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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公示 廢人’의 悲劇的 現實, 露宿人·白手…|新東亞

사바나 르포

‘公示 廢人’의 悲劇的 現實, 露宿人·白手…

8年 公示 挑戰 後 派遣·日傭職·알바

  • 김건희 客員記者

    kkh4792@donga.com

    入力 2019-12-25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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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公試生 41萬 名 時代, 취준생의 40%

    • “나이만 먹고 갈 會社는 없고…‘공시’ 挑戰 後悔돼”

    • “正規職 轉換 어렵다면 原請會社 契約職이라도”

    • 就業 經歷 空白 메우려 ‘블랙企業’ 入社 支援도

    • 社會 適應 失敗 後 鷺梁津으로 돌아가는 ‘公示 廢人’

    • 自愧感·無力感 呼訴…“露宿人과 다를 바 없다”

    • “抛棄하는 것도 勇氣” “公示價 人生의 全部 아냐”

    [GettyImage]

    [GettyImage]

    “우리 다음에 볼 때는 꼭 公務員이 돼서 만나요. 이番이 眞짜 마지막이니까.” 

    2018年 3月 서울 鷺梁津에 位置한 한 스터디 카페. 公示 스터디 멤버로 만난 네 사람의 表情이 사뭇 眞摯하다. 鷺梁津에 온 지 5年이 넘은 이들은 性別도 나이도, 地域도, 學校도 다 다르다. 一名 ‘公試生(公務員 試驗 準備生)’으로 불리는 이들은 이틀 뒤 各自 準備한 試驗 考査場으로 向했다. 結果는 全員 不合格. 公示 合格을 唯一한 希望으로 여긴 채 앞만 보고 달려온 時間이 虛妄하게만 느껴진다.

    公試生의 ‘小確幸’과 ‘존버’

    [동아DB]

    [東亞DB]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推算하는 2018年 公試生은 41萬 名. 全體 就業準備生 105萬 名의 40% 程度 된다. 이렇게 많은 公試生이 試驗을 準備하지만 1次 關門을 通過하는 人員은 極少數다. 사이버國家考試센터 資料에 따르면, 2019年 國家職 9級 公務員 選拔 人員 對備 凝視 人員의 1次 筆記試驗 合格率은 4.27%에 不過하다. 筆記試驗 合格率이 낮다는 건 그만큼 競爭이 熾烈하다는 뜻. 해마다 合格 커트라인度 높아지고 있다. 公務員 試驗 合格은 如前히 ‘駱駝가 바늘구멍을 通過하기’ 만큼이나 어렵다. 

    N世代·X世代의 뒤를 이어 誕生한 밀레니얼 世代(1980年代 初에서 2000年 初 사이에 出生한 世代를 일컫는 말)는 1997年과 2008年 두 次例 經濟危機를 겪으며 ‘小確幸’과 ‘존버’라는 새로운 時代精神을 體得했다. 小確幸은 ‘작지만 確實한 幸福’의 줄임말로 ‘日常에 感謝한다’는 肯定的인 뜻이 있는 反面, 裏面에는 ‘於此彼 큰 幸福은 내 차지가 못 된다’라는 自嘲가 깔려 있다. ‘버티는 者가 勝利한다’는 뜻의 ‘존버’ 亦是 밀레니얼 世代의 碌碌지 않은 現實을 代辯한다. 더는 新造語라 하기에도 머쓱할 만큼 어느덧 小確幸과 존버는 大韓民國 靑年들의 삶 全般에 녹아 있다. 

    앞에 言及한 公試生 네 名도 例外는 아니다. 公示에서 失敗한 뒤 다시금 就業 前線에 뛰어들었지만 이들 앞에 펼쳐진 現實은 苛酷하기만 하다. 特히 이들을 힘들게 만드는 건 ‘公示에 괜히 挑戰했다’는 後悔다. 



    서아름(假名·29) 氏는 公示에 失敗한 뒤 地域 就業센터 紹介로 民間 圖書館에서 夜間 사서 도우미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月給은 130萬 원. 한 달 最低時給(179萬 5310원)보다 50萬 원이 적은 돈이었다. 勤務時間은 週末 包含해 每週 5日, 午後 1時부터 10時까지, 契約期間 11個月이었다. 하지만 徐氏는 남들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쉬고 싶다는 생각에 아르바이트를 始作한 지 6個月 만에 일을 그만뒀다. 

