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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年 시진핑·리커창 이어 頂上 노릴 6世代 三頭馬車|新東亞

2022年 시진핑·리커창 이어 頂上 노릴 6世代 三頭馬車

  • 하종대│東亞日報 社會部長, 前 베이징 特派員 orionha@donga.com

    入力 2011-04-21 15: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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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춘화 네이멍구 自治區 黨 書記
    • 쑨정차이 지린省 黨 書記
    • 저우창 湖南省 黨 書記
    2022년 시진핑·리커창 이어 정상 노릴 6세대 삼두마차

    3月5日 中國 全國人民代表大會가 후진타오 國家主席(앞줄 가운데)과 원자바오 總理(오른쪽)가 參席한 가운데 開幕됐다.

    中國의 次世代 指導部, 卽 第5世代 指導部의 先頭 競爭은 基本的으로 雙頭馬車 構圖다. 시진핑(習近平·58) 中國 共産黨 中央서기처 西紀 兼 國家副主席과 리커창(李克强·56) 國務院 副總理가 1年 뒤에는 各各 黨 總書記와 國務院 總理를 맡을 것으로 豫想된다. 黨 總書記와 國務院 總理는 黨 權力序列上 各各 1, 3位지만 總理의 實質的인 權力은 權力 2位인 全國人民代表大會 常務委員會 委員長을 凌駕한다. 現在 두 사람은 中國 最高指導部人 黨 中央政治局 常務委員 9名 가운데 唯一한 50代 人士다. 中國의 次世代 指導部의 核心은 이들 2名일 것이라는 豫想은 中國에서 이미 一般化한 지 오래다.

    이들 5世代가 退陣하는 2022年엔 第6世代 指導部가 登場한다. 5世代가 1950年代 出生者人 데 비해 6世代는 1960年代 出生者들이다. 5世代 指導部 先頭競爭이 雙頭馬車 構圖라면 6世代 指導部 競爭은 三頭馬車 構圖다. 이番에 紹介할 人士는 이들 세 名이다.

    三頭馬車 先頭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人物은 亦是 후춘화(胡春華·48) 네이멍구(內蒙古)自治區 黨 西紀 兼 人民代表大會 常務委員會 主任이다. ‘리틀 후진타오(胡錦濤)’로 불리는 그는 少數民族이 사는 가난한 오지 山골에서 태어났지만 타고난 성실함과 努力으로 超高速 昇進을 거쳐 오늘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最年少 記錄 製造機’이기도 하다. 中國 政界에서는 덩샤오핑(鄧小平)李 후진타오를 最高指導者로 落點했듯, 장쩌민(江澤民)은 시진핑을 落點했고, 후진타오는 후춘화를 落點할 것이라고 豫想하는 사람이 많다. 이른바 格對落點(隔代落點) 傳統이 이어질 것이라는 主張이다.

    다음으로 쑨정차이(孫政才·48) 지린(吉林)省 黨 西紀 兼 人民代表大會 常務委員會 主任이 있다. ‘中國 옥수수 密植(密植)栽培의 代價’로 불리는 그는 1970年代 末부터 1990年代 中盤 사이에 베이징(北京) 地域 옥수수의 單位面積當 生産量을 無慮 두 倍 以上 끌어올림으로써 中國의 食糧 不足 現象을 解消하는 데 크게 寄與했다.

    이와 함께 注目할 人事는 저우창(周强·51) 後難(湖南)省 黨 西紀 兼 性 人民代表大會 常務委員會 主任이다. 三頭馬車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그는 1960年代 出生者 가운데 첫 成長이기도 했다.



    이들 外에도 現在 中國 中央指導部의 部長 또는 地方指導部의 成長級 가운데 第6世代 人士는 네 名이 더 있다. 장칭웨이(張慶偉·50) 中國賞用航空機有閑公社 理事長과 壘下午(陸昊·44) 中國共産主義靑年團(공청團·共靑團) 中央서기처 第1書記, 累얼 바이커리(努爾 白克力·50) 신장(新疆)위구르族 自治區 主席, 쑤수린(蘇樹林·49) 푸젠(福建)省 代理成長이다.

