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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스타인브레너 前 뉴욕 양키스 球團主|新東亞

조지 스타인브레너 前 뉴욕 양키스 球團主

돈보다 勝利를 사랑한 ‘보스’ 새로운 事業 모델 構築한 CEO

  • 하정민│東亞日報 DBR 記者 dew@donga.com

    入力 2011-04-20 14: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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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포츠와 企業 經營은 共通點이 많다. 成功을 위해서는 뛰어난 리더십이 必要하다는 點이 特히 그렇다. 스포츠界 리더들이 最高의 자리에 오른 祕訣은 무엇일까?
    • 또 그들의 리더십에서 배울 수 있는 經營 原則은 무엇일까? 동아일보가 만드는 高品格 經營 저널 ‘DBR(동아비즈니스리뷰)’의 하정민 記者가 스포츠界 리더들의 리더십을 本格 探究하는 ‘Leadership in Sports’를 連載한다.
    • 첫 番째 對象者는 美國 메이저리그(MLB) 最高 球團인 뉴욕 양키스의 高(故) 조지 스타인브레너 球團主다. <편집자 주="">
    조지 스타인브레너 전 뉴욕 양키스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를 主人公으로 내세운 스포츠 專門誌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標識들.

    “내게 勝利는 숨 쉬는 것 다음으로 重要하다. 숨 쉬고 있다면 勝利해야 한다(Winning is the most important thing in my life, after breathing. Breathing first, winning next).”

    승리에 對한 渴望을 이보다 더 强烈하고 생생하게 表現하기도 힘들다. 이 말의 主人公은 오직 勝利만을 위해 살다 2010年 7月 他界한 조지 스타인브레너 前 뉴욕 양키스 球團主다. ‘보스(The boss)’라는 愛稱으로 더 有名한 그는 强力한 카리스마로 양키스를 35年間 統治하며 양키스를 메이저리그(MLB)의 最高 球團이 아닌 現代 스포츠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스타인브레너는 元來 美國 오하이오州 클리블랜드의 船舶 財閥이었다. 그는 1973年 成績 不振과 觀衆 減少로 慢性赤字에 시달리던 양키스를 CBS 放送局으로부터 1000萬달러라는 歇값에 사들였다. 當時 球團과 함께 사들인 駐車 倉庫를 CBS에 120萬달러에 되팔았으니 그가 實際 양키스를 買入하는 데 들인 돈은 880萬달러에 不過했다.

    하지만 現在 양키스의 價値는 어마어마하다. 2011年 3月 美國 經濟專門誌 ‘포브스’는 양키스의 球團 價値가 17億달러에 達한다고 밝혔다. 스타인브레너가 引受할 當時보다 180倍 以上 불어난 數値다. 양키스는 이 調査가 始作된 1998年 以後 14年 連續 1位를 記錄하고 있다. 2位와의 隔差도 엄청나다. 2位인 보스턴 레드삭스의 價値는 9億1200萬달러로 양키스의 折半 水準이다.

    이는 스타인브레너의 果敢한 投資와 攻擊的인 經營 德分이다. 事業 手腕이 대단했던 그는 케이블TV에 엄청난 金額으로 中繼權을 팔고, 스포츠用品業體와 巨額의 後援 契約을 맺은 最初의 球團主다. 中繼權 再協商視 中繼權 販賣會社가 양키스를 買入하려 하자 곧바로 自體 放送國 예스 네트워크(YES Network)를 設立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도 開拓했다.



    그가 球團主로 在職하는 동안 양키스의 成績 또한 눈부셨다. 1973年 以後 양키스는 7番의 월드시리즈 優勝(2009年 優勝은 아들 할 스타인브레너에게 球團主 職位를 讓渡한 後 이뤄짐)과 11番의 아메리칸리그 優勝을 일궜다. 양키스는 메이저리그에 屬한 30個 球團 中 월드시리즈 優勝(27回)과 리그 優勝(40回)을 가장 많이 한 팀이다. 양키스의 優勝 記錄은 美國 프로 스포츠를 통틀어도 單一팀 最多 優勝이다.

