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內亂陰謀 造作 事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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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內亂陰謀 造作 事件 (金大中內亂陰謀造作事件)은 1980年 新軍部 勢力이 金大中 을 비롯한 民主化 運動家 20餘 名을 北韓의 使嗾를 받아 內亂陰謀를 計劃하고 光州 民主化 運動 을 일으켰다는 嫌疑로, 軍事裁判 에 回附한 事件이다. 2004年 김대중은 再審을 통해 無罪 를 宣告받았다.

1993年 10月 18日에 열린 國會 國政監査 法司委員會에서 民主黨 강수림 議員은 "1980年 當時 戒嚴法 에는 軍法會議 國家保安法 違反事件을 다룰 權限이 없는데도 有罪判決을 내린뒤 1981年 뒤늦게 戒嚴法 을 改正하여 常識밖의 脫法을 저질렀다"고 하면서 "軍檢察이 光州市民 虐殺에 對해 搜査를 할 用意가 있는가"라고 追窮하였다. [1]

新軍部의 政治人 逮捕 計劃 [ 編輯 ]

新軍部는 非常戒嚴 擴大措置를 手段으로 超憲法的 非常機構人 國保委의 設置, 民主化日程等이 論議될 臨時國會의 早期解散等을 主要內容으로 하는 執權시나리오人 `時局收拾方案'을 企劃했다.

5月 初 全斗煥 은 保安司 對共處長 이학봉 에게 指示, 當時 戒嚴解除및 新軍部의 退陣等을 要求하는 大學街의 民主化 示威를 制壓하고 學生示威를 背後操縱하는 政治人,在野人士,復學生等을 豫備檢束 强制 逮捕토록 했다. 전두환의 指示에 따라 이학봉 은 主要 政治人과 在野人士,學生들을 國紀紊亂者와 權力型 不正蓄財者로 各各 分類한 두個의 搜査計劃書를 마련, 全斗煥에게 5月15日 最終報告했고 對象者들에 對해 곧바로 連行逮捕作業에 들어갔다. [2]

5月 13日 김대중은 記者會見을 갖고 "北韓 共産集團이 우리의 過渡期를 利用하여 南韓에 對해 暴力에 依한 그들의 野慾을 成就하려는 陰謀를 劃策하려는 일이 絶對 없기를 嚴重 警告한다."면서 "國民과 學生, 勤勞者들은 秩序를 지키고 社會 安定을 維持하여 北韓共産集團이 誤判할 契機를 주지 말하야 한다"라고 發表하여, 學生 運動圈의 秩序 維持를 當付했다. [3]

5月 16日 在野 政治團體 '국민연합'은 5月 7日 날 한 聲明을 다시 한 番 確認하고,‘계엄 解除', 전두환 退陣', '政治日程 具體化'를 政府가 22日까지 實行할 것을 促求하는 聲明을 發表했다. 김대중은 國民聯合에 5月 20日 臨時國會 召集을 理由로 18日까지 政府가 對答하라는 草案을 22日까지 延長할 것과, '戒嚴軍이 上官 命令에 服從하지 말 것'을 要求하는 條項은 內亂煽動에 걸린다는 理由로 削除할 것을 當付했다. [4]

김대중 內亂陰謀 裁判 [ 編輯 ]

1980年 5月 17日 新軍部 5·17 非常戒嚴 全國擴大 措置 를 내리면서 同時에 김대중, 김종필을 비롯한 政治人과 在野人士들을 逮捕했다. 이날 김대중도 學生·勞組騷擾關聯 背後操縱 嫌疑로 동교동 自宅에서 首警司 憲兵團에 依해 逮捕됐다.

5月 18日부터 非常戒嚴 全國擴大 措置로 인한 政治彈壓에 抗議하는 光州市民들이 光州 民主化 運動 을 벌였다. 光州 民主化 運動을 鎭壓한 新軍部 勢力은 民主化 人士를 彈壓하기 위해 光州 民主化 運動의 主動者로 김대중을 指目하여 內亂嫌疑로 起訴했다. 新軍部는 두달餘의 拷問 을 통해 關聯者의 陳述을 造作해냈다.