    이들 7名 가운데 저우창 湖南省 書記와 장칭웨이 中國賞用航空機有閑公社 理事長은 約 9年 前인 2002年 가을부터 長官級(部長級) 以上 職責을 맡을 수 있는 中國 共産黨 中央委員會 中央委員이었다. 또 후춘화 네이멍구 自治區 書記와 쑨정차이 지린省 書記는 제17차 黨 大會가 열린 2007年 가을 黨 中央委員에 當選됐다. 反面 累얼 바이커리 腎臟위구르 自治區 主席과 쑤수린 푸젠성 代理成長은 2007年 가을 黨 中央委員會 候補委員에 當選됐다. 壘下午 공청團 中央서기처 第1書記는 最年少 部長級 人事지만 아직 中國 共産黨의 中央委員會에는 進出하지 못했다.

    2010年 現在 1960年代에 出生한 第6世代 指導部 人士 中 次官級(副部長級) 以上 人事는 100餘 名이다. 이들은 第20次 黨 大會가 열리는 2022年 가을부터 中國을 本格的으로 이끌 것으로 보인다.

    마오쩌둥(毛澤東)李 일으킨 文化大革命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두 地方으로 하방되는 等 큰 試鍊을 겪었던 第5世代 指導部 人事와는 달리, 이들은 모두 덩샤오핑의 執權 以後 復活한 大學入試와 改革開放의 惠澤을 集中的으로 받은 世代다. 따라서 이들은 열 살 가까이 많은 제5세대 指導部 人士와 함께 大學을 다닌 境遇가 적지 않다. 全 世代인 5世代 指導部와 달리 보다 開放的인 思考를 가진 것도 이 때문이다. 全體的으로는 공청團 人士가 많다. 第6世代 先頭走者 7名 가운데 藷芋槍과 후춘화는 공청團 中央서기처 第1書記를 歷任했고 樓下오는 現在 이 職責을 맡고 있다.

    ▼ 後·춘·火

    6世代 最先頭 ‘리틀 후진타오’

    2022년 시진핑·리커창 이어 정상 노릴 6세대 삼두마차
    ‘6世代의 先頭로 나선 리틀 후진타오(胡錦濤)’로 불리는 후춘화는 2010年 1月 네이멍구 自治區의 黨 書記와 自治區 人民代表大會 常務委員會 主任으로 選出됐다. 2006年 11月 中國共産主義靑年團(共靑團·공청團) 中央서기처 第1書記에 就任한 뒤 2008年 4月 허베이(河北)省 副書記와 代理成長, 2009年 9月 허베이省 成長에 이은 超高速 昇進이다.

    事實 ‘最年少 記錄’은 그의 長技 가운데 하나다. 1990年 2月 滿 27世도 안 된 나이에 부청長級인 공청團 시짱(西藏)自治區 副書記에 올랐다. 1992年엔 滿 29歲에 靑壯級人 시짱自治區 공청團 書記, 1997年 12月엔 34歲의 나이로 副部長級人 공청團 中央서기처 書記에 任命됐다. 모두 職級上 最年少 記錄이었다. 2006年 11月 공청團 中央서기처 第1書記로 任命됐을 때도 最年少 部長(長官)級이었다.

    後 成長이 태어난 후베이(湖北)省 우펑(五峰)縣은 平均 海拔高度 1500m의 山岳地域으로 周邊이 모두 投資(土家)族의 少數民族 自治區域이다. 奧地 中의 奧地로 外部와는 事實上 斷絶돼 사는 地域이다. 그 亦是 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고무신은커녕 헝겊신도 없어 짚신을 신고 學校에 다녔다. 各各 4㎞와 6.5㎞ 떨어진 中學校와 高等學校를 다니는 동안 해져 닳은 짚신만 한 무더기다. 그의 발바닥엔 當時 銅錢 두께의 굳은살이 恒常 박여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窮僻한 生活은 그를 좌절시키기는커녕 그의 意志를 더욱 强靭하게 만들어줬다. 學校 成跡 亦是 恒常 斷然 1位였다. 大學入試가 復活한 지 3年째이던 1979年 여름 그는 우펑縣 首席으로 베이징대 中文科에 合格했다. 우펑縣에서 베이징大 入學生이 처음 排出되는 瞬間이었다. 하지만 學費는 勿論 베이징에 올라갈 旅費조차 없었다. 그는 學費를 벌기 위해 大學 入學 直前 여름 放學 내내 水力發電所 工事場에서 剛모래를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當時 한 달 넘게 한 막勞動으로 그가 번 돈은 100위안. 當時로서는 매우 큰돈이었다.

