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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在哲 東遠그룹 名譽會長 서울敎大 特講|新東亞

地上中繼

金在哲 東遠그룹 名譽會長 서울敎大 特講

“오늘의 選擇이 來日의 나를 만든다. 只今 冒險하고 挑戰하라”

  • 整理·송화선 記者

    spring@donga.com

    入力 2019-12-2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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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年 11月 20日 서울 서초구 서울敎大에서 金在哲(85) 東遠그룹 名譽會長의 特講이 열렸다. 1934年 全南 康津에서 11男妹의 長男으로 태어난 金 會長은 康津農高, 釜山水産大를 卒業하고 遠洋漁船 無給 船員으로 社會生活을 始作했다. 그가 1969年 資本金 1000萬 원으로 創業한 동원산업은 50年 만에 資産 總額 基準 國內 48位 企業으로 成長했다. 系列社 한국투자금융까지 包含하면 財界 順位는 20位圈 以內로 뛰어오른다. 

    • 맨주먹에서 出發해 世界 屈指의 企業을 일구기까지, 크고 작은 人生의 波濤를 넘어온 金 會長은 그 過程에서 挑戰 精神과 協同心 等 人性(人性)의 重要性을 切感했다고 한다. 1979年 動員育英財團을 創立하고 奬學 및 敎育 事業을 꾸준히 펼쳐온 理由가 여기 있다. 金 會長은 現在 서울교대를 비롯해 全國 11個 大學에 設置된 全人敎育 프로그램 ‘라이프 아카데미’를 後援하고 있기도 하다. 

    • 金 會長은 이날 서울敎大 學生들 앞에서 自身의 人生 이야기를 풀어놓고, 聽衆의 다양한 質問을 받고 對答하는 時間을 가졌다. 未來 韓國 敎育을 이끌 豫備 敎師를 對象으로 進行된 이 特講을 地上 中繼한다.

    • <編輯者 週>



    [박해윤 기자]

    [박해윤 記者]

    1部 金在哲 動員그룹 會長 特講 
    “우리나라가 가진 最高의 資産은 사람, “뛰어난 知性에 人性 더해야”

    여러분 반갑습니다. 

    一般的으로 여러분 年齡帶 大學生은 進路나 就業 걱정이 많을 텐데 여러분은 이미 進路가 定해져 있습니다. 일자리도 거의 豫約돼 있습니다. 대단히 福 받은 분들이라고 생각합니다. 祝賀합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바와 같이 저는 대단히 나이 든 할아버지입니다. 萬 85世가 지났으니, 어쩌면 여기 서울敎大에 와서 講義하는 사람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여러분은 저를 보면서 ‘저 할아버지가 무슨 얘기를 하려나’ 궁금할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 앞에서 敎育에 關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모두 훌륭한 敎育者가 되실 분들이니까요. 只今 이 자리에 임채성 서울敎大 總長님과 김경성 前 總長님 같은 敎育 分野 大家들이 계셔서 이 主題로 말씀드리는 것이 多少 조심스럽기는 합니다. 하지만 先生님들이 學校에서 가르치는 內容이 아니라 社會에서 일어나는 일 中心으로 하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프랑스 哲學者 사르트르가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人生이란 例外 없이 B에서 始作해 D로 끝난다.’ 여기서 B와 D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네. 여러분이 생각하시듯 各各 Birth(出生)와 Death(죽음)를 뜻합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例外가 없죠. 그런데 이렇게 말하고 보면 너무 재미가 없잖아요. 그래서 神이 B와 D 사이에 C를 뒀답니다. 여기서 C는 Choice(選擇)를 뜻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各自 어떤 選擇을 하느냐에 따라 삶이 매우 크게 달라진다는 얘기입니다. 

    초이스의 C로 始作하는 單語 中에는 肯定的인 意味를 가진 것이 많습니다. Challenge(挑戰하다) Change(變化하다) Cooperate(協力하다) Cheer(激勵하다) Continue(持續하다) 等이 그렇습니다. 反面 C로 始作하는 否定的인 意味의 單語도 많습니다. Complain(不平하다) Corruption(腐敗) Conflict(葛藤) Cheat(속이다) Cut(中斷하다) 等이 그렇습니다. 以外에도 辭典을 찾아보면 아주 많은 單語가 나올 겁니다. 사람이 B와 D 사이에서 어떤 C를 擇하느냐에 따라 人生이 決定된다는 게 사르트르의 생각입니다. 어때요. 이 意見에 共感이 갑니까.

