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7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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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7 쿠데타
날짜 1980年 5月 17日
場所
結果 非常戒嚴 擴大措置 및 新軍部 政權 掌握
大規模의 民主化 運動 發生
交戰國

대한민국 新軍部

대한민국 大韓民國 第4共和國
指揮官
全斗煥
盧泰愚
최규하
軍隊

대한민국 하나회

대한민국 非하나회 新軍部
대한민국 大韓民國 陸軍

5·17 쿠데타 1980年 5月 17日 全斗煥 , 盧泰愚 를 비롯한 하나회 (新軍部) 人士가 政權 掌握을 위해 主導한 非常 戒嚴 擴大 措置에 依해 發生한 事件이다. 新軍部는 時局을 收拾한다는 名目 아래 1980年 5月 17日 24時부터 非常戒嚴을 全國으로 擴大하면서 政黨 및 政治活動 禁止·國會 閉鎖·國保委 設置 等의 措置를 내리고, 令狀없이 學生·政治人·在野人士 2,699名을 拘禁했다. 5·17 非常戒嚴 全國擴大 措置로 實權을 掌握한 하나회 非常戒嚴 期間 第5共和國 政權을 創出하는 過程에서 人權蹂躪·獻呈破壞 行爲를 恣行했다. 5·17 內亂 事件 으로도 불리며 이 쿠데타에 對한 抗議로 일어난 5·18 光州 民主化 運動 에 對한 暴動的 示威鎭壓 을 이 事件과 묶어서 1997年 12.12, 5.18 事件 裁判 當時에는 5·18 內亂 事件 으로 불리기도 했다. 서울의 봄 이라고 불리는 期間은 10·26 事件 부터 이 事件이 發生한 時間까지를 가리킨다.

背景 [ 編輯 ]

1979年 10·26 事件 으로 朴正熙 大統領이 암살당하자 大韓民國 政府는 國務總理 최규하 를 大統領 權限代行으로 임명하고 濟州島를 除外한 全國에 非常戒嚴令을 宣布했다. 10月 27日 戒嚴司令官에 陸軍參謀總長 鄭昇和 가, 10·26 事件 搜査를 擔當하는 合同搜査本部長에 保安司令官 全斗煥 이 就任했다. 10·26 事件을 契機로 緊急措置 로 民主化 輿論을 억누르던 維新憲法 을 廢止하고, 改憲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통일주체국민회의 選擧에 依해 當選된 최규하는 12月 7日 0時 大統領 就任 直後 憲法에 對한 一切의 批判이나 反對 論議를 禁止하는 緊急措置 第9號 를 解除하면서 民主的인 憲法으로 改正을 約束하고 政治的 抑壓을 緩和했다. [1] 하지만 12月 12日 軍部內 强勁派 勢力인 하나회 12·12 軍事叛亂 을 일으켜 鄭昇和 陸軍參謀總長을 强制 連行하고 軍 主導權을 掌握했다. 12·12 軍事叛亂 으로 登場한 하나회 는 民主化 日程을 不透明하게 만들고 明確하게 提示하지 않았다. 1980年 2月부터 保安司令部 는 廢止됐던 情報處를 復活시키고, 民主化 輿論을 軍部의 政治 參與를 正當化하는 方向으로 轉換하기 위해 言論에 對한 懷柔를 核心으로 하는 K-工作 計劃 을 實施했다. 같은해 3月 保安司令官 全斗煥 은 陸軍 中將으로 進級한데 이어, 4月 中央情報部長 署理(副總理級)를 兼職하며 兩大 情報機構를 掌握하고 國內 政治에 本格的으로 介入 하기 始作했다.

1980年 5月 初旬頃 全斗煥 을 中心으로 하는 하나회 人士들은 時局을 收拾한다는 名目 아래 本格的으로 政局을 掌握하고 執權을 하기 위한 方案을 議論했다. 5月 12日 保安司 에서는 전두환의 指示를 받아 '非常戒嚴 全國擴大'·'國會 解散'·'國家保衛 非常機構 設置'를 骨子로 하는 執權 시나리오로 時局收拾方案 을 企劃했다. 地域戒嚴만으로는 新軍部가 政局을 掌握하는 데 限界가 있기 때문에 전두환 退陣 等을 要求하는 國民들의 示威와 抵抗을 强力히 制壓하고 軍部가 前面에 나서서 政局을 掌握하기 위해서 非常戒嚴을 全國으로 擴大하고, 國家保衛 非常機構를 設置해 內閣을 操縱·統制하는 機能을 軍部가 遂行하는 過程에서 憲法上 戒嚴解除 要求權을 가지고 있는 國會가 戒嚴解除를 要求할 憂慮가 있어 新軍部에 依한 持續的인 政局掌握을 擔保하기 위해서 政治인 逮捕와 國會解散이 必要하다는 것이 時局收拾方案의 企劃意圖였다. [2] 以後 전두환·盧泰愚· 황영시 · 차규헌 · 유학성 · 정호용 等 新軍部 核心 人士들은 時局收拾方案을 實行하기 위한 論議를 順次的으로 하고, 全軍主要指揮官會議에서 軍指揮官들의 支持決意를 誘導함으로써 全軍의 醫師를 背景으로 時局收拾方案을 推進하기로 했다. 5月 15日 保安司 對共處長 이학봉 金大中 · 金鍾泌 等 主要 政治人을 連行하기 위해 '國紀紊亂子 搜査計劃', '權力型 不正蓄財者 搜査計劃'을 마련해 全斗煥에게 報告하고, 전두환은 이학봉에게 檢擧 準備를 命令했다. [3]

