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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사는 삶이 조화로운 것 같아요”|신동아

“느리게 사는 삶이 조화로운 것 같아요”

天然染色하는 작은 巨人 이성래의 寶城 樵隱當

  • 김서령| 칼럼니스트 psyche325@hanmail.net

    入力 2011-04-21 13:4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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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全南 寶城에서 罰 치고 天然染色하며 瓊玉膏 만드는
    • 이성래氏 夫婦는 創造的으로 살아간다.
    • 남이 버린 것도 고쳐서 金도끼로 만드는 재주를 가졌다.
    • 마음이 가난하고, 智慧를 배우는 것을 所重히 한다.
    • 아름다움을, 自然을, 傳統을, 純粹를 사랑한다.
    “느리게 사는 삶이 조화로운 것 같아요”

    박정신·이성래氏(오른쪽) 夫婦.

    땅바닥에 제비꽃이 피고 空中엔 梅花가 피었다. 그 위쪽 하늘엔 새가 날며 ‘그지그지’ 하고 운다. 사람들의 同意를 求하는 듯한 새소리다. 全南 寶城郡 회천면 樵隱當(草隱堂)에 사는 사람들은 그 새를 ‘그지그지새’라고 이름 지었다. 쓰나미가 덮쳐 한 마을 全體를 쓸고 가는 場面을 무슨 災難映畫를 보듯 非現實的으로 지켜본 地圖 한 달이 지났다. 地球의 놀라운 異變 위로도 如前히 봄은 오고 꽃은 피고 새는 운다. 아니 災難이 지나갔기에 꽃과 새와 풀이 더욱 貴하고 새롭게 느껴지는 봄이다.

    樵隱當 舍廊채에서 하루를 묵는 豪奢를 누렸다. 樵隱當 舍廊채는 다섯 坪이 안 되는 아주 자그만 집이다. 집이라기엔 너무 작은 별채지만 이토록 호사스러운 空間을 나는 以前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 房바닥은 쪽物 들인 韓山모시를 발랐고 그 위에 세 番 ‘콩댐’을 하고 다시 ‘들깻댐’을 했다는데 빛깔은 깊은 바닷속처럼 검푸르다. 손으로 만지면 모시올의 質感은 느껴지되 까칠한 게 아니라 들깨기름이 먹어 매끄럽고 溫和하다. 電氣 照明은 아예 없앴고, 代身 촛불을 켠다. 沙器호롱을 넣은 옛날 나무초롱도 한 귀퉁이에 걸렸다.

    세 坪 程度의 房과 한 坪이 채 안 되는 마루와 곁에 달아낸 자그만 化粧室과 退마루로 構成된 집은 이집 主人 이성래(42)氏가 손수 지었다. 남의 힘 들이지 않고 제 손으로 제 집을 짓는 人間은 굳세고 眞摯하다. 나는 제 손으로 집을 지은 이를 여럿 만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握手하는 손이 억세고 눈빛이 沈着했다. 서투른 一般化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집을 짓는다는 것은 눈앞에 當面한, 매우 具體的이지만 哲學的인 命題다. 크기와 形態와 材料와 쓰임과 費用을 두루 苦悶해야 하고 그러자면 제 삶을 찬찬히 둘러볼 수밖에 없다. 話頭를 들고 面壁하는 것만큼의 集中과 天下를 注油하는 것만큼의 너른 눈을 必要로 한다.

    손수 다섯 채 집 짓다

    産業化 以後 사람들은 大槪 제 物件을 스스로 만들지 않는다. 專門家에게 맡기고 費用을 支拂한다. 제가 쓰는 그릇, 제가 使用하는 延長, 제가 입는 옷, 제가 덮는 이불을 만들기도 쉽지가 않은데 하물며 집이랴. 이토록 모든 것이 分業化된 時代에, 精誠스러운 準備와 勞動과 知識이 必要한 집짓는 일에 非專門家가 뛰어들기는 버怯高度 非效率的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해내겠다는 生意를 낸 사람들은 如干 아닌 뚝심과 配布를 가진 이들일 것이다. 아무튼 樵隱當 主人 이성래氏는 2004年 寶城 山골짝의 茶밭 끝자락으로 들어온 以後 해마다 한 채씩 總 다섯 채의 집을 지었다.