    工事판에서 번 돈과 아버지가 親姻戚에게서 꾼 돈으로 겨우 學費와 旅費를 마련해 베이징에 올라왔다. 16歲의 어린 나이였던 그는 學校에서 가장 키가 작았다. 하지만 成跡은 恒常 水位를 維持해 卒業할 때 ‘優秀卒業生’ 賞狀을 받았다.

    2022년 시진핑·리커창 이어 정상 노릴 6세대 삼두마차
    卓越한 成跡 때문에 當初 그는 베이징에 남을 수 있었다. 實際로 갈 자리도 마련돼 있었다. 하지만 그는 僻村奧地인 티베트 勤務를 自願했다. 1978年 7月18日 卒業式에서 그는 다른 同僚 卒業生 2名과 함께 티베트로 가는 所懷를 發表했다. 自身이 티베트를 選擇한 理由에 關한 說明이었다.

    “中國은 여러 民族이 사는 國家입니다. 少數民族이 사는 地域은 全 國土의 60%에 達합니다. 제 故鄕도 少數民族 自治地域입니다. 萬若에 改革開放과 現代化가 迅速하게 이뤄지지 않았다면 나 亦是 現在 外部와 隔離된 山間奧地에서 밭을 갈고 農事를 짓고 있었을 것입니다. 한족의 現代畫는 中華民族의 現代化도 아니요, 中國의 現代化는 더더욱 아닙니다.”

    1983年 8月 티베트에 到着한 그는 공청團 시짱自治區委員會 組織部 幹部를 始作으로 시짱靑年報와 시짱호텔 勤務를 거쳐 시짱自治區의 地方과 中央에서 無慮 19年을 勤務했다. 普通 中央의 要職으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오지 勤務 經歷을 利用하는 사람들과는 根本的으로 달랐다. 19年間 티베트의 7個 支給(地級)市 가운데 6個를 現場 視察했고, 티베트의 75個 現·市 가운데 50個를 누비고 다녔다.

    海拔高度 3500~5000m에 이르는 시짱自治區 가운데서도 가장 오지는 바로 中國에서 唯一하게 自動車道路가 없는 모퉈(墨脫) 縣이다. 하지만 그는 한番 갔다 오는 데만 15日이 걸리는 이곳을 끝내 直接 訪問해 現地人들의 生活을 直接 살펴봤다. 사람들은 그를 ‘完全한 티베트人’이라고 불렀다. 血統만 漢族이지 티베트語에 能通하고 티베트 춤을 잘 추며 稱커(靑·#53886;)主로 불리는 티베트 술도 잘 마셨기 때문이다.

    이처럼 奧地에서 처박혀 살던 그는 2006年 末 공청團 中央서기처 第1書記로 拔擢되면서 中央政界로 進出했다. 이러한 超高速 昇進의 背景에는 후진타오 國家主席의 後援이 있었다. 後 主席과 그의 因緣은 後 主席이 1988年 시짱自治區 書記로 옮기면서부터다. 後 主席은 當時 시짱自治區 공청團 副書記이던 그를 눈여겨봤고 沈着하고 총명하면서도 일處理 能力이 뛰어난 그를 점찍어뒀다.

    1992年 10月 시짱自治區 書記를 그만두고 中央政治局 常務委員으로 올라간 後 主席은 直接 電話를 걸어 시짱自治區의 공청團 書記에 후춘화를 앉힐 것을 付託할 程度로 神經을 썼다. 후춘화는 그해 12月 공청團 시짱自治區 書記로 拔擢됐다. 最近의 超高速 昇進도 모두 後 主席과의 因緣 德分이다.