陸軍本部 戒嚴普通軍法會議(裁判長 문응식 所長, 審判官 박영철 이재흥 여운건 准將, 法務士 양신기 中領)는 1980年 9月 17日 陸軍本部 大法廷에서 19回 公判을 열어 김대중에게 內亂陰謀 國家保安法 反共法 戒嚴法 外國換管理法違反 罪를 適用하여 死刑을 宣告했다. 또 문익환 이문영은 內亂陰謀 戒嚴法違反 等을 適用하여 懲役20年에서 5年, 서남동 等 11名에게는 戒嚴法違反을 適用 懲役4年에서 2年을 宣告했다.

陸軍戒嚴高等軍法會議 裁判部(裁判長 유근환 所長, 審判官 백영기 准將, 法務士 장동완김진흥 김익하 中領)는 1980年 11月 3日 陸軍本部 大法廷에서 김대중 內亂陰謀事件 被告人 24名을 出征시킨 가운데 김대중의 抗訴를 棄却하고 死刑을 宣告했다. 1審에서 懲役20年이 宣告됐던 문익환 懲役15年, 二重門, 송건호, 한승헌, 유인호 等 4名에 對해 減刑하고 김윤식, 이택돈 김녹영 等 3名에게는 執行猶豫를 宣告했다.

1981年 1月 大法院은 軍事裁判에서 김대중에 對해 死刑 을 宣告했으나, 當時 김대중이 "이 땅의 民主主義가 回復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政治報復이 다시는 行해지지 않도록 해달라"고 한 法定 最後陳述이 國際社會에 알려지면서 큰 反響을 불러일으켰다. 지미 카터 前 美國 大統領, 레이건 行政府, 美國 議會 와 甚至於는 當時 敎皇인 요한 바오로 2歲 를 비롯한 世界 各國 指導者와 宗敎人, 人權團體들로부터 김대중 死刑 中斷 壓力이 거세어짐에 따라 1月 23日 김대중의 刑量은 無期懲役으로 減刑되었다. 얼마 後에는 20年型으로 다시 減刑되었다. 以後, 國家安全企劃部長 盧信永 이 全斗煥에게 김대중을 美國 亡命을 할 것을 勸誘하고 誓約書를 提出할 것을 願하여 김대중은 全斗煥에게 비록 死刑宣告를 받았지만 政治판에 발을 들이지 않겠다는 親筆 便紙를 作成하게 된다.

誓約書 專門 [ 編輯 ]

전두환大統領 閣下, 局社 에 진념하신 가운데 閣下의 尊體 더욱 健勝하심을 仰祝하나이다. 却下게서도 아시다싶이 本人은 矯導所生活이 二年半에 이르렀아온데 本來의 持病인 高關節變形症과 耳鳴 等으로 苦楚를 겪고 있으며 專門醫에 依한 充分한 治療를 받고자 渴望하고 있읍니다. 本人은 却下게서 出國許可만 해주신다면 美國에서 이, 三年間 滯留하면서 完全한 治療를 받고자 希望하온데 許可하여 주시면 感謝千萬이겠읍니다. 아울러 말씀드릴것은 本人은 앞으로 國內外를 莫論하고 一切 政治活動을 하지 않겠으며 日放 國家의 安保와 政治의 安定을 害하는 行爲를 하지 않겠음을 約束드리면서 閣下의 善處를 仰望하옵니다.

