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韓國 록 代父’의 音樂 人生 60年|新東亞

이 時代의 名將

‘韓國 록 代父’의 音樂 人生 60年

왜 只今 다시 ‘신중현’인가

  • 入力 2018-06-27 17:00:01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6月 15日부터 7月 22日까지 종로구에 있는 弘益大學校 大學路아트센터 大劇場에서 신중현의 音樂으로 만든 創作 뮤지컬 ‘美人’이 公演 中이다. 그의 音樂 人生 60年을 記念하는 公演이다. ‘왜 只今 다시 신중현’인지, 그의 音樂的 成果를 되짚어보았다.
    美國 매사추세츠주 보스턴에는 大衆音樂 大學에 關한 限 가장 有名하고 威勢 堂堂한 버클리 音樂大學이 있다. 韓國에서도 많은 大衆音樂 志望生이 世界的 音樂家를 꿈꾸며 이곳으로 留學을 간다. 現在 보스턴 音大 總長인 로저 브라운은 2017年에 韓國 出身 在學生들의 氣를 살려주고 未來의 留學生을 더 많이 誘致하기 위해 아이디어를 냈다. 韓國에서 가장 名望 높고, 歷史的 認定을 받는 音樂家를 選定해 名譽博士學位를 주자는 것이었다.
     
    버클리 史上 最初로 韓國人 音樂家에게 授與하는 名譽博士學位人 까닭에 總長을 비롯한 關係者들은 오랜 時間을 들여 韓國의 여러 뮤지션의 身上과 履歷을 把握했다. 그들의 選擇은 ‘韓國 록(Korean rock)’의 始作인 신중현이었다. 브라운 總長은 人選을 마친 뒤 바로 韓國으로 날아와 신중현의 居住地인 京畿 陽地를 찾았다. 賞을 밝히는 體質이 아님에도 신중현은 버클리 音大의 認定과 努力에 感化해 美國行을 決心했다.

    버클리 音大 史上 最初 韓國音樂家 名譽博士學位

    美國 音樂界가 신중현을 注目한 건 이番이 처음은 아니다. 2009年 일렉트릭 기타의 名家(名家)인 펜더社(社)로부터 ‘기타 演奏 發展史에 寄與’했다는 名目으로 맞춤型 기타를 憲政받기도 했다. 펜더가 기타를 만들어 바친 사람은 그때까지 여섯 名이었고 아시아에서는 신중현이 最初였다. 버클리 音大의 名譽博士學位는 其他 演奏를 넘어 音樂 自體에 對한 評價였기에 신중현은 ‘音樂 하는 사람한테는 靈光’이라며 기뻐했다. “賞을 받을 줄 想像하지 못했다. 正確한 表現일지는 모르지만 밥 딜런이 노벨文學賞을 받은 氣分이 이런 게 아닐까 생각한다.” 

    卒業式 現場에서 브라운 總長의 祝辭는 韓國 留學生들과 家族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그리고 그 祝辭엔 보스턴 音大가 신중현에게 名譽博士學位를 授與하는 理由와 신중현의 存在感을 注目한 理由가 고스란히 담겼다. 브라운 總長은 펜더社 製品戰略가 리처드 맥도널드의 말을 빌려 신중현을 ‘絶對的 音樂 傳說’이자 ‘끊임없이 發展하는 아티스트’라고 稱頌했다. 하지만 重要한 것은 그다음 말이었다. “1970年代 韓國 政府의 壓迫에 屈하지 않고 自身의 뜻을 堅持한 反體制(anti-establishment)的 態度가 더욱 그의 位相을 드높였다.” 

    버클리 音大는 政府와 旣存 秩序에 對한 그 反抗的 面貌를 로큰롤의 社會的 價値라는 脈絡에서 높게 評價한 것이었다. 우리 音樂史에서 신중현이 갖는 位相 또한 바로 여기에 基盤을 둔다. ‘韓國 록의 代父’라는 修飾이 말해준다. 分明 신중현은 트로트와 美國産(産) 재즈風 노래 一色인 가요 판에서 록밴드 애드포(Add4)를 結成해 韓國 록의 黎明期를 主導했고, ‘빗속의 女人’ ‘아름다운 江山’ ‘美人’ 等 紀念碑的인 로큰롤 歌謠를 만들었다.