    그는 6世代로 分類되지만 事實 5世代로 分類되는 리커창 中央政治局 常務委員이나 리위안差誤(李源潮) 政治局 委員 兼 中央組織部 部長과 보시라이(薄熙來) 政治局 委員 兼 충칭(重慶)市 書記와 大學 卒業 및 社會 入門은 별다른 差異가 없다. 리위안差誤와 보시라이 委員은 各各 77學番이고 리커창 常務委員 亦是 78學番으로 79學番인 그와 1, 2年 差異다. 이는 文化大革命 期間 大學入試가 廢止됐다가 77年부터 復活했기 때문이다.

    그의 어릴 때 집안 事情은 韓國의 李明博 大統領과 비슷하고 社會에 入門한 뒤 經歷은 후진타오 主席과 매우 恰似하다. 山間 奧地인 티베트와 공청團에서 오래 지낸 勤務 經歷이나 性格도 비슷하다. 後 成長은 “後 主席과 함께 勤務한 31個月 동안 총명하고 能力 있는 일處理 솜씨에 매우 깊은 印象을 받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후진타오의 焚身’ ‘리틀 후진타오’로 불리는 그가 2022年 6世代 指導部가 出帆할 때 어떤 자리에 오를지 注目된다.

    ▼ 쑨·정·차·이

    옥수수 密植栽培의 代가

    2022년 시진핑·리커창 이어 정상 노릴 6세대 삼두마차
    2010年 1月 中國 지린省 黨 西紀 兼 지린省 人民代表大會 常務委員會 主任에 選出된 쑨正差異 또한 2022年 以後 中國을 이끌어갈 제6세대 先頭走者로 손꼽히지만, 行政經驗이 짧아서인지 그에 對한 紹介 資料는 찾기 힘들다. 甚至於 中國 官營 ‘신화왕(新華網)’에서조차 그의 經歷은 明確하게 나와 있지 않다.

    다만 中國에서 ‘쑨 博士’ 하면 如前히 ‘옥수수 密植栽培의 代價’로 通한다. 1980年 라移讓(萊陽)農學院에서 大學을 마친 그는 1984年 곧바로 베이징市 農林科學院에 碩士 硏究生으로 들어갔고, 이 곳에서 中國 옥수수 硏究의 巨頭(巨頭)인 千궈핑(陳國平) 敎授를 師事했다. 千 敎授는 1980年부터 1996年까지 베이징市 옥수수 顧問團 團長으로 일하면서 베이징시의 무(畝·藥 1마지기) 黨 옥수수 收穫量을 1979年 229㎏에서 1996年 481.6㎏으로 끌어올렸다. 쑨 部長은 이곳에서 密生(密生) 옥수수의 生長 過程을 集中 硏究했다. 똑같은 面積에 많은 옥수수를 심으면서도 한 그루當 收穫量이 줄어들지 않도록 硏究한 것이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은 산둥(山東)省 룽靑(榮成)市 後産(虎山)진 于룽주이(五龍嘴)寸이다. 산둥省에서도 韓國에 가장 가까운 地域이다. 그가 어렸을 적 이 地域의 生活水準은 다른 어느 곳 못지않게 劣惡했다. 學校 寄宿舍에서 宿食하면서 中高校를 다닌 쑨 部長은 週末에 집에 갈 때도 學校에서 모아둔 食糧을 짊어지고 갔다 남보다 일찍 돌아오곤 했다. 집에 가면 自己가 먹을 樣式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試驗成績은 恒常 上位였다. 初等學校를 다닐 때는 줄곧 學級의 班長을 했다. 當時 體育先生이었던 長壽第(張樹皆) 敎師는 2007年 初 ‘웨이하이(威海)一步’와의 인터뷰에서 “工夫도 잘했고 어렸지만 어른스러웠으며 親舊들과 한 番도 싸워본 적이 없는 어린이였다”고 그를 回顧했다.

    그는 現在 于룽주이村에서 有史 以來 가장 出世한 人物이다. 1980年 高校 卒業 땐 그를 비롯한 겨우 3, 4名만이 大學에 入學했다. 碩士 硏究生 試驗을 앞두고 그는 一週日 열흘씩 쉰다는 춘제(春節)에도 집에 가지 않고 學校 圖書館에서 工夫했다. 工夫하는 사람이 혼자여서 너무 추워 外套를 입고도 毯요로 몸을 감고 工夫했다고 그의 大學同僚들은 傳했다.

