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世界는 왜 金煥基에 注目하는가|신동아

Art

世界는 왜 金煥基에 注目하는가

마크 로스코의 뉴욕에 金煥基 또한 있었다

  • 入力 2018-06-24 09:00:01

  • 글字크기 설정 닫기
    • 韓國 近現代美術 最高價 ‘붉은 點火’의 神話

    • 李仲燮, 朴壽根에게는 없는 金煥基의 ‘普遍性’

    • 點 하나 찍는 行爲에 意味, 잭슨 폴록 一脈相通

    • “그림 價格은 곧 國格”

    5월 27일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한국 근현대미술 경매 최고가(85억3000만 원)에 낙찰된 김환기의 ‘붉은 점화’(3-11-72 #220, 254x202cm, 1972) (오른쪽)

    5月 27日 서울옥션 홍콩 競賣에서 韓國 近現代美術 競賣 最高價(85億3000萬 원)에 落札된 金煥基의 ‘붉은 點火’(3-11-72 #220, 254x202cm, 1972) (오른쪽)

    金煥基의 ‘붉은 點火’(3-11-72 #220, 254×202cm, 1972)가 5月 27日 서울옥션 홍콩 競賣에서 85億3000萬 원에 落札됐다. 韓國 近現代美術 競賣 最高價格이다. 韓國 近現代美術 競賣價格 톱 10에는 金煥基 作品이 8點 들어 있다. 以外에는 李仲燮의 ‘소’가 47億 원으로 6位, 朴壽根의 ‘빨래터’가 45億 2500萬 원으로 8位에 랭크돼 있다.
     
    美術에서 價格과 順位는 意味가 크다. 資本主義 社會에서 價格은 市場의 需要와 供給에 依해 決定된다. 需要와 供給에 影響을 미치는 要因은 作品이나 作家에 對한 藝術的 評價, 時代精神, 트렌드, 國民 情緖, 經濟 狀況 等 作品과 關聯된 모든 것이다. 作家나 作品에 對한 當代의 評價가 어떠했느냐는 指標를 單 하나만 提示하라면 價格이 될 수밖에 없다. 價格은 資本主義 病弊를 避할 수 없고, 또 唯一한 基準이 될 순 없지만, 그래도 가장 믿을 만한 基準임은 否認할 수 없다.

    金煥基가 獨占한 ‘Top 10’

    전면점화를 그리고 있는 김환기 화백의 생전 모습.

    全面點畫를 그리고 있는 金煥基 畫伯의 生前 모습.

    金煥基(1913~1974), 李仲燮(1916~1956), 朴壽根(1914~1965). 세 사람은 作品 價格이 말해주듯 韓國人이 가장 사랑하는 作家다. 이들은 같은 時期에 태어나 日帝强占期와 6·25戰爭을 겪으며 굴곡진 삶을 살았다. 같은 時代를 살되, 삶의 무늬는 저마다 달랐으며, 이는 그대로 作品에 反映됐다. 셋은 모두 우리 固有의 情緖를 自身만의 獨特한 造形 言語로 表現하는 데 成功했다. 

    平安南道 平原의 有福한 집에서 태어난 李仲燮은 烏山高等普通學校를 卒業하고 東京으로 건너가 분카학원(文化學院) 美術科에서 工夫했다. 日帝强占期, 餘裕 있는 집안 美術志望生들의 발길은 大部分 日本으로 向했다. 李仲燮은 거기서 마사코(山本方子·後에 이남덕으로 改名)를 만나 解放되던 해에 結婚, 元山에 定着했다. 

    6·25戰爭 勃發로 두 사람은 두 아들을 데리고 釜山, 濟州島 西歸浦로 避難했다. 그러나 生活苦를 견딜 수 없었던 李仲燮은 이남덕과 두 아들을 日本으로 보내고 韓國에 남아 釜山, 統營 等地를 떠돌며 홀로 지낸다. 以後 李仲燮은 家族에 對한 切切한 사랑과 그리움을 執拗하게 그렸다. 그는 1953年 日本으로 건너가 一週日쯤 家族을 만나고 돌아와서는 끝내 再會하지 못하고, 1956年 41歲에 적십자병원에서 身元未詳의 行旅病者로 죽었다. 死因은 營養失調. 末年에는 精神病 症勢를 보였다. 

