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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年 넘게 遺骸 찾아 헤매는 한묘숙氏, 그 崎嶇한 삶|新東亞

30年 넘게 遺骸 찾아 헤매는 한묘숙氏, 그 崎嶇한 삶

“내가 二重스파이라고요? ‘미스테이크’예요”

  • 배수강│東亞日報 新東亞 記者 bsk@donga.com

    入力 2011-04-21 15: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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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戰爭孤兒 아버지’ 美 위트컴 將軍과 結婚해 ‘人生 2幕’
    • “홍콩에 다녀오시오” 特命… 20年間 中國 生活
    • 25次例 北韓 드나들며 遺骸 情報 蒐集
    • 갑자기 걸려온 電話… “오마니, 長津湖에 뼈다귀가 떠다녀요”
    • 박철언氏 回顧錄엔 “한묘숙은 正體不明의 女人”
    • “노랑머리 나온다”며 强制로 子宮摘出手術 받기도
    • ‘最初 公開’, 虛談 前 조평통 委員長의 訪北 招請狀
    30년 넘게 유해 찾아 헤매는 한묘숙씨, 그 기구한 삶
    그를 만나기 前, 記者는 그가 기센 女丈夫이거나, 돈 많은 마나님, 或은 美貌의 ‘마타하리’일 거라고 생각했다. 1979年 中國에 들어가 20餘 年間 머물며 中國과 北韓 高位層을 만나고, 北韓을 25回 드나들면서 ‘미션’을 遂行한 사람이니 普通은 아닐 거라는 豫斷(豫斷)에서다. 亦是 豫斷은 빗나가게 마련. 그에겐 未安하지만, 3月 末 그의 서울 한남동 아파트를 처음 찾았을 때 記者는 “따님은 어디 계세요?”라고 말할 뻔했다. 矮小한 할머니(키는 145㎝, 몸무게는 35㎏이다)가 “제가 한묘숙입니다”하고 먼저 얘기하지 않았다면. 4月1日 午後 그를 두 番째 만나던 날, 그는 中國 단둥(丹東)에 있는 누군가와 國際電話를 했다.

    “잘 있었어? (北韓) 官吏들하고 헤어졌어? 그래, 뭐래?…너는 괜찮니?”

    受話器 너머 “오마니”하고 부르는 한 男子의 목소리가 옆에 있던 記者의 귀에도 또렷이 들렸다. 韓氏는 반가움인지, 귀찮음인지 모를 妙한 表情으로 덤덤하게 말했다.

    “美軍 遺骸(遺骸)가 무더기로 發見됐대요. 長津湖 隣近에 비가 많이 와 ‘뼈다귀’가 둥실 떠다닌다나. 이番엔 쌀이나 醫療機器, 뭐 이런 걸 (가져오면) 좋겠다는데, 갈 時間이 되나 모르겠네.”

    한묘숙(86)氏는 그렇게 여러 次例 記者를 놀라게 했다. 斟酌은 했겠지만, 韓氏의 ‘미션’은 6·25戰爭 中 北韓에서 戰死한 美軍 遺骸를 찾아 美國의 家族들에게 傳達해주는 일이다. 단둥에서 그에게 電話한 사람은 北韓 官吏와 親한 一種의 連絡責이다. 北韓 內 美軍 遺骸나 ‘도그태그’(Dog Tag·軍番줄)를 찾으면 電話를 하는데, 쌀과 醫療機器는 連絡責에게 가져다주는 一種의 答禮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이 活動을 30年 넘게 해왔다. ‘미션’을 알리지 않고 活動하다 보니 別의別 소리도 다 들었다. 미친 사람, 二重스파이, 對北 로비스트….



    記者는 3月 末부터 4月 中旬까지 세 次例 그를 만났다. 여러 次例 電話 인터뷰도 했다. 補聽器를 꼈지만 그에겐 큰 소리로 또박또박 質問해야 했다. 오래된 記憶만큼 그가 말하는 年度와 統計도 明確하지 않았다. 한 次例 인터뷰 後 關聯 資料를 찾아 確認한 다음 인터뷰를 進行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種種 뭔가 不安한 듯 얘기하기를 꺼렸다. 情報機關에 끌려가 調査받은 經驗 때문인지, 論難거리는 될 수 있으면 避하고 싶어했다.