    그가 옥수수 代價로 클 수 있었던 데는 大學時節 指導敎授의 嚴한 叱責이 큰 밑거름이 됐다. 라移讓農學院 在學 時節 밀 品種實驗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實驗 밭 어디에서 잃어버렸는지 몰라도 粉筆이 없어진 것. 이미 實驗 밭은 밀을 심느라 모두 갈아엎은 狀態였다. 普通 敎授 같으면 大部分 그냥 넘어가는 게 例事였다.

    2022년 시진핑·리커창 이어 정상 노릴 6세대 삼두마차
    하지만 그의 指導敎授는 달랐다. 粉筆이 밀의 發芽와 生長에 影響을 줄 수 있고 그러면 實驗에 影響을 미칠 수 있으니 粉筆을 찾아 꺼내라고 指示한 것이다. 그는 하루 終日 津땀을 흘리며 實驗 밭 흙을 뒤집은 끝에 結局 粉筆을 찾아냈다. 그가 學術的으로 옥수수 栽培에 造詣가 깊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天賦的인 才能과 努力 以外에도 指導敎授의 이런 嚴格한 科學的 學問 硏究의 態度가 그에게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서 이뤄진 것이라는 게 그와 10年間 함께 工夫하고 硏究한 同僚 敎授의 傳言이다.

    最近 發刊된 于룽주이村의 寸志(村誌)는 “寶劍의 칼날은 스스로 날카롭게 硏磨할 때 만들어지는 것이고 梅花의 香氣는 추운 겨울을 견뎌야만 하는 것”이라며 “쑨 部長의 成功은 至難한 땀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 村의 어린이와 學生들에게 龜鑑이 되고 있다”고 적었다.

    성실하고도 緻密하며 質樸한 그의 硏究 態度는 곧바로 大學 指導敎授들의 信任을 받았다. 베이징市 農林科學院에서 博士課程을 마치고 1年間 英國 留學을 갖다오자마자 農林科學院 作物소 硏究所 副主任에 그를 앉혔다. 이어 1993年엔 서른의 나이로 農林科學院 토비(土肥)硏究所 所長으로 昇進했고 얼마 안 돼 科學院 副院長을 거쳐 黨위 副書記에 任命됐다.

    옥수수 硏究에만 沒頭하던 그에게 1997年 새로운 길이 나타났다. 34歲이던 그는 農林科學院을 떠나 베이징市 순이(順義)縣의 不現場으로 자리를 옮겼다. 以後 代理現場, 現場, 球場을 거쳐 2002年 5月 順이구 黨 書記 資格으로 베이징 市 委員會 常務委員에 當選됐다.

    이렇듯 쑨 書記는 中國에서 몇 안 되는 學者 出身 高位 官僚다. 周圍 사람들은 그가 우레같이 猛烈하고 바람처럼 迅速하게 일處理를 한다고 評價한다. 하지만 縣과 區의 經驗만 가진 官吏로서 2006年 12月 中國 農業의 最高 責任者인 農業部長에 起用된 것에 對해 憂慮의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후진타오 國家 主席과 원자바오 國務院 總理가 食糧 增産을 督勵하고 中國 農業을 한 段階 끌어올리기 위한 ‘果敢한 冒險’으로 받아들여졌다. 옥수수 增産 硏究에서 뛰어난 業績을 남긴 學者라는 點에서 食糧 增産을 劃期的으로 이룩할 수 있는 適任者라고 볼 수는 있지만, 行政을 맡아본 經驗이 只今까지 農業部長에 任命된 사람 가운데 가장 짧다는 點에서 冒險이었던 셈이다.

    쑨 書記는 農業部長에 就任하자마자 ▲食糧 生産 提高 ▲農民 輸入 增大 ▲農業 자주技術 革新 ▲農産品 安全 確保 ▲農業 서비스 强化 ▲農村 改革開放 深化 ▲動物 疾病 防疫 强化 ▲農民 實質 問題 解決 等 8代 目標를 提示하고 職員들을 督勵했다.

