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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속 宦官 家門의 相續|新東亞

相續의 歷史

歷史 속 宦官 家門의 相續

族譜 만들고 財産도 물려받아

  • 入力 2018-10-07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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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只今은 사라지고 없으나, 옛날 옛적에는 宦官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去勢된 사람들이었다. 親子女를 둘 수 없었던 그들도 家門의 傳統을 잇고, 財産을 물려줄 方法을 考案했다.
    청나라 마지막 환관. [magnum photos]

    淸나라 마지막 宦官. [magnum photos]

    古代에는 東西洋을 莫論하고, 各 나라 王室에 宦官이 있었다. 이미 紀元前 21世紀 수메르에도 宦官이 存在했다. 멀쩡한 男性을 去勢해 王宮에 두고 여러 가지 雜務를 시켰다는 記錄이 이를 立證한다. 宦官에 關한 最初의 記錄인 셈이다. 

    世界 여러 나라에서 宦官은 ‘統治者의 귀’ 노릇을 했다. 그들은 王의 寢室을 깨끗이 淸掃했고, 王의 理髮과 沐浴을 살폈다. 大體로 宮中의 하찮은 일을 도맡았다. 그들의 任務는 비록 하찮은 것이었으나, 宦官은 權力者의 最側近이었다. 그 때문에 王의 信任이 두터워 宦官의 權勢가 肥大해지는 境遇도 많았다. 

    宦官의 出身은 微賤했다. 이미 어린 나이에 去勢된 境遇도 많았다. 結果的으로 그들은 親子女를 거느리지 못해 社가(私家)의 未來에는 別로 마음을 쓰지 않았다. 國家에서는 바로 그 點을 노리고, 宦官이란 制度를 오랫동안 運營했다. 宦官은 一種의 消耗品이었다. 王의 마음에 들면 가까이에 두고 別의別 일을 다 시켰다. 그러다가도 王의 뜻에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假借없이 버렸다. 宦官의 목숨은 王의 뜻에 달려 있었다. 

    世界 歷史를 살펴보면, 충성스럽고 有能한 宦官도 많았다. 그들 中에는 이름난 宰相과 學者도 적지 않았다. 紀元前 4世紀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帝國에는 바孤兒스라는 宦官이 있었다. 그 이름 自體가 宦官을 의미했다고 하는데, 바고아스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3歲의 信任을 얻어 受賞 자리에 올랐다. 나중에는 王과 사이가 나빠져 王을 殺害하는 地境에 이르렀다. 結局 新王 다리우스 3歲가 바고아스를 處斷했다.

    政治 입김 거센 宦官

    宦官의 政治 介入은 로마帝國 後期에도 나타났다. 비잔틴제국(東로마) 때도 宦官들이 王宮의 事務뿐만 아니라 國家의 行政 全般을 掌握하다시피 했다. 6世紀 유스티니아누스 皇帝 時節에는 宦官 出身인 나르세스 將軍이 74歲의 高齡에도 不拘하고, 對外遠征軍 司令官이 돼 여러 戰鬪에서 큰 功을 세웠다. 



    中國에는 이름난 宦官이 더욱 많았다. 1世紀 中國에서 史上 最初로 종이가 發明됐다. 記錄에 따르면, 종이를 發明한 이는 漢나라의 宦官 蔡倫이다. 그는 宮中의 攻防 責任者인 상방령이었다. 蔡倫은 손재주가 뛰어나 여러 가지 道具를 發明하기도 했는데, 나무껍질과 삼베, 낡은 천 等을 利用해 종이를 만들었다(105년). 이것이 바로 ‘채후지’였다. 宋나라 宦官 家憲은 數學者로서 이름을 떨쳤다. ‘황제구萇山輕傷해’와 ‘席瑣散서’라는 著作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中國 古代 歷史서 ‘詐欺’를 完成한 司馬遷도 宦官이었다. 알려져 있다시피 그는 韓武帝의 미움을 사 宮刑(宮刑)을 當하고는 宦官이 됐다. 司馬遷은 極甚한 侮辱과 數値를 堪耐하고 마침내 不朽의 業績을 남겨 後世로부터 끝없는 尊敬을 받고 있다. 