    韓國 最初의 원양선

    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이 서울교대 학생들 앞에서 원양어선을 타고 오대양을 누비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金在哲 東遠그룹 名譽會長이 서울敎大 學生들 앞에서 遠洋漁船을 타고 五大洋을 누비던 젊은 時節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많은 사람이 삶을 살아가며 ‘남 탓’을 합니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내가 어떻게 變化하고(Change) 挑戰하고(Challenge) 行動을 持續하는지(Continue)에 따라 내 삶이 決定된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저는 釜山 수산대를 卒業했습니다. 첫 職業은 南太平洋에서 참치를 잡는 漁夫였습니다. 그때가 1958年인데, 當時엔 漁船이 只今처럼 좋지 않았습니다. 요즘 사람들한테 그런 배를 타라고 하면 ‘只今 나보고 죽으라는 거냐’는 말이 나올 겁니다. 그런데 當時엔 그런 배를 타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우리나라에 일자리가 거의 없었고, 모두 다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只今 우리 國民 1人當 所得이 어느 程度 되는지 압니까? 2018年 基準으로 3萬3000달러가 넘습니다. 제가 처음 배를 타고 나갔을 때는 우리 國民 1人當 所得이 80달러였습니다. 그 時代를 여러분은 아마 想像하기도 어려울 거예요. 우리가 絶對 貧困國이라고 생각하는 아프리카 街나라든지 소말리아 같은 나라 사람들도 1人當 所得이 80달러는 넘습니다. 60餘 年 前 우리나라는 只今 그런 나라보다도 훨씬 가난했던 겁니다. 

    제가 수산대에 進學하기로 마음먹은 건 그런 環境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가난한 땅에서는 살기 어려우니 바다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大學에서 實習差 東海, 西海, 南海를 나가보고 크게 挫折했어요. 이미 우리 沿岸 水産資源이 絶滅 狀態라는 걸 알게 됐거든요. 日帝强占期에 日本 사람이 물고기를 다 잡아가고, 光復 後엔 또 韓國 사람이 잡아들였습니다. 繼續된 濫獲으로 資源이 거의 없는 形便이었습니다. 

    그런 狀況에서 卒業 무렵 우리나라 最初의 遠洋漁船이 釜山港을 出發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無酌定 찾아갔지요. “나도 그 배를 타고 싶다”고 하니 처음엔 “大學까지 나와서 무슨 이런 일을 하느냐”고 拒絶합디다. 또 찾아가서 태워달라고 하니 “이미 船員이 다 採用돼서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抛棄하지 않고 몇 番이고 찾아갔습니다. 마침내 “1年間 無報酬로 일한다. 죽어도 會社에 責任을 묻지 않겠다”고 約束하고서야 그 배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때부터 꼬박 1年을 참치잡이 生活을 했습니다. 

    돌아보면 그때 제가 그 배를 타기로 選擇했기 때문에 오늘날 動員이 世界에서 물고기를 가장 많이 잡는 會社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제가 萬若 그때 좀 더 安全한 길을 찾아 우리나라 沿近海에서 操業하는 작은 배를 탔다면 世界 第1의 水産會社를 만들 수 없었을 겁니다. 

    저는 그렇게 바다로 나간 뒤 冒險을 참 많이 했습니다. 只今은 遠洋漁業 關聯 技術과 裝備가 매우 發達했지요. 하지만 當時엔 狀況이 달랐습니다. 無邊大海에 나가면 해나 별의 角度를 測定해 배 位置를 把握했습니다. 날이 궂어 해나 별이 보이지 않으면 며칠이고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操業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危險千萬한 일이라 船員 가운데 犧牲者가 참 많았어요. 우리나라 遠洋漁業의 發祥地인 南太平洋 사모아, 大西洋 라스팔마스, 印度洋 포트리스 等에 가면 그 무렵 목숨을 잃은 船員들 무덤이 참 많습니다. 우리나라 遠洋漁業協會長은 只今도 몇 年에 한 番씩 그곳으로 省墓를 갑니다. 이런 過程을 거쳐 韓國 遠洋漁業이 發展한 겁니다.

    하버드대에서 배운 慧眼

    저는 以外에도 살아가며 여러 ‘챌린지’를 했습니다. 30代에 會社를 세웠고, 그것이 어느 程度 軌道에 올랐을 때 다른 事業을 해봐야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美國 하버드대 最高經營者過程에서 工夫도 했습니다. 