    李仲燮은 家族에 對한 그림 外에 소를 많이 그렸다. 憤怒, 熱情, 狂氣에 가득 찬 그의 소는 當時의 우리 民族을 象徵한다는 評價를 받는다. 李仲燮뿐만 아니라 當時 韓國의 畫家 多數가 소를 그렸다. 그의 作品은 鄕土的이고 自傳的이다. 그의 悲劇的 生涯는 숱한 文學, 映畫, 演劇 作品의 素材가 돼 傳說처럼 傳해진다. 



    江原道 楊口의 가난한 집 胎生인 朴壽根은 初等學校밖에 나오지 못했다. 制度圈 美術敎育을 받지 못하고 밀레처럼 오로지 훌륭한 畫家가 되고 싶다는 熱情 하나로 獨學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 때문에 그에게는 ‘그래서 基本이 안 된 畫家’ ‘그림을 못 그리는 畫家’라는 汚名이 따라다녔다. 오늘날 國民畫家로 불리는 朴壽根은, ‘基本이 안 된’ 그림으로 大韓民國美術展覽會(國展)에서도 여러 番 떨어져 絶望했다. 學歷이 微賤한 그에게 國展은 唯一한 登龍門이자 살길이었다.

    이 일로 朴壽根은 暴飮하는 버릇이 생겼다고 한다. 結局 健康을 해쳐 52歲로 短命했다. 우리나라 西洋畫 導入期에 다른 畫家들이 印象主義, 表現主義, 立體主義, 超現實主義니 하는 西洋 그림을 배우며 비슷비슷한 그림을 그릴 때, 朴壽根이 아는 것은 初等學校 敎科書에 나오는 밀레 그림이 全部였다. 

    이러한 그의 無知가 오히려 世界 어디에도 類例가 없는 그만의 造形 語法을 可能케 했다. 그가 그린 그림의 質感은 우리나라에 가장 흔한 花崗巖을 닮았다. 그는 主로 自己 周邊의 善한 사람들, 흔한 風景을 그렸다. 그림을 그것에 담기는 精神이나 情緖와 그것을 담는 그릇(表現 樣式)으로 區分해 본다면, 朴壽根은 內容에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릇을 만들었다. 國民畫家는 우리 國民의 愛情이 듬뿍 담긴,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愛稱이다. 當時 마거릿 밀러 같은 西洋人들이 그의 그림에 熱狂한 것은 世上 어디서도 볼 수 없는 朴壽根의 獨創性 때문이었다.
     
    全羅南道 新安郡 安佐島의 富者집에서 태어난 金煥基의 藝術 生涯는 크게 네 時期로 나눌 수 있다. 東京留學 時節(20~25歲·6年), 서울대 및 弘益大 敎授 時節(36~44歲·8年), 파리 時節(44~47歲·3年), 뉴욕 時節(50~61歲·11年)이 그것이다. 세 곳의 海外 滯留期間 中 뉴욕 時代가 가장 길었다. 

    東京 留學 詩 그는 日本 抽象美術을 받아들여 幾何學的 抽象을 그렸다. 그러나 1948年 創立展을 연 ‘新寫實派’展(‘神事實’이라는 이름은 金煥基가 直接 지었다) 以後 파리 時節까지 그의 그림은 具體的인 事物을 그린 構想(Figurative) 會話였다. 그가 다룬 對象은 主로 韓國 固有의 傳統文化와 關聯된 器物이거나 韓國의 自然이었다. 

    그는 44歲의 나이에 弘益大學校 學長 자리를 버리고 파리로 留學을 떠난다. 金煥基가 藝術家로서 自身의 理念과 畫家로서 自身의 位置를 苦悶하자, 넓은 世上으로 나가 自身의 모습을 돌아볼 것을 勸한 이는 夫人 김향안이었다고 한다.