    양키스 다음으로 월드시리즈 優勝을 많이 한 팀은 10次例 優勝을 차지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다. 메이저리그 歷史 上 두 자릿數 월드시리즈 優勝을 차지한 팀은 오직 양키스와 카디널스뿐이지만 카디널스의 優勝 回數도 양키스에 比較하면 초라하다. 양키스 못지않은 名門 팀으로 自負하는 보스턴 레드삭스와 LA 다저스도 各各 7回, 5回밖에 優勝하지 못했다.

    汚點 많은 리더? 能力 있는 리더!

    이처럼 훌륭한 成果를 거뒀음에도 不拘하고 人間 스타인브레너에 對한 評價는 엇갈린다. ‘보스’라는 別名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獨善的이고 帝王的인 性格 때문에 惡名을 떨쳤다. 一旦 自身의 마음에 들지 않는 團長과 監督을 밥 먹듯 解雇하는 일로 有名했다. 그는 在任 期間 無慮 20番이 넘는 監督 交替, 10番이 넘는 團長 交替를 斷行했다.

    그는 特히 1970~80年代 양키스 全盛時代를 이끌었던 빌리 마틴 監督을 5番이나 解雇했다가(1번은 마틴 스스로 辭任)다시 데려왔다. 1982年에는 性的 不振을 理由로 한 시즌에 無慮 3名의 監督에게 팀을 맡겼다. 自身의 마음에 들지 않는 플레이를 할 때는 아무리 스타 選手라 해도 公開的으로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 不適切한 發言으로 罰金을 낸 回數도 헤아릴 수 없다. 닉슨 大統領 時節에는 不法 政治資金 스캔들로, 1990年에는 選手의 私生活을 들추다 2番이나 球團主 資格도 박탈당했다.

    스타인브레너는 莫强한 資金力을 앞세워 다른 팀의 스타플레이어들도 싹쓸이했다. 그는 이미 檢證된 自由契約選手(FA·Free Agent)를 迎入하는 것이 觀衆 動員의 祕訣이라고 剛하게 믿었다. 그런 믿음으로 觀衆 誘致와 팀 成跡 向上을 위해 몸값 비싼 自由契約選手들을 大擧 迎入했다. 하지만 이는 選手들의 몸값을 치솟게 해 다른 팀들의 엄청난 怨聲을 낳았다. 라이벌 보스턴 레드삭스의 球團主는 스타인브레너 麾下의 양키스를 ‘惡의 帝國’이라고 불렀다. 實際 양키스는 選手團 全體 年俸(페이롤·payroll)李 2億달러에 達하는 唯一한 球團이기도 하다.

    이처럼 많은 論難이 있지만 美國 野球界는 스타인브레너를 最高의 球團主로 꼽는 데 躊躇하지 않는다. 2003年 1月 美國의 有名 스포츠週刊誌 ‘스포팅 뉴스’는 그를 美國 스포츠界에서 가장 影響力 있는 人物로 選定했다. 프로팀 球團主가 野球, 籠球, 美式蹴球, 아이스하키 等 美國 4代 프로 스포츠 種目의 커미셔너를 누르고 1位를 차지한 건 그가 最初였다.

    그의 性格에 對한 論難은 있을지언정, 그가 美國 스포츠界에 끼친 影響力과 業績에 反旗를 드는 사람은 없다. 그는 中繼權 事業, 後援 契約 等을 통해 메이저리그 球團의 비즈니스 모델을 새로 마련했다. 美國人의 專有物이었던 野球와 메이저리그를 世界人의 娛樂으로 만드는 데도 크게 寄與했다. 1986年부터 1996年까지는 美國 올림픽委員會 副委員長을 지내며 1996年 애틀랜타올림픽 誘致 및 開催에도 큰 役割을 擔當했다.

    스타인브레너는 分明 汚點이 많은 리더다. 그는 모든 사람을 自己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어했고 잦은 失手와 誤判, 甚至於 不法 行爲를 저지르는 일도 介意치 않았다. 그런데도 모두가 同意하는 事實이 있다. 승리에 對한 渴望이 그 어떤 選手, 監督, 團長보다 强했던 人物이 바로 스타인브레너라는 點이다. 過去의 映畫에만 젖어 있던 양키스는 그가 球團主로 在職하던 時節에 와서야 메이저리그 最大, 最高, 最强의 名門 팀으로 完全히 자리 잡았다.

