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農村 總角에게 希望 주는 농협의 國際結婚 仲介事業|新東亞

農村 總角에게 希望 주는 농협의 國際結婚 仲介事業

現地 取材 - 慶尙道 사나이들, 베트남에 장가들던 날

  • 김희연│新東亞 客員記者 foolfox@naver.com

    入力 2011-04-21 11:5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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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해 統計廳이 發表한 國際結婚 比率은 婚姻 10件當 1件인 10.8%였다.
    • 特히 結婚 適齡期 女性을 찾기 힘든 農村 地域에서는 韓國人 新郞이 外國人 新婦를 맞이하는 일이 더욱 흔해졌다.
    • 農村의 現實을 보다 못한 農協中央會가 아예 國際結婚 仲介事業에 뛰어들었다.
    • 첫 示範事業을 통해 合法的으로 誕生한 韓國-베트남 夫婦의 結婚式과 新婚旅行 現場에 同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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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문섭 마이 캉 커플(가운데)의 結婚式에 김종삼 허우 커플(왼쪽)과 조찬형 他剩 커플이 賀客으로 參席했다.

    2011年 4月 仁川國際空港發(發) 베트남 하노이行(行) 飛行機 안. 慶北 聞慶에서 온 엄문섭(55), 김종삼(43), 조찬형(42)氏에겐 여느 乘客들과 다른 각별한 意味가 있는 旅行길이다. 베트남에 있는 各自의 新婦 마이 캉(36), 허우(35), 他剩(22)氏를 만나 結婚式을 올리고 짧은 新婚旅行도 다녀올 참이기 때문이다. 이들 韓國 男性과 베트남 女性의 結婚을 周旋한 곳은 다름 아닌 農協中央會 農村自願開發部(部長 김성훈)다. 農村에는 이미 多文化家庭이 折半을 넘어선 것이 現實이어서, 그동안 농협은 組合員의 外國人 아내들에게 營農과 한글을 가르치고 母國 訪問을 支援하는 等 多樣한 多文化 關聯 事業을 進行해왔다.

    農協中央會가 配偶者 없이 生活을 꾸리느라 어려움을 겪는 組合員을 對象으로 國際結婚 仲介業 登錄을 한 것은 지난 2009年이다. 2010年 6月에는 多文化 關聯 事業에 熱心히 參與해온 慶北 聞慶의 산동농협에서 事業說明會를 開催했고, 같은 해 11月 韓國의 베트남女性文化센터와 ‘베트남 國際結婚 業務推進’ 協約을 締結했다. 바로 다음 달인 12月에는 組合員과 組合員 子女인 男性 네 名이 베트남으로 건너가 現地 女性들과 선을 보고 約婚式을 치렀다. 이番 베트남 訪問은 結婚이 成事된 세 雙이 結婚式을 올리는 한便 베트남 當局과 인터뷰를 해 結婚을 인정받는 節次를 거치기 爲한 것이었다.

    透明한 身上 公開가 原則

    이番에 농협이 周旋한 세 雙의 結婚이 特別한 理由는 韓國 男性이 合法的으로 베트남 女性과 結婚하는 첫 事例라는 點이다. 이미 周邊에서 韓國 男性과 結婚한 베트남 女性을 여럿 봐온 韓國人이라면 조금은 놀랄 만한 事實이다. 現在 베트남 女性과 結婚을 周旋하는 業體들은 우리나라의 國際結婚 仲介業法에 依據해 各 市道에 登錄돼 있다. 그러나 베트남 當局에서는 公認받지 못했다는 것이 問題다.

    베트남에서 國際結婚은 女性聯盟이라는 곳에서 總括한다. 女性聯盟은 우리나라의 女性家族部에 該當하는 준(準)국가기관이다. 兩性平等을 重視하는 社會主義 國家 베트남에서 꽤 높은 位相을 차지하고 있다. 女性聯盟의 家族社會과는 15個의 結婚志願센터(MSC)를 運營하고 있는데, 이 結婚支援센터가 國際結婚을 希望하는 女性을 對象으로 紹介와 相談, 敎育을 擔當한다. 大部分의 베트남 國際結婚은 이 센터를 통하지 않고 社說 仲介業者가 女性들을 募集해 이뤄진다. 社說 仲介業者는 男性 或은 女性에게까지 手數料를 받아 利益을 벌어들인다. 이 가운데는 單純히 成事率을 높이기 위해 新郞新婦 候補에 對한 虛僞 情報를 公開하는 곳도 없지 않다.