    當然한 일이지만 宦官은 親血肉을 남기지 못했다. 數十, 數百 名의 존비속에 둘러싸인 士大夫에 比하면 宦官의 家門은 단출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中國의 皇帝들은 士大夫보다는 宦官을 더욱 信賴했다. 베트남 歷史에도 비슷한 傾向이 目擊된다. 中國과 베트남에서는 宦官과 士大夫 간 反目과 葛藤이 甚했다. 有能하고 충성스러운 宦官이 많았으나, 士大夫들에 依해 그들의 役割이 歪曲되는 境遇가 大部分이었다. 嚴密히 말해 宦官 中에는 皇帝의 利益을 위해 心血을 쏟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 그와 달리 士大夫는 自身들의 階級的 利害關係에 더욱 徹底했다. 兩者의 衝突은 避치 못할 일이 됐다.

    腐敗 權力의 象徵

    베트남에서는 宦官을 고를 때 先天的으로 性器에 異常이 있는 10歲 前後의 아이들을 對象으로 해 審査했다. 그러나 中國에서는 司馬遷처럼 去勢型을 받은 사람 中에서 宦官을 選拔했다. 特히 秦나라와 漢나라 때 이런 風潮가 支配的이었다. 隋나라와 唐나라 때는 中國 南쪽 地方의 少數民族 가운데서 宦官을 골랐다. 거란족 遼나라는 中國人(한족)과 周圍의 여러 民族 中에서 宦官을 뽑았다. 元나라는 世界帝國이었던 만큼 宦官의 選拔 範圍도 可히 世界的이었다. 西洋·印度·中國·韓國 사람이 모두 宦官으로 活動했다. 그 傳統은 明나라에 이어졌다. 明나라 宮闕에도 몽골 出身을 비롯해, 韓國(1435年까지), 베트남, 캄보디아, 中央아시아, 泰國 및 오키나와 出身의 宦官이 뒤섞여 있었다. 

    明나라 末期, 中國의 宦官 數는 7萬 名이었다. 그들은 坊坊曲曲에 背馳돼 다양한 業務를 管掌했다. 大闕 안에는 一部 宦官들이 남았다. 宦官의 數가 가장 많았을 때는 無慮 10萬 名을 헤아렸다. 

    明나라의 宦官들은 國家 權力을 쥐고 흔들었다. 그들은 小說에도 자주 登場했는데, 凶惡한 存在로 描寫되기 일쑤였다. 宦官은 百姓을 쥐어짜 稅金을 멋대로 喝取하고, 人肉을 먹는가 하면 變態的 性行爲를 일삼는 邪惡한 存在라고 돼 있다. 이것은 分明 부풀려진 內容이었으나 일정한 歷史的 含意를 內包하고 있다. 宦官은 腐敗 權力의 象徵이기 때문이다. 

    宦官의 橫暴에 對한 歷史的 反省이 크게 일어난 적도 있다. 淸 王朝는 宦官의 數를 繼續 줄였다. 末期에는 宦官의 數가 2000餘 名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의 權力은 如前히 대단했다. 먹고살기 위해 去勢의 苦痛을 무릅쓰고 宦官을 自願하는 平民이 많았으니 말이다. 

    韓國에서는 高麗 때부터 宦官을 制度化한 것으로 보인다. 韓國의 宦官은 結婚도 하고 家庭을 이룰 수 있었다. 明나라와는 다른 點이었다. 韓國에서는 去勢를 하더라도 고환만 잘라내는 境遇가 많아 結婚한 뒤에도 性生活이 可能했다는 意見이 있다. 

    ‘經國大典’에 따르면, 大闕 안에는 140名쯤의 內侍가 다양한 任務에 從事한 것으로 記錄돼 있다. 그러나 이것은 正確한 數値가 아니다. 實學者 李瀷의 技術에 따르면, 朝鮮 後期 우리 朝廷에는 宦官이 335名, 宮女가 684名이며 이들이 받는 祿을 合치면 쌀 1萬1430石이라고 돼 있다(성호사설, 第24卷, ‘宦官宮女’). 宦官에게는 政治的 權限이 없었다. 그러나 王을 側近에서 補佐하는 만큼 儒敎 經典에 關한 試驗을 每달 치렀다고 한다. 