    成跡과 돈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프로 스포츠 世界에서 善과 惡을 따지는 일 自體가 無意味한지도 모른다. 能力과 無能力만 存在하는 世界에서 스타인브레너는 徹底히 能力으로 自身의 엄청난 存在 價値를 立證한 球團主였다. 그 어떤 스타 選手보다 더 스타였던 球團主, 團地 양키스 팀이 아닌 메이저리그 全體를 象徵하는 球團主가 바로 스타인브레너다.

    양키스 引受와 帝國의 再建

    스타인브레너의 本名은 조지 마이클 스타인브레너 3歲다. 獨逸系 後孫인 그는 1930年 美國 오하이오 州 로키 리버에서 아버지 헨리 스타인브레너 2世와 어머니 리타 사이에 1男2女 中 長男으로 태어났다. 1948年 인디애나 州 北部의 쿨버 밀리터리 아카데미를 卒業하고, 매사추세츠 州의 윌리엄스 칼리지에서 英文學을 專攻했다. 美 매사추세츠 工大(MIT)를 卒業한 秀才였던 그의 아버지는 自身만큼 學業 成跡이 뛰어나지 못한 아들에게 稱讚을 해주는 일이 거의 없었다. 또 매우 嚴格하게 아들을 訓育했다. 이런 成長 環境이 그의 暴君 氣質을 부추겼다는 分析도 많다.

    윌리엄스 칼리지 卒業 後 故鄕으로 돌아온 그는 1955年 오하이오 州立大學에서 體育學 碩士 學位를 받았다. 學窓 時節부터 陸上팀의 障礙物 競技 스타, 풋볼팀 러닝白으로 活躍하며 스포츠에 才能을 보인 그는 學校 新聞의 스포츠 編輯長을 맡은 적도 있다. 스타인브레너는 오하이오 주립대에 在學할 때 有名 풋볼 코치인 우디 헤이스를 도와 일했다. 1955年에는 노스웨스턴대, 1956~57年에는 퍼듀대에서 풋볼 部코치로 活躍했다.

    그는 1956年 엘리자베스 조안 자이그와 結婚해 행크, 할, 제시카, 제니퍼의 2男2女를 뒀다. 結婚 後 本格的으로 事業에 뛰어든 그는 1957年 집안에서 運營하던 킨즈먼 海運會社에 合流해 어려움에 處한 會社를 正常化시켰다. 1963年 그 會社를 사들였고, 1967年 아메리칸 海運을 引受하며 本格的인 船舶 財閥로 이름을 알렸다.

    스타인브레너는 1960年 클리블랜드 파이퍼스라는 籠球팀에 投資하면서 스포츠 事業에 발을 들였다. 클리블랜드 파이퍼스는 美國 프로籠球 史上 最初의 黑人 監督인 존 매클랜던이 이끌던 팀으로도 有名했다. 하지만 2年 만인 1962年 12月 美國 籠球리그(ABL)가 破産으로 解體되면서 그의 첫 스포츠 投資는 完全히 失敗했다. 그 渦中에 그는 브로드웨이의 演劇 舞臺에도 投資했다. 그가 投資한 뮤지컬 ‘시소(Seesaw)’는 1974年 토니상을 받았다. 그의 演劇 投資는 1980年代 後半까지 이어졌다.

    1973年 스타인브레너는 색다른 冒險을 試圖했다. 美國 3大 空中波 네트워크인 CBS가 所有하고 있던 양키스를 몇몇 投資者와 함께 1000萬달러에 引受한 것이다. 1970年代 初 양키스는 過去의 映畫와는 無關한 팀이었다. 양키스는 1960年代 初까지 無慮 20次例 월드시리즈 優勝을 거머쥐며 메이저리그를 平定했지만 CBS가 引受한 後 연이은 成績 不振으로 觀衆으로부터 외면당했다. 1966年에는 56年 만에 아메리칸리그 꼴찌까지 記錄했다. 傳說的인 스타 미키 맨틀이 1968年 隱退한 뒤에는 내로라할 만한 스타 選手도 없어 觀衆 動員이 더 어려웠다.

    이 때문에 스타인브레너가 引受하기 直前인 1972年, 양키스는 1945年 以後 처음으로 100萬名 觀衆 動員에 失敗하는 受侮도 겪었다. 월드시리즈 단골 優勝 球團, 메이저리그 最高 人氣 球團이라는 이미지는 온데간데없었다. 이런 팀을 引受한다는 건 相當한 冒險이었다.

