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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年生 공병호, 1960年生을 말하다|신동아

60年生 공병호, 1960年生을 말하다

가난 딛고 이뤄낸 成就… “이 나이까지 나라 걱정 할 줄이야”

  • 공병호 공병호TV, 공병호硏究所 所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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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入力 2020-01-04 10: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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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年 경자(庚子)年은 1960年生이 還甲을 맞는 해다. 1960年 大韓民國에서는 歷史上 가장 많은 新生兒가 태어났다. 1年 동안 100萬 6018名이 첫 울음을 터뜨렸는데, 最近의 低出産 趨勢를 勘案하면 이 記錄은 앞으로 깨지지 않을 展望이다. 

    • 태어나면서부터 4·19 等 韓國 政治의 激變을 겪은 1960年生은 젊은 時節 韓國 經濟의 發展을 앞장서 이끌었고, 30代 後半 IMF 外換危機를 맞았다. 停年延長 政策의 惠澤을 받은 이들은 2020年 隱退를 앞두고 있지만, 就業難과 住宅難에 시달리는 靑年層 子女를 보면 마음이 쓰리다. 1960年 태어난 공병호 공병호硏究所 所長이 近現代 60年을 살아온 1960年生의 새해 感懷를 써 보냈다. [編輯者 週]

    1960년대 초등학교 풍경. 학생들이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친구에게 도시락을 건네주고 있다. [동아DB]

    1960年代 初等學校 風景. 學生들이 도시락을 싸오지 못한 親舊에게 도시락을 건네주고 있다. [東亞DB]

    나는 1960年 5月 10日, 慶南 統營에서 7男妹의 막내로 났다. 이따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길 때면 恒常 統營 港口 場面이 떠오른다. 흐릿한 黑白寫眞 위에 느릿느릿한 速度로 記憶들이 지나가고 또 지나가기를 反復한다. 나라가 正말 가난했다. 沿近海 漁業을 했던 아버지 德에 貧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恒常 資本 不足에 시달리고 더 나은 船舶을 갖기 위한 投資를 斷行한 아버지 德分에 어린 時節부터 삶은 늘 아슬아슬함 그 自體였다. 平生 삶에 對한 緊張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한 것은 柳少年期 어깨너머로 봤던 아버지의 日常, 漁獲量에 따라 屈曲을 反復했던 집안 形便이었다.

    가난의 追憶

    1973년 6월 경남 통영 앞바다에서 밀수단속반원이 어장 근처 바다에 숨겨둔 밀수품을 적발해 끌어 올리고 있다. [동아DB]

    1973年 6月 慶南 統營 앞바다에서 密輸團束班員이 漁場 近處 바다에 숨겨둔 密輸品을 摘發해 끌어 올리고 있다. [東亞DB]

    내가 나서 자란 곳은 統營의 항남동이다. 過去에는 主로 배를 所有한 船主가 많이 살았고, 日本人 船主가 主로 居住하던 敵産家屋이 골목길을 따라 堵列해 있었다. 日本人이 남긴 敵産家屋의 기와나 內部의 다다미방 그리고 日本式 定員은 아직도 내 記憶 한便에 또렷이 남아 있다. 담배를 配給하던 專賣廳, 輸出入을 管理하던 稅關이 우리 집 가까이에 位置해 있었다. 그런 建物은 大部分 日本人이 남기고 떠난 것이었다. 當時 沿近海 漁船 가운데 相當數도 日本人이 남긴 赤山 船舶이었다. 經濟開發計劃이 始作되면서 政府 支援에 힘입어 沿近海 漁船을 建造하는 計劃이 推進될 수 있었다. 

    내 머리에는 나라가 너무 가난했다는 記憶이 매우 剛하게 박혀 있다. 只今도 市場에 움幕집을 짓고 살던 浪人 모습과 그 家屋이 손에 잡힐 듯하다. 또 가슴을 저미는 것은 그 많은 빨래를 어머니가 어떻게 했을까 하는 궁금함이다. 上下水道가 제대로 具備되지 않았고 食水 事情도 좋지 않았다. 가뭄이 닥치면 食水를 얻으러 消防車 앞에 긴 줄을 서던 記憶도 있다. 電氣도 심심하면 나갔다. 

    나라가 發展하면서 形便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을 온몸으로, 온 마음으로 느끼면서 成長했다. 그래서 나는 只今도 나라에 對해 不平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다.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나라가 나에게 무엇을 해줘야 한다고 單 한 番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運命의 거친 波高를 헤치고 自己 삶을 開拓해나가는 게 人生이고 삶이란 原則이 내게 깊이 뿌리내려 있다. 柳少年期 가난했던 時代의 産物이라고 생각한다. 