    最近 硏究에 따르면, 內侍의 壽命은 大略 70歲 程度였을 것으로 豫想된다. 이는 平民보다 10餘 歲나 길다. 그런데 信憑性은 좀 떨어진다. 젊은 時節 疾病으로 犧牲되거나 宮中의 暴力에 露出돼 絶命한 사람도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參考로 韓國의 宦官은 體格도 좋고 목소리도 男子다웠다. 그 言行에도 威嚴이 있었다고 하고, 闕內의 建物을 補修하는 等 肉體勞動度 너끈히 堪當할 程度였다.

    權力 壟斷한 明나라 宦官, 위충현

    명나라 선덕제의 환관들. [위키피디아]

    明나라 선덕제의 宦官들. [위키피디아]

    中國 明나라의 宦官은 威勢가 대단했다. 그들 中 위충현이 惡名이 가장 높았다. 허베이省 창저우 出身의 平民으로 本名이 ‘僞史’인 위충현은 22歲 때 賭博으로 敗家亡身하자, 妻子를 버린 채 스스로 去勢하고 宦官이 됐다. 이름도 이진충으로 바꿨다. 

    이진충은 大闕의 化粧室 淸掃를 맡았다. 얼마 뒤 賂物을 써 苦役에서 벗어난 그는 어린 王子 駐儒敎의 始終이 되었다. 王子이긴 하지만 駐儒敎의 처지는 最惡이었다. 끼니를 잇기도 어려웠다. 이진충은 그런 週儒敎를 極盡히 섬겼다. 運이 좋았던지 駐儒敎의 아버지 주상락은 士大夫 黨派인 東林黨의 後援으로 太子가 되었고, 駐儒敎는 皇世孫으로 冊封됐다. 駐儒敎는 이진충의 忠誠에 感激해 本來의 城을 되찾아주었다. 이름도 ‘賢明한 忠臣’이라는 뜻에서 ‘위충현’으로 바꿔주었다. 

    얼마 뒤 주상락이 皇帝가 되었으나, 數個月 만에 病死했다. 뒤를 이어 15歲의 駐儒敎가 皇帝가 되었다. 천계제였다. 위충현은 새 皇帝의 最側近으로서 皇帝의 乳母 客氏와 政治的으로 結託해 大權을 左右했다. 

    어린 천계제는 위충현을 宦官의 우두머리인 病筆太監으로 삼았다. 얼마 뒤 皇帝는 祕密情報機關 ‘同窓(東廠)’의 指揮權까지 위충현에게 맡겼다. 永樂帝가 設置한 同窓은 皇帝의 直屬機關으로 最高의 權力機關이었다. 大臣들의 同情을 監視해 萬若 問題가 發見되면 皇帝 直屬의 錦衣衛를 움직여 假借 없이 肅淸했다. 이 機關도 結局 위충현의 指揮를 받았다. 

    그런 위충현에게도 强力한 靜寂이 있었다. 東林黨이었다. 東林黨은 성리哲學을 이념적 武器로 삼았는데, 主로 江南 士大夫들의 政治的 利益을 追求했다. 東林黨은 위충현에 對한 彈劾을 서둘렀다. 無慮 24가지 罪目을 들어 皇帝에게 위충현의 處斷을 要求했다. 

    危機에 處한 위충현은 皇帝의 乳母 客氏의 도움으로 再起했다. 이제 東林黨과 本格的으로 싸우게 됐다. 自身을 窮地로 몬 量聯 等을 逮捕해, 모진 拷問을 加한 끝에 죽였다. 위충현은 동림黨派를 하나씩 摘發해 肅淸했고 그들의 求心點인 동림書院度 閉鎖했다. 

    위충현의 權勢는 갈수록 커져 皇帝를 凌駕할 程度가 됐다. 節강순무 半旅程은 위충현의 生祠堂을 세웠다(1626년). 氣高萬丈한 위충현은 自身을 堯임금과 舜임금에 비겼다. 바깥 行次를 할 때마다 그는 宦官 3000名으로 護衛兵을 삼아 ‘舊千歲’를 외치게 했다. ‘만세’는 皇帝를 위해 남겨두었다. 