    한무숙·말叔氏와 姊妹之間

    遺骸 發掘이라는 그의 運命은 처음부터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韓氏는 作家인 한무숙(1993年 작고)·말숙씨와 姊妹之間이다. 伽倻琴 名唱 황병기氏는 그의 제부(弟夫)다. 아버지는 서울 鍾路區 옥인동의 소론(少論) 家門, 어머니는 통의동 老論(老論) 家門 出身. 아버지는 慶南 河東, 泗川 等에서 30年間 郡守로 在職했다. 獨立運動을 하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自決한 것으로 알려진 한길명氏는 그의 큰아버지다.

    韓氏 亦是 젊은 時節 忠南 天安과 서울 한남동에서 孤兒院을 運營하며 社會事業을 했다. 적어도 男便 리처드 위트컴(Richard S. Whitcomb·1894~1982) 將軍을 만나기 前까지 그는 社會事業이 天職인 줄 알았다. 위트컴 將軍은 6·25戰爭 때 釜山의 美軍 2軍需基地司令官을 지낸 人物. 1954年 准將으로 退役한 뒤 李承晩 大統領의 政治顧問으로 白堊館과의 連絡業務를 遂行했다. 위트컴 將軍 事後인 1985年, 그가 美國 LA에 設立한 ‘위트컴 希望財團’도 美軍 遺骸 發掘에 注力하고 있다. 韓氏는 이 財團의 理事長이고, 前 男便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LA本部를 이끌고 있다.

    “只今도 생각하면 우스워요. 恒常 韓服을 입고 다녔는데 1964年 어느 날 將軍이 洋裝을 하고 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洋裝을 하고 美國大使館에 갔는데 그날 結婚式을 올렸어요.”

    그는 男便을 ‘將軍’이라고 불렀다. 그 呼稱을 말할 때면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위트컴 將軍과의 結婚은 그에게 再婚이었다. 前 男便과 離婚한 後 美國 留學을 떠나려고 했지만 留學 情報가 없었다. 그 때 도움을 請한 人物이 將軍이었다. 將軍은 平素 그의 孤兒院을 찾아 戰爭孤兒들에게 膳物을 나눠주는 等 孤兒院 運營을 도왔다. 結婚 以後 親庭 家族들과는 生離別했다. 當時로는 生疏한 離婚에, 더구나 外國人과의 再婚으로 家族들은 그와의 連絡을 끊었다. 家族들은 ‘노랑대가리 나온다’며 半强制로 그를 病院으로 데리고 가 子宮摘出手術을 받게 했다.

    베트남戰爭 當時 美軍 顧問으로 사이공으로 간 將軍을 따라 그곳에서 몇 해를 보냈다. 어느 날 將軍은 불쑥 “홍콩에 한番 다녀오라”고 했다. 거기서 中國에 들어갈 수 있는 方法이 있는지 알아보라는 뜻을 살짝 내비쳤다.

    “遺骸를 가져오려면 北韓에 가야 하고, 그러려면 中國을 經由해야 하니 그때로서는 홍콩에서 方法을 알아봐야 했다.”

    그의 表現대로 홍콩, 臺灣을 100番도 넘게 드나들었다. 그곳에선 主로 中國이나 北韓 消息을 듣고 中國에 들어가는 方法을 찾았다.

    지도 들고 中國行

    機會를 엿보던 中 홍콩에서 알게 된 事業家의 招請으로 1979年 中國 進入에 成功했다. 그제야 將軍은 아내에게 “6·25戰爭 때 죽어간 美軍 兵士 遺骸를 故鄕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며 具體的인 ‘指令’을 내렸다. 將軍이 왜 中國 비자를 發給받으려고 그토록 애를 썼는지 理解할 수 있었다.

    그가 中國으로 갈 때면 將軍은 地圖 한 張과 만날 사람 리스트, 美國大使館 位置를 알려줬다. 將軍은 週(駐)프랑스 美國大使館에서 武官으로 일한 적이 있어 그때 사귄 中國 高位層을 잘 알았고 있었다.

    “이름을 밝히면 國際的으로 힘들어진다”며 그는 中國 高位層 人士에 對해 말을 아꼈지만, 記者의 재촉에 다음과 같이 짧게 힌트를 줬다.