    제가 農業高等學校, 수산대를 나오고 배를 탔기 때문에 英語를 잘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버드대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正말 오만 手段을 다해 그 學校에 갔습니다. 제가 이걸 왜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느냐 하면, 그 挑戰을 통해 얻은 게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1981年 하버드대에 들어가서 보니, 그 學校 經營大에서 가장 優秀한 學生들이 投資銀行이나 證券社에 就業하더라고요. 當時 우리나라에서 證券社는 맨 詐欺꾼이 設置는 데라는 認識이 있었습니다. 누가 證券會社 다닌다 하면 그 사람을 좀 異常하게 볼 程度였습니다. 그런데 資本主義 宗主國이라는 美國에서는 最高로 優秀한 사람들이 證券會社에 들어가는 겁니다. 제가 그걸 보고 ‘아, 이쪽에 將來가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以後 韓國에 돌아와 當時 公賣로 나와 있던 韓信證券을 引受했지요. 引受 價格이 큰 배 한 隻 價格쯤 했습니다. 以後 그 會社를 키우고자 갖은 努力을 다했고, 그것이 오늘날 韓國에서 톱클래스로 評價받는 한국투자증권이 됐습니다. 

    저는 이 成就의 바탕에 제가 그동안 해온 挑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일찌감치 바다로 나간 德分에 좀 더 큰 視野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世界가 넓고 宇宙가 크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바다 生活을 하며 몇 番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기 때문에 膽大해질 수 있었습니다. 世上에 죽음보다 겁나는 게 뭐 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게 됐습니다. 

    勿論 살다 보면 힘든 瞬間도 옵니다. 그때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때 바다에서 죽었으면 다 끝나는 거였는데 이만큼 살지 않았나. 겁날 게 뭐가 있나. 只今 이렇게 살아 있는 것만 해도 幸福이다.” 이런 생각 德에 企業을 運營할 때도 ‘正道(正道)經營’을 할 수 있었습니다. “구질구질하게 살지 말자”는 마음을 繼續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動員이 世界에서 물고기를 가장 많이 잡는 會社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沿岸에서는 單 한 마리도 잡지 않습니다. 漁夫들에게 被害를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고기를 遠洋에서만 잡습니다. 이렇게 늘 程度經營을 위해 努力하고 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世界地圖 거꾸로 보기

    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이 세계지도를 거꾸로 돌려 보여주며 우리나라의 입지적 장점을 설명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金在哲 東遠그룹 名譽會長이 世界地圖를 거꾸로 돌려 보여주며 우리나라의 立地的 長點을 說明하고 있다. [박해윤 記者]

    者, 이제는 여러분에게 제가 여러 挑戰을 통해 얻은 智慧를 나눠드리려고 합니다. 世界地圖를 거꾸로 볼 수 있는 視角입니다. 

    우리가 一般的으로 알고 있는 世界地圖를 한番 들여다보십시오. 韓半島는 유라시아 한 귀퉁이에 매달려 있는 듯 보입니다. 제가 어린 時節에는 이런 立地 條件 때문에 우리가 도무지 發展할 可望이 없다는 自嘲的인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어른들이 “어쩌면 나라가 이렇게 버선짝처럼 생겼냐” “토끼가 귀를 잡혀 붙들려 있는 形象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바다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문득 깨달았어요. 별에는 위아래가 없다는 걸 말이지요. 우리가 地圖를 볼 때는 無心코 北쪽이 위, 南쪽이 아래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밤하늘에 無數히 떠 있는 별을 보세요. 어디가 위고 어디가 아래입니까. 더군다나 우리 地球는 ‘star’ 축에도 못 드는 하나의 ‘planet’에 不過합니다. 北쪽, 南쪽이 따로 있을 理 없습니다. 그래서 한番 地圖를 뒤집어봤습니다. 그러자 完全히 새로운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韓半島는 大陸에서 바다를 向해 埠頭처럼 나와 있습니다. 유라시아 大陸을 발板 삼아 太平洋으로 나갈 烽火臺처럼 堂堂한 모습입니다. 이때 日本은 우리나라를 막아주는 防波堤, 中國은 北西風을 가려주는 큰 언덕처럼 보입니다. 

    제가 그동안 航海한 거리를 다 합치면 地球를 200바퀴 以上 돈 格이 됩니다. 그렇게 긴 時間, 無邊大海에서 몇 달이고 몇 年이고 지내면서 宇宙와 地球 次元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면 이런 發想이 생깁니다. 저는 1990年 이런 깨달음을 담아 ‘地圖를 거꾸로 보면 韓國人의 未來가 보인다’라는 冊을 썼고, 그것이 베스트셀러가 됐습니다.

    무게로 달아 읽은 冊

    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이 바다를 항해하며 쓴 글은 우리나라 초·중·고교 교과서에 실렸다. [박해윤 기자]

    金在哲 東遠그룹 名譽會長이 바다를 航海하며 쓴 글은 우리나라 初·中·高校 敎科書에 실렸다. [박해윤 記者]

    꽤 오랫동안 우리나라 初·中·高 敎科書에도 제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1965年부터 約 30年間 있었으니, 여러분의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그 冊을 보셨을 겁니다. 

