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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의 近代化 追求한 實學的 實用主義者 朴智元…中國語共用化론 提唱한 急進 改革主義者 박제가|新東亞

朝鮮의 近代化 追求한 實學的 實用主義者 朴智元…中國語共用化론 提唱한 急進 改革主義者 박제가

朴趾源과 박제가

  • 김호기│ 延世大 敎授·社會學 kimhoki@yonsei.ac.kr

    入力 2011-04-20 15:4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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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企劃을 始作하기로 했을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知識人을 꼽으라면 바로 楚亭 朴齊家다. 個人的 偏見인지 몰라도 朴齊家야말로 朝鮮時代 最高의 ‘問題的 知識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問題的이란 두 가지 意味를 갖는다. 이른바 모더니티에 正攻法으로 對決했던 것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平生 그를 따라다녔던 庶子 出身이라는 社會的 拘束에도 그가 보였던 膽大한 態度다.
    조선의 근대화 추구한 실학적 실용주의자 박지원…중국어공용화론 제창한 급진 개혁주의자 박제가
    “너는 시집간 지 10年이 넘도록 子息을 낳지 못하고 죽었으니… 뒷날로 보면 後孫이 끊어지고 말았구나!… 나는 가고 싶었지만, 職責上 함부로 道의 境界를 넘을 수 없어, 墓誌銘을 지어 壙中에 넣는다. 後世사람들은 이를 보고 네가 精油 朴齊家의 딸임을 알 것이다. 名을 짓는다.”

    朴齊家가 더없이 사랑하던 둘째딸 尹氏 夫人이 죽었을 때 쓴 글이다. 이 悲感한 글을 읽고 나는 두 가지를 생각했다. 하나는 子息을 먼저 보내야만 하는 父母의 애끊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朴齊家의 限없이 드높은 自尊心이다. 서세동점(西勢東漸)이 始作되던, 새로운 社會變動의 기운이 꿈틀거리던 朝鮮 後期의 한가운데를 거침없이 걸어갔던 知識人, 그 自身의 表現을 빌리면 ‘千年 뒤에도 千萬 名의 이들과는 다른’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自己正體性을 堂堂히 드러냈던 知識人이 바로 박제가다. 朴齊家와 그의 스승 燕巖 朴趾源이 바로 이番 企劃에서 注目하고자 하는 知識人들이다.

    18世紀, 새로운 時代精神의 要求

    우리 歷史의 時代精神과 知識人을 다루는 이 企劃에서 가장 苦心한 部分 中 하나는 앞서 말한 바 있지만 어떤 知識人을 選擇할 것인지의 問題였다. 朝鮮 中期를 代表하는 知識人으로 李滉과 李珥를 다룬 다음에 누구를 擇할 것인지를 놓고 지난 한 달 동안 여러 생각을 했다. 禮訟 論爭을 中心으로 尤庵 宋時烈과 未收 許穆을 다뤄볼까도 苦悶했지만 곧바로 朝鮮 後期로 오기로 했다.

    宋時烈과 許穆이 活動했던 時期는 17世紀다. 이 時期는 壬辰倭亂 以後 仁祖反正, 丙子胡亂, 北伐 推進으로 이어진 時代다. 이 時期에는 宋時烈과 許穆 外에도 金堉, 尹鑴, 이현일, 김창협 그리고 柳馨遠 等의 知識인 政治家들이 個性 있는 知的 活動과 熾烈한 現實 參與를 벌였다.



    17世紀는 壬辰倭亂과 丙子胡亂 以後 體制를 整備하고 朝鮮을 小中華(小中華) 國家로 자리매김하는 同時에 實學이라는 새로운 思想을 暗中摸索한 時期라는 點에서 注目할 만한 充分한 價値를 갖고 있다. 하지만 紙面의 制限을 考慮할 때 朝鮮 後期로 그대로 넘어올 수밖에 없었는데, 그 가운데 가장 重要한 理由는 이 企劃의 核心 主題가 時代精神의 觀點에서 본 知識人이라는 데 있다.

    時代精神의 視角에서 가장 重要한 것은 時代的 變化와 그 變化를 判讀하는 새로운 哲學과 思想이다. 여기서 時代的 變化라고 하면 一般的으로 그것은 古代社會에서 中世社會로, 그리고 다시 近代社會로의 變動을 뜻한다. 勿論 17世紀를 中世社會가 衰殘해가고 近代社會의 端緖가 나타나기 始作한 時代였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宋時烈과 許穆으로 대표되던 當時 知識社會의 主要 흐름은 儒敎的 理想社會의 具現에 있었지 새로운 모더니티의 摸索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世紀와 比較해 18世紀는 새로운 轉換을 摸索하려는 흐름이 世界的으로 나타났던 時期다. 西歐社會에서는 政治·經濟的으로 모더니티가 本格化됐으며, 東아시아에도 새로운 變化를 追求하려는 흐름이 形成되고 있었다. 바로 이 時期에 登場한 知識人들이 實學派다. 이 實學派가 登場한 데에는 內外的인 條件을 注目할 必要가 있다.

