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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兆 원 寄附 ‘官庭 이종환’의 96年 ‘큰 구두쇠’ 人生|新東亞

허문명이 만난 사람

1兆 원 寄附 ‘官庭 이종환’의 96年 ‘큰 구두쇠’ 人生

“돈이 아니라 사람이 열쇠더라”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19-12-21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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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韓民國 最高齡 企業人의 寄附하는 삶

    • 總賞金 75億 원 ‘韓國版 노벨賞’ 만들기로

    • 世界觀正科學賞이 노벨賞 버금가는 게 마지막 꿈

    • 日帝 때 學兵 끌려가 죽을 고비 넘겨

    • 애써 키운 企業 빼앗기고 安企部에서 拷問 當해

    • 事業은 1㎝로 勝敗 갈리는 長대높이뛰기

    • 돈을 어떻게 쓸지 苦悶한 不眠의 밤들

    [홍중식 기자]

    [홍중식 記者]

    約束된 인터뷰 始作 時間이 繼續 늦어지고 있었다. 會議室 안에서 間間이 흘러나오는 목소리의 主人公이 官庭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名譽會長인 것 같았다. 뭔가 解決할 일이 생겨 部下 職員들을 챙기는 것으로 보였다. 1924年生, 새해 아흔 여섯이다. 100歲를 앞둔 그가 요즘에도 每日 事務室로 出勤해 일한다는 것을 確認하는 瞬間이었다. 

    40餘 分쯤 지났을까. 그가 會議室에서 나와 會長室로 걸어 들어갔다. 느릿한 걸음걸이였지만 꼿꼿한 허리가 100歲를 앞둔 나이를 無色하게 했다. 2019年 12月 10日 午後 3時 半, 서울 명륜동 그의 執務室에서 그와 마주앉았다.

    素材 生産 企業 三映畫學 創業主

    - 듣던 대로 健康해 보이십니다. 하루 日常은 어떠신지요. 

    “젊을 때와 큰 差異는 없어요. 일어나면 밤새 別일 없었는지 電話로 全國 現場부터 챙기는 것도 똑같고. 前에는 새벽 5時면 깼는데 只今은 7時에 일어나는 게 좀 달라졌다고 할까. 아침에 오르간으로 行進曲을 치고 出勤하는 習慣도 如前합니다. 只今까지 平衡感覺 瞬發力을 잃지 않은 것은 열 손가락을 自由自在로 움직여 鍵盤을 두들기는 演奏 習慣 德分이 아닌가 싶습니다.” 

    - 職員들 携帶電話 番號 100餘 個를 외우고 다니신다고 들었습니다. 

    “只今은 한 30餘 個 程度…. 70代 後半까지만 해도 腦神經 損傷을 막으려고 每日 밤 피나게 暗記했지요(웃음). 내 일이 24時間 쉬지 않고 機械 돌려 製品 만드는 것 아닙니까. 最一線 工場 勤勞者에게까지 밤이고 새벽이고 隨時로 電話했는데 이제 더는 그렇게까지 하지 말라고들 해서 낮에만 일합니다. 요즘에도 하루에 決定하는 큰 일이 두세 가지는 생깁니다. 隨時로 脂肪 工場 視察이나 海外 出張도 가고요.” 

    - 長壽 祕訣이 궁금합니다. 

    “특별한 거 없어요. 밥은 늘 한 空氣, 고기보다 生鮮을 즐기고 飯饌은 골고루 먹어요. 運動은 골프場에서 홀가분하게 라운딩하는 程度. 술은 葡萄酒 한 盞, 氣分 내키면 두 盞까지. 담배 끊은 지는 50年 돼갑니다. 집안이 長壽 집안이라 하늘과 祖上에 感謝하고 있습니다.” 



    會議室 밖까지 흘러나오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비해 인터뷰 내내 그의 목소리는 낮게 깔렸다. 그러면서도 强調할 대목에서는 直接 裏面紙에 筆師까지 해가며 톤을 높였다. 삶이나 經營에서 군더더기를 싫어하고 本質에 穿鑿하는 게 平素 哲學이라고 밝혀온 사람답게 에너지도 選擇과 集中을 해서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5個 分野 總賞金 75億 원 ‘韓國版 노벨賞’

    인터뷰를 始作하자 ‘正道(正道)’라는 題目으로 自敍傳까지 펴내서 그런지 “딱히 해줄 이야기가 없는데”라고 韻을 뗐다. 記者가 “生前에 한番 뵙고 싶었다”고 하자 “내가 좀 ‘珍貴한 動物’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보고 싶다는 사람이 많이 있기는 하다”는 弄談이 돌아왔다. 

