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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十字軍-基督敎 戰爭할 것인가, 交流할 것인가|신동아

이슬람-十字軍-基督敎 戰爭할 것인가, 交流할 것인가

  • 朴用鎭 서울大 HK敎授·西洋中世史 parktoan@snu.ac.kr

    入力 2011-04-20 1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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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月19日 聯合軍의 攻襲 直後 리비아 國營TV는 “十字軍 敵(crusader enemy) 戰鬪機들이 트리폴리의 民間 施設을 爆擊하고 있다”고 報道했다.
    • 十字軍이라는 낱말을 끄집어내 西方 基督敎 國家에 對한 反感을 刺戟한 것이다.
    • 都大體 十字軍이 뭐기에 이슬람-基督敎 世界에서 只今껏 膾炙되는 것일까.
    • 11世紀 末부터 200年間 文明의 交叉路에서 持續된 十字軍이 人類에게 남긴 것.
    이슬람-십자군-기독교 전쟁할 것인가, 교류할 것인가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最高指導者 支持者가 장난감 小銃을 든 아이를 목말 태운 채 리비아 國旗를 흔들고 있다. 카다피 支持勢力은 西方의 攻襲을 十字軍의 爆擊이라고 表現했다.

    最近 親舊와 말다툼을 하거나 夫婦싸움을 한 적이 있는가? 살다보면 他人과의 疏通에 問題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로 인한 葛藤도 避할 수 없다. 社會나 國家도 마찬가지여서 戰爭 消息이 끊이지 않고 들린다. 人類 歷史上 戰爭이 멈추었던 적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 只今도 地球上 어느 곳에선가는 서로 銃부리를 겨누고 있다.

    美國과 아프가니스탄, 美國과 이라크의 戰爭은 언뜻 基督敎 文明과 이슬람 文明의 衝突인 것처럼 보인다. 開戰 當時 美國 大統領이던 조지 W 부시는 十字軍이라는 用語를 使用했다. 이슬람圈의 오사마 빈 라덴도 이 낱말을 입에 올렸다. 요즈음 世界人의 注目을 받고 있는 리비아에서도 무아마르 카다피가 西方 世界의 干涉을 十字軍에 比喩하며 이슬람 情緖를 刺戟했다.

    基督敎 世界의 膨脹

    이러한 例에서 보듯 十字軍이란 말은 基督敎와 이슬람의 衝突을 象徵하는 用語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된 데에는 十字軍에 對한 좁은 視角이 한몫을 했다. 十字軍에 對해 이야기할 때 그 焦點이 戰爭으로서의 十字軍에 맞추어져서, 個別 戰鬪의 展開 樣相 및 戰略과 戰術, 그리고 狂信에 따른 殘酷 行爲에 關心이 集中되곤 한다. 또한 十字軍의 本流에서 벗어나 聖堂騎士團이나 聖杯(聖杯) 이야기 等에 關心이 쏠리는 傾向도 있다. 그러나 十字軍은 여러 가지 다른 側面을 가지고 있다.