    두 番째로 擇한 일터는 大學病院 案內데스크. ‘알바’ 꼬리票를 떼긴 했지만 이番에도 給與는 턱없이 낮았다. 公式 給與는 180萬 원이지만 人力 派遣業體에 紹介費와 手數料를 내고, 稅金까지 除하면 月給은 120萬 원臺로 줄어들었다. 圖書館 夜間司書 도우미 알바보다도 적은 金額이다. 

    그마저 派遣期間이 2年 以上은 不可能하다. 徐氏가 所屬한 會社는 派遣勤勞者保護法에 따라 派遣 勤勞者를 1年 만에 書類上으로 解雇한 뒤 契約職으로 다시 採用해 1年을 더 勤務하게 하고, 以後에 完全히 解雇한다.

    公示 經歷 있으면 묻지마 不合格?

    “案內 業務 말고 다른 部署에는 못 보내겠네.” 病院 일을 始作하기 前 派遣業體 採用 擔當者가 徐氏에게 한 이 말은 就業 市場 內 徐氏의 位置를 代辯해준다. 그렇다면 徐氏는 왜 派遣職을 選擇했을까. 

    “一旦 집에서 나와 어딘가에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懇切했어요. 派遣職이긴 하지만 처음 大學病院에 就業했을 땐 ‘이제 나도 사람 구실하며 살 수 있겠구나’ 하는 希望에 暫時 들뜨기도 했고요. 무엇보다 다른 데 就業할 때 經歷으로 쓰기 좋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徐氏라고 正規職에 欲心이 나지 않았을 理 없다. 當場은 힘들지만 좀 더 기다렸다가 正規職으로 堂堂하게 社會生活을 始作하겠다고 決心한 적도 많다. 하지만 그러기엔 ‘就業 空白’李 너무 길었다. 大學 卒業 後 5年間 公示에 매달리느라 履歷書에 번듯한 經歷 한 줄 넣을 게 없었다. 

    徐氏는 公試生 生活을 淸算한 뒤 3個月間 入社志願書를 50餘 통 넘게 썼지만 面接 보러 오라는 곳은 딱 한 곳뿐이었다.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작은 規模의 스타트업이었다. 徐氏는 그날의 空氣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面接 初盤만 해도 雰圍氣가 나쁘지 않았다. 會社 代表는 “人生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瞬間이 언제냐”고 물었고, 徐氏는 暫時 苦悶하다 率直하게 “公試生으로 살던 5年”이라고 答했다. 一瞬間 靜寂이 흘렀다. 代表가 “一當百 役割 할 사람이 必要한데…”라며 말끝을 흐리자, 徐氏는 비로소 自身이 뭔가 잘못 말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徐氏가 懇切하게 듣고 싶었던 말은 “出勤하라”였지만, 그는 끝내 그 말을 듣지 못했다. 

    “이미 就業 關聯 온라인 커뮤니티에선 아무리 스펙이 좋아도 公試生이라면 ‘묻지마 不合格’을 當한다는 말이 公公然하게 퍼져 있었어요. 모든 企業이 그런 건 아니지만, 求職 活動을 해보니까 公試 準備를 오래할수록 志願者에 對한 面接官의 信賴度가 낮아지는 게 있더라고요.” 


    經歷 空白 메우려 블랙企業에 支援

    一部 企業이 公試生 出身 志願者를 忌避하는 것은 다른 志願者보다 社會性이 不足하다는 偏見 때문이다. 公試 準備에만 沒頭하다 보면 아무래도 사람들과 어울려 集團 生活하는 게 如意치 않겠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公示를 準備하느라 생긴 就業 空白을 就業 經歷으로 認定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就業 空白을 메우지 못한 公試生은 스펙이 좋은 就準生한테 밀려날 수밖에 없다. 

    一部 公試生은 私企業보다 公企業에 就業하는 게 유리하다고 强調한다. 萬一 書類銓衡만 通過한다면 公示 筆記試驗을 工夫할 때 얻은 知識을 活用해 公企業 筆記試驗에서 좋은 成跡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主張이다. 하지만 現實은 이와 다르다. 徐氏의 말이다. 

    “英語를 除外하고는 公示 筆記試驗과 公企業의 筆記試驗이 겹치는 部分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筆記試驗에서 合格하기가 決코 쉽지 않죠. 요즘은 公企業에 就業하려는 實力者가 많아지는 趨勢라 競爭이 아주 熾烈해요. 運 좋게 筆記試驗에 合格해서 面接을 보더라도 職務能力을 强調할 만한 經歷이 없으면 通過하기가 어려워요.” 