    當時 慶南 統營은 ‘密輸의 中心地’였다. 바다장어를 잡아서 배 밑에 구멍이 뚫린 赤山 船舶에 싣고 玄海灘을 건너 日本 후쿠오카 等으로 많이 輸出했다. 玄海灘 뱃길에서 목숨을 잃은 船員과 海難 事故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또 온갖 物件이 日本으로부터 密輸됐다. 鉛筆, 化粧品, 파라솔, 電子製品, 가죽점퍼 等이 들어왔다. 나는 密輸를 業으로 하는 父母를 둔 親舊와 密輸꾼을 잡으러 다니는 父母를 둔 親舊와 더불어 放課 後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놀곤 했다.



    바닥에서 일어선 大韓民國

    只今 우리 社會에서는 自己가 누리는 것을 너무 當然하게 여기는 傾向이 强하다. 나는 只今도 종이 한 張, 化粧室 타월 한 張도 節度 있게 使用하는 習慣이 몸에 배어 있다. 이것은 그 時代가 준 膳物이라 생각한다. 

    大韓民國이 正말 바닥에서부터 일어섰음을 너무 많은 사람이 잊어버린 것에 對해 나는 크게 걱정한다. 工業 基盤이라 할 만한 것이 全혀 없는 狀態에서 이 나라가 일어섰다. 그래서 60餘 年의 努力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린 文在寅 政府의 脫原電 政策에 對해 나는 누구보다 憤怒했다.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만들어내기가 얼마나 힘든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내가 成長한 다음 市場經濟와 企業家를 擁護하고, 우리 歷史에 對해 肯定的인 視角을 갖게 된 것은 柳少年期의 體驗 때문이라 생각한다. 밀가루, 쌀, 기름, 石油 어느 것 하나 不足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後날 經濟學을 工夫하고 韓國 近現代史에 關한 글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내 눈에는 눈물이 흐를 때가 자주 있었다. 柳少年期 가난했던 나라 風光과 歷史的 資料가 오버랩되면서 울컥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時節 學校는 늘 滿員이었다. 學生을 午前班과 午後班으로 나눠 2部制 授業을 했던 記憶이 난다. 우리 世代는 美國의 剩餘 農産物로 만든 옥수수빵을 먹고 자랐다. 當時에는 虛飢를 채워주던 그 빵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後날 韓國 近現代史에 關한 冊이나 人物 評傳을 쓰면서 美國 援助가 나라를 일으키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됐는지 確認할 機會가 있었다. 

    筆者와 年輩가 비슷한 사람 가운데 錚錚한 運動圈 活動家들이 있다. 이들은 只今 出世해 政治權 要職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들과 나 사이에는 歷史觀을 둘러싸고 하늘과 땅만큼의 間隔이 存在한다. 

    나는 體質的으로 左派 思想에 傾倒될 수 없는 性向을 갖고 있지만, 이것 못지않게 柳少年期의 體驗이 重要하게 作用했다. 아무 基盤이 없는 狀態에서 나라가 한 걸음 한 걸음 前進하듯 일어서는 것을 너무나 생생하게 體驗했다. 또 父母가 大家族을 먹여 살리려고 渾身의 힘을 다하며 집안을 일으켜 세우는 過程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봤기에 虛荒된 이데올로기에 傾倒되지 않았다. 그 德에 大韓民國 歷史를 否定的으로 바라보는 그런 致命的 失手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본다. 

    當時만 하더라도 南海岸은 北韓 工作船의 主要 浸透 루트였다. 집의 御幕(魚幕) 터가 統營에서 뱃길로 40~50分 떨어진 鶴林島(새섬)에 있었다. 隣近에서 武裝船舶들이 交戰 끝에 사로잡히는 일이 더러 있었다. 武裝共匪를 실은 間諜船으로 疑心되는 船舶을 申告하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 社會에는 1960~70年代 北韓과의 體制 競爭을 浪漫的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 時代의 體制 競爭은 北韓에 먹히느냐 마느냐 하는 生存 問題였다. 

    體制 競爭은 只今도 繼續되고 있다. 只今은 核과 미사일로 武裝한 北韓이 남남葛藤을 助長하려고 온 힘을 다하고 있다. 내게는 全體主義 體制가 가진 危險을 直視할 수 있고, 이것이 가진 危險에 對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基礎로 柳少年期의 體驗이 一定 役割을 한 것이 事實이다.