? 1982年 12月 13日
金大中

外國의 김대중 救命運動 [ 編輯 ]

로널드 레이건 大統領은 캐스퍼 와인버거 美 國防部 長官과 그레그 前 大使를 韓國에 急派했고, 이들은 전두환 新軍部를 相對로 金大中 救命運動에 나셨다. [5] 에드워드 케네디 美國 上院 議員은 71年 當時 신민당 大選候補로 美國을 訪問한 김대중에 對해 “當身은 韓國의 존 F 케네디”라며 支持를 表明했다. 그는 80年 김대중이 新軍部에 依해 死刑宣告를 받자 救命運動에 앞장섰고 美國 亡命 生活과 歸國 때도 큰 도움을 줬다. 케네디 議員은 84年 4月 26日 김대중에게 보낸 便紙에서 “當身과 나는 民主와 平和를 支持하는 立場을 共有하고 있다. 韓國의 平和的 政權交替를 支持한다”고 썼다. 85年 2·12 總選 前에 歸國을 決心한 김대중은 84年 6月 “84年 말까지 歸國하기로 決定했다”는 뜻을 書信에 담아 傳했다. 케네디 議員은 86年 5月 韓國에서 民主化를 위한 김대중의 努力에 敬意를 표한다는 內容의 便紙를 보냈다. 當時 테네시州 上院議員이던 앨 고어 前 副統領 等은 김대중의 安全한 歸國을 保障하라며 全斗煥에게 便紙 等을 보냈다. [6]

獨逸 社民黨 의 1980年 9月 17日子 報道資料에 따르면 빌리 브란트 當時 사민당 總裁는 “김대중氏에 對한 死刑 宣告는 우리 모두에게 큰 挑戰으로, 큰 衝擊을 받았다”며 “曺國의 社會的 發展과 人權守護를 爲해 獻身한 愛國者의 努力이 이런 判決로 歸結될 수 있다는 事實을 理解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이番 判決이 執行된다면 韓國은 國際社會에서 莫大한 損傷을 입으므로 大統領이 判決이 修正되도록 措置할 것을 緊急히 要請한다”며 “김대중氏 救命에 모든 힘을 發揮해 줄 것을 美國 政府에도 緊急히 要請한다”고 말했다. [7]

敎皇 요한 바오로 2歲 는 서울 駐在 로마 敎皇廳 大使館을 통해 全斗煥에게 두 次例 便紙를 發送해 김대중의 善處를 當付했다. [8]

以後에도 繼續하여 美國 을 비롯한 海外 知識人들의 剛한 抗議가 提起되고 及其也 로널드 레이건 美國 大統領으로부터 迂廻的인 壓力이 들어오자 金大中 問題가 美國과의 外交 摩擦로 이어질 것을 憂慮한 盧信永 當時 安企部長은 全斗煥 當時 大統領에게 김대중의 釋放을 建議했다. 이를 두고 苦心하던 전두환은 1982年 光復節 特赦 名單에 김대중을 包含시킬 豫定이었지만 軍 內部의 反撥로 霧散되었다.

그러나 얼마 後 전두환은 노신영 安企部長에게 김대중 釋放을 推進하라고 指示했고, 盧信永은 李姬鎬를 통해 김대중에게 美國으로 出國하여 病을 治療하고 오라는 事實上의 亡命 勸誘를 했다. [9] 김대중은 처음에 이를 反對했으나, 美國으로 떠나기만 하면 周邊 사람들을 더 以上 壓迫하지 않겠다는 盧信永의 提案에 結局 이를 受諾하여 1982年 12月 刑 執行停止로 出所하여 美國으로 出國했다. [9]

歸國과 家宅 年金 [ 編輯 ]

美國으로 出國한 김대중은 一切의 政治 活動을 안하기로 전두환 政府와 約束했으나, 얼마 못가 美國 內의 政治人들을 만나며 韓國의 政治 現實에 對해 强力한 聲討를 하는 等 전두환 政府에 對해 獨裁 政權이라는 非難을 했다. 그리고 1985年 12代 總選 을 앞두고 韓國에 歸國하겠다는 發表를 했다.

