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2 軍事 叛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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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軍事 叛亂

쿠데타가 끝나고 軍 首腦部 人事가 發表된 뒤인 1979年 12月 14日, 쿠데타 指揮部와 行動大將들이 國軍保安司令部 建物 앞에서 찍은 記念寫眞.
날짜 1979年 12月 12日
場所
結果

叛亂 成功

交戰國

新軍部

대한민국 危機管理政府
   (최규하 政府)
指揮官
全斗煥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유학성
盧泰愚
장세동
허화평
차규헌
노재현
鄭昇和
장태완
정병주
金鎭基
류병현
李建榮
최규하
兵力

대한민국 第1空輸特典旅團

  • 1大隊
  • 2大隊
  • 5大隊
  • 6大隊

대한민국 第5空輸特典旅團
대한민국 第2機甲旅團

  • 16電車大隊

대한민국 9師團

  • 29聯隊

대한민국 20師團
대한민국 30師團

  • 90聯隊
  • 搜索檢問所

대한민국 首都警備司令部

  • 電車大隊

대한민국 靑瓦臺

  • 警護室

대한민국 國軍保安司令部

  • 西氷庫 分室

대한민국 中央情報部
대한민국 30警備團

  • 本部
  • 機動打擊部隊

대한민국 33警備團

  • 機動打擊部隊

대한민국 首都警備司令部

  • 憲兵團
  • 33憲兵隊
  • 2次 憲兵 特攻隊

대한민국 第3空輸特典旅團

  • 特功組

미국대한민국 韓美聯合軍司令部
대한민국 第9空輸特典旅團

  • 5分臺基調 大隊

대한민국 首都警備司令部

  • 司令部 殘留 兵力
  • 1次 憲兵 特攻隊
  • 首警司 正門 衛兵所
  • 第1한강교 檢問所

대한민국 陸軍特殊戰司令部

  • 司令部 本部 行政重大

대한민국 海軍本部

  • 陸軍總長 公館 海兵隊

대한민국 30師團

  • 幸州大橋 北端 檢問所
  • 開花哨所

대한민국 第1防空旅團

  • 國防部 防空砲隊

대한민국 國防部

  • 國防部 벙커 哨所

대한민국 首都機械化步兵師團

대한민국 26師團

12·12 軍事 叛亂 ( 韓國 漢字 : 十二十二軍事反亂) 또는 12·12 肅軍 쿠데타 1979年 12月 12日 , 全斗煥 盧泰愚 等을 中心으로 한 하나회 를 爲始한 新軍部 勢力이 최규하 大統領의 承認 없이 戒嚴司令官인 鄭昇和 大韓民國 陸軍 參謀總長 , 정병주 特殊戰司令部 司令官, 장태완 首都警備司令部 司令官, 金鎭基 陸軍 憲兵監 等을 逮捕한 事件이다. [1]

保安司令官 全斗煥 은 12·12 軍事 叛亂으로 大韓民國 을 掌握하고 政治的인 實勢로 登場했다. 以後 1980年 5月 全斗煥 을 中心으로 하는 新軍部는 5·17 쿠데타 를 일으켰다. 5·17 쿠데타에 反抗한 5·18 光州 民主化 運動 에 對해 銃을 들고 일어난 暴動으로 생각하여 戒嚴軍을 보내서 强勁 對應했다. 전두환은 8月 22日 에 陸軍 大將으로 豫編했고 1980年 9月 1日 大韓民國 第11代 大統領이 되었다. [2]

事件의 背景 [ 編輯 ]

10·26 事件 以後 各 軍 首腦部들은 戒嚴司令官을 하게 된 鄭昇和 陸軍參謀總長 을 求心點으로 國家의 保衛와 安寧을 위해 一致團結하기로 決意했다. 全斗煥 保安司令官 은 合同搜査本部長을 鄭昇和 陸軍參謀總長 이 임명해서 10.26 事件을 搜査했다. 하지만 이 時期에는 정승화가 10.26 일어난 事件現場 가까이 있었다는 事實과 김재규와 같이 陸軍本部로 移動한 事實, 그 以後 國防部長官이 있음에도 不拘하고 軍隊를 이동시키고 이것을 國防部長官에게는 報告하지 않고 김재규에게만 보고 [3] 한 事實 等이 알려지기 前이었다.

10.26 事件 當時 鄭昇和 가 宮井洞과 가까이 있었고 犯人인 中央情報部長 김재규 와 平素 親分이 두터웠기 때문에 鄭昇和 朴正熙 大統領 暗殺事件과 關聯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疑惑이 있었다. 當時 서울地檢의 公安部 및 特殊部 檢事 7名이 派遣 되었으며, 派遣檢事 大部分은 10·26 直後에 전두환 本部長에게 朴 大統領 弑害 當時 궁정동 現場에 있었던 정승화 總長을 嚴重 調査해서 김재규와의 連累嫌疑를 追窮해야 한다고 建議했지만, 全斗煥이 戒嚴司令官인 정승화 總長에 對해 그렇게 할 엄두를 내지못했다 [4] .

1979年 11月 6日 保安司令官 兼 合同搜査本部長 全斗煥 은 10·26 事件 搜査를 마치고 김재규 의 單獨 犯行이라는 1次 搜査結果를 發表했다. 全斗煥 은 " 鄭昇和 總長이 陸軍本部 벙커에 到着 後 迅速한 措置를 取함으로써 問題가 擴大되지 않고 秩序 정연히 事態를 收拾했다"라고 말했다. 또한 "發表文을 보면 鄭昇和 總長의 一擧一動을 알 수 있다"면서 " 鄭昇和 總長이 김재규 의 말을 듣고 中央情報部 로 갔으면 큰 混亂이 招來되었을 것이다. 鄭總長이 陸軍本部 로 가자고 하였다"라고 말했다. [5]

11月 1日 日本 마이니치 新聞 에 一介 所長인 전두환 保安司令官이 軍의 最高 實權者라는 言論 發表도 나오며, [6] 12月 9日 國防長官은 鄭昇華 戒嚴司令官으로부터 保安司令官 전두환을 東海警備司令官으로 轉補시키는 建議를 받았으나 一般人들에게 搜査와 關聯한 疑惑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며 轉補 發令을 留保시킨다. [7]

展開 過程 [ 編輯 ]

鄭昇和 搜査 支持 指揮官들의 30警備團 集結 [ 編輯 ]