    “농협의 新郞 候補들은 女性聯盟에 登錄된 베트남 女性들의 데이터베이스를 볼 수 있습니다. 反對로 新婦 候補들도 同等하게 농협이 保證한 新郞 候補들의 個人 身上을 確認할 수 있고요. 兩쪽의 自發的인 意思가 確認돼야 맞선을 볼 수 있으며, 結婚에 이르는 모든 節次가 當事者의 自由意志에 따라 進行됩니다.”

    韓國 男性들과 함께 베트남을 訪問한 농협 農村自願開發部 雇傭支援팀 최호영 次長의 말이다. 농협이 周旋한 이番 國際結婚은 하루나 이틀 동안 團體로 선을 본 다음 雰圍氣에 떠밀려 旅行 한 番에 結婚까지 超高速으로 하던 慣行과는 달리 進行됐다. 네 名의 新郞 候補는 지난해 12月 첫 旅行에서 베트남 女性들과 專擔 通譯士를 사이에 두고 一帶一路 맞선을 봤다. 선을 볼 때는 相對方을 把握할 수 있는 充分한 時間이 割愛돼 사흘 동안 다섯 名의 女性을 만난 이도 있다. 韓國 男性이 마음에 들어 해도 베트남 女性이 拒否할 수 있기 때문에 關係者들은 焦燥한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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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삼 허우 커플이 베트남 하이펑 집에서 結婚式을 올린 뒤 神父 家族들과 記念撮影을 하고 있다.

    運 좋게도 첫 番째 맞선에서 結婚 相對를 찾았으나, 結婚式 日程이 이番에 베트남을 訪問한 세 夫婦보다 늦어진 이정훈(29), 르엉(22)氏 夫婦는 이番 結婚 仲介의 自律性을 잘 보여주는 事例다. 르엉氏는 結婚을 決定하기까지 拒絶과 承諾을 여러 次例 反復했다고 한다. 베트남에서는 結婚을 決定할 때 父母와 兄弟들의 影響力이 韓國보다 훨씬 큰 便이다. 르엉氏는 이정훈氏와 交感했다가도 집에 돌아가서는 마음이 흔들려 每日 自身의 決定을 飜覆했다. 르엉氏는 結局 結婚 決心을 굳혔으나 結婚에 골인하기까지는 함께 線을 본 다른 夫婦들보다 오래 걸릴 듯하다.

    까다로운 節次 通過해야

    두 番째 베트남 旅行의 中心 日程은 結婚式이라기보다 法務部 인터뷰였다. 베트남에서 國際結婚에 關係하는 組織은 女性聯盟만 있는 것이 아니다. 不法 國際結婚 仲介行爲를 團束하는 公安部, 國際結婚 法令을 施行하고 管理하는 法務部, 海外 駐在公館에서 管理와 監督을 맡는 外交部 等의 協助를 받아야 結婚이 認定된다. 韓國에서는 夫婦 同意 後 婚姻申告만 하면 結婚이 成立되지만, 베트남에서는 關係機關의 許可를 받도록 하고 있다. 特히 國際結婚이라면 結婚에 强制性은 없는지, 베트남 女性이 外國에 가서 便安하게 生活할 수 있는지를 嚴格하게 審査한다. 미리 提出해야 하는 書類도 旅券 外에 出生證明書, 家族關係證明書, 健康檢診 結果 等 여러 가지다.

    베트남 新婦들은 約婚 後부터 結婚式을 치르기 前 두 달 동안 베트남女性文化센터에서 韓國語와 韓國料理를 배웠다. 週 5日 點心時間을 除外하고 6時間 동안 每日같이 敎育이 이뤄졌다. 인터뷰 豫想 質問에 對한 對答도 事前에 練習했다. 神父들의 結婚 節次를 도맡아 支援한 베트남女性文化센터는 베트남 女性이 韓國에서 잘 定着할 수 있도록 持續的으로 돕는다.

    베트남 法務部에서 인터뷰가 있던 날, 韓國에서 온 新郞들도 緊張한 氣色이 歷歷했다. 女性이 自意로 選擇한 結婚인지, 結婚을 하는 過程에서 不法的인 行爲는 없었는지, 韓國에 가서 어느 程度 對話가 可能한지를 보는 인터뷰지만 新郞에게도 女性과 責任 있는 結婚生活을 할 수 있는 사람인지를 가늠하기 위한 質問을 던진다. 新婦 虛于氏가 사는 하이펑 性 法務部에서 인터뷰를 마친 金宗三氏는 인터뷰 中에 唐慌했다고 한다.