    조지 스타인브레너 전 뉴욕 양키스 구단주
    스타인브레너의 양키스 引受는 當時 양키스 社長이던 마이클 버키의 周旋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그는 스타인브레너와의 不和로 4個月 만에 양키스를 떠났다. 球團主가 되자마자 解雇를 斷行하며 惡質 雇用主의 威容을 드러낸 셈이다. 實際로 그가 양키스를 引受한 後 球團 內에는 온갖 論爭과 意見 衝突이 끊이지 않았다. 그는 自身에게 反旗를 드는 人事는 假借 없이 肅淸했다.

    하지만 양키스의 榮光을 再建하겠다는 그의 意志는 變함이 없었다. 마침 메이저리그에는 커다란 變化가 있었다. 1973年 시즌 途中 自由契約選手(FA) 制度가 施行됐기 때문이다. 스타인브레너는 애初에는 이 制度를 달갑지 않아 했지만 變化의 바람에 맞춰 攻擊的으로 有名 選手를 사들였다. 그는 1975年 FA가 된 사이영賞 受賞者 캣 피시 헌터를 史上 最高額인 5年間 375萬달러에 데려왔다. 한 해 뒤에는 當時 FA 最大魚였던 홈런王 레지 잭슨을 5年間 350萬달러에 迎入했다.

    效果는 바로 나타났다. 그가 양키스를 引受한 지 4年 만인 1977年 양키스는 드디어 월드시리즈 優勝 챔피언을 손에 쥐었다. 바로 다음해인 1978年 2年 連續 월드시리즈를 制霸했다. 이때 레지 잭슨이 한 競技에서 3홈런을 몰아치는 等 決定的인 役割을 했다.

    永久 題名에서 復活까지

    2連續 월드시리즈 制霸로 限껏 氣勢를 올린 스타인브레너는 비싼 FA를 사들이는 데 熱을 올렸다. 1981年에는 强打者 데이브 윈필드와 前代未聞의 10年 2300萬달러 契約도 締結했다. 하지만 윈필드는 負傷 等의 理由로 돈 값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重要한 고비마다 不振을 거듭하는 윈필드처럼 양키스에는 失敗한 FA 選手가 쌓여가기 始作했다. 當然히 成跡도 神通치 않았다.

    莫大한 돈을 들여 迎入한 FA가 ‘먹튀’가 되자 그렇지 않아도 性情이 膈한 스타인브레너는 暴發하고 말았다. 그는 特히 데이브 윈필드를 가장 싫어했다. 포스트시즌에 唯獨 强해 ‘10月의 사나이(Mr. October)’로 불렸던 레지 잭슨을 期待하고 윈필드를 데려왔건만 시즌 初에만 반짝 잘한다며 ‘5月의 사나이(Mr. May)’라고 嘲弄하기도 했다. 윈필드가 마음에 차지 않았던 스타인브레너는 윈필드가 入團할 當時 그의 財團에 30萬달러를 寄附하기로 한 約束을 지키지 않으려고 했다. 스타인브레너는 1989年 私設探偵을 雇用해 윈필드의 弱點을 캐내려 했으나 그의 計略은 곧 들통 났다.

    當時 MLB 커미셔너였던 페이 빈센트는 1990年 스타인브레너를 野球界에서 쫓아냈다. 1974年 當時 大統領이던 리처드 닉슨에게 不法 獻金을 한 理由로 2年間 球團主 資格을 박탈당한 後 두 番째 退出이었다. 1974年과 달리 빈센트 커미셔너는 스타인브레너에게 永久 除名의 鐵槌를 내렸다. 하지만 스타인브레너의 生命力은 끈질겼다. 빈센트가 커미셔너 職에서 물러난 1993年, 그는 福券에 成功했다.

    스타인브레너가 떠나 있던 3年은 그에게는 暗鬱한 時間이었을지 몰라도 양키스 球團으로 보면 썩 나쁘지 않았다. 球團의 모든 사람을 다그치며, 이기지 못하면 卽時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벗으라고 윽박지르던 球團主가 없는 동안 平和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양키스는 成跡에 크게 神經 쓰지 않고 有望株를 차근차근 성장시켰다. 버니 윌리엄스, 데릭 지터, 호르헤 포사다, 앤디 페티트, 마리아노 리베라, 폴 오닐 等이 成長하면서 양키스는 또 復活했다.