    事實 제가 글쓰기를 工夫한 적은 한 番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글을 쓰는 것도 저한테는 큰 挑戰이었습니다. 제가 바다에 나가서 보니 ‘우리가 살길은 바다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분명해졌습니다. 이 事實을 젊은이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은데 方法이 없었습니다. 그때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처음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쉬운가요. 앞서 말씀드렸듯 農業學校, 水産學校 나와서 바로 배를 탔기 때문에 冊 읽을 時間이 全혀 없었습니다. 내가 참 속이 가난하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冊을 읽기로 決心하고 많이 읽었습니다. 

    當時 日本 뒷골목에 가면 古書籍을 廢止보다 若干 비싸게 파는 데가 있었습니다. 冊을 무게로 달아 팔았어요. 거기 가서 괜찮아 보이는 冊을 몇 箱子씩 샀습니다. 그걸 가지고 배에 오르면 몇 달은 充分히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지내다 보니 어느 瞬間 ‘나도 글을 쓸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다의 無限한 可能性에 對한 글을 써서 新聞社 雜誌社 等에 보냈지요. 그 글이 알려지고 몇 年 지나자 當時 문교부(現 敎育部)에서 敎科書에 실을 바다에 關한 이야기를 써달라는 要請이 왔습니다. 그게 出發點이 돼 初等學校 4學年 國語敎科書, 中學校 2學年 國語敎科書, 그리고 實業界 高等學校 2學年 國語敎科書에 各各 제가 쓴 글이 실렸습니다. 

    제가 제 자랑을 하려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예로부터 ‘정신일도하사불성’이라는 말이 있지요. ‘精神을 쏟아서 하면 어떤 일이 不可能하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도 그런 勇氣를 갖고 사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말씀드립니다.

    知識, 智慧, 創意性

    그렇다면 우리는 살아가며 어떤 챌린지를 해야 할까요. 이것을 決定할 때 가장 重要한 건 狀況 認識이라고 생각합니다. 大洋에서 航海할 때 船長의 1次的 責務는 내 배가 어디 있는지를 아는 겁니다. 여러분도 人生에서 重要한 選擇을 할 때는 내가 只今 어디에 있는지 잘 알아야 합니다. 

    배야 物理的 位置를 아는 것으로 充分하지만, 여러분은 自身의 社會的 歷史的 位置까지 다 把握할 수 있어야 합니다. 只今 世界는 놀라운 速度로 變하고 있습니다. 人類 歷史가 7萬 年 程度 됐다고 하는데, 人間의 삶은 最近 50年 사이에 지난 몇 萬 年 동안보다 더 크게 變했습니다. 特히 우리나라의 變化 速度는 世界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빠릅니다. 여러분은 이런 걸 綜合的으로 보고 理解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必要한 게 知識(Knowledge)입니다. 

    여러분은 知識이 무엇으로 構成됐다고 생각합니까. 情報(Information)가 쌓여 定型化된 것을 知識이라고 합니다. 그럼 情報는 뭐냐. 그것은 데이터(Data)의 蓄積을 의미합니다. 學者들은 이것을 DIK 理論이라고 합니다. 

    데이터와 情報가 뒷받침되지 않은 知識을 우리는 ‘카더라’라고 합니다. 只今 우리나라는 ‘카더라’ 때문에 많이 혼란스럽습니다. 여러분은 앞으로 모든 狀況을 判斷할 때 이 點을 留念하고 ‘카더라’에 흔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處한 現實을 제대로 把握하려면 知識이 必要하고, 그러자면 情報나 데이터가 뒷받침돼야 합니다. 根據 없는, 데이터 없는 얘기에 眩惑되지 마시라는 趣旨에서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앞서 說明한 內容으로 돌아가면 데이터, 情報, 知識 위에는 智慧(Wisdom)가 있습니다. 그 위에 있는 것은 創意力(Creativity)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世界에서 손꼽힐 만큼 머리가 좋고 數學·科學도 잘하는데 創意力이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데이터, 情報, 知識의 基礎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뿐 아니라 여러분의 아버지, 할아버지도 注入式 暗記式 敎育을 받았습니다. 試驗에 對備해 熱心히 暗記하고 競爭하는 것만 배웠습니다. 그러니 우리 社會가 이렇게 됐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이런 現實이라는 것을 알고 克服할 方法을 찾기를 바랍니다. 

    克服하려면 먼저 人間의 屬性부터 알아야 할 겁니다. 매슬로의 欲求 5段階說에 對해 배웠지요? 매슬로는 人間이 生理的 欲求부터 段階別로 安全의 欲求, 所屬感과 사랑의 欲求, 尊重의 欲求, 自我實現의 欲求 等을 갖고 있다고 봤습니다. 各各의 欲求를 充足하고 마지막으로 自我實現까지 하면 幸福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이 段階까지 간 사람은 많습니다. 그럼 그다음에는 뭐가 있을까요? 여러분이 한番 생각해봐주세요. 