    現在 管井敎育財團 理事長을 맡고 있는 이 會長은 2019年 10月 世上을 또 한 番 놀라게 했다. 2022年부터 全 世界 學者들을 對象으로 5個 分野 各各 15億 원씩 總 75億 원의 賞金을 주는 假稱 ‘世界觀正科學賞’을 制定한다고 한 것. 6個 分野 總 70億 원 賞金을 주는 노벨賞보다 賞金 規模 面에서 더 크다. 

    이날 인터뷰는 그의 寄附 人生보다 名實相符 大韓民國 最高齡 現役 企業人의 企業家 精神을 먼저 듣는 것으로 始作했다. 

    - 自敍傳을 읽다 보면 豫期치 않은 不幸도 있었지만 幸運도 많았습니다. 成功 祕訣은 努力에 있습니까, 하늘의 뜻이나 運에 있습니까. 

    “무슨 일이든 誠心誠意를 다해 熱心히 努力하다 보면 天運이나 幸運을 잡을 수 있다고 봐요. 흔히 韻7期3이라고 하는데 나는 韻1期9라고 믿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超薄膜 커패시터 필름(電子製品 核心 素材인 祝典 및 絶緣 필름)과 高壓 礙子(碍子·電信柱에 매달려 있는 電氣 絶緣物) 開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超薄膜 커패시터 필름은 1980年代 初 外國 旅行을 하다 美國 科學 專門雜誌에서 偶然히 接한 技術입니다. 運이 좋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걸 알아본 眼目과 技術 開發에 對한 끈질긴 努力이 없었다면 놓치고 말았을 겁니다. 運과 努力이 結合돼 우리 삼영화학이 獨逸, 日本 企業과 함께 世界 3大 메이커가 됐습니다.
     
    1980年代 超超高壓 礙子를 開發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送電線의 엄청난 무게와 超强力 颱風을 이겨내야 하는 게 技術의 마지막 核心이었는데 全 世界를 뒤지고 다니며 온갖 方法을 다 찾아 해봐도 穩全치 못했습니다. 그러다 偶然히 特殊한 흙을 發見해 흙 한 숟가락으로 解決했습니다. 成分은 只今도 나만 알고 있어요. 世上 뜨기 前에 믿는 사람에게 傳授할 생각입니다.”

    뜻대로 되지 않았던 靑年期

    李 會長은 光復 直後 精米所 運營까지 合하면 企業을 經營한 歲月이 70年을 훌쩍 넘는다. 그의 지난 삶을 돌아보면 ‘産業韓國’의 戰爭터를 이끌어온 老兵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1924年 日帝强占期에 태어난 그는 마산중학교 卒業 後 虎狼이를 잡으려면 虎狼이窟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으로 日本 메이지대 輕傷學科에 入學한다. 하지만 太平洋戰爭 막바지였던 1944年 學兵으로 끌려가는 바람에 人生이 바뀐다. 蘇聯, 滿洲 國境과 오키나와를 오가던 關東軍 生活은 그야말로 私選(死線)을 넘나드는 것이었다. 

    “只今 젊은이들은 나라가 없다는 게 어떤 狀況인지 잘 그려지지 않겠지만 靑雲의 꿈을 품고 留學까지 간 靑年이 大學校 2學年 때 갑자기 戰爭터로 끌려가 남의 나라를 위해 銃을 들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身世가 됐을 때의 漠漠함이란…. 零下 46度 酷寒에 무거운 砲身을 메고 高地를 오르내리고 不動姿勢로 夜間 哨兵을 섰습니다. 꽁꽁 언 밥을 포크로 쪼개 먹는데 포크가 부러질 程度였어요. 그래도 나는 살아서 解放을 맞았으니 幸運兒였습니다.” 

