 그런데 이러한 呼稱 中에서 파리의 價値를 가장 잘 나타내는 單語는 바로 ‘市民의 都市’가 아닐까 싶다. 

    파리는 예부터 一部 貴族이나 特權層의 專有物이 아니라 平凡한 市民들의 것이었다. 이곳에서는 골목길 어디에서든 市民 누구나 主人 行世를 하며 정답게 對話를 나눈다. 아름다운 뤽상부르 公園에서는 優雅하게 피크닉을 즐기며 자유롭게 이 都市를 享有한다. 

    또한 파리는 革命의 都市다. 藝術 分野에서도 많은 革命의 痕跡을 찾을 수 있다. 몽마르트르에서 藝術魂을 불살랐던 이들의 이름을 떠올려보자. 代表的으로 네덜란드 出身의 畫家 반 고흐를 들 수 있다. 1886年 파리로 온 그는 1年 남짓 이곳에 머물며 새로운 畫風의 洗禮를 받고, 後期 印象派의 巨匠으로 거듭났다. 

    畫家뿐만 아니라 詩人, 作家, 音樂家 等 수많은 藝術家가 파리로 몰려들었다. 그들 中에는 파리의 共同墓地 페르 라셰즈에 고이 잠든 이들도 있다. 안개가 자욱한 12月 어느 날 나는 아일랜드 作家 오스카 와일드의 무덤에 한 송이 붉은 薔薇를 바쳤다. 

    政治的 革命은 말할 것도 없다. 프랑스革命의 始發點으로 市民軍이 바스티유 監獄을 陷落시킨 事件을 記念해 해마다 7月 14日이 되면 祝祭가 열린다. 都心을 환히 밝히는 그날의 불꽃놀이를 본 사람이라면 直感的으로 알 수 있다. 이곳 市民들에게 프랑스革命은 如前히 現在進行形이란 것을 말이다. 파리 市民들은 툭하면 罷業을 열고 示威도 자주 한다. 올해는 政府 施策에 反對하는 ‘노랑조끼’ 물결이 크게 일렁였다.



    성모마리아에게 奉獻된 노트르담 大聖堂

    파리에 到着하자마자 내 발길은 노트르담 大聖堂으로 向했다. 2017年 한 해 1200萬 名의 觀光客이 이곳을 訪問했단다. 그다음으로 訪問客 數가 많은 名所는 몽마르트르 언덕에 우뚝 솟은 사크레쾨르 大聖堂, 루브르 博物館, 에펠塔, 퐁피두센터, 오르세 美術館 巡이다. 나폴레옹 1歲의 무덤이 있는 생트 샤펠, 판테온, 튈르리 公園, 콩코르드 廣場, 개선문 等도 人氣다. 

    많고 많은 名所 中에 왜 觀光客들은 唯獨 노트르담 大聖堂을 보고 싶어 할까. 理由는 바로 이곳이 프랑스人들에게 특별한 歷史的 經驗을 안겨준 곳이라는 데 있다. 파리에서 만난 親舊 알랭은 노트르담의 歷史的 意味를 오랜 時間에 걸쳐 說明해줬다. 우리는 聖堂의 尖塔이 보이는 센 江가의 어느 酒店에서 보르도 地方, 正確히는 메독에서 生産된 카베르네 소비뇽 葡萄酒 한 甁을 사이좋게 나눠 마셨다. 

    성모마리아에게 奉獻된 것으로 알려진 노트르담 大聖堂은 고딕 建築의 妙味를 제대로 確認할 수 있는 傑作이다. 17世紀 바로크 時代와 19世紀의 藝術品도 한데 모여 있다. 예수가 쓴 가시冠, 그를 十字架에 박을 때 使用한 못도 保管돼 있다. 13世紀 프랑스 王 루이 9世가 콘스탄티노플에서 가져온 것들이다. 王은 빚 수렁에 빠진 라틴王朝의 보두앵 2世에게 巨金을 주고 이 聖物들을 가져왔다. 以外에도 노트르담 聖堂은 世界에서 가장 큰 오르간, 雄壯한 敎會 鐘소리 等으로 有名하다. 