    朝廷 大臣들도 위충현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特히 代身 고병겸은 阿附가 甚했다. 그는 위충현을 아버지라 부르며, 제 아들을 孫子로 삼아달라고 했다. 또 大學史 위굉징은 위충현의 조카로 行世했다. 위충현은 病弱한 천계제 以後의 權力 構圖까지 左右할 듯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끝이 있는 法이다. 1627年 천계제가 世上을 뜨자 皇位는 그의 아우(崇禎帝)에게 돌아갔다. 東林黨과 奇脈이 통하던 崇禎帝는 위충현을 逐出할 셈이었다. 皇帝는 于先 客氏부터 조용히 隱退시켰다. 이어서 위충현의 心腹들을 除去했다. 그러고는 위충현을 向해 肅淸의 칼을 뽑았다. 南京으로 가서 皇陵을 돌보라고 하더니 錦衣衛를 急派해 그를 逮捕하라고 했다. 終末을 豫感한 위충현은 自決했다. 崇禎帝는 위충현의 屍身을 陵遲處斬했다. 

    中國 歷史는 위충현을 일컬어 權力을 壟斷한 奸臣 中의 艱辛이라 한다. 그는 果然 奸臣이었을까. 천계제는 위충현을 뭐라고 判斷했을까. 或是 自身을 輔弼하기에 盡力한 忠臣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한 사람의 忠逆(忠逆)을 裁斷하기란 수월하지 않다. 

    위충현에게는 최정수라는 心腹이 있었다. 그는 收賂罪로 파면당하게 됐을 때 위충현에게 달려가 忠誠을 盟誓하며 살기를 바랐다. 以後 최정수는 東林黨 彈壓의 先鋒이 됐다. 위충현은 그를 養아들로 삼았다. 養父와 兩者는 東林黨의 處罰에 앞장섰으나, 結局 崇禎帝로부터 逆風을 맞았다. 

    위충현이 故鄕에 두고 온 妻子息은 어떻게 됐을까. 그들은 苦難의 時節을 넘지 못하고 죽고 만 것 같다. 以後 위충현에게는 ‘醫師(擬似) 家族關係’가 形成됐다. 言及했듯이, 文官 최정수와 代身 고병겸은 위충현의 養아들이요, 大學史 위굉징은 量조카가 됐다. 이들 養아들과 釀造카는 위충현의 權勢를 빌려 富貴와 權勢를 마음껏 누렸다. 하지만 천계제 事後 위충현이 沒落하자 狀況은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그들 또한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宦官의 權力은 믿을 것이 못 됐다. 平素 權力者는 宦官을 最側近에 두었으나, 언제든 마음대로 내칠 수 있었다.

    忠直한 宦官 김처선

    이웃 나라 朝鮮의 事情은 어땠을까. 結論부터 말하면 宦官의 權勢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들의 影響力이 조금이라도 强化될 幾微가 보이면, 士大夫들이 앞다투어 牽制했기 때문이다. 士大夫들은 漢나라와 唐나라의 先例를 列擧하며 임금을 壓迫했다. 

    士大夫들은 宦官에 關한 일이라면 나쁜 쪽으로 誇張하는 傾向이 剛했다. 17~18世紀 實學者 李瀷은 例外的이었다. 그는 宦官 中에도 忠臣이 적지 않다며 燕山君 때의 宦官 김처선(金處善)을 기렸다. 

    李肯翊의 ‘燃藜室記述’(第6卷)에는 김처선의 行跡이 詳細히 記述돼 있다. 燕山君이 失政을 거듭하자 김처선은 힘껏 諫言했다. 燕山君은 그를 미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燕山君이 處容(處容) 놀이를 했는데 매우 淫亂했다. 김처선은 집을 나서기 前 食口들에게 말했다. “오늘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는 大闕에 들어가서 燕山君에게 諫言했다. “저는 네 분의 임금을 섬겼습니다. 經書와 歷史冊을 大綱 압니다마는 殿下처럼 行動하는 賃金이 古今에 없었습니다.” 燕山君이 火를 참지 못해 그에게 화살을 쏘았다. 성난 燕山君은 그를 죽인 다음, 누구도 ‘妻(處)’란 글字를 꺼내지 못하게 했다. 