全斗煥 保安司令官 兼 合同搜査本部長은 11月 中旬부터 鄭昇和 總長을 除去하고 軍部를 掌握할 計劃을 세우고, 하나회 를 비롯한 同調 勢力 糾合에 나섰다. 허화평 保安司令部 祕書室長, 허삼수 保安司令部 人事處長, 이학봉 保安司令部 搜査課長, 장세동 第30警備團長, 金晋榮 第33警備團長 等 領官級 後輩의 同調를 얻어 謀議를 進行하기 始作했다. 11月 末頃 全斗煥 황영시 第1軍團長, 盧泰愚 第9師團長, 백운택 第71防衛師團長, 박희도 , 최세창 , 장기오 1, 3, 5空輸特戰旅團長 等 先後輩 同僚 將星과 정승화總長 連行을 謀議하였다. 12月 8日 全斗煥 이학봉 中領으로부터 鄭昇和 總長은 日課時間 後 總長 公館에서 連行하는 것이 좋겠다는 意見이 添附된 細部計劃書를 傳達 받고, 이를 確定한 後 허삼수와 우경윤 陸軍本部 犯罪搜査團長에게 具體的인 計劃을 세우도록 指示했다. [8]

12月 12日 午後, 전두환은 박희도, 최세창, 장기오, 차규헌 , 盧泰愚 , 황영시 等 糾合한 同調勢力을 장세동이 있던 景福宮 內 首都警備司令部 如何 第30警備團 團長室로 모이도록 한 後 市內 一圓을 掌握하기로 한 計劃을 指示, 論議했다.

같은 날 18時, 전두환은 최규하 大統領에게 沐浴 時間을 避해서 20分 일찍 오라는 傳喝까지 받고 [9] 陸軍參謀總長 逮捕案에 對한 再嫁를 윤필용 事件 의 境遇를 例로 들어 時急하고 祕密을 요하는 境遇라며 홀로 [9] 提案했으나 거절당한다.

陸軍 參謀總長 强制 連行 [ 編輯 ]

전두환의 指示를 받은 허삼수 , 우경윤은 鄭昇和 總長 連行計劃을 進行했다. 19時, 이들은 정승화 總長을 逮捕하기 위해 首都警備司令部 33憲兵隊 50名을 投入했다. [10] 33憲兵隊는 海兵隊 兵力이 警備하던 公館 內에 日帝 슈퍼 살롱 한 臺와 [9] 마이크로 버스 1臺를 타고 들어와 [11] 保安司 次長의 報告라며 손님 待接까지 받으며 居室에서 待機한다. [7]

그리고 戒嚴司令官에게 賂物 收受 嫌疑를 擧論하여 總理 公館으로 確認 連絡을 하려던 人員을 向해 銃擊이 일어나고 [7] 公館 內部를 制壓한다. [11] 私服 차림에 [9] 두 大領이 總長을 兩쪽에서 잡아서 일으켜 세우니, 玄關 窓門을 깨고 軍人이 들어와 小銃의 銃口로 總長을 찌르며 妻家로 가려던 길을 도리어 재촉한다. [7] 押送 途中에 建物 밖에서 公館 經費 海兵隊員들과 銃擊戰을 치른다. [11] 이 銃擊戰에서는 保安司 麾下 拉致代의 陸本 所屬 우경윤 大領 1名만 拉致臺 間의 誤認 射擊으로 因해서 銃傷을 입는다. [11] 繼續된 銃擊戰 속에서 [12] 鄭 總長 身邊의 危險을 느낀 經費 憲兵들이 近接하는데 時間이 걸리자, 許大領의 銃口가 [9] 뺨에 닿아 있는 狀態로 總長은 세단車에 떠밀려 들어가고 [7] , 이미 占領된 公館 正門은 세단 뒷座席에서 2名의 大領에게 붙들려 꼼짝 못하는 狀態로 [9] 總長의 期待와는 反對로 沮止를 받지 않고 순조롭게 通過한다. [7] 公館 警備兵까지 連行을 當했는데 [13] 上部에서 無斷 連行으로 뒤늦게 알려왔고 [7] , 海兵隊가 公館을 再奪還하는 過程에서 公館 正門에 殘留한 叛亂軍側 박윤관 一兵이 사살당한다. [14] 戒嚴司令官 公館에서 모두 3名이 死亡, 20名이 重輕傷을 입는다. [15]

19時 21分, 叛亂軍은 鄭總長을 保安司 西氷庫 分室로 强制 連行했다.

20時頃 陸軍本部 參謀次長 윤성민 中將은 北韓 特殊部隊의 總長公館 浸透로도 疑心하다가 合搜部로 派遣이 나간 陸軍本部 犯罪搜査團長 우경윤 大領의 行動을 報告받고 保安司의 總長 連行으로 疑心한다. [16] 그리고 陸軍本部 憲兵監 김진기 准將은 總理公館 特別警護大將 구정길 中領에게 總理公館에 있던 전두환 將軍의 逮捕 準備를 다짐 받는다. [16]

總理 公館에서 밤새 連行 裁可 要求 [ 編輯 ]

21時 30分頃, 全斗煥, 유학성, 황영시 等은 다시 國務總理 公館으로 가서 최규하 大統領에게 集團으로 鄭 總長의 連行·調査를 再嫁해 달라고 再次 要求하였으나 國防部長官의 陪席이 없기 때문에 거절당했다. 그리고 決裁와 關聯한 意見들로 밤을 새우게 되는 밀고 당기기가 始作된다. [17] 새벽 3時30分頃 國防部 廳舍에 到着한 總理는 노재현 國防部 長官 을 찾아서 최규하 大統領에게 데리고 갔고, 總理公館에 到着後 再嫁를 하고, 뒤 이어 최규하 大統領이 裁可하므로서 事實上 12.12 事態는 終結된다.

參謀總長 連行 以後의 陸軍本部와 合同搜査本部의 葛藤 [ 編輯 ]

1空輸旅團의 陸軍本部 出動 誤報 發生 [ 編輯 ]

21:30分頃 1空輸 旅團이 陸軍本部를 攻擊하기 이해서 出動했다는 威脅的인 諜報가 陸軍本部에 傳達된다. 이 諜報는 後에 事實이 아닐 可能性이 높은 것으로 判明되었지만, 12.12 事態 當時에 미친 影響은 매우 크다. 于先 當時 陸軍本部는 9空輸旅團이 지키고 있었으나, 1週日 前에 復歸한 狀況이고 1空輸를 막기위해 陸軍本部는 9空輸旅團의 出動을 要請했으며, 정병주 特戰司令官은 9空輸 出動을 要請한다. 뿐만 아니라, 萬若의 事態를 對備하기 위하여 陸軍本部 指揮部는 필동의 首都警備 司令部 領內로 移動하여 22時 15分 首警司 正門에 到着 [18] 하고, 노재현 國防部長官은 監聽이 되지 않는 美8軍 벙커로 자리를 옮긴다 [16] .