    永久除名까지 當했다 돌아온 스타인브레너였지만 獨善的 氣質은 如前했다. 1995年 스타인브레너는 當時 팬들로부터 人氣가 높았던 벅 쇼월터 監督을 解雇했다. 그는 解說家로 일하던 세인트루이스 監督 出身의 조 토레를 迎入한다. 양키스에 오기 前 토레는 10餘 年 동안 여러 팀을 轉轉했지만 이렇다 할 成跡을 내지 못했다. 그 때문에 토레의 迎入에 疑問을 표하는 사람이 많았다.

    보스의 退場

    하지만 토레 監督은 1996年 赴任 첫해 곧바로 18年 만의 월드시리즈 優勝을 차지하며 變德스러운 球團主를 洽足하게 해줬다. 以後에도 양키스는 1998年부터 2000年까지 3次例 連續 월드시리즈 優勝을 하며 메이저리그 最强 팀의 面貌를 되찾았다.

    2000年代 들어 스타인브레너의 健康은 눈에 띄게 나빠졌다. 特히 2006年 孫女의 公演을 보다가 쓰러진 그는 더 以上 걷지 못하고 휠체어 身世를 져야 했다. 불같은 호통도 잦아들었고 팀 運營의 相當 部分도 團長에게 讓渡했다. 結局 2008 시즌 後 公式的인 球團主 자리도 둘째아들 할에게 물려줬다.

    2009年은 스타인브레너에게 특별한 해였다. 于先 양키스 球團主가 된 瞬間부터 꾸었던 꿈, 새 球場을 完成했다. 비록 健康은 나빠졌지만 그의 事業 手腕은 如前했다. 루돌프 줄리아니가 뉴욕市長으로 在職하던 時節 새 球場 建築 計劃을 밝힌 그는 줄리아니 前 市長이 ‘球場 建設費 中 折半을 뉴욕 詩가 負擔할 테니 立場 輸入의 4%를 每年 納付하라’고 한 條件을 拒絶했다. 野球場 建設費, 運營費, 維持費를 全額 負擔하더라도 立場 輸入을 獨占하겠다는 計算에서였다.

    그는 뉴욕 市와 協商한 끝에 新築 球場 敷地를 無償으로 제공받고, 財産稅도 免除받는 데 成功했다. 양키스가 隣近의 뉴저지 州로 빠져나가면 損害가 莫甚하다는 點을 强調했기 때문이다. 새 球場에서 치러진 開場 競技에서 觀衆은 그의 이름 ‘조지’를 連呼했다. 天下의 獨不將軍 스타인브레너도 이때는 눈물을 흘렸다.

    2009年 시즌 양키스는 2000年 以後 9年 만에 월드시리즈 優勝에도 成功했다. 2010年 4月 健康이 많이 惡化된 스타인브레너는 마지막으로 양키스 球場에 모습을 나타냈다. 양키스의 캡틴人 데릭 지터와 조 지라디 監督이 2009年 월드시리즈 優勝 半指를 直接 傳達했다. 그가 양키스를 引受한 뒤 7番째 優勝 半指였다.

    半指를 받고 3個月이 지난 後 그는 눈을 감았다. 그의 死亡이 알려진 날 美國 言論은 一齊히 헤드라인 뉴스로 이 消息을 傳達했다.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市長은 “지난 40餘 年 동안 스타인브레너만큼 뉴욕에 影響을 끼친 人物은 드물다. 그는 뉴요커에게 自矜心을 심어줬다”고 哀悼했다.

    世界的 CEO에 견주는 理由

    여러 論難에도 不拘하고 스타인브레너가 뛰어난 리더였다는 事實에는 疑心의 餘地가 없다. 特히 그는 웬만한 世界的 企業의 CEO를 凌駕하는 事業 手腕으로 뛰어난 財政的 成果를 올렸고, 마케팅에도 一家見을 보였다. 그렇다면 그와 世界的인 CEO의 類似點은 무엇일까.