    “中國 톈진(天津)의 甲富 왕광잉(王光英)氏는 英國에서, 동생 狂메이(光美)氏는 美國에서 工夫했죠?”

    왕광잉氏는 中國의 前 國家主席 류사오치(劉少奇·1898~1969)의 妻男. 두 살 아래 동생 狂메이氏는 류 前 主席의 아내다. 文化大革命 時期에 8年間 獄살이를 하다 復權돼 톈진시 副市長과 國際信託投資工事 副理事長을 지냈다. 韓氏가 王氏와 親分을 쌓을 즈음인 1983年에 王氏는 홍콩에서 ‘광대步業公社’를 設立했다. 中國 經濟發展에 必要한 尖端 技術과 外資 誘致를 위한 中國 政府의 戰略的 企業이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 前 總理는 그에게 ‘붉은 資本家’라는 名稱을 붙여줬다. 韓氏가 만난 사람들이 어떤 ‘그룹’인지 斟酌할 수 있는 대목이다.

    “베이징 서우두(首都)空港에 내리면 마중 나온 사람이 ‘紅치’(紅旗·中國 自動車 商標)를 끌고와 나를 에스코트했어요. 將軍이 다 連絡을 해놓았는지 그대로 따라가면 됐어요.”

    數十 次例 韓國과 中國을 오가다 그는 아예 中國에 눌러앉았다. 主로 베이징(北京)호텔과 젠궈(建國)호텔에 投宿했는데, 젠궈호텔 810號에서는 8年間 居住했다. 1982年 위트컴 將軍이 서울 용산 美8軍 내자호텔에서 心臟痲痹로 死亡할 때도 그는 中國에 있었다.

    “돌아가실 때도 ‘北韓에 묻힌 遺骸를 제발 美國으로 보내달라’는 말씀을 남겼대요. 얼마나 가슴 아프던지…. 그래서 이 일을 그만둘 수가 없었어요. 未婚이던 그가 구태여 나와 結婚한 건, 自身이 죽어도 이 일을 할 사람이 必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退役 美軍 出身인 김계현 위트컴 希望財團 理事의 생각도 비슷했다.

    “美軍 大領이나 將軍들은 進級을 위해 現地 女性과는 結婚하지 않는다. 出世를 다 버리고 한 理事長과 結婚한 것은 그 理由임이 분명하다.”

    30년 넘게 유해 찾아 헤매는 한묘숙씨, 그 기구한 삶

    1989年 虛談 조평통 委員長이 韓氏에게 보낸 招請狀. 安企部에 原本은 빼앗겼지만 韓氏는 複寫를 해 놓았다.

    中國에 오래 있다보니 그를 찾는 韓國 사람도 많이 생겼다. 韓中(韓中) 修交 以前이어서 1980年代 後半 韓氏는 駐中 韓國大使館 ‘비슷한’ 役割을 했다. 金永三(YS) 當時 統一민주당 總裁의 訪中(訪中) 要請 親書를 直接 共産黨 幹部에게 傳達했고, 大企業 人士들과 中國 高位層을 連結해주기도 했다.

    “저는 故鄕이 北韓이어서 當時 (1989年에 열린) 平壤祝典에 가려고 招請狀을 받고 싶었어요. 方法을 찾던 中 누군가가 ‘베이징 젠궈호텔에 있는 한 理事長을 찾아가 봐라’고 助言해 한 理事長을 만났어요. 그땐 다들 한 理事長을 찾던 時節이었어요.”(김계현 理事)

    “馬尾” 외치다 죽어간 美 海兵隊

    韓氏의 호텔에는 이처럼 中國이나 北韓 關聯 業務가 있는 사람들과 中國 高位層, 北韓大使館 職員들이 자주 찾았다. 이즈음 韓氏는 北韓의 虛談 祖國平和統一委員會(祖平統) 委員長과 鳶이 닿았다. 1990年 6月 北韓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것도 虛談의 招請狀이 있어 可能했다. 中國에 들어간 지 11年 만이었다.