    光復 後 故鄕으로 돌아온 그는 精米所 事業으로 事業家의 첫발을 내디딘다. 成功的으로 基盤을 닦는 듯했지만 간디스토마에 걸려 生死의 岐路에 서면서 1年 半 만에 事業을 접어야 했다. 겨우 몸을 추슬러 再起를 試圖했지만 6·25戰爭이 터졌다. 먹고살 길이 寞寞해 1953年 서울로 올라와 始作한 게 東大門市場 褓따리 장사였다. 

    “生産施設 大部分이 爆擊을 맞아 生活必需品을 모조리 輸入하던 때였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사람들 틈에 끼어 장사를 했는데 늘 損害를 봤어요. 價格 흥정을 제대로 못한 거죠. 葬事에 넌덜머리가 나 機械와 씨름하는 게 속 便하겠다 싶어 製造業으로 눈을 돌린 게 플라스틱 事業이었습니다. 1958年 射出機 1臺로 삼영화학工業社를 차렸습니다.” 

    當時만 해도 플라스틱은 新素材였다. 그는 工場長, 商品企劃者, 디자이너, 販賣員 1人 多役을 하며 바가지, 컵, 洋동이 같은 生活必需品을 만들어 팔았다. 只今 系列社들의 이름에 붙어 있는 ‘크라운’이라는 企業 名稱은 當時 製品에 박은 王冠 模樣 會社 로고에서 비롯된 것이다. 當時를 살았던 老年層 中엔 記憶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外換危機 直前엔 不渡 危機도 겪어

    以後 이 會長의 삶은 그야말로 現實에 安住하지 않는 挑戰의 連續이었다. ‘物件을 찍어내면 돈’이라고 할 만큼 재미를 봤지만 곧바로 다음 事業인 包裝用 필름 事業으로 옮겨갔다. 

    當時만 해도 輸出用 包裝材를 全量 日本에서 輸入하다 보니 納期를 못 지키는 企業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뛰어든 일이었다. 大成功이었다. 그는 이어 技術 開發을 통해 菓子, 라면 包裝紙, 透明 包裝紙 等 高難度 合成包裝材 生産에 挑戰했다. 飮食物을 싸는 透明 랩을 最初로 開發한 것도 三映畫學이다. 

    그의 事業 人生이 꽃길만은 아니었다. 숱한 挫折과 豫期치 못한 惡材 탓에 事業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눈물과 한숨을 삼켜야 했다. 

    “플라스틱 事業에 손댄 지 4年 後 아주 우연한 機會에 鐵道廳 枕木 改良 事業에 뛰어들었습니다. 在來式 枕木을 시멘트 鐵筋으로 바꾸는 일이었는데 千辛萬苦 끝에 受注해 ‘됐다’ 싶었는데 大企業이 달려드는 바람에 속절없이 빼앗겼습니다. 그때 大企業의 橫暴를 經驗하면서 남의 胃腸 안에 들어가 있는 飮食物이라도 맘만 먹으면 쇠갈퀴로 빼내갈 사람들이란 생각에 悲哀를 많이 느꼈습니다.” 

    그는 韓國에 거의 몇 안 남은 創業 1世代다. 스스로도 “만인 對 만인 弱肉强食 鬪爭 時代를 살았다”고 한다. 

    한 고비 넘겼다 싶으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이 나타나 以前까지 들인 피와 땀을 虛事로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自然에는 獅子만 사는 게 아니라 토끼도 산다. 環境과 與件에 適應하자는 마음으로 버텼다”고 한다. 外換危機 直前엔 不渡 危機까지 갔다가 起死回生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건 政府와의 關係였다. 

    “企業을 運營하다 보니 곧이곧대로만 해서는 안 되고 政治人들과도 親하게 지내야 했습니다. 政府 與黨에도 잘 보여야 하는데 그러지 않아 損害를 많이 봤습니다. 國際戰線이라는 國內 最大 規模 電線 工場을 세웠다가 結局 다른 財閥 企業에 빼앗겼는데 政治權力이나 官僚들이 作心만 하면 피땀으로 일군 企業을 하루아침에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直接 當해본 事件이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事業할 생각이 完全히 사라진 때이기도 했지요. 나이 五十에 5年 동안 겪은 風波였습니다.”


