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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國과 30年 맞짱 뜬 ‘沙漠의 風雲兒’는 왜 흔들리나|신동아

美國과 30年 맞짱 뜬 ‘沙漠의 風雲兒’는 왜 흔들리나

‘리비안 마키아벨리’ 카다피와 그 家族들

  • 이웅현 | 政治學 博士·國際政治칼럼니스트 zvezda@korea.ac.kr

    入力 2011-04-21 15: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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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執權 後 오일 로열티 120% 引上…西方의 눈엣가시
    • 演說은 基本 5時間…“카다피의 武器는 그의 입과 돈”
    • 美軍 爆擊으로 養女 死亡, 아들은 負傷
    • ‘팬암기’ 補償으로 經濟制裁 푼 건 ‘마키아벨리안 테크닉’
    • 알제리, 이집트 民主革命은 團地 起爆劑일 뿐
    • 나라 門 열었지만 國民은 後進性 自覺…‘고르바초프 딜레마’
    • ‘리비안 마키아벨리’의 運命은 21世紀 中東 激變의 가늠자
    미국과 30년 맞짱 뜬 ‘사막의 풍운아’는 왜 흔들리나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國家元首가 4月10日 首都 트리폴리의 要塞 바브 알아지지아에 登場해 健在함을 誇示했다.

    1973年 이탈리아 日刊紙 ‘라 스탐파’는 리비아의 指導者 무아마르 카다피를 諷刺하는 記事를 실었다. 憤怒한 카다피는 ‘라 스탐파’ 所有會社인 ‘피아트’를 사들이겠다고 엄포를 놓으며, 유대人 編輯長 아리고 레비를 解雇하라고 要求했다. 當時 피아트의 會長 조반니 아넬里는 레비를 斗頓하고 나섰고, 카다피는 이탈리아人들의 웃음거리가 됐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난 것은 아니었다.

    3年 뒤, 아넬里는 피아트의 새로운 事業파트너로 카다피를 迎入한다고 發表했다. 리비아 外換銀行이 4億달러가 넘는 돈을 投資하면서 世界 5位의 自動車會社 피아트의 持分 10%를 사들였던 것이다. 4億달러라는 돈은 當時 이탈리아의 財政赤字 4分의 1을 메울 수 있는 큰 額數였다. 이番에는 이탈리아 政府와 이탈리아人들이 카다피의 嘲弄거리가 된 셈이었다. 아리고 레비가 그 後 어찌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月給쟁이 編輯長으로서는 카다피의 執拗함과 피아트 持分 10%의 ‘위력’을 버텨낼 才幹이 없었으리라.

    第2次 世界大戰이 끝날 때까지 리비아를 植民統治했던 이탈리아의 自尊心은 여지없이 구겨졌지만, 마키아벨리의 後裔들은 카다피의 돈 앞에 언제든지 무릎 꿇을 準備가 돼 있었다.

    그러나 美國人들은 이탈리아人들이 사랑한 카다피의 이 돈을 미워했다. 그럴 만도 했다. 1969年 9月 쿠데타로 執權하자마자 카다피는 아랍 民族主義와 아랍人의 自尊心을 부추기면서 리비아國立石油會社를 設立해 美國 메이저 石油會社들에 油田使用料 引上을 要求했고, 2年이 채 지나지 않아 배럴當 1달러였던 로열티를 배럴當 2.2달러로 無慮 120%나 끌어올렸다. 當時 每日 100萬배럴씩 原油를 生産하던 리비아의 外換保有額(290億달러)李 사우디아라비아를 제치고 守衛로 올라서자 다른 産油國들도 앞 다투어 카다피의 先例를 따랐다. 美國이 北아프리카의 말 많은 指導者를 눈엣가시로 여기기 始作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카다피에 依해 逐出된 리비아의 前 國王 이드리스는 메이저 石油會社들에게 매우 寬大한 條件을 提供했고, 美國의 石油會社들은 리비아를 ‘우리의 眞正한 樂園’이라고 불렀었다.