    먼저 內的으로는 時代精神으로서 性理學이 限界를 보였다는 點이다. 壬辰倭亂과 丙子胡亂 以後 朝鮮 性理學은 哲學的으로 內的 發展을 이뤘는지는 몰라도 現實 問題를 解決하는 데는 적지 않은 限界를 드러냈다. 한便 外的으로는 淸나라를 통해 새로운 西洋 文物이 朝鮮에 紹介되면서 西歐 社會에 對한 關心이 높아졌다. 西洋의 科學 및 技術은 勿論 天主敎를 包含한 西洋 文化와의 本格的인 接觸이 朝鮮 社會에서도 徐徐히 增加하고 있었다.

    實學派의 鳥類

    實學에 對한 우리 學界의 關心은 日帝强占期부터 最近까지 繼續 돼왔는데, 이 企劃과 關聯해 注目할 만한 한 심포지엄이 2005年 10月에 열렸다. 韓國實學學會, 韓國漢文學學會, 경기문화재단이 主催한 ‘朴智元·朴齊家 逝去 200周年 記念 國際學術大會’가 그것이다. 이 學術會議는 그 主題를 ‘18世紀 朝鮮, 새로운 文明 企劃’으로 삼고 18世紀 朝鮮을 새로운 文明國家로 改造하기 위한 熾烈한 知的 고투(苦鬪)로서 朴趾源과 朴齊家의 思想을 集中的으로 照明했다.

    조선의 근대화 추구한 실학적 실용주의자 박지원…중국어공용화론 제창한 급진 개혁주의자 박제가

    朴智元의 代表作 ‘熱河日記’.

    이 學術會議를 主導한 송재소 敎授는 實學 硏究의 先驅者 中 한 사람인 이우성 敎授를 따라 實學을 經世致用(經世致用)學派, 利用厚生(利用厚生)學派, 實事求是(實事求是)學派의 세 흐름으로 나눴다. 經世致用學派가 主로 制度改革과 農民問題에 關心을 갖고 있던 星湖 李瀷, 順菴 安鼎福, 茶山 丁若鏞으로 대표된다면, 利用厚生學派는 都市 商工業의 發展과 關聯된 技術改革을 主唱한 湛軒 洪大容, 朴趾源, 朴齊家 等으로 대표된다. 한便 實事求是學派는 淸나라 考證學의 影響을 받아 學問을 近代的으로 발전시키고자 한 秋史 金正喜로 대표된다.

    이 가운데 利用厚生學派의 다른 이름이 北學派(北學派)다. 송재소 敎授에 따르면 北學派란 이름의 起源은 그 意味가 北쪽에 있는 淸나라에서 배우자는 데서 비롯됐다. 當時 朝鮮보다 文物이 發展한 淸나라를 배움으로써 富國强兵을 이룩하자는 것이 北學派의 核心 아이디어이자 企劃이었다.

    우리 歷史에서 北學派의 思想은 一種의 先驅的인 近代化論이다. 近代化論의 基本 發想은 더 發展된 國家의 文物과 制度를 受容함으로써 社會 發展을 이룩할 수 있다는 데 있다. 顯在的 觀點에서 이 論理가 새로운 것이라고 보기 어렵지만, 當代的 觀點에서는 대단히 革新的인 것이었다.

    그 理由는 當時 朝鮮과 中國의 關係에 있다. 周知하듯이 丙子胡亂에서 淸나라에 屈服한 朝鮮은 形式的으로는 靑果 垂直的인 外交 關係를 맺었지만, 다른 한便으로 淸나라에 對한 敵對心이 매우 컸다. 宋時烈을 中心으로 한 知識人들이 提案하고 孝宗이 切齒腐心으로 推進한 北伐論은 이러한 雰圍氣를 反映한 當時 朝鮮 社會의 支配 理念 가운데 하나였다. 淸나라에 恥辱을 當한 만큼 武力으로 請을 征伐하고 明나라에 對한 義理를 지키자는 北伐論은 그 實現可能性 與否를 떠나 對內的 社會統合을 提高하기 위한 一種의 支配 헤게모니로서 그 威力을 發揮하고 있었다.

    朴趾源과 그의 同僚 및 弟子들은 이러한 北伐論을 正攻法으로 批判했다. 特히 朴趾源과 朴齊家는 비록 오랑캐라 하더라도 法과 制度가 優秀하면 積極的으로 受容해야 한다고 主張함으로써 北伐論에 맞서는 北學論을 提示했다. 旣存 支配 理念과 政策에 對應해 새로운 비전과 戰略을 提示하는 게 時代精神 探究의 本質을 이룬다면, 朴趾源과 朴齊家는 北學論을 통해 새로운 時代精神을 積極的으로 摸索한 知識人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熱河日記’에 對한 熱狂과 批判

    朴趾源은 傳統社會에서 近代社會로 가는 우리 歷史의 길목에서 丁若鏞과 함께 가장 注目할 만한 知識人으로 꼽혀왔다. 그는 北學論을 提示해 商工業의 奬勵를 促求한 改革的인 政治家이자, 文體를 革新해 韓國籍 散文의 새로운 地平을 연 文筆家였다. 홍대용, 炯菴 이덕무, 英才 유득공, 척재 이서구, 그리고 朴齊家가 同僚이자 弟子였으며, 開化派의 先驅者 朴珪壽는 그의 孫子였다.

