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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正 功臣 已歸와 김류의 主導權 다툼|新東亞

私論史論으로 본 朝鮮王朝實錄

反正 功臣 已歸와 김류의 主導權 다툼

史觀은 곧은 붓을 들어야 한다

  • 入力 2018-10-14 09: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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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朝鮮에서는 史觀이 歷史를 있는 그대로 記錄하는 直筆이 可能하도록 制度的으로 保障하려 했다. 이는 當代의 歷史를 後代 사람들이 거울삼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史觀들은 當代의 權力者에 對한 評價와 批判도 果敢히 記錄할 수 있었다. 

    1623年 3月 仁祖反正에 成功한 뒤, 反正 功臣 勢力은 政局의 主導權을 잡았다. 功臣 勢力은 光海君 때 執權派였던 對北(大北) 勢力을 肅淸하는 데 서슬 퍼런 칼날을 휘두르는 한便, 빈자리를 메울 새로운 人物을 登用하는 일도 함께 해나갔다. 

    이때 이러한 일을 功臣 勢力의 두 軸이었던 李貴(李貴·1557~1633)와 김류(金·1571~1648)가 같이 이끌어나갔으나, 이 둘은 政治的 意見이 달라 팽팽하게 對立한 境遇가 적지 않았다. 已歸는 自身이 옳다고 생각한 일을 人組 앞에서도 거침없이 말해 史官에게 ‘잡君子(雜君子)’라는 評價를 받기도 했는데, 김류와의 關係에서도 例外는 아니었다. 

    仁祖 7年(1629) 7月 23日, 敬德宮(現在의 慶熙宮) 子正前(資政殿)에서 낮에 임금과 함께 工夫하는 珠江(晝講)이 열렸다. 已歸는 知經筵事(知經筵事) 資格으로 參席해 左議政 김류가 權力을 濫用하고 있다고 猛非難했다.


    지난날 尹元衡이 나라의 權力을 마음대로 휘둘렀지만 淸直(淸職)의 候補者를 定하는 일에는 干與하지 못했고, 李珥(李珥)같이 賢明한 分도 吏曹判書로 있으면서 司憲府 地平 候補者 하나도 定할 수 없었습니다. 이는 堂下官인 淸職의 候補者 選定을 李朝의 郎官이 主管했기 때문입니다. 大臣이 官員을 薦擧하여 임명하는 것이나 李朝의 郎官이 淸職의 候補者를 定하는 일이 모두 現職 大臣의 손에서 이루어진다면 權勢가 너무 强해져 또 하나의 이이첨(李爾瞻)李 될 것입니다.  



    <仁祖實錄 7年 7月 23日>


    반정 공신 이귀의 초상이다. 김류와 함께 인조반정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반정이 성공한 뒤 김류가 권력을 남용한다고 맹비난했다. 사관은 이귀가 ‘순수하지 못한 면은 있지만 선을 좋아하는 것이 장점’이라고 평했다. [국립중앙박물관]

    反正 功臣 이귀의 肖像이다. 김류와 함께 仁祖反正에 決定的인 役割을 했으나, 反正이 成功한 뒤 김류가 權力을 濫用한다고 猛非難했다. 史觀은 已歸가 ‘純粹하지 못한 面은 있지만 線을 좋아하는 것이 長點’이라고 評했다. [국립중앙박물관]

    仁祖의 信望을 받은 김류는 그즈음 朝廷의 人事에 積極 介入하고 있었다. 이에 이귀는 駐江이 열린 자리에서 김류가 임금을 속이고 權限을 마음대로 行使했다고 論駁하면서 김류를 奸凶 이이첨에 빗댄 것이다. 김류는 다음 날 바로 辭職을 請하는 箚子(箚子)를 올려 自身의 뜻을 仁祖에게 알렸다.


    神과 이귀는 決意하던 날부터 한 몸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巨事가 失敗하면 함께 屠戮당하고 成功하면 같이 福을 누릴 處地였으니, 이러한 狀況에서 어찌 서로를 해칠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졌겠습니까? 神이 변변치 못하여 事態가 이 地境에 이르렀습니다. 모두 신이 自招한 일이니, 누구를 怨望하고 탓하겠습니까? 예전에 歷史書를 보니, 어떤 사람이 親舊와 같이 길을 가다가 金덩어리를 줍게 되자 江에 던지면서“이 金덩어리 때문에 敦篤했던 友情이 或是라도 變할까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이番 일도 이 이야기에서 敎訓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신은 부끄럽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합니다.  

    <仁祖實錄 7年 7月 24日>

    반정 공신 김류의 초상. 반정이 성공한 뒤 조정의 인사에 적극 개입하다가 이귀로부터 권력을 남용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사관은 김류가 ‘고집이 세긴 했지만 명예를 탐내는 사람은 아니었다’라고 평했다.[국립중앙박물관]

    反正 功臣 김류의 肖像. 反正이 成功한 뒤 朝廷의 人事에 積極 介入하다가 已歸로부터 權力을 濫用한다는 非難을 받았다. 史觀은 김류가 ‘固執이 세긴 했지만 名譽를 탐내는 사람은 아니었다’라고 評했다.[국립중앙박물관]

    김류는 已歸가 自身을 奸凶으로 指目한 것을 臣下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이라고 하면서 已歸와 關係가 틀어진 것이 모두 自己 탓이라고 했다. 두 功臣의 이런 모습을 보고 史觀은 다음과 같이 論評했다.


    김류와 已歸는 함께 反正에 參與해 功을 세웠지만 志向하는 바가 달랐다. 김류는 朋黨의 弊端을 바로잡으려 했고 이귀는 한쪽 便만 登用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김류 便에서 빠져나온 者들은 모두 김류가 名譽를 탐낸다고 하고 李貴 篇으로 들어간 者는 모두 已歸가 線(善)을 좋아한다고 하여 是非가 들끓고 紛爭이 일어났는데, 김류가 이귀를 헐뜯는 일은 적었고 已歸가 김류를 誹謗한 일은 많았다. 김류가 固執이 세긴 했지만 名譽를 탐낸다는 것은 事實이 아니었고 已歸가 純粹하지 못한 面은 있지만 線을 좋아하는 것이 長點이었으니, 둘 다 君子라 할 만했다. 그러나 서로 疑心하고 猜忌하는 結果를 면하지 못했다. 已歸는 名望과 實際가 本來 가벼웠는데, 김류가 마음을 넓게 먹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仁祖實錄 7年 7月 24日>

    이 社評에서 보이는 史官의 時刻이 꼭 客觀的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士官의 評價를 통해 우리는 當代 權力者인 已歸와 김류의 모습을 좀 더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仁祖反正 後 權力의 頂點에 있던 두 人物에 對해 史觀이 거리낌 없이 批判할 수 있었던 데에는 直筆을 保障한 朝鮮의 史觀 制度와 史觀이 지닌 透徹한 記錄 精神이 重要한 役割을 했다. 當代의 權力者인 功臣들을 批判的인 視角으로 바라보며 自身의 判斷을 記錄으로 남길 수 있는 存在가 ‘史觀’이었으며, 이러한 일들이 可能한 나라가 朝鮮이었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거침없이 主張하고 그르다고 생각하는 것을 加減 없이 批判할 수 있는 社會가 健康한 社會라고 할 때, 果然 우리가 살고 있는 現在가 數百 年 前 朝鮮 社會보다 健康하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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