    世界 美術 市場 이끄는 ‘뉴욕學派’

    ‘가장 韓國的인 것이 가장 世界的인 것’이라고 말한 그는 韓國의 아름다움을 그렸다. “나는 東洋 사람이고 韓國 사람이다. 내가 아무리 飛躍하고 變貌한다 해도 내 以上의 것은 할 수 없다. 내 그림은 東洋 사람의 그림이요, 韓國 사람의 그림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러한 그의 藝術哲學은 平生 持續된다. 프랑스 留學 後 歸國展에서 최순우가 “佛蘭西 물만 마시고 와도 모두 그림들이 홱 바뀌는데 手話 그림은 조금도 變하지 않아서 나는 좋다”고 하자, “其實은 佛蘭西에 가서 個人展을 갖기 前까지는 그곳 作家들 그림에 물들까봐서 展覽會 구경도 안 다니고 自己를 지키느라 매우 애를 썼다”고 金煥基는 말했다. 

    韓國美를 表現하는 金煥基의 樣式은 뉴욕 時節 크게 바뀐다. 具體的인 對象은 善과 色과 構成으로 抽象化된다. 이것이 絶頂에 이른 作品이 요즘 美術市場에서 最高의 人氣를 謳歌하며 韓國 美術品 價格 記錄을 更新하고 있는 所謂 ‘全面點畫(全面點畵)’다. 

    뉴욕에 이르러 完成된 金煥基의 藝術은 1950年代부터 世界 美術의 中心을 파리에서 뉴욕, 유럽에서 美國으로 옮겨오게 한 美國式 그림(American Style Painting)인 抽象表現主義(Abstract Expressionism)를 言及하지 않고는 說明하기 어렵다. 클리퍼드 스틸(1904~1980), 바넷 뉴먼(1905~1970), 잭슨 폴록(1912), 마크 로스코(1913), 빌렘 드 쿠닝(1926) 等 金煥基와 同時代, 같은 空間에 살면서 뉴욕學派(New York School)를 이끈 作家들은 只今 世界 美術 市場에서 앞다투며 最高價를 更新하고 있다. 

    金煥基가 活動 舞臺를 뉴욕으로 옮긴 것은 오늘날 그의 人氣와 無關하다고 볼 수 없다. 當時 우리나라 畫家 大部分은 衰落해가는 파리를 向했다. 南關, 김흥수, 이성자, 文身, 이응노 等 1950,60年代 代表的 作家들이 그러했다. 金煥基 亦是 일찍이 파리에 滯留했고, 1963年 第7回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韓國 代表로 參加하고 ‘繪畫部門 名譽賞’을 受賞한 일로 뉴욕을 거쳐 다시 파리로 갈 計劃이었다. 그러나 事情이 如意치 않아 그는 뉴욕에 주저앉는다. 그것이 오늘의 金煥基를 있게 했다. 日本, 獨逸을 거쳐 뉴욕에 定着하면서 世界的인 아티스트가 된 백남준 亦是 美國의 負傷(The American Century)과 聯關시키지 않을 수 없다.

    抽象表現과 崇高美

    마크 로스코, 김환기, 잭슨 폴록의 작품(왼쪽부터). 이들은 1960년대 뉴욕에서 활동한 동시대 작가들이다.

    마크 로스코, 金煥基, 잭슨 폴록의 作品(왼쪽부터). 이들은 1960年代 뉴욕에서 活動한 同時代 作家들이다.

    第2次 世界大戰 後 美國은 世界 最高의 强大國이 되었다. 1947年 美國은 全 世界 工産品의 50%, 鐵의 57%, 戰力의 43%, 石油의 62%, 自動車의 80%를 生産하고 原子爆彈을 獨占하는 나라였다. 美國은 美術界에서도 ‘美國의 世紀’를 實現해가고 있었다. 前後 유럽의 컬렉터, 評論家, 畫家들이 ‘希望의 나라’ 美國으로 모여들었다. 美國 政府와 民間은 物心兩面으로 이들에 對한 支援을 아끼지 않았다. 聯邦政府는 FAP(Federal Art Project)로 藝術家들의 生計를 책임졌다. 