    1) 지칠 줄 모르는 投資

    양키스의 過多 支出에 關해서는 아직도 말이 많지만 스타인브레너의 選手 欲心과 巨額의 年俸 支拂은 確實히 다른 팀 球團主와 差異가 있다. 그의 이런 行動은 一時的인 게 아니라 連續性을 지녔기 때문이다. 1973年 1000萬달러에 양키스를 引受한 後 各各 300萬달러가 넘는 年俸을 주고 캣 피시 헌터와 레지 잭슨을 迎入한 일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會社 價値의 3分의 2에 達하는 돈을 주고 2名의 選手를 사온다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以後에도 스타인브레너는 데이브 윈필드, 에드 휫슨, 도일 알렉산더, 마이크 암스트롱, 존 메이베리 等을 줄줄이 迎入했다. 2000年代에 들어서도 그의 欲心은 그칠 줄 몰랐다. 알렉스 로드리게스, 자니 데이먼, 마크 텍세이라, CC 사바시아, AJ 버넷, 爐底 클레멘스 等 이름만 들어도 錚錚한 메이저리그의 별들이 적게는 數百萬달러, 많게는 數千萬달러를 받고 양키스 유니폼을 입었다.

    그는 스타 迎入 後 單純히 팀 成跡을 올린 後 該當 選手의 몸값이 비쌀 때 팔아치우는 ‘장사치’로만 行動하지 않았다. 그와 다른 球團主들의 決定的인 差異點이다. 많은 메이저리그 球團主는 어렵게 좋은 成跡을 낸 後 그 成跡의 주춧돌이 된 核心 選手를 팔아 오랫동안 좋은 成跡을 내는 데 失敗했다. 代表的 例가 플로리다 말린스의 球團主 웨인 後이젱가다. 1993年 創團한 플로리다 말린스는 創團 4年 만인 1997年 월드시리즈 優勝을 차지하며 世上을 놀라게 했다. 當時 케빈 브라운, 개리 셰필드, 롭 넨, 離反 에르난데스 等 巨額 年俸의 스타 選手들을 大擧 迎入한 結果였다.

    하지만 後이젱가 球團主는 優勝 直後부터 스타 選手들을 비싼 값으로 다른 팀에 팔고, 資産 價値가 最高潮에 達할 때 球團도 賣却했다. 스타 選手를 잃어버리고 새로운 選手 迎入에도 失敗한 플로리다 말린스는 以後 繼續 下位圈을 맴돌고 있다. 스타인브레너가 後이젱歌처럼 選手들을 팔아치웠다면 어땠을까. 決코 只今의 양키스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조지 스타인브레너 전 뉴욕 양키스 구단주
    種目은 다르지만 蹴球界에는 球團 運營을 통해 얻은 收入으로 自己 빚을 갚은 球團週도 있다. 바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말콤 글레이저다. 엄청난 돈을 빌려 맨유를 引受한 글레이저는 數千萬달러에 達하는 利子를 갚기 위해 入場料 引上을 斷行하고 스타 選手들을 他 球團에 팔아치워 맨유 팬들의 公憤을 사고 있다. 一部 팬들은 球團主 退出 運動까지 벌이고 있다. 스타인브레너와의 決定的 差異點이다.

    或者는 비싼 選手들을 모으면 누가 優勝을 못하냐며 양키스의 優秀한 成跡을 돈의 힘으로만 置簿하기도 한다. 이 亦是 事實이 아니다. 양키스 못지않은 돈을 써도 成跡은 正反對인 球團도 있다. 1998年 텍사스 레인저스를 2億5000萬달러에 사들인 톰 힉스 球團主는 2000年 大型 遊擊手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10年間 2億5200萬달러에 迎入했다. 選手 한 名에게 球團 買入에 맞먹는 돈을 支拂한 셈이다. 팀이 優勝은 못해도 로드리게스라는 스타 選手가 팬들을 불러 모을 것으로 期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3年間 텍사스는 優勝은커녕 디비전 꼴찌를 免치 못했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힉스는 結局 球團을 賣却했다.

    美國 最大 都市인 뉴욕이라는 빅 마켓을 緣故地로 지닌 양키스가 다른 球團보다 유리한 條件을 지닌 건 事實이다. 하지만 帝國의 威容은 決코 저절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양키스는 1980年代 美國 經濟가 안 좋을 때도 唯一하게 페이롤이 늘어난 球團이다. 最高의 選手를 볼 줄 아는 眼目, 그들을 꾸준히 迎入하고 維持해야 좋은 成跡을 낼 수 있다는 스타인브레너의 强力한 信念과 一貫된 行動이 있었기에 나타난 結果다.