    오일달러가 威力을 發揮하기 始作하자 美國 言論들은 “1980年代가 되면 사우디아라비아의 王子들이 제너럴 모터스(GM)를 사들이고, 쿠웨이트의 資金이 美國 全域에 ‘아라비안나이트’라는 이름의 모텔을 建設할 것이며, 아부다비의 무슬림들이 컬럼비아 픽처스나 MGM 같은 映畫社들을 所有하게 될 것”이라며 警戒論을 펼쳤다. 特히 反美路線을 堅持하던 리비아와 이라크를 美國의 對(對)유럽 政策에 事事件件 엇拍子를 놓던 프랑스로부터 核武器를 購入할 可能性이 가장 큰 國家로 指目하기도 했다.



    孤獨한 風雲兒

    實際로 1970年代 카다피는 주체할 수 없을 程度로 넘쳐나는 오일달러를 리비아에 全혀 必要가 없는 미라지 戰鬪爆擊機 114臺를 導入하는 데(2億달러) 쓰거나, 이집트와 시리아 等 周邊 國家들에 每年 各各 1億달러와 5000萬달러씩 支援하는 데 썼다. 누가 보아도 타깃은 이스라엘이었다. 當時까지만 해도 게릴라組織으로 낙인찍혀 있던 아라파트의 팔레스타인解放機構에 資金을 支援하면서 리비아는 테러組織을 支援하는 國家로 이미지가 굳어졌다. 反美, 反이스라엘 路線을 堅持하는 무슬림 組織이라면 美國 內 運動團體라도 ‘桶 큰’ 카다피의 支援을 받을 수 있었다.

    1970年代와 80年代 카다피의 武器는 自身의 입과 돈이었다. 넘쳐나는 熱情으로 아랍人의 團結을 呼訴하던 카다피의 演說時間은 普通 5時間. 사이가 좋던 時節의 이집트 카이로放送은 카다피 演說을 그대로 中繼하곤 했다(2010년 유엔總會에서 長時間 演說을 한 카다피에 對해 西方言論은 빈정댔지만, 그의 長廣舌은 새파랗게 젊은 時節부터 트레이드마크였다). 帝國主義的 秩序를 종식시키려는 그의 熱情은 西方에서는 ‘테러리즘 首魁의 狂奔’으로 비쳤다. 結局 모두 失敗로 끝났지만 이집트, 手段, 시리아, 말타, 부르키나파소, 차드,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甚至於 中國과의 聯邦國家 樹立까지 試圖하는 카다피의 廣幅行步를 理解할 方法은 없었다. 英國의 테러리즘 專門家인 폴 윌리엄슨의 表現을 빌리면 “노벨 테러리즘床이 있다면, 가장 强力한 首相候補는 (當然히) 카다피”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熱情과 野望 그리고 오일달러를 가지고 超强大國 美國을 相對로 한 싸움에서 持續的으로 同盟國을 만들기는 어려웠다. 어린 時節 카다피의 精神的 支柱였던 이집트의 나세르(1918~70)는 正常으로서 그와 相面한 자리에서 “젊은 時節의 나를 보는 것 같다”고 얘기했지만 나세르 死後에는 이집트도 리비아와 距離를 두었다. 나세르의 後任 사다트가 親美路線을 擇했기 때문이다.

    1981年 로널드 레이건은 美 大統領에 就任하자마자 카다피를 “世界에서 가장 危險한 者”로 規定하고, 公公然하게 ‘中東의 미친개’라고 불렀다. 이에 對해 리비아 國營 텔레비전은 레이건이 할리우드 俳優時節 원숭이와 함께 主人公을 맡아 出演한 映畫를 放映하면서 레이건을 嘲弄했다. 2003年 레이건이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었을 때 카다피는 “레이건은 이미 1986年 리비아 攻擊을 指示할 때부터 미쳐 있었다”며 비웃었다.

    레이건과 카다피의 ‘OK牧場의 決鬪’는 1980年代 兩國關係를 규정지었다. 結局 1986年 4月 서베를린의 한 디스코텍 爆發로 美軍 1名과 美國人 23名을 包含한 200餘 名이 부상당하는 事件이 發生하자, 英國과 地中海에 駐屯하고 있던 美 空軍과 海軍은 이른바 ‘엘도라도 溪谷’ 作戰에 突入해 트리폴리와 벵가지를 爆擊했다. 이 爆擊으로 美國은 리비아人 36名이 死亡했다고 發表했지만, 리비아 當局은 “死亡者가 100名, 負傷者가 200名이 넘는다”고 主張했다. 死亡者 가운데 16個月 된 카다피의 養女 ‘한나’가 包含돼 있었고, 6男 사이프 알-아랍(당시 4歲)과 7男 카미스(3歲)는 2000파운드級 爆彈의 爆發 壓力으로 浮上했다(사이프 알 아랍은 2011年 叛軍이 蜂起하자 리비아 政府軍 兵力의 한 司令官으로 任命됐고, 카미스는 이미 리비아群 精銳 ‘카미스 旅團’을 이끌고 있었다. 사이프는 叛軍에 投降했다).