1980年 4月 末부터 學生 運動圈과 政治權에서 保安司令官과 中央情報部長 署理를 兼任하면서 權力을 强化하는 전두환을 警戒하는 雰圍氣가 形成됐다. 5月 1日 서울대 總學生會는 徹夜會議 끝에 전두환 保安司令官을 中心으로 하는 新軍部의 政治 介入이 民主化 에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理由로 政治 鬪爭을 決定했다. 5月 初부터 大學生들은 전두환 退陣·民主化 日程 提示 等의 示威 口號를 외치면서 民主化 要求 示威를 벌였다. 한便 5月 中旬부터 政府와 國會에서는 民主化 日程을 앞당기고 있었다. 5月 12日 新民黨 共和黨 兩黨 總務들은 改憲案을 接受하고, 5月 20日 10時 臨時國會를 召集해 戒嚴 解除·政治日程 短縮 等 政治 懸案 問題를 論議하기로 合意했다. [4] 5月 13日부터 大學生들에 依한 本格的인 街頭示威가 始作됐다. 5月 15日 서울驛 에는 大學生 10萬名이 結集했다. 이過程에서 戰鬪警察 1名이 示威隊 버스에 깔려 死亡한다 [5] 君의 動向이 尋常치 않자 大學生들은 午後 8時까지 示威를 하던 中 自進 解散했다. 이날 신현확 總理는 政治 日程을 앞당기겠다는 內容의 談話를 發表하면서, 80年 말까지 改憲案을 確定하고 81年 兩大 選擧를 實施해 政權을 移讓하겠다고 發表했다. [6] 國會 憲法改正審議特別委員會는 5月 15日 憲法 全文을 除外한 모든 部分에 對해 與野가 合意를 이뤄내어 4年 任期에 1番 中임을 許容하는 大統領 直選制를 뼈대로 하는 專門 121兆, 附則 7條의 憲法 改正案을 마련하여 事實上 改憲作業을 完了했다. 5月 20日에는 國會 本會議 開催가 豫定되어 있어, 改憲案은 곧 本會議를 通過할 것으로 豫想됐다. [7] 5月 16日 全國總學生會 會長團은 正常授業을 받으며 當分間 時局을 觀望하기로 決定하고 當分間 集會를 中止하기로 決定했다.

北傀南侵설 惡用 [ 編輯 ]

1980年 5月 10日 中央情報部는 當時 日本 內閣情報調査室 韓半島 擔當班長이었던 에비스 겐이치 (惠比壽建一)의 諜報를 土臺로 對北 特異動向을 警告하는 報告書, '北傀南侵설'을 作成했다. 5月 11日 陸軍本部 情報참保傅에서는 '北傀南侵설'을 分析하고 이와 같은 諜報는 價値 없다고 結論내렸다. 5月 13日 美國 國務部 代辯人은 '北傀南侵설'와 關聯해 "우리가 가진 情報에 따르면 北韓에서 平素와 다른 部隊移動을 볼 수 없으며 韓國에 對한 某種의 攻擊이 臨迫했다고 믿을 만한 움직임이 없다"는 聲明을 發表했다. 駐韓美軍 司令官 존 위컴 은 "전두환이 靑瓦臺의 主人이 되기 위한 口實"라고 評價했다. [8] [9] 그럼에도 不拘하고 전두환은 5月 12日 深夜에 臨時 國務會議에서 關聯 內容을 誇張해서 報告했다. 南侵說을 提報했다고 알려진 當時 日本의 內閣 調査室 韓半島 擔當班長과 나카소네 야스히로 當時 防衛省 長官 等은 "그런 具體的인 內容을 말한 적도 그런 情報도 없었다"고 밝혀 5月 17日을 전후한 '北傀南侵설'은 新軍部에 依해 造作된 것으로 드러났다. 新軍部는 北韓의 南侵 可能性을 빌미로 危機感을 造成하고 非常戒嚴 擴大措置를 正當化하기 위해 南侵 諜報를 惡用했던 것이다. [10]

軍部隊의 事前移動 [ 編輯 ]