    朴趾源은 1737年(英祖 13年) 서울에서 태어났다. 字는 중미(仲美)이고 號는 연암(燕巖)이다. 아버지는 반남 朴氏 事由였으며, 어머니는 咸平 李氏 昌原의 딸이었다. 1752年 이보천의 딸과 婚姻했으며, 保薦의 아우 양천에게 ‘詐欺’ 等을 배웠다. 朴趾源에게는 妻家가 重要했는데, 特히 妻男 이재성과는 平生 學問的으로 人間的으로 매우 가까웠다.

    朴趾源은 1765年 科擧에 應試했으나 落榜했다. 1768年 白塔 近處로 移徙했으며, 親舊인 홍대용, 이웃인 李德懋, 柳得恭, 이서구 그리고 朴齊家 等과 交遊했다. 이때는 英祖 末年과 正祖 初期에 該當하는 時期였으며, 朴趾源은 本格的으로 紹介되기 始作한 西洋 文物에 큰 關心을 보였다. 落榜한 以後 朴趾源은 오직 硏究와 글쓰기에 注力하면서 새로운 學問과 政策을 摸索하고 있었다.

    朴智元 삶의 轉換은 正祖의 登極과 함께 이뤄졌다. 正祖 初期 政治的 理由로 朴趾源은 黃海道 衿川 燕巖協에 隱居해 있었는데, 1780年 三從兄 박명원이 公式使節로 年庚(北京)에 갈 때 隨行員으로 따라갔다. 1780年 6月 末에 出發해 10月 末에 돌아온 朴趾源은 自身의 旅行 體驗談을 冊으로 냈는데, ‘熱河日記(熱河日記)’가 바로 그것이다. ‘熱河日記’는 暴發的인 關心을 불러 모았다. 젊은 世代는 熱狂한 反面 旣成世代에게서는 相當한 批判을 받았다.

    朴趾源은 뒤늦게 官僚社會에 進出하기도 했다. 1786年 繕工監 監役에 除授된 以後 漢城府판관, 眼醫縣監, 襄陽府使 等을 지냈다. 여러 記錄을 볼 때 朴趾源은 훌륭한 地方 行政官이었으며, 이 時期에 ‘課農小抄’ 等을 包含한 著述을 남겼다. 正祖가 죽고 順調가 登極해 改革派의 立地가 좁아지던 1805年(純祖 5年) 朴趾源은 世上을 떠났다. 그의 아들 종채는 아버지에 對한 記錄인 ‘과정록’을 썼으며, 종채의 아들인 朴珪壽는 高宗 때 開化派로 活躍했다.

    時代精神과 知識人을 다루는 이 企劃에서 朴趾源과 朴齊家의 時代에 와서 던질 수 있는 質問의 核心은 다름 아닌 ‘모더니티(modernity)란 무엇인가’이다. 顯在的 觀點에서 世界社會는 如前히 모더니티의 時代가 繼續되고 있다. 一角에서는 모더니티를 넘어서는 포스트모더니티(post-modernity)를 이야기하지만, 文化 現象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은 存在한다고 볼 수 있더라도 制度的 條件으로서 모더니티가 世界社會를 이끌고 있다.

    朝鮮 모더니티의 起點

    모더니티란 大略 17世紀부터 西유럽에서 始作돼 全世界的으로 擴散돼온 制度와 意識, 다시 말해 經濟的 資本主義, 政治的 國民國家, (近代的 意味의) 文化的 民族主義를 指稱한다. 英國의 社會學者 앤서니 기든스(Anthony Giddens)는 制度的 側面에서 모더니티를 네 가지 制度와 그 關係性으로 槪念化하기도 했는데, 資本主義, 産業主義, 監視體制, 軍事的 힘이 그것이다. 또한 모더니티를 이루는 意識과 文化로는 個人主義, 自由主義, 民主主義, 平等主義 等을 指摘할 수 있다.

    注目할 것은 이 모더니티의 歷史的 過程인 近代化(modernization)가 單一 類型으로 存在하지 않는다는 點이다. 近代化가 西유럽에서 始作된 것이지만, 搖亂 투르鄙諺(Goran Therborn)에 따르면 地球的 水準에서 近代化의 歷史的 經路에는 革命 或은 改革의 유럽 近代化, 아메리카 新世界의 近代化, 外部的으로 주어진 近代化, 植民地 近代化의 여러 下位 類型이 存在한다. 이런 經路들은 世界體制 內의 構造的 位置와 國內의 個人的 및 集合的 行爲 間의 相互複合的인 關係에 依해 더욱 多層化될 수 있다.

    問題는 우리 歷史다. 果然 우리 歷史는 이러한 近代化 企劃에 어떻게 對應해 왔는가. 먼저 指摘할 수 있는 것은 韓國 모더니티의 起源을 언제로 볼 것인지의 問題다. 여기에는 그동안 여러 談論이 競爭해왔다. 어떤 이는 英·正祖 時代까지 起源을 溯及하는가 하면, 다른 이는 開港(1876) 또는 甲午改革(1894)을 注目하고, 또 다른 이는 植民地 時代를 提示하기도 한다.