    “제가 再婚이다 보니, 왜 離婚을 했는지 묻더라고요. 왜 何必 베트남 女性과 結婚하려는지도 궁금해 하고요. 속으로는 깜짝 놀랐지만 올바른 配匹을 만나느라 여기까지 힘들게 왔고, 놓치면 서로 後悔할 것이라고 自信 있게 答辯을 했죠.”

    新婦 마이 캉氏가 사는 河이즈엉 性 法務部에서 인터뷰를 마친 엄문섭氏는 세 雙 가운데 가장 먼저 結婚 認定書를 받았다. 嚴氏는 新郞, 新婦를 앞에 세워놓고 擔當 公務員이 誓約을 하게 하는 節次가 結婚式만큼이나 떨렸다고 털어놨다. 김종삼-허우, 조찬형-他剩 夫婦도 하이펑 性 法務部의 인터뷰를 無難히 通過했다.

    멀리 베트남에서 新婦를 맞아들이는 세 新郞에게는 어떤 事緣이 있을까. 畜産業을 하는 엄문섭氏와 農業에 從事하는 金宗三氏는 이番이 再婚이다. 製造業體에 다니는 조찬형氏는 婚期를 놓친 招魂남이다. 셋 다 本人의 自發的인 생각보다는 周邊에서 勸誘해 國際結婚을 考慮했다고 말한다. 조찬형氏의 境遇 농협 組合員인 父母의 입김이 크게 作用했다.

    “婚期가 늦어져도 父母님이 負擔을 주거나 壓迫하시진 않았어요. 그런데 농협에서 하는 國際結婚 說明會를 듣고 나서는 成火를 하시더라고요. 믿을 만한 자리라고 생각하신 것 같아요.”

    金宗三氏와 엄문섭氏는 子女들이 등을 떠밀었다. 열두 살짜리 딸을 둔 金宗三氏는 自身의 아내이자 딸의 어머니가 되어줄 女性을 찾았다. 아이와 나이 差異가 얼마 나지 않는 20代 女性은 맞선 段階에서부터 拒絶하기도 했다. 結局 막내딸이지만 持病이 있는 아버지를 구완하느라 婚期를 놓친 虛于氏가 配匹이 됐다. 첫 番째 旅行에서 結婚을 決定한 後, 虛于氏는 金宗三氏의 딸과도 자주 通話한다. 金氏의 딸은 “學校에 필리핀이나 베트남 出身 어머니를 둔 親舊들이 折半이 넘는다”며 “엄마, 보고 싶어. 빨리 韓國에 와요”라고 살갑게 받아준다고 한다.

    엄문섭氏에게는 서른이 넘은 長成한 아들과 딸이 있다. 喪妻한 아버지가 좋은 女性을 만나 苦生을 더는 것이 子息들의 所望이었다고 한다. 嚴氏는 “남 부끄럽다”는 理由로 固辭하다가 농협의 紹介로 베트남까지 왔다. 嚴氏의 아내가 된 마이 캉氏에게도 다섯 살배기 딸이 있다. 嚴氏는 이 딸도 韓國에 데려와 키울 생각이다. 맞선 때부터 마이 캉氏와 딸이 韓國 사람과 생김새가 비슷해 더 好感이 갔다고 한다. 마이 캉氏도 嚴氏의 子女를 “親子息처럼 對하겠다”며 好意的인 反應을 보였다고 한다.

    집에서 結婚잔치를 여는 베트남

    세 雙의 夫婦는 따로 結婚式을 치렀다. 旅行期間에 짧게 合同結婚式을 여는 旣存의 國際結婚과는 다른 風景이다. 金宗三氏와 조찬형氏는 各各 하이펑에 있는 新婦 虛于氏와 他剩 氏의 집에서, 엄문섭氏는 河이즈엉의 한 禮式場에서 結婚式을 올렸다. 베트남의 一般的인 結婚 風習은 新郞이 新婦 집을 訪問해 父母에게 許諾을 求하는 一種의 約婚式을 거친다. 이때는 新郞 집에서 形便에 따라 셋에서 아홉 가지에 이르는 物品을 準備해 新婦 집에 傳達한다고 한다. 主로 떡, 술, 돼지, 담배 等이다. 結婚式 때는 前날 저녁과 當日에 新郞과 新婦 兩쪽 집에서 잔치를 연다. 最近에는 禮式 當日에 食堂이나 禮式場을 求해서 結婚式을 하는 事例도 많아졌다고 한다. 禮式場에서 式을 擧行하는 夫婦라도 兩쪽 집을 訪問해 父母에게 人事를 하고 그 집에서 모시는 神을 기리는 祭壇 앞에 例를 갖춘다.

