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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羅道 村사나이의 野望과 沒落 박노식|新東亞

全羅道 村사나이의 野望과 沒落 박노식

거칠고 뜨거웠던 映畫 天才, 스크린에 ‘韓國 社內’를 남기다

  • 오승욱│映畫監督 dookb@naver.com

    入力 2011-04-21 15: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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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는 뜨거웠다. 술 한 盞 들어가면 先輩도, 公權力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 嚴酷하던 軍事政權 時節, 툭하면 警察을 때려눕히는 俳優는 決斷코
    • 박노식 한 名뿐이었다. 隨時로 監獄을 드나들다 그 體驗을 바탕 삼아
    • 映畫 ‘執行猶豫’를 演出한 怪짜. 그가 모든 熱情을 쏟아 부은
    • 對象은 映畫였다. 땀 냄새 풍기는 뒷모습만으로도 1960年代
    • 가난한 사내들의 絶望을 表現할 줄 알았던 俳優.
    • 水準 높은 B級映畫를 演出했던 天才 監督. 폼 나게 살고 싶었으나
    • 悲劇的으로 沒落한 ‘용팔이’ 박노식을 追憶한다.
    전라도 촌사나이의 야망과 몰락 박노식

    映畫에서나 삶에서나 ‘마초’ 그 自體였던 俳優 박노식.

    1968年 4月22日 午前 1時. 大邱의 金壺觀光호텔 나이트클럽에서 暴行事件이 일어났다. 當時 新聞記事에 따르면 映畫俳優 박노식이 김진규·장동휘와 술을 마시고 춤을 추다가 넘어져 호텔 깡牌가 自身을 때렸다고 生트집을 잡고, 호텔 器物을 破壞했다. 또 박노식의 暴行 事件이 터졌다. 박노식은 以前에도 크고 작은 여러 暴行 事件의 主人公이었던 것. 事件 發生 後 時間이 지나 事件의 全貌가 좀 더 仔細하고 正確하게 드러났다. 박노식과 호텔 깡牌, 두 사람 사이에 是非가 붙어 싸움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술을 마시던 一行, 卽 장동휘와 박노식 間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이 일로 박노식은 刑事 立件됐는데, 暴行 事件으로 立件되기로 따지자면 映畫界에서 그를 따를 者가 없었다.

    박노식이 쓴 自敍傳을 引用해 그날 그 事件의 全貌를 再構成해보자. 유현목 監督이 映畫 ‘카인의 後裔’(1968) 撮影 場所로 選擇한 大邱의 어느 곳. 撮影을 마치고 意氣投合한 김진규와 장동휘 그리고 박노식은 나이트클럽에서 술을 마시며 懷抱를 푼다. 오랜만에 自身의 에너지를 마음껏 發散할 수 있는 配役을 맡은 박노식은 意欲이 넘쳐흘러 술자리를 싸늘하게 식혀버릴 말을 내뱉고 만다. “두 兄님들 날 싸가지 없는 놈이라 辱하지 말고 내 말 좀 들어보시오 잉” 하고는 그 부리부리한 눈을 들어 김진규와 장동휘를 노려본다. “이番 大鐘賞은 나가 꼭 타야 쓰것는디, 兄님들이 讓步하쇼. 그리고 兄님들이 암만 몸부림쳐도 말입니다잉. 이 映畫에서 役割로 보나 比重으로 보나, 나의 演技를 따를 수 있겠습니까잉. 아예 斷念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天下에 이런 唐突한 말이 어디 있는가? 점잔 빼는 先輩 김진규는 泰然하게 ‘알았다’며 받아넘겼지만, 天下의 장동휘가 어떤 사람인가? 이 따위로 막가는 後輩를 그냥 보고 있을 사람이 아니다. 박노식의 性格이 불같다면 장동휘는 活火山이다. 장동휘 曰. “그래 너 혼자 다 해먹어라, 이 싸가지 없는 새끼야!!!” “타라면 누가 못 탈까봐 그러십니까? 그런데 이렇게 큰 놈의 새끼 보셨습니까?” 박노식 已往 저지른 것 끝까지 간다며 대드는 瞬間. 장동휘는 自己 앞에 놓여 있던 술甁을 들어 박노식의 머리에 내리친다. 鮮血이 흐르고, 술집은 阿修羅場이 된다. 異常은 박노식 自敍傳 ‘뻥까오리 伯爵’에서 引用한 것이다.