    제가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은 人間은 혼자 살 수 없다는 겁니다. 사람 人(人)字를 보면 짝대기 두 個가 서로 기대 있지 않습니까. ‘人間’이라는 單語도 사람 사이의 關係, 間隔을 의미하고요. 이것에 對해 얘기하는 게 倫理인데, 우리 敎育에서 가장 缺如된 게 바로 그 部分으로 보입니다. 많은 사람이 試驗 準備에만 매달리다보니 倫理, 道德 같은 것과 멀어져버렸습니다. 그런데 社會에서 보면 똑똑한 사람보다 人間關係 좋은 사람이 成功한 例가 훨씬 많습니다.

    더불어 사는 世上

    머리가 좋은 사람은 利己的이라 周圍를 돌아보지 못하고 외톨이가 되는 境遇가 많습니다. 社會的으로 問題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요즘은 學生들이 일찍부터 競爭에 시달리니까 남과 어떻게 더불어 살까에 對한 敎育이 잘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무리 발뒤꿈치를 세우고 까치발을 해도 남의 무등을 탄 것만큼 키가 클 수는 없습니다. 남의 무등을 타려면 남을 配慮하고 서로 協同해야 합니다. 

    地球는 몇十萬 年 前 만들어졌습니다. 그때 以後 새로 생긴 物質은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世界는 놀랍게 發展했습니다. 旣存에 있던 物質이 繼續 융·複合한 德分입니다. 物質의 融複合은 놀라운 變化를 가져왔습니다. 人間 社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로 이뤄지는 것은 없습니다. 서로 特性과 才能과 技術을 합쳐야 發展합니다. 

    우리나라는 特히 이런 面이 많이 不足합니다. 個人 能力으로는 世界에서 1等을 하는데 노벨賞은 平和賞을 除外하고 하나도 받지 못했습니다. 또 우리나라는 如前히 分斷國家로 남아 있습니다. 왜 이렇게 됐는가. 이 答을 찾는 것을 여러분께 宿題로 남기고 싶습니다. 

    只今까지 제가 그동안 살아오며 느낀 點, 그리고 여기저기서 배운 것들에 對해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은 社會에 나가면 한 사람當 적어도 1000名의 어린이 敎育을 맡을 겁니다. 제 講義가 그들에게 좋은 影響을 미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2部 金在哲 動員그룹 會長 ? 서울교대 學生들 質疑 應答

    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이 서울교대 학생의 질문을 듣고 있다. [박해윤 기자]

    金在哲 東遠그룹 名譽會長이 서울敎大 學生의 質問을 듣고 있다. [박해윤 記者]

    - 會長님은 참치 會社를 經營하셨는데 正말 참치를 좋아하시는지요. 

    “참치는 제가 가장 많이 먹는 飮食입니다. 사람들이 저를 보고 ‘어떻게 그렇게 健康하신가요’ 하고 물으면 저는 한마디로 ‘참치를 많이 먹어서 그렇습니다’ 하고 對答합니다. 

    조크로만 하는 얘기가 아닙니다. 물고기 中에 大洋을 건너다니는 魚種은 참치뿐입니다. 또 참치는 부레가 작아서 가만히 멈춰 있지 못합니다. 잠도 못 자고 平生을 돌아다녀요. 그만큼 强靭하지요. 水深 100m, 200m를 자유롭게 오르내리기도 합니다. 참치가 世界에서 가장 高級 食糧으로 評價받는 理由가 거기 있습니다. 

    저는 젊은 時節 참치잡이 배를 탔습니다. 그때는 바다에 나가서 몇 달씩 있으면서 참치를 샤브샤브 해 먹기도 하고 소금이나 간醬을 뿌려 먹기도 했습니다. 只今도 참치찌개를 거의 每日 먹습니다. 저를 보면 참치가 實際로 좋은 飮食인 게 證明되지요.” 

    - 年歲에 비해 매우 健康해 보입니다. 健康管理 祕訣도 있는지요. 

    “타고난 것이 있겠지만, 어린 時節 鍛鍊된 面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시골에서 中學校, 高等學校를 나왔습니다. 6年間 每日 5km쯤 되는 자갈길을 걸어 다녔습니다. 그래서 下體가 아주 튼튼해졌습니다. 只今도 골프를 하면 제 年齡에 비해 飛距離가 아주 깁니다. 또 하나, 저는 젊은 時節 배에서 요즘 말로 하면 奴隸처럼 일했습니다. 그때 몸이 鍛鍊돼 只今까지 健康하다고 생각합니다.” 

    - 會長님은 어떨 때 가장 幸福하신가요. 