    十字軍은 11世紀 末부터 始作돼 200年 동안 持續된 基督敎의 聖地 回復을 위한 戰爭을 指稱한다. 그러나 넓은 意味에서는 基督敎의 膨脹 政策 全體를 일컫는다. 10世紀부터 에스파냐에서 基督敎 勢力이 벌인 財政服運動(reconquista)이나 프로이센에서 獨逸人이 벌인 植民 活動을 十字軍으로 指稱하기도 한다. 8世紀 初 이슬람은 오늘날 스페인에 있던 서고트 王國을 征服했다. 이로써 이베리아 半島는 한동안 이슬람의 支配 아래에 놓였고, 이 地域을 基督敎化하려는 샤를마뉴 大帝의 試圖조차 이슬람에 依해 挫折됐다. 그러나 10世紀부터 이 地域의 基督敎徒들이 反擊에 나서 조금씩 領域을 넓혀나갔고, 마침내 1492年 이슬람 勢力을 이베리아 半島에서 몰아냈다. 이러한 財政服運動 亦是 基督敎와 이슬람의 鬪爭이라는 點에서 十字軍으로 看做된다. 甚至於 12~13世紀 南部 프랑스에 널리 퍼져 있던 基督敎의 異端 카타르(Cathares)派에 對해 敎皇과 프랑스 國王이 彈壓한 것 亦是 十字軍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카타르파는 肉身을 더러운 것으로 看做하고 精神만이 깨끗하다고 여겼으며, 肉身을 깨끗하게 淨化(cathare라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이 같은 二分法的인 생각은 正統 敎理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論難이 됐다. 이들은 旣存의 正統 敎會를 惡의 敎會로 規定했다. 敎皇의 彈壓 對象으로 指目될 條件을 카타르派가 두루 갖췄던 셈이다. 當時 프랑스 國王이던 필리프 2世는 自身의 政治的 影響力을 南部 프랑스로 擴大하기를 願했다. 南部 프랑스는 貴族마저 카타르파를 믿는 境遇가 많았다. 結局 같은 基督敎徒인 카타르派에 對한 十字軍은 敎皇과 프랑스 國王의 利害關係가 一致했기에 일어난 것이었다. 더욱이 이 十字軍의 鎭壓 方式은 殘酷하기 그지없었다.



    이슬람-십자군-기독교 전쟁할 것인가, 교류할 것인가

    이라크 戰爭을 두고도 十字軍이라는 表現이 나온다.

    이렇듯 十字軍은 10世紀부터 13世紀에 걸친 유럽의 膨脹運動을 통틀어 일컫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十字軍은 宗敎的인 性格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유럽의 社會的 힘이 外部로 膨脹하는 現象을 가리키는 것으로 看做해야 할 것이다. 예루살렘 聖地에 對한 十字軍은 그러한 膨脹을 象徵的으로 보여주는 事例다.

    十字軍의 原因은 1次的으로 이슬람 勢力의 膨脹에 두려움을 느낀 비잔티움 皇帝 알렉시오스 콤네노스(Alexios Comnenos)가 로마 敎皇에게 도움을 要請한 데에 있었다. 비잔티움 帝國은 만치케르트 戰鬪에서 셀주크 투르크에 敗北해 아시아에 있던 領土의 大部分을 잃었다. 困境에 處한 비잔티움 皇帝는 1094年 敎皇 우르바누스 2歲(Urbanus II)에게 투르크 族을 攻擊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을 要請했다.

    十字軍의 原因

    이슬람-십자군-기독교 전쟁할 것인가, 교류할 것인가
    事實 이러한 要請은 異例的인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왜냐면 오래前부터 로마 敎皇과 비잔티움 皇帝가 所願했기 때문이다. 過去 로마의 皇帝는 祭祀場이기도 했으므로 皇帝는 行政組織의 우두머리林과 同時에 宗敎組織의 우두머리였다. 宗敎組織만을 놓고 본다면 皇帝 바로 아래 5名의 總大主敎(總大主敎·Patriarch)가 있었으며, 後日 敎皇이라고 불리는 로마 總大主敎 亦是 그中 한 名이었다. 이러한 體系는 서로마 帝國이 滅亡한 다음에도 한동안 持續됐는데, 로마 總大主敎는 다른 總大主敎들과 마찬가지로 비잔티움 皇帝의 保護를 받았다. 따라서 서로마 敎會(로마 가톨릭 敎會)와 東로마 敎會(비잔티움 敎會)는 元來 單一한 敎會 組織에 屬했으며, 모두 비잔티움 皇帝의 指揮 아래 있었다. 그런데 726年 聖像(聖像)파괴령을 起點으로 두 敎會가 分裂하기 始作했다. 비잔티움 皇帝 레온 3歲(Leon III)는 모든 性狀을 偶像(偶像)으로 看做해 禁止했으나, 게르만족에게 持續的으로 布敎해야 하는 로마 敎皇은 聖像 維持를 主張했다. 結局 로마 가톨릭 敎會와 비잔티움 敎會는 서로 다른 길을 가기 始作했고, 1054年 로마 敎皇의 特使가 콘스탄티노플 總大主敎를 波紋함으로써 두 敎會는 完全히 訣別했다. 오늘날 西유럽의 로마 가톨릭과 東유럽의 正敎會는 이때부터 같은 基督敎이면서도 別個의 組織을 갖게 된 것이다.