全斗煥 · 황영시 · 정호용 等 新軍部 核心勢力은 執權 시나리오에 따라 이루어질 措置에 對한 反對 集會가 있을 것으로 豫想해 鎭壓兵力 投入 및 强勁鎭壓 方針을 決定했다. 時局收拾方案은 戒嚴 擴大와 同時에 空輸部隊를 投入해 果敢한 方法의 打擊으로 示威隊를 鎭壓한다는 指針이 卽刻 實行될 것을 前提로 하는 것이었다. [11] 1980年 3月 初부터 이미 學生 示威가 加熱될 것을 對備해 全國 軍 部隊에 攻勢的 暴動鎭壓訓鍊인 忠情訓鍊 이 强度높게 實施됐다. 5·17 非常戒嚴 全國擴大 措置 以前, 新軍部는 軍部隊를 事前 이동시켜 示威 鎭壓 準備를 마쳤다. 京畿道 楊平의 第20師團, 江原道 華川의 第11空輸旅團, 忠淸北道 曾坪의 第13空輸旅團 等은 서울로 移動했으며, 同時에 首都警備司令部에 配屬됐다. 5月 10日 2軍司令部에서는 光州·大田 燈에 제7공수여단을 配置하는 方案을 議論했다. 5月 15日 第7空輸旅團은 光州·大田으로 移動할 準備를 마쳤고, 제31사단은 光州 地域의 主要 保安 目標를 占據했다. [12]

5·17 非常戒嚴 全國擴大 措置 [ 編輯 ]

新軍部는 1980年 5月 20日 臨時國會가 開會되면 政局 掌握에 蹉跌이 빚어질 것을 憂慮하여, 김재규 에 對한 大法院 判決이 確定되는 5月 20日 以後에 施行하겠다던 當初 計劃을 修正하고 時局收拾方案을 17일으로 앞당겨 施行하기로 決定했다. [13] 5月 17日 9時 30分頃 전두환은 권정달 保安司 情報處長을 주영복 國防部長官에게 보내, 時局收拾方案을 自身이 大統領에게 報告할 豫定이니 大統領에게 全軍主要指揮官會議 決議事項이라고 말하라고 要求했다. 17日 午前 이학봉 은 전두환의 指示에 따라 全國 保安部隊에 17日 24時 非常戒嚴이 全國으로 擴大되니 學生 等 示威 主動者들을 日帝 檢擧할 準備를 하라고 指示했다. [11]

17日 正午 新軍部는 政府로부터 戒嚴 擴大措置를 이끌어내기 위해 全軍主要指揮官會議를 열었다. 盧泰愚 · 정호용 · 황영시 等 新軍部 核心 人士들은 全軍主要指揮官會議에서 非常戒嚴 擴大 方案을 力說했으며, 非常戒嚴 全國擴大를 통한 軍의 政治介入을 決定하도록 誘導했다. 17日 午後 5時 全斗煥, 주영복 等은 全軍의 一致된 意見임을 내세워 大統領과 國務總理에게 時局收拾方案의 '非常戒嚴 全國擴大'·'國會 解散'·'非常機構 設置'을 받아들이도록 强要했다. 17日 午後 9時 中央廳에 執銃한 軍人들이 堵列하고 外部와의 連絡이 끊어진 狀況 속에서 國務會議가 열려 特別한 討議 없이 非常戒嚴 擴大安易 通過됐다. 이에 따라 5月 17日 24時 部로 非常 戒嚴令이 濟州島를 包含한 全國으로 擴大됐다. [14] 戒嚴 擴大와 同時에 新軍部는 戒嚴司令官 이희성 名義로 戒嚴布告 第10號를 發令하면서 政治活動 禁止·大學校 休校令·言論報道 事前檢閱 强化·集會 및 示威 禁止 等의 措置를 내렸다. 이는 憲法에 規定된 國會 通報 節次도 거치지 않고 戒嚴軍을 動員해 國會를 無力으로 封鎖한 채 벌인 不法措置였다. 5月 18日 새벽 2時 新軍部는 國會를 占領한 뒤 武力으로 封鎖했고, 憲政中斷 事態가 發生했다. 한便 非常戒嚴이 擴大되기 直前, 保安司에서 豫備檢束을 통해 金大中 · 金鍾泌 를 비롯한 主要 政治人 26名은 合同搜査本部로 不法 連行하면서 學生·政治人·在野人士 2,699名을 逮捕하고 신민당 總裁 金永三 亦是 家宅年金 處分내리는 政治 彈壓을 敢行했다. 非常戒嚴 全國擴大 措置로 인해 國會와 政府에 依해 進行된 改憲 論議가 中止됐다. 서울의 봄 은 虛無하게 幕을 내렸다. [15]

이 過程에서 全羅北道 全州 所在 전북대 學生會館 3層에서 油印物을 作成中이던 전북대 農學科 2學年 이세종 烈士가 전북대에 侵入하여 學生들을 連行하던 金馬 7空輸部隊員에게 頂수리를 개머리板으로 價格 當하였고 이로 인해 죽음에 이르러 最初의 犧牲者가 되었다. [16]

新軍部의 政權掌握 [ 編輯 ]