    結婚式 前날 저녁, 虛于氏 家族이 新郞 金宗三氏와 그의 家族을 代身해 농협과 베트남女性文化센터 一行을 집으로 招待했다. 베트남에서는 普通 結婚式 前날 저녁에 新郞이 金이나 다이아몬드 같은 禮物을 新婦에게 준다. 金宗三氏 一行은 韓國에서 準備해 간 人蔘 等을 膳物했다. 虛于氏 집에는 臨時 火덕이 設置돼 있었고 一家親戚들이 우물가에 모여 다음날 쓸 飮食 材料를 손질하고 있었다. 이날 열린 베트남式 相見禮는 “父母님이 걱정하시지 않도록 韓國에 가서도 사랑으로 보살피며 잘 살겠다”는 金宗三氏의 다짐과 親戚들의 德談으로 마무리됐다.

    結婚式 當日엔 打잉氏와 虛于氏 집에서 잔치가 벌어졌다. 베트남에서는 新郞이 부케를 들고 新婦 집에 가 新婦에게 쥐여주는 것으로 結婚式이 始作된다. 新郞新婦는 第一 먼저 新婦 아버지나 아버지가 없을 境遇 그 役割을 代身하는 사람의 印度를 받아 祭壇에 人事를 한다. 特別한 式은 따로 없다. 司會者가 웨딩 케이크를 자르고 샴페인을 터뜨리는 簡單한 行事를 進行하고, 主禮 없이 그 집의 家長이 簡單한 人事말을 한다. 新郞과 新婦는 半指만을 交換하고, 新婦의 父母나 親戚들은 新婦에게 持參金 兆로 땅이나 金을 건네기도 한다. 音響機器를 設置해 願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노래를 부를 수 있고, 그 노래를 들으며 賀客들은 먹고 마시고 논다. 新郞은 新婦를 데리고 新郞 집에 가 다시 비슷한 節次를 거친다고 한다. 이番 結婚式은 新郞의 집이 韓國에 있고 時間의 制約도 있어 몇 가지 節次를 省略하고 進行됐다. 다음날 禮式場에서 結婚式을 올린 엄문섭-마이 캉 夫婦도 웨딩 케이크를 자르고 샴페인으로 乾杯한 後, 養아버지의 人事말을 듣는 것 外에 行事는 하지 않았다.

    서로 다른 文化 受容이 關鍵

    新婚旅行으로는 하이펑과 河이즈엉에서 가까운 하노이에서 1泊2日을 지내기로 했다. 아직 韓國말이 서툰 아내들과 보내는 時間이지만, 함께하는 經驗이 늘어날수록 마음의 距離가 줄어들 것이다. 나이가 가장 어린 新婦 打잉氏는 韓國말을 익히느라 餘念이 없었다. 같은 事物을 놓고 韓國말로는 어떻게 發音하는지, 베트남末路는 어떤 소리가 나는지 서로 배우는 것만으로도 時間이 훌쩍 갔다. 初級 베트남語 敎材를 들고 온 엄문섭氏는 아내 마이 캉氏에게 電子辭典을 膳物하기도 했다.

    베트남 女性들이 韓國을 친숙하게 여기고 韓國 男性을 選好하는 것은 드라마의 影響도 크다. 韓國에 시집간 親舊들이 잘사는 모습이 그 自體로 좋은 弘報 效果를 내기도 한다. 實際로 가는 곳마다 많은 베트남 사람이 周邊에 新婦감이 있으니 좋은 韓國 新郞감이 또 있으면 紹介해달라고 하기도 했다. 베트남 女性文化센터 구교훈 事務總長은 “漠然히 韓國에 對해 幻想을 가지고 오면 問題가 생길 수 있다”면서 “나라보다 男便감의 됨됨이를 보고 選擇해야 問題의 素地가 적어진다”고 助言했다. 엄문섭氏의 아내 마이 캉氏는 “新郞의 첫印象이 착해 보였고 같이 지낼수록 親切해서 맘에 들었다”고, 金宗三氏의 아내 虛于氏는 “男便이 맞선 以後 韓國에 돌아가서도 자주 電話를 하며 마음을 傳해줬다. 떨어져 있어도 따뜻한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조찬형氏의 아내 打잉氏는 “平生 아껴주면 그것으로 足하다”고 한다.

    國際結婚을 위해 韓國 男性들도 多文化 敎育을 받는다. 그間 韓國 男性이 國際結婚을 통해 만난 女性에게 言語暴力을 加하거나 甚至於 常習的인 毆打를 하는 不美스러운 事例가 種種 있었다. 이에 맞서 韓國 法務部에서 出國 前 素養敎育을 義務化한 것이다. 앞으로 女性에 對한 偏見을 없애는 性 인지 敎育, 國家나 民族의 優劣을 가리지 않도록 하는 多文化 敎育이 더욱 强化돼야 할 것이다.