    이처럼 分裂돼 있었으나 로마 敎皇도 비잔티움 皇帝도 基督敎라는 이름 아래 和解해야 할 必要를 느끼고 있는 가운데 비잔티움 皇帝가 援助를 要請한 것인데, 皇帝가 豫想했던 元祖는 大規模 十字軍 派兵이 아니라 帝國 軍隊를 補助할 小規模의 傭兵 記事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敎皇의 생각은 달랐다. 敎皇은 비잔티움 帝國에 對한 援助보다는 聖地 回復에 傍點을 찍었다.

    聖地 巡禮는 懺悔의 手段이었다. 中世에는 예전에 成人들이 머문 곳을 訪問하면 그 影響力의 一部가 巡禮者의 것이 된다거나, 性遺骨(聖遺骨)을 찾아가면 疾病 治癒와 같은 奇跡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또한 重罪를 저지른 者에게 敎會가 巡禮를 命令하는 境遇도 있었다. 이처럼 巡禮가 널리 퍼져 있던 中世 時代의 3代 巡禮地는 에스파냐 北部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 로마 그리고 예루살렘이었다. 巡禮地 中 하나인 예루살렘의 回復이야말로 基督敎人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義務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敎皇이 願한다고 해서 記事들이 順順히 十字軍에 나설 理는 萬無하다. 記事들은 記事들 나름대로 參戰 理由가 있었다. 西유럽은 게르만족의 侵入, 서로마 帝國의 滅亡, 그리고 바이킹의 侵入 等으로 混亂에 빠져 있다가 10世紀頃부터 安定되기 始作했다. 封建制가 成立돼 記事들 사이에서는 位階秩序가 생겼으나 이들의 暴力性은 사라지지 않았다. 敎會로서는 이들이 好戰性을 噴出할 出口를 마련해줄 必要가 있었다. 또한 이슬람을 征服함으로써 自身들의 土地를 獲得할 수 있다는 點이 騎士들에게 魅力으로 作用했다. 더욱이 聖地 回復과 聖地 巡禮라는 名分까지 더해졌으므로 十字軍이야말로 技士들에게 魅力的인 機會였던 것이다.

    그러나 좀 더 넓은 視角에서 바라본다면 앞서 言及했듯 十字軍은 西유럽 社會의 膨脹이 原因이었다고 할 수 있다. 西유럽이 安定되면서 人口가 增加하고 새로운 土地 開墾이 이뤄졌지만, 土地는 如前히 不足했고, 長子相續制가 施行돼 둘째 아들부터는 領地를 相續받을 機會가 없었다. 卽 人口 壓力이 높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狀況은 西유럽 밖으로의 人口 排出을 誘導했다. 따라서 十字軍의 發生 原因을 聖地 奪還이나 好戰性만으로는 說明할 수 없다. 유럽의 膨脹이라는 視角으로 十字軍을 들여다봐야 穩全하게 理解할 수 있는 것이다.

    十字軍의 經過

    十字軍은 11世紀 末부터 거의 200年 동안 持續됐는데, 大規模 軍事遠征이 여덟 次例 試圖됐고 小規模 遠征은 셀 수 없을 程度로 많으며, 14世紀에도 十字軍 遠征에 對한 熱望은 이어졌다. 第1次 十字軍은 1096年 始作됐는데, 1099年 예루살렘을 征服하는 데 成功했으며, 팔레스타인 地域에 4個의 十字軍 領地(領地)를 建設했다. 技士들은 聖堂騎士團, 病院騎士團 같은 組織을 構築해 예루살렘을 지키고 巡禮者를 保護했다. 이들 騎士團은 예루살렘이 이슬람에 陷落된 뒤 유럽으로 돌아와서도 社會에서 重要한 役割을 遂行했다. 特히 이들이 예수가 最後의 晩餐 때 使用했다고 하는 聖杯를 가져왔다거나, 예수의 葬禮를 지낼 때 몸을 감쌌다고 傳해지는 誠意(聖衣)를 가져왔다는 이야기는 유럽人의 想像力을 刺戟했다.