    “짐승도 새도 제 새끼 낳을 굴을 제 힘으로 짓지 않습니까. 人間만이 집을 못 지을 理가 없지요.”(이씨)

    옳은 소리다. 하긴 都市人이라고 제 집을 짓지 않는 건 아니다. 집지을 돈을 버느라 뼈가 휠 뿐! 그러나 이성래氏의 집짓기는 勞動이되 創造였다. 그래서 즐거웠고 벅찼다고 한다. 살림집 20坪, 作業室 17坪, 舍廊채 5坪, 쪽 發效室 兼 倉庫 하나, 亭子 하나. 집 周邊을 돌아가는 4個의 아름다운 굴뚝과 돌담을 혼자 힘으로 짓고 쌓았다.

    “혼자라니 語不成說입니다. 혼자 한 게 아니지요. 처음엔 妊娠한 아내가 도와줬고 나중엔 걸음마를 始作한 딸이 도왔어요. 여기저기 얻어들은 말들과 이제껏 살면서 봐왔던 모든 아름다운 物件과 읽었던 冊들과 只今껏 만났던 여러 스승이 함께 저를 도운 것입니다. 그 힘을 모아 지은 것이지 어찌 혼자 힘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어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집지을 材料는 거의 우리 洞네 사람과 親戚들이 거저 준 거예요. 이 집 짓는 데 總 여덟 채의 집이 들어갔어요. 쓰고 남은 천을 모아 쪽 褓자기를 만들 듯 헌 집에서 나온 材料들을 모아 ‘再活用’韓 집이에요. 그러니 只今은 여기 없는 故鄕사람들이 모두 함께 樵隱黨을 지은 겁니다.”

    세상에, 이렇게 흐뭇한 計算法도 있구나. 鄭 必要할 때는 木手를 몇 番 샀고 모자라는 나무와 흙을 조금 샀지만 돈 들여 求한 材料는 그리 많지 않다.

    “本채 天障을 만드는 데 새 나무가 좀 들어갔고 壁을 바르는 데 石灰가 좀 들어갔고 뒷門으로 쓴 두꺼운 느티나무 널門을 100萬원이나 주고 샀지요.”

    代身 굵직한 기둥과 甓돌과 門짝과 기와는 大槪 헌 집 허무는 데서 주워오거나 얻어오거나 품삯으로 벌어온 것들이다.

    “이 반질반질한 기둥은 外三寸네 집을 허물면서 나왔고 이 오래된 흙甓돌은 이웃집 무너진 터에서 주워왔고 저 기와는 다산초당을 헐 때 거기서 일하고 품값으로 얻어온 겁니다. 이 마룻장은 우리 洞네 第一 富者집 마루인데 집을 새로 지으면서 버리는 걸 어머니가 얻어오셨고 저 굴뚝에 얹은 기와는 光州文化센터 허물 때 가져온 겁니다.”

    甕器 속에서 아름다움을 배우다

    남이 버리는 걸 주워 쓰자면 取捨選擇할 줄 아는 眼目이 있어야 한다. 낡은 것이라고 다 좋은 것도 아니고 버리는 것이라고 無條件 새로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이성래氏는 낡은 材料들로 드물게 정갈하고 安穩한 空間을 만들어냈다. 버려진 材料로 氣品 있는 집을 지을 수 있는 힘과 기운은 어디에서 왔을까. 그런 힘이 이성래氏에게 깃든 來歷이 궁금했다.

    그는 보성읍 쾌상리 出身으로 群山大學校에서 陶藝디자인을 專攻했다. 물감 만지는 것보다 흙 만지는 것이 좋아서 擇한 陶瓷器였다. 卒業하고 그가 찾은 곳은 當時 ‘뿌리 깊은 나무’에서 運營하던 工藝業體인 징광甕器였다.

    “이 地域에 甕器가마가 많이 있어요. 微力甕器는 사람이 너무 많길래 징광甕器로 갔지요. 거기 샘이 깊은 물 한창기 社長님의 동생인 한상훈 先生이 계신다는 것도 모르고 찾아갔어요. 前 스승 福이 아주 많은 사람입니다. 두 兄弟분은 韓國의 傳統 文化를 위해서라면 돈을 落葉처럼 태울 準備가 되신 분들이었지요. 눈썰미가 빼어나고 熱情과 性質도 대단하셨어요.”