    美國 政府는 ‘豫期치 않게’ 카다피가 死亡했다는 聲明까지 準備했지만, 텐트를 轉轉하며 禁慾生活을 하던 카다피는 목숨을 건졌다.

    ‘身上털기’ ‘獨裁者 때리기’ 그리고 데자뷰

    2年 뒤인 1988年 乘客 270餘 名을 싣고 뉴욕으로 날아가던 팬암 103號基가 스코틀랜드의 로커비 上空에서 爆破돼 乘客과 乘務員 全員이 死亡하는 事件이 發生했다. 寄着地인 슈투트가르트에서 積載된 도시바 라디오-카세트 플레이어에 裝着된 爆彈이 爆發했던 것이다. 1991年 11月에 가서야 美·英·佛 合同調査團은 明白한 證據 없이 카다피 連累 疑惑을 提起했다. 美國의 容疑者 引渡 要求에 對해 카다피는 “根據 없는 主張”이라고 一蹴했다. 그러나 유엔과 美國의 經濟制裁를 비롯한 國際社會의 制裁를 받자 카다피는 이 時期부터 微妙하게 變化하기 始作한다.

    西方國家들의 政府와 매스미디어는 非好感 獨裁政權에 對해서 妙한 팀플레이를 하는 듯한 印象을 준다. 2011年 初 알제리에서 始作된 이른바 재스민革命이 리비아에서도 불을 댕기자 英國이 自國 內 카다피 一家 財産을 凍結 措置한 것을 契機로 카다피 家族과 側近들의 腐敗와 非理에 關한 報道가 줄을 이었다. 카다피 家族에 對한 ‘身上털기’가 始作된 것이다. 1970年代 靑年期의 카다피와 成形手術 疑惑을 받은 現在의 醜惡한 얼굴의 카다피 寫眞을 對照해 비추면서 ‘한물가도 이미 오래前에 한물갔어야 할’ 獨裁者에 對한 嫌惡感을 부추기는 報道도 이어졌다. 2003年 美國이 이라크를 侵攻하기 直前까지 美國 言論의 사담 후세인 ‘털기’도 그랬었다.

    1991年 第1次 美國-이라크 戰爭 以後 2003年까지 카다피를 제치고 美國의 目標物로 浮上한 것은 사담 후세인이었다. 嫌疑는 카다피가 받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大量殺傷武器 製造와 테러리스트 支援 疑惑. 事實上 證據로 立證되지 않은 ‘問罪(問罪)’에 對한 사담 후세인의 抗辯은 1980年代 카다피의 境遇처럼 英語로는 거의 傳達되지 않았다.

    1995年 8月의 뉴욕版 ‘타임’은 ‘사담스 패밀리 離脫하다’라는 題下에 映畫 ‘아담스 패밀리’를 聯想케 하는 후세인 家族寫眞을 크게 실었다. 이라크의 最高權力者 一家를 그로테스크한 鬼神家族에 絶妙하게 投影시킨 ‘傑作’이었다. 記事 內容은 사담 후세인의 두 사위 후세인 카멜과 사담 카멜이 요르단으로 亡命했고, 美國 情報機關이 이들로부터 사담 후세인 一家 周邊에 關한 情報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었지만, 그 內容보다는 그 寫眞 한 張의 破壞力이 컸다. 후세인 一家는 一見 코믹하고 時代錯誤的인 ‘무서운 家族’으로 轉落했다.

    1990年代 以後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冷戰 以後 世界的인 平和무드와 民主化에 걸맞지 않은 ‘獨裁者’였다. 그리고 그는 2003年 美國의 侵攻으로 脈없이 무너졌다. 이라크의 權力者는 美國이라는 超强大國을 相對할 境遇 自身이 가지고 있는 힘의 限界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하는 데 失敗했다. 이런 點에서는 카다피가 한 手 위였다.

