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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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최규하(1979년)
최규하(1979年)
大韓民國 第10代 大統領
任期 1979年 12月 6日~1980年 8月 16日
國務總理 신현확 (1979年~1980年)
前任: 朴正熙 (第5·6·7·8·9代)
後任: 全斗煥 (第11·12代)

任期 1976年 3月 13日~1979年 12月 5日
大統領 朴正熙
前任: 金鍾泌 (第11代)
後任: 신현확 (第13代)

身上情報
出生日 1919年 7月 16日 ( 1919-07-16 )
出生地 日帝 强占期 朝鮮 江原道 原州郡 圓柱面 봉산리
死亡日 2006年 10月 22日 ( 2006-10-22 ) (87歲)
死亡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鍾路區 연건동 서울대학교病院
埋葬地 大韓民國 大田廣域市 儒城區 갑동 國立大前賢充員
國籍 大韓民國
本館 江陵 (江陵)
學歷 도쿄高等師範學校 英語英文學科
正當 無所屬
父母 최양오 (簿), 이응선 (某)
配偶者 弘基
子女 2男 1女
宗敎 無宗敎
別名 號 현석(玄石), 者 壻屋(瑞玉)
署名

최규하 (崔圭夏,  1919年 7月 16日 ~ 2006年 10月 22日 )는 大韓民國 의 第10代 大統領 이다. 第4共和國 의 2番째 大統領이며, 大韓民國 最初의 國務總理 出身 大統領이었다. 本貫은 江陵 (江陵)이며, 號는 현석(玄石)이다.

1945年부터 경성사범大學 英文科 敎授로 在職하다가 美 軍政 中央食糧行政處 企劃課長으로 拔擢됐다. 大韓民國 政府樹立 後 農林部 에서 勤務하다가 外務部 로 拔擢되면서 外交官의 길을 걸었다. 말레이시아 大使로 任命된 後 말레이시아에서 居住하기도 했으며 歸國 以後 1967年에 外務部 長官에 拔擢됐다. 1967年 第22次 UN 總會 首席代表로 參加하고 돌아왔다. 外務部 長官 在任 時節에 '조용한 外交'를 標榜하면서 外務 行政 組織의 强化를 꾀했고 通商 外交를 强化했다. 1970年 韓國外國語大學校 名譽文學博士學位를 받았다. 1971年 大統領 外交擔當 特別補佐官에 就任해 1972年 南北調節委員會 委員이 되어 平壤 에 다녀왔다. 大統領特使로 7回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이란·에티오피아 等 24個國을 親善 訪問했다.

1975年 12月 19日 國務總理 署理로 任命되었고, 1976年 3月 13日 國會의 同意를 거쳐 國務總理가 됐으며, 1979年 3月 國務總理로 再信任됐다. 10.26 事件 으로 大統領 朴正熙 가 死亡하자 大統領 權限代行을 거쳐 第10代 大統領에 就任했다. 1979年 10月 27日부터 1979年 12月 6日까지 大統領 權限代行으로, 1979年 12月 6日부터 1980年 8月 16日까지 軍部 실圈下의 大統領으로 再任하였다.

大統領 在職 時期,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在職 初盤부터 하나회가 叛亂을 일으켜 軍部의 實權을 掌握하기도 했으며 이듬해에는 民主化 示威가 터지기도 했다. 서울醫봄 以後에도 繼續 統治하다가 1980年 8月 16日 大統領 職에서 退任했고 退任 後 박충훈 國務總理 署理가 暫時 大統領 權限代行을 지냈다. 歷代 大韓民國 大統領 가운데 英語 를 가장 能通하게 驅使한 人物은 李承晩 다음으로 최규하가 꼽힌다. [1]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1919年 7月 16日 江原道 原州郡 圓柱面 봉산리(現, 江原道 原州市 봉산동 ) 836-2에서 최양오(崔養吾)와 全州 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양오는 學校 訓導를 歷任했고, 暫時 原州郡 原州面長을 歷任하기도 했다. 할아버지 최재민(崔在民)은 1897年 成均館 博士 를 歷任했다. 博士는 朝鮮의 官職 名稱이었으며 그의 집은 할아버지가 成均館博士를 歷任한 理由로 崔博士宅이라 불렸다.

그는 어릴 적부터 漢學者였던 할아버지로부터 漢學을 배워 〈童蒙先習〉·〈孝經〉 等을 始作하여 〈小學〉·〈論語〉·〈孟子〉·〈大學〉·〈中庸〉·〈痛感〉 等을 읽었다.

1928年 3月 10歲 때 原州普通學校에 3學年으로 越班 入學했다. 1932年 2月 原州普通學校를 卒業할 때까지 할아버지에게 門과 禮節을 배우는 家庭學習은 繼續되었다. 1932年 3月 30日 京城第一公立高等普通學校 (只今의 景氣中學校 , 경기고등학교 의 前身)에 入學했다. 경성고보 4學年 在學 中인 1935年 11月 父母의 뜻에 따라 홍병순(洪炳純)의 세째 딸 弘基 (洪基)와 結婚을 했다.

高等學校 在學 時節 [ 編輯 ]

그는 原州 를 떠나 서울에서 學校를 다녔다. 鍾路區 團成社 뒤 봉익동의 親戚집에서 學校를 다녔다 한다. [2] 社交性이 좋은 민관식 은 최규하가 사는 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2]

1937年 2月 京城第一公立高等普通學校 를 33期로 卒業했다. 그의 京城第1高普 卒業 同期生은 이영섭 大法院長 等이 있다. [3] 落第를 하여 1年 留級되어 復學生이 된 민관식 은 최규하와 함께 卒業狀을 받았지만 그의 高校 1年 先輩였다. [3] 後日 최규하가 大統領 權限代行으로 있을 때 그의 同窓인 이영섭은 大法院長이었고, 卒業 動機인 민관식 國會議長 職務代行 資格으로 다시 만나게 된다.

語學 實力에 뛰어났던 그는 英語 를 自由自在로 驅使하였다. 英語 를 第1言語처럼 使用했던 李承晩 다음으로 英語에 能通했던 大統領으로 꼽히기도 한다. [4]

敎育 活動과 公職 進出 [ 編輯 ]

그 뒤 日本 으로 留學, 도쿄高等師範學校(現, 쓰쿠바 大學 (筑波大?)의 前身)로 進學해 英語 英文學을 專攻했으며, 1941年 2月 日本 도쿄高等師範學校 英語英文學科를 卒業하고, 그해 3月 滿洲 로 건너가 滿洲 國立大桐學院(國立大同學院) 政治行政班에 入學, 1943年 7月 5日 滿洲 國立大桐學院 政治行政班을 修了하였다. [5] 滿洲國의 官僚로 在職했지만 그는 이때의 記錄을 남기지 않았다. [6] 언제, 어떤 經路로 歸國했는지도 記錄이 없다. [6]