    징광甕器는 光明丹 바르지 않은 傳統 甕器를 만들면서, 緋緞과 무명을 野生의 풀과 뿌리로 染色하는 自然染色을 하고, 野生茶를 뜯어 全 過程을 사람 손으로 作業하는 옛날式 덖음차人 ‘징광잎茶’도 만드는 곳이었다. 징광에서 그가 배운 것은 아름다움의 本質이었다. 甕器뿐 아니라 染色과 茶 만드는 技術도 같이 배웠다.

    “한상훈 先生님이 첫마디에 ‘네가 只今까지 배운 知識, 技術, 習慣을 다 버릴 覺悟가 돼 있느냐’고 물으시데요. 그러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다 버릴 自信이 있다고 했지요.”

    거기서 그는 3年間 호된 徒弟敎育을 받는다. 한상훈 先生은 정작 具體的인 技術을 說明하지는 않으면서 “이 베에 푸른빛을 들여봐라. 이 풀을 씹어봐라, 이 흙을 치대봐라” 하는 式으로 染色과 甕器製造法을 스스로 攄得하게 만들었다.

    “韓 先生님은 甕器의 基本形態가 뚝배기라고 하셨습니다. 뚝배기 模樣에서 茶盞도 나오고 醬독도 나온다고요. 뚝배기의 線을 하루 100番씩 그렸어요. 그런 後 甕器의 形態를 훤하게 꿰게 되니까 물레 앞에 앉히시데요. 머리보다 몸으로 形態를 익히게 하셨던 거지요. 한 番 몸 틀이 잡히면 잊어버리는 것이 없다고요. 1997年 서울에서 징광甕器廛을 할 때 구워낸 甕器의 善은 다 제가 잡아놓은 거였어요.”

    壁(碧) 빛을 찾아서

    “느리게 사는 삶이 조화로운 것 같아요”

    이성래氏의 書齋.

    染色 또한 그렇게 몸을 굴려 배웠다. 미친 듯이 山을 헤매며 풀과 나무껍질과 뿌리를 캤고 그걸 끓이고 젓고 빨기를 反復했다. 그 過程에서 그는 회초리로 종아리를 맞은 적도 있다. 20餘 名의 젊은이가 울퉁불퉁하지 않고 그걸 달게 견뎠다.

    “쪽染色이 第一 어렵지요. 봄부터 쪽을 길러서 가을에 물을 들이는 거니까 1年을 꼬박 기다리는 作業이거든요. 先生님은 쪽을 알면 다른 染色은 절로 알게 된다고 하셨지요. 쪽은 흰빛의 천이 玉빛이 되다가 靑色이 되다가 藍빛이 되어가는 變化의 段階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染色입니다. 藍빛에서 한 段階 더 나간 푸른빛을 우리는 壁(碧)이라 불렀어요. 흰빛에서 壁빛까지 過程을 들여다보면 고된 染色過程의 힘겨움을 다 잊을 만큼 恍惚했어요.”

    그러니까 超銀黨 舍廊채의 장판빛, 검은 듯 가라앉은 푸른빛이 바로 쪽에서 얻은 碧色이란 얘기다. “紅花의 붉은빛에도 治者의 노란빛에도 다 그런 變化의 段階가 있겠지요. 그러나 그게 너무 한瞬間에 지나가버려 쪽처럼 뚜렷하지가 않아요. 先生님은 비뚤어진 線을 아름다움으로 쳐줬어요. 그게 가장 큰 배움이었던 것 같아요. 반듯하게 만들려고 하는 緊張이 아름다운 것이지 반듯하게 만들어진 結果物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라고 하셨지요.”

    그런 言質은 그가 아름다움을 깨닫는 契機가 됐다. 손으로 매만진 精誠 어린 勞動이 美(美)의 最上을 이룬다는 것도 깨달았다.

    “道具를 써서 반듯하게 만드는 짓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다, 라고 하셨죠.”