    最近 歷史學界에서 모더니티의 起點에 對한 有力한 見解로는 ‘1876年’과 ‘1894年’李 맞서고 있다. 電子가 外部 衝擊인 ‘開港’을 重視한다면, 後者는 內部의 對應인 ‘甲午改革’을 强調한다. 하지만 나는 近代의 起點에 對한 論議는 結論을 서둘러 이끌어낼 것이 아니라 다양한 經驗的 硏究가 蓄積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特히 改革을 積極的으로 摸索했던 正祖 時代는 여러 含意를 안겨주고 있다.

    朴趾源이 남긴 代表的인 글로는 ‘熱河日記’와 ‘燕巖集(燕巖集)’을 들 수 있다. 모더니티의 觀點에서 ‘熱河日記’는 問題的인 著作이다. 흔히 이 冊은 年庚 紀行文學의 精髓로 評價된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指摘하듯이 紀行文學을 넘어서 一種의 社會改革 프로그램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特히 두 가지 點을 注目할 必要가 있다. 當時로는 先進 文物이라 할 수 있는 淸나라의 經濟·社會·文化·建築·土木·天文·醫學 等 多樣한 分野를 詳細히 紹介하고 있다는 게 하나라면, 이들에 對한 利用厚生을 積極的으로 强調함으로써 社會 全般의 變化를 促求하고 있다는 點이 다른 하나다.

    한마디로 朴趾源이 품었던 政治的 企劃은 앞선 淸나라의 文物을 受容해 뒤떨어진 朝鮮 社會를 改革하자는 데 있다. 앞서 말했듯이 이러한 企劃이 顯在的 觀點에서는 西歐 技術과 科學을 積極的으로 受容하자는 近代化論과 매우 類似하지만, 當時로는 매우 革新的인 思想이었다. 當代 主流 知識社會에서는 半晴親명(反淸親明)의 傾向, 다시 말해 淸나라를 拒否하고 明나라에 對한 義理를 지키려는 傾向이 두드러졌다.

    宋時烈을 爲始한 庶人들이 提示한 北伐論은 이러한 論理를 代表하는 政治的 企劃이었으며, ‘熱河日記’는 이런 北伐論에 맞서서 새로운 北學論을 提示하고자 했다. ‘熱河日記’의 10卷 ‘옥갑야화’에 실린 小說 ‘許生傳’은 北伐論의 虛構性을 날카롭게 諷刺하고 富國移民(富國利民)의 經濟哲學을 强調한다.

    支配階層의 二重的 道德性 叱咤

    조선의 근대화 추구한 실학적 실용주의자 박지원…중국어공용화론 제창한 급진 개혁주의자 박제가

    朴齊家는 그림에도 能해 뛰어난 作品을 남겼다.

    政治, 다시 말해 國家經營의 一次的 課題는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國民 多數의 物質的, 精神的 生活을 풍요롭게 하는 데 있다. 問題는 그 方法이다. 朴趾源은 當時 支配階層의 ‘性理學的 原則主義’에 맞서 ‘實學的 實用主義’를 積極的으로 提示하고 이를 政策으로 具體化하고자 했다. 支配階層이 갖는 虛僞意識에 對한 朴智元의 批判은 젊은 時節에 쓴 小說 ‘兩班傳’에도 이미 나타났지만, 熱河日記 4卷 ‘管內情事’에 나오는 ‘虎叱’에서도 잘 드러난다. 兩班을 꾸짖는 虎狼이를 통해 朴趾源은 支配階層의 二重的 道德性을 諷刺하고 叱咤한다.

    朴智元 思想의 核心은 ‘利用이 있은 後에 厚生이 되고, 厚生이 된 後에 定德(正德)李 될 것’이라는 主張에 壓縮돼 있다. 다시 말해 定德을 이룬 다음에 利用厚生을 할 것이 아니라, 그 反對로 利用厚生 以後 定德을 이루자는 主張이 朴趾源이 품었던 實學思想의 根幹을 이루고 있다. 스콜라的人 朱子學에 對한 根本的 批判을 겨냥하는 이러한 發想에는 科學과 技術을 注目하고 特權化하려는 近代的 思惟의 一端이 담겨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燕巖의 思想은 朝鮮 後期 우리 文學의 頂點을 이룬 그의 一連의 作品에도 잘 나타나 있다. “아! 所謂 法鼓(法古)한다는 사람은 옛 자취에만 얽매이는 것이 病통이고, 창신(?新)한다는 사람은 商道에서 벗어나는 게 걱정거리다. 眞實로 法鼓하면서도 變通할 줄 알고 창신하면서도 능히 剪芽하다면, 요즘의 글이 바로 옛글人 것이다.” 朴齊家의 ‘楚亭집’ 西門으로 朴趾源이 쓴 글에 나오는 內容이다. 옛것을 본받아 새롭게 創造하자는 ‘법고창신’의 精神 아래 朴趾源은 우리 文學史에서 빛나는 作品을 多數 남겼다.

    個人的인 일을 暫時 말하자면, 내가 市內라 할 수 있는 鍾路에 進出한 것은 高等學校 時節이었다. 1970年代 中盤 學校 授業이 끝나면 學院에 다니면서 鍾路와 그 隣近 地域을 익히기 始作했다. 再修生 時節에는 아예 아침부터 저녁까지 鍾路에서 時間을 보냈다. 그래서인지 그때 무던히도 돌아다녔던 鍾路 구석구석에는 내 젊은 날의 記憶과 追憶이 깃들어 있다.