示威 過激鎭壓 및 臨時國會 登院 沮止 [ 編輯 ]

非常戒嚴 全國擴大 措置에 따라 全國 保安 目標에 戒嚴軍이 投入됐다. 92個 大學에 戒嚴軍 兵力 中 93%인 22,342名이 配置됐다. 反面 保安 目標는 109個 目標에 2,395名만 配置됐다. 이는 新軍部 勢力이 大學街의 示威를 잠재우려는 意圖에서 戒嚴軍을 配置했음을 보여준다. [17] 5月 18日 午前 전남대학교 學生 數百餘名이 學校 正門 앞에서 戒嚴令 擴大와 休校令에 反撥하는 示威를 했는데, 空輸部隊는 學生들을 毆打하며 殘酷하게 鎭壓했다. 光州 市內에 投入된 空輸部隊는 大檢·棍棒으로 過激鎭壓을 展開했고, 이는 光州 市民을 刺戟해 5·18 光州 民主化 運動 의 主要 原因이 됐다. 當時 新軍部의 核心人士였던 전두환은 中央情報部長과 保安司令官이라는 職位를 利用해 指揮系統에 不法 介入함으로써 强勁鎭壓하도록 影響力을 行使했다. 新軍部는 5月 20日 午前 戒嚴令 解除와 憲法 改正을 論議하려는 臨時國會를 霧散시키기 위해 首都警備司令部 所屬 第30警備團 兵力을 動員하여 國會를 封鎖하고 國會議員의 登院을 强制로 沮止했다. [11]

政權 簒奪 以後 公職者와 言論人 解職 强要 [ 編輯 ]

新軍部는 5·17 非常戒嚴 全國擴大 措置에 抗拒한 5·18 光州 民主化 運動 을 武力으로 鎭壓한 다음, 內閣을 操縱·統制하는 超憲法的 機構로 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 (國保委)를 設置해 實質的으로 政權을 掌握했다. 國保委 常任委員長에 전두환 保安司令官이, 常任委 分課委員長에 現職 軍人이 中心으로 選任됐다. 新軍部 勢力은 國保委를 基盤으로 統治權을 行使했으며, 軍部의 意圖에 따라 社會를 改造하는 作業을 施行했다. 전두환은 國保委 社會淨化分課委員會를 통해 公職者 肅正計劃을 立案하고 1980年 7月 31日까지 公職者 總 8061名에게 辭任을 强要했으며 [11] , 國保委 文敎公報分課委員會를 통해 1980年 10月 末까지 記事 檢閱反對나 製作 拒否運動을 主導해 保安司 의 '言論 정화자 名單'에 오른 記者 933名을 各 言論社의 自律淨化 形式으로 解職하도록 했다. [18] 國保委 社會淨化分課委員會는 社會惡一掃特別措置 및 戒嚴布告令 第19號에 따라 三淸敎育隊 를 設置하고, 社會淨化計劃에 따라 合同搜査本部에 搜査指示를 내려 10·27 法難 을 일으켰다. [19]

1980年 6月 末부터 國保委 法司分課委員膾가 改憲案을 硏究하고, 전두환·노태우 等 新軍部 主要 人士들이 모인 자리에서 大統領 單任制와 選擧人團에 依한 選出 等을 骨子로 한 改憲案이 確定됐다. 8月 14日로 豫定된 김대중 等에 對한 內亂陰謀事件의 裁判을 앞두고 保安司는 양병호, 민문기, 임항준, 김윤행, 서윤홍 大法院 判事를 一括 辭職하도록 强要했다. 8月 16日 國政 遂行에 限界를 느낀 최규하 大統領이 辭任하고 [20] 8月 27日 통일주체국민회의 選擧에 依해 全斗煥이 第11代 大統領으로 當選됐다.

戒嚴令下에 憲法 恐怖 및 國會 解散 [ 編輯 ]

10月 27日 戒嚴令下에 치뤄진 國民 投票를 통해 第5共和國 憲法 이 公布됐다. [21] 第5共和國 憲法 附則에 따라 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 는 立法權을 가진 臨時 立法 機構 國家保衛立法會議 로 改編됐다. 國家保衛立法會議는 國會 의 役割을 代行해 言論基本法, 勞動關係法, 政治風土刷新을위한특별조치법 等 189個의 法案을 통과시켰다. [11]