    노트르담 大聖堂은 1160年 工事를 始作해 1260年頃 한 次例 完成됐다. 프랑스에 基督敎가 들어오기 前에는 木星을 모신 神殿이었는데, 基督敎 受容 後 처음에는 性 스테판 敎會였다가 네 番 改築 後 로마네스크 樣式의 大聖堂으로 바뀌었다. 그것을 다시 고딕 樣式으로 고쳐 지은 것이 現在의 大聖堂이다. 

    노트르담 大聖堂은 프랑스 歷史의 産室이다. 1431年 헨리 6世는 百年戰爭 때 이곳에서 戴冠式을 올렸다. 當時 그는 10살밖에 안 된 ‘少年 王’이었다. 1548年에는 프랑스의 新敎徒, 卽 위그노와 宗敎戰爭을 벌였는데, 聖堂의 石像들을 ‘偶像崇拜’로 規定하고 이를 毁損했다. 以後 루이 14世는 聖堂을 大大的으로 補修했다. 그는 1699年 父王 루이 13歲의 維持를 繼承해 노트르담을 더욱 華麗하게 丹粧했다. 루이 13歲와 14歲가 피에타上 앞에 무릎 꿇은 모습을 아로새긴 祭壇도 만들었다.

    小說 ‘노트르담 드 파리’로 名聲 되찾아

    하지만 18世紀 末 프랑스革命이 일어나자 聖堂은 受難을 當했다. 革命의 熱氣 속에서 많은 藝術品이 破壞됐다. 敎會의 財産도 沒收돼 公共財産이 됐다. 結局 聖堂 內 宗敎 活動까지 禁止되면서 이곳은 한낱 倉庫로 轉落해버렸다. 그러다 나폴레옹이 執權하면서 事情이 바뀌었다. 1801年 7月 16日, 나폴레옹은 敎皇 비오 7世와 條約을 맺어 가톨릭교회가 市民 大多數의 宗敎임을 認定했다. 이로써 노트르담은 本來의 位相을 回復했다. 

    나폴레옹은 建物을 補修해 自身의 皇帝 戴冠式도 이곳에서 擧行했다. 1804年 12月 2日, 나폴레옹은 皇帝의 棺을 들어 올려 自身의 머리에 얹었다. 이 場面은 한 篇의 그림으로 記錄돼 後世에 傳해지고 있다. 

    나폴레옹이 쓰러지자 노트르담은 또 荒廢해졌다. 하지만 1831年 빅토르 위고가 쓴 小說 ‘노트르담 드 파리’ 德分에 다시금 國民들로부터 뜨거운 歡待를 받기 始作했다. 노트르담 大聖堂에 對한 民心이 바뀌자 國王 루이 필립은 聖堂을 새롭게 修理할 것을 命令했다. 1844~1864年에 聖堂再建事業이 推進됐다. 

    小說 ‘노트르담 드 파리’의 主人公은 鐘지기 꼽추 콰지모도와 아름다운 집시 女人 에스메랄다다. 15世紀 後半을 舞臺로 한 作品으로 두 名의 主人公말고도 主任 神父 프롤로와 近衛隊腸 페뷔스가 登場한다. 作家는 에스메랄다를 둘러싸고 세 名의 男性이 겪은 葛藤을 多角度로 描寫했다. 이 小說의 人氣는 實로 대단했으며 後날 뮤지컬과 映畫, 애니메이션 等으로 脚色됐다. 앤서니 퀸이 콰지모도를 延期한 映畫(1957)는 몇몇 場面이 아직도 鮮明하게 기억난다. 

    노트르담 大聖堂은 現代史의 證人이기도 하다. 1944年 8月 26日, 파리가 나치 政權으로부터 解放되자 이곳에서 特別 미사가 執典된 바 있다. 프랑스의 英雄 드골 將軍도 參席했다. 後날 드골의 葬禮미사度 이곳에서 열렸다(1970). 1996年 프랑수아 미테랑 大統領의 葬禮미사 亦是 노트르담 聖堂에서 擧行됐다. 