1945年 8月 以後 歸國, 경성사범大學 英文學科 助敎授 에 就任하여 敎壇에 섰다. 경성사범 助敎授로 在職 中 1946年 4月 美 軍政廳 中央食糧行政處 企劃課長으로 拔擢되면서 公職에 投身, 農林行政에 從事하게 됐다. 1947年 中央食糧行政處 行政室長이 되었다가 1948年 8月 15日 大韓民國 政府 樹立 以後에는 農林部 로 補職되어 量鄭課長이 되었으며, 1951年 農林部 農地管理國葬 署理 等을 지냈다. 1948年 大韓民國 政府樹立 後 農林部 量鄭課長이 됐으며, 그해 9月 26日 부터 10月 10日 싱가포르 에서 열린 國際聯合 食糧農業機構(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FAO) 아시아 地域 米穀委員會 會議에 農林部 次官 정흥구와 함께 韓國代表로 參加했다. [7] 이 會議에서 그는 外國語 驅使能力과 國際會議 代表로서의 活動力을 認定받아 人材의 適材適所 보임을 主張하던 當時 外務部長官 변영태 에 依해 拔擢됐다. [8] 以後에는 農林部 歸屬農地管理局長, 外務部 通商局長으로 자리를 옮겨 外交官이 되었다. 1951年 9月 9日 부터 9月 18日 에는 싱가포르 에서 열리는 遠東 經濟委員會에 大韓民國 代表團員의 한사람으로 參席하였다.

이때 그는 鉏乙特別市 麻浦區 서교동에 집을 마련했는데 짧은 靑瓦臺生活 外에 繼續 이곳에서 居住하였다. 江原道 原州市 봉산동 에 있던 그의 生家는 그가 1994年 原州市 에 寄贈하였고, 原州市立博物館 敷地가 되었다.

公職 生活 [ 編輯 ]

日本 大使館 生活 [ 編輯 ]

外交官 在職 中의 최규하

外務部 通商局長으로 在職 中 1951年부터 1952年까지 ECAFE 貿易振興會의 韓國側 首席代表로 參席하고 돌아왔다. 1952年 7月 17日 도쿄 의 週日 大韓民國 代表部 總領事 로 赴任하였다. 1953年 10月 6日 ~ 10月 10日 日本 外務省 에서 韓國-日本 兩側 代表團 各 18名이 參與한 韓日會談에 陪席, 參與하였다. 1954年 10月 6日 ~ 10月 13日 日本 도쿄에서 열린 極東經濟委員會에 韓國 代表者의 한사람으로 現地에서 參席했다. 1955年 7月 8日 이사관 에 任命되고 外資靑 職員을 兼職하였다. 1957年 5月 16日 週日韓國代表部 參事官(參事官) 等을 지냈으며, 그해 12月에는 在日僑胞體育會 會長에 選任되었다.

1958年 4月부터 10月까지 그는 第4次 韓日會談의 韓國側 代表의 한 사람으로 參與하였으나 賠償額數에 對한 韓日 兩國間 立場差異로 成果를 얻지 못하였다. 1959年 3月 20日 週日代表部 公社로 昇進, 아시아 極東經濟委員會(Economic Commission for Asia and the Far East/ECAFE) 第11·12·13次 總會와 第4次 韓日會談에 韓國代表로 參加하였다. 그 해 歸國하여 1959年 9月 12日 外務部 次官이 됐다. 1960年부터는 外務部長官 職務代行을 겸하다가 4·19革命 後인 1960年 5月 12日 外務部 次官職을 辭任했다. [8]

軍事 政府에 參與 [ 編輯 ]

1960年 6月 3·15 不正 選擧 에 關聯되었나 與否에 對해 警察의 搜査對象에 올랐으나 嫌疑 없음으로 밝혀져 處罰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自由黨 內閣의 閣僚라고 하여 1961年 1月 公民權 制限 對象者의 한 사람에 選定되고 그해 2月 再搜査를 받았지만 嫌疑없음으로 處理되었다.

1962年 1月 民主공화당 의 事前 創黨組織 硏究팀과 事前 組織인 동양화학 株式會社의 創立에 參與하였다. [9] 5.16이 일어난 지 3個月 만인 1961年 8月에 金鍾泌 은 民政引受 構想의 하나로 공화당을 事前組織하기 始作했던 것이다. [9] 이러한 共和黨 事前組織은 朴正熙 의 裁可를 얻은 金鍾泌 의 새 政黨 創黨構想 硏究팀으로, 責任者는 豫備役 陸軍 中將 최영두이고, 尹天界(古代), 김성희(서울大), 강상운(중앙대) 敎授와 이종극, 김운태, 윤태림, 정범모, 박종화 , 유호선, 김정렴 , 김학열, 최규하, 이필석, 홍승면 等으로 構成되었다. [9] 이들은 1962年 1月 이 硏究室의 이름을 '동양화학 株式會社'로 僞裝하고 鍾路 2街 뒷골목 第一典當舖 2~3層에 事務室을 차렸다. [9]

1962年 서울 아시아反共聯盟 總會에 參席하여 臨時議長으로 社會를 보았으며, 民族反共聯盟 臨時總會議長에 選出되었다. 反共聯盟 總會에 다녀온 뒤 外務部 長官 拷問으로 復歸하고 1962年 7月 새로 開催되는 韓日會談의 拷問이 되었다. 1963年 外務部 本部 臺詞를 거쳐 그해 3月 國家再建最高會議 議長 外交擔當 拷問이 됐으며, 4月 韓日會談에서 韓國側 交涉代表의 한 사람으로 選出됐다. 1963年 5月 8日 다시 國家再建最高會議 議長 政策小委 拷問, 1964年 週 말레이시아 韓國 大使(1964年 11月~1967年 6月)를 지내고 歸國하여 1967年 6月 外務部 長官에 拔擢됐다.

外務部 長官 時節 [ 編輯 ]

그는 直接 外國을 다니며 外國을 相對로 北韓側과 外交 論戰을 벌였다. 當時에는 北韓과의 外交前이 한창이라 外務長官들은 스스로 海外에 나가 유엔에서의 支持를 얻어내기 위해 談判을 짓는 일이 흔했다. 이때 최규하 外務長官은 뛰어난 英語 實力을 바탕으로 北韓과의 外交 戰爭에서 猛活躍을 하였다. [4]

67年 第22次 유엔總會 韓國 側 首席代表로 參加하고 돌아왔다. 外務部長官으로 在任時 '조용한 外交'를 標榜하면서 外務行政組織의 强化를 꾀했고 通商外交를 强化했다. 1968 第19次 콜롬보計畫諮問委員會 閣僚會議에 韓國政府 代表者의 한 사람으로 參席했으며, 이때 諮問委員會 閣僚會議 議長에 選出되었다. 1969年 6月 2日 美國의 牌카드 國防次官을 만난 뒤 6月 3日과 6月 4日에는 年例 韓美 國防閣僚會議에 參席하였다. [10] 1970年 韓國外國語大學校 名譽文學博士學位를 받았다.

1970年 4月 3日 부터 4月 10日 타이완 , 泰國 等을 巡訪하고 歸國했다.