    陶瓷器든, 집이든, 家口든 너무 매끈한 面과 반듯한 線은 보는 사람을 不便하게 한다. 자연스럽지 않은 까닭이다. 자로 그은 듯 반듯한 것은 自然의 線이 아니다. 自然은 適當히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하다. 自然을 닮은 線과 面이 우리를 푸근하게 만든다.

    한창기 先生에 이어 한상훈 先生이 갑자기 世上을 떠났다. 어쩔 수 없이 그도 징광을 떠났다. 징광에 늘 찾아와 요가를 가르치던 분 中에 윤두병 先生이 계셨다.

    “모리居士라고 부르던 분이셨어요. 奇人이셨죠. 도솔社에서 僧侶生活을 하다 還俗하셨고 獨裁에 抗拒하다 獄苦도 치르셨다고 들었어요. 太極拳과 수박度를 하셨어요. 그분을 따라 慶南 居昌으로 갔지요.”

    스승을 찾아 떠나는 巡禮였다. 배움이 목말랐다. 아름다움을 위해 살고 싶은데 가진 것이 없었고 方法도 몰랐다. 눈과 몸이 半쯤만 만들어진 狀態여서 목마름이 더욱 컸다. 그의 눈에 모리巨事는 浩然之氣를 가진 어른이었다. 別名으로 쓰는 모리(某里)는 ‘어떤 마을’이란 意味로 하늘 아래 모든 곳을 내 집으로 여긴다는 意味였다. 그는 居昌에서 志向이 비슷한 이들과 함께 共同體 生活을 했다. 거기서 李氏가 새로 만난 스승이 김광현 牧師였다.

    “그분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牧會를 하는 牧師가 아니라 흙을 파서 農事를 짓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主張하는 ‘땅牧師’이셨어요. 그분은 나라는 小宇宙를 自然이라는 大宇宙와 하나가 되게 풀어놓으라고 하셨지요. 自然에 合一하는 精神을 牧師님께 배웠어요. 自然 속의 나무와 풀이 우리 몸에 어떻게 藥이 되는지도 배우고요. 거기서 다석 유영모 先生의 ‘예수와 基督敎’, 咸錫憲 先生의 ‘씨알의 소리’, 장일순 主敎의 ‘나락 한 알 속의 宇宙’, 권정생의 ‘우리들의 하나님’, 스콧 니어링의 ‘조화로운 삶’, 헬렌 니어링의 ‘사랑 그리고 마무리’를 읽었습니다. 참 宗敎가 뭔지를 알았어요. 저도 그렇게 살고 싶었습니다.”

    이성래氏가 말하는 冊은 그냥 讀書用 冊이 아닌 것 같다. 머리맡에 놓고 冊張이 반질반질 닳게 매만지면서 精神을 吸入하는 樣式이랄까. 冊 題目을 하나씩 말하는 데서 그런 沒頭와 愛情이 고스란히 傳達된다. 只今도 그 冊은 樵隱當 茶房에 貴하게 꽂혀있다. ‘뿌리 깊은 나무’가 出版했던 民衆自敍傳도 거기 꽂힌 冊 目錄 中 하나다.

    아내 박정신氏도 김광현 牧師 宅을 드나들던 이였다. 大學 卒業 後 釜山에서 職場生活을 하다가 두 살 위 오빠가 事故로 世上을 뜨는 바람에 人生의 座標를 잃은 채 기우뚱대던 處女였다. 그는 아픈 어머니를 모시고 구들房 治療를 위해 居昌에 머물던 中이었다.

    “金 牧師님 宅에 갔더니 連奏 아빠(이성래氏)가 茶를 내오더라고요. 車 한 盞에 至極 精誠을 들이는 모습이 都大體 이 世上 사람 같지가 않았어요. 조심스럽게 茶를 따르는 모습이 그날 제 눈에 하늘에서 내려온 神仙 같아 보였습니다.”

    박정신氏는 오빠를 잃고 彷徨하다 도법 스님의 實相寺 歸農學校에 들어갔다. 거기서 農村에 希望이 있다는 것을 發見한다. 自然 속에서 農事짓고 살면 몸과 마음에 스민 絶望과 憂鬱이 풀릴 것 같았다. 서른이 넘은 同甲내기 處女總角은 서로에게 眞摯하게 이끌린다. 農村에서 살고 싶은 박정신에게 農村에서 살 準備가 完了된 이성래가 ‘神仙처럼’ 때맞춰 登場한 것이다.