    그때 權橃(權)이란 선비가 科擧試驗에 合格했는데, 알고 보니 答案紙에 ‘妻(處)’ 字를 썼다. 그 때문에 그의 合格이 取消되는 어처구니없는 騷動이 벌어졌다.조선의 宦官은 代가 끊어지면 祭禮(祭禮)를 모시지 못할까 봐 걱정이었다. 그들은 일찌감치 어린아이를 入養해 宦官으로 키워 代를 이었다. 養父와 養子의 性은 다른 境遇가 많았다. 假令 明宗 때의 常藥(藥을 擔當하는 宦官) 노익겸의 養父는 宦官 박한종이었다(‘조선왕조실록’, 明宗 14年(1559) 9月 25日子 記事). 父子間의 姓은 다르더라도 鄭은 두터웠다. 

    幸여 아비(宦官)가 罪를 짓고 귀양을 가면, 養아들(宦官)은 아비를 위해 上疏를 올렸다(조선왕조실록, 中宗 18年(1523), 9月 5日子 記事 參照). 아버지를 侮辱하는 調整 管理가 있으면, 아들은 身邊의 危險을 무릅쓰고서 激烈히 抗議했다. 1663年(玄宗 4)에는 李尙益이라는 調整 管理가 어린 宦官들 앞에서 宦官 최대립을 批判하자, 이를 目擊한 宦官 양달원이 거세게 抗議한 일이 있었다. 調整은 양달원의 無禮를 問題 삼았다. 그런데 양달원은 최대립의 兩者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誹謗하는 이상익의 言動을 坐視하기 어려웠다.(조선왕조실록, 顯宗 4年 7月 11日子 記事) 

    따지고 보면 宦官 최대립에게 큰 罪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內侍府에 所屬된 奴婢에 關한 公務로 宦官들이 經常感謝 이상진에게 公文을 보냈다. 그러나 이상진은 別로 協助하지 않았다. 최대립은 宦官을 代表해 이상진을 若干 批判했을 뿐이다(조선왕조실록, 顯宗 4年 6月 15日 記事)

    惰性받이로 이어진 朝鮮의 宦官 家門

    정조 때 환관 이윤목이 편찬한 ‘양세계보’.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正祖 때 宦官 이윤목이 編纂한 ‘量世界步’. [국립중앙도서관 提供]

    正祖 때 宦官 이윤목은 宦官들의 統合 族譜인 ‘量世界步(養世系譜)’를 編纂했다. 그의 7代孫 宦官 문건호 等이 100年 뒤에 이를 다시 改正했다. 이 族譜에는 15世紀 前半부터 20世紀 初盤까지 生存한 宦官 650名이 收錄돼 있다. 거기에는 養子女의 出生地와 본적도 包含돼 있다. 

    宦官들이 집안의 和合과 繁榮을 위해 族譜까지 만들었다는 事實은 特記할 일이다. 中國과 베트남에서는 宦官 家門 自體가 아예 存在하지 못했다. 그러나 韓國에서는 宦官도 族譜를 重視했다. 그들도 祖上의 祭祀와 子孫들의 親睦을 社會的 義務로 여겼다. 韓國은 가장 性理學的인 나라였다. 

    宦官의 財産 相續은 어땠을까. 일찍이 1437年(世宗 19)에 그 問題에 關해 調整은 原則을 整理했다. 宦官이 生前에 直接 사들인 奴婢는 養子에게 물려줄 수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를 비롯해 一家親戚에게서 받은 奴婢는 親家의 조카와 宗孫 等에게 나눠주라고 했다. 그 밖의 財産도 마찬가지였다. 

    韓國은 宦官도 族譜를 가진 나라였으므로 養子를 통해 祭祀도 이어가고, 財産도 물려주는 地球上 唯一한 나라다. 韓國에서는 甚至於 僧侶들도 司祭 間에 家門과 財産을 주고받았다. 家門의 繼承을 이처럼 重視한 나라는 世上 어디에도 없다.

    백승종
    ● 1957年 全北 全州 出生
    ● 獨逸 튀빙겐대 哲學博士
    ● 서강대 史學科 敎授, 獨逸 튀빙겐대 韓國 및 中國學과 敎授, 프랑스 國立高等社會科學院 招聘敎授
    ● 現 韓國技術敎育大 待遇敎授
    ● 著書 : ‘백승종의 逆說’ ‘마흔 歷史를 알아야 할 時間’
    ‘禁書, 時代를 읽다’  ‘正朝와 不良선비 강이천’ ‘朝鮮의 아버지들’ 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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