新軍部는 第5共和國의 出帆을 앞두고 執權 基盤을 다지기 위해 政治的 整地作業에 나섰다. 80年 11月 전두환과 노태우(保安司令官)는 保安司와 中央情報部에 指示해 K-工作計劃 의 結果를 바탕으로 言論機關 統廢合 方案을 마련한 다음, 情報機關을 動員해 各 言論社를 脅迫함으로써 言論 强制 統廢合 을 施行했다. [11] 전두환은 保安司와 中央情報部에 指示해 政治人別 身上카드를 가지고 政治 活動 規制 對象을 選定하게 하고 이를 決裁해 社會淨化委員會에 그 名單을 傳達, 80年 11月 12日 811名에 對한 政治活動 規制措置를 發表하게 했으며, 政治活動 規制措置로 新軍部의 執權에 妨害가 되는 舊 政治人들의 政治的 挑戰을 막기 위해 3金氏를 비롯한 500餘名의 有力政治人들을 政治舞臺에서 退出시켰다. 以後 新軍部는 新軍部의 政治參與를 위한 與黨格인 民主正義黨 의 創黨뿐만 아니라 民主한국당 等 多數의 親與 性向 野黨 創黨에도 直間接的으로 介入을 했다. [22] 1981年 1月 23日 新軍部가 造作한 김대중 內亂陰謀 事件 에 連累된 김대중에 對한 死刑 判決이 確定됐다. [23] 1981年 3月 3日 全斗煥이 第12代 大統領이 되면서 公式的으로 第5共和國 이 出帆했다. [24]

評價 [ 編輯 ]

최규하政府의 國務總理 를 歷任했던 신현확 은 1980年 5月 當時 新軍部 勢力으로부터 時局收拾方案 決裁 要求를 받고 나서, 전두환 保安司令官이 非常戒嚴 全國擴大, 國會解散, 國家保衛 非常機構 設置를 통해 行政府·國會 等 主要 憲法機關을 事實上 掌握해 國政을 名實共히 主導하고 나아가 政權까지도 簒奪하려는 馬脚을 드러낸 것이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신현확은 非常戒嚴 措置로 인해 實質的으로 內閣이 國政運營過程에서 排除됐으며, 이에 따라 無力感을 느끼게 되어 5月 20日 辭退했다고 말했다. [25] 80年 5月 當時 신현확은 "國保委 設置와 國會 解散에는 內閣이 거의 全員 反對하는 立場이며 非常戒嚴擴大措置안은 大統領이 最終 決裁할 事案이므로 時間을 두고 決定할 일"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에 不拘하고, 新軍部 勢力은 臨時 國務會議場에 30警備團과 憲兵隊 兵力을 不法動員, 强壓的인 雰圍氣를 造成한 뒤 5.17 非常戒嚴擴大案을 强行 通過시켰다. [26]

1980年 5月 17日 최규하 前 大統領은 '時局收拾方案' 첫 裁可 要求에 反對 意思를 밝혔다. 최규하는 當時 이희성 戒嚴司令官 等에게 "憲政秩序가 뒤바뀌는 것은 5.16 政變 한番으로 足하다. 모든 일은 法 테두리 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해 新軍父側의 `時局收拾方案'에 反對하는 立場을 明白히 했다. [26]

新民黨 總裁 金永三 은 5月 20日 상도동 自宅에서 新軍部를 糾彈하는 記者會見을 열었다. 그는 "오늘 戒嚴統治를 擴大 强化한 5 ·17 事態를, 民主回復이라는 國民的 目標를 背信한 暴擧로 規定한다. 戒嚴當局의 强壓統治로 빚어진 流血事態는 이 나라를 破局으로 몰아가고있다."면서 '國民的 目標를 背信한 5·17 暴擧'라는 記者會見文을 發表했다. [27]

美國 國務部는 5月 18日과 이튿날인 5月 19日에도 워싱턴에서 "우리는 非常戒嚴이 大韓民國 全域에 擴大 實施되고, 大學이 閉鎖되고, 많은 政治 指導者와 學生 指導者들이 逮捕된 것에 對해 甚히 遺憾스럽게 생각한다. 政治 自由化를 向한 發展에는 法의 遵守가 隨伴되어야 한다. 우리는 韓國의 指導者들에게 우리가 매우 憂慮하고 있는 바를 分明히 밝혔고, 崔大統領이 일찍이 밝힌 바와 같이 憲法 改正과 廣範圍한 支持基盤을 갖춘 文民政府 選擧가 卽時 繼續되어야 한다는 우리의 信念을 强調했다."는 內容의 聲明을 發表해 新軍部의 措置에 憂慮하는 立場을 밝혔다. [28]

美國의 反應 [ 編輯 ]

1979年 10·26 事件 直後 美國 은 維新憲法 改正을 통한 民間 政府 樹立을 希望하면서 大韓民國의 政治日程에 깊숙이 關與했다. [29] 12·12 軍事 叛亂 으로 新軍部가 實勢로 軍部를 掌握하고 나서 美國 政府와 新軍部 間의 葛藤이 高調됐지만, 結局 美國 政府는 全斗煥이 韓國軍의 實權을 掌握한다고 해서 반드시 韓國의 民主化가 不可能하지는 않을 것이라 判斷, 事實上 軍事 叛亂을 默認했다. [30] 12·12 軍事 叛亂 以後, 美國은 新軍部가 國防에만 注力하도록 하고 大韓民國에 民間政府를 樹立하는 것을 目標로 設定했다. 美國은 全斗煥의 中央情報部長 兼任·經濟 事情 惡化·言論 檢閱 强化 等으로 民主化 日程이 遲延되는 것을 憂慮했다. [28]

