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快樂, 小說, 그리고 ‘옛날’에 對하여|신동아

快樂, 小說, 그리고 ‘옛날’에 對하여

  • 함정임│小說家·동아대 文藝創作科 敎授 etrelajiham@empal.com

    入力 2011-04-21 1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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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쾌락, 소설, 그리고 ‘옛날’에 대하여

    옛날에 對하여 <br>파스칼 키냐르, 송의경 옮김, 文學과知性社, 382쪽, 1萬3000원

    마침내 우리는 그곳에 到着했다. 그곳은 마지막 王國이라 불리는 小說的인 곳, 哲學과 文學의 境界, 詩와 散文의 警戒, 自我와 日常의 警戒, 廣大無邊한 ‘옛날’의 宇宙로. 아니다, 첫 文章을 다시 始作해야겠다. 마침내 우리는 20世紀를 거쳐 21世紀 파스칼 키냐르에 到着했다. 유례없는 文學 蒐集家의, 快樂에 關한, 永遠에 關한 巨大한 글-부스러기 帝國으로! 永遠이라고? 우리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그가 明示하는 대로 瞬間을, 瞬間의 快樂을 記憶해야 하고, ‘只今’보다는 過去로, 또는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過去와 옛날은, 事實, 같은 것이 아닌가, 다른 것인가?

    사랑에 빠질 때마다 우리의 過去는 바뀐다. 小說을 쓰거나 읽을 때마다 過去는 바뀐다.

    過去란 그런 것이다. 그런 것이야말로 옛날(jadis)에 비해 過去(passe)를 결정짓는 要因이다. 過去는 바꿀 수 있지만 옛날은 바꾸지 못한다. 時代에 이어 國家, 共同體, 家族, 생김새, 偶然, 卽 條件이 되는 무엇이 끊임없이 過去를 左之右之한다. 質料, 하늘, 땅, 生命은 永遠토록 옛날을 構成한다.

    ‘過去’와 ‘옛날’에 對한 키냐르의 事由는 小說的인가? 나는 며칠째, 키냐르의 小說 ‘옛날에 對하여’를 읽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異常하게, 나는 어느 瞬間부터 ‘小說을 읽고 있다’는 事實을 까맣게 忘却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뭐랄까, ‘그곳’李 어디인지는 몰라도 매우 익숙한 느낌으로 散策하며 周圍를 確認하는, 世俗的 義務感으로부터 벗어나 氣分 좋게 풀어헤쳐진 걸음걸이의 느낌, 收縮과 弛緩의 리드미컬한 緊張感이라고 해야 할까. 이러한 感情의 흐름은 普通 小說을 읽으며 얻는 性格의 것이 아니다. 키냐르는 都大體 무엇을 쓴 것일까. 이것은 小說인가? 아니 이것은 小說이 아닌가?

    프랑스는 幽靈이 出沒하는 나라다. 그곳에서 過去가 새어나온다. 그곳의 하늘은 오래된 閃光(閃光)이다. 아주 微微한 發光(發光)李 조그만 이 나라의 鐘塔과 지붕들로 퍼지는 透明하고 거침없는 빛에 追加된다. 綠色 平原의 외딴 마을들에게는 숨어 있는 痕跡들이 散在한다.(중략) 프랑스, 그것은 나라가 아니라, 時間이다.



    이것은 第6張 ‘프랑스’에 對한 內容이자 描寫다. 內容(contents)이되, 스토리(story)는 아니다. 스토리란 時間 巡으로 展開되는 事件의 敍述을 가리킨다. 作家들은 이 順次的인 이야기의 單位(事件, action)를 가지고 小說이라는 장르 속에서 再構成(reconstruction)하며 노는(play) 者들이다. 여기에는 作家마다 再構成의 方法이 있게 마련이다. 傳統的인 敍事 技法과는 달리 現代小說에서는 이 配分과 排置에서 作家의 個性이 드러나는데, 이러한 法則에 代入해서 키냐르의 ‘文學 作業’의 正體를 가늠해보자면, 그는 可能한 限 ‘人類의 巨大한 삶’, 달리 말하면 거의 모든 것의 歷史를 잘게 부수는 作業을 小說이라는 장르 속에서 遂行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巨大한 日常의 探究者들人, 歷史學에서 아날학派의 方法論(광대하고도 魅惑的인 ‘私生活의 歷史’ 를 보라!)과 同軌이며, 프랑스의 象徵派 詩人 보들레르 時에 心醉한 나머지 19世紀 藝術의 數도(capital)를 파리로 삼아, 그때까지 形成된 資本主義를 解體한 뒤 自己 方式으로 再構成하려고 試圖한 발터 벤야민의 作業(厖大하고도 恍惚한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보라!)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庭園에 어둠이 내린다.