    安企部에서 拷問도 當해

    그는 귀에 補聽器를 끼고 있었다. 처음엔 高齡 탓에 聽力이 弱해졌기 때문인 줄 알았는데 듣고 보니 抑鬱한 事緣이 있었다. 

    “1987年 11月이었습니다. 日本에서 北韓과 連繫해 石炭 關係 일을 하던 사람이 知人의 紹介로 불쑥 찾아와 茶 한盞 마시고 헤어졌는데 다음 날 猝地에 눈이 가려진 채 끌려갔어요. 南山인지 西氷庫였는지는 모르겠고 安企部 對共分室이었습니다. 내 나이 예순다섯 때 일입니다. 

    몇 時間 동안 아들뻘 調査官 세 名이 傷處 안 나는 곳만 골라 몽둥이로 때리고 물拷問까지 하겠다고 浴槽로 끌고 가 怯을 주더군요. 내가 못 참고 高喊을 치니까 한 사람이 냅다 내 뺨을 때립디다. 以後 耳鳴症이 생겨 歸家 나빠졌어요. 고쳐보려고 日本이고 美國이고 百方으로 다녔지만 結局 補聽器 身世를 지고 있습니다. 

    그때의 抑鬱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힘 있는 者들에게 阿附할 窮理 안 하고 愚直하게 일만 했는데 왜 나를 잡아다가 兩쪽 귀를 못쓰게 만들었는지 只今까지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解明을 들은 적이 없어요. 

    當時만 해도 企業들이 알아서 政治資金을 獻納하던 雰圍氣였는데 自進 納付를 하지 않아 當한 게 아닌가 혼자 생각할 뿐이었지요. 나중에 眞實和解委員會에서 公權力에 依한 拷問 被害라는 것을 公式 認定하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잃어버린 聽力이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무슨 所用입니까. 名譽回復을 했다는 次元에서 慰安을 찾을 뿐입니다.” 

    그는 “내가 自敍傳 冊 題目을 ‘程度’라고 할 程度로 政經癒着을 멀리하며 野性(野性) 企業人으로 只今까지 이렇게 企業을 運營하고 있는 것 自體가 奇跡”이라고 했다. 

    “政府에 기대기보다 오히려 많이 싸웠습니다. 抑鬱한 일을 當하면 屈하지 않고 訴訟으로 對應했으니까요. 馬山 國有地를 無斷으로 使用했다면서 賃貸料를 賦課받은 事件도 政府와 맞서 3審 내내 勝訴했고, 國稅審判所松島 이겨 還給을 받았고 管井敎育財團 運營과 關聯한 不合理한 稅法에도 承服하지 않아 稅法 改正을 세 番이나 이끌어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잘못된 政府 措置에 맞서 싸워 이겨 새 判例를 남기는 것도 弱者를 돕는 길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財團을 設立하고 平生 모아온 不動産을 段階的으로 出捐하는 過程에서 낸 稅金만도 數百億 원입니다. 現金이 아닌 出演 不動産에 對한 稅制 惠澤이 當時 全無했기 때문이었습니다. 公益財團에 對한 稅金 減免이 더 늘어나야 한다고 봅니다.”

    企業 빼앗긴 抑鬱함을 新規 事業 위한 에너지로

    삼영화학이 생산하는 ‘애자’ [홍중식 기자]

    삼영화학이 生産하는 ‘哀子’ [홍중식 記者]

    그는 “成功이나 失敗는 事業家에게 늘 있는 일이겠으나 重要한 것은 成功했을 때 驕慢하지 않고 失敗했을 때 挫折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는 挫折이 닥칠 때마다 오히려 超人的 에너지로 事業에 沒頭했다. 

    “國際戰線을 虛妄하게 빼앗기고 始作한 게 礙子 産業이었습니다. 이 나라에서 남들이 못하는 가장 힘든 事業이 뭔지 窮理했습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分野에 뛰어들면 다시는 權力과 不條理의 犧牲羊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挑戰한 것이 礙子 開發이었습니다. 5年 苦生하면 될 줄 알았는데 30年을 매달렸어요.” 