그러나 當時 1空輸旅團은 當時에 營內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當時 1空輸를 指揮할 수 있는 박희도는 30段에 있었으며, 附與丹粧人 이기룡이 作戰指示를 받으로 陸軍本部로 出發해서 제1한강교를 通過했는데, 이것을 1空輸特戰旅團의 出動으로 錯覺한 것으로 보는 視角이 있다 [19] [20] [21] .

1空輸旅團 出動 關聯 報告書 內容 [ 編輯 ]

1空輸旅團이 12.13日 出動한 것은 事實이나, 전두환을 批判하는 많은 記事와 報告書에서는 1空輸旅團의 出動이 9空輸旅團의 出動보다 먼저이며 그 時間이 大略 22:00 警 以前으로 言及되어 있다. 하지만 그 內容은 大槪 不一致하고 몇 가지 버전이 있다.

  1. 이에 따라 12日 午後 9時 10分께 朴熙道 1空輸旅團長은 이기용 附與丹粧에게 兵力出動 準備를 指示, 9時 45分께 1空輸 1大隊 兵力이 신월동 三거리에 集結했다 [22] .
  2. 22:03 附近에 漢江다리 檢問所를 通過했다 [23] .
  3. 第1한강교에서 막혀서 행주大橋를 거쳐서 陸軍本部로 進入했다 [18] [24] [25] .

以上 여러 報告書와 記事의 內容이 不一致하며, 무엇보다 1空輸 附與丹粧과 關聯者의 陳述과도 不一致한다. 當時 박희도는 30段에 있었기 때문에 部隊를 출동시킬 수 없었으며, 附與丹粧人 이기룡은 非常狀況에서 1空輸旅團이 戒嚴軍에 配屬되기 때문에 정병주 司令官의 指示를 받지 못하는 狀況에서 정병주 司令官의 指示로 인하여, 陸軍本部로 直接 移動하여 指示를 받기 위해서 제1한강교를 건넜기 때문에 當時 部隊에 있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곧 제2한강교에서 首都警備司令部 所屬 憲兵이 下車시켜 年金 [19] 하였기 때문에 1空輸旅團은 朴熙道가 部隊에 復歸한 13日 00:00까지는 指揮 空白이 있었다.

陸軍本部의 對應과 保安司令官으로서의 全斗煥의 對應 [ 編輯 ]

陸軍本部 立場에서는 1空輸旅團이 먼저 陸軍本部를 攻擊하는 立場에서 이에 對하여 9空輸를 출동시키고, 30段을 攻擊을 試圖하는 對應을 하였으며, 保安司令部 立場에서는 合法的인 節次없이 30段을 攻擊하는 것으로 判斷하여 保安司令官의 權限으로 大全鰒作戰을 遂行한다. 結局 新軍部 勢力은 總長의 强制連行이 不當하다며 原狀復歸를 主張하던 3軍司令官 李建榮 中將, 首都警備司令官 장태완 所長, 特戰司令官 정병주 所長, 陸軍本部 作戰參謀部長 하소곤 所長, 陸軍本部 憲兵監 金鎭基 准將 等에 對해 下剋上을 敢行하고, 이들을 武力으로 制壓하며 連行했다.

하나회 會員이던 朴熙道 准將이 이끄는 第1空輸特典旅團 兵力과 최세창 准將이 指揮하던 3空輸特典旅團, 그리고 장기오 准將의 第5空輸特戰旅團이 서울로 出動했다.

美國은 北韓의 南侵이 憂慮된다는 理由로 날이 밝을 때까지 兵力을 出動하지 말도록 美8軍 벙커 노재현 國防長官에게 까지 慫慂하였다. [16] 서울市內는 무슨 軍部隊가 어디를 占領했으며 國防部에서 銃擊이 났다는 消息을 接하고 大統領은 決裁가 不可能하며 國防部 長官 決裁가 없으니 國防部 長官을 데려오라고 要求한다. [17]

13日 밤 2時가 되어 全斗煥이 몇 番씩 決裁를 要求하는 가운데 9師團 兵力에 움직임이 報告되어 大統領은 師團長 노태우 所長한테 原隊復歸를 命令한다. [17]

軍 統帥權으로 鎭壓軍 沮止 [ 編輯 ]

그렇게 優先的으로 內亂은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兩側의 接觸을 總理公館에서 連絡하여 막아 놓는다. [17] 그런 以後에야 聯合司 로부터 國防部에 到着한 長官과 連絡이 되는데 國防部長官은 對峙 狀態를 理由로 總理公館으로 가기를 拒否한다. [17] 事態가 急迫해지자 國防部 長官한테 다시 連絡하여 總理 가 가면 오는 것으로 大統領은 確答을 받는다. [17] 盧泰愚 所長은 自身이 指揮官이던 9師團 29連帶를 中央廳 앞에 집결시켰다.

1空輸特典旅團은 第1한강교에서 遮斷되어 回軍하지만 [18] 幸州大橋에 있던 30師團 兵力을 無力化시킨 後 곧장 서울로 달려갔다. [12] 얼마 後, 1空輸特典旅團은 國防部와 陸軍本部를 攻擊하여 노재현 國防部 長官을 逮捕, [26] 國防部 50憲兵隊 警備兵力으로 勤務하던 정선엽 兵長을 射殺한 後 [14] 國軍 首腦部를 逮捕했다. 國防部 對空砲의 對應 射擊으로 銃彈이 빗발치니 商社 階級의 1空輸 副士官이 國防部 進入을 反撥하였으나 現場을 指揮하던 1空輸 少領에게 크게 혼나며 默殺된다. [12] 이 過程에서는 銃擊戰으로 國防部 建物 앞은 琉璃門 等이 부서지고 鮮血이 狼藉하였다. [17] 國防部에서 모두 1名이 死亡, 10名이 重輕傷을 입는다. [16]

鎭壓軍 側의 主導力 喪失 [ 編輯 ]

한便 3空輸特典旅團은 3旅團의 營內에 있던 特典司令部 本部에 3旅團 15大隊長이 이끄는 10餘 名의 逮捕組가 投入되어 [27] 特戰司令官 祕書室長 김오랑 少領을 射殺, 特戰司令官 정병주 所長을 逮捕해간다. 3攻守에서 差出된 精銳 兵力이 特典司令部 指揮統制室에 1週日 가까이 常住하며 特典司令部의 機能을 정지시킨다.