1970年 5月 자카르타 에서 열린 아시아太平洋國際會議에 參席하고 歸國했다. [11] 1970年 11月 유엔 總會에 參席하고 [12] , 歸國하였다.

國務總理 署理와 總理 在職 [ 編輯 ]

1971年 大統領 外交擔當 特別補佐官에 就任해 1972年 南北調節委員會 委員이 되어 平壤 에 다녀왔다. 大統領特使로 7回에 걸쳐 사우디아라비아·이란·에티오피아 等 24個國을 親善訪問했다. [8]

1975年 國務總理 서리 를 거쳐 1976年 3月 國務總理 에 起用되었다. 朴正熙 는 그의 '寡默하면서도 政治的 手腕이 不足한 點을 높이 評價해 그를 國務總理로 拔擢했다'고 한다. [13] 1977年 7月 25日 및 26日에는 大韓民國 과 美國 間의 第10次 安保 年例協議會議가 서울 에서 開催되었다. [14] 최규하는 서종철 國防部長官, 해럴드 브라운 美國 國防部長官, 노재현 大韓民國 合參議長, 조지 에스 브라운 美 合參議長, 그리고 兩國 政府의 高位外交 및 國防官吏들과 이 會議에 參席하였다. [14]

1977年 7月 26日에는 해럴드 브라운 美國 國防長官이 찾아와 面談하였다. [15] 이어 第10次 韓美安保年例會議에 國防部 長官 서종철 , 合同參謀本部 議長 노재현 을 데리고 會議에 參席했다. 1979年 3月 國務總理로 再選出됐다. 同窓會에 招待돼도 拒絶했다 한다. 國務總理 在職 中 勤儉節約하고 깨끗한 公職生活을 한 것으로 評價받았다.

1979年 6月 30日과 7月 1日 韓國 大統領 朴正熙와 美國 大統領 지미 카터 間에 韓美頂上會談이 서울 靑瓦臺에서 開催되었다. 최규하는 當時 韓國側 閣僚의 한 사람으로 陪席하였다. [16] 이 會談에 韓國側으로부터는 최규하 國務總理, 박동진 外務部長官, 노재현 國防部長官, 김계원 大統領祕書室長, 김용식 臺詞가, 그리고 美國 側에서는 사이러스 밴스 國務長官, 해럴드 브라운 國防長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 國家安保擔當 補佐官, 리처드 홀부르크 國務次官補 및 윌리엄 글라이스틴 臺詞가 陪席하였다. [16]

1979年 10.26 事件 으로 朴正熙 大統領이 中央情報部長 김재규 의 被襲을 받고 殺害되면서, 當時 國務總理 를 맡고 있던 최규하는 非常國務會議를 召集하고, 大統領 職務代行으로서 權力을 移讓받았다. 非常國務會議에서 濟州島를 除外한 全國에 非常戒嚴令 을 宣布하기로 決定했다.

10.26과 12.12 事態 [ 編輯 ]

10.26 事態 前後 [ 編輯 ]

1979年 10月 26日 大韓民國 第9代 大統領 朴正熙 서울 궁정동 安家에서 김재규 에 依해 殺害되었다. 그날 11時의 非常國務會議를 召集하고 大統領 有故를 發表한다. 朴正熙가 殺害當한 다음 날인 1979年 10月 27日 濟州道 를 除外한 全國에 非常戒嚴令이 宣布되었다. 이 날 國務總理 최규하가 大統領 權限代行이 되었다. [17]

朴正熙 의 뒤를 이어 大統領 權限代行을 맡은 최규하는 戒嚴令 을 宣布하였다. 그리고 維新 憲法을 따라 大統領 을 뽑은 뒤 改憲하겠다는 政治 日程을 發表하였다.

10月 27日 새벽 大統領 權限代行이 된 그는 朴正熙 被殺事件의 早速한 搜査를 命令하고, 10月 28日 非常會議에서는 中央情報部長 김재규 를 10月 27日子로 溯及解任했다. 陸軍大將 鄭昇和 가 戒嚴司令部 司令官이 되었고, 陸軍少將 全斗煥 은 戒嚴司令部 合同搜査本部長으로 任命됐다. 11月 3日 暗殺된 朴正熙 의 殯所에 建國功勞勳章 中將(뒤에 대한민국장 으로 名稱 變更)을 追敍하고, 國葬 (國葬)을 決定, 朴正熙大統領國葬委員會 委員長이 되어 國葬 을 主管했다.

처음에는 차지철 로 報告받았다가 김재규 가 朴正熙 大統領의 殺害犯이라고 報告받은 최규하는 10月 28日 前날 部로 김재규 의 中央情報部長職을 免職하고 全斗煥 을 合同搜査本部長에 임명하여 搜査를 指示한다.

學生 運動 勢力의 示威 [ 編輯 ]

1979年 11月 서울 學生 運動家들의 示威를 始作으로 各地에서 維新 憲法을 撤廢하라는 示威가 터져나왔다. 최규하는 戒嚴令을 풀지 않고 지켜보았다. 1979年 11月 24日 在野 勢力들은 國民 大會를 열어 통일주체국민회의 에서 大統領을 選出하는 것을 中斷하라고 强力하게 要求하였다. [18] 在野 勢力들은 當時 狀況을 10年 넘게 各界 各層 民衆이 苦難에 찬 反獨裁 鬪爭을 벌인 結果로 보면서 참된 國民의 合意에 基礎를 둔 民主 憲政을 서둘러 出帆시키라고 要求하였다. 최규하는 維新 殘黨으로 몰리면서도 當分間 方針에는 變化가 없을 것임을 宣言하고 10.26 事件 에 對한 搜査에 專念하였다.

1979年 第10代 大統領 間接選擧 [ 編輯 ]
최규하 大統領이 個人的으로 利用했던 푸조 604 .

現職 大統領 朴正熙 김재규 에 依하여 被殺된 後, 權力空白에 따라, 于先 憲法 第48條에 따라 當時 國務總理이던 최규하가 10月 27日 部로 大統領 權限代行으로 就任하였다. 그는 現行 憲法을 존속시키면서 第8代 · 第9代 와 똑같은 方法으로 第10代 大統領 選擧를 實施하기로 하였다.

11月 6日 최규하는 維新 憲法 에 따라 새 大統領 을 選出하고 새 大統領 이 빠른 時日 內에 憲法을 改正한다는 '時局에 關한 談話'를 發表하였다. [19] 윤보선 은 卽時 그에게 政治犯 釋放을 要求하였지만 그는 尹潽善의 付託에 對한 答辯은 回避하였다.