    “아까 말씀드렸듯 저는 ‘죽었으면 이미 끝났을 人生, 只今까지 살고 있는 게 얼마나 幸福하냐’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只今 東遠그룹 從業員이 2萬 名쯤 됩니다. 國內에 1萬6000名, 外國에 4000名쯤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과 일하다 보면 別의別 일이 다 있습니다. 스트레스 받을 일도 많지요. 그때마다 ‘살아서 이런 일 저런 일 겪는 게 幸福’이라고 생각하면 스트레스가 쌓이지 않습니다. 사람한테 가장 안 좋은 게 스트레스를 쌓아두는 겁니다. 여러분도 나중에 敎師 生活 하다 보면 學生들이 哀悼 먹이고 할 겁니다. 그때는 그날그날 스트레스를 푸십시오. 갖고 살면 健康에 안 좋습니다.” 

    - 會長님은 젊은 時節부터 많은 挑戰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일을 試圖할 때 失敗하면 어떻게 할지 먼저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뒷일 생각지 않고 一旦 試圖부터 하십니까. 

    “처음에는 ‘죽기 아니면 살기’로 모든 걸 다 걸고 했습니다. 제가 30代에 創業을 했는데, 그때는 그 나이에 會社를 始作하는 걸 想像하기 힘든 雰圍氣였습니다. 只今은 10代, 20代에도 創業을 하는 사람이 있지만 當時엔 그랬습니다. 그때 한 先輩가 제게 助言을 해줬습니다. ‘事業을 하더라도 家族들 굶지 않게 對策은 세워놓으라’고요. 저는 ‘會社가 亡하면 다시 배를 타자. 그러면 最小限 밥은 먹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무렵엔 배를 타려면 船員手帖이라는 게 必要했습니다. 저는 ‘언제든 다시 배를 탈 수 있다’는 생각에 會社를 세우고도 몇 年間 船員手帖을 維持했습니다. 有效 期間이 지나면 새로 申請하고, 身體檢査도 繼續 받았습니다. 한 10年쯤 지나고는 自信感이 생겨 更新을 그만뒀지요. 

    會社가 어느 程度 成長한 뒤부터는 새로운 試圖를 할 때 ‘이 일이 잘 안 돼도 本體가 아주 망가지지는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日本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本業을 버리는 者는 亡한다. 本業만 하는 者도 亡한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안 되는 것 같기도 하지요? 그런데 分明히 맞는 말입니다. 사람이 本業으로 하던 것을 제대로 안 하고 다른 일을 하려고 기웃거리면 亡합니다. 그런데 本業 하나만 쭉 하면 그때도 所謂 ‘成長의 限界’가 옵니다. 제가 只今까지 참치잡이만 繼續했다면 아무리 世界 第一의 會社로 키웠다 해도 여러분 앞에 와서 이런 얘기를 할 資格이 없었을 겁니다. 여러 가지 일을 해보니 이런 자리에도 설 수 있게 된 거죠. 

    사람이 여러 가지 일을 하다 보면 아이디어가 솟구칩니다. 例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證券會社를 引受하고 한동안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하지만 只今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머리 좋은 사람들이 들어오는 會社가 됐습니다. 제가 거기에 뭘 導入했는지 압니까. 바로 遠洋漁船의 賃金體系입니다.
     
    遠洋漁船은 基本生活費 말고는 給與 大部分을 인센티브 形態로 支給합니다. 船員은 고기를 많이 잡으면 돈을 많이 벌고 적게 잡으면 적게 법니다. 이걸 우리 證券會社에도 適用했더니 사람들이 눈에 불을 켜고 일하게 됐습니다. 現在 韓國投資金融이 잘되는 건 우리나라에서 最高로 優秀한 사람들에게 最高 待遇를 해주기 때문입니다. 

    2018年 韓國投資證券의 次長 한 사람 年俸이 20億 원이 넘는다는 事實이 알려져 話題가 된 일이 있습니다. 當時 여러 言論이 ‘社長이나 오너보다도 次長이 돈을 많이 받았다’고 報道했습니다. 우리 會社는 職員이 돈을 많이 벌면 月給을 그렇게 많이 줍니다. 제가 여러 試圖를 해봤기에 그런 아이디어를 낼 수 있었습니다.” 

    - 會長님은 젊은 時節 遠洋漁船을 타셨습니다. 그런 挑戰을 할 수 있었던 原動力이 무엇인지, 또 子女를 키울 때 가장 重點的으로 敎育한 게 뭔지 궁금합니다. 