    “當時 虛談은 김신(金九 先生 아들), 김복동(當時 노태우 大統領 妻男), 한묘숙 이렇게 세 사람을 招請했어요. 김신은 김일성이 죽기 前에 꼭 한番 보고 싶다고 招請한 거죠. 그런데 招請狀을 들고 (金浦)空港에 내리자마자 招請狀을 빼앗겼어요. ‘中情’(當時는 國家安全企劃部)에서 나와 나를 調査했는데, 나보고 金日成 앞잡이라고 하는 거예요.”

    3日間 調査받은 뒤 그는 無事히 풀려났다. 美國 市民權者인데다 美軍 將軍의 未亡人인 德이 컸다. 安企部 調査에서도 그는 遺骸에 對해선 緘口했다. 그는 安企部는 몰랐어도, 以後 美國은 그의 活動을 알고 있었을 것으로 推測했다. 그는 이때부터 安企部의 ‘主要 觀察 對象’李 된다. 招請狀에 얽힌 얘기는 記事 뒷部分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자.

    1990年代 初, 北韓을 드나들기 始作하면서는 韓氏는 本格的으로 遺骸 發掘 作業을 始作했다. 北韓에선 어딜 가든 指導員과 運轉手, 慘事가 따라붙었다. 먼저 膳物과 稱讚으로 好感을 산 뒤 親해지면 北韓의 外國人墓地와 長津湖에 對해 슬쩍 물어보는 式으로 情報를 蒐集했다.

    “長津湖 近處까지 갔을 때 北韓 사람이 묻더군요. ‘馬尾(Mommy)가 뭐냐’고요. 엄마라고 했더니, ‘아, 美國 놈들이 오마니를 찾다가 죽어갔구나’하더라고요. 長津湖 戰鬪 當時 美軍들이 죽어가며 ‘馬尾’하고 외쳤다는 거예요. 異域萬里에서 엄마를 찾으며 죽어간 불쌍한 靈魂을 생각하며 눈물이….”

    長津湖(長津湖)는 1950年 겨울 零下 40℃의 酷寒 속에 美 海兵隊 1師團 1萬餘 明과 中共軍 7個 師團 12萬餘 名이 熾烈한 戰鬪를 벌인 곳이다. 咸鏡南道 蓋馬高原 一帶의 長津湖에서 美 海兵隊 折半 以上이 戰死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戰鬪로 中共軍의 南下는 2週間 遲延됐고, 避亂民 等 20餘萬 名이 그 有名한 ‘興南 撤收’를 할 수 있었다. 生前 위트컴 將軍은 “長津湖에 數千 具의 美軍 遺骸가 있을 것”이라고 그에게 입버릇처럼 말했다.

    “北韓에서도 有害 얘기는 꺼내지 않았어요. 將軍도 一切 말하지 말라고 했거든요. ‘뼈다귀’ 찾으러 왔다면 아마 미쳤다고 했을 거예요.”

    그가 北韓에서 唯一하게 ‘事業 아닌 事業’을 하게 된 것도 長津湖 近處로 가기 위해서였다. 長津湖 가까운 곳에서 松耳버섯을 採取해 日本으로 輸出하는 事業. 돈은 썼지만, 죽어간 美軍 消息을 들을 수 있었다. 現地人들에게서 ‘數千 具의 美軍 屍體가 長津湖에 首長(水葬)됐다’는 이야기도 이때 들었다. 1999年까지 그는 스물다섯 番 訪北했지만, 訪北 招請狀은 數도 없이 받았다. 그때마다 갈 수는 없었다.

    “1萬5000달러(藥 1630萬원)가 없으면 안 들어갔어요. 그들(北韓 高位層)은 옷이나 醫藥品, 特히 日本約 求心(求心·心臟弱)을 많이 要求했어요. 옷도 렛떼루(상표) 떼고 (北韓에) 들여보내야 하는데, 옷이 너무 많아 렛떼루 떼는 職員을 雇用했을 程度였어요. 그냥 오라고 해도 빈손으로 갈 수가 있나요.”

    집 팔고 佩物 팔아 遺骸 發掘

    ▼ 그 많은 物品을 어떻게 보냈나요?

    “主로 中國에서 트럭에 실어가거나 託送貨物로 부치죠. 들고 갈 物件은 飛行機에 싣고….”

    ▼ 訪北 回數를 勘案하면 物品 購入費用만 50萬달러(約 5億4000萬원)는 들었겠는데요?