최규하의 談話가 나오자 '民主主義와 民族統一을 위한 國民聯合'은 11月 12日 통일주체국민회의 에서 大統領을 選出한다는 것은 決코 容納할 수 없다고 밝히고, 民主憲法을 3個月 以內에 制定하고 빠른 時日 內에 選擧를 實施할 것을 要求했다. [20] 그러나 최규하는 이에 對한 應答을 回避하였다. 11月 13日 동아, 朝鮮투위 等에서도 共同 聲明을 發表했다. 11月 22日 서울대生들度 早期 改憲, 早期 總選을 要求하며 示威를 벌였다. 11月 24日 서울 YMCA 講堂에서 400餘 名이 集會를 갖고 '통대 沮止를 위한 國民宣言'을 發表해 통일주체국민회의 代議員(통대)에 依한 體育館大統領 選出을 强力히 批判하고 國民 基本權 을 保障해 國民의 積極的 參與로 憲法을 確定할 것을 主張했다. [20] 여기에는 함석헌 , 윤보선 , 백기완 等이 參與하였으나 警察의 連行으로 沮止되었다.

當時 憲法 때문에 野圈의 立候補는 事實上 禁止되어 있었다. 結局 無所屬인 최규하가 單獨으로 出馬하였고, 12月 6日 치러진 大統領 選擧에서 96.7%(2,465票)의 得票率을 얻고 當選되었다. [8] 特異한 點은 無效票가 無慮 84票나 나온 것이 特徵이었다.

1979年 12月 통일주체국민회의 議長에 被選되었으며, 12月 6日 통대에서 최규하가 大統領에 選出되어 다음 날 國務會議에서 緊急措置 9號 解除를 議決하였다. [20] 12月 10日 최규하는 總理職을 辭職하고 신현확을 國務總理로 임명하였다. 以後 12月 21日 就任式을 擧行하였다.

12·12 軍事 叛亂 [ 編輯 ]

최규하가 10代 大統領으로 就任한 後 10.26事件 을 搜査中이던 合同搜査本部(本部長 全斗煥 )는 當時 鄭昇和 戒嚴司令官이 10·26 事件 當日 事件現場에 있었으며 事件發生 前後 大統領 弑害犯 김재규 와 狀況에 對한 協議가 있었음을 把握하고 12月 12日 午後에 鄭昇華 逮捕作戰을 벌이게 되는데 이와 關聯된 一連의 狀況을 12.12事態 라고 한다.

12·12 軍事 叛亂 時期 최규하 大統領은 노재현 國防部 長官의 意見을 듣기 위해 전두환 합수部長이 午後 6時에 올린 鄭昇華 戒嚴司令官 逮捕建議 裁可를 미루었는데 結局 최규하 大統領의 決裁는 정승화가 逮捕되고 노재현 長官이 나타난 以後인 12月 13日 午前 5時 10分에 事後 承認 形式으로 이루어졌다.

한便, 노재현 國防長官은 漢南洞 國防長官 公館 옆에 있던 鄭昇華 戒嚴司令官의 公館에서 12月 12日 午後 07時 20分頃 銃소리가 나자 바로 家族들을 데리고 避身하였고, 家族들을 避身시킨 後 自身은 陸軍本部 , 韓美聯合司 司令部 等으로 避身다니다가 12月 12日 午後 10時 10分 韓美聯合司 狀況室에서 최규하 大統領과 通話가 이루어지자 大統領이 들어오라고 指示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 後 김영휴 國防次官 等의 거듭된 大統領 面談 勸誘에도 움직이지 않다가 12月 13日 午前 03時 50分頃 國防部로 노재현 長官을 찾으러 간 신현확 國務總理와 이희성 中央情報部長 署理의 說得에 依해 최규하 大統領이 있는 곳으로 出發했다고 한다. [21]

大統領 在任時 [ 編輯 ]

執權 初期 [ 編輯 ]

第4共和國의 두 番째 大統領이 된 최규하는 非常措置를 解除하면서 民主的 選擧節次에 依한 새 政府 出帆을 國民들에게 約束하고 6年 任期의 大統領으로 選出되었으나 8個月만에 辭任하여, 大韓民國 歷史上 最短期 執權 大統領이라는 不名譽를 안게 되었다.

12月 7日 副總理 신현확을 總理로 指名하는 等 正式으로 業務를 遂行하기 始作했으며, 1979年 12月 21日 就任式을 擧行하였다. 就任辭에서 그는 國論分裂 防止와 政治安定을 强調했다. [22] 12月 21日에는 緊急措置 關聯者 561名이 特別赦免되고, 1,330名이 釋放되었다. 또한 除籍學生 759名이 復學되고, 解職敎授 19名이 復職되었다. [23] 그러나 그는 維新 政權의 國務總理 였고, 통일주체국민회의 代議員 들에 依해 大統領 에 選出된 만큼, 그의 政權은 正當한 政權으로서의 權威를 누릴 수 없었다. [24] 또한 최규하는 公職 生活 中에 獨自的으로 自己 勢力, 自己 派閥을 形成하지 못했다. 政治的 基盤이 脆弱했던 최규하는 新軍部 의 權力 掌握을 事實上 認定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에 依해 退任할 때까지 허수아비 大統領으로서의 役割을 遂行했다. [13]

1980年 2月에는 윤보선 , 金大中 等 687名의 福券을 宣言하였다. [23] 그는 이한빈 等을 拔擢하여 經濟部處를 運用케 했다. 1980年 上半期에는 國際 原油가 引上 等으로 消費者의 物價의 上昇率이 30%에 達했다. 1980年 5月 사우디아라비아 압둘아지스 硬式大勳章, 쿠웨이트 무바락알하비르 硬式大勳章을 特別히 膳物로 授與받았다.

그는 韓國 憲政史上 政黨에 關與하지 않은 職業公務員으로서 課長·局長·次官·長官·國務總理를 次例로 거쳐 大統領이 된 첫 番째 사람이었다. 長期執權을 하던 朴正熙 의 暗殺로 國民들은 維新憲法의 廢止를 통한 民主化를 願했다. 國家元老들과 前 大統領 윤보선 은 최규하 大統領에게 維新 體制를 廢止하고 새로운 民主的 節次에 依한 選擧로 새 政府를 構成할 것을 要請했다. 최규하 大統領은 非常措置를 解除해 禁止됐던 憲法 改正 論議를 許諾했다.

한便 그는 警護隨行 節次를 無視하거나 行事 時 곧잘 엉뚱한 行動을 하여 話題가 되기도 했다. [25]

그는 前任 朴正熙 大統領과 달리 鐵壁 警護를 귀찮게 생각했다. 大統領이 靑瓦臺 境內를 散策한다고 하자 大統領 警護室長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런데 그는 '그만 가서 일 보라. 나 같은 사람에게 누가 銃을 겨누겠는가'라며 警護室長을 돌려보냈다. [26]

實權 없는 大統領 [ 編輯 ]

그러나 하나회 의 政治軍人들이 12.12 軍事 叛亂 을 일으키면서 國防部 高官과 鄭昇和 陸軍參謀總長, 정병주 特戰司令官, 장태완 首警司令官 等을 붙잡아 監禁시키고 軍部를 掌握한 뒤, 政府의 實權을 掌握했다.

1980年 2月 18日 최규하 大統領은 各界 元老˙重鎭 23名으로 國政諮問會議 를 構成하고, 生存限 前職 大統領인 윤보선 李 議長으로 被選됐다. 1980年 建國功勞勳章 中將(重章)을 授與받았다. 2月 29日 최규하는 윤보선 , 金大中 等 在野人士를 687名을 復權했다.