    2)새 비즈니스 모델 마련

    그는 스포츠 球團 最初로 自體 放送局을 設立해 메이저리그 球團 運用에 새로운 轉機를 마련했다. 케이블TV에 最初로 單獨 中繼權을 巨額에 販賣한 球團主였던 스타인브레너는 再契約에 問題가 發生하자 곧바로 양키스 京畿만 專擔 中繼하는 채널인 예스 네트워크를 設立했다. 포브스 評價에 따르면 예스 네트워크의 自體 價値는 양키스 球團 價値보다 훨씬 높은 30億달러에 達한다. 양키스는 이 예스 네트워크의 持分 35%를 가지고 있다.

    예스 네트워크의 設立은 스타인브레너의 選手 欲心이 輸入 增加와 直結된다는 點을 잘 보여준다. 敗北를 窒塞하던 그는 흔히 말하는 效率性을 따지지 않고 選手에게 投資했다. 언뜻 無知莫知하게 비싼 돈을 주고 FA를 迎入하는 일이 매우 非效率的으로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長期的으로 이는 양키스라는 球團의 價値를 엄청나게 키웠다. 스타 플레이어들을 모아 더 많은 팬으로부터 關心을 받고, 이는 예스 네트워크의 視聽率 增加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스타인브레너의 投資는 單純히 優勝을 많이 하겠다는 게 아니라 양키스라는 브랜드의 價値를 維持하는 性格이 짙다. 成績이 優秀하기 때문에 最高의 브랜드가 되는 게 아니다. 最高의 브랜드라는 이미지를 維持하면 球團 財政이 튼튼해지고, 더 많은 優秀 選手를 모을 수 있으며, 좋은 成跡도 自然히 뒤따라온다는 論理다.

    慢性 赤字에 빠졌을 當時에 양키스를 引受한 그는 帝國을 다시 일으키는 가장 빠른 方法이 스타 選手를 통해 觀衆席을 꽉꽉 메우는 거라고 생각했다. 스타인브레너가 選手를 評價하는 基準은 單 한 가지였다. 바로 ‘저 選手가 觀衆席을 얼마나 채울 수 있을 것인가’였다. 實際 비싼 몸값을 주고 迎入한 스타 選手는 設使 成績이 좀 不振해도 野球團의 財政에는 肯定的인 影響을 미친다. 프로 野球팀의 收益은 크게 中繼權料, 立場 收益, 其他 收益으로 分類할 수 있다.

    이 中 가장 큰 部分을 차지하는 게 中繼權料다. 中繼權 價格은 當然히 視聽率로 決定된다. 스타 選手의 높은 年俸이 제값을 하는 理由다. 特級 FA에 對한 投資家 球團의 成績 向上과 中繼權料 上昇으로 이어지고, 이로 인해 球團의 財政이 두둑해지면 더 많은 大型 스타를 迎入하는 善循環 構造가 만들어진다. 많이 쓰면 쓸수록 더 많이 버는 事業 모델을 만든 사람이 바로 스타인브레너다.

    그의 選手 蒐集은 그 自體로도 훌륭한 마케팅 手段이었다. 野球界는 勿論 팬들마저 시즌이 끝나면 양키스가 올해 스토브리그에서는 어떤 FA 大魚를 낚을지 關心을 集中했다. 本意든 아니든 양키스는 메이저리그 全體의 ‘公共의 敵’이 됐다. ‘惡의 帝國’이 登場하면서 양키스를 꺾으려는 相對 팀의 意志도 더욱 불타올랐다. 이 挑戰과 應戰이 메이저리그의 興行을 더한 셈이다.

    3)矜持와 强力한 動機 附與

    스타인브레너는 그 自身이 누구보다 熱情的인 양키스의 팬이었다. 그는 양키스라는 最高 球團에 몸담은 사람들은 그에 걸맞은 最高의 姿勢, 態度, 禮節을 지녀야 한다며 選手들의 外貌와 服裝까지 細細하게 干涉했다.

    그는 球團主가 되자마자 긴 머리와 콧鬚髥 外의 鬚髥을 禁止했다. ‘矯導所도 이보다는 자유로울 것’이라며 一部 選手들이 反抗했지만 ‘머리를 기를 테면 球團에서 나가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甚至於 競技 때마다 머리카락이 어깨에 닿는 ‘長髮子’ 名單을 적어 監督에게 傳했다. 바로 措置하라는 뜻이었다.