    “어휴, 더 들었죠. 滯留費에 交通費에, 다 合하면 100萬달러는 넘을 거예요.”

    ▼ 그 돈은 어떻게 마련했나요?

    “물려받은 財産과 將軍 年金으로 했죠. 佩物도, 집도 다 팔았어요. 政府든 企業이든 돈 한番 받아본 적 없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걸로 했지. 只今은 남은 게 別로 없어요. 다 쏟아 부었으니….”

    10億원이 넘는 家産을 ‘蕩盡(?)’했는데도 그는 ‘우습다는 듯’ 페니실린 이야기를 꺼냈다.

    “한番은 (北韓에서) 페니실린菌이 必要하다고 해서 가져다줬더니 깜짝 놀라더라고요. 只今까지 (付託은 해도 實際로) 페니실린菌을 들고 들어온 사람이 없었다나요. 그런데 濃縮하고 培養하는 技術이 없어 그걸 들고 제가 러시아로 가기도 했어요.”

    ▼ 北韓에서 고마워했겠군요.

    “그래서 努力勳章이라는 걸 줬어요.”

    ▼ 왜 美軍 遺骸 發掘에 執着하시죠?

    “좋은 일이잖아요. 將軍 維持도 받들고….”

    ▼ 成果는 있었나요?

    “1993年부터 단둥에서 일(美軍 遺骸 및 軍番줄 蒐集)을 해주는 사람이 連絡 오면 確認하러 갔어요. 도그태그 數百 個와 수많은 遺骨을 가져왔지만 大部分 假짜였어요. 소뼈度 있었고, 假짜 도그태그가 大部分이었죠. 처음부터 버릇을 잘못 들여놓았는지….”

    韓氏는 처음엔 遺骸를 確認하면 그 자리에서 수고費로 1000달러를 줬다. 하지만 遺骸와 軍番줄을 가져와 駐韓美軍에 依賴하면 大部分 ‘假짜’로 判明 나 차츰 額數를 낮췄다. 只今은 大部分 膳物을 준다.

    “美 國防部 傘下의 ‘戰爭捕虜·失踪者 事務局(DPMO)’에서 遺骸가 發掘되면 死亡·失踪者 名單과 맞춰보고 親姻戚 遺傳子 鑑識을 통해 眞僞를 밝힙니다. 正確해요. 그 사람들은 뼈 色깔만 보고 美國人인지 아닌지 맞힙니다. 아, 이런 사람들에게 넘겨받은 도그태그를 確認하니 살아서 있는 사람 거였어요. 假짜를 만들었는가 봐요. 이 일은 美軍이 나서야 하고 저는 協助하는 役割밖에 안 돼요.”

    소뼈와 假짜 軍番줄

    여기서 暫時 北韓과 美國의 遺骸 送還 問題를 짚어보자. 遺骸 送還은 1954年 유엔 側이 北韓으로부터 4011具의 遺骸(國軍 遺骸 2144具, 나머지는 유엔 參戰軍 遺骸)를 돌려받은 以後 暫定 中斷됐다. 1990年代 初 北韓은 ‘美軍 遺骸’를 發掘했다며 補償金을 要求했다. 1996年부터는 本格的으로 北韓에 人力과 裝備를 보내 遺骸 發掘 作業을 벌여 220餘 具의 美軍 遺骸를 發掘했다. 하지만 2005年 北核 問題로 北·美關係가 惡化되면서 美國 發掘 人力의 安全 問題로 作業을 中斷했다. 只今까지 133具의 身元이 確認돼 家族의 품으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韓氏는 北韓에서 發掘한 遺骸는 몇 具를 除外하고는 ‘假짜’일 거라고 斷言했다.

    “北韓은 倉庫를 만들어 遺骸를 쌓아두고 있어요. 그런데 그 有害가 누구 건지도 몰라요. 檢査도 안 해요. 美軍 遺骸를 美國과의 協商카드로 생각하니 量만 많으면 돼요. 大部分 다른 사람 유해일 겁니다. 어휴, 이젠 너무 歲月이 흘렀어요.”

    ▼ 假짜로 判明 나면 火가 나지 않나요?

    “화내면 나만 損害잖아요. 하나라도 더 찾아내야 하니까요. 이 일은 五臟六腑 다 내놓고 해야 해요. 죽은 사람이건 산 사람이건 親切하게 해주고 脾胃를 맞춰야 합니다.”