    서로 尊敬하는 夫婦

    “느리게 사는 삶이 조화로운 것 같아요”

    딸 連奏量(아래)은 自然의 變化와 소리에 유난히 敏感한 아이다.

    婚姻한 지 10年, 아직도 아내 박정신에게 男便 이성래는 이 世上 뭇 男子들과는 썩 다른 사람이다. 或是 男便을 尊敬하는 거냐고 묻자 그이는 곰곰이 생각더니 “그렇다”고 肯定한다. 男便을 尊敬한다는 아내를 만난 것 自體가 자그마한 奇跡 같다. 젊은 女子 大部分이 消費에 들떠 있고 그러느라 제 삶에 滿足하기 어려운데 山골짝에 묻혀 사는 都市女子가 婚姻 10年 以後에도 如前히 男便을 尊敬한다고 말하다니!

    “저 사람은 외骨髓라고 할 만하게 純粹해요. 옳다 싶으면 옆도 뒤도 안돌아보고 거기에 沒入하지요. 日常 하나하나에 깊은 精誠을 들여요. 허투루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요. 新婚 初에 다툴 일이 있었는데 제가 마음 傷해하니까 저 사람이 나무 막대기를 두 個 만들어 와서 房 안으로 들이밀어줘요. 모리居士님으로부터 막대기로 발바닥 치기를 한창 배우고 있을 때였는데 하나로는 발바닥을 치고 다른 하나로는 自己를 쳐서 分을 풀라고 하더군요. 그 막대기를 보고 있자니 우습기도 하면서 마음이 절로 풀리더군요.”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을 본 김광현 牧師는 둘을 불러 앉혔다. 그리고 ‘아버지가 될 몸’과 ‘어머니가 될 몸’에 對해서 가르쳤다. 金 牧師는 두 사람에게 婚姻해서 아이를 가지려면 적어도 1年 前부터 몸을 準備해야 한다고 强調했다.

    “아빠가 먼저 體力을 기르고 술 담배를 끊고 淸淨한 飮食을 먹으며 冥想과 丹田呼吸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엄마도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自己 몸을 健康하고 便安한 狀態로 維持할 것을 勸했습니다. 태어나서 3年보다 태중 1年이 더 重要하고, 그보다는 또 아이가 생기는 날 父母의 몸과 마음 狀態가 더욱 重要하다고 하셨어요. 술에 醉하거나 氣分이 傷하거나 感情이 均衡을 잃어서도 안 되며, 監査도 自覺도 없이 아이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하셨지요. 우리 둘 다 牧師님의 말씀에 首肯했고 徹底히 지켰어요.”(박씨)

    그래서 태어난 아이가 演奏다. 演奏는 自然의 變化와 소리에 유난히 敏感한 아이다. 밝고 健康해 父母에게 웃음과 生命力을 안겨준다. 집 앞 대나무 가지에 앉아 우는 새를 ‘그지그지새’라고 명명한 것도 演奏다.

    “演奏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배에 대고 ‘옴~’소리를 냈어요. 아이가 배 속에서 安定感을 느끼라고 내는 소리였지만 그러고 있으면 우리 둘이 더 便安하고 充滿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演奏家 태어날 날을 기다렸어요.”(박씨)

    樵隱當 세 食口는 날 感激하게 했다. 우리 나이로 올해 마흔셋이 된 夫婦와 7살짜리 幼稚園生 連奏, 그들은 日常 속에서 아름다움을 實踐할 줄 아는 이들이다. 演奏는 납작한 나무판에 紅花를 우린 물감으로 ‘사랑해요’라고 써서 食卓 위에 올리고 엄마는 梅花와 제비꽃과 진달래를 따서 나물무침과 마늘 짱아찌 위에 꽃繡를 놓고 아빠는 아궁이 불에 三발이를 올려 食後에 마실 木瓜茶를 뭉근하게 끓인다. 다들 그런 일들이 몸에 배어 全혀 騷亂하지가 않다.