    마키아벨리의 次男

    2002年 8月 카다피는 테러支援國이라는 汚名을 뒤집어쓴 리비아의 이미지를 轉換하기 위해 自身의 둘째 아들 세이프 알-이슬람을 國際舞臺에 내세웠다. 젊은 時節의 카다피를 쏙 빼닮은 30歲의 이 建築學徒는 自身이 理事長으로 있는 ‘慈善을 위한 카다피國際財團’의 資金과 自身이 그린 作品 37點을 들고 베를린, 파리, 런던, 로마를 돌았다. 베두人 텐트를 設置해 無料展示會를 연 것이다. 展示된 그림 가운데는 1986年 美國의 트리폴리 爆擊 當時 떨어진 砲彈의 破片을 박은 ‘挑戰’이라는 作品도 있었지만, 西方世界는 이 젊은 靑年에게서 달라진 카다피의 態度와 潛在的 後繼者 可能性을 보았다. 英國의 런던政經大(LSE·카다피의 검은 돈을 받았다는 事實이 最近 리비아 內戰 中 밝혀진 바로 그 大學)에서 政治學 博士코스를 밟을 豫定이라는 點도 好感을 샀다. 세이프는 2008年 이 大學에서 博士學位를 받았다.

    그리고 2003年 3月 美國이 이라크 侵攻 準備로 餘念이 없을 때, 카다피는 이탈리아의 總理 베를루스코니를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美國人들에게 傳해주시오. 그들이 願하는 대로 하자고.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처럼 되고 싶지는 않소.”

    팬암 103期 爆破事件의 犧牲者 遺家族에 對한 補償金 27億달러를 支拂하는 代身 自國에 對한 經濟制裁를 解除해줄 것을 要求했다. 테러 主導 與否를 떠나 美國과 유엔의 制裁로 300億달러의 損失을 甘受해야 했던 리비아로서는 事實上 남는 壯士였던 셈이다. 이탈리아人들로부터 배운 ‘마키아벨리안 테크닉’이었다.

    같은 해 12月 카다피는 大量殺傷武器 開發計劃을 抛棄한다고 宣言하고, 核擴散禁止條約(NPT) 議定書에 署名하는 것은 勿論 國際原子力機構(IAEA) 査察을 受容한다고 發表했다. 이 宣言으로 그가 잃은 것이 ‘體面’ 말고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얻은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카다피는 國際社會의 ‘異端兒’에서 一擧에 ‘偉大한 政治人’으로 格上돼 國際社會의 賞讚을 한 몸에 받았다. 사담 후세인이 馬廏間의 짐승처럼 逮捕되는 동안, 카다피는 하루아침에 ‘아프리카와 中東地域 安定의 基盤’으로 變身했다. 美國의 메이저 石油會社들이 리비아로 復歸했고, 카다피는 유엔 安保理에 參席해 한 달 동안 議長職을 遂行하기도 했다.

    42年이라는 歲月은 徹頭徹尾한 마키아벨리스트에게도 버거운 것인 듯하다. 超强大國 美國을 相對로 30年 동안 피를 말리는 ‘對決’을 거듭해온 ‘沙漠의 風雲兒’도 國民의 抵抗에 直面하자 甚하게 흔들리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로렌초 디 메디치에게 이렇게 訓手했다. “統治者는 被治者의 사랑을 받으려 하기보다는 두려움의 對象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두려움의 對象이 될지언정 絶對로 憎惡의 對象이 되어서는 안 된다.”

    카다피 패밀리

    ‘異端兒’ 時節의 카다피는 리비아人에게 사랑과 두려움의 對象이었다. 그러나 國際社會의 ‘偉大한 政治家’가 되는 瞬間 카다피는 더 以上 리비아 國民에게 두려움의 對象이 아니었다. 國際社會에 復歸함과 同時에 리비아人들은 自己 나라와 世界 사이에 엄청나게 벌어진 距離를 認識하며 ‘君主’에 對한 憎惡心을 쌓아왔는지도 모른다. 알제리와 이집트의 民主革命은 團地 起爆劑일 뿐이었다. 自國 門을 활짝 열어 國際 安定과 平和에 寄與하면서도, 정작 스스로의 後進性을 自覺한 國民에게는 憎惡의 對象이 될 수밖에 없는, 變種 ‘고르바초프 딜레마’에 카다피는 逢着한 것이다.