1980年 4月 全斗煥 의 强要에 依해 최규하는 전두환을 朴正熙 政權 時節부터 莫强한 權力을 行使해 왔던 中央情報部長으로 임명했다. 그는 職銜은 大統領이었지만 實속은 全혀 없었다. 그는 自身의 이름으로 發表한 內閣에서 조차 自身의 뜻을 提示하지 못했다. 內閣이 構成된 지 두 달 假量이 지날 즈음부터 靑瓦臺 에서 長官들 얼굴을 보기 조차 힘들어졌다. [27]

全斗煥이 中央情報部長 署理를 兼任할 무렵에는 靑瓦臺 에는 人跡이 그쳐 寂寞만이 흐르고 있었다. [27] 그나마 최규하가 長官들을 불러 會議를 한 것은 몇 안되었으며 미스유니버스 選拔大會를 위한 對策會議 等 몇 個가 채 되지 않았다.

1980年 4月 12日 靑瓦臺 境內에서 當時 그가 附屬室 권영민 祕書官에게 '國民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하나.'라고 묻자, 머뭇거리던 祕書官 권영민의 입에서 '모두들 閣下를 崔 主事라고 부릅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28] 平素 溫和하기 그지없던 崔 前 大統領은 '뭐야, 崔 注射?'라며 불같이 火를 냈다. [29] 平素 溫和한 崔 前 大統領은 그날 불같이 火를 냈다고 한다. [30] 그는 國民들이 自身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고 싶어했다. 그래서 권영민 祕書官에게 '率直한 國民들의 생각'을 注文했고, 어렵게 말門을 연 卷祕書官이 勇氣를 내 '崔 注射'라는 말을 건넸다. [30]

전두환과의 葛藤 [ 編輯 ]

1980年 4月 全斗煥 이 中央情報部長에 就任하고 國保委의 副委員長을 하면서 事實上의 執權者 役割을 하자 全國 各地에는 學生들의 民主化 要求 示威가 發生했다. 5月 1日부터 15日間 全國의 大學生들은 서울驛 廣場을 占據하고 示威를 했고, 16日 民主化 要求에 對한 政府의 對應을 기다린다는 名分으로 大學生들은 解散했다.

1980年 5月 新軍部는 執權시나리오에 따라 최규하 大統領에게 '非常戒嚴 全國擴大', '國會 解散', '國家保衛 非常機構 設置'를 骨子로 하는 時局收拾方案을 實施하도록 强要했다. [31] 5月 16日 최규하 前 大統領은 '時局收拾方案'에 反對 意思를 밝혔다. 최규하는 當時 이희성 戒嚴司令官 等에게 "憲政秩序가 뒤바뀌는 것은 5.16 政變 한番으로 足하다. 모든 일은 法테두리안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여 新軍父側의 `時局收拾方案'에 反對하는 立場을 明白히 했지만, 軍部의 잇따른 强要에 5月 17日 午後 一旦 非常戒嚴을 擴大하는 方案만 받아들였다. [32]

5月 18日 正午 新軍部는 國會議事堂, 中央廳을 軍兵力으로 占據해 閉鎖했다. 金鍾泌 , 金大中 , 김진만 等 主要 政治人을 逮捕하여 保安司로 連行했고, 이어 金永三 , 이철승 , 李珉雨 , 유치송 等을 家宅年金에 處分했다. 이는 5月 18日 發生한 5·18 光州 民主化 運動 의 導火線이 된다.

서울의 봄 時期에 學生運動圈에서 최규하 責任論이 提起됐다는 主張도 있으나 當時 高麗大學校 會長이었던 신계륜 은 "최규하 쪽이 問題가 아니다. 軍部가 問題라고 봤다. [33] "라고 反駁했다.

新軍部의 權力 掌握 [ 編輯 ]

1980年 5月 25日 光州를 訪問하였다. 그러나 최규하는 尙武臺 에 와서 談話文만 發表하고 事態 收拾을 外面하고는 서울로 되돌아갔다. [34] 26日 午後 6時 최규하 大統領은 國防長官 주영복 等을 帶同하고 光州 에 왔으나 全南, 北 戒嚴分所長으로부터 報告를 들은 뒤 相對方 쪽은 面談도 하지 않고 形式的인 談話文을 밤 9時 KBS 放送으로 내보냈을 뿐이었다. [35] 그날 밤 10時에 速히 서울로 되돌아왔다.

5月 27日 新軍部 의 要請에 따라 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 를 設置하고 5月 31日 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 議長이 됐다. 新軍部는 權力 接受 시나리오대로 國家非常機構로 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 (國保委) 設置案을 5月 26日 최규하에게 再嫁해줄 것을 要求했다. [36] 최규하는 이들의 非常機構 設立 要求를 回避하며 하루 동안 時間을 질질 끌었다. 그것이 27日 國務會議를 通過하자 5月 31日 전두환을 常任委員會 委員長으로 하는 國保委가 發足됐다. 國保委 는 一種의 軍事革命委員會 [37] 였다. [36] 光州民主抗爭 以後 全斗煥 等은 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 를 통해 全權을 掌握하고, 최규하 大統領을 威脅하여 下野토록 했다. [38] 최규하는 이를 두고 오래도록 苦悶하였다. 한便 全軍主要指揮官會議에서 國家元首로 推戴된 全斗煥 은, 朴正熙 의 前例에 따라 陸軍 所長 에서 陸軍 大將 으로 進級하여 轉役한 다음 維新 體制의 遺産인 통일주체국민회의 代議員들에 依해 大統領 으로 選出되었다. [38] 최규하는 1年 사이에 全斗煥 의 어깨에 두 별을 달아주었다.

1980年 7月 30日 京畿道 水原 의 새마을 硏修院을 視察했다. 1980年 7月 30日 新軍部의 付託을 받은 김정렬 이 靑瓦臺로 찾아가 崔 大統領과 5時間 談判을 하여 崔 大統領에게 下野를 要求했다. 8月 16日 최규하는 大統領職을 辭任하였다. [39]

退任 以後 [ 編輯 ]

退任 [ 編輯 ]

8月 16日 大統領職과 一切의 公職을 모두 辭任했으며, 大統領 權限代行은 總理署理人 박충훈 이 臨時로 맡게 되었다. 全斗煥이 1980年 9月 1日 새로운 大統領으로 就任했다. 이때 새 大統領 就任式場에 최규하 內外가 招請되었는데 그의 夫人 弘基 女史는 露骨的으로 不快感을 드러내며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1981年 4月 20日 國政諮問會議 가 發足되자 4月 20日부터 1988年 2月까지 國政諮問會議 議長을 지냈다. 1985年 강원대학교 에서 名譽法學博士學位를 받았다. 1982年 獨立記念館 建立基金을 寄附했다. 1985年 1月 17日 延世大學校 講堂에서 열린 백낙준 의 追慕 禮拜에 參席했다. 87年 6·29宣言 以後 12.12와 新軍部의 執權 過程에 對한 眞相糾明을 위한 國會聽聞會에 出席, 證言하라는 野黨과 國民輿論의 壓力을 받았으나 끝내 陳述을 拒否했다.