    ‘괘씸罪’의 덫

    2017년 5월 한국 뮤지션으로는 최초로 신중현이 버클리 음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임진모 제공]

    2017年 5月 韓國 뮤지션으로는 最初로 신중현이 버클리 音大에서 名譽博士學位를 받았다. [임진모 提供]

    버클리 名譽博士學位 授與를 하루 앞둔 祝賀 公演에 直接 出演한 신중현은 有名한 스탠더드 ‘가을落葉(Autumn leaves)’을 기타로 연주해 들려줬다. 그만의 色깔을 살린 이 演奏는 霎時間에 所聞이 퍼져 다음 날 보스턴 거리에서 만난 많은 美國人이 ‘대단한 演奏를 들려줘 靈光’이라는 讚辭를 건네기도 했다. 신중현은 “前에 美國 公演 왔을 때도 느낀 바지만 그들은 音樂을, 特히 演奏를 들을 줄 안다”고 말했다. 



    1950年代 엘비스 프레슬리와 1960年代 비틀스 以來로 靑春의 主要 文法이 된 로큰롤은 但只 그러한 藝術的 테두리 안에 머물지 않는다. 좋은 演奏와 빼어난 曲 構成, 大衆性만이 全部는 아니다. 록은 特定 時代를 사는 젊은 世代의 欲望과 社會的 視線과 聯關돼 있다. 따라서 本質的으로 旣成社會의 價値 一般과 衝突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록의 抵抗性이라는 키워드가 빚어진다. 다시 말해 신중현은 록의 두 軸이라고 할 ‘藝術性’과 ‘抵抗性’의 完璧한 實現이라는 點에서 우리 록의 代父로 불리는 것은 勿論, 펜더의 기타 憲政과 버클리 音大의 名譽博士 授與가 말해주듯 海外에서도 崇仰을 받는 것이다. 

    신중현은 1960~70年代 朴正熙 軍事政府 時節에 音樂的 全盛期를 맞았다. 애드포, 덩키스, ‘신중현과 더 멘’ 等 自身이 이끈 밴드 活動으로도 一家를 이뤘지만 이정화를 始作으로 펄시스터즈, 김추자, 박인수, 長峴, 김정미로 이어지는 歌手들을 訓鍊하고 曲을 써주는 作曲家 프로듀서로도 時節을 風靡했다. 그 무렵 신중현의 音樂性과 大衆的 人氣는 他의 追從을 不許했다. 

    當代를 號令하던 그의 行步가 꺾인 것은 1972年에 靑瓦臺에서 걸려온 電話 한 通 때문이었다. 朴正熙 大統領의 새로운 統治 卽 維新을 肯定的으로 다룬 노래를 만들어달라, 말하자면 ‘朴正熙 讚歌’를 불러달라는 注文이었다. 그는 이 要請을 鄭重하게 拒絶했다. 以後 ‘괘씸罪’의 덫에 걸려들었다. “그때부터 일이 꼬이기 始作했다!”고 述懷했다. 公演 때마다 警察 團束이 이어졌다.

    韓國 土種의 냄새가 물씬

    명예박사학위 수여 기념식에서 신중현이 미국의 팝 가수 라이오넬 리치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임진모 제공]

    名譽博士學位 授與 記念式에서 신중현이 美國의 팝 歌手 라이오넬 리치와 記念撮影을 하고 있다. [임진모 提供]