    釜山에서의 高校 時節

    1972년 경남 통영군 한산면 비진도에서 주민들이 행정지도선이 실어온 식수를 받아가고 있다. [동아DB]

    1972年 慶南 統營郡 한산면 比珍島에서 住民들이 行政指導船이 실어온 食水를 받아가고 있다. [東亞DB]

    父母는 어떻게든 子息에게 더 나은 敎育을 提供하고자 心血을 기울인다. 內 아늑했던 少年期의 記憶은 中學校 무렵 釜山으로 轉學을 가면서 끝나게 된다. 當時 統營에서는 競爭的으로 아이를 外地로 보냈다. 父母가 子息을 생각하는 것은 宿命이다. 내 自身이 父母가 돼 子息 敎育을 위해 心血을 기울이면서 “韓國人에게 子息 敎育은 무엇인가?”라는 疑問을 던지기도 했다. 

    高校 配定 抽籤이 始作되고 두 番째 世代가 1960年生이다. 갑자기 無試驗이 實施되면서 이른바 뺑뺑이를 돌려 自身의 實力이나 意志와 全혀 關聯 없는 學校에 配定될 수밖에 없는 制度가 생겨 落膽한 記憶이 난다. 뺑뺑이의 結果로 釜山에서도 하늘에 가장 가까운 高校에 入學하게 됐다. 다른 學校에 비해 施設이 劣惡한 곳이었다. 

    高校 時節 記憶 가운데 두 가지는 꼭 言及하고 싶다. 하나는 가난한 사람의 모습이다. 내가 配定받은 學校가 山腹道路 위에 있었기 때문에 헌冊房으로 有名한 보수동에서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따라 學校를 올라가다 보면 正말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부엌이라 할 만한 空間이 없어 집에 붙어 있는 空터에서 밥을 짓는 모습을 자주 봤다. 오랜 歲月이 흐른 只今도 그 모습이 鮮然하게 떠오른다. 1970年代 中盤 무렵 農事일을 버리고 都會地로 向한 수많은 家族 가운데 한 家族이었을 것이다. 

    넉넉하게 成長할 形便이 되지 못해 그럴 수도 있지만, 내 생각의 中心에는 恒常 ‘나라가 잘사는 일’ 그리고 ‘個人이 잘사는 일’에 對한 關心이 있었다. 後날 經濟學을 工夫하긴 했지만, 少年期와 高校 時節부터 이미 그런 兆朕이 있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只今도 그렇지만 當時에도 入試는 熾烈했다. 通行禁止가 있던 時代라 새벽 일찍 學校에 가고 가장 밤늦게 돌아오는 生活이 反復됐다. 只今 생각해도 神奇한 것은 어떻게 그렇게 規則的으로 무엇인가를 繼續할 수 있었느냐는 點이다. 또 흥미로운 것은 그때나 只今이나 삶의 스타일은 크게 바뀐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의 根本은 歲月이 가도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只今도 또렷히 남아 있는 當時 記憶 가운데 또 하나는 새벽 일찍 學校 가는 길에서 만나던 光景이다. 舊 釜山女高 校庭에는 越南 敗亡으로 祖國을 떠난 사람들이 머물던 避難民 收容所가 있었다. 後날 알게 된 事實은 南北韓의 經濟力 隔差가 1971年을 前後로 逆轉되기 始作했고 重化學工業化를 거치면서 韓國이 北韓을 經濟力으로 完全히 누르게 됐다는 點이다. 내가 越南 避難民收容所를 유난히 오랫동안 記憶하는 것은 그 時節에도 體制 競爭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傍證일 수 있다.

    다시 光化門에 서다

    1985년 서울 수유동 4·19민주묘지 입구에서 시위를 벌이는 대학생들을 전경이 저지하고 있다. [동아DB]

    1985年 서울 수유동 4·19民主墓地 入口에서 示威를 벌이는 大學生들을 戰警이 沮止하고 있다. [東亞DB]

    大學은 한 해 늦게 들어갔다. 當時 有名 學院이 光化門 世宗文化會館 周邊에 布陣해 있던지라 只今도 光化門集會에 參加할 때면 大入 再修를 하던 때가 떠오른다. 이 나이가 돼서 政府 政策에 抗議하고자 光化門에 나가 示威를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요즘은 부쩍 民族에게는 習性 같은 게 있지 않으냐는 생각을 할 때가 잦다. 極端的인 全體主義 體制를 追求하는 北韓을 볼 때도 그렇지만 大統領만 되고 나면 王이라고 錯覺하는 이 땅의 權力者를 보면서도 마찬가지다. 選出된 者가 國民에게 奉仕한다는 생각만 해도 얼마든지 대단한 나라를 만들 수 있을 텐데 그런 單純 明瞭한 原則이 無視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1979學番으로 大學에 들어갔는데, 데모가 참으로 많았던 때다. 大學 1年 가을에 朴正熙 大統領이 死亡했고, 大學 2學年 때 1980年 서울의 봄을 맞았다. 非常戒嚴이 宣布되던 1980年 봄의 어느 날 아침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莊嚴한 音樂이 기억난다. 經濟學科 同期 가운데 少數는 學生運動에 專念하면서 다른 길을 選擇했고, 大部分 親舊는 示威에 參加하긴 했지만 그렇게 熱烈한 便은 아니었다. ‘轉換時代의 論理’流의 冊이 氣勢를 限껏 올리던 時節이지만, 그 冊은 나를 說得하는 데는 效果를 發揮하지 못했다. 