    그 가운데 한 곳이 탑골公園 周邊이었다. 再修生 時節 學院을 마치면 鍾路 3街에 있는 다른 學院에 다니는 親舊를 더러 찾아갔는데, 우리는 뜨거운 여름인데도 뜨거운 라면을 먹은 다음 가까운 탑골公園으로 바람을 쐬러 가곤 했다. 탑골公園 안에는 그 이름이 이미 알려주고 있듯이 원각사 10層 石塔이 있다. 바로 이 塔을 朝鮮時代에는 그 色깔이 흰色에 가까워 白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빙 둘러 있는 城 한가운데에 白塔이 있다… 여기가 바로 원각사의 옛터다. 지난 巫子年(1768)과 己丑年(1769) 사이에 내 나이는 열여덟, 열아홉이었다. 美中 朴趾源 先生이 文章에 造詣가 깊어 當代에 으뜸이라는 말을 듣고, 마침내 白塔의 北쪽으로 가서 찾아뵈었다. 先生께서는 내가 왔단 말을 들으시더니 옷을 걸치며 나와 맞이하시는데, 마치 오랜 親舊처럼 손을 잡아 주셨다. 마침내 當身이 지은 글을 모두 꺼내 와 읽게 하셨다. 몸소 쌀을 씻어 茶솥에 안치시고, 흰 周鉢에 밥을 담아 玉小盤에 받쳐 內오셔서는 盞을 나에게 祝壽해 주셨다. 나는 지나친 歡待에 놀라고 기뻐하며 千古의 盛大한 일로 여겨 글을 지어 和答하였다. 서로에게 傾倒되던 모습과 마음을 알아주던 느낌이 大槪 이와 같았다.”

    引用이 多少 길었지만, 朴齊家가 쓴 ‘白塔靑煙집’ 序文이다. ‘白塔靑煙집’은 朴趾源 一派의 詩文과 尺牘(편지)을 모은 冊이다. 위의 引用은 朴齊家가 記憶하는 朴趾源과의 첫 만남을 담고 있는데, 30代 初盤의 朴趾源과 10代 後半의 朴齊家의 만남이 마치 드라마를 보듯 생생히 描寫되어 있다. 내친김에 앞의 글을 좀 더 引用해보자.

    “當時 炯菴 李德懋의 집이 北쪽으로 마주 보고 있었고, 落書 이서구의 사랑은 그 西便에 솟아 있었다. 數十 걸음 떨어진 곳은 서상수의 서루였고, 거기서 다시 꺾어져 北東쪽으로 가면 유금과 柳得恭이 사는 집이었다. 나는 한番 갔다 하면 돌아오는 것도 잊고 열흘이고 한 달이고 連거푸 머물곤 했다. 詩文이나 尺牘을 썼다 하면 卷帙을 이루었고, 술과 飮食을 찾아다니며 밤으로 낮을 잇곤 했다.”

    朴趾源과 朴齊家의 만남

    當時 白塔 近處에 살던 이들은 우리 知省事에서 매우 異例的인 커뮤니티였다. 朴趾源을 先生으로 하고 李德懋, 朴齊家, 柳得恭, 李瑞求 等이 함께 어울린 이 커뮤니티는 北學派를 胎動시켰으며, 이 가운데 庶孼 出身인 李德懋, 朴齊家, 柳得恭은 正祖 時節 奎章閣의 檢書官으로 함께 任用되기도 했다. 當時 奎章閣은 昌德宮 안에 있었는데, 奎章閣이었던 宙合樓를 요즘도 어쩌다 찾아가게 되면 더없이 自由롭고 熾烈했던 백塔婆 知識人들을 떠올리게 된다.

    朴齊家는 1750年(英祖 26年) 서울에서 태어났다. 박평의 庶子인 그의 字는 再選(在先)이고, 號는 楚亭(楚亭)이다. 朴齊家는 少年 時節부터 文明을 떨쳤다. 10代 後半에 朴趾源을 만났으며, 李德懋, 柳得恭, 李瑞求 等과 交遊했다. 여러 記錄을 보면 朴齊家의 性格은 豪放하고 激情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市·西·化에 모두 뛰어났던 것으로 보아 感受性 또한 銳敏한 知識人이기도 했다.

    1776年 李德懋, 柳得恭, 이서구와 함께 ‘건연집’이라는 四家詩集(四家詩集)을 내어 그 이름이 淸나라에까지 알려졌다. 朴齊家는 庶孼을 官職에 진출시키려는 正祖의 政策에 따라 1779年 奎章閣 檢書官으로 李德懋, 柳得恭, 서이수 等과 함께 任命됐다. 以後 그는 奎章閣에 勤務하면서 많은 冊을 校正하고 刊行했다. 그는 地方 行政을 맡기도 했는데 扶餘縣監, 永平縣監 等을 지냈다.