    “박노식, 絶對的으로!”

    事實 박노식은 喪服이 別로 없었다. 恒常 김진규, 최무룡, 신성일 같은 美男 俳優들이 登場하는 映畫에서 惡役 조연만을 맡거나, (그런 美男 俳優들이 出演하지 않은 映畫라서) 自身이 單獨 主演을 한 作品은 各種 映畫祭의 外面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番 出演作 ‘카인의 後裔’는 황순원 原作·유현목 監督의 野心作으로 박노식이 보기에 매우 훌륭한 作品이었고, 게다가 自身이 맡은 役이 비록 助演이긴 하지만 대단히 에너지가 넘쳐서 俳優로서 渾身을 바쳐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박노식의 演技에 對한 欲心과 自負心이 드러나는 事件이자, 그의 成功과 沒落을 豫想할 수 있는 事件이다.



    내가 初等學生이던 1970年代 初, 그가 監督 主演한 ‘박노식 票’ 映畫가 劇場街를 휩쓸었다. 不幸하게도 나는 當時 왕우와 李小龍, 스티브 매퀸, 알랭 들롱에 빠져 박노식 映畫를 좀 幼稚하게 생각하는 건방진 꼬마였기에 그의 映畫와 劇場에서 만나는 幸運을 누리지 못했다. 三寸을 따라가서 韓國 最初의 立體映畫 ‘天下壯士 임꺽정’을 보긴 했지만 박노식은 全혀 記憶에 없고, 오직 나를 向해 날아오는 화살과 槍날에 깜짝 놀랐던 日課 종이 선글라스 眼鏡이 몹시 거추장스러웠던 것만 기억날 뿐이다. 그가 콧鬚髥을 기르고 찰스 브론슨을 흉내 내며 아들과 함께 牛乳 廣告에 나와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하던 畵面 속 모습이 只今 내 記憶에 唯一하게 남아 있다.

    내 幼年期 박노식은 學校와 집을 오가는 골목길에 붙어 있던, 1970年代 當時에는 유별났던 映畫 宣傳 포스터 속 모습으로 남아 있다. 憤怒에 찬 그의 얼굴과 日本 海賊들이 무시무시한 鬼面(鬼面)을 쓰고 있는 모습이 印象的이었던 ‘日本海賊’ 포스터. 검은 가죽 옷 지퍼를 半쯤 내려 가슴골과 하얀 속살이 드러난 女子의 上半身이 强烈했던 ‘쟉크를 채워라’, 쇠사슬에 묶여 있는 박노식의 悽絶한 모습이 담긴 포스터를 보고 집에 돌아와 엄마에게 執行猶豫가 뭐냐고 물어보게 만들었던 ‘執行猶豫’, 박노식의 부릅뜬 황소 눈이 사나웠던 ‘나’라는 外資 題目 映畫 等等.