    리비아와 같이 傳統이 支配하는 곳에서는 如前히 家父長的 權威에 發言權이 있다. 게다가 카다피는 國家라는 制度가 必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스스로 最高指導者로서의 어떤 公式 職銜도 갖지 않았다. 只今 그의 周邊을 지키고 있는 勢力 가운데 그래도 믿을 수 있는 것은 自身의 家族들日 것이다. 相對的으로 사담 후세인의 家族만큼 ‘털리지 않아’ 確然하게 그릴 수 없는 그의 家族은 두 番째 妻 斜皮野와 7男1女, 그리고 1970年代부터 國家保安機構의 責任을 맡으며 카다피를보좌해온 東西 壓달라 歲누씨 程度다. 歲누씨는 現在 軍 情報機關의 責任者다. 次男 세이프 알-이슬람은 現在 리비아 政府의 代辯人 役割을 하면서 얼굴을 알리고 있지만, 2002年 作品展示會 當時에는 “政治는 내 삶의 一部이고 나의 環境 그 自體이지만, 政治家나 長官이 되는 것은 또 다른 問題”라며 아버지와는 다른 節制된 態度를 보였다.

    ‘위키리크스’를 통해 暴露된 美國 外交 專門, 그리고 ‘위키피디아’에 散發的으로 蒐集된 情報에 依하면 카다피의 다른 子女들은 다음과 같다.

    첫 番째 夫人과의 사이에 出生한 것으로 알려진 長男 무함마드는 나서서 政治的 役割을 하지 않고, 리비아 올림픽委員會 委員長職을 맡고 있다. 3男 알-사디는 리비아蹴球聯盟 議長이며 이탈리아의 ‘세리에 A’에 至大한 關心을 갖고 있다. 4男 알-무아타씸은 리비아群 中領으로 國家安保補佐官으로 活動하면서, 2008年 政權安保를 위한 民兵隊의 創設을 위해 리비아國立石油會社 會長에게 12億달러를 要求했다고 한다. 이 會社는 카다피 패밀리의 資金源으로 알려져 있다. 5男 한니발은 아버지를 補佐하기보다는 유럽 全 地域을 轉轉하며 사고 치는 것으로 더 有名하다. 카다피의 唯一한 딸 아이샤는 사담 후세인의 裁判에서 그를 辯護한 法律家로 더 알려져 있다. 카다피의 親舊인 이디 아민과 結婚했으나 現在 離婚 狀態다.

    요염한 金髮 看護師

    카다피 패밀리는 트리폴리 南쪽 近郊에 位置한 밥 알-아지지아 兵營에 主로 居住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카다피가 움직일 때는 恒常 帶同했다는 우크라이나 出身 看護師 할리나 콜로트니츠카야는 美國 外交官들이 ‘요염한 金髮(voluptuous blonde)’이라고 報告書에 表現했다고 해 世人의 입에 오르내렸다. 自然스럽게 카다피의 세 番째 處일지도 모른다는 疑問이 提起됐지만, 우크라이나로 歸國한 것으로 보아 後者의 可能性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美國 外交官들의 人物評價가 옳은 것 같지도 않다. 最近 카다피를 오랫동안 補佐해왔고 리비아 情報機關의 首長을 지낸 外傷이자 ‘카다피의 오른팔’ 無事 쿠社가 英國으로 亡命하면서 카다피 政權의 기둥이 하나씩 무너지기 始作했다는 觀測이 있지만, 執權 期間 42年 동안 家族들을 軍과 情報關聯 核心要職에 布陣시켰기 때문에, 外部의 武力介入이 없는 限 카다피 政權은 健在할 것이라는 主張도 있다.

    리비아는 오스만 帝國(터키), 이탈리아, 獨逸, 프랑스 그리고 最終的으로는 英國의 支配와 干涉을 받았던 나라다. 外勢에 依存하던 王政을 打破하고 리비아에 새로운 秩序를 樹立하려고 했던 ‘指導者’가 周邊 아랍 이슬람 國家들의 支援을 期待할 수 없다면, 버티기의 마지막 지렛대는 家族일 것이다. 베두인족의 家父長的 傳統이 支配하는 나라에서 生存과 鬪爭에 關한 限 徹頭徹尾한 現實主義者인 ‘리비안 마키아벨리’의 運命은 이미 21世紀 中東-아랍 地域의 激變의 가늠자가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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