    以後 4個 十字軍 國家 中 하나이던 에데사 伯爵領이 이슬람 手中에 들어가자 제2차 十字軍이 結成됐다. 그리고 1187年 이슬람의 支配者 살라딘(Saladin)이 下틴(Hattin)의 戰鬪에서 勝利하고 예루살렘과 그 一帶를 征服하자 第3次 十字軍이 構築됐다. 그러나 두 次例 모두 聖地 回復에 成功하지는 못했다. 特히 第3次 十字軍은 프랑스 國王 필리프 2世와 英國 國王 리처드 1世가 힘을 모았으나, 두 軍隊 사이의 葛藤으로 인해 港口都市 아크레를 獲得하는 데 그쳤다. 이즈음 十字軍은 漸次 變質돼가고 있었다.

    第4次 十字軍은 가장 醜惡한 十字軍으로 記錄돼 있다. 일찍이 베네치아 商人들은 비잔티움 帝國의 貿易과 關聯해 特權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特權을 競爭 都市인 제노아와 피사에도 附與하자 베네치아 商人들은 十字軍에게 聖地로 가는 船舶을 提供해줄 테니 콘스탄티노플을 攻擊해달라고 要求했다. 1204年 十字軍은 基督敎 都市인 콘스탄티노플을 陷落·掠奪한 뒤, 그 一帶에 라틴 帝國을 세웠다. 聖地에는 가지도 않았으며 이슬람과의 戰鬪도 勿論 없었다. 以後에도 네 次例 더 十字軍이 結成됐으나 모두 失敗했다.

    十字軍의 結果

    十字軍은 元來 目標한 바를 成就하는 데 失敗했다. 애初 敎皇은 聖地 回復이라는 名分을 내세워 西유럽을 單一한 基督敎 世界로 만들고자 十字軍을 提唱했으나, 結果는 正反對로 나타났다. 敎皇의 權威가 失墜한 反面, 國王들의 權威는 伸張됐다. 國王들은 十字軍에 參加해서 戰死한 封建貴族의 領地를 沒收했고, 自身이 直接 參加한 十字軍의 記事 軍隊를 指揮했다. 勿論 十字軍이 王權 强化의 唯一한 原因은 아니다. 그러나 十字軍이 王權 强化에 도움을 준 것만은 否認할 수 없다. 이러한 權力關係의 變化는 敎會權力과 世俗權力의 對立에서 敎會權力이 漸次 衰退하고, 單一한 基督敎 世界라는 槪念이 退潮하는 代身 近代國家가 登場하리라는 것을 의미했다. 國王이 權力을 强化했을 뿐만 아니라 一種의 民族的 敵對感이 激化되기도 했다. 第2次 十字軍 때는 獨逸人과 프랑스人 사이에 憎惡感이 커졌으며, 第3次 十字軍 때에는 프랑스 國王 필리프 2世와 英國 國王 리처드 1歲 사이에 葛藤이 있었다. 結局 單一한 基督敎 世界를 建設하겠다는 바람은 分裂된 民族國家의 길로 들어서는 正反對의 結果를 낳았다.