    徐氏는 就業 空白을 메우려고 ‘블랙企業’에까지 支援했다. 블랙企業은 靑年世代 社員들에게 非合理的인 勞動을 强要하는 企業을 가리키는데, 殘業手當을 支給하지 않거니 長時間 勞動을 强要하는 境遇가 많다. 性戱弄, 暴言, 毆打 等이 日常的으로 일어나기도 한다. 이는 單純히 勤務 與件이 劣惡한 企業에 入社한 것과는 次元이 다른 問題다. 그래서 就業 關聯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初年生 職場人이 가지 말아야 할 블랙企業’ 리스트를 따로 만들어 共有하기도 한다. 

    徐氏가 支援한 會社는 勞動 搾取로 口舌에 여러 番 오른 規模가 작은 한 IT企業이었다. 採用 公告에는 ‘新入社員 正規職’을 採用한다고 올라와 있었다. 徐氏는 “就業 커뮤니티엔 該當 企業에서 採用 條件에 ‘正規職 採用’이라고 明示한 뒤 勤勞契約書에는 인턴이나 非正規職 採用으로 變更한다는 얘기가 돌고 있어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就業 空白을 메우기 위해선 여기라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結局 入社 願書를 作成해 會社에 보냈다. 하지만 徐氏는 블랙企業에서조차 就業 空白이 있다는 理由로 거절당했다. 그 代身 “無給 인턴으로 일해보면 어떻겠느냐”고 提案이 들어왔다. 結局 徐氏는 會社 側 提案을 拒絶했다.

    “나이만 먹고 就業 時機 놓칠까봐 不安”

    “就業 空白을 메워주는 代身 給與 없이 일하라고 해서 率直히 荒唐했어요. 내가 이런 取扱까지 받아야 하는 건가 싶어 不快하기도 했고요. 더군다나 한 달 인턴을 正規職으로 轉換해주는 게 아니잖아요. 인턴 하고 나면 다시 元來 자리로 돌아오는 건데, 이럴 거면 차라리 돈이라도 벌 수 있는 알바가 낫지 않을까 싶었어요.” 

    徐氏는 더는 집에서 用돈을 받아 쓰는 게 面目이 없어 短期 아르바이트를 救했다. 週末에는 大型마트의 試食 아르바이트로 日當 8萬 원을 벌었고, 가끔 座談會 等에 參席해 2時間 程度 앉아 있다 4萬 원을 받았다. 一旦 돈을 벌게 되니 急한 불은 끌 수 있었다. 하지만 未來에 對한 不安感과 걱정으로 늘 마음이 무거웠다. 

    “輸入에서 公課金과 用돈을 除하고 나면 남는 金額은 얼마 안 돼요. 한 달에 일하는 날보다 안 하는 날이 더 많으니까요. 앞으로 繼續 이렇게 살 수는 없는데, 그렇다고 해서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이러다 나이만 먹고 正規職 就業은 아예 물 건너 갈까봐 두려워요.” 

    事實 徐氏의 어릴 적 꿈은 公務員이 아니었다. 中學生 때부터 키워온 眞짜 꿈은 同時通譯師다. 目標를 이루기 위해 大學에서 英語英文學을 專攻했고, 大學校 3學年 땐 스페인으로 語學硏修를 다녀왔다. 放學 期間엔 語學院을 다니며 中國語와 日本語를 배우기도 했다. 이러한 努力 德分에 徐氏는 5個國語가 可能한 사람이 됐다. 

    하지만 就業 市場에서 徐氏는 ‘外國語를 조금 할 줄 아는 사람’일 뿐이었다. 그보다 語學 實力이 뛰어난 취준생들이 차고 넘치는 게 現實이다. 그렇다 보니 徐氏가 就業을 準備하던 2011年 무렵엔 外國語는 더는 ‘特記事項’으로 取扱받지 못하는 雰圍氣였다. 只今은 그런 雰圍氣가 더 甚하다. 요즘은 外國語에 能通한 ‘海外 居住 經歷者’를 于先 採用한다. 徐氏는 背囊旅行과 6個月 語學硏修 말고는 몇 年씩 海外에 居住한 經驗이 없다.