새벽 3時30分頃 國防部 廳舍에 到着한 總理는 노재현 國防部 長官 을 찾아서 최규하 大統領에게 데리고 갔다. [17]

새벽 4時30分頃 保安司는 守防司 장태완 司令官을 連行하며 守防司 領內 陸軍本部 指揮官들은 집으로 귀가시킨다. [28] 守防司 司令部 營內에서 1名이 重輕傷을 입는다. [16]

새벽 5時 최규하 大統領에게는 세 次例 걸쳐 10時間 만인 13日, 陸軍參謀總長 連行에 關한 事後 裁可가 이루어졌다. 結局 全斗煥의 意圖대로 事態는 一段落되었다.

美軍에 日出 以後 鎭壓 意圖의 挫折 [ 編輯 ]

12月 13日 午後, 노재현 國防部 長官이 談話文을 통해 10.26 事件 連類 嫌疑로 鄭昇華 總長을 連行하고 이와 聯關된 정승화 陸軍參謀總長과 一部 將星 또한 拘束됐으며, 戒嚴司令官職에 이희성 陸軍 大將으로 任命되었음을 發表했다.

12月 14日 12.12 事件 以後 전두환 保安司令官은 事實上 이희성 陸軍參謀總長을 直接 임명하고 6人 委員會를 통해 軍部의 人事를 調整하여 軍의 主導權을 掌握하고, 權力 空白期에 最高 實力者가 되었다. [29]

美國 側 判斷 [ 編輯 ]

當時 美國 은 12.12 事態 直後, 北韓의 南侵 可能性을 50% 程度로 判斷하고, 萬一의 事態에 對備했다. 美 中央情報局(CIA)은 12.12 事態 發生 8日 後인 12月 20日 作成한 `南韓內 不安定에 對한 北韓의 反應'이라는 特別 狀況判斷 報告書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30]

또한, 美國 政府는 新軍部가 平時 作戰統制權 行事와 關聯한 한.美 間의 合意를 違反한데 對해 白堊館과 美 軍部의 强力한 不滿을 傳達하고 向後 大韓民國의 民間政府만을 全幅 支持하겠다는 立場을 表明해 新軍部 勢力과 緊張感이 高調되었다. 하지만 보름 뒤 新軍部 勢力에 對한 批判 語調는 多少 누그러져, 軍部 內 叛亂을 事實上 默認했다. [31]

叛亂軍 側 意見 [ 編輯 ]

鎭壓에 關한 否定的 情勢로 分析 [ 編輯 ]

12月 12日부터 다음날까지 總理 公館에는 叛亂軍 側에서 陸軍參謀 總長 公館에서 總長을 拉致한 [32] 以後로 叛亂軍 側의 指揮官들 中에 一部가 들어와 있었다. [17] 서울 市內는 어느 軍部隊가 掌握을 하고 前方 師團이 서울로 移動 中이며 國防部에서 銃擊戰이 일어난 狀況에서, 叛亂軍 側의 그 指揮官들은 이제 內亂 狀態를 막을 길이 어려워 지겠다는 意見을 國軍 統帥權者의 公館에서 繼續해서 낸다. [17]

叛亂 以後 [ 編輯 ]

12·12는 肅軍 目的을 띤 軍 內部의 叛亂이었다. 政權을 奪取한다고 하는 意味로의 쿠데타에 該當하는 것은 오히려 1980年 의 全國 非常 戒嚴令으로부터 光州民衆抗爭 에 이르는 過程( 5.17 쿠데타 )이다. 結局 이러한 一連의 事件을 통해 최규하를 辭任시키고 新軍部가 實權을 잡았기 때문이다.

2個 情報機關長 兼職 [ 編輯 ]

전두환은 保安司 司令官과 中央政府 部長으로 2個의 情報機關長에 兼職 任命 된다. [17] 12月 20日 戒嚴普通軍法會議 1審과 1980年 1月 21日 2審에서 朴 大統領 弑害 嫌疑로 逮捕된 情報部長과 情報部 박선호 儀典誇張을 비롯한 職員 6名은 死刑을 宣告 받는다. [33]

軍部의 政權掌握에 道具化 [ 編輯 ]

1980年 1月 軍將星들의 大大的인 물갈이가 있었고, 그 以後에도 公私席에서 12·12 軍事 叛亂에 對해 批判的인 發言을 했던 將星들은 내쫓기거나 補職이 變更되는 等, 軍部가 政權掌握의 道具로 利用될 準備가 갖추어졌다. [34] 美國과의 關係는 新軍部의 뜻대로 쉽게 풀리지 않았다. 駐韓 美軍司令官 존 위컴 將軍은 軍士 叛亂을 認定하지 않았다. [35]

쿠데타 首腦 大統領 選出 [ 編輯 ]

朴正熙 政府 時代와 비슷한 軍部 體制를 形成하려는 新軍部의 움직임에 抵抗하여 5月 中旬부터 大規模 學生 示威가 發生했다. 新軍部는 執權 시나리오에 따라 1980年 5月 17日에 發生한 軍士 쿠데타 에 依한 全國 非常 戒嚴令을 宣布했다. 5月 18日 부터 이에 抗拒한 光州民衆抗爭 이 發生하자, 戒嚴軍을 投入해 武力으로 鎭壓했다. 5月 24日 김재규 朴正熙 被殺 關聯者는 大法院 判決 確定 後 卽決審判으로 處刑됐다. 같은 해 8月, 최규하 大統領은 新軍部의 壓力으로 辭任했고 8月 27日 에는 전두환 將軍이 통일주체국민회의 代議員會 [36] 에서 第11代 大統領으로 選出되었다. 以後 國保委 는 憲法을 改正했고, 第5共和國 이 成立되었다.

處罰 [ 編輯 ]

鎭壓軍 [ 編輯 ]

陸軍本部 參謀次長 윤성민 中將은 1軍司令官으로 轉補 된다. [16] 兵力 動員에 가장 積極的이던 首警司 司令官 장태완 所長은 3個月을 服役後 二等兵으로 降等 [37] 되어 强制 豫編되고 家宅軟禁을 當하며, 唯一하게 麾下 部隊를 動員한 特戰司令官 정병주 所長은 保安司 取調室을 거처 强制 豫編되고 家宅軟禁을 當한다. [16]

叛亂軍 [ 編輯 ]

文民政府 가 들어서자 金永三 大統領은 12·12 事件을 "下剋上에 依한 쿠데타的 事件"이라고 規定했다. [38] 박계동 議員의 노태우 祕資金 暴露로 始作된 歷史 바로 세우기 作業은 全斗煥 盧泰愚 에 對한 告發로 이어지기까지에 이른다. 1994年 12月 檢察 은 12·12 事件은 軍事叛亂이 맞지만 國內의 混亂을 憂慮하여 起訴 猶豫 處分한다고 發表했다. 12.12 事件 起訴 猶豫 處分에 對한 憲法訴願審判 請求事件에서 憲法裁判所 1995年 1月 20日 12·12事件 起訴猶豫處分取消請求에 對하여 却下 및 棄却 決定을 내렸다. [39] 1995年 7月 檢察 은 5ㆍ18 事件은 全斗煥 의 政局 掌握 意圖에 進行됐다는 搜査 結果를 發表하면서도 '成功한 쿠데타는 處罰할 수 없다'는 論理로 起訴하지 않았다. 以後 國會에서 5·18 特別法 을 制定하였고 新軍部 人士들의 새로운 嫌疑가 發見되자 檢察 1995年 12月 12·12, 5·18 事件 再搜査에 나섰다. 結局 全斗煥 , 盧泰愚 等의 新軍部 核心 人士는 1月 23日 5·18 事件에서의 內亂嫌疑로, 2月 28日 12·12 事件에서의 叛亂嫌疑로 拘束 起訴되었다.