    새들이 沈默한다.

    저녁의 沈默은 닳고 닳은 主題이다.

    저녁의 沈默, 動物의 屬性이며 새들의 屬性인 그것은,

    本能的이고, 自然스러운, 닳고 닳은 主題이다.

    파스칼 키냐르는 小說家라기보다 ‘文學蒐集가’라고 불린다. 위의 ‘저녁의 沈默’은 詩集의 한 페이지처럼, 그러니까 詩 한 篇으로 하나의 場(第82張)李 提示되고 끝난다. 그 뒤는? 第83章으로 提示된 뤽상부르 公園에서 過去에는 每日 벌어졌으나 이제는 구경할 수 없는 체스 놀이에 對한 記憶을 더듬은 짧은 散文이다. 그 앞, 그러니까 제81장은? 로마 皇帝의 演說로 始作되어 ‘아기라는 나이 많은 짐승’에 對한 正義로 끝나는데, 4쪽에 걸쳐 9조각으로 構成된 散文이다.

    가장 最近의 것이 가장 낡은 것이다. 아기는 새로운 存在가 아니다. 女子들, 男子들 가운데서 살려고 버둥대는 아기들을 보라. 그들은 혼자 내버려두면 사흘도 生存할 수 없으므로 우리가 돌보는 매우 나이 많은 짐승이다.

    人間의 出生과 죽음, 그러니까 人生이라는 旅行의 時間 順序를 倒置해서, 老人으로 태어나 漸漸 젊어졌다가, 胎兒가 되어 사라지는 스콧 피츠 제럴드의 ‘벤자민 버튼의 時間은 거꾸로 흐른다’를 연상시키는 이 대목에 이르러, 아니 順序를 깨고 여기저기 뒤적뒤적 읽다보면, 이것은 小說인가, 아닌가의 問題를 떠나 파스칼 키냐르라는 作家에 對한 疑問이 갈수록 增幅된다. 도무지 이 作家의 魂과 肉體를 形成해준 뿌리, 그러니까 先天的이고도 後天的인 胎生이 궁금해서 못 견딜 地境이 되는 것이다. 나는 銃 95個의 張을 다 涉獵한 끝에 決定的인 한 조각을 抽出해냈는데, 이 作品의 前半部에 收錄된 한 篇의 글, ‘르 아브르(Le Havre)’에 對한 幼年의 追憶談이다.

    窓門은 르아브르 港口를 向해 있었다. 港口는 廢墟, 꿀벌 떼, 防波堤, 쥐들과 다름없었다. 세이렌들(뱃사람들을 홀려 難破시키는 妖精들)이기도 했다. 나는 여섯 살이었다. 童話와 傳說을 읽었는데, 두 발을 窓門 앞의 노란色 小型 木製 作業臺에 올려놓고서였다. 窓門은 바다, 아니 우중충한 萬年 突風을 向해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는, 아직도 기억나는데, 누구나 바다를 그렇게 불렀다.