    “저는 농사짓는 집에서 태어나 農業學校를 나왔습니다. 元來부터 挑戰 精神이 있었던 건 아닙니다. 當時 農業學校 學生들의 가장 큰 꿈은 서울대 農大에 가는 거였습니다. 저는 特別生 制度를 통해 서울대 農大에 들어가는 게 確定돼 있었습니다. 그런데 大學 願書를 쓸 무렵 擔任先生님이 學生들 앞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들 全部 名門大 들어가는 걸 좋은 길로 생각하는데, 내가 너희라면 바다 系統 大學에 가겠다’고요. 그분이 서울대 文理大 化學科를 1等으로 入學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저희에게 ‘나를 봐라. 내가 서울대를 卒業했지만 하루 終日 너희와 입씨름만 하고 있지 않으냐. 내가 너희라면 바다에서 길을 찾겠다’고 하신 겁니다. 그 말씀을 듣고 조용히 敎務室에 찾아가 ‘先生님, 바다 系統 大學은 뭐가 있습니까’ 하고 여쭈었지요. 그랬더니 ‘나도 잘 모르겠다. 釜山 쪽에 있다더라’ 하시더군요. 그때 이리저리 搜所聞한 끝에 수산대를 알게 돼 志願하고 合格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大學에 가보니 形便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때가 1954年인데 戰爭 直後라 本校를 美軍이 占領하고 있었습니다. 學生들은 板子집에서 授業을 들었지요. 바다에 나가 보니 水産資源度 이미 枯渴된 狀態였습니다. ‘내가 選擇을 잘못했구나’ 하던 참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遠洋漁船이 出港한다는 消息을 들었어요. 그래서 正말 죽자사자 매달렸습니다. 1年間 無報酬 船員으로 일하는 것도 그쪽에서 要求한 게 아닙니다. 제가 어떻게든 그 배를 타려고 自請한 일입니다. 그때 그렇게 ‘챌린지’하면서 漸次 挑戰이 習慣이 된 게 아닌가 싶습니다. 

    子女敎育에 對해서도 答하겠습니다. 只今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저는 子女를 좀 단단히 鍛鍊을 시켰습니다. 只今 韓國投資證券 副會長으로 있는 제 長男은 고려대를 卒業한 뒤 遠洋漁船에 태웠어요. 어떤 분이 우리 아들한테 ‘고대 나오고 遠洋漁船 탄 사람은 歷史賞 네가 처음일 것’이라고 하시더군요. 그 아들이 바다에서 사람 죽는 現場도 보고 하면서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 뒤에 大學院에 갔는데 ‘내가 只今 느낀 걸 좀 더 일찍 알았다면 大學 工夫를 熱心히 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實際로 大學院에서는 工夫를 아주 잘했고요. 

    제 둘째 아들은 工場 勤務, 營業社員 生活을 하도록 했습니다. 옛말에 貴한 子息일수록 旅行을 시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旅行을 가면 돌봐주는 사람 없이 모든 걸 스스로 챙기게 되니까요. 저는 여러분께도 健康할 때 여러 經驗을 해볼 것을 勸합니다. 背囊旅行을 하고, 工場이나 障礙人 施設에도 가보십시오. 社會에서 크게 成長한 사람을 보면 어려움을 겪은 이가 많습니다. 便安하게 호강한 사람은 抵抗力, 忍耐力이 없어요. 스스로 機會를 만들어 몸과 精神을 鍛鍊하십시오.” 

    - 저는 東遠그룹이 왜 라이프아카데미를 만들었는지 궁금합니다. 會長님이 人性敎育에 關心을 갖게 된 契機가 있나요. 

    “저는 感受性이 銳敏하던 젊은 時節 世界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습니다. 로마, 파리 等의 遺跡에 觀光客이 붐비는 모습도 봤습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매우 가난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제가 大學을 卒業한 1958年 우리 國民 1人當 所得이 80달러에 不過했습니다. 100달러가 된 게 1963年의 일입니다. 그렇게 어렵던 時期에 豐饒로운 外國 風景을 본 겁니다. 

    그곳에서 恝視도 많이 받았습니다. 外國에 가면 入國場에서 ‘韓國이 어디 있는 나라냐’는 質問을 받기 일쑤였습니다. 日本人과 함께 들어서면 그 사람은 프리 패스 하는데 저만 한참을 붙들려 있곤 했습니다. ‘韓國이라는 나라에 汽車는 있냐’ ‘固有 文字는 있냐’ 같은 質問을 들으면 自尊心이 많이 傷했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도 했어요. ‘남의 祖上들은 저렇게 遺跡을 남겨 곳곳에 觀光客이 들끓는데 우리한테는 왜 이끼 낀 草家집밖에 없는가. 왜 우리나라엔 遺産이라곤 가난밖에 없는가.’ 悲痛함에 눈물 흘리고 感傷的인 時間도 가져봤습니다. 