    “돌아올 수 없는 江을 건넌 氣分”

    “저 나름대로 스펙을 쌓았는데 競爭者들 스펙이 ‘넘사壁’이에요. 어릴 때 美國에서 살았고 大企業 駐在員인 아버지를 따라 日本에도 몇 年 머물러서 英語와 日本語에 能熟한 사람이 不知其數예요. 그런 사람의 스펙을 어떻게 제가 이길 수 있겠어요. 그래서 스펙 競爭 없이 오로지 點數로만 就業할 수 있는 公示로 눈을 돌렸던 거죠. 工夫머리는 어느 程度 되니까 熱心히 해서 試驗만 잘 보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徐氏가 “돌아올 수 없는 江을 건넌 것 같다”고 느낀 때는 2015年에 치른 두 番째 公示였다. 鷺梁津에 入城한 지 2年 程度 됐을 때였는데, 筆記試驗에서 1點 差異로 떨어지자 아예 休學屆를 내고 다시 公示에 매달렸다. 當時 徐氏는 4學年이었다. 

    하지만 三修(三修)의 結果는 더욱 悽慘했다. 結局 徐氏는 卒業은 해야겠다는 마음에 다시 學校로 돌아갔다. 學業과 試驗工夫를 竝行하며 이듬해 다시 한番 試驗을 봤지만 이 亦是 失敗로 돌아왔다. 徐氏는 그길로 鷺梁津 生活을 끝냈다. 

    “눈을 낮춰 中小企業에 就業하려고 해도 ‘書類 狂奪’은 基本이고, 面接에선 또래 經歷者한테 밀려나기 일쑤예요. 求職者들이 選好하는 中小企業은 競爭이 더 熾烈하죠. 나이는 많고 就業 經歷은 없으니, 公試生이 就業에 成功하려면 그間의 空白을 뛰어넘을 수 있는 뭔가가 있어야 할 것 같아요.” 

    派遣職은 責任 素材가 曖昧해 때때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난다. 그래서 블랙企業의 正規職보다 못하다는 소리도 듣는다. 派遣職人 걸 모르고 이웃들이 “좋은 職場에 就業해 좋겠다”고 할 때 徐氏의 父母는 애써 表情管理를 해야 했다. 그런 父母의 모습을 보는 徐氏의 마음도 不便하기는 마찬가지였다. 最惡의 靑年 就業難 속에서 派遣職 일자리라도 얻은 게 어디냐 싶다가도 다른 正規職과 比較하면 本人의 處地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派遣職에서 原請會社의 契約職으로 轉換하는 比率은 낮은 便이다. 國內 派遣業體 關係者는 “10名 中 1~2名 程度”라고 說明했다. 關係者의 말이다. 

    “實力이 좋거나 윗사람의 눈에 들어 正式으로 採用 試驗을 쳐서 運 좋게 原請會社의 契約職으로 轉換되는 境遇가 間間이 있어요. 그때부턴 原請會社에 所屬한 職員이 돼서 2年間 勤務하죠. 原請會社의 契約職이 된다고 해서 正規職으로 轉換될 可能性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해요.”

    “暫時 있다 떠날 사람” “다른 會社 사람”

    徐氏와 함께 工夫하던 公示 스터디 멤버 3名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徐氏는 如前히 派遣勤勞者였고, 1名은 캔들 攻防을 運營하고 있다. 나머지 2名은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다시 公試生으로 돌아갔다. 徐氏는 “就業을 抛棄하고 다시 鷺梁津으로 돌아가는 ‘公示 廢人’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小說家 김애란이 2017年 發表한 小說集 ‘바깥은 여름’에 收錄한 短篇小說 ‘건너便’에는 公示에 6年間 挑戰했다가 물만 먹은 男子 主人公 履修가 就職해 社會에 適應하려 했지만 結局 다시 公試生으로 돌아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권선호(假名·32) 氏는 小說 속 履修와 같은 經驗이 있다. 2011年부터 7年 동안 公示에 挑戰했다가 結局 抛棄한 뒤 補習學院 講師 일을 始作했다. 社會生活에 適應했을 무렵, 文在寅 政府가 靑年雇傭이란 理由를 앞세워 公務員 數字를 늘리겠다고 發表했다. 結局 2017年 12月 公務員 增員 規模를 9475名으로 確定했다. 權氏는 “하늘이 준 마지막 機會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 다음해 鷺梁津으로 돌아왔으나 그해 年末에는 鷺梁津 考試院에서 房을 뺄 수밖에 없었다. 8年間의 公試生 生活에 마침標를 찍은 瞬間이었다. 