    이때 美國으로 亡命 乃至는 移住한 主要 作家들이 페르낭 레제, 피터르 몬드리안,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마크 로스코, 빌렘 드 쿠닝, 아쉴 고르키 等이었다. 1950年代에 30餘 個에 不過하던 뉴욕의 花郞이 1960年代에는 300餘 個로 늘었다. 財閥들은 이들의 作品을 사주고 美術館을 지었고, 政府는 여기에 對한 稅制 惠澤을 아끼지 않았다. 

    經濟와 軍事로 ‘팍스 아메리카나’를 이룩한 美國은 또한 文化로 世界를 支配하고자 했다. 抽象表現主義는 美國이 美術로 世界를 이끈 始發點이었으며, 뒤이어 팝아트 等 20世紀의 모든 美術運動을 만들어냈다. 美術 市場의 中心도 美國이었고, 美術 思潮의 中心도 美國이었다. 

    抽象表現主義 以前 美國은 世界 美術의 主要 흐름에 單 한 番도 寄與한 적이 없는, 파리를 기웃거리는 周邊 國家였다. 冷戰 時代, 共産主義에 對抗하는 自由, 個人主義의 旗手, 巨大한 領土를 가진 超强大國이라는 美國의 正體性을 反映한 抽象表現主義는 個人的 表現을 重視한 만큼 다양한 스타일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들의 作業을 貫通하는 共通分母가 存在한다. 

    抽象表現主義 作家들은 國境과 個別 文化의 特殊性을 뛰어넘는 抽象的 形象을 願했다. 뉴먼은 ‘記憶, 聯想, 鄕愁, 傳說, 神話와 같은 妨害物’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願했고, 로스코는 ‘記憶, 歷史 或은 幾何學’이라는 障礙物을 拒否했다. 스틸은 ‘陳腐한 神話’를 願치 않았다. 素材를 抛棄하려는 集團的 意志는 유럽 文化의 굴레를 벗어나 美國的 經驗과 精神을 바탕으로 美國 固有의 무엇인가를 찾으려는 試圖의 出發點이었다. 金煥基도 뉴욕에 온 後 그의 作品에서 韓國의 器物이나 自然 等 識別 可能한 對象物을 모두 없앴다. 

    抽象表現主義 繪畫의 特徵 中 하나는 巨大한 스케일이다. 敍事的 스케일은 超强大國 美國의 野望과 自負心, 美 大陸의 廣闊한 風景과도 一脈相通한다. 旣存의 繪畫的 特徵인 形象과 歡迎的 空間, 焦點을 버린 그들의 巨大한 올오버 會話(all-over painting)는 自然이자 宇宙 空間이다. 그들의 作品은 ‘崇高美’를 보여준다. 폴록은 “내가 自然이다”라고 宣言했다. 金煥基의 巨大한 全面點畫度 이런 特徵을 지닌다. 自然이자 宇宙다. 그 그림 앞에 서면 觀客은 莊嚴함에 壓倒돼 自身을 잃고 作品의 一部가 된다. 作品과 畫家와 觀客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르네상스 壁畫 以來 이런 스케일의 作品에 挑戰한 作家들은 없었다. 

    바넷 뉴먼이 ‘人間, 英雄的이고 崇高한’(1950~51, 242×542cm)을 展示하면서 “사람들은 큰 그림을 멀리서 구경하는 傾向이 있다. 그러나 이 展示에서 큰 그림들은 가까운 距離에서 觀覽하도록 企劃되었다”는 메모를 붙였다. 로스코度 本人의 巨大한 作品을 제대로 鑑賞할 수 있는 作品-觀覽客 間 距離가 46㎝쯤이라고 했다. 觀覽客에게는 숨 막히는 거리지만, 作家가 作業할 때 손이 미치는 距離다. 로스코는 觀客에게 作家가 되기를 要求했다.

    우리는 金煥基를 理解하고 있는가

    2012년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김환기’ 전(위)과 미국 로스앤젤레스현대미술관(MOCA)에 걸린 마크 로스코의 작품들. 1960년대 뉴욕에서 활동한 두 작가의 작품은 추상표현주의, 거대한 스케일과 그로부터 나오는 숭고미 등의 공통분모를 갖는다.