    그런데 客觀的으로 보면 우리나라가 땅이 좁지만 人口가 많습니다. 또 船長으로서 世界 여러 나라 사람들과 함께 일해 보면 우리나라 사람이 分明 똑똑한 게 느껴졌습니다. 只今은 各種 統計로 우리 國民이 優秀하다는 게 立證됐습니다. 當時는 그런 資料가 만들어지기도 前입니다. 하지만 저는 經驗을 통해 우리 國民이 優秀하다는 걸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될 길은 사람을 잘 가르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믿음에 會社를 세우기 前, 月給쟁이 때부터 月給을 쪼개 奬學生을 길렀습니다. 以後 動員을 創業하고도 繼續 奬學事業을 이어갔습니다. 只今까지 奬學金을 支給한 學生이 延人員으로 4000~5000名이 됩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政府가 奬學金을 많이 주기 始作했습니다. 다른 걸 뭘 할까 하면서 어린이 幼少年 蹴球大會를 열어보고, 背囊旅行 프로그램도 運營해봤습니다. 모든 게 一時的인 效果를 내는 데 그쳤습니다. 좀 더 根本的인 敎育을 해보자는 趣旨로 만든 게 라이프 아카데미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똑똑하기는 한데 人性이 不足해 共同生活이 어렵지 않습니까. 이 問題를 바로잡으려면 人性敎育이 必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共同體에 對한 貢獻

    김재철 동원그룹 명예회장(왼쪽에서 다섯 번째)이 2019년 11월 20일 서울교대 특강을 마치고 임채성 서울교대 총장, 김경성 서울교대 전 총장(왼쪽에서 여섯, 일곱 번째) 등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해윤 기자]

    金在哲 東遠그룹 名譽會長(왼쪽에서 다섯 番째)李 2019年 11月 20日 서울敎大 特講을 마치고 임채성 서울敎大 總長, 김경성 서울敎大 前 總長(왼쪽에서 여섯, 일곱 番째) 等과 함께 記念撮影을 하고 있다. [박해윤 記者]

    제가 아까 여러분께 매슬로의 欲求 5段階說에 對해 말씀드렸죠. 이때 自我實現까지 한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물었고요. 매슬로는 5단계설을 完成한 뒤 欲求를 하나 더 追加했습니다. 그것이 ‘共同體에 對한 貢獻’입니다. 共同體는 내가 나온 學校 同窓會일 수도 있고, 마을 또는 國家일 수도 있습니다. 나아가 人類 全體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여러분은 自我實現에 그치지 말고 共同體에 貢獻까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者, 이렇게 아까 드렸던 質問 가운데 하나에 對한 答은 제가 드렸습니다. 나머지 두 質問에 對한 答은 여러분이 생각해주세요. 첫째는 한때 滿洲 벌판에서 말을 달리며 그 넓은 땅을 다 차지했던 우리 民族이 只今 왜 半島의 半토막에서 살고 있는지에 對한 것입니다. 우리 國民은 머리가 좋고 韓半島의 地政學的 位置도 매우 좋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只今까지 分斷國家로 남아 있을까요. 그 理由를 생각해보십시오. 

    둘째는 亦是 이렇게 머리가 좋은 사람이 모여 있는데 왜 우리나라에서 只今까지 노벨賞 受賞者가 안 나왔는지에 對한 質問입니다. 여러분이 이 두 가지 主題를 잘 생각해 스스로 答을 求하면 좋겠습니다.” 

    이날 質疑 應答時間에는 여러 學生의 많은 質問이 이어졌다. 金 會長은 “讀書와 質問, 討論을 强調하는 라이프아카데미 프로그램이 學生들에게 좋은 影響을 미친 것 같다”며 반가워했다. 이어 다음 이야기를 덧붙이며 講演을 마무리했다. 

    “마이클 브린이라는 言論人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우리나라에서 15年間 살면서 ‘韓國人을 말한다’라는 冊을 썼습니다. 거기 韓國人의 特性으로 提示한 內容을 整理하면 이렇습니다. ‘첫째 過去志向的이다. 둘째 남 탓을 많이 한다. 셋째 妥協할 줄 모른다.’ 

    우리한테 이런 弱點이 있다는 걸 알고 거기에 휩싸이지 않으려면 冊을 많이 읽고 다른 사람 意見도 많이 들어야 합니다. 큰 것을 이루려면 여러 사람이 協力해야 한다는 걸 銘心하십시오. 

    이제 여러분은 社會에 進出해 어린이들을 가르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가진 뛰어난 部分을 發掘해 잘 指導하면 韓國에서 엄청난 人物이 많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는 우리나라 靑少年, 아이들을 잘 가르치는 重且大한 任務가 맡겨져 있으니 그 일을 통해 우리나라가 잘되게 해주십사 하는 付託을 마지막으로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신동아 1月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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