    歲밑을 앞둔 2019年 12月 中旬, 受話器 너머 들려오는 權氏의 목소리엔 잔뜩 無力感이 배어 있었다. 完全히 克服한 건 아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隱遁型 외톨이처럼 房구석에 박혀 지냈다. 權氏는 “한동안 露宿者와 다를 바 없는 生活을 했다”고 말했다. 

    “제가 工夫하고 있을 때 親舊들은 일하면서 經歷도 쌓고 돈도 제법 모았더라고요. 比較하면 안 되지만, 나는 그동안 뭐 했나 싶어 自愧感마저 들었어요.” 

    權氏는 아직 갚지 못한 學資金 貸出이 700萬 원 程度 남아 있다. 그도 더는 집에서 支援받는 게 未安해 그동안 入社志願書를 80通 넘게 썼다. 하지만 連絡이 온 곳은 없었다. 나이 어리고 스펙 좋은 취준생들과 競爭하려면 나름의 戰略이 必要하지만 權氏는 就業 스터디조차 들어가기 힘들었다. 

    “요즘은 就業 스터디에서도 나이를 가려서 받아요. 學閥이나 學點이 좋아도 나이가 서른둘 넘으면 끼워주질 않더라고요. 男子 나이 서른둘은 就業 市場에서 거의 마지노線에 가까워요. 저는 나이도 많고 就業 空白도 기니, 그런 모임에 끼기 힘들죠.” 

    요즘 權氏는 中小企業 靑年인턴制度를 알아보고 있다. 權氏는 “다른 것보다 몸을 無理하게 쓰는 職種만큼은 避하고 싶다”고 말했다. 鷺梁津으로 되돌아간 뒤 肺結核 確診 判定을 받아 苦生했는데, 只今도 健康을 完全히 回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公試生은 눈뜨는 瞬間부터 잠들 때까지 하루 日課가 試驗工夫에 맞춰져 健康管理에 疏忽하기 쉬워요. 公示를 完全히 그만둔 뒤에도 工夫하느라 弱해진 體力을 回復하지 못했어요. 뭐라도 해야겠다 싶어 工事場으로 일하러 나갔다가 2週도 못 버티고 나온 적도 있고요.” 

    權氏는 “첫 試驗에서 0.3點 差異로 탈락한 게 結局 ‘公示 中毒’으로 이어졌다”고 告白했다. 公試生들은 “合格 컷(커트라인) 近處까지 간 것 自體가 대단하다”며 그를 치켜세웠다. ‘끝까지 버티면 合格한다’며 權氏를 應援하는 公試生度 많았다.

    熱心히 해도 不合格하는 理由

    “딱 1年만 더 工夫하면 合格하겠구나, 다시 해보자 다짐했어요. 그다음 해에는 1點 差異로 탈락했고, 그다음 해엔 面接試驗에서 떨어졌어요. 職列을 바꿔서 挑戰한 적도 있는데, 0.7點 差異로 筆記試驗에서 떨어졌어요. 그러다 政府가 公務員 數字를 늘린다고 해서 이番이 마지막이라는 心情으로 다시 挑戰했는데…. 合格 컷보다 10點이나 點數가 낮았어요. 자꾸 나쁜 생각이 드는데,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 그러지도 못하고….” 

    슬럼프를 種種 겪기는 했어도 하루 15時間 꼬박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試驗 準備에 沒頭했다. 그런데도 連거푸 試驗에 떨어졌다. 理由가 뭘까. 權氏가 내린 結論은 이렇다. 公示價 누구나 다 挑戰할 수 있는 試驗이다 보니 虛數가 많다는 것이다. 工夫에도 一種의 戰略이 必要한데, 虛數에 該當하는 사람은 아무런 戰略도 없이 잠 줄여가며 無條件 熱心히 工夫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權氏는 “나 또한 虛數였다”고 告白했다. 

    “無條件 熱心히 하는 게 오히려 毒으로 作用하는 것 같아요. 컨디션은 컨디션대로 나빠지고 時間은 時間대로 버리고. 公試生 이름 앞에 ‘長修生(公示 試驗을 많이 본 사람)’ 딱紙가 붙는 건 時間問題예요. 그 時間에 차라리 資格證을 따거나 就業을 했더라면….” 