    이렇듯 겉으로 드러난 直接的 結果만이 十字軍이 남긴 影響은 아닐 것이다. 基督敎徒에게 十字軍은 勝利의 表示로 認識됐다. 돌이켜보면 313年 밀라노 勅令으로 基督敎가 로마에서 公認됐을 때부터 十字架 表示는 勝利의 象徵이었다. 312年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는 막센티우스와 서로마의 霸權을 놓고 다퉜는데, 하늘의 啓示를 받아 防牌에 基督敎의 十字架 表示를 하고 戰鬪에 臨해 勝利를 거뒀다. 이 勝利에 對한 報答으로 콘스탄티누스가 이듬해 基督敎를 認定해 주었던 것이다. 結局 十字軍은 콘스탄티누스의 防牌에 새겨진 勝利의 表示를 다시 한番 確認하고자 하는 試圖이기도 했던 셈이다. 오늘날 權力家들度 승리에 對한 確信을 심어주기 위해 걸핏하면 十字軍 운운하지 않는가.

    注目해야 할 點은 十字軍이 基督敎人에게 勝利의 表示로 記憶되는 만큼이나, 이슬람 地域에서 十字軍은 神聖冒瀆이나 유럽人 侵略行爲의 表示로 理解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侵略을 斷乎하게 물리쳤을 뿐만 아니라 十字軍에게까지 寬容을 베푼 살라딘을 이슬람 世界가 英雄으로 받들고 있다는 點 亦是 注目해야 할 것이다. 1956年 수에즈 運河 國有化로 인해 이집트가 英國, 프랑스와 벌인 戰爭은 1191年 英國 國王과 프랑스 國王이 모두 參與한 第3次 十字軍에 比喩됐고, 이집트의 나세르 大統領은 第3次 十字軍을 물리친 살라딘에 比喩됐다. 그리고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亦是 西方 世界에 對抗해 싸우는 自身을 살라딘에 빗댔다.

    地中海 世界의 復活

    十字軍은 一見 衝突의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衝突이란 交流의 한 側面이다. 衝突과 交流는 銅錢의 兩面과도 같다. 十字軍은 元來 目標에는 없던 다양한 結果를 가져왔고, 그 열매들이 後代에 큰 影響을 미쳤다.

    地中海 世界는 十字軍을 거치면서 文明 交流의 張으로 復活했다. 로마가 地中海를 支配할 때, 모든 交流는 地中海를 통해 이뤄졌다. 物資와 人力, 그리고 文化가 地中海를 통해 로마로 흘러들어왔고, 로마에서 混合됐으며, 로마로부터 흘러나갔다.

    事實 地中海 世界는 로마 帝國이 存在하기 以前부터 存在했다. 紀元前 1000年頃 페니키아人이 地中海에 都市를 建設했으며, 以後 그리스인이 地中海에 進出해 여러 植民都市를 세웠다. 우리가 잘 아는 나폴리, 마르세유 等이 바로 그리스인이 세운 植民都市다. 그리스인의 뒤를 이어 로마가 地中海를 內海(內海, mare internum)로 만들었다.

    이슬람-십자군-기독교 전쟁할 것인가, 교류할 것인가

    르드 살라딘(1138~1193)은 이슬람의 英雄이다.

    로마 中心의 地中海 世界는 서로마 帝國의 滅亡으로 衰退했다. 4世紀부터 서로마가 있던 地域으로 移住한 게르만족은 混亂을 惹起했고, 7世紀부터 北아프리카에는 이슬람 勢力이 登場했다. 反面 東로마 帝國은 縮小되기는 했으나 그리스와 小아시아에서 그 命脈을 維持했다. 이윽고 프랑크 王國의 샤를마뉴가 서로마 皇帝에 오른 800年에는 明白히 地中海는 세 文明으로 分裂돼 있었다.

    過去 서로마 帝國에 屬하던 領土에는 게르만족이 移住해 살기 始作했고, 이들 中 一部는 基督敎로 改宗했다. 8世紀 末 게르만족 中에서 가장 卓越한 人物이던 샤를마뉴는 게르만족의 王國들을 大部分 征服했고, 로마 總大主敎이던 敎皇은 샤를마뉴에게 서로마 皇帝의 冠을 씌워주었다. 이로써 오늘날 西유럽 地域에는 ‘게르만족-로마 가톨릭’ 文明이 形成됐고, 이 文明에서는 宗敎 指導者인 敎皇이 政治 指導者인 皇帝보다 優位에 있었다.