    프랑스人의 눈으로 보면 노트르담 大聖堂은 특정한 宗敎機關이 아니다. 지난 1000年間 프랑스가 겪은 歷史的 經驗의 總體라 할 수 있다. 最近에는 뜻밖의 試鍊을 겪기도 했다. 2019年 4月 15日 大型 火災가 난 것이다. 補修工事 中이던 聖堂은 15時間이나 불탔다. 그나마 多幸인 건 聖堂의 主要 遺物은 無事하다는 點이다. 하지만 불타버린 노트르담을 바라보는 市民들의 慘澹한 心情은 이루 말할 수 없다.

    現代史 主要 舞臺로 使用된 베르사유 宮殿

    베르사유 궁전. [GettyImage]

    베르사유 宮殿. [GettyImage]

    ‘太陽王’ 루이 14歲를 빼놓고 파리를 論할 수 없다. 그가 지은 베르사유 宮殿은 프랑스人의 自尊心을 象徵하기도 한다. 호사스럽기 그지없는데, 特히 거울의 房은 그 自體로 하나의 傳說이다. 베르사유 宮殿은 父王 루이 13歲 때만 해도 사냥터에 있는 자그만 오두幕에 不過했다. 루이 14世는 이 볼품없던 空間을 世上에서 가장 멋진 宮殿으로 바꿔놓았다. 

    베르사유 宮殿 앞에 선 各國의 使節團들은 讚歎을 마지않았다. 18世紀 以後 유럽 各國은 이 宮殿을 模倣하느라 精神이 없을 地境이었다. 當時 유럽 內에서 프랑스의 位相은 대단했다. 유럽 모든 宮廷에서 프랑스語를 使用하는 게 流行이었다. 邊方인 러시아도 例外는 아니어서 19世紀까지 러시아 貴族들은 外國人 家庭敎師를 招聘해 프랑스語를 비롯해 英語, 獨逸語, 라틴語 等을 배웠다. 德分에 數百 年 동안 프랑스의 가난한 貴族과 敎養 階層은 各國으로 進出해 家庭敎師로 일하며 돈을 벌었다. 

    다시 루이 14歲 때로 돌아오면, 當時 부르봉 王家는 戰爭과 奢侈를 일삼았다. 結局 財政은 바닥났고 憤怒에 휩싸인 프랑스人들은 18世紀가 끝나갈 무렵 史上 初有의 市民革命을 일으켰다. 이를 契機로 프랑스는 새로운 轉機를 맞았다. 

    王政이 무너진 뒤에도 베르사유 宮殿은 歷史의 主要 舞臺로 活用됐다. 1919年 第1次 世界大戰 終戰 後 勝戰國과 敗戰國은 베르사유 宮殿에 모여 戰後 處理를 論議하는 파리講和會議를 열었다. 當時 勝戰國 中 하나였던 中國은 日本의 外交 攻勢를 막지 못하고 侮辱과 挫折에 빠졌다. 日本은 이른바 21個 條項을 들고 나와 列强의 同意를 얻었다. 中國에 對한 日本의 侵略 意志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로 인해 中國에서는 ‘5·4運動’이 일어났다. 그보다 두 달 앞서 韓半島에서 點火된 3·1運動의 熱氣도 베르사유와 關聯이 깊다. 파리講和會議에서 美國 大統領 윌슨이 主唱한 民族自決主義가 3·1 運動의 起爆劑가 됐으니 말이다.
     
    베르사유의 한 食堂에서 알랭과 나는 치즈플레이트를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치즈의 나라답게 프랑스에는 300個가 넘는 다양한 種類의 치즈가 있다. 이들의 치즈 사랑은 무척이나 유별나 “치즈로 胃臟을 열고 치즈로 胃臟을 닫는다”는 말이 있을 程度다. 프랑스人이라면 食事의 始作도 마무리도 치즈로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날 우리가 注文한 치즈는 카망베르, 콩테, 미몰레트, 블루 度베르뉴 그리고 에푸아스 等이었다. 치즈라면 다 좋아하는 나지만 그 中에서도 唯獨 푸른곰팡이가 혀를 誘惑하는 블루 도르베뉴가 가장 맛있었다.