    나는 이미 敎育받기 前부터 胎生的으로 集團보다는 個人을 훨씬 重要하게 여기는 思想的 土臺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組織的이고 體系的으로 未來를 準備하는 動機가 드물지 않게 있었는데, 나도 大學 2年 때부터 그런 部類에 屬했다. 나아짐에 對한 熱望이 있었고, 自己 삶을 어떻게든 自己 손으로 일으켜 세워야겠다는 생각이 剛했다. 單 한 番도 누구의 도움을 받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나라가 나를 도와줘야 한다는 생각을 내 生涯에 單 한 番도 한 적이 없다. 

    그래서 오늘날 韓國 社會의 時代精神이 急速히 變하는 것에 對해 깊은 憂慮를 갖고 있다. 이미 나는 2011年 吳世勳 當時 서울市長의 無償給食 市民 投票가 韓國 現代史에서 가장 重要한 分岐點 가운데 하나가 되리라고 굳게 믿었다. 멀쩡한 知人들조차 “無償 給食해야 한다”고 외치는 것을 보면서 ‘아, 韓國이란 나라가 이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구나’하고 歎息했지만, 나라의 進路를 個人이 어떻게 해볼 道理가 없었다.

    不透明한 나라의 앞날

    靑年期에는 恒常 더 나은 未來를 믿었다. 오늘날 韓國의 靑年이 그 같은 생각을 가질 수 없다는 點을 旣成世代의 한 사람으로 遺憾스럽게 생각한다. 韓國 社會가 좀 더 市場 親和的이고 力動的인 社會로 갈 수 있기를 所望했지만, 漸漸 그 反對쪽으로 가는 것 같아서 걱정을 많이 한다. 

    아무튼 더 나은 未來가 있을 것이라는 確信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美國 留學에 挑戰했다. 이런저런 모임에서 젊은 날을 함께했던 親舊들을 만나면 다들 苦悶이 많은 것 같다. 只今에 비해 高成長期를 걸어왔지만 老後를 제대로 準備한 親舊는 그렇게 많지 않다. 다들 熱心히 살았지만 隱退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다가왔고 이를 전후해 여러 問題가 한꺼번에 닥치고 있다. 

    組織에 몸담았던 親舊들 가운데는 最高 자리까지 올라간 一部를 除外하면 大部分 55歲를 전후해 옷을 벗었다. 大學에 있는 親舊들은 相對的으로 10餘年 길게 일할 機會를 가졌다. 서울에서도 제법 괜찮은 大學과 學科를 卒業했지만 親舊들이 期待한 만큼 自身의 未來를 準備하는 데 成功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歲月이 職場 生活한 만큼 남은 것을 念頭에 두면 親舊들의 苦悶이 많다. 幸運이 함께하고 自身의 努力이 더해져 專門 分野를 開拓해 온 몇몇 親舊는 오히려 時間이 갈수록 더 旗발을 날리는 境遇도 있다. 이들은 時代 變化를 읽고 繼續해 變身하면서 自身을 準備해온 親舊들인데 5%가 채 되지 않는 것 같다. 

    1960年生이 갖고 있는 큰 苦悶은 나라의 앞날이 너무 不透明하다는 點이다. 이런 式으로 繼續 가다 보면 年金에 問題가 없을지, 나라의 體制에 問題가 없을지 苦悶하는 親舊가 많다. 産業化와 民主化가 마무리되면서 大韓民國 앞에는 오로지 先進化의 길만 있다고 믿어 疑心치 않았는데 이미 다 지나가버린 理念에 나라가 사로잡히는 것 같아 苦悶하는 사람이 많다.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子息들 結婚이 늦어지고, 職場 問題로 苦心하는 親舊도 부쩍 늘어가고 있다. 1960年生 가운데 多數가 只今 苦心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次元의 나라 걱정이다. 

    “나라 걱정을 내 生涯에 다시 하게 될 줄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공병호
    ● 1960年 慶南 統營 出生
    ● 고려대 經濟學科, 美國 라이스代 大學院 卒業(經濟學 博士)
    ● 韓國經濟硏究院 硏究委員, 自由企業院 院長 等 歷任
    ● 現 공병호硏究所 所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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