    東로마 帝國은 그리스와 小아시아로 縮小된 채 維持되고 있었으나, 7世紀 中盤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皇帝의 治世를 分岐點으로 옛 로마 帝國의 性格을 漸次 잃고 그리스 文化를 中心으로 한 새로운 文明으로 거듭났다. 이 帝國을 首都의 이름 비잔티온을 따서 비잔티움 제국이라고 한다. 그런데 過去 로마의 皇帝가 祭祀場이기도 했으므로 비잔티움 皇帝 亦是 政治 指導者이면서 宗敎 指導者였다. 따라서 비잔티움 帝國에서는 總大主敎가 皇帝 아래에 있었다. 東로마 帝國이 ‘그리스 文化-正敎會(Orthod-oxy)’를 特徵으로 하는 비잔티움 帝國으로 變貌한 것이다.

    北部 아프리카와 오리엔트 地域 亦是 過去에는 로마 帝國에 屬했으나, 이슬람이 이 地域을 占領했다. 이슬람 勢力은 8世紀 初 이베리아 半島까지 進出해 地中海 南쪽 折半에 該當하는 地域을 ‘이슬람 文明’으로 뒤덮었다.

    이로써 地中海 文明은 오늘날의 프랑스를 中心으로 한 샤를마뉴 帝國, 그리스를 中心으로 한 비잔티움 帝國, 그리고 北아프리카와 中東地域을 中心으로 한 이슬람 文明으로 分裂했다. 이러한 區分은 오늘날에도 有效하다. 地中海를 西유럽, 東유럽, 이슬람이 나누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늦춰 잡아도 800年부터 十字軍이 發生한 時期까지 地中海는 文明의 交叉路 役割을 거의 하지 못한 셈이었다. 第1次, 第2次 十字軍은 陸地로 移動했는데, 이 같은 事實은 海路가 封鎖돼 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十字軍은 西유럽에서 出發해 東유럽을 지나 그리스를 通過해 터키에 이르렀다. 터키에서부터는 陸地와 海路를 모두 利用했다. 第3次 十字軍에 이르러서는 英國과 프랑스 等 西유럽의 十字軍은 배를 타고 移動했으며, 獨逸을 비롯한 中東部 유럽의 十字軍만이 陸地로 移動했다. 惡名 높은 第4次 十字軍은 베네치아 商人들이 提供한 배를 타고 콘스탄티노플로 向했다. 時間이 지날수록 地中海를 통한 海上運送이 回復된 것이다.

    海上運送을 恒久的인 것으로 만든 데에는 팔레스타인 地域에 생긴 基督敎 領地들度 한몫을 했다. 앞서 敍述했듯 第1次 十字軍으로 예루살렘 王國을 비롯한 4個의 領地가 생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데사 伯爵領이 이슬람 手中으로 넘어갔고, 뒤이은 十字軍에서도 이 伯爵領을 回復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地域에선 當然히 여러 가지 物件이 必要했고 이러한 必要를 充足하고자 유럽으로부터 物資가 輸送됐다. 物資 流通은 基督敎徒의 領地들이 이슬람 手中에 넘어간 以後에도 繼續됐다. 이탈리아의 都市들이 이 같은 流通의 中心 役割을 떠맡았다. 이탈리아를 出發한 船舶은 그리스를 거쳐 小아시아 半島와 키프러스 섬에 이르렀다. 이곳에서 예루살렘 王國의 各地로 物件이 실려나갔다.

    그러나 유럽에서 傳해지는 物件보다 유럽으로 보내는 物件이 값어치가 더 나갔다. 유럽은 후추를 비롯한 香辛料와 綿織物, 貴金屬을 輸入했다. 中東에서 出發한 배가 이탈리아의 여러 都市에 到着했고, 一部 船舶은 南部 프랑스와 스페인 東部로 航海했다. 中東의 産物은 江을 타고 西유럽 구석구석으로 傳해졌다. 商業의 溫氣가 유럽의 末梢神經까지 傳해진 것이다. 한마디로 로마 帝國 沒落 以後 斷絶됐다고 할 만큼 衰退했던 地中海 貿易은 十字軍을 통해서 復活했다. 그리고 이러한 商業의 復活은 거의 農業만으로 自給自足하던 유럽의 여러 마을에 外部의 産物을 가져다주었고, 都市가 發達하는 디딤돌로 作用했다.