1980年 5月 8日 學生 示威가 加熱되는 가운데 駐韓 美國大使 글라이스틴은 全斗煥(保安司令官), 최광수(大統領 祕書室長)와 面談을 가졌다. 그는 軍 投入을 통한 暴力 事態와 逮捕 狀況을 憂慮하는 立場을 보이면서도, "韓國 政府의 法秩序 維持 必要性을 理解하며, 美國은 軍隊를 投入하는 '非常計劃'의 樹立을 막지 않겠다"고 밝혔다. 글라이스틴은 面談 以後 韓國 政府가 軍投入의 危險性을 알고 있으며 軍投入에 愼重한 立場이라고 美國 國務部에 報告했다. 이는 結果的으로 新軍部 主導 勢力에 對해 安易하게 判斷, 政局 흐름을 誤判한 것이었다. [31] 當時 美國의 立場은 서울에서 發生한 學生 示威를 確固하게 鎭壓하는 것은 必要할지 모르지만 戒嚴令 擴大나 政治人 逮捕와 같은 政治 彈壓을 隨伴하는 데 反對한다는 것이었다. [32]

5月 17日 新軍部가 戒嚴擴大와 政治人 逮捕 準備를 完了한 뒤, 美國은 非常戒嚴 2時間 前에 新軍部로부터 非常戒嚴 全國擴大 措置를 갑작스럽게 通報받았다. 월리엄 글라이스틴 駐韓 美國大使는 워싱턴의 指示에 따라 5月 18日 최규하 前 大統領을 訪問해 前날의 彈壓과 非常戒嚴 擴大는 '衝擊的이고 驚愕할 일'이라는 美國 側의 强力한 抗議를 傳達했다. [33] 美國이 新軍部가 5·17 非常戒嚴 全國擴大 措置를 내리도록 操縱했다는 主張도 있지만 美國은 新軍部의 5·17 非常戒嚴 全國擴大 措置를 事前에 알지 못했고, 美國이 이와 關聯됐다는 主張은 全혀 根據가 없다. [28] 5·17 非常戒嚴 全國擴大 措置에 抗拒한 5·18 光州 民主化 運動이 勃發하자, 美國은 新軍部에 平和的 解決을 促求하는 立場을 거듭 밝혔지만 新軍部의 武力 鎭壓을 强力하게 制止하지는 않았다. [32]

5月 30日 全斗煥이 國保委 常任委員長에 就任하고 新軍部로 權力이 完全히 넘어가게 되자, 美國은 對話를 꺼리던 以前과 달리 實權者가 된 전두환과 接觸하기 始作했다. 美國 政府 內에서 新軍部를 排除하고 北韓과 對話를 해서라도 新軍部를 强勁하게 다뤄야 한다는 카터 · 머스키 等 强勁派와 전두환을 現實로 認定하자는 홀브룩·글라이스틴 等 愼重派의 對立이 있었지만, 結局 美國은 전두환을 現實로 認定하는 代身 妥協을 통해 最大限 韓國의 政治發展을 이끌어낸다는 쪽으로 方向을 設定했다. [34] 戒嚴令 아래서 保安司에 依해 統制되던 韓國言論은 韓國의 事態 展開에 對한 美國官吏들의 말을 番番이 無視하고 歪曲하기도 했다. 美國官吏가 韓美 安保關係를 支持하는 말을 하면 그 말은 반드시 大書特筆됐으나, 民主化와 人權尊重을 促求하는 말은 대수롭지 않게 取扱되거나 아예 報道되지도 않았다. [28] 當時 지미 카터 美 行政府는 이란 人質 事件 과 大統領 選擧를 맞아 어려움을 겪고 있어 韓國 狀況에 神經 쓸 餘裕를 갖지 못 했고, 전두환은 徹底하게 親美的인 態度를 보이면서 美國의 이러한 狀況을 活用함으로써 執權을 굳혔다. [34]

韓國은 레이건 大統領 就任 以後 美國과 頂上會談 交涉을 위한 交涉을 始作했다. 美國 側은 '레이건 大統領이 就任하자마자 어떻게 光州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손에서 피가 흐르는 사람을 만날 수 있겠느냐'며 頂上會談을 拒否했지만, 韓國 側에서 死刑을 宣告받은 金大中 前 大統領의 救命 問題를 言及하여 成事될 수 있었다. [35] 81年 2月 2日 訪美한 전두환은 政治的으로 自身을 支持해 달라고 美國에 要請을 했지만 거절당했다. [36] 全斗煥의 美國 訪問은 80年 5月 光州民主化運動에 對한 軍當局의 流血鎭壓을 契機로 不安定했던 全斗煥 政權에 對한 美國의 公式支持로 解釋돼 批判을 받기도 했다. [37]

關聯 判決 [ 編輯 ]