    스타인브레너는 양키스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勿論 팬들까지 最高의 歷史와 成跡을 지닌 球團의 一員이라는 自負心을 지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每年 새롭게 迎入하는 選手들을 불러놓고 “當身은 最高의 팀에서 뛰는 選手”라고 致賀했다. 泄瀉 特級 選手가 아니더라도 그렇게 말했다. 最高가 아니라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決코 最高의 成跡을 거둘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球團에 對한 사랑도 대단했다. 스타인브레너는 거의 모든 公式席上에 양키스 로고가 새겨진 폴라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엘리베이터를 같이 탄 市民이 양키스를 批判하자 그 자리에서 辱說과 주먹을 날렸다는 逸話도 있다.

    4)人間味 넘치는 카리스마

    스타인브레너는 걸핏하면 解雇를 濫發하는 惡質 보스였지만 監督, 團長, 選手들의 勞苦를 잊지 않았다. 代表的인 事例가 빌리 마틴과 요기 베라에 關한 逸話다.

    스타인브레너에게 無慮 5番 起用되고 解任됐던 빌리 마틴 監督은 첫 解任 때 憤을 삭이지 못했다. 그는 “이 엿 같은 팀에는 타고난 거짓말쟁이와 犯罪者가 있다”는 毒舌을 퍼부었다. 前者는 競技 途中 自身과 멱살잡이를 했던 홈런王 레지 잭슨, 後者는 말할 것도 없이 不法 政治資金 스캔들에 連累된 스타인브레너였다. 하지만 1989年 마틴 監督이 交通事故로 世上을 떠나자 스타인브레너는 直接 나서 베이브 루스가 묻혀 있는 墓所 近處에 마틴의 묏자리를 購入했다.

    ‘野球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It ain′t over till it′s over)’란 말로 더 有名한 傳說的 捕手 出身 監督 요기 베라도 마찬가지다. 1985年 시즌 때 스타인브레너는 겨우 16競技를 치른 베라 監督을 電話로, 그것도 제3자를 시켜 電擊 更迭했다. 베라는 스타인브레너가 있는 限 決코 양키스 스타디움에 오지 않겠다고 분을 吐했다. 1999年 스타인브레너는 直接 베라를 찾아가 謝過하며 그의 분을 달래줬다.

    選手들에게도 따뜻한 面貌를 잊지 않았다. 그는 많은 年俸은 基本이요, 그에 合當한 待接도 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0年 뉴욕 메츠와 競技를 한 월드시리즈에서 메츠의 셰이 스타디움을 訪問한 스타인브레너는 양키스 選手들이 使用하는 셰이 스타디움 椅子가 不便하다고 判斷했다. 그는 곧바로 양키스 스타디움의 高級 椅子를 空輸해왔다. 選手들이 最高의 環境에 있어야 勝利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當時 左翼手로 活躍했던 데이비드 저스티스는 “언뜻 보면 別거 아니지만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스타인브레너만의 行動이었다”며 感激했다. 양키스는 뉴욕 메츠를 꺾고 2000年 월드시리즈 優勝을 차지했다.

    스타인브레너는 유머도 豐富했다. 둘 다 多血質로 有名했던 스타인브레너와 마틴의 사이에는 수많은 逸話가 있다. 한 番은 監督 迎入 後 스타인브레너가 마틴을 紹介하는 記者會見에서 “트레이드는 내 管轄”이라고 했다. 마틴이 “그건 아니다”라고 받자 그는 “내 方式대로 못하면 當身은 解雇야”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對한 마틴의 對答이 더 傑作이다. “아직 날 雇用하지도 않았잖소”라고 應酬해 記者會見場에 爆笑가 터졌다.

    스타인브레너는 1990年 美國의 人氣 코미디 프로그램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 出演했고, 人氣 시트콤 ‘사인펠드’에도 惡德 雇用主로 出演했다. 弄談調의 밀러 라이트 비어 廣告를 빌리 마틴과 함께 찍었고, 비자카드 廣告에서는 조 토레 監督과 데릭 지터와 함께 出演해 話題를 낳기도 했다.



    ‘양키스는 왜 强한가’(이종률, 2003, 韓國能率協會)

    양키스 球團 웹사이트 newyork.yankees.mlb.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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