12·12, 5·18 事件 裁判 1審에서는 全斗煥 은 死刑, 盧泰愚 는 無期懲役의 判決을 내렸다. 高等法院에서는 全斗煥에게는 無期懲役으로 減輕했다. 大韓民國의 大法院은 12·12 軍事叛亂에 對해서 전두환과 노태우 等에게 叛亂罪를 認定했다. 大法院은 軍事叛亂과 內亂을 통하여 政權을 掌握한 後 國民投票를 거쳐 憲法을 改正하고 改正된 憲法에 따라 國家를 統治하여 왔다고 하더라도 그 軍事叛亂과 內亂을 통하여 새로운 法秩序를 樹立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憲法에 定한 民主的 節次에 依하지 아니하고 暴力에 依하여 憲法機關의 權能行使를 不可能하게 하거나 政權을 掌握하는 行爲는 어떠한 境遇에도 容認될 수 없다고 判示했다.

赦免 [ 編輯 ]

1997年 大選을 앞두고 政治 報復은 없다는 김대중 大統領 當選者와 김영삼 大統領의 合意에 따라 1997年 12月 22日 金永三 大統領은 12·12, 5·18 事件 關係者를 特別 赦免했다.

叛亂軍(全斗煥 側)과 鎭壓軍(정승화 側) [ 編輯 ]

軍事 叛亂 當時 하나회 核心 人物(全斗煥 側) [ 編輯 ]

國軍保安司令部
首都警備司令部
  • 이진백 人事參謀 (大領) (當時 장태완 首都警備司令部 司令官 (所長) 直屬部下)
  • 조홍 憲兵丹粧 (大領) (當時 장태완 首都警備司令部 司令官 (所長) 直屬部下)
  • 장세동 第30警備團長 (大領) (當時 장태완 首都警備司令部 司令官 (所長) 直屬部下)
  • 金晋榮 第33警備團長 (大領) (當時 장태완 首都警備司令部 司令官 (所長) 直屬部下)
  • 김진선 作戰補佐官 兼 狀況室長 (中領) (當時 장태완 首都警備司令部 司令官 (所長) 直屬部下)
  • 최석립 第33憲兵警護隊長 (中領) (第33憲兵警護隊는 大統領 警護室 配屬部隊이나, 10.26 直後 合同搜査本部(本部長:全斗煥)에 臨時로 配屬됨)
  • 신윤희 憲兵部團長 (中領)
  • 박윤관 首都警備`司令部 33憲兵隊 (一兵)-義務服務軍人
陸軍本部 및 國防部
  • 유학성 國防部 軍需次官補 (中將)
  • 우경윤 犯罪搜査團長 (大領) (當時 金鎭基 憲兵監 (准將) 直屬部下) 鄭昇和 陸軍參謀總長 不法連行에 直接 關與)
  • 성환옥 憲兵監室 企劃課長 (大領) (當時 金鎭基 憲兵監 (准將) 直屬部下)
  • 변규수 保安部隊長 (准將)
社團 軍團 및 旅團 諸君 司令部
  • 차규헌 陸軍 首都軍團長 (中將) (當時 李建榮 3軍 司令官 (中將) 直屬部下)
  • 김성환 陸軍 首都軍團 參謀長 (准將)
  • 황영시 陸軍 第1軍團長 (中將) (當時 李建榮 3軍 司令官 (中將) 直屬部下)
  • 최동수 陸軍 第1軍團 憲兵隊長 (大領)
  • 백운택 陸軍 第71防衛步兵師團長 (准將)
  • 박준병 陸軍 第20機械化步兵師團腸 (所長) (當時 李建榮 3軍 司令官 (中將) 直屬部下)
  • 박희모 陸軍 第30步兵師團長 (所長) (當時 李建榮 3軍 司令官 (中將) 直屬部下)
  • 송응섭 陸軍 第30步兵師團 90聯隊長 (大領)
  • 盧泰愚 陸軍 第9步兵師團長 (所長) (當時 李建榮 3軍 司令官 (中將) 直屬部下)
  • 구창회 陸軍 第9步兵師團 參謀長 (大領)
  • 이문섭 陸軍 第9步兵師團 28聯隊長 (大領)
  • 이필섭 陸軍 第9步兵師團 29聯隊長 (大領)
  • 김봉규 陸軍 第9步兵師團 30聯隊長 (大領)
  • 정호용 陸軍 第50步兵師團長 (所長)
  • 李相奎 陸軍 第2機甲旅團長 (准將) (當時 李建榮 3軍 司令官 (中將) 直屬部下)
特典司令部
  • 박희도 第1空輸特戰旅團長 (准將) (當時 정병주 特戰司令官 (所長) 直屬部下)
  • 이기룡 第1空輸特典旅團 參謀長 (大領)
  • 김경일 第1空輸特典旅團 1大隊長 (中領)
  • 백남석 第1空輸特典旅團 憲兵隊長 (大尉)
  • 권대포 第1空輸特典旅團 作戰參謀 (少領)
  • 박덕화 第1空輸特典旅團 5大隊長 (中領)
  • 최세창 第3空輸特戰旅團長 (准將) (當時 정병주 特戰司令官 (所長) 直屬部下)
  • 박종규 第3空輸特典旅團 15大隊長 (中領)
  • 장기오 第5空輸特戰旅團長 (准將) (當時 정병주 特戰司令官 (所長) 直屬部下)
  • 김정룡 特典司令部 保安部隊長 (大領) (當時 정병주 特戰司令官 (所長) 直屬部下)
  • 신우식 特典司令部 作戰參謀 (大領) (當時 정병주 特戰司令官 (所長) 直屬部下)
  • 이병구 特典司令部 作戰處長 (大領)(當時 정병주 特戰司令官 (所長) 直屬部下)
大統領警護室
  • 고명승 大統領 警護室 作戰擔當官 (大領)
  • 정동호 大統領 警護室長 職務代理 (准將)

軍事 叛亂 當時 戒嚴司令部 側 人物(정승화 側) [ 編輯 ]

장태완 手記에 따르면 大勢가 叛亂軍 側으로 기울자 정병주, 金鎭基를 除外한 거의 모든 이들이 背信했다. 이와 달리 신윤희 中領은 많은 將校가 장태완 司令官의 指示를 따르지 않은 것은 그의 無理한 命令 (卽, 我軍 特히 大統領 經費部隊를 攻擊하라는 命令) 때문이라고 主張했다 [40] [41] . 首警司 參謀長이던 김기택은 首警司 檢問所에 1空輸를 그대로 통과시키도록 命令했고, 懸病副團長 신윤희는 陸本 側 將星들에게 銃을 돌려 그들을 逮捕했다.