    ▼ 힘들지 않았나요?

    “….”

    그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듯 오른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五臟六腑 다 내놓고’ 일을 했지만, 抑鬱한 건 抑鬱한 일. 그 中 한 가지는 박철언 當時 大統領政策擔當補佐官과 얽혀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1989年 박철언氏가 對北 密使로 北韓을 오가며 北側 關係者를 만난 事實이 野黨 議員들에게 알려지면서 政治權 이슈로 떠올랐지요. 그때 野黨 議員들에게 그가 오간 事實을 알려준 게 나라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이 때문에 中庭(安企部)에 잡혀가 苦生했습니다.”

    박철언氏는 自身의 回顧錄 ‘바른 歷史를 위한 證言’ 2卷에서 韓氏를 ‘正體不明의 女人’이라고 描寫하면서 이렇게 記述하고 있다.

    “金氏 將軍의 密入北 祈禱와 關聯, 調査하던 中 드러났다. 한묘숙이라는 62歲 女性을 통해 김영삼(當時 統一민주당) 總裁가 祕密裏에 中國 訪問을 推進하는 거 같은데, 平壤 工作 一環인 거 같다. 通路나 時期가 不適切하다…(중략)…다음날(1989년 8月10日) 靑瓦臺 消息黨에서 노태우 大統領은 ‘工作的인 브로커에 말려 김복동 將軍도 中國 訪問 問題에 連累돼 있는 것 같다. 한묘숙이라는 女子가 交涉했던 模樣인데 注意할 必要가 있다. 내가 安企部長에게도 그렇게 일러놓았다’고 했다.”

    韓氏는 ‘어이없는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두 金氏나 박철언氏와는 當時 一面識도 없어요. 北韓 官吏가 호텔로 招請狀 3張을 준 거뿐입니다. 저도 冊을 보고 ‘그래서 박철언氏가 그동안 나를 미워했구나’하고 생각했어요. 冊이 나오고 周邊에선 ‘가만있느냐’고 했는데, 그런 사람하고 싸우기도 싫고, 내가 政治하는 사람도 아니잖아요? 오직 遺骸 때문에 가는 건데. 關心 없어요.”

    韓氏는 그래서인지 언제부턴가 ‘二重스파이’로 疑心받았다고 했다.

    “1990年度에 코미디언인 故(故) 이주일氏 一行이 베이징에 왔더라고요(당시 이주일氏는 演藝人 應援團長으로 베이징을 訪問했다). 딸과 함께 만났는데 누군가 딸을 데리고 나갔어요. 言語와 地理를 모르니 通譯가이드로 쓰려나보나 했어요. 그런데 저녁에 돌아온 딸이 그러더라고요. 自己를 데리고 간 사람은 安企部 職員인데 ‘한묘숙氏는 間諜이니까 어머니라고 하지 말라’고 했다고. 나를 間諜으로 본다는 생각에 헛웃음이 나왔어요. ‘옛날 女子’가 무슨 間諜을 합니까?”

    한창 北韓을 드나들며 情報 蒐集하던 1993年 어느 날, 平壤 고려호텔 5層 255號에 있을 때는 한 職員이 올라왔다.

    “오마니 큰일 났어요. 아랫동네(南韓)에서 오마니를 二重스파이라고 하는가 봐요. 39號室 높은 兩班이 보자고 해요.”

    39號室은 김일성 等 北韓 指導部의 祕資金 管理와 外貨벌이를 책임진 機關. 그는 39號室에 가서도 “내가 二重間諜으로 보입니까? 그건 미스테이크예요. 나는 마타하리가 아닙니다”라고 反駁했다.

    30년 넘게 유해 찾아 헤매는 한묘숙씨, 그 기구한 삶

    男便인 위트컴 將軍 寫眞은 그의 寢臺맡에 놓여 있었다.

    1999年 6月에는 大型 誤報事件度 터졌다. 韓國系 美國人 ‘카렌 限’氏가 北韓에 抑留됐는데 그가 한묘숙이라는 記事였다. 國內 新聞 大部分이 ‘한묘숙=카렌 限’이라고 報道했다. 當時 記事를 살펴보자.