    憤怒한 신중현은 獨裁者에게 바치는 노래가 아닌 우리나라의 江山과 國民을 위한 노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노래가 신중현과 더 멘의 ‘아름다운 江山’이었다. 텔레비전에 나와 라이브를 했을 때 보컬 박광수는 削髮을 했고 멤버들 모두 귀 周邊에 머리핀을 꽂아 긴 머리를 걷어 올려 長髮을 浮刻했다. 신중현은 그때를 回想하며 “한마디로 維新體制의 强壓에 對한 不滿을 表示한 것”이라고 說明했다. 버클리 音大의 總長이 祝辭에서 言及한 ‘反體制’ 用語는 바로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신중현에 對한 監視가 强化되는 가운데 1975年에는 가요 歷史上 最大의 悲劇으로 記錄된 大麻草波動이 터진다. 當代 人氣 포크와 로큰롤 歌手 27名이 拘束되고 9名이 立件되었다. 猝地에 大麻草 供給線으로 엮인 신중현은 ‘大麻草 王초’ ‘大麻草 首魁’ 딱紙가 붙었다. 그와 그가 들려준 록은 ‘不穩과 頹廢’로 直結되었고 그것으로 그의 音樂 生命은 끝이 났다. 1980年代 들어 活動을 再開했지만 리즈 時節이 훌쩍 지나면서 大衆的 歡待는 全혀 얻지 못했다. 신중현은 只今도 “大麻草事件은 나뿐만 아니라 그 以前까지 길을 잘 닦아온 우리 全體 音樂의 水準과 氣(氣)를 單숨에 꺾어버렸다”며 激怒의 感情을 거두지 않는다. 

    신중현 音樂의 創意性, 卓越한 純度(純度)와 密度는 只今 基準에서도 變함이 없다. 버클리 音大 在學生들은 신중현에 對한 名譽博士學位 授與式이 있던 卒業式 콘서트에서 신중현 作品인 ‘즐거워’와 김정미에게 준 曲 ‘바람’과 ‘봄’을 연주해 敬意를 표했다. 이 曲들 가운데 ‘신중현과 歲 나그네’ 時節에 만든 ‘즐거워’는 우리에겐 덜 알려진 曲이지만 衝擊 그 自體였다. 現場에 있던 國內 關係者들과 外國 觀客들까지 왜 그를 가리켜 ‘韓國 록의 代父’로 떠받드는지 卽刻 共感하는 瞬間이었다. 

    일렉트릭 기타로 연주한 西歐의 ‘록’ 스타일이 明白함에도, 거기에는 西歐의 느낌이 아닌, 韓國 土種의 냄새가 물씬했다. 보스턴에서 들으니 눈물이 날 만큼 韓國的이었다. 生硬한 西歐의 록을 우리만의 呼吸과 숨결로 創造해 提供했다는 것, 그것은 以前과 分離線을 치는 革新的 偉業이었다. 外國의 文物이 물밀 듯 들어오는 狀況에서, 眞正한 藝術家의 任務가 그것을 創意的으로 再加工해 우리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면, 신중현은 그 으뜸 人物이었던 셈이다. 

    이 偉業을 볼 수 있는 代表的인 노래가 1974年 韓半島 南쪽 全體를 들썩거리게 한 問題作 ‘美人’이었다. 한 言論은 이 曲이 센세이션을 몰고 오자 ‘三千萬의 가요’라고 描寫했다. 音樂關係者와 大衆 모두가 大衆歌謠史上 最高의 作品으로 꼽는 이 曲을 두고 신중현은 當時 ‘野心’을 가지고 만들었다고 밝혔다. 그 野心은 다름 아닌 가장 韓國的인 록을 鑄造해낸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西洋 리듬이 아닌 우리 固有의 장단과 가락을 녹여냈고 五音階로 曲을 썼다. 무엇보다 기타 리프를 伽倻琴이나 거문고를 켜는 方式으로 연주했다. 韓國人이라는 認識 아래 傳統의 內在的 價値를 信賴하기에 나온 結實이 아닐 수 없었다. 明白한 록이지만 ‘韓國的’인 맛이 가득했다. 또한 리프를 그렇게 前面에 내세운 것도 事實上 처음이었다.