    그러나 現在 中國의 食糧 生産量 增加分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2005年엔 前年보다 1455萬t 늘었지만 2006年엔 1309萬t, 2007年엔 350萬t으로 增加分이 줄었다. 農業이 主力인 中國의 1次 産業의 年間 成長率 亦是 2~6%로 每年 10% 以上의 高速成長을 繼續하는 2, 3次 産業과 크게 差異가 있다. 하지만 3年間의 그의 農業部長은 成功的이었다는 評價가 적지 않다.

    行政 專門家로 10年間 外道하다 다시 自身의 專攻 分野로 돌아와 中國의 農業改革이라는 至難한 任務를 大科(大過) 없이 完遂하고 지린省의 最高 責任者로 자리를 옮긴 쑨 部長이 6世代 先頭走者 地位를 굳건히 해 11年 뒤에 最高指導部의 核心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지 注目된다.

    ▼ 저·右·窓

    節次 重視하는 6世代 先頭走者

    2022년 시진핑·리커창 이어 정상 노릴 6세대 삼두마차
    6世代 先頭 3人坊 가운데 마지막으로 紹介하는 저우창 湖南省 黨 西紀 兼 性 人民代表大會 常務委員會 主任은 2006年 9月 世間의 話題를 모으며 最年少 成長으로 拔擢된 人物이다. 當時 中國을 통틀어 1960年代 出生者 가운데 첫 成長이었다. 이어 2010年 4月엔 湖南省 黨 書記에, 5個月 뒤엔 黨 西紀 兼 靭帶 主任에 拔擢됐다.

    藷芋 書記는 후진타오 主席을 首長으로 하는 공청團 出身 가운데서도 核心 공청團맨이다. 공청團의 最高 首長인 中央서기처 第1書記로만 無慮 8年을 勤務했다. 공청團 中央서기처 서기까지 包含하면 無慮 11年에 이른다. 單 1年間 中央서기처 第1書記를 지낸 後 主席이나 리커창 常務委員의 5年보다도 在任期間이 길다.

    공청團 勤務時節 業績도 卓越하다. 그가 第1書記로 在職하는 동안 공청團은 ‘黨이 要求하면 공청團은 行動한다(黨有號召 團有行動)’라는 口號 아래 여러 가지 事業을 成功的으로 完遂했다. 中國 政府가 1999年부터 大大的으로 展開한 西部對開發을 支援하기 위한 ‘大學生 西部自願 프로그램’부터 창장(長江), 荒墟(黃河) 等 汚染이 深刻한 中國의 主要 江들을 살리는 ‘母親下(母親河) 保護 액션’, 그 外에도 박사복無斷, 靑年문명호, 靑年志願者 프로그램 等 國家를 위한 다양한 靑年活動을 展開했다. 또한 國際IT靑年포럼, 中國타이다(泰達)生物포럼, 海外學術人 歸國創業主(週) 等 많은 國際協力事業을 새로 만들었다.

    이 中에서도 代表的인 것은 공청團 傘下의 中國靑年旅行社를 中國 最大의 旅行社로 키워낸 것이다. 2006年 現在 이 會社의 總 資産은 33.3億위안(藥 4926億원)으로 웬만한 財閥會社와 맞먹는다. 2006年 上半期 營業收益 亦是 11.3億위안(藥 1672億원)에 純收入만도 3767萬위안에 達한다. 2006年 9月 最年少 成長으로 拔擢된 것 亦是 後 主席의 核心 人脈인 공청團 出身이라는 點도 作用했지만 이런 그의 卓越한 能力이 높이 評價됐기 때문이다.