    地中海 商業의 復活은 西유럽이 中國-印度-중동-아프리카로 이어지는 世界 經濟에 連結됐음을 의미한다. 中國과 印度에서 生産한 物件이 流入되는 것은 勿論이고 中國, 印度의 文化도 들어왔다. 예컨대 11世紀 末 中國에서 使用하던 羅針盤이 12世紀에는 유럽으로 流入됐다. 오늘날 베네치아에서 볼 수 있는 琉璃工藝는 시리아에서 傳來된 것이며, 沙糖수수나 緋緞 같은 새로운 物品도 유럽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以前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奢侈品이 유럽으로 運送됐다. 유럽은 貴金屬, 木材, 毛皮 等을 除外하면 反對給付로 提供할 것이 없었다. 洞房으로 輸出할 物品이 必要했던 유럽은 毛織物 生産을 늘리기 始作했다.

    地中海 貿易의 中心은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 等 이탈리아 都市다. 이들은 十字軍과 예루살렘 王國에 物資를 提供했을 뿐만 아니라 中東地域과도 物資를 去來했다. 이들에게 가장 큰 걸림돌은 宗敎가 아니라 이탈리아와 中東 사이에 있는 비잔티움 帝國이었다. 베네치아 같은 都市에서 中東에 이르는 바닷길은 비잔티움 帝國의 統制를 받고 있어서, 通行許可를 받고, 關稅를 納付해야 했다. 이러한 비잔티움의 統制에 不滿을 품은 베네치아는 十字軍을 使嗾해 비잔티움 帝國의 首都인 콘스탄티노플을 攻擊하도록 했다. 베네치아 商人들에게는 宗敎보다 商業이 더 重要했던 것이다. 베네치아를 비롯한 이탈리아 都市들은 以後 地中海 商業의 霸權을 掌握했다. 이탈리아 商人들의 霸權 掌握은 十字軍의 變質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地中海 商業의 復活이 눈앞의 利益을 追求하면서 發生한 ‘交流’라면, 좀 더 長期的인 觀點에서 유럽의 精神世界에 影響을 미친 交流도 있었다. 그것은 이슬람 學問의 收入이었다. 勿論 十字軍 以前부터 이슬람의 學問은 이베리아 半島의 코르도바 칼리프國(Caliphate of Cordoba)을 통해 傳해지고 있었다. 750年에서 900年 사이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著作이 아랍語로 飜譯됐고, 신플라톤학파의 著述 亦是 비슷한 時期에 飜譯됐다. 그리고 12世紀까지 이슬람의 여러 學者가 이 著作들을 解釋하고 註釋을 달았다. 이러한 이슬람의 學問的 業績이 十字軍으로 인해 本格的으로 유럽으로 건너갔다. 學問的 交流는 大部分 基督敎徒와 이슬람敎徒가 이웃해 함께 살던 地域에서 이뤄졌다. 12世紀에는 에스파냐의 톨레도를 中心地로 삼아 아리스토텔레스의 著作들이 거의 모두 라틴語로 飜譯됐다. 이러한 飜譯을 통해 거의 모든 知識 分野에서 學問的 進展이 이뤄졌다. 特히 아베로에스(Averroes)의 아리스토텔레스에 對한 아랍語 主席이 라틴語로 飜譯돼 中世 스콜라 哲學의 形成에 相當한 影響을 미쳤다. 哲學뿐 아니라 數學 分野에서도 基督敎 世界로 學問이 傳播됐다. 人道에서 由來한 아라비아 數字와 영(零)李 유럽에 導入됐고, 오늘날 컴퓨터 用語로 자주 使用되는 알고리즘(algorithm)이라는 單語의 語源인 數學者 알콰리즈미(al-Khwarizmi)의 代數學度 基督敎 世界로 輸入됐다. 科學 分野의 學問 收入도 적지 않았는데 鍊金術, 占星術이 代表的이다. 鍊金術이나 占星術은 그 自體로서는 一種의 거짓 科學이지만, 鍊金術을 발전시키는 過程에서 化學 器具가 發展했으며, 占星術 亦是 天文 觀測機構의 製作과 天文圖 作成의 디딤돌 구실을 했다.