1988年 11月 全斗煥 國政諮問會議 議長職을 辭退하자 1993年 2月까지 최규하의 國政諮問會議 議長職으로 다시 맡았다. 國會에서는 5共 淸算을 理由로 최규하한테 國政 證人으로 採擇하라고 要求하였으나 최규하는 出席을 拒否했다. 1988年 11月 19日 노태우 大統領은 전두환과 최규하의 國政 證言은 回避했지만, 全斗煥 兄弟 等을 非理 嫌疑로 拘束했다. [40] 전경환 處罰과 全斗煥 百潭寺行을 빌미로 그에 對한 證言 出席 要求는 撤回되었다.

1991年 以後부터 民族史바로찾기국민회의 第3代 議長을 지냈다.

民間 政府 時節 [ 編輯 ]

한便 1989年 12月 三淸敎育隊 被害者인 이택승 等으로부터 告訴를 當한다. 삼청교육대 被害者 이택승 等은 1989年 12月 최규하, 全斗煥 , 이희성 , 김만기 (當時 國保委 淨化分課委員長) 等을 監禁, 暴行 및 苛酷行爲, 殺人 및 殺人敎唆罪로 서울地檢 에 告訴했다. [41] 그러나 3年이 지난 뒤인 1992年 서울地檢 으로부터 公訴權 없음 決定을 받았다. [41]

1992年 安重根義士 旅順殉國遺跡 聖域化事業推進委員會 拷問에 推戴됐다. 1993年 民族史바로찾기국민회의로부터 議長 連任 建議가 들어왔으나 辭讓하고 윤택중 前 문교부長官을 後任으로 內定했다. 民族史바로찾기국민회의 名譽議長에 推戴되어 2006年까지 在任했다. 1995年 金永三 大統領의 文民政府 로부터 新軍部가 司法處理의 對象에 올라 法院에서 數次例 證言 要請을 받지만, 이때에도 그는 法廷 證言을 끝까지 拒否했다.

1999年 6月 최규하는 白凡記念館 建立委員會 拷問에 推戴되었다. [42] 1998年 國民의 政府 出帆 以後 前職 大統領 招請 晩餐에 모습을 들어내거나, 國務總理 等 政治人들의 내방을 받으며 末年을 보냈다. 2003年 2月 25日 열린 盧武鉉 前 大統領의 就任式에 參席하였으며, 이듬 해인 2004年부터 健康 惡化로 인해 病院에 入院하는 回數가 잦아지며 對外 活動을 一切 中斷하였다. 2004年 8月 朴槿惠 當時 한나라당 新任代表를 入院中이던 서울大病院에서 豫防한 것이 言論에 비친 최규하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2004年 7月 20日, 否認 弘基 가 먼저 世上을 떠났다.

逝去 [ 編輯 ]

國立大前賢充員에 位置한 墓所.

2006年 10月 22日 午前 6時頃 서울 麻浦區 西橋洞 467-5(東郊로 15길 10) 自宅에서 意識을 잃은 狀態로 發見돼 서울大病院 으로 後送됐으나, 午前 7時 37分에 逝去했다. [43] 서울대 病院側은 "崔 前 大統領이 午前 病院으로 옮겨지는 過程에서 心境機가 있었다"며 "急性心不全이 直接的인 死因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44] 享年 87歲였다.

生前 그의 嚴格할 程度의 청렴함은 逝去 以後에 월간조선 等을 통해 알려졌다. 1973年 麻浦區 西橋洞 私邸로 移徙한 以後 逝去할 때까지 煉炭 보일러를 使用했다. 國務總理 在任 當時 江原道 장성鑛業所( 太白市 所在)에서 鑛夫들과 한 約束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意志의 表現으로 풀이된다. 즐겨 신던 태화고무신은 밑창이 달면 고무타이어 조각을 붙여 신었고, 靑瓦臺 時節 使用했던 家口를 廢棄하지 않고 私邸로 가져와 使用했다. 至毒히도 무더웠던 1953年 갓 태어난 셋째딸(種慧)을 爲해 장만한 나쇼날 扇風機 또한 2006年 逝去할 때까지 그의 곁을 默默히 지켰다. 朱黃色 플라스틱 材質의 이쑤시개 또한 닦아서 繼續 再活用하였고, 달曆 뒷面을 오려 裏面紙로 利用하였다. 眼鏡 또한 그의 청렴함을 證明해주는 素材다. 臙脂色의 로이드 뿔테 近視 眼鏡은 화동 경기고 在學 時節부터 外務部借款을 在任한 1960年까지 使用하였고, 以後 말레이시아 大使 時節부터 大統領 辭任에 이르기까지 反뿔테 近視 眼鏡과 뿔테 遠視 眼鏡을 兼用하였다. 辭任 以後 西橋洞 時節에 白內障 手術을 받은 後부터 使用한 反뿔테 近視 眼鏡(現在 초당대學校 眼鏡博物館 所藏, 眼鏡다리가 부러짐), 逝去 前까지 使用한 反뿔테 近視 眼鏡 等이 그것이다.

事後 [ 編輯 ]

葬禮는 國民葬 (國民葬)으로 치러졌으며, 國民葬 當日에는 2,000餘 名이 參與했다. 國立大前賢充員 國家元首墓域에 安葬됐다. 生家는 江原道 原州市 봉산동에 所在하며 現在는 原州歷史博物館 內에 位置해 있다. 2010年 12月 3日 그가 다녔던 원주초등학교 에 최규하 記念館(현석관)이 세워졌다. [45]

2012年 10月 2日 최규하 記念事業會가 江原道 原州市 에서 組織되었다. [46]

論難 [ 編輯 ]

陳述 拒否 問題 [ 編輯 ]

그는 오랫동안 12.12나 5.18에 對한 證言 陳述을 拒否하였다. 그는 陳述 拒否에 對해 '그 事由를 밝히지 않는 것은 前職 大統領이 證言에 應하는 惡例를 남기지 않는 것 [47] '이라며 陳述 拒否의 理由를 披瀝하였다. 그가 沈默과 인터뷰 拒絶, 面談 拒絶로 一貫하자 當時 漫畫에서는 그가 손으로 입을 막고, 귀를 막고, 눈을 가리는 것을 諷刺하여 '최규하 요가硏究所 開設'이라는 諷刺 漫畫들이 나돌기도 했다.