    그리고 時間이 흘러 高等學生이 된 나는 TV 韓國映畫特選 時間에 술甁에 맞아 머리가 깨지면서까지 延期에 欲心을 냈던 바로 그 映畫 ‘카인의 後裔’를 보게 됐다. 그때까지 나는 박노식을 철모르는 어린애들이나 좋아하는 깡牌 映畫俳優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까치집같이 엉망인 白髮의 머슴 박노식에게는 賤하게 一生을 살아온 사람 特有의 悔恨의 응어리가 있었다. 그는 光復 直後 北韓에서 土地 改革이 始作되자 ‘내 世上이 됐다’며 狂氣에 車서 날뛰며 수많은 人命을 殺傷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딸은 갑자기 變해 날뛰는 아버지에게서 돌아서버렸다. 딸이 變한 것이 김진규 때문이라 생각하고 그를 憎惡하고 嫉妬하는 박노식은 自身에게 親切했던 옛 上典의 아들이자 딸이 사랑하는 男子이며 無産者 階級의 敵이라 憎惡해야 하는 김진규와 땀과 흙 범벅이 되어 싸움을 한다. 늙었지만 힘이 壯士인 그는 어느 瞬間 김진규를 죽이지 못하고, 罪意識 때문일까? 自身이 가진 모든 힘을 한瞬間에 消盡해버린다.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의 壯大하면서도 悲劇的 라스트가 聯想되는 場面이다. 이 映畫로 나는 박노식의 演技에 感歎했다. 歲月이 흘러 또 30代가 된 1990年代의 어느 날, 케이블 TV에서 ‘돌아온 八道 사나이’(便거영 監督, 1969)를 보게 됐고, 나는 大韓民國 男子 俳優 中 絶對的으로 누구를 좋아하냐는 質問에 한瞬間의 망설임도 없이 “박노식, 絶對的으로!”라고 말하게 됐다.

    쓸쓸한 그의 뒷모습

    용팔이 박노식은 주먹질로 살았던 過去를 뉘우치고, 이제는 주먹으로 사는 깡牌가 아니라 꽃처럼 아름다운 아내 사미자를 위해 날품팔이라도 땀 흘려 일하는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러나 남을 威脅해서 먹고살았던 過去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法. 예전에 그가 몸담았던 깡牌 組織은 그의 주먹을 利用하려 용팔이 周邊을 맴돌며 誘惑한다. 용팔이 박노식은 땀 흘려 일해서 번 돈으로 꽁치 두어 마리를 사서 煉炭불에 구워 아내와 함께 먹는 삶이 얼마나 幸福한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런 용팔이를 깡牌 組織은 容納지 않는다. 용팔이를 다시 주먹의 世界로 돌아오게 하려 奸惡한 凶計를 꾸미는데 용팔이의 아내 사미자를 劫奪하고 그의 家庭을 박살내는 것이다. 오늘도 용팔이는 東大門市場에서 지게를 지고 날품팔이를 한다. 오늘따라 番番이 손님을 놓친 용팔이. 공치나보다 하고 풀이 죽어 있는데 검은 洋服을 입은 사내가 그를 불러 沙果 두 箱子를 配達시킨다. 平素 받는 돈보다 두어 배의 웃돈을 쥐여주며. 沙果 두 箱子를 받을 사람은 東大門市場에서 저기 光化門을 지나 아현동 고개를 넘어 신촌로타리의 서강대학교에 勤務하는 女敎授님이다. 지게에 沙果 두 箱子를 짊어진 용팔이는 東大門에서부터 걷기 始作한다. 只今처럼 宅配가 있는 것도 아니요, 퀵 서비스가 있는 것도 아니던 時代였다. 오로지 튼튼한 두 다리로 걸어서 配達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고 솔찬이 힘든데 말이지…” 하며 아현동 고개를 오르는 용팔이. 그 時間. 깡牌들은 용팔이의 아내 사미자를 拉致해 골房에 가두고 强姦하려 한다. 용팔이는 그 事實을 모르고 목에 두른 手巾으로 땀을 닦으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 西江大에 到着하는데, 이미 해는 지고 沙果 두 箱子를 받아야 할 女敎授님은 退勤을 하셨단다. “아이고 이거 어쩌면 좋을까잉 그러면 女敎授님 宅이 어디가요잉.” 水位 曰. “女敎授님 집은 저기 峨嵯山 너머 광나루를 건너 千戶洞….” 용팔이는 沙果 두 箱子를 고쳐 메고 신촌에서 광나루 건너에 있는 천호동을 向해 걸음을 옮기고, 그의 땀에 젖은 어깨 위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는다. 過去의 주먹을 숨기고, 家庭을 위해 굽신거리며 卑屈한 성실함으로 살아야 하는 사내. 나는 映畫 속 박노식의 모습에서 1960年代를 살았던 아버지들의 모습을 보았다.