首都警備司令部

特典司令部

師團 및 軍團 司令部

合同參謀本部, 陸軍本部, 海軍本部, 韓美聯合司令部, 國防部

기타 [ 編輯 ]

評價 [ 編輯 ]

否定的 評價 [ 編輯 ]

  • 新軍部 勢力은 이미 調査해 鄭昇和 總長이 10.26 關聯 無嫌疑라고 發表했던 戰績을 뒤집고 中央情報部長 김재규 와 默示的으로 同調했다는 嫌疑를 내세우며 12.12 叛亂을 일으켰지만, 全斗煥 을 中心으로 한 新軍部 勢力이 郡內의 反撥을 무릅쓰고 戒嚴司令官이던 鄭總長을 强制 連行한 實際 理由는 當時 전두환 保安司令官을 東海岸 經費 司令官 으로 轉補 發令시키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大統領 朴正熙 의 寵愛를 받아 主要 補職을 獨占해온 一部 政治軍人들을 牽制하기 위해 陸軍參謀總長 大將 鄭昇和 가 ‘人事措置案’을 作成하여 實行하려고 計劃했기 때문인 것으로 國防部 過去事眞相糾明委員會는 報告書를 發表하였다. [42]
  • 최규하 大統領은 事件 直後 金鍾泌 與黨 總裁를 만나 합수本部長 전두환 所長과 몇몇 將軍들이 決裁를 要請하며 지난 밤에 亂離를 피워서 죽을 뻔했다고, 抑揚이 異常한 忠淸道 사투리로 一種의 두려움을 呼訴했다고 한다. [43]
  • 신현확 前 副總理는 調査를 目的으로 部下가 相關을 逮捕하는 것은 純粹하게 그 事件 調査를 目的으로 그랬다기보단 軍 內部의 意見이 틀린 系統이 있는 것을 除去하고, 全君을 掌握하기 위한 方法으로 그렇게 했다고 누구든지 말할 수 있는 것이고 그런 疑心은 當然히 할 수 있다고 判斷했다. [17] 그래서 神 副總理는 軍의 움직임을 12·12 軍事 叛亂이 일어나기 前과는 다르게 지켜보았고, 中央情報部는 大統領 直屬으로 國家 體制, 制度上 總理가 關與를 못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憲法과 法律을 大學에서 가르치던 法學敎授이기도 하였던 新 副總理가 一種의 軍 牽制 次元인지 中央情報部長 任命에 關與하는 일까지도 생긴다. [17]
  • 노재현 前 國防長官은 처음엔 決裁할 생각이 없었다가 時間이 漸漸 지나면서 이 事件이 더 擴大되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했고, 이미 다 일어난 狀況이기 때문에 決裁를 늦게 하거나 빨리 하거나 해도 問題 自體가 合理化 되지 않을 것이다고 생각했다고 文民政府가 出帆한 1993年 國會에서 證言했다. [16] 노재현은 保安司에서 새벽 4時 40分까지 約 30分間 전두환을 面談한 後에 鄭昇華 逮捕 同意書에 決裁하기로 決心을 하고 大統領이 國防長官을 찾은지 10時間 만에 大統領을 만나러 갔다고 KBS放送에서 紹介되었다. [16]
  • 장태완 首都警備司令部 司令官은 逮捕된 12月 13日 西氷庫 保安司로 끌려가서 數十日 苦生하다 1980年 2月 5日 面談室에서 전두환을 만났다. 여기서 전두환은 "정승화 總長이 김재규 事件과 關聯이 있으나 調査에 不應하므로 陸軍參謀總長 職銜을 내려놓고 집에서 6個月 程度 쉬면 大使 長官 以上에 자리를 保障해 준다며 總長을 說得하려고 하였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44] 장태완 將軍은 그때 “이 親舊들이 쿠데타 計劃을 緻密하게 짰구나”라고 느꼈다고 한다. [44]
  • 이 날 叛亂軍側 作戰名은 "生日집 잔치"라고 再照明된 바 있다. [45]
  • 12月 13日 새벽 狀況이 叛亂軍의 勝利로 事實上 마무리되면서, 首都警備司令部가 軍事 行動을 中止하고 叛軍 司令部로 그 決定을 通報한지 半時間은 經過하였고, 司令官室의 合同參謀本部 勤務 人員들을 逮捕하러 온 逮捕組가 銃擊을 加하며 接近하여 當時 하소곤 陸本 作戰參謀部長이 銃傷을 입는다. 이들은 當時 銃擊 現場에선 전두환 保安司令官의 指示라고 說明을 하였는데, 애初에 이 逮捕組 首長이 장태완의 直屬 部下인 신윤희 首警司 憲兵團 副團長이었기 때문에 장태완 首都警備司令官은 當然히 이것을 軍紀 紊亂罪로 判斷했고 氣가 막혀했다. [18]
  • 金壽煥 樞機卿은 後날 마치 西部活劇을 보는 것 같았다며, 西部映畫를 보면 銃을 먼저 빼 든 사람이 이기라더라는 말을 새해를 맞아 1980年 正月에 人事를 온 전두환 司令官의 面前에서 傳했다. [46]
  • 탄허 스님은 平素 鄭昇華 陸軍參謀總長과 因緣이 있었는데, 西氷庫紛失에 强制 連行된 정승화 陸軍參謀總長이 스님께서 講說한 華嚴經 을 보내달라 한다고 側近이 訪問하니 “그 사람은 내 冊을 읽을 資格이 없소. 나와 한 約束을 어찌하여 지키지 못했느냐고 묻더라고 傳하시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47] 이때 두 사람이 한 具體的인 約束이 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탄허 스님은 이런 쿠데타 狀況을 憂慮했던 것으로 보인다.
  • 조갑제 前 조선일보 記者는 1空輸旅團의 서울 進入이 12·12 軍事 叛亂에서 勝負를 最終的으로 결정지었다고 發表했다. [48] 하지만 그는 1空輸旅團長이 이미 장태완 首警司令官에 依해서 射殺 命令이 내려졌다는 것은 言及하지 않았다.
  • 임기상 CBS노컷뉴스 記者는 鎭壓하러 出動했다가 回軍한 第9空輸旅團이 12·12 쿠데타의 分水嶺이라고 報道한다. [49] 機動性이 좋은 9空輸旅團 [48] 이 먼저 陸軍本部에 到着해 防禦態勢를 갖추었을 境遇 쿠데타가 失敗할 可能性이 높았다는 것이다. [49]