    2012年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韓國 現代美術의 巨匠-金煥基’ 前(危)과 美國 로스앤젤레스현대미술관(MOCA)에 걸린 마크 로스코의 作品들. 1960年代 뉴욕에서 活動한 두 作家의 作品은 抽象表現主義, 巨大한 스케일과 그로부터 나오는 崇高美 等의 共通分母를 갖는다.

    큰 作品은 요즘의 트렌드와도 符合한다. 새로 생기는 美術館 展示 空間이 巨大해지고 設置美術이 一般化되면서 繪畫도 큰 作品에 對한 需要가 커지고 있다. 抽象表現主義의 한 分派인 色彩(綿)抽象主義(Chromatic Abstraction·바넷 뉴먼, 마크 로스코, 클리퍼드 스틸 等)는 作品에서 붓 자국을 없앰으로써 빛이 發하는 듯한 視覺的 效果를 냈다. 

    이러한 效果로 로스코나 뉴먼의 색면抽象은 靈的이고 신비로운 雰圍氣를 풍긴다. 金煥基의 全面點畫度 從前의 두꺼운 마티에르를 버리고 水墨畫처럼 맑고 透明하게 번져나가는 빛의 技法을 使用한다. 이러한 變化에 對해 그는 “東洋 사람의 體質은 亦是 毛筆이 맞고, 거기서 微妙感이 나오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金煥基는 캔버스 위에 한 點 한 點 찍어나가는 行爲(action) 自體를 重視했다. 파리 時節까지 그는 그림 그리는 行爲에 對해 말한 적이 없다. 抽象表現主義의 한 갈래인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잭슨 폴록, 빌렘 드 쿠닝, 프란츠 클라인 等)은 行爲를 藝術로 본다. 巨大한 캔버스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물감을 뿌려댄 잭슨 폴록에게 그림은 곧 行爲, 過程, 퍼포먼스였다. 액션페인팅은 藝術과 삶을 一致시켰다. 行動(곧 實存)은 ‘實存은 本質에 優先한다’는 實存主義 哲學의 中心이다. 힘이 넘치는 律動感과 生命力은 액션 페인팅의 要諦였으며, 金煥基는 휘몰아치는 듯한 點의 構成을 통해서 이를 確保했다. 

    金煥基 作品 價格의 記錄이 앞으로도 繼續 更新될 것이라고 믿지 않을 理由가 없는 것은, 뉴욕 時節 그가 이룩한 成果가 普遍性과 世界性을 獲得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처럼 美術品의 年間 去來 規模가 다빈치의 ‘살바토르 문디’ 單 한 點 價格(5000億 원)에도 훨씬 못 미치는 零細한 市場을 가진 나라에서, 그리고 自國 藝術에 對한 自矜心이 別로 없는 나라에서, 그래서 自國의 作家 中에서도 外國 사람들이 購入하는 作家들의 作品만 熱心히 따라 사는 나라에서, 固有性만으로 世界的인 作家가 되기는 어렵다. 韓國 精神은 普遍的인 時代精神(Zeitgeist)은 아니다. 

    한 나라 作家의 그림 價格은 그 나라의 經濟力, 그리고 文化에 對한 自矜心에 比例한다. 그림 價格은 곧 그 나라의 국格이다. 어떤 外國 展示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有名한 韓國 作家가 自身의 그림을 展示한 畫廊 主人에게 “韓國 사람들은 내 作品을 잘 理解하지 못한다. 그러니 韓國 사람들에게는 내 作品을 팔지 말라”고 했다. 그 作家의 心情을 나는 理解한다, 首肯할 순 없지만.

    김순응
    ● 1953年 忠北 鎭川 出生
    ● 서던캘리포니아대學校 大學院 經營學 碩士
    ● 하나은행 資金本部長, 서울옥션 代表理事, 케이옥션 代表理事
    ● 現 김순응아트컴퍼니 代表
    ● 著書 : ‘美術市場의 봄여름가을겨울’(2010), ‘돈이 되는 美術’(2006) 等




    댓글 0
    닫기

    매거진東亞

    • youtube
    • youtube
    • youtube

    에디터 推薦記事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Copyright ⓒ 2020 By '전통문화연구회(傳統文化硏究會)' All Rights reserved.
     한국   대만   중국   일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