    베트남 當局도 國際結婚의 弊害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結婚 節次를 漸漸 더 嚴格하게 修正해나갈 豫定이라고 한다. 베트남 女性聯盟이 韓國 側 協力 相對로 베트남女性文化센터를 選擇한 것에서도 베트남 側의 憂慮를 읽을 수가 있다. 베트남女性文化센터는 大邱에 있는 非營利 奉仕團體로 2006年에 設立됐다. 그리 크지 않은 團體임에도 數年間 韓國 男性과 結婚한 베트남 女性들을 꾸준히 支援하며 女性聯盟의 信賴를 얻을 수 있었다. 애初 많은 團體가 베트남 女性聯盟과 손잡기를 願했지만, 베트남女性文化센터만한 믿음을 주지 못한 것이다. 베트남女性文化센터 亦是 수많은 民間業體의 協力 提案을 받은 가운데, 國際結婚 仲介를 非營利事業으로 進行하겠다는 農協中央會를 選擇했다.

    家族과 이웃의 따뜻한 配慮 必要

    드디어 農協中央會와 베트남女性文化센터의 첫 結實인 세 雙의 夫婦가 誕生했다. 아직은 튼實한 열매라기보다 갓 고개를 내민 새싹과도 같은 段階다. 5月에 新婦들이 韓國에 들어오고 나서 이들 夫婦가 얼마나 健康한 生活을 해나가느냐가 問題다. 結婚은 國籍이 같은 男女가 해도 配慮와 讓步, 理解가 없이는 維持되기 힘들다. 事業 主體인 농협과 베트남女性文化센터의 相談과 支援이 繼續되겠지만, 세 雙의 夫婦가 잘 살려면 두 사람의 努力 外에도 新郞 家族과 이웃들의 따뜻한 關心과 愛情이 뒷받침돼야 한다.

    조찬형氏와 打잉氏는 조氏 父母와 한 집에서 살 豫定이다. 조氏는 “言語나 料理는 時間을 두고 차차 배우면 되겠지만, 그보다 文化 差異가 問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自身과 아내, 그리고 父母가 各自 다른 價値觀을 調律할 수 있을지가 只今으로서는 걱정된다고 했다.

    사흘 동안 河이즈엉에 머물며 아내 마이 캉氏의 家族과 親舊들을 두루 만난 엄문섭氏는 “베트남 사람들의 삶을 가까이서 들여다볼 수 있어서 재밌었다”고 所感을 밝혔다. 아내의 나라를 理解하기 위한 努力이 엿보였던 嚴氏는 國籍의 差異보다 나이와 都農의 差異가 더욱 커 보인다고 했다. 都市에 살다온 젊은 나이의 마이 캉氏가 慶北 聞慶에 適應할 수 있을지에 對한 念慮다. 비슷한 理由로 國際結婚을 하는 韓國 男性들이 居住地나 子女 有無를 속이는 境遇가 種種 있다. 嚴氏와 마이 캉氏는 正直하게 서로의 情報를 公開한 狀態에서 만났는데도 想像과 現實은 다를 수 있어서 苦悶되는 模樣이었다.

    한便 韓國에서는 베트남에 들르기가 어렵지 않지만, 베트남의 家族들이 韓國을 訪問하기는 쉽지가 않다. 不法 滯留를 憂慮한 韓國 쪽에서 父母 外에는 비자를 잘 내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韓國에서도 費用이나 時間 탓에 베트남에 자주 오가기가 힘들 수 있다. 神父는 男便 하나만을 믿고 家族을 남겨둔 채 故鄕을 떠나오는 셈이다. 金宗三氏의 아내 허우 氏는 “내 故鄕은 베트남이지만, 이제 男便의 나라인 韓國이 내 나라”라면서도 “앞으로 베트남의 家族들을 몇 番이나 더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言語부터 飮食, 文化까지 모든 것이 다른 두 나라. 韓國의 新郞과 베트남의 新婦가 만났다. 그래도 差異點보다 더 많은 共通點을 發見하고, 사람을 國籍이 아닌 個人으로 判斷하는 態度가 要請된다. 韓國은 벌써 多文化社會에 접어들었고, 農村 地域에서 多文化家庭의 比率이 折半을 넘어서고 있다. 우리도 이제 多文化社會를 準備할 段階가 아니라 多文化社會가 이미 現實로 펼쳐지고 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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