    太陽王 루이 14歲의 兩面性

    프랑스혁명의 상징인 개선문. [GettyImage]

    프랑스革命의 象徵인 凱旋門. [GettyImage]

    이날 우리는 루이 14歲에 關해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王은 無慮 72年하고도 110日 동안 王座를 차지했다. 絶對主義 時代를 代表하는 最長期 統治者였던 것이다. 그는 그동안 남아 있던 封建主義의 殘滓를 깨끗이 쓸어낸 뒤 豪華燦爛한 베르사유 宮殿으로 貴族들을 불러 모았다. 貴族에 對한 統制를 强化하기 위해서였다. 루이 14世는 貴族들의 居處를 提供하기 위해 別途의 住居施設도 마련했다. 베르사유로 生活 터전을 옮긴 貴族들은 自身들의 地位에 어울리는 넉넉한 生活을 위해 더 많은 年金이 必要했다. 이를 위해서 王에게 더욱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루이 14世는 宮廷儀式을 莊嚴하고 精巧하게 다듬어 王의 權威를 높였다. 그는 記憶力도 非常해, 언제 어느 貴族이 宮廷 모임에 出席했는지 다 꿰고 있었다. 貴族들은 王의 눈圖章을 찍고자 熱心히 모임에 參席했다. 그는 무서운 王이었다. 自身의 말이 곧 法이라고 宣布한 루이 14世는 戰爭狂에 가까웠다. 네덜란드, 스페인, 아우크스부르크 同盟(프랑스가 라인江 東쪽으로 뻗어오지 못하게 하려고 結成된 同盟)과도 血鬪를 벌였다. 

    하나의 戰爭이 끝나고 平和가 찾아올 때도 그는 다음에 일으킬 戰爭을 構想했다. 루이 14世에게 外交란 戰爭을 勝利로 이끌기 위한 補助 手段에 不過했다. 그의 中央集權化 政策은 敎會에 對한 抑壓으로도 나타났는데, 高位 聖職者인 主敎들도 王의 許可가 있어야만 國外로 나갈 수 있었다. 왕이 同意하지 않는 限, 敎皇이 宣布한 모든 規定은 그 어떤 效力도 갖지 못했다. 루이 14世는 冊 發刊은 勿論이고 個人의 便紙도 檢閱 對象에 올렸다. 

    代身 그는 華麗한 對中 行事로 사람들의 耳目을 사로잡았다. 自身에게 유리한 社會 雰圍氣를 形成하려는 속셈이었다. 또 有能한 平民을 高官으로 拔擢했으며, 寵愛를 얻어 벼락出世한 新興 貴族을 後援했다. 그들은 當然히 王黨派가 돼 絶對王權에 服從했다. 

    루이 14世는 學問과 藝術에 對한 後援도 남달랐다. 아카데미프랑세즈(翰林院)를 支援했고, 몰리에르와 張 드 라퐁텐 같은 作家를 통해 文學과 演劇을 後援했다. 音樂과 美術도 例外가 아니었다. 1661年 파리에는 발레學校가 設立됐고, 얼마 뒤에는 오페라學校度 門을 열었다. 게다가 그는 루브르 宮殿의 一部를 博物館으로 轉用했다. 이것이 後日 世界 屈指의 博物館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루브르 博物館이다. 

    文化를 育成했다는 點에서 루이 14世는 우리나라의 세종대왕과 비슷하다. 勿論 世宗은 徹底히 百姓 中心이었던 反面 루이 14世는 오직 王權 强化에 熱情을 쏟았다.

    나폴레옹의 登場

    파리는 ‘飮食의 都市’이기도 하다. 개선문 近處에서 나는 알랭과 함께 뵈프 부르기뇽을 즐겼다. 쇠고기에 洋파와 버섯을 얹은 것인데 소스에는 붉은 葡萄酒가 使用된다. 프랑스의 代表 料理 中 하나로 맛이 우리나라 소갈비와 비슷하다. 