    只今 그들의 生業은 天然染色·瓊玉膏·野生茶 만들기와 土種벌치기다. 이들 夫婦는 곧 樵隱黨을 좋아하는 이들을 위해 舍廊채를 開放할 計劃도 세우고 있다. 土種벌은 個體數가 자꾸 줄어들어 種을 지킨다는 義務感에서라도 더 熱心히 키운다고 했다.

    長斫도 보기 좋게 쌓아야

    “꿀이 生産되는 만큼만 瓊玉膏를 만들고 있어요. 瓊玉膏 만드는 法은 伽倻山 백학동의 노곡 임기종 先生에게 배웠어요. 저는 가는 곳마다 眞짜 스승을 만나는 큰 福을 타고 났습니다. 노곡 先生은 김광현 牧師님이 紹介하셨지요. 일꾼이 必要하다 해서 2000年부터 겨울 석 달間은 伽倻山 中턱에 머물렀지요. 지게로 나무 해서 불 때는 게 일이었어요. 한番 불을 때면 3日 連續해서 때고 하루를 식혔다가 다시 하루 불을 때서 總 5日이 걸리는 作業입니다. 東醫寶鑑에 나오는 法制를 忠實히 따르는 것인데 마음을 정성스럽게 가지지 않으면 藥이 안돼요. 山中턱이니 電氣도 없고 나무해서 불 때는 데 그 時間이 그렇게 평화스럽고 좋았습니다.”(이씨)

    瓊玉膏는 人蔘과 地黃과 白茯苓을 孤兒 土種꿀에 섞어 만드는 貴한 藥劑이고 이제 그게 超銀黨의 生業이 되었다. 瓊玉膏 만드는 作業室조차 어찌나 정성스럽고 정갈한지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지런해진다. 樵隱黨은 흐트러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甚至於 長斫까지 井然하게 쌓여 있다. 뽕나무는 뽕나무대로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돌담을 쌓듯 알뜰하게! 樵隱黨에 들른 이들은 집 앞에 쌓인 長斫을 보고 一旦 感歎한다.

    -곧 허물어서 불을 때고 말 텐데 왜 저렇게 長斫을 알뜰하게 쌓지요?

    “그래야 쌓는 내가 氣分이 좋잖아요. 지나다니면서 보는 눈도 즐겁고!”

    그는 日常에 精誠을 들이는 게 몸에 배었다. 아무리 些少한 일도 些少하게 取扱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몸을 움직이는 것을 겁내지 않고 勞動 自體를 즐긴다. 德分에 삶의 마디마디에 큰 스승이 턱턱 나타나는 것이리라.

    노곡 先生을 통해 만난 스승은 金薰이라는 디자이너였다. 金訓은 光州에서 天然纖維로 옷을 만들던, 感覺이 매우 빼어난 디자이너였다. 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은 登攀 案內人과 雇用主 사이였지만, 곧 先後輩 사이로 發展한다. 居昌에 있으면서 그가 生業으로 擇한 일이 登攀 案內人이었다. 히말라야가 아니라 智異山 縱走에도 짐을 지고 올라갈 案內人을 찾는 이들이 있다. 矮小해 보이는 體格의 그가 登攀 案內人이라고? 30㎏이 넘는 背囊과 카메라 가방을 메고 그는 智異山을 벌처럼 가볍게 날아다녔다.

    “體力이란 눈에 보이는 筋肉이 아니에요. 自然 속에서 만들어진 몸과 헬스클럽에서 만든 筋肉은 힘쓰는 게 다르다고요. 野生動物이 겉보기에 筋肉이 發達했나요, 어디? 筋肉이 안 보여도 自然에 길든 몸은 必要할 때 절로 대단한 힘을 發揮하거든요.”

    “느리게 사는 삶이 조화로운 것 같아요”

    1 이성래氏 집의 樵隱當 扁額. 2 정갈한 食卓. 3 再活用品으로 만든 굴뚝. 4 野生茶.

    버려진 땅을 얻다

    故鄕 寶城으로 돌아오고 싶어하는 그를 金氏가 積極 支援한다. 땅을 찾고 집을 짓는 것을 始終 곁에서 거들어줬다.