    公示를 여러 番 치러보니 깨달은 事實이 몇 가지 있다. 1點 差異로 떨어진 사람은 1點만 더 받았다면 試驗에 붙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合格圈에 들기 위해서는 最少 2~3點을 더 받아야 可能하다는 게 權氏의 主張이다. 選拔 人員의 2~3排水까지가 合格圈이기 때문이다. 權氏는 “公示 挑戰할 땐 미처 생각하지 못한 일이 너무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임현수(남·30) 氏는 大企業 系列 保險會社의 營業社員으로 勤務하다가 退社한 뒤 2016年부터 公示를 準備했다. 勤務 期間은 1年이 조금 안 되지만, 營業 壓迫으로 스트레스가 너무 커 會社 다니는 동안 慢性 胃炎에 시달렸다. 

    “아무리 月給을 많이 준다고 하더라도 公務員이 될 수 있다면 公務員을 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어요. 그래서 조금이라도 어릴 때 安定的인 職場을 찾자고 會社를 그만두고 公務員 試驗을 보게 됐죠.”

    “抛棄하는 것도 勇氣” “公示價 人生의 全部 아냐”

    [GettyImage]

    [GettyImage]

    於此彼 公示는 合格者 定員이 定해져 있어 많은 이가 탈락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最上位圈 實力者는 어느 試驗에나 布陣해 있어 갈수록 競爭은 熾烈해진다. 公示는 失手로 틀리는 問題를 줄여야 하는 싸움이다. ‘어느 講師의 講義를 듣느냐’가 合格을 左右한 지도 오래됐다. 그런데 林氏는 “요즘 새로운 變數가 追加됐다”고 했다. ‘工夫에만 集中하도록 뒷받침할 經濟力이 父母에게 있는가.’ 여기에 따라 비슷한 實力이라도 公示 成敗가 갈린다는 것이다. 적어도 公試生들은 그렇게 느끼고 있다고 한다. 林氏는 “出發點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어쩔 수 없는 것 같다”며 “公示는 아무나 準備하는 게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林氏는 1年 6個月 만에 鷺梁津에서 나왔다. 그동안 職場 生活하며 번 돈으로 學院費, 月貰, 交際費, 用돈 等을 充當한 金額이 적지 않아서 抛棄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林氏는 “이제라도 발 뺀 게 多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林氏는 “抛棄하는 것도 勇氣다”라고 말한다. 過去 投資한 時間과 돈, 努力에 對한 補償 心理가 作用하다 보니 ‘1年만 더 해보자, 이番엔 붙겠지’ 하다 보면 公試生 生活이 漸漸 길어진다는 것이다. 몇 年씩 冊床 앞에만 앉아 冊을 보고 있으면 未來에 對한 不安感이 掩襲하는데도 抛棄할 勇氣가 없어 時間만 보내는 이가 적지 않다. 

    “公試生 사이에선 ‘2, 3年 안에 合格하지 못하면 그만둬야 한다’란 말이 ‘箴言’처럼 통해요. 試驗 3番만 치러도 4~5年이 훌쩍 지나가버리거든요. 適切한 타이밍을 잡지 못하면 憂鬱의 늪에 빠질 수 있어요. 試驗 挑戰 期間을 定한 뒤 그 안에 合格하지 못하면 나와서 다른 길을 찾아야 해요.” 

    公示를 抛棄한 뒤 林氏는 氷菓業體 營業事業으로 재취업했다. 이 過程에서 自身이 敗北者가 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한다. 林氏를 面接한 한 任員은 “우리 職員들 平均年齡이 29世인데, 나이 어린 先輩나 上司를 따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林氏에겐 그 말이 마치 ‘結局 돈, 時間만 버리고 끝난 거 아니냐’며 自身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林氏처럼 公示를 그만두고 다시 社會에 나온 公試生들은 이런 不便한 視線을 默默히 이겨내고 있다. 自身보다 社會 經歷이 더 쌓인 어린 上司나 先輩의 蔑視를 견뎌내는 게 괴로운 일이지만 自身의 選擇에 따른 代價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公示든 就業이든 人生에 答은 없는 것 같아요. 答을 찾기 위해 努力하고 그 나름의 意味를 가지고 살아가는 게 人生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公示 抛棄한 經驗이 人生의 밑거름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신동아 1月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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