    社內됨의 悲哀

    전라도 촌사나이의 야망과 몰락 박노식

    暴行 事件에 連累돼 南大門警察署에서 調査 받고 있는 젊은 날의 박노식.

    멋진 俳優는 걷는 演技가 훌륭하다. 주구장창 걷기만 하는 映畫 ‘사무라이’에서 알랭 들롱은 孤獨한 늑대의 憂愁에 찬 걸음을 보여주었다. ‘荒野의 7人’에서 율 브리너는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上體를 뒤로 젖히고 느릿느릿 걸으면서 그가 얼마나 自信感에 차 있는 男子인지를 보여주었고, 같은 映畫에서 제임스 코번은 목숨을 건 칼 던지기 내기에서 斷乎하고 冷酷한 걸음걸이로 虛勢에 가득 찬 相對方을 壓倒해버린다. ‘돌아온 八道 사나이’에서 박노식은 아현동 고개를 沙果 두 箱子를 짊어지고 걸으면서 그 時代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참고 또 참으며 힘겨운 勞動을 했던 大韓民國 사내들의 悲哀를 表現했다. 나는 이런 演技를 다시 해낸 韓國 映畫 속의 俳優를 아직까지 보지 못 했다.

    눈 내리는 남포동 밤거리에 검은 옷을 입은 中年의 사내가 들어선다. 사내는 悔恨에 찬 눈으로 거리를 바라본다. 얼마 만에 돌아온 距離인가? 한쪽 팔이 없어 바람에 휘날리는 소매가 사내의 어두운 過去를 말해준다. ‘怨恨의 距離에 눈이 나린다’(임권택 監督, 1971).

    1960年代 末, 70年代 初에 만들어진 大韓民國 깡牌映畫는 거의 모두 비슷한 이야기였다. 映畫가 始作되면 主人公은 아름다운 女子를 만나 주먹 世界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려고 한다. 그러나 그가 過去에 저지른 어두운 罪들은 代價를 치르라며 至毒하게 쫓아온다. 當時 만들어진 깡牌 映畫들 中 完成度가 가장 높은 것으로 評價되며 登場人物들의 사랑과 憎惡의 感情이 活火山처럼 暴發하는 흔치 않은 例가 바로 ‘怨恨의 距離에 눈이 나린다’이다.

    박노식은 문희를 사랑한다. 그래서 둘은 이제 結婚하려고 한다. 그런데 問題가 있다. 박노식이 戰爭 直後 깡筒 하나를 들고 鳴動거리를 轉轉하며 살아가다 굶주림에 지쳐 죽어갈 때 그를 거두어준 아버지 같은 存在인 깡牌 頭目 장동휘가 殺害된 것이다. 또 하나의 問題. 장동휘의 아름다운 딸 최지희는 오빠 박노식을 사랑한다. 박노식과 함께 거리에서 거두어져 박노식을 좋아하지만 그를 넘어서고 싶어하는 동생 김희라는 최지희를 사랑한다. 엇갈린 사랑의 感情들이 부글부글 鎔巖처럼 터지기 直前, 눈이 하얗게 쌓인 숲 속. 최지희와 박노식이 마주 보고 서 있다. 최지희는 自身의 사랑이 깨져버리자 自暴自棄해 自身을 짝사랑하는 김희라에게 몸을 맡겨버렸다. 두 사람 사이로 겨울바람이 분다. 失戀당한 女子의 憤怒. 박노식은 최지희의 感情을 알지만 어쩔 道理가 없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문희가 있기 때문이다. 최지희는 그저 귀엽고 所重한 女同生일 뿐. 그보다 더 重要한 것은 아버지 장동휘를 죽인 者가 바로 동생 김희라人 것을 알고 난 後의 憤怒와 復讐의 感情이다. 박노식이 힘들게 입을 열어 최지희가 마음을 잡고 사랑하려는 者가 바로 아버지를 殺害한 者임을 밝히는 瞬間, 최지희는 몸을 비틀며 悲鳴을 지를 듯 크게 입을 벌린다. 그러나 그女의 목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 너무나도 괴롭고 悲痛한 感情이 周邊의 모든 소리를 지워버린다. 默音. 沈痛한 박노식의 옷자락이 겨울바람에 펄럭이지만 亦是 소리가 없다. 그리고 갑자기 카메라가 멀리 뒤로 빠지고, 눈에 젖은 시커먼 裸木들과 눈, 그리고 그 속에 선, 感情이 激昂되었지만 表情을 알 수 없는 두 사람의 작은 모습을 비춘다. 매서운 겨울바람 소리가 그들의 暴發한 感情처럼 터져 나오고 최지희가 비틀거리며 박노식에게서 달아나는 발소리, 흐느낌 소리가 洪水처럼 눈 덮인 숲 속에 쏟아진다. 1970年代 韓國 액션 映畫 中 主人公들의 極度로 激昂된 感情을 뛰어나게 演出하고 演技한 最高의 名場面이다.