    朴齊家의 삶에서 特히 重要했던 것은 네 次例에 걸친 連行길이었다. 그는 1778年 謝恩使 蔡濟恭을 따라 淸나라로 갔으며, 1801年 謝恩使 尹行恁을 따라 燕京을 訪問한 것에 이르기까지 네 番 連行길에 올랐다. 이 旅行에서 朴齊家는 이조원, 반정균 等의 淸나라 學者들과 交遊했으며, 이런 交遊의 傳統은 그의 弟子 김정희에게로 이어졌다. 네 番째 連行에서 돌아오자마자 朴齊家는 흉書(凶書) 事件에 連累돼 終聲에 流配됐다가 풀려났지만 1805年(純祖 5年) 世上을 떠났다.

    朴齊家의 글은 ‘精油角집(貞·#54406;閣集)’에 集約돼 있다. ‘北學議(北學議)’를 除外하고 朴齊家가 남긴 글들을 담고 있는 이 冊은 다양한 角度에서 그의 삶과 思想을 理解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이 冊에 실린 글들 가운데 가장 印象的인 글을 꼽으라면 妙香山 旅行을 다룬 ‘妙香山所期’다.

    정민 敎授는 이 글을 우리 歷史 紀行文 가운데 가장 뛰어난 傑作으로 指目한다. 鄭 敎授도 指摘하고 있지만, 내가 이 作品을 注目한 理由는, 妙香山의 風光에 對한 驚歎할 수밖에 없는 더없이 流麗한 描寫도 描寫지만, 庶孼이라는 自身의 處地에 對한 슬픔이 짙게 깔려 있다는 데 있다. 朝鮮 前期의 栗谷 李珥에 匹敵할 天才였건만, 嫡庶 差別이라는 身分的 拘束 아래 挫折을 겪어야만 했던 朴齊家의 悲哀와 그것을 超克하려는 意志가 곳곳에 담겨 있어 이따금 ‘精油角집’을 펼쳐 보면 마음 한구석이 시려誤祈禱 한다.

    進步的 世界化主義者

    ‘北學議’는 朴齊家의 代表 著述이다. 이 冊은 朴齊家가 첫 番째 連行에서 돌아와 自身의 見聞을 記錄한 冊으로 ‘熱河日記’와 함께 北學派의 理論과 戰略을 代辯한다. 朴齊家는 섬세하면서도 豪快한 自身의 性品에 걸맞게 淸나라 文物을 緻密하게 紹介하고 이를 果敢하게 受容할 것을 提案한다.

    이 冊은 ‘內篇’과 ‘外便’으로 이뤄져 있다. 具體的인 項目을 보면 朴齊家의 問題意識을 엿볼 수 있다. 먼저, 내편은 거(車)·善(船)·性(城)·壁(?)·와(瓦)·옹(甕)·단(簞)·궁실(宮室)·창호(窓戶)·계체(階?)·도로(道路)·교량(橋梁)·축목(畜牧)·우(牛)·마(馬)·여(驢)·안(鞍)·조(槽)·시정(市井)·상고(商賈)·은(銀)·전(錢)·철(鐵)·재목(材木)·여복(女服)·장희(場戱)·한어(漢語)·역(譯)·약(藥)·장(醬)·인(印)·전(氈)·당보(塘報)·지(紙)·궁(弓)·총시(銃矢)·척(尺)·문방지구(文房之具)·고동서화(古董書畵) 等의 30項目으로 돼 있다. 여기서 朴齊家는 實生活에 聯關된 다양한 器具와 施設을 살펴보고 이에 對한 改革을 提示하고 있다.

    한便 外篇은 前(田)·分(糞)·賞과(桑菓)·농잠총론(農蠶總論)·과거론(科擧論)·북학변(北學辨)·관론(官論)·녹제(祿制)·재부론(財賦論)·통강남절강상박의(通江南浙江商舶議)·병론(兵論)·장론(葬論)·존주론(尊周論)·오행골진지의(五行汨陳之義)·번지허행(樊遲許行)·기천영명본어역농(祈天永命本於力農)·재부론(財賦論) 等의 17項目으로 돼 있다. 여기서 朴齊家는 商工業과 農業 問題를 다루고 있으며, 商工業의 發展과 農業 技術의 改善을 積極的으로 提案하고 있다.

    ‘北學議’는 一種의 國富論이다. 富國의 方法으로 朴齊家는 淸나라 文物의 卽刻的이고도 大大的인 輸入 및 應用을 强調함으로써 새로운 國家 비전을 提示하고 있다. 朴齊家의 提案이 얼마나 急進的이었는지는 中國 文化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中國語(漢語)를 써야 한다는 그의 主張에서 端的으로 살펴볼 수 있다. 最近 論難을 불러일으킨 英語共用化論에 앞서 200年 前에 朴齊家는 中國語共用化論을 提案한 셈인데, 그 論難에 對한 評價를 떠나서 이러한 見解는 急進的 改革主義者 朴齊家의 面貌를 잘 보여준다.

    朴齊家는 뛰어난 詩人이자 文章家이기도 했다. 그는 李德懋, 柳得恭, 이서구와 함께 朝鮮 後期 漢文學 4代價로 꼽혔으며, 앞서 말했듯이 그의 詩는 淸나라에도 널리 알려졌다. 더불어 내가 注目하고 싶은 것은 朴齊家의 國際 感覺이다. 네 次例나 連行을 갔다 올 程度로 朴齊家는 中國을 제대로 理解하고 있었으며 또 나름대로 豐富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었다. 顯在的 觀點에서 보면 그는 世界化主義者, 그것도 進步的 世界化主義者였다. 이런 朴齊家의 思想은 그의 弟子 秋史 金正喜에게 이어졌다.