    “집지을 때 金薰 先生은 머리고 演奏아빠는 손발이었어요. 마루板을 어떻게 깔면 좋을지 窓과 門을 어떤 位置에 달면 좋을지 참 많은 아이디어를 주셨지요.”(박씨)

    李氏는 남이 全혀 關心을 갖지 않던 땅을 마음에 들어 했다.

    “제가 워낙 가진 것이 없으니까 이 땅이 눈에 들어왔을 겁니다. 元來 溪谷을 따라 난 階段式 논이 있었는데 묵혀놓아서 대숲이 됐더군요. 널찍한 개울 건너 있으니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거지요.”

    1000坪을 2000萬원 주고 산 뒤 대숲을 整理하니 東쪽으로는 너비 4m의 數量 豐富한 개울이 흐르고 南쪽으로는 1.5m 程度로 四철 돌돌 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맑은 溪谷을 면한 땅이 나왔다. 自然이 이들 夫婦를 위해 일부러 감춰놓은 듯한 아름다운 땅이었다. 대나무는 밭을 이뤘고 松嶽과 자귀나무와 山벚나무와 梅花와 梧桐과 때죽나무가 개울가에 여러 그루 자라고 있었다.

    “때죽나무 香氣가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꽃은 종처럼 아래를 向해서 피는데 떨어질 때는 꽃송이가 위로 올라오지요. 5月이 되면 땅바닥에 온통 때죽나무 꽃이 하얗게 덮인답니다. 꽃 模樣이 망가지지 않고 떨어져서 冬柏처럼 바닥에 깔린 꽃을 보는 것도 長官이랍니다.”

    夫婦가 입을 모아 때죽나무 꽃을 讚美하는 소리 사이로 꿀벌이 잉잉대는 소리가 들린다. 그 背景으로 梅花가 화르륵 떨어질 때 나는 잠깐 여기가 天國인가 錯覺한다.

    손가락을 잃다

    그러나 사람 사는 世上에 天國 같은 時間만 있으랴. 그럴 理 없다. 3年 前 이성래 夫婦는 호된 몸살을 치렀다. 長興이 한放 特區로 指定되고 寶城에 瓊玉膏 硏究所가 들어섰는데, 傳統 技術을 가진 이성래氏가 거기로 가게 됐다.

    “大量으로 生産하니 방앗間 같은 粉碎機械를 썼어요. 瓊玉膏는 精誠이 먼저라 티끌 하나도 들어가서는 안 되거든요. 그런데 그냥 놔둬도 되었을 텐데 雜티 하나를 꺼내려고 손을 넣었던 게 頉이었어요.”

    感情 없이 돌아가는 機械에 感覺 빼어난 손가락을 잃는다. 瞬息間에! 그것도 오른손가락을 세 個씩이나! 그 무엇보다 제 몸을 믿고 살아온 삶이었다. 손가락을 잃으니 그는 예전의 몸 틀을 維持할 수 없었다. 그는 憂鬱에 시달려 한 2年 사람 만나는 것도 極口 避했다.

    “저 사람이 비로소 일을 쉬더군요. 느긋하게 아무 일도 안하니 저는 되레 좋을 적도 있었지만요.”(박씨)

    “이른 봄날이었어요. 날마다 사람이 아무도 안 오는 뒷山 得音程으로 올라가 멍하니 물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게 日課였거든요. 개울의 징검다리를 지나는데 뭔가 하얗고 자그만 것이 물에 닿을락 말락 흔들리는 게 보입디다. 늘 훌쩍 건너뛰는 징검다리인데 그날은 그것 때문에 쭈그리고 앉아봤어요. 그건 냉이꽃이었어요. 눈에 보이지도 않을 작은 꽃을 매달고 살려고 발버둥치는 냉이꽃! 전 그 자리에 퍽 쓰러졌습니다. 냉이꽃度 이렇게 살려고 애쓰는데 人間인 내가? 고작 손가락 셋을 잃었다고 絶望을 해? 그날부터 다시 몸을 쓰기 始作했습니다. 이제 別 不便 없을 程度가 됐어요, 하하.”(이씨)

    아직도 그는 모르는 이에게 오른손을 내밀어 握手를 請하기는 躊躇하지만 다른 部分은 거의 克服했다.