    怪짜 마초

    者, 이쯤에서 俳優 박노식이 아닌 映畫 監督 박노식에 對해 이야기해보자. 1960年代 末. 夜間 撮影을 마치고 청진동 解酲국집을 向하던 박노식의 지프가 警察 檢問所의 바리케이드에 부딪혀 뒤집혔다. 車에서 기어 나온 박노식은 그를 잡으러 달려온 警察을 뿌리친다. 警察이 넘어져 아스팔트 위로 나뒹굴며 헬멧이 벗겨진다. 警察 暴行. 거듭된 暴行 事件으로 矯導所에 收監된 박노식은 監房의 窓살 아래서 수많은 생각을 한다.

    “이게 뭔가? 나는 왜 이렇게 事故를 저지르는가?”

    靑瓦臺 水位를 毆打한 일로 구속당한 것을 包含해 公權力을 가진 者를 暴行한 두 番째 事件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박노식. 너 人間 辭表를 써라!”라는 외침이 끝없이 메아리쳤다. “나는 暴行 俳優인가? 여기서 죽으면 나는 무엇으로 남게 되는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 엉뚱한 곳으로 번졌다.

    “나도 映畫를 만들고 싶다. 映畫監督을 하고 싶다.”

    이렇게 해서 박노식 監督·主演·製作·脚本의 映畫 ‘人間辭表를 써라’(1971)가 誕生한다. 이 世上의 過剩이란 過剩은 全部 들어 있는 怪物 같은 映畫의 誕生이었다. 아마도 그의 꿈은 할리우드 액션映畫와 같은 멋진 액션映畫를 만드는 것이었을 것이다. 當時 韓國 映畫에서는 볼 수 없던 危險한 스턴트와 숨 막히는 自動車 追擊 場面, 殘酷한 暴力이 登場하는 이 映畫는 그야말로 乖常하기 이를 데 없다. 自身의 두 눈을 뽑아 멀리 他鄕에서 죽은 사랑하는 동생의 아내에게 주려고 하고, 그 눈은 끝내 主人을 못 찾고 마는 奇怪한 身體 毁損과 라스트의 壯大한 悲劇이 이 첫 番째 映畫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粗惡하기 짝이 없지만 大韓民國의 觀客은 이런 映畫를 처음 만났다. 興行에 靑信號가 켜지고 加速度가 붙었다. 그는 연이어 ‘나’(1971) ‘쟉크를 채워라’(1972) ‘지프’(1972)를 演出했다. 그리고 또다시 矯導所에 들어가게 된다. 이番에는 罪도 없이 社會 各層의 代表的인 暴力輩를 檢擧하라는 指示에 依해 示範 케이스로 걸린 것이다. 2年 前 술을 마시고 是非가 붙어 술집 웨이터를 暴行한 事件이 빌미가 됐다.