    傳統과 모더니티의 警戒線에서

    무릇 어떤 思想이라도 時代的 拘束을 超越하는 것은 없다. 北學派의 思想이 支配的인 性理學的 秩序를 批判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傳統的인 儒敎思想의 範圍를 完全히 넘어섰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朴趾源과 박제가로 대표되는 北學派 知識人들은 朱子學에 對應해 考證學을 選好하고 利用厚生을 强調하는 것이지 包括的 意味의 傳統思想과 完全히 斷絶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새로운 文物의 導入을 積極的으로 强調한 同時에, 家族을 中心으로 한 共同體注意, 宇宙의 秩序와 聯關된 道德과 倫理, 배움을 바탕으로 政治를 하는 엘리트 等을 强調하는 傳統的 儒敎思想의 磁場 안에 如前히 朴趾源과 朴齊家는 놓여 있었다. 그들이 남긴 여러 글을 보면 朴趾源과 朴齊家는 傳統的 知識人이기도 했다. 傳統과 모더니티 사이에 境界가 存在한다면 朴趾源과 朴齊家는 그 境界에 서 있던 知識人들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내가 注目하고 强調하려는 것은 모더니티를 이루는 兩 軸인 制度와 精神에서 朴趾源과 朴齊家가 보여준 先驅的인 問題意識이다. 制度로서 모더니티가 資本主義, 産業主義, 監視體制, 軍事的 힘으로 이뤄져 있다면, 朴趾源과 朴齊家는 비록 近代的 資本主義와 産業主義에 對한 理解가 深度 깊지 않았고 그 應用 모델이 淸나라이기는 했지만, 同時에 두 사람은 分明 生産道具 改善과 流通構造 革新 等 近代的 社會·經濟 變化에 對한 剛한 熱望을 갖고 있었다.

    精神으로서 모더니티 亦是 마찬가지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朴趾源의 小說들이다. ‘兩班傳’ ‘虎叱’ ‘穢德先生傳’ ‘烈女咸陽朴氏傳’ 等 一連의 作品을 통해 朴趾源은 封建的인 身分制를 批判하고 平等主義에 基盤을 둔 새로운 社會倫理를 摸索했을 뿐만 아니라 合理的 理性과 자연스러운 感情을 가진 普遍的 存在로서 人間에 對한 새로운 理解를 追求했다. 그가 남긴 作品들에 담긴 모더니티를 생각할 때 文化史的 側面에서 朴趾源은 참으로 이채로운 知識人이었다.

    問題는 모더니티를 向한 이러한 새로운 흐름의 運命이었다. 朴趾源과 朴齊家가 새로운 思想을 펼칠 수 있었던 條件 가운데 하나는 ‘啓蒙 君主’ 正祖의 存在였다. 時代史的 變化에 積極的으로 對應하려는 正祖의 改革 政治는 그러나 1800年 그의 죽음과 더불어 終結되고 以後에는 오히려 傳統的 秩序를 强化하려는 勢道政治가 得勢했다. 前進과 後退가 歷史의 本質이기는 하지만, 當時 世界私的 變化를 지켜볼 때 朝鮮社會의 對應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었다. 앞으로 이 企劃에서는 두 次例에 걸쳐 傳統과 모더니티의 境界에 서 있던 知識人의 삶과 思想을 繼續 살펴보고자 한다.

    知識人의 氣品

    두 해 前 나는 某 週刊誌 企劃을 맡아 民統線과 非武裝地帶를 돌아본 적이 있다. 西쪽 江華郡에서 東쪽 固城郡까지 休戰線을 둘러보면서 分斷時代의 過去와 現在, 그리고 未來를 생각해보는 것이었다. 이 企劃에서 네 番째로 찾은 곳이 江原道 楊口와 麟蹄였는데, 休戰線에 붙어 있는 楊口 펀치볼에서 인제 서화면으로 넘어와 圓筒으로 내려오던 길이 내게는 아주 印象的이었다. 雪嶽山 西쪽 四面에 位置한 山은 높고 溪谷도 깊은 麟蹄의 風景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때 문득 떠올랐던 것이 朴趾源과 朴齊家가 남긴 글이었다. 두 사람이 交遊하던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백동수다. 武人 집안에서 태어난 백동수는 李德懋의 妻男이다. 그는 李德懋, 朴齊家와 함께 ‘武藝圖譜通志’를 지었으며, 北學派 知識人들과 매우 가깝게 交遊했다. 者(字)가 영숙이었던 백동수가 서울 生活을 淸算하고 인제縣 麒麟골로 들어가게 되자 朴趾源과 朴齊家는 이에 對해 글을 썼다.

    個人的 所懷를 말하면, ‘燕巖集’과 ‘精油角집’에 실려 있는 이 두 篇의 글은 朝鮮時代 知識人들이 남긴 글들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小品들이다. 먼저 朴趾源의 ‘麒麟協으로 들어가는 백영숙에게 贈呈한 序文’을 보면 다음과 같은 句節이 나온다.