    “染色도, 경옥高度 내가 最高라고 自負心이 치솟을 때였거든요. 染色은 흐르는 개울물에 흔들어서 하는 게 最高인데 이 땅의 條件이 딱 그렇지 않습니까. 四철 數量이 豐富하고 물도 맑으니 여기서 染色하면 다른 곳과는 다르게 나오지요. 그건 謙遜하게 感謝할 일이지 으스대며 자랑할 일은 아니거든요. 그걸 자랑하고 싶어 근질거렸으니…. 내 손가락을 탁 ‘쳐분 것’ 같어요. ‘낮아져라. 重要한 것을 찾아라,’ 그런 뜻으로 누군가 나를 아끼려고 저 위에서 탁 쳐불었다니깐요.”

    이쯤 되면 樵隱當 主人은 이미 젊은 禪寺의 境地에 이른 것 같다. 세련된 眼目을 傳授한 金薰 先生도 幽明을 달리했다. 그 金薰 先生의 紹介로 다시 이어진 스승이 是認 황청원이었다. 樵隱當 堂號度 黃 詩人이 지었고 ‘樵隱黨은 참으로 貴한 풀들을 모아 健康한 삶을 꿈꿉니다’라는 解除와 글씨도 그가 썼다.

    “황청원 先生에게 배운 생각이 참 貴해요. 사람들은 이미 있는 祝福을 다 누리지도 못하면서 만날 神에게 祝福을 달라고 祈禱한다고 하셨거든요. 있는 것을 누리는 것만 해도 차고 넘치는데 말입니다. 내 눈으로 아름다운 世上을 볼 수 있고 내 발로 걸어 다닐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感謝한 일이라는 것을 黃 詩人에게서 새삼 배웠습니다.”

    젊은 船社

    이성래氏는 머리를 길러서 꽁지머리로 묶고 다닌다. 거기에도 나름대로 攄得한 哲學이 있다. “單純하게 생각을 한곳으로 모으려면 머리칼을 밀어버리는 게 나아요. 저도 한때 그렇게 밀고 다녔거든요. 確實히 사람이 심플해지더군요. 그런데 머리카락을 길게 기르면 感覺이 銳敏해지는 것이 느껴져요. 世上을 섬세하게 잘 느끼려고 머리칼을 길러서 묶는 거지 멋 부리려고 그런 것은 아닙니다.”

    樵隱當 舍廊채엔 花甁에 넘치도록 진달래를 꽂아뒀다. 좁은 마루 위에서 꽃들이 欲心 없이 환하다. 樵隱當 舍廊채는 이성래氏가 限껏 멋 부려 지은 집이다. 묵은 흙甓돌이 생기면 딱 그만큼만 壁을 쌓고, 길 잘든 마룻장이 생기면 딱 그만하게 마루를 짜 넣었다. 더 좋은 材料가 생기면 欲心이 생겨 壁을 허물기를 세 番이나 했다.

    “집짓는 데도 가장 어려운 것이 欲心을 줄이는 일이었어요. 크기나 構造를 欲心 부리는 게 아니라 낡은 材料의 멋을 마음껏 살리는 欲心이었죠. 이만하면 됐다, 여기서 멈추자, 고 自身을 說得하곤 했습니다. 근데 그게 참 어려웠어요.”

    “느리게 사는 삶이 조화로운 것 같아요”
    金瑞鈴

    1956年 慶北 安東 出生

    경북대 國文科 卒業

    大邱 中央中 國語敎師, 매일경제신문·샘이 깊은 물 客員記者

    月刊 ‘東西文學’ 新人賞

    著書 : ‘女子前’ ‘김서령의 家’ ‘삶은 천천히 태어난다’ 等


    돌아오는 길에 樵隱當 건너마을에서 寶城덤벙이를 만드는 송기진氏의 寶城요에 暫時 들렀다. 이성래氏의 大學 後輩라는 송기진氏의 말이 맘속에 자꾸 맴돌았다.

    “樵隱當 兄은 이제 스승이 不必要한 듯해요. 스스로 自己 스승이 된 것 같습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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