建國訓長 대한민국장 論難 [ 編輯 ]

第10代 大統領 在任 當時 스스로에게 建國訓長 대한민국장 을 授與해 論難이 있다. 特히 親日 行跡이 疑心되어 論難이 加重되었다. [48]

大統領 下野過程 論難 [ 編輯 ]

1980年 최규하가 大統領職에서 下野하는 過程에서 미심쩍은 部分이 있지만, 최규하가 大統領 在任時 일어난 일들에 對한 陳述을 拒否했기 때문에 論難이 일었다. 전두환을 비롯한 新軍部 勢力이 김정렬 에게 付託하여 김정렬이 최규하 大統領에게 찾아가 下野를 慫慂했다는 疑惑도 있다. 최규하 政府에서 國務總理를 맡았던 신현확 前 總理는 1995年 12月 16日 檢察 陳述에서 "81年 김정렬氏에게 崔大統領에게 下野를 積極 勸誘한 事實이 있다고 分明히 들었다"고 陳述했다. [49] 實際 김정렬氏는 崔大統領이 雪嶽山으로 夏季 休暇를 떠나기 直前 靑瓦臺를 訪問하여 그와 獨對하였다. [50]

略歷 [ 編輯 ]

著書 [ 編輯 ]

  • 《八旬記念文獻集》

徐薰 [ 編輯 ]

  • 1969年 말레이시아 SSM 硬式大勳章
  • 1970年 一等 修交勳章
  • 1971年 淸朝勤政勳章
  • 1976年 修交勳章 鑛化大將
  • 1977年 泰國 백상勳章
  • 1979年 無窮花大勳章
  • 1980年 建國功勞勳章 대한민국장
  • 中華民國 政府 백상最高勳章 記事大將
  • 벨기에 王冠十字大勳章
  • 1980年 5月 사우디아라비아 압둘아지스 硬式大勳章
  • 1980年 5月 쿠웨이트 무바락알하비르 硬式大勳章

學歷 [ 編輯 ]

名譽 博士 學位 [ 編輯 ]

家計 [ 編輯 ]

  • 할아버지 :최재민(博士)
  • 아버지 : 최양오 (崔養吾, 1897年 4月 21日~1973年 8月 26日)
  • 어머니 : 이응선 (李應善, 1899年 10月 11日~1983年 5月 2日)
    • 配偶者 : 弘基 (洪基, 1916年 3月 3日~2004年 7月 20日)
      • 長男 : 최윤홍 (崔胤弘, 1943年 6月 11日~)
      • 次男 : 최종석 (崔鍾晳, 1951年 2月 28日~)
      • 長女 : 최종혜 (崔鍾惠, 1953年 9月 20日~)
    • 男동생 : 최명하 (崔命夏, 1922年~1998年)
    • 男동생 : 最重하 (崔重夏, 1926年~2008年)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79年 大選 10代 大統領 大韓民國 無所屬 2,456票
96.29%
1位

評價와 批判 [ 編輯 ]

史學者 오항녕은 '최규하는 朴正熙 大統領이 죽은 뒤, 國務總理로 大統領職을 承繼받았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大統領職을 내놓고 全斗煥 政權의 誕生을 도왔다'며, 그가 新軍部를 돕고 전두환 執權을 도왔다며 批判하였다.

成均館大 敎授 서중석은 '최규하는 뻔뻔스럽게도 朴正熙를 大統領으로 選出했던 통일주체국민회의 에서 大統領에 當選되어 12月 21日 就任했다.'며 그가 통일주체국민회의 를 廢止하지 않은 點을 批判하였다.

劇作家 신봉승은 '國家를 保衛해야 하는 大統領 의 固有한 權限과 任務를 내동댕이쳤으면서도, 如前히 그 事由를 밝히지 않는 것은 前職 大統領이 證言에 應하는 惡例를 남기지 않는 것이라는 어린아이만도 못한 歷史 認識으로 一貫하고 있다.'고 批判했다.

全北大 敎授 康俊晩 은 '責任을 痛感한다던 최규하가 81年 4月 20日에 發足한 國政諮問 會議의 議長을 맡은 건 무슨 理由였을까? '崔主事' 라는 그의 別名이 실감나 는 대목이 아닐 수 없겠다. [52] '고 했다.

美國 國務部 의 報告書에는 "言行이 느리고 따분하다는 評을 얻고있으며, 現職 任務 遂行은 別로 印象的이지 않고 活氣에 차 있지도 않음." 그리고 "外形的으로는 協調的이고 理解心이 많은 것처럼 行動하지만, 自己 自身의 생각은 거의 남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13] "고 評하였다. 그는 베테랑 外交街였지만 政治家로서는 높은 點數를 받지 못했다. [13]

기타 [ 編輯 ]

최규하의 경성고보 卒業動機이자 1年 先輩였던 민관식 의 收集品 目錄에는 최규하 大統領 就任式 晩餐 飮食 메뉴가 있다. 민관식 國會議長 職務代行 資格으로 1979年 12月 21日 최규하 大統領 就任 慶祝 晩餐에 招待되었다. [53] 최규하 大統領 就任 慶祝 晩餐에는 駐韓 外交使節과 함께 민관식 國會議長 職務代行, 이영섭 大法院長 等이 包含되어 있었다. [53] 이날 靑瓦臺 는 最上의 晩餐을 내놓았다. 메뉴는 燻製 알래스카 鰱魚 , 쇠고기 수프, 廣魚 찜, 셔벗, 쇠고기 등心구이, 데운 野菜, 샐러드 , 커피 順이었다. [53] 赤葡萄酒 白葡萄酒 였다. [53]

大韓民國 建國 初期 政治人으로는 드물게 178cm의 長身이었다. 그리고 血液型은 A型.

같이 보기 [ 編輯 ]

大衆 媒體 [ 編輯 ]

드라마 [ 編輯 ]

映畫 [ 編輯 ]

關聯 書籍 [ 編輯 ]

  • 서중석, 《寫眞과 그림으로 보는 韓國現代史》 (熊進知識하우스, 2005)
  • 김진국, 《WWW.韓國現代史.COM》 (민연, 2000)
  • 서중석, 《韓國現代史 60年》 (역사비평사, 2002)
  • 朴元淳, 《顧問의 韓國現代史 野蠻時代의 記錄》 (역사비평사, 2006) 652페이지

各州 [ 編輯 ]