    “이제 영숙이 麒麟協에 살겠다며 송아지를 등에 업고 들어가 그걸 키워 밭을 갈 作定이고 된醬도 없어 아가위나 담가서 醬을 만들어 먹겠다고 한다. 그 험색하고 窮僻함이 燕巖協에 비길 때 어찌 똑같이 여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 自身은 只今 갈림길에서 彷徨하면서 去就를 선뜻 定하지 못하고 있는 形便이니, 하물며 영숙의 떠남을 말릴 수 있겠는가. 나는 오히려 그의 뜻을 壯하게 여길망정 그의 궁함을 슬피 여기지 않는 바이다.”

    한便 朴齊家는 ‘江原道 麟蹄縣 麒麟山골로 떠나는 백영숙을 보내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낮에 나가면 오직 손가락 끝이 무지러진 나무꾼과 쑥대머리를 한 숯쟁이들이 서로 더불어 火爐가에 빙 둘러앉아 있을 뿐이리라. 밤이면 솔바람 소리가 쏴아 하며 일어나 집 둘레를 흔들며 지나가고, 窮한 山새와 슬픈 짐승들은 울부짖으며 그 소리에 應答할 것이다.…영숙이여! 떠날지어다. 나는 지난날 困窮 속에서 벗의 道理를 얻었소. 비록 그러나 영숙에게 있어 내가 어찌 다만 가난한 때의 사귐일 뿐이겠는가?”

    憂國忠情을 품었으나 時代와의 不和 속에서 隱遁을 選擇할 수밖에 없는 親舊의 삶에 對한 안타까움을 朴趾源과 朴齊家는 이렇게 表現하고 있다. ‘燕巖集’과 ‘精油角집’에서 이 글들을 다시 찾아 읽으며, 새삼 知識人의 正體性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番 글에서 말한 바 있지만 知識人의 現實參與를 否定的으로만 볼 必要는 없다. 그러나 現實參與와 現實批判이라는 知識人의 二重的 課題 사이에는 분명한 境界가 存在한다.

    或是 現在 우리 社會 知識人들은 自身의 個人的 利益을 위한 活動을 社會參與와 混同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參與는 參與이고 批判은 批判인데도 그 批判의 嚴正性이 參與의 現實論理로 인해 무뎌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 自身을 包含해 이 땅의 知識人들은 政治權力이든 經濟權力이든 權力으로부터 果然 얼마나 超然할 수 있는지 麟蹄縣 麒麟協으로 떠나는 백영숙에게 주는 朴趾源과 朴齊家의 글을 읽으면서 다시 한 番 質問을 던지게 된다.

    知識人에게 氣品이란 무엇인가. 知識에 對한 探究를 통해 眞理를 밝히는 이로서 知識人은 境遇에 따라 時代와 不和할 수도 있고 權力에 맞설 수도 있어야 한다. 人間의 自由에 對한 熱望과 平等에 對한 所望은 知識人이 가져야 할 德目이며, 이 德目을 내면화하고 社會的으로 實踐하는 것이야말로 知識人이라면 마땅히 갖고 있어야 할 威嚴이자 氣品이다.

    조선의 근대화 추구한 실학적 실용주의자 박지원…중국어공용화론 제창한 급진 개혁주의자 박제가
    김호기

    1960年 京畿道 洋酒 出生

    연세대 社會學科 卒業

    獨逸 빌레펠트臺 社會學 博士

    美國 UCLA 社會學科 房文學者

    韓國政治社會學會 副會長

    美國 스탠퍼드대 亞太硏究所 Korea Democracy Project 共同編輯人

    著書: ‘韓國 市民社會의 省察’ 等 多數


    市內에서 저녁 約束이 있어 모처럼 인사동으로 나갔다. 저녁을 먹은 後 아는 이들과 헤어져 혼자 鍾路3街 쪽으로 걸었다. 가까이 白塔이 보였다. 不知不識間에 朴趾源과 朴齊家가 떠올랐다. 한 젊은이가 大門을 열고 들어가 人事를 드리니 다른 한 中年 사내가 서둘러 나와 반갑게 손을 잡아끌고 들어간다. 밤을 새워 끝없이 이어지는 그들의 이야기가 서울 하늘 아래 조용히 울려 퍼진다. 벌써 200年 前의 일이건만 그들의 첫 만남이 내 눈에 선하다.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거리를 가득 메운 人波 저 뒤便 어디선가 두 사람 亦是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고 있는 것 같았다. 3號線을 타기 위해 鍾路3街 逆으로 걸어가면서 이따금 나는 뒤돌아보곤 했다.

    朴趾源은 누구인가

    1737年 서울에서 出生. 1805年 死亡. 實學派를 代表하는 學者이자 朝鮮 後期의 代表的인 文章家. 北學派로 알려진, 利用厚生의 實學派를 이끌었던 그는 社會 改革을 摸索하고 文體 革新을 主導했음. 主要 著作으로 ‘熱河日記’ ‘燕巖集’ 等이 있음. .

    朴齊家는 누구인가

    1750年 서울에서 出生. 1805年 死亡. 朴趾源과 더불어 北學派의 代表的인 知識人이던 그는 朝鮮 後期 漢文學 4臺가 中 한 사람이며, 淸나라 文物을 受容해 社會 改革을 摸索한 急進的인 思想家였음. 主要 著作으로 ‘北學議’ ‘精油角집’ 等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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