전두환은 激怒하며 김대중 入國을 沮止하도록 安企部에 指示했고, 美國 政府와 政治人들 亦是 不過 2年 前인 1983年 여름 필리핀 의 野黨 指導者 베니그노 아키노 가 마닐라 空港에 入國하는 瞬間 마르코스 獨裁 政權에 依해 暗殺되었음을 想起하며 김대중을 積極 挽留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祖國의 現實을 外面할 수 없다면서 監獄에 가는 限이 있더라도 歸國을 强行하겠다는 意志를 밝혔고, 이에 최창윤 當時 大統領 政務祕書官은 1985年 1月 23日子 뉴욕타임즈와의 會見에서 김대중이 歸國할 境遇 남아있는 刑期를 다시 執行하기 위해 矯導所에 再收監하겠다는 强勁한 立場을 밝혔다.

그러자 美國 政府는 全斗煥 政權이 김대중의 無事 歸國을 保障하지 않을 境遇 1985年 4月로 豫定된 全斗煥의 訪美를 白紙化시킬 수 있다는 警告를 서울에 傳했고, 이에 唐慌한 全斗煥 政權은 駐美 韓國大使館을 통해 최창윤의 發言이 政府의 公式 立場이 아닌 個人的인 意見일뿐이라는 解明資料를 내놓았다. 또한 美國 國務部가 김대중을 講師로 招請하여 職員들에게 韓國의 民主主義 等을 主題로 講演하도록 周旋하면서 全斗煥 政權에 對한 美國의 壓力은 漸漸 더 거세졌다.

마침내 1985年 2月 8日 김대중은 2年 2個月만에 故國 땅을 밟게 되었다. 이미 全斗煥 政權이 김대중에 對해 家宅 年金 外에는 어떠한 措置도 取하지 않겠다고 約束했으나, 美國 人士들은 如前히 전두환 政權을 完全히 信賴하지 않았는지 민주당 에드워드 페이言(Ed Feighan), 民主黨 토머스 폴리에打(Thomas M. Foglietta) 下院 議員을 비롯한 여러 美國의 著名 人士들이 김대중과 함께 飛行機에 搭乘하여 金浦空港 入國場까지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러나 入國場에 들어서는 瞬間 기다리고 있던 安企部 要員과 警察이 김대중 夫婦를 强制로 끌고 地下로 移動해 安企部 버스에 태웠고, 이를 沮止하려던 美國 人士들과 安企部 要員들이 衝突하는 事態까지 빚어졌다.

特히 當時 駐韓 美國 大使館은 이원경 當時 外務部 長官과의 協議를 통해 김대중이 歸國할 境遇 美國 大使館 1等 書記官이 迎接하고 大使館 寬容車便으로 동교동 自宅까지 同行하겠다는 方針을 세웠으나, 김대중의 歸國 當日 安企部의 妨害로 美國 大使館 關係者들이 제時間에 到着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뒤늦게 김대중의 동교동 自宅에 到着한 美國 人士들은 憤痛을 터뜨리며 全斗煥 政權을 非難했고 特히 엘살바도르 駐在 美國 大使를 지낸 로버트 화이트는 "서울 올림픽 때 美國人들이 安全하게 韓國을 訪問할 수 있는지를 再考해야 한다."는 發言까지 할 程度였다.

美國 政府 亦是 가만히 있지 않았다. 美國 國務部는 金浦空港에서의 騷動에 對해 遺憾을 表示하고 이에 對한 解明을 要求했으며, 美國 大使館도 이원경 外務部 長官에게 合意 破棄에 對한 謝過와 解明을 要求하면서 全斗煥의 訪美를 앞두고 韓美間에 深刻한 葛藤이 發生했다. 特히 美國 政府가 全斗煥 政權을 直接 非難한 것은 전두환이 大統領에 就任한 以來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10]

金大中 再審 無罪判決 [ 編輯 ]