  1. 송국건, 《都大體 靑瓦臺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2007) 127페이지
  2. 조성관, 《實物로 만나는 우리들의 歷史》 (熊進씽크빅, 2005) 28페이지
  3. 조성관, 《實物로 만나는 우리들의 歷史》 (熊進씽크빅, 2005) 40페이지
  4. 송국건, 《都大體 靑瓦臺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2007) 355페이지
  5. http://www.jabo.co.kr/sub_read.html?uid=17922&section=sc1
  6. 최규하, 單 한마디도 털어놓지 않은 大統領의 業報 한겨레 2015.02.13.
  7. “食糧農業會議에 韓國代表도 參加” . 東亞日報社. 1949年 9月 2日. 오는 九月 ?六日부터 洞 ?日까지 五日間에 걸쳐 “씽街폴”에서 열리는 極東亞細亞食糧農業會議에 招請을 받고 우리나라에서도 代表 二名을 派遣하기로 되었는데 現 農林部次官 鄭求興氏와 糧政課長 崔圭夏 梁氏를 推薦하였다 한다.  
  8. 최규하 - Daum 百科事典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9. 李在五, 《韓國 學生運動史》 (爬羅북스, 2011) 282페이지
  10. 김용직, 《史料로 본 韓國의 政治와 外交 1945~1979》 (誠信女子大學校出版部, 2005) 408페이지
  11. [1]
  12. [2]
  13. 서중석, 《寫眞과 그림으로 보는 韓國現代史》 (熊進知識하우스, 2005) 306페이지
  14. 김용직, 《史料로 본 韓國의 政治와 外交 1945~1979》 (誠信女子大學校出版部, 2005) 522페이지
  15. 하영선, 《韓美同盟의 비전과 課題》 (東아시아硏究院, 2006) 133페이지
  16. 김용직, 《史料로 본 韓國의 政治와 外交 1945~1979》 (誠信女子大學校出版部, 2005) 538페이지
  17. 서중석, 《寫眞과 그림으로 보는 韓國現代史》 (熊進知識하우스, 2005) 305페이지
  18. 歷史學硏究所 《바로 보는 우리 歷史》 (서해문집, 2004) 463페이지
  19. 서중석, 《韓國現代史 60年》 (역사비평사, 2007) 159페이지
  20. 서중석, 《韓國現代史 60年》 (역사비평사, 2007) 160페이지
  21. 池萬元, 노재현의 避身과 裁可遲延 Archived 2016年 3月 11日 - 웨이백 머신
  22. 머니투데이 (2013年 2月 25日). “李承晩·朴正熙·최규하…歷代 大統領 就任辭 살펴보니” . 2013年 4月 28日에 確認함 .  
  23. 서중석, 《韓國現代史 60年》 (역사비평사, 2007) 161페이지
  24. 김당택, 《우리 韓國史》 (푸른역사, 2006) 493페이지
  25. 송국건, 《都大體 靑瓦臺에선 무슨 일이》 (네모북스, 2007) 28페이지
  26. "모두들 閣下를 崔(崔)主事라 부릅니다" 報告에 歷程 朝鮮日報 2008.11.28.
  27. 김진국, 《WWW.韓國現代史.COM》 (민연, 2000) 234페이지
  28. "모두들 閣下를 崔(崔)主事라 부릅니다" 報告에 歷程
  29. "모두들 閣下를 崔(崔)主事라 부릅니다" 報告에 歷程
  30. "나 같은 이에 누가 銃을 겨누겠나" 영남일보 2008.11.28.
  31. 5.18事件 再搜査 終結,來日 起訴 朝鮮日報 1996年 1月 22日子 記事
  32. 新軍部,時局收拾안 大統領 反對不拘 强行
  33. 김진국, 《WWW.韓國現代史.COM》 (민연, 2000) 239페이지
  34. 서중석, 《寫眞과 그림으로 보는 韓國現代史》 (熊進知識하우스, 2005) 311페이지
  35. 서중석, 《韓國現代史 60年》 (역사비평사, 2007) 171페이지
  36. 서중석, 《韓國現代史 60年》 (역사비평사, 2007) 174페이지
  37. 軍人들이 쿠데타 後 結成하는 組織들에 對한 代名詞
  38. 김당택, 《우리 韓國史》 (푸른역사, 2006) 495페이지
  39. 서중석, 《韓國現代史 60年》 (역사비평사, 2007) 175페이지
  40. 서중석 , 《寫眞과 그림으로 보는 韓國現代史》 (熊進知識하우스, 2005) ISBN   978-89-01-04959-5 337페이지 “1988年 11月 19日 1萬餘 名의 學生과 市民들이 全斗煥 夫婦 拘束을 위한 第2次 蹶起大會를 열었다. 노태우 大統領은 전두환과 최규하의 國政 證言은 回避했지만, 全斗煥 兄弟 等을 非理 嫌疑로 拘束했다.”
  41. 朴元淳, 《顧問의 韓國現代史 野蠻時代의 記錄》 (역사비평사, 2006) 652페이지
  42. (風向計) 朴正熙記念館 建立과 道德的 解弛 교수신문 2001年 8月 13日
  43. 《聯合뉴스》(2006.10.22.)
  44. 최규하 前 大統領 死亡原因은 急性心不全症 노컷뉴스 2006.10.22.
  45. 原州초교에 ‘최규하 記念館’ 文化日報 2010.12.03
  46. 최규하 前 大統領 記念事業會 8日 原州서 創立
  47. 신봉승, 《신봉승의 造船社 나들이》 (圖書出版 답게, 1996) 5페이지
  48. 親日事前 登載 朴正熙 建國訓長 論難 2009年 11月 8日 京鄕新聞
  49. “신현확 檢察 陳述書” . 2015年 5月 2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5年 4月 21日에 確認함 .  
  50. 김정렬 崔大統領 下野 說得
  51. “大韓民國 職員錄 1952年” . 《韓國史데이터베이스》 . 2008年 11月 19日에 確認함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52. 康俊晩, 《韓國 現代史 散策 1980年代篇 1 : 光州虐殺과 서울올림픽》 (人物과 思想史, 2003)
  53. 조성관, 《實物로 만나는 우리들의 歷史》 (熊進씽크빅, 2005) 256페이지
  54. 劇 中에서는 최한규라는 이름으로 登場.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第10代 大韓民國 大統領
前任
朴正熙
최규하
(權限代行)
1979年 12月 6日~1980年 8月 16日 後任
박충훈
(權限代行)
李承晩   · 윤보선   · 朴正熙   · 최규하   · 全斗煥   · 盧泰愚   · 金永三   · 金大中   · 盧武鉉   · 李明博   · 朴槿惠   · 文在寅   · 尹錫悅
大韓民國 大統領
前任
朴正熙
1979年 10月 26日~1979年 12月 6日(權限代行) 後任
최규하
李承晩   · 윤보선   · 朴正熙   · 최규하   · 全斗煥   · 盧泰愚   · 金永三   · 金大中   · 盧武鉉   · 李明博   · 朴槿惠   · 文在寅   · 尹錫悅
前任
金鍾泌
國務總理 署理
1975年 12月 19日~1976年 3月 12日
後任
최규하
前任
최규하
(署理)
第12代 國務總理
1976年 3月 12日~1979年 12月 5日
後任
신현확
前任
김동조
第7代 外務部 次官
1959年 9月 12日~1960年 5月 11日
後任
이수영
前任
조정환
外務部 長官 職務代行
1959年 12月 22日~1960年 4月 24日
後任
許政
前任
최홍희
第2代 週 말레이시아 大使
1964年 11月~1967年 6月
後任
갈홍기
前任
정일권
第14代 外務部 長官
1967年 6月 30日~1971年 6月 3日
後任
김용식
前任
윤보선
第2代 國政諮問會議 議長
1980年 9月~1981年 4月 23日
後任
최규하
前任
최규하
第3代 國政諮問會議 議長
1981年 4月 23日~1988年 2月 25日
後任
全斗煥
前任
全斗煥
第5代 國家元老諮問會議 議長
1988年 11月 23日~1993年 2月 25日
後任
盧泰愚
前任
윤보선
第3代 民族史바로찾기 국민회의 議長
1990年~1993年
後任
윤택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