    矯導所에 收監된 박노식은 30日 拘留를 살고 懲役 8月에 執行猶豫 1年을 받고 釋放됐다. 西大門矯導所 門을 나서며 하도 執行猶豫를 많이 當해 이番에는 執行猶豫란 題目으로 映畫를 만들고 싶어졌다. 그래서 만든 映畫가 바로 ‘執行猶豫’(1973)다. 以後 그는 또다시 큰 暴行 事件을 저지른다. 별다른 理由도 없이 檢察에 連行된 박노식은 漫醉해 大檢察廳 懸板을 떼어내 兩손에 들고 檢察廳의 琉璃窓이란 琉璃窓은 모두 깨버리는 亂動을 부린 것이다. 이제 내리막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時期에 그는 監督 人生 中 가장 뛰어난 두 篇의 映畫를 만든다. ‘왜?’(1974)와 ‘執行猶豫’다. 社會的으로는 暴力 俳優란 惡名을 얻고 要注意 人物로 찍혀버렸지만, 서너 篇의 映畫를 演出하며 經驗이 쌓인 그는 特有의 欲心과 에너지로 漸漸 完成度 높은 映畫를 만들어낸 것이다. 말하자면 大韓民國의 奇怪한 魅力의 B級 映畫가 박노식에 依해 誕生한 것이다.

    눈부신 ‘B級’ 映畫

    전라도 촌사나이의 야망과 몰락 박노식

    박노식의 出演作 포스터. 그는 1960~70年代 수많은 映畫에 出演한 當代의 스타였다.

    여기서 말하는 B級 映畫란, 低豫算으로 密輸業者들처럼 돈에 눈이 멀어 대충 뚝딱뚝딱 剽竊과 막치기로 만드는 映畫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B級 映畫는 低豫算과 酷毒한 檢閱 속에서 自意識이 넘치고, 表現하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은 監督이 不均質하지만, 壓倒的인 에너지로 觀客을 說得하는 그런 映畫다. ‘왜?’와 ‘執行猶豫’ 以前의 박노식 監督 映畫들은 그의 에너지에 비해 너무나 粗惡해서 보기 힘들 地境이었다. 欲心이 많은 監督이니 수많은 할리우드 映畫를 보며 工夫했을 테고, 설익은 工夫가 오히려 그의 映畫를 粗惡하게 만들었을 게다. 그런데 ‘왜?’에서는 그런 錯愕함이 많이 사라졌다.

    映畫가 始作되면 ‘人間辭表를 써라’부터 始作된 박노식 特有의 惡趣味人 울긋불긋 怪常한 衣裳을 입은 박노식이 官府(關釜)連絡船 床에 登場한다. 恒常 달고 다니는 그의 永遠한 部下 용칠이 장혁과 함께 甲板 위에서 누군가를 본 용팔이 박노식은 悲鳴을 지르며 도망친다. 무엇 때문에 天下의 용팔이가 저렇게 허겁지겁 도망칠까? 용팔이는 남의 客室을 無斷 侵入하고, 여기저기를 들쑤셔 한바탕 騷亂을 벌이고 어느 門 앞에 이르러 安堵의 한숨을 내쉰다. 化粧室! 하하하. 이게 뭐냐? 용팔이는 무서운 敵을 만나 도망친 게 아니라 化粧室이 急했던 것이다. 荒唐한 개그 演出이 失笑를 자아내지만 火가 날 地境은 아니다. 말하자면 이 映畫 以前의 박노식 映畫들은 이 程度의 場面들조차 앞뒤가 안 맞고, 말이 안 됐다. 日本에서 旅券을 잃어버린 그들은 警視廳에 잡혀간다. 가방에 旅券이 있을지 모른다며 가방을 연 瞬間. 가방이 暴發하고 시커멓게 재를 뒤집어쓴 警察들과 용팔이, 용칠이. ‘왜? 어떻게 이런 일이?’ 하고 觀客들이 생각하려는데 용팔이와 용칠이가 觀客을 등지고 돌아선다. 그러면 그들의 너덜너덜해진 등판이 觀客을 向하는데 용팔이의 等에는 ‘왜’라는 글字가. 용칠이의 等에는 커다란 ‘?’가 새겨지며 타이틀이 始作된다. “뭐야 이거?”