    2022년 시진핑·리커창 이어 정상 노릴 6세대 삼두마차
    그는 湖南省長에 任命되자마자 後難 性 內 55個 行政 및 法 執行機關의 權力리스트를 一般에 公開했다. 또 各級 行政機關은 重要 事業이나 政策은 一般에 公開해 調査와 硏究, 專門家 포럼을 거치되 반드시 一般人의 參與 속에 決定하도록 指示했다. 이 같은 措置는 누가 行政의 責任者이고 權限을 가진 사람인지를 一般人이 알고 行政 權力을 監督할 수 있도록 함과 同時에, 政府의 行政效率을 提高하며 官吏들의 非理를 事前에 막고 모든 行政을 法 節次에 맞게 處理하기 위한 措置였다. ‘權力의 陽光(陽光) 運行’ 運動으로 불리는 이 措置를 法的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그는 2007年 4月 湖南省 行政節次條例를 改正했다. 住民의 行政 監督과 參與를 法으로 制度化한 것이다.

    이처럼 그가 透明하고도 法에 따른 節次를 重視하는 것은 그의 大學 專攻이나 司法府에서 勤務한 經歷과 無關하지 않다. 그는 高校를 卒業하고 1年間 故鄕에서 知識靑年으로 農事를 짓다 1978年 충칭에 있는 시난(西南)政法大에 入學했다. 大學에서 學士와 碩士까지 7年間 工夫한 그는 1985年 司法府에 背馳돼 辦公廳 副主任, 法制史(法制司) 社長 等 10年 남짓 司法府에서 勤務했다.

    學窓時節 藷芋窓은 典型的인 模範生이었다고 한다. 그의 高校時節 스승인 저宇成(周勝) 氏는 “나이는 어렸지만 學業成跡은 매우 뛰어났다”며 “特히 文學作品을 많이 읽어서 語文 實力이 出衆했다”고 回顧했다. 藷芋 成長의 어머니는 “名節이나 休日이 돼도 窓은 하루 終日 바깥에 나가지 않고 冊을 읽었다”며 “故鄕에서 知識靑年으로 農事일을 할 때도 恒常 머리맡엔 冊을 쌓아두고 읽곤 했다”고 回顧했다.

    그의 工夫 欲心은 남다르다. 그의 大學 同僚인 中國檢察出版社 위안치궈(袁其國) 社長은 “藷芋窓은 就寢을 위해 寄宿舍 불을 끈 뒤에도 懷中電燈을 켜고 혼자 工夫하곤 했다”며 “그래서 親舊들이 이를 빗대 ‘낭잉잉쉐(囊螢映雪·螢雪之功(螢雪之功)이라는 뜻)’라고 얘기하곤 했다”고 말했다.

    高校를 마치고 農村에서 일하다가 치른 大入試驗에 곧바로 合格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같은 習慣 때문이었다. 當時 시난政法大의 法學科는 300餘 名의 入學生을 選拔했는데 藷芋窓은 當時 17歲로 가장 어린 축에 屬했다. 文化大革命(1966~76) 期間 大學에 가지 못했던 靑年들이 同時에 몰리면서 滿 15, 16歲부터 33歲까지 多樣한 年齡層이 合格했던 것이다.

    “激情과 以上이 充滿한 時代였다. 모두 國家와 民族의 將來에 對한 希望으로 부풀었고 社會에 對한 强烈한 責任感을 느꼈다. 社會 밑바닥에서 일해본 經驗이 있는 사람들이어서 絶對 苦生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藷芋 成長이 지난해 3月 中國의 한 言論 媒體와 한 인터뷰에서 大學時節을 回顧하며 남긴 말이다. 그가 大學 碩士課程을 卒業할 때 指導敎授였던 眞핑(金平) 敎授는 그에게 期待를 表示하며 “中國은 大國으로 많은 政治家가 必要하지만 絶對로 政客이 돼서는 안 된다”고 當付했다고 한다.

    湖南省에 가자마자 그는 1年 만에 물고기가 살 수 없는 둥팅(洞庭)號의 5給水 水質을 3級數로 크게 改善했다. 湖南省 經濟가 破綻난다는 憂慮에도 不拘하고 廢水를 흘려보내는 236個의 製紙工場을 門 닫게 하고 234個 工場의 操業을 中斷시킨 結果였다.

    1995年 공청團 中央서기처 書記로 拔擢된 뒤 이러한 政治的 業績을 背景으로 乘勝長驅해온 그가 2022年엔 最高指導部의 核心指導者로 우뚝 설 수 있을지 世人의 눈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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