    르 아브르란 어떤 곳인가. 鐵道의 歷史가 始作된 19世紀 中盤부터 파리의 生 라자르 驛에서 印象派 畫家들이 畫具(畵具)를 들고 野外의 빛을 찾아 汽車를 타고 자주 찾던 바다의 中心都市. 여섯 살의 키냐르가 ‘두 발을 窓門 앞의 노란色 小型 木製 作業臺에 올려놓고’ 窓門을 통해 바라보던 ‘우중충한 萬年 突風’의 ‘바다’는 印象派의 由來가 되기도 한 畫家 모네가 그린 ‘해돋이 引上’의 現場. 그 바닷가 散策路에는 行動派 實存主義 作家이자 샤를 드골 政權에서 文化部長官을 지낸 앙드레 말로의 博物館이 우뚝 솟아 있다. 또한 看過할 수 없는 歷史的인 場面으로, 實存主義의 代表的인 作家이자 哲學者인 사르트르가 파리 高等師範學校를 優等으로 卒業하고 高等學校 敎師로 赴任해 在職한 곳이 르 아브르다. 靑年 哲學者 사르트르의 出世作이자 作家의 班列에 들게 한 問題作 ‘嘔吐(La nause)’의 舞臺. (存在의) 嘔吐하는 人間이라는 새로운 類型의 現代人 로캉탱의 실존적 認識 過程이 이 바닷가에 널려 있는 하찮은 조약돌로부터 비롯된 것. 프랑스 노르망디 地方의 最北端, 그러니까 英國과 마주 보고 있는 도버海峽 沿岸의 港口 都市로, 北大西洋 特有의 우중충한 하늘과 바다와 濕期 아니면 突風 搖亂한 自然 環境일지언정, 19世紀에서 20世紀 前半期까지 이루어진 이러한 빛나는 대목들은 르 아브르라는 空間을 當時의 그 어느 곳보다 意味深長하게 만들어주었던 셈.

    키냐르는 르 아브르 隣近의 베르뇌유쇠르아브르에서 名聲이 높은 音樂家 出身의 아버지와 言語學者 出身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幼年 時節 키냐르 가(家)의 食卓에서는 母國語와 여러 外國語가 오고 가고, 오르간을 비롯해 여러 樂器의 소리들이 울려 퍼졌던 것으로 傳해진다. 그는 母國語를 習得하기도 前에 無防備로 露出된 多重 言語와 소리에 對한 스트레스로 18個月부터 自閉症에 걸렸고, 及其也는 言語 拒否症과 拒食症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놀랍게도 키냐르는 르 아브르로 옮겨와 지내면서 두 番의 自閉症과 拒食症에서 벗어났고, 놀랍게도 自身의 平生의 伴侶로 오르간과 文學(言語)을 選擇했다. 그러니까, 키냐르는 사느냐 죽느냐의 絶體絶命의 岐路에서 自身을 膣式시켰던 바로 그 두 世界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正面 對決에 나선 것이다. 17世紀 숲 속에 隱遁한 비올라의 巨匠의 音樂과 삶을 다루어 1990年代 初 全 世界 觀客들에게 큰 反響을 일으킨 映畫 ‘世上의 모든 아침’은 키냐르의 小說이자, 作家가 直接 시나리오를 執筆한 作品으로 幼年期의 트라우마를 創造的으로 昇華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宣祖 또는 先輩 遺産의 깊이가 깊을수록 後輩는 헤아릴 수 없는 負擔感으로 입이 닫히고, 숨이 막힌다. 이 冊 ‘옛날에 對하여’는 두 番의 自閉症에 맞서서 作家로 噴出한 키냐르式 思惟의 結晶體로 그의 著作 全體를 아우르는 文學의 定義(定義)이자 王國이다. 印象的인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거의 모든 것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으로 作家는 ‘快樂’을 놓고 있는데, 그 快樂을 잘게 부수어 窮極的으로 살려내고자 하는 것이 ‘小說’이라는 點이다. 아니다, 마지막 文章을 다시 써야겠다. 作家가 살려내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人類가 繼續되는 限, 저절로 되살아나고야 마는 것으로!

    옛날에 한 사람이. (中略) 이렇게 日本의 옛날이야기는 始作된다. 옛날 옛적에 한 사람이…

    逐字的으로 옮기면, Jadis homme(옛날에 한 男子가)…

    Jadis tis(옛날에 어떤 사람이)…



    (本文의 몇몇 引用文의 行은 紙面 關係上 筆者가 任意로 붙여서 進行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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