    “抑留된 사람은 有名 女流 小說家 한무숙·말叔氏와 姊妹之間으로 國際 로비스트 한묘숙氏다.…남북한에 널리 알려진 로비스트로 서울을 隨時로 드나들며 政府의 對北 人士들과도 여러 次例 接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985년부터 最近까지 삼성그룹과 連繫해 對北 에이전트 活動을 해온 것으로 確認되고 있다.”

    當時 그는 韓國에 있었고, 誤報를 낸 記者들이 그를 直接 찾아와 謝過하고 訂正記事를 냈다.

    “카렌 恨이라는 사람이 ‘將軍 夫人’이라며 제 行世를 하고 다녔대요. 그 사람과 같은 호텔(베이징호텔)에 있기도 했는데 서로 잘 몰랐어요. 三星 일을 도왔는데…. 저는 有害 때문에 한 거지, 企業 돈 안 받아요.”

    그는 自身을 미워한 人士들과 그에게 付託했던 여러 企業인 얘기를 했지만 ‘오프더레코드’(非報道)를 要請했다. 1999年까지 中國에서 北韓을 오갔던 韓氏는 以後 中國과 北韓 關聯 일을 整理하고 돌아와 現在는 단둥 連絡責과 情報를 交換하고 있다. 體力的으로, 金錢的으로 現地에서 活動하는 것도 無理고, 美國의 財團 本部 일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위트컴의 使命感과 人類愛

    士大夫 家門에서 태어나 戰爭孤兒를 돕고, 美軍 將軍과 結婚해 30年 넘게 美軍 遺骸를 찾아 돌아다니는 韓氏의 一生은 한 篇의 大河(大河)小說 같다. 아무리 옳은 일이고, 男便의 遺志를 받든다 해도, 家産을 蕩盡하면서까지 그 危險한 일을 왜 했을까. 처음엔 韓氏의 活動을 額面 그대로 믿기 어려웠지만, 그가 “우리 將軍” 하며 無限 信賴를 보내는 ‘將軍’에 對해 取材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取材를 綜合해보면, 男便 위트컴 將軍은 使命感과 愛國心이 徹底한 軍人이었다. 人類愛를 實踐하기 위해 不斷히 努力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1,2次 世界大戰에 參戰했고, 2次 世界大戰 때는 노르망디 上陸作戰에도 參加했다. 平素 누군가가 軍用 종이에 메모라도 하려면 “政府 資産을 왜 함부로 쓰느냐”며 다그칠 程度로 工事(公私)를 分明히 했고, 上司가 韓氏를 軍用車에 태우려 해도 같은 말을 하며 辭讓했다. 잠들기 前에는 반드시 손手巾과 옷을 直接 빨아 빨랫줄에 널었다.

    軍需司令官으로 있던 1953年, 釜山逆轉 大火災가 發生하자 直接 罹災民收容所를 設置했고, 軍需物資를 罹災民에게 풀어 美 議會 聽聞會에 서기도 했다. 當時 “戰爭은 總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나라 國民을 위하는 것이 眞正한 勝利”라고 말해 議員들의 起立拍手를 받았다. 現在의 釜山大 캠퍼스를 지을 때는 25萬달러 相當의 建築資材를 支援하는가 하면, 麾下 工兵部隊로 하여금 進入路와 敷地造成 工事를 하도록 도왔다(부산대학교 60年史). 戰爭孤兒 診療를 위해 釜山 메리놀病院 新築을 主導했고, 部隊員들의 月給 1%를 新築基金에 獻金하도록 했다(메리놀병원 50年史). 退役 以後에는 韓美財團을 만들어 수많은 孤兒院을 도왔다. 釜山日報는 1982年 7月23日 ‘韓國戰爭 孤兒의 아버지, 釜山 UN 墓地에…’라는 題目으로 그의 訃告 記事를 다뤘다. 그가 그토록 念願했던 遺骸 發掘도 이러한 使命感과 人類愛 實踐의 한 方案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韓氏는 事後 男便을 만나 “부끄럽게도 그냥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日本이 降伏한지도 모르고 28年間 괌에 숨어 산 日本軍 要코이 쇼이치(橫井庄一·1915~97)가 歸國 當時 했던 그 一聲(一聲), “부끄럽게도 살아 돌아왔습니다”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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