1993年 文民政府가 出帆한 뒤, 쿠데타로 執權한 新軍部 勢力에 對한 處罰 要求가 잇달았다. 김영삼 大統領은 5·13 談話에서 '文民政府는 民主 政府로써 光州民主化運動의 延長線上에 있다'는 表現을 使用하여 光州 5?18 民主化運動 을 再評價했다. 하지만 전두환·노태우 두 前職 大統領들을 法的으로 處罰하기보다 歷史의 評價에 맡기자는 立場을 보였다. [38] [39] 1994年 5月 13日 5·18 事件의 被害者 3百 22名은 전두환·노태우 等 5.18 關聯 責任者 35名을 內亂 및 內亂 目的 殺人 嫌疑로 서울地檢에 告訴했다. 1995年 7月 18日 서울地檢은 5·18 事件이 全斗煥의 政權 掌握 意圖에 따라 최규하 大統領의 事前 指示없이 企劃·立案해 推進됐다는 搜査結果를 發表했음에도 不拘하고, 被疑者들에 對해 '公訴權 없음' 決定을 내렸다. [40] 檢察의 發表는 各界 各層의 거센 批判을 받았다. 김영삼 大統領은 輿論에 따라 5·18 特別法 制定을 受容했다. 1995年 11月 27日 檢察은 5·18 事件 再搜査를 決定했으며, 12月 3日 전두환을 安養矯導所에 收監했다. [41] 12月 15日 憲法裁判所 는 '成功한 쿠데타도 處罰 可能하다'는 趣旨의 認容決定을 내렸다. [42] 12月 21日 國會 5·18 特別法 을 制定했다. 1996年 1月 23日 公訴時效 滿了 하루 前 檢察은 5·18 事件 關聯者들을 電擊的으로 拘束 起訴했다. [43] 1997年 4月 大法院은 5.18 事件에서 두 前 大統領 및 다른 被疑者들에 對해 “內亂首魁·內亂謀議參與·內亂重要任務從事·內亂目的殺人·叛亂首魁·叛亂謀議參與·叛亂重要任務從事”等의 有罪를 認定했다.

大法院 은 成功한 쿠데타의 家閥性에 對해 “被告人들의 政權掌握을 통해 새로운 法秩序를 樹立한 것으로 볼 수 없고, 우리의 憲法秩序下에서는 憲法에 依한 民主的 節次를 거치지 않고 暴力에 依해 憲法機關의 權能行使를 不可能하게 하거나 政權을 掌握한 行爲는 어떤 境遇에도 容認될 수 없다.”라고 摘示했다. 大法院은 5.17 非常戒嚴 全國擴大 措置와 以後의 政權 掌握 過程을 內亂罪 叛亂罪 로 認定하면서 아래와 같이 整理했다. [44]