    礙子는 배電線路龍 小型 電信柱에 쓰이는 것에서부터 巨大 送電塔에 매다는 超高壓, 超超高壓 礙子까지 있다. 李 會長이 세운 ‘考慮礙子’는 世界 네 番째로 超超高壓 礙子를 生産했다. 全量 輸入에 依存하던 것을 100% 國産化했으며 이제는 輸出까지 하고 있다. 

    超超高壓 礙子의 境遇 礙子 하나가 비바람과 햇빛 속에서 數十t 電線 무게를 견디며 매달려 있어야 한다. 濕期, 鹽分, 高熱, 超低溫에 금이 가면 안 되는 高度의 精密함과 堅固함이 要求된다. 考慮礙子가 만든 것이 全國에 6000萬 個나 걸려 있는데 그中 하나라도 故障 나면 停電이 된다. 

    그는 事業을 ‘長대높이뛰기’에 比喩했다. 

    “처음 3, 4m는 많은 選手가 成功하지만 世界新記錄에 다가갈수록 1cm에 勝敗가 갈리지 않습니까. 내 人生도 그랬습니다. 커패시터 필름 두께 10㎛(1㎛는 1000分의 1㎜) 生産에 成功했다고 기뻐할 새도 없이 7㎛에 挑戰했고 다시 5㎛, 3㎛ 開發로 치고 나갔습니다. 

    礙子度 難題를 完全히 풀었다고 快哉를 불렀는데 先進國에서 폴리머라는 合成고무 礙子를 開發해 다시 挑戰받고 있습니다. 原價가 우리 것의 折半이어서 해가 갈수록 國內外 需要가 줄고 있어요. 하지만 우리 것이 半永久的이고 環境汚染도 거의 없다는 評價가 나와 一部 需要가 되돌아오고 있어요. 다시 回復될 날이 빨리 오기를 希望합니다. 企業 人生에서 未來 豫測이란 건 正말 힘이 듭니다.” 

    그는 아흔을 바라보던 2009年 船舶用 大型 디젤엔진 生産에도 뛰어들어 重工業 分野로 事業을 擴張했다. 빼앗긴 會社 國際戰線의 恨을 늦게나마 풀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홍중식 기자]

    [홍중식 記者]

    2000年 6月 現金 10億 원으로 出發한 管井이종환財團의 現在 規模는 1兆 원臺로 아시아 最大 規模 奬學財團이다. 李 會長 財産 97%가 들어갔다. 19年間 奬學金을 받은 사람이 1萬 名에 達한다. 2014年 600億 원을 寄附해 서울대 管井圖書館을 獻呈하면서 서울대 史上 最大 寄附額을 記錄하기도 했다. 

    - 自敍傳에서 識字憂患(識字憂患)李 아니라 財富憂患(財富憂患)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를 印象 깊게 읽었습니다. 

    “돈 많으면 아무 걱정 없겠다고들 하지요. 그렇지 않아요. 平生 온갖 試鍊을 이겨내고 財産을 일군 사람일수록 하늘의 부름을 기다리는 나이가 되면 財産 處理 問題가 가장 큰 難題입니다.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苦悶과 葛藤에서 헤어날 수가 없지요. 

    相續하면 簡單하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다음 代에 亡하는 境遇를 흔히 봐왔고 法대로 正直하게 相續하면 折半을 稅金으로 내야 하니 經營權까지 威脅받아요.”

    돈이 아니라 사람을 남겨야 한다

    2018년 관정이종환교육재단 국내 장학생 수여식

    2018年 管井이종환敎育財團 國內 奬學生 授與式

    李 會長은 “돈을 어떻게 쓸 것인지를 두고 몇 年 동안 不眠의 밤을 보냈다”고 했다. 

    “돈을 움켜쥐고 있자니 걱정만 커졌습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앉는 일도 많았고요. 그러다가 2000年 6月 奬學財團을 通한 社會 還元을 決定했습니다. 寄附를 決定하고 나니 얼마나 마음이 便安해졌는지 몰라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事業하면서 抑鬱한 일을 좀 많이 겪었습니까. 奬學財團을 세우고 다져가면서 傷處가 아물어갔습니다. 