    우리는 琉璃窓 너머로 개선문을 바라보며 프랑스革命의 意味를 따져보았다. 그것이 어찌 프랑스만의 것이겠는가. 人類 모두가 그 惠澤을 입었으니 말이다. 프랑스革命이 있었기에 後世는 共和國의 價値를 알았고 自由와 平等이란 指標도 세울 수 있었다. 革命 當時 張자크 루소의 社會契約說은 많은 이에게 엄청난 影響을 미쳤다. 

    勿論 그 當時 市民들이 루소의 冊을 다 읽은 건 아니었다. 革命의 熱氣를 부채질한 冊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포르노그래피’다. 國王 內外를 비롯해 高位 聖職者 및 貴族들의 不淨腐敗와 淫亂을 告發한 文學作品이 煽動의 要素로 活用된 것이다. 

    革命 過程은 매우 혼란스럽고 支離滅裂했다. 1799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執權한 뒤에야 社會가 安定되기 始作했다. 따지고 보면 나폴레옹은 獨裁者였다. 하지만 그의 執權을 통해 學校制度가 近代化됐고, 財政도 近代的으로 바뀌었다. 革命 精神을 그대로 反映한 民法典이 編纂된 것도 그때다. 

    嚴密히 말해 나폴레옹은 프랑스 사람도 아니다. 그는 코르시카섬의 下級 貴族으로 母國의 獨立을 꿈꾸던 젊은이였다. 그랬던 그가 쿠데타를 일으켜 權力을 잡았고, 마침내 住民 投票를 거쳐 皇帝까지 됐다. 劇的인 變化요, 아이러니한 일이다. 스스로 皇帝가 됐다는 點에서 그 스스로 革命의 本質을 否定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여러 가지 改革을 통해 革命精神을 徹底히 實行에 옮겼다는 點에서는 革命家로 評價받을 만하다. 

    개선문은 1806年 나폴레옹이 짓기 始作했다. 祖國의 榮光을 記念하기 위해서였다. 오스트리아 땅 아우스터리츠에서 大勝을 거두자, 그는 그때까지 거둔 一連의 勝利를 永遠히 記念하고 싶어 했다. 結局 로마의 개선문을 模倣해 짓기 始作했는데 나폴레옹이 이미 失脚하고 난 뒤인 1836年이 돼서야 完成됐다. 以後 世界 여러 나라는 또 앞다퉈 개선문을 模倣하기 始作했다. 

    프랑스革命에 關해서는 많은 硏究 結果가 蓄積돼 있다. 20世紀만 해도 이 革命을 階級鬪爭으로 보는 視角이 大部分이었다. 結果的으로 農民과 都市勞動者의 役割이 强調됐다. 하지만 21世紀에 접어들면서 硏究 傾向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아직 새로운 觀點이 正確히 세워진 건 아니지만, 旣存의 패러다임이 說得力을 잃었다는 것이 衆論이다. 

    마지막으로 파리의 또 다른 別名은 ‘빛의 都市’다. 이 別名 亦是 루이 14歲 때 붙여졌다. 王은 파리의 犯罪를 줄이고자 한밤中에도 거리를 환히 밝혔다. 그런데 18世紀에 접어들면서 파리는 啓蒙思想의 中心地가 됐고 그때부터 ‘빛’은 重義的 意味로 使用되기 始作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파리를 빛의 都市라 부르는 건 多少 어패가 있다. 現在 프랑스는 政治的으로 큰 混亂을 겪고 있다. 國家 債務도 深刻하다. 世上의 빛이 되기에는 많이 不足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아직 希望의 씨앗은 있다고 본다. 프랑스 파리만큼 이슬람文化圈과의 疏通에 힘쓰는 都市가 없다. 또 氣候危機를 克服하고자 努力하는 모습도 印象的이다. 앞으로 파리 空港을 離陸하는 모든 飛行機에는 環境稅가 附加될 豫定이다. 더 나은 世上을 만들기 위한 파리의 努力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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