    우리 固有의 장단과 가락을 녹여낸 ‘美人’

    歌手 金秀哲은 “後代의 모든 기타리스트 志望生에게 기타를 잡도록 刺戟한 紀念碑的 曲”이라고 定義했다. 아들이자 1980年代 後半 國內 最初로 헤비메탈을 實驗한 신대철은 “그 누구에게 單 5音階만으로 이렇게 멋진 曲을 써보라고 해보시라”며 100年 後에는 ‘아리랑’과 같은 班列에 오를 曲이라고 했다. 

    2011年 初盤 신중현이 ‘美人’을 기타로 연주하는 場面을 담은 텔레비전 廣告가 放映되었다. 이 CF에서 曲은 아이들을 위한 動搖로, 어르신들을 위한 판소리로, 世界的인 록 오페라로 다양하게 編曲되어 불렸다. 비록 廣告이긴 했지만 다시금 ‘美人’이 어떤 스타일로 만들어도 결이 나오는 不朽의 名作, 世紀的 酬酌임을 確認해 주었다. 신중현이 만든 노래 23曲이 나오는, 막 開幕한 創作 뮤지컬의 題目도 ‘美人’이다. 

    록이 標榜하는 精神, 그 抵抗性을 ‘록 스피릿’이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는 가장 完璧한 록의 삶을 산 人物인지도 모른다. 그의 音樂 人生 키워드는 革新과 挑戰이었다. 國內 環境에서 可當치 않게 1964年에 록 밴드인 애드포를 結成한 것도 그렇지만 첫 앨범에 收錄된 ‘빗속의 女人’을 들어보면 當代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火星으로 써낸 曲이라는 點에서 경이롭다. 이미자의 ‘섬마을先生님’, 南進의 ‘가슴 아프게’, 나훈아의 ‘물레방아 도는데’보다 時期的으로 各各 2年, 3年, 8年 앞섰음을 前提하면 너무도 놀랍다. ‘當身은 어느 별에서 오신 겁니까?’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이러니 그 무렵에 活動하던 歌手들이 몰릴 수밖에 없다. 曲을 써달라는 涉外가 暴發했다. 펄시스터즈(‘님아’), 김추자(‘越南에서 돌아온 金上士’ ‘님은 먼 곳에’), 박인수(‘봄비’), 長峴(‘未練’), 김정미(‘봄’) 等 無數한 歌手가 그의 曲으로 스타덤에 올랐다. ‘신중현社團’이란 修飾이 言論에 登場했다. 國內에서 音樂家 個人에게 師團이란 表現이 大衆的으로 動員된 것 또한 신중현이 始作이었다.

    創作 뮤지컬 ‘美人’

    그의 革新과 挑戰에 音樂 스타일이 빠질 理 없다. 그가 가요 歷史에 빛나는 名曲을 줄줄이 生産해낸 것 外에 여러 새로운 장르를 實驗한 것이다. 正統 로큰롤뿐 아니라 當代 西歐의 트렌드인 사이키델릭 록을 試圖했고 ‘봄비’와 ‘님은 먼 곳에’가 말해주듯 當代 黑人音樂인 소울(soul)을 紹介했다. 따라서 그를 록의 프레임만으로 規定한다면 지나치게 制限的이라고 본다. 요샛말로 ‘文化多樣性’을 實踐한 人物이라고 할까. 

    그와 어울리지 않을 듯한 재즈 또한 關係가 깊다. 韓國 재즈의 傳說인 故 정성조는 “신중현을 論할 때 록 以前에 재즈를 먼저 얘기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신중현 本人도 “재즈 感性은 如前하며 어쩌면 나는 재즈에서 록으로 轉向한 케이스”라고 認定한다. 그는 實際로 재즈風의 曲을 相當數 썼다. 그래서 그를 록의 大夫가 아니라 ‘韓國 大衆音樂의 先覺者’로 일컫는 게 더 穩當한 技術이라고 본다. 

    이와 關聯 신중현은 이런 말을 했다. “音樂은 장르를 가리지 말고 모두 듣는 것이 좋다. 音樂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듣는 것 外에 달리 方法이 없다. 나는 록은 勿論 재즈, 클래식, 우리 國樂, 甚至於 트로트도 좋아했다.” 