肯定的 評價 [ 編輯 ]

  • 허화평 前 大統領 政務首席은 大法院 裁判에서 정승화 陸軍參謀總長의 連行은 問題가 되지 않았기에 不法이 아니었다고 主張했다. 合同本部搜査機關腸은 大統領의 許可가 없어도 自體 判斷에 依해(?) 相對를 連行, 搜査할 수 있다는 主張이다. 그 外 大規模 兵力을 動員한 것은 처음부터 計劃的으로 動員한 것이 아니라 장태완 將軍이 우리를 攻擊하기 위해 兵力을 動員하자 ‘살기 위해’, 任務 遂行 次元에서 動員한 것이라고 主張했다. 그러면서 5共 主役들은 (叛亂軍으로 規定되어) 勳章, 年金을 몰수당했고, 온갖 受侮와 試鍊을 견뎌야 했으며 이 過程에서 叛亂軍, 鎭壓軍 兩側에서 적지 않은 분들이 世上을 떠났으나, 歷史的 評價까지는 '政治 裁判'의 結果와 같다고 믿을 수는 없으므로 最小限 後날에는 제대로 된 歷史的 技術이 이뤄지리라 確信한다고 自身의 意見을 披瀝하였다. [50] 勿論 現實은 以後에도 軍事叛亂으로 쭉 규정짓고 있다.
  • 신윤희 前 首警司 憲兵團 副團長도 허화평 主張과 비슷한 12.12쿠데타는 軍事叛亂이 아니란 趣旨의 冊을 장태완이 死亡하고 2年이 지난 2012年 出刊해 論難이 되기도 했다. 以後에도 그는 搜査官과 警護官들이 衝突한 것 外에는 別 다른 일이 없었다고(?) 主張했다. 總長을 救出하기 위해 首警司 司令官, 陸軍本部가 對應 措置한 것 때문에 일이 커지고 꼬이기 始作했다고 自身의 意見을 披瀝했다. [28]

論難事項 [ 編輯 ]

  • 1空輸特戰旅團의 最初 出動時間은 언제였는가에 對해서 論難의 餘地가 있다. 장태완, 윤성민 參謀次長은 1空輸特戰旅團이 12日 21時 50分 頃 먼저 出動 [25] 했으며, 이것이 막히자 나중에 행주大橋를 건너서 陸軍本部로 進軍했다고 主張하고 있으며, 大部分의 12.12 事態에 對한 鎭壓軍 側의 文獻을 이러한 立場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陸軍本部에서 그렇게 判斷했다는 것은 事實이다. 하지만 1空輸特戰旅團이 陸軍本部를 向해 出動한 것은 公式的으로는 13日 0時가 지나서이다. 이러한 誤報는 12.12 狀況에서 매우 重要한 影響을 미치는데, 1空輸가 陸軍本部를 向해서 出動했다고 判斷했기 때문에 陸軍本部는 9空輸特戰旅團의 出動을 命令 [25] 하고, 陸軍本部 指揮部는 首警司로 移動하고 노재현 國防部長官은 監聽이 되지 않는 美軍 領內로 移動한다 [25] . 또한 後에 장태완은 1空輸特戰旅團이 먼저 進擊했다는 事實을 바탕으로 30段에 對한 攻擊命令을 내렸고, 이 攻擊命令에는 事實上 1空輸 指揮官에 對한 射殺 命令이 包含되어 있었다 [18] . 박희도는 自身이 射殺 對象者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며 [16] 그가 景福宮에서 1空輸特戰旅團으로 復歸할 때 그는 陸軍本部側이 反逆者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16] . 또한 1994年 2月 22日 이기룡의 陳述에 依하면 이 射殺 命令으로 인하여 1空輸旅團의 附與丹粧人 이기룡은 第2한강교에서 逮捕되어 있었으며, 抗議할 境遇 射殺될 危險이 있었다 [20] .
  • 쿠데타 鎭壓과 大全鰒作戰의 差異, 合搜部側과 陸軍本部 側에서는 서로 相對方이 反逆者라고 부르고 있다. 陸軍本部는 戒嚴司令官은 大統領의 裁可 없이 連行한 것이 쿠데타라고 말하는 反面, 合搜部는 調査를 위해서 連行한 것은 不可避하며, 最小限 쿠데타는 아니라고 主張한다. 또한 以後 장태완의 攻擊命令에 對해서도 장태완은 먼저 合搜部側에서 1空輸旅團을 출동시켰다고 하지만, 反對로 合搜部 側에서는 그런 일이 없으며, 이것은 誤報였으며, 오히려 陸軍本部가 먼저 30段을 攻擊하려는 命令을 내렸고, 30段 攻擊 命令은 大統領의 許可가 必要한 事項인데 이것을 要求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反逆者라고 主張한다. 陸軍本部의 主張의 根據는 1空輸特戰旅團의 出動이 먼저라는 것인데 이는 陸軍本部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點은 事實이지만, 實際로는 22:00 頃에는 1空輸特典旅團은 出動한 記錄이 없다. 1空輸特戰旅團의 出動이 13日 0:00時 以後라고 한다면, 먼저 攻擊 命令을 내린 것은 首都警備司令官 장태완으로 보인다. 그는 自身의 肉筆手記에서 12日 10:50分에 首警司 將校 450名 中 殘留한 60名에게 "逆謀者들을 逮捕 射殺하라고"명령했다고 敍述했다 [18] . 뿐만 아니라 實際 出動時間은 늦지만, 陸軍本部에 依해서 9空輸旅團의 出動 命令이 내려진 것은 21:50分 1空輸가 出動했다는 誤報가 알려진 直後이다 [24] .
  • 陸軍本部 側은 大統領과 通話를 試圖했는가? : 윤성민 參謀次長은 최규하 大統領에게 電話를 하려고 했으나 최광수 祕書室長이 狀況이 如意치 않다고 끊었다고 主張했으나, 최광수 祕書室長은 윤성민 參謀次長과 直接 對話한 적이 없다고 法廷에서 陳述 [51] 했으며, 이어서 윤성민 參謀次長은 大統領과 對話가 되지 않아서 신현확 國務總理와 通話했으며, 신현확은 "被害없이 智慧롭게 收拾"하라고 했다고 主張 [25] 했지만, 신현확 國務總理는 自身은 윤성민 參謀次長과 通話한 적이 없으며, 萬若에 通話했다면 옆에 있는 大統領을 바꿔주었을 것이라고 陳述 [52] 하였다. 최광수와 신현확의 陳述을 볼 때, 윤성민 參謀次長은 大統領과 國務總理와 通話를 試圖하지 않았을 可能性이 오히려 높다. 뿐만 아니라 최광수와 신현확의 陳述을 보면, 當時 陸軍本部와 通話를 合搜部側에서 遮斷한 痕跡이 全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장태완의 30段 攻擊 命令이 大統領의 裁可를 받지 않고 大統領의 經費部隊를 攻擊한 것이 反逆이라는 전두환 合搜部側의 主張과 一致한다.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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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12·12 事態,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나? | YES24 文化웹진 채널예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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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이, 相互 (2023年 11月28日). “12·12에 對한 映畫와는 다른 角度의 ‘記憶’” . 《펜엔마이크》 . 2024年 2月 6日에 確認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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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 銃口 뺨에 닿인채 끌려갔다" 鄭昇華 前육참總長이 말하는 「12·12事態」” . 中央日報. 1987年 11月 1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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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2) "「슈퍼살롱」을 찾아라" 緊急命令” . 中央日報. 1987年 11月 14日.  
  10. http://www.nocutnews.co.kr/news/1148681
  11. ““軍에 法을 無視하는 汚點 남겨”” . 시사저널. 1990年 1月 21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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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정승화氏 12.12關聯 證言要地>...(1)” . 韓國經濟. 1993年 6月 26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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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드러난 12.12事態 眞相-檢察이 밝힌 全貌” . 1994年 10月 29日 . 2024年 2月 9日에 確認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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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촛불集會 鎭壓 兵力, '12.12 軍士쿠데타' 部隊와 똑같았다.” . 아이엠피터뉴스. 2018年 7月 9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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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相關·部下를 쏴죽여라" 命令한 장태완 / 신윤희 當時 首警司 憲兵副團長 出演 [第5共和國 歷史의 證言]》 . 펜앤드마이크TV. 2021年 12月 3日.  
  29. (12.12 軍事 叛亂 以後) 全斗煥 이 쪽紙를 보여주었는데, 거기에 「陸軍參謀總長 이희성 」이라고 적혀 있기에 不快해서, '누구 마음대로 總長을 임명하느냐'고 火를 내었더니, 유학성 이 제 손을 잡아끌고 다른 房으로 데리고 가 「이 難局을 收拾할 사람은 當身밖에 없으니 總長을 맡아 달라」고 懇請하여 맡았다.
     