    要컨대 유럽人은 十字軍을 통해서 이슬람의 學問世界를 接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 哲學의 遺産을 穩全히 되살릴 수 있었으며, 論理學 倫理學 政治學 天文學 等의 學問을 발전시켰다.

    十字軍이 當初 意圖한 目的을 이뤘다고는 할 수 없다. 聖地 回復이라는 純粹한 宗敎的 意圖를 가지고 始作한 十字軍이라고 하더라도 種種 狂信이나 政治的 意圖에 依해 變質되곤 했다. 애初에 十字軍을 提唱했던 敎皇은 單一한 基督敎 世界를 構築하려는 政治的 意圖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第4次 十字軍이 보여주듯이 十字軍에 參與한 技士들은 土地와 財物에 關心을 가진 境遇가 많았다. 게다가 種種 벌어졌던 狂信에 가까운 行動은 內部 結束을 다지는 機制로 作用하기도 했다. 假令 第1次 十字軍이 예루살렘을 陷落하고 나서 벌인 殺戮은 너무나도 深刻해 솔로몬 神殿 옆에 피의 도랑이 생겨 발목까지 잠겼다고 하는데, 이러한 逸話는 이슬람이 團結하는 契機가 됐다. 이와 反對로 下틴(Hattin)의 戰鬪에서 살라딘이 聖堂騎士團을 虐殺한 事件은 十字軍 쪽의 憎惡를 불러일으켰다. 이 같은 憎惡心은 戰爭을 持續해야 하는 名分으로 作用했다. 이러한 傾向은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서, 오늘날에도 十字軍이라는 單語는 相對方에 對한 敵愾心을 불러일으키는 手段으로 利用되곤 한다.

    얻은 것과 잃은 것

    十字軍의 重大한 結果物은 基督敎와 이슬람의 交流일 것이다. 勿論 두 文明의 交流가 十字軍을 契機로 始作됐다고 斷定하기는 어렵다. 交流는 以前부터 存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十字軍을 통해 文明의 交流가 大規模로 이뤄지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이탈리아 都市들은 地中海 貿易의 中心地로 浮上해 르네상스 時代까지 榮光을 누렸다. 地中海 商業의 復活도 意圖하지는 않았으나 後代에 큰 影響을 미친 十字軍의 成果라고 할 수 있다. 激烈한 ‘衝突’ 속에서도 意圖하지 않은 ‘交流’가 發生하고, 이것이 後代에 큰 影響을 끼친다는 것을 보여주는 事例라고 하겠다.

    유럽이 이슬람 學問을 輸入한 것 亦是 衝突의 過程에서 이뤄진 交流의 結果다. 地中海 商業의 復活이 눈앞의 利益을 위한 것이었다면, 學問의 輸入은 유럽이 다른 世界를 理解하고 그 長點을 醉해 自身들의 長期的 發展을 圖謀하도록 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事例는 모두가 宗敎와 戰爭에 埋沒돼 있을 때도 學問의 交流를 통해 未來를 準備하는 사람이 있으며, 이들이 다른 世界에 對한 理解를 增進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只今도 世界 어느 곳에선가는 衝突이 發生하고 있지만, 나머지 地域은 평화롭게 交流하고 있으며, 甚至於 衝突이 벌어지는 곳에서조차 交流가 이뤄지고 있다. 十字軍에서 보았듯이, 交流와 衝突은 銅錢의 兩面과 같은 것이며, 交流와 衝突 모두 敵愾心을 품게 할 수도, 理解를 增進시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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