    아. 화내지 마시라. 이 映畫에는 美女들이 덤블링을 하며 발바닥으로 背信者의 뺨따귀를 때리며 膺懲하는 場面과 그네 斷頭臺(guillotine)까지 登場하는 興味津津한 라스트가 準備돼 있다. 타이틀이 사라지면 日本의 커다란 居室에 온몸에 文身을 한 男女 야쿠자들이 堵列해 있고 그 가운데 야쿠자 頭目이 있는데 박노식이다. 아! 1人2役. 게다가 日本 야쿠자 頭目 박노식은 自身의 첫 映畫 ‘人間辭表를 써라’의 主人公과 똑같은 헤어스타일과 콧鬚髥을 하고 있다. ‘八道 사나이’에서 만들어진 캐릭터 용팔이와 自身이 첫 映畫에서 만들고 以後 繼續 自身의 映畫에 등장시키는 非情한 하드보일드 캐릭터와 對決을 시키려는 것이다.

    마지막에 용팔이 박노식과 야쿠자 頭目 박노식이 대면하는 場面이 매우 興味롭다. 얼굴이 똑같은 두 사람이 서로 마주친다. 잠깐의 놀람에 이어 爆笑가 터진다. 몸이 꽁꽁 묶여 危機에 處한 용팔이와 용칠이. 그리고 陰謀의 犧牲者인 女同生. 용팔이와 얼굴이 똑같이 생긴 야쿠자 頭目과 그의 部下들 모두가 拍掌大笑를 터뜨린다. 박노식의 分裂된 自意識을 유머러스하게 表現한 場面이다.

    “나한테 한放 맞아주라”

    全南 順天에서 태어나 天方地軸, 부러울 것이 없이 幼年期와 靑少年期를 보냈고, 꿈에 그리던 俳優가 된 뒤 10餘 年 만에 大韓民國 最高의 액션 스타이자 高所得者가 된 박노식. 그가 가진 두 모습. 무서울 것 없이 檢察이고, 깡牌高 마음에 안 들면 주먹부터 올라가는 거친 마초. 同時에 誠實한 卑屈함으로 大韓民國을 社는 1960年代 가난한 사내들의 모습을 가장 잘 表現한 男子 俳優. 이 相反된 두 가지의 모습이 ‘왜?’라는 映畫 속에서 용팔이와 야쿠자 頭目으로 分裂돼 表現된 것이다.

    아마 意識的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相反된 모습을 가진 者는 恒常 悲劇的인 沒落의 主人公이 된다. 以後 박노식은 暴力 俳優로 緊急措置에 걸려들어 俳優 停職(停職) 處分을 當하고 美國으로 쫓겨난다. 1980年이 되어 서울로 돌아온 용팔이는 더 以上 韓國 映畫 市場에서 再起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만다. 中風으로 擧動이 不便했던 박노식의 末年. 공교롭게도 美國에서 스티브 매퀸이 生을 접은 마지막 居處였던 病院에 入院해 으스스 떨면서도 再起의 꿈을 잃지 않았던 그는 “이제 일어나서 다음 映畫 만들어야지” 하며 自身을 찾아온 知人들에게 다짐했지만 끝내 다음 映畫를 만들지 못하고 만다.

    전라도 촌사나이의 야망과 몰락 박노식
    오승욱

    1963年 서울生

    서울대 조소학 學事

    映畫 ‘킬리만자로’ 脚本 및 演出

    1999年 第36回 大鐘賞 映畫祭 脚本賞


    박노식은 팔팔했던 時節 自身의 映畫에 出演시키고 싶은 俳優나 일하고 싶은 스태프를 만나면 같이 일하자는 뜻으로 주먹을 들어 보이며 “나한테 한放 맞아주라”라고 했었단다. 아마도 그는 마지막 瞬間까지 주먹을 쥐고 “나한테 한放 맞아주라”를 외치고 싶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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