    돈이라는 게 한番 斷念하기로 마음먹으면 아주 便해요. 하나도 아깝지 않아요. 마음속 마지막 끈마저 놓아버리니 그렇게 가벼워질 수가 없었습니다. 요즘에도 나는 내 손에 쥔 모든 것을 徹底하게 비우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봅니다. 참, 아까 健康祕訣을 물으셨는데 마음 비우고 좋은 일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게 健康祕訣인 것 같네요.” 

    그는 自身의 寄附 實踐이 갑자기 튀어나온 게 아니라 어릴 적 經驗에서 우러나온 것이라고도 했다. 

    “祖父(祖父)로부터 ‘이 世上에 태어나 작은 발자국이라도 남기려면 財産이 아니라 사람을 남겨야 한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자랐습니다. ‘黃金 한 광주리를 子孫에게 물려주기보다 한 卷의 冊을 더 읽히도록 하라’는 것이 中始祖로부터의 오랜 가르침이기도 했구요. 

    또 ‘돈을 모아 子孫에게 남겨준다 해도 子孫이 다 지킨다고 볼 수 없고, 冊을 모아 남겨준다 해도 子孫이 다 읽는다고 볼 수 없다. 남모르게 陰德을 베푸는 것이 子孫을 위한 좋은 計劃‘이란 明心寶鑑 글句도 늘 가슴에 있었습니다. 

    故鄕인 宜寧에서 初等學校 敎師를 한 적이 있는데 돈이 없어 工夫 못 하는 優秀한 아이들을 많이 도와주었지요. 나중에는 製造業을 하다 보니 先進國으로 가려면 人材 養成이 時急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가장 어려웠던 게 技術 開發이었는데 亦是 사람이 열쇠였어요. 優秀 人力을 키워 좋은 製品을 만들어 輸出하는 길만이 國富(國富)를 만드는 것이고 企業人이 國家를 위해 奉仕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 結局 科學人材 育成으로 이어진 거죠.” 

    大韓民國에서 企業을 한다는 것, 企業人으로 산다는 것이 너무 힘들고 어렵다는 말들만 들려오는 요즘, ‘企業輔國’을 말이 아닌 行動으로 實踐해온 盧(老)企業인 앞에서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그래 ‘나는 큰 바보’다”

    - 아직도 飛行機 탈 때 이코노미席에 앉으세요?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 아니, 부끄러우시다니요. 

    “꼰대처럼 보이잖아요(웃음). 며칠 前에도 中國 出張을 갔다 왔는데 大韓航空 優秀顧客이라 非常口 쪽 座席을 주더라고요. 거기 앉으면 발도 뻗고 便한데 굳이 돈을 더 들여 비싼 座席 살 必要가 있습니까. 그런다고 나만 빨리 가는 것도 아니고요(웃음). 이런 나를 向해 사람들이 ‘바보’라고 하는 소리도 들리던데 그럴 때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그래 ‘나는 큰 바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虛禮虛飾입니다. 體面치레로 남에게 보이기 위해 돈 쓰는 일은 絶對 하지 않습니다. 내 式대로 먹고 내 式대로 입습니다. 人生에서 거품을 빼자 이런 注意죠. 하지만 最新 機械를 들여온다든지 最高 人材를 데려오고 키우는 일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인터뷰를 마칠 時間이 다가오고 있었다. 한 해가 가고 2020年이 며칠 남지 않은 時點에서 100歲를 눈앞에 둔 어른에게 智慧를 듣고 싶었다. 

    - 世上이 갈수록 어지러워지는 것 같아요. 

    “저는 未來에 對해 恒常 樂觀的입니다. 只今 世界가 어렵고 우리나라도 어렵지만 長期的으로는 起伏은 있다 해도 發展할 것으로 믿습니다. 政治나 經濟가 잘못된 方向으로 나가고 있더라도 輿論이 있고 言論이 있기 때문에 바로잡힐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當場 이뤄지지 않아도 選擧라는 安全瓣이 있지 않습니까.
     
    彈劾이라는 方法도 있지만 늘 彈劾이나 하고 拘束이나 하면 社會가 제대로 될 수가 없지요. 저는 이제 國民 力量이 더 重要한 時代가 됐다고 봅니다. 

    政府가 뭘 잘못해도 國民이 그 잘못을 無色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政府가 엉터리면 우리 國民이 엉터리로 하지 않겠다는 결氣를 보여줘야 합니다. 