    — 이희성 (1924年), 이희성
  30. 美, 12.12 當時 北 軍事行動 可能性 `50%' 判斷
  31. "美 12.12直後 新軍部에 不滿..보름뒤 默認"(綜合)
  32. “[어떻게 지내십니까?] 張泰玩 前 首都警備司令官” . 월간조선. 2010年 1月.  
  33. “[10·26 40周年]① 宮井洞의 銃소리…엇갈리는 評價” . 每日經濟. 2019年 10月 25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4. 이계성 (1993). 《지는 別 뜨는 별: 靑瓦臺 實錄》. 한국문원. 280쪽.  
  35. 이계성. 《지는 別 뜨는 별: 靑瓦臺 實錄》. 296쪽. 12·12 軍事 叛亂 直後 保安司에 잡혀가 調査를 받고 나왔던 한 豫備役 將星의 말이다. "내가 保安司에 붙잡혀 들어가자 집사람이 생각다못해 전두환 將軍의 夫人 이순자氏를 찾아갔다고 한다. 집사람은 이氏와 아우 兄님 하면서 잘 지내온 사이였다. 집사람이 '어떻게 男便을 살릴 수 없겠느냐'고 事情을 하자, 李氏는 '우리 形便도 마찬가지다. 美國이 認定을 안해줘 男便의 일이 失敗해서 卒倒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當時 前將軍은 위컴 司令官이 12·12 擧事를 認定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떤 人事를 통해 分明히 傳해오자 크게 傷心했다는 말을 나도 나중에 들은 적이 있다."  
  36. 一名 장충체육관選擧, 韓國 現代史의 恥辱 中 하나
  37. “悲運의 將軍 장태완 '當身은 正말 떳떳한가? ' . 충청일보. 2017年 3月 25日.  
  38. 戰爭과 獨裁에 울고 革命·올림픽에 웃다
  39. 憲裁 1995.01.20, 94헌마246, 判例集 第7卷 1輯 , 15
  40. “靑瓦臺 탱크 進擊命令 내린 漫醉 司令官” . 2012年 1月 17日 . 2024年 2月 9日에 確認함 .  
  41. “[大韓民國지키기불교도총연합] 12. 12 事件은 쿠데타도, 軍事叛亂度 아니다” . 2024年 2月 9日에 確認함 .  
  42. 國防部 過去事眞相糾明委員會 第3號 報告書 5페이지
  43. “최규하 “總裁님, 어젯밤 죽을뻔 했시유” … 上氣된 목소리로 JP에게 하소연했다” . 中央日報. 2015年 9月 4日. 2022年 10月 16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22年 10月 24日에 確認함 .  
  44. “[어떻게 지내십니까?] 張泰玩 前 首都警備司令官” . 월간조선. 2010年 1月.  
  45.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시즌2 1回 "1979 서울占領 : 運命의 레이스" SBS 2021-03-11
  46. “[塹城壇]"서로 사랑하세요 " . 경인일보. 2019年 2月 15日.  
  47. “[왜냐면] 己未年, 탄허 큰스님과 鄭昇和 / 元行 스님” . 한겨레. 2012年 12月 10日.  
  48. “空輸 1旅團, 漢江을 건너다!” . 조갑제닷컴. 2016年 6月 28日.  
  49. “12.12 쿠데타의 分水嶺 "9空輸旅團의 回軍 " . 노컷뉴스. 2013年 8月 19日.  
  50. “털어놓고 하는 이야기 - 허화평 前 大統領 政務首席 (上)” . 월간조선. 2012年 3月.  
  51. “12.12 5.18事件 18次公判 地上中繼” . 2024年 2月 9日에 確認함 .  
  52. “전남대학교 5·18硏究所” . 2024年 2月 9日에 確認함 .  

參考 文獻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