1995年 에는 光州 民主化 運動에 關한 特別法(5?18 特別法)이 制定되어 김대중을 비롯한 關聯者들의 再審 請求와 名譽 回復이 이어졌고, 김대중은 大統領 任期를 마친 2003年 再審을 請求해 2004年 1月 이 事件에 對해 無罪를 宣告받았다. 裁判部는 判決文에서 “79年 12·12事態 와 80年 5·18 을 전후해 發生한 新軍部의 憲政破壞犯行을 沮止하거나 反對함으로써 憲法의 存立과 憲政秩序를 守護하기 위해 行한 正當한 行爲이므로 刑法 第20條의 正當行爲에 該當, 犯罪가 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11]

金大中 救命 飛火 [ 編輯 ]

레이건 政府 當時 리처드 알렌 美 前 安保補佐官은 《 손석희의 視線集中 》에 出演해 金大中 救命運動에 關한 祕話를 公開했다. 알렌 前 補佐官은 當時 狀況에 對하여 "저를 만나러 美國을 訪問한 韓國의 特使는 저에게 死刑이 豫定대로 執行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으며, 死刑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면서 "美國은 非公式的 채널, 公式的 채널을 動員하여 김대중을 석방시키기 爲한 措置를 取했다"고 말했다. 美國은 死刑이 執行된다면 이것은 倫理的인 犯罪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고, "韓國 뿐만 아니라 韓美關係에 있어서 災殃이 될 것"이란 外交的 理由를 提示했다. 外交祕話로 全斗煥이 레이건 美 大統領 就任 以後 첫 訪問者도 아니었으며, 첫 訪問者는 자메이카의 에드워드 세아가 總理라고 밝혔다. 그리고 전두환과 레이건의 만남은 頂上會談도 아니었고 國賓訪問度 아니었다고 말했다. [12] [13]

各州 [ 編輯 ]

  1. [1]
  2. 公訴狀으로 본 5.18 展開過程
  3. “김대중氏 會見 北傀의 過渡期 틈탄 暴力 陰謀 警告” . 京鄕新聞. 1980年 5月 13日. 1面.  
  4. 이해동, 80年의 DJ "자꾸 밧줄 목에 걸리는 게 聯想" 告白
  5. '김대중 지킴이' 그레그와 DJ의 管鮑之交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6. 에드워드 “DJ, 當身은 韓國의 JFK”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7. "브란트 前 獨 總理 DJ 救命運動했다"
  8. 배명재 (2009年 5月 19日). “죽음 앞둔 DJ 救한 ‘敎皇의 自費’” . 京鄕新聞. 敎皇은 1980年 12月11日 서울 駐在 敎皇廳 大使館을 통해 全 前 大統領에게 1次 便紙를 發送해 金 前 大統領의 善處를 當付했다. 金 前 大統領의 刑量이 死刑에서 無期懲役으로 減刑된 直後인 이듬해 2月14日 2次 便紙를 보내 前 大統領에게 感謝의 뜻을 傳達했다.  
  9. 이도성,한기흥 (1994年 2月 13日). “南山의 部長들 (174) 全(前)氏 民心(民心)收拾 겨냥"金大中(金大中)釋放 " . 東亞日報. 11面. 그러니 男便에게 2,3年 동안 美國에 가서 病治療를 하도록 勸해달라  
  10. 한기흥 (1994年 4月 10日). “南山의 部長들 (182) 全氏 訪美와 바꾼 「金大中 歸國」” . 東亞日報. 11面. 前(全)政權 出帆 以來 처음으로 非難하는 聲明을 내고 空港에서 벌어진 騷動과 金氏에 對한 年金措置에 遺憾을 表示했다. 워커大使도 이(李) 外務長官에게 合意事項破棄에 對한 謝過와 解明을 要求, 前 大統領의 訪美를 앞두고 韓美間에 먹구름이 끼어들기 始作했다.  
  11. DJ 24年만의 無罪 "新軍部 對抗 正當行爲"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2. 전두환과 美國의 去來에 對하여
  13. "DJ 死刑은 韓美關係에도 災殃이었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