    6月 15日 開幕한 創作 뮤지컬 ‘美人’은 신중현이 써낸 히트 曲 23曲을 엮은 이른바 주크박스 뮤지컬이다. 여기 노래를 들으면 그가 實驗한 多彩롭고 廣大한 장르 팔레트를 確認할 수 있을 것이다. 뮤지컬 ‘美人’에 出演한 俳優 김지철은 이렇게 말했다. “率直히 제 世代는 아니어서 잘 몰랐는데 대단한 것 같아요. 只今 들어도 全혀 촌스럽지 않고 歌詞 하나하나 느낌이 다 달라요. 보면 볼수록 漸漸 尊敬心이 듭니다.” 

    그를 向한 同僚와 後輩들의 尊敬은 끝이 없다. 1970年代와 1980年代를 貫通한 國內 音樂家 大部分이 ‘影響을 준 音樂과 音樂家가 누구인가’ 하는 質問에 비틀스와 같은 팝歌手 外에 어김없이 신중현을 꼽는다. 李長熙는 “남들도 다 좋아한 엘비스 프레슬리, 비틀스에 熱狂했지만 國內로 하면 無條件 신중현 先生”이라고 했다. ‘松鶻매’ 出身 배철수는 신중현을 ‘우리 大衆音樂의 先覺者’로 定義하면서 이렇게 吐露한다. 

    “中·高校 때는 主流 音樂界가 成人歌謠 一邊倒여서 率直히 내 立場에서는 들을 게 없었다. 1972年 ‘신중현과 더 맨’의 ‘아름다운 江山’은 나로 하여금 ‘韓國에도 이런 音樂이 있나!’ 하는 衝擊의 회오리를 불렀다. 音樂의 構成을 비롯한 모든 게 從來의 歌謠와는 完全히 달랐다. 1974年 ‘신중현과 葉錢들’의 ‘美人’도 마찬가지였다. ‘美人’의 成功을 보면서 ‘韓國에서 록을 한다면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하는 靈感을 받았다.”

    록은 永遠한 音樂文法

    신중현이 後代로부터 얻는 尊敬과 崇拜는 徹底히 音樂에 기초한다. 話題性이나 비주얼 또는 成功 公式에 對한 奉仕와는 距離가 멀다. 오로지 只今 基準에서도 높은 水準의 曲들을 써냈다는 點과 實驗의 姿勢로 一貫했다는 事實에 依據한다. 거기에 音樂家로서 지켜야 할 非妥協的 姿勢와 自由를 向한 江골의 所有者라는 點을 더하면 完璧하다. 只今도 록에 對한 信念은 確固하다. 

    “록은 世界가 만날 수 있는 장르로 자리 잡았다. 決코 흘러가는 하나의 流行이 아니라 永遠한 音樂文法이다. 나의 境遇도 우리 情緖를 록에다 얹어 우리의 장단과 興을 世界에 알리고자 하는 目標로 살았다. 록은 ‘리얼’이고 ‘라이브’가 中心이 된다. 只今 流行의 大勢가 힙합과 電子댄스音樂(EDM)이란 것을 안다. 時代에 따라 歡迎받는 스타일이 있게 마련이고 또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록은 흔들리지 않는다.” 

    신중현은 흔들리지 않는다. 專門的으로 말하자면 音樂人다움(musicianship)과 音樂的 態度(musical attitude)를 共히 完成한 人物이다. 그는 强調한다. “結局 純粹함이 이긴다. 音樂家는 音樂 志向, 돈, 名譽와 關聯해서 純粹해야 한다. 大衆도 結局에는 純粹한 것을 사랑하고 認定한다.” 

    多數의 傑作을 만들었으되 그의 音樂은 돈과 人氣가 아닌 自由를 품었다. 藝術性과 社會性의 結合일 수도 있다. 우리와 우리 歷史가 이런 높이와 크기의 뮤지션을 가졌다는 것은 多幸이며 祝福이다.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