12·12軍事叛亂을 통하여 軍의 指揮權을 實質的으로 掌握함과 아울러 國家의 情報機關을 完全히 掌握한 뒤, 1980. 5. 初旬頃부터 이른바 '時局收拾方案', '國紀紊亂子 搜査計劃', '權力型 不正蓄財者 搜査計劃'을 마련하여 이를 檢討, 推進하기로 謀議하고, 그 計劃에 따라 1981. 1. 24. 非常戒嚴의 解除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豫備檢束, 非常戒嚴의 全國擴大, 國會議事堂 占據·閉鎖, 光州示威鎭壓, 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의 設置·運營, 政治活動 規制 等 一連의 行爲를 强壓에 依하여 行한 事實을 認定한 다음, 被告人들이 行한 위와 같은 一連의 行爲는 結局 强壓에 依하여 憲法機關인 大統領, 國務會議, 國會議員 等의 權限을 侵害하거나 排除함으로써 그 權能行使를 事實上 不可能하게 한 것이므로 國憲紊亂에 該當된다. [44]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冊갈피 속의 오늘> 1975年 緊急措置 9號 宣布 東亞日報 2008年 5月 13日子 記事
  2. “1996年 1月 4日 권정달 檢察 陳述 調書” . 2007年 5月 2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12月 24日에 確認함 .  
  3. <全.盧氏等 8名 公訴事實 要旨>-1 聯合뉴스 1996年 1月 23日子 記事
  4. 兩黨 國會 對策 改憲解除論議 等 活性化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東亞日報 1980年 5月 13日子 1面 記事
  5.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京鄕新聞” .  
  6. 申總理 談話, 政治日程 可能한 앞당겨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東亞日報 1980年 5月 16日子 1面 記事
  7. 전두환 勢力, 直選制 改憲 막으려 非常戒嚴 擴大 한겨레 2010年 5月 16日子 記事
  8. 美,10.26부터 全氏就任까지 白書形式 聲明 公開
  9. 光州가 우리에게 묻는 것 - 남은 者의 課題 京鄕新聞 2010年 5月 12日子 記事
  10. 日本 커넥션 - 쿠데타 政權과 親韓派
  11. 12.12 5.18 事件 1審, 抗訴審, 上告審 判決文
  12. 國防部過去事眞相糾明委員會 12.12 5.17 5.18 事件 調査結果報告書, 軍部隊의 事前移動 44~46쪽
  13. 5月 中旬부터 與野 主要 政治人들은 戒嚴令 解除와 憲法 改正 論議할 日程을 앞당겼고, 5月 20日 臨時國會에서 戒嚴令 解除가 이루어질 可能性이 높았다. 戒嚴令이 解除되면 軍部의 權限이 적어지게 되고, 新軍部의 權力이 弱化된다. 따라서 新軍部는 20日 以後 戒嚴令을 擴大하려던 當初 計劃과 달리 臨時國會가 열리는 5月 20日 以前인 5月 17日에 非常戒嚴 擴大措置를 내려 國會를 封鎖하고, 現職 國會議員을 비롯한 政治人들을 不法的으로 逮捕한 것이다.
  14. 地域戒嚴 下에서 大統領-國防部長官-戒嚴司令官으로 되어 있던 統帥系統이 大統領-戒嚴司令官으로 바뀌게 돼, 軍部의 權限이 더 强해진다.
  15. “12.12, 5.18및 祕資金事件 論告文” . 2012年 7月 1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2年 7月 12日에 確認함 .  
  16. “4月5日 UC Berkley 講演 - 5.18 最初의 犧牲者 이세종 烈士” . 2016年 4月 2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6年 4月 21日에 確認함 .  
  17. 國防部過去事眞相糾明委員會 12.12 5.17 5.18 事件 調査結果報告書, 55쪽
  18. 'K-工作'의 實狀 MBC 2007年 10月 25日
  19. 新軍部 '10.27法難' 새로 밝혀진 事實들 聯合뉴스 2007年 10月 25日子 記事
  20. 新軍部가 8月 初 최규하에게 김정렬 을 보내 辭任을 强要하기도 했다.
  21. “國會 解散 制度” . 京鄕新聞. 2013年 11月 29日.  
  22. 新軍部 政權掌握 …野政治活動 規制 '民主主義 外面' 대전일보 2007年 5月 28日子 記事
  23. 內亂陰謀 再審 DJ에 無罪宣告 한겨레 2004年 1月 29日子 記事
  24. 改憲의 歷史 ③ 第 5, 6 共和國(8~9次 改憲)
  25. “1995年 12月 16日 신현확 檢察 陳述 調書” . 2007年 5月 2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9月 13日에 確認함 .  
  26. 新軍部,時局收拾안 大統領 反對不拘 强行 聯合뉴스 1996年 1月 23日子 記事
  27. 新軍部 峭法의 칼 휘두르다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東亞日報 1993年 4月 11日子 記事
  28. “United States Government Statement on the Events in Kwangju, Republic of Korea, in May 1980 (1980年 5月 光州에서 일어났던 事件에 對한 美國 政府의 立場)” . 2013年 3月 3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3月 31日에 確認함 .  
  29. 美, 10.26 直後 政治日程 깊숙이 關與 聯合뉴스 2010年 10月 26日子 記事
  30. "美 12.12直後 新軍部에 不滿.. 보름뒤 默認"(綜合) 聯合뉴스 2009年 12月 12日
  31. 80年 初 美國務部.軍將星, 新軍部 政策 異見 聯合뉴스 2010年 5月 18日子 記事
  32. 光州民主化運動 勃發과 美國의 誤判 新東亞 2004年 4月 28日
  33. "美 5.18 非常戒嚴 2時間 前에 通報 받았다" 聯合뉴스 2010年 5月 12日子 記事
  34. 全斗煥의 執權과 美國의 '거리' 두기 新東亞 2004年 9月 22日
  35. “金大中 살려주면 全斗煥 美 國賓訪問 許容 ‘韓·美 頂上會談’ 去來 있었다” 서울新聞 2013年 3月 5日
  36. 지난 1981年, 美 全斗煥 '支持要請' 拒絶 MBC 2010年 2月 11日
  37. <레이건 死亡> 韓半島政策(綜合) 聯合뉴스 2004年 6月 6日子 記事
  38. “김영삼 大統領, 光州 民主化抗爭 關聯 特別談話文 發表” . 《 MBC 뉴스데스크》. 1993年 5月 13日. 2014年 2月 1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9年 12月 8日에 確認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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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5.18事件 關聯者 全員 `公訴權 없음' 決定(綜合) 聯合뉴스 1995年 7月 18日子 記事
  41. 自進出頭 - 전두환 令狀發付 强制求人 헤럴드經濟 2009年 4月 30日子 記事
  42. 憲裁, 5.18 憲法訴願 事件 30日 最終決定 聯合뉴스 1995年 11月 27日子 記事
  43. 全.盧氏等 5.18關聯者 8名起訴, 搜査結果 發表 聯合뉴스 1996年 1月 23日子 記事
  44. 12·12 5·18 事件 大法院 判決文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