    半導體를 政府가 시켜서 한 것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選手들이 世界 골프를 휩쓸고 있는 것도 政府가 시킨 것 아닙니다. 어느 行商 할머니가 全 財産을 奬學金으로 다 내놓은 것도 누가 强要해서 한 것 아니잖아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政府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自身, 우리 全體를 위한 것입니다. 

    政府가 잘못하더라도 國民이 잘하면 돼요. 政治人들이 마음에 안 들면 選擧에서 바꾸면 됩니다. 世界 歷史도 마찬가지입니다. 人類 歷史와 文化는 온갖 試鍊을 겪으면서도 繼續 發展해오고 있지 않습니까.”

    “밥 먹는 時間, 잠자는 時間 줄여 일해”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명예회장은 “휴일을 모르고 일했다”고 했다.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名譽會長은 “休日을 모르고 일했다”고 했다.

    - 經營도 그렇고 寄附도 그렇고 超人的 에너지가 느껴집니다. 

    “千萬의 말씀입니다. 저도 普通 사람입니다. 缺點도 있고 잘못도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天才도 아니고 企業을 물려받은 것도 아닌데 그래도 오늘날 이렇게 成功한 祕訣은 남이 쉴 때 일하고 끊임없이 窮理해 남보다 조금 앞서 나간 德分이라고 생각합니다. 休日을 모르고 일했고 밥 먹는 時間, 잠자는 時間을 줄여가며 일했습니다.” 

    - 只今 이 時期에 必要한 政治 리더십은 어떤 것이어야 한다고 보십니까. 

    “제가 政治를 잘 몰라서 하는 얘기는 아닌데 ‘政治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政治에 많이 발을 담가 政治를 主導해나갔으면 합니다. 政黨의 目的이 政權 維持나 獲得이라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나나 黨보다 國民을 먼저 챙겨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좋은 자리나 일이 있다고 내가 먼저 챙기려 해서는 안 됩니다. 道德敎科書的인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그것이 政治의 程度(正道)입니다. 

    善心을 많이 쓰고 組織을 擴大하고 그럴듯한 薔薇빛 公約을 내세우면 票를 많이 얻을 것 같지만 이제 그런 時代는 지났습니다. 國民이 꿰뚫어 보기 때문이지요. 꼼수는 안 통합니다. 實現 可能한 좋은 政策을 펴거나 더 나은 代案을 提示해 그 結果로 政權을 維持하거나 執權하도록 해야 합니다. 

    國民 30~40% 支持로 執權하고 正義를 100% 獨占하려 해서도 안 됩니다. 保守든 進步든 原則과 信念이 너무 剛하면 敎條主義나 獨斷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뭐든 가진 것을 좀 버리는 犧牲과 獻身이 必要합니다. 요즘 報酬, 進步 가리지 않고 그런 現象이 一部 나타난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그러나 惡化가 良貨를 構築하듯이 덜 좋은 사람들이 政治판에 남고 더 좋은 사람들이 떠나는 形局은 警戒해야 합니다.”

    “내가 죽더라도 管井科學賞은 이어졌으면”

    이종환 명예회장이 2019년 8월 관정일본연구 학술회의에서 축사하고 있다.

    이종환 名譽會長이 2019年 8月 管井日本硏究 學術會議에서 祝辭하고 있다.

    - 世界觀正科學賞은 잘 推進되고 있는지요. 

    “해가 가기 前에 創設準備企劃팀을 만들어 本格的인 準備 作業에 着手합니다. 2020年 5月 創設을 公式 發表하고 世界 最高 碩學들로 5個 部門 審査委員會를 發足한 後 2021年 候補 推薦을 받아 그 이듬해(2022年)에 첫 施賞을 할 計劃입니다. 

    5個 施賞 分野는 노벨賞과 差別化해 人文社會科學, 生命科學, 數理物理學, 化學, 工學 等으로 나누고 賞金은 各各 15億 원으로 할 겁니다. 理論 못지않게 應用도 重視할 것입니다. 特히 아시아 쪽에 疏忽함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삶에는 欲心이 없는데 管井科學賞만큼은 내가 죽더라도 綿綿히 이어갔으면 좋겠다는 懇切한 바람이 있습니다.”

    [신동아 1月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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