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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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언
申昌彦
大韓民國의 前 憲法裁判所 裁判官
任期 1994年 9月 15日 ~ 2000年 9月 14日
前任 한병채
後任 권성 [1]
大統領 金永三

身上情報
出生日 1942年
死亡日 2019年 9月 3日
學歷 서울大學校 法學學事
經歷 釜山地方檢察廳 檢事長

신창언 ( 1942年 ~ 2019年 9月 3日 )은 檢事 出身으로 憲法裁判所 裁判官 을 지낸 法曹人이다.

生涯 [ 編輯 ]

서울特別市 出身으로 寶城高等學校 서울大學校 를 卒業하고 1964年 最年少者로 第3回 司法試驗 에 合格해 檢査에 任用되었다. 서울地檢 刑事2部 部長檢事로 在職할 때 朴鍾哲 拷問致死 疑惑 事件 搜査팀長을 맡았고 以後 서울地方檢察廳 2次長, 法務部 法務課長, 濟州地方檢察廳 檢事長, 大檢察廳 公判 訟務部長, 法務部 法務室長, 大檢察廳 21世紀 企劃團 初代 團長을 거쳐 釜山地方檢察廳 檢事長에 在職하고 있을 때 " 朴鍾哲 拷問致死 縮小隱蔽 造作事件 [2] 의 主任檢事였다"는 理由를 들어 反對하는 목소리가 있었음에도 民主自由黨 의 推薦으로 1994年 9月 15日 憲法裁判所 裁判官 에 任命되어 任期 6年을 마친 2000年 9月 14日에 公職에서 물러났다. [3]

憲法裁判所 裁判官으로 主審을 맡은 事件 [ 編輯 ]

  • 1990年 土超稅.開發利益還收制度와 함께 土地公槪念의 一環으로 導入된 宅地所有上限에 關한 法律에서 서울과 6大 廣域市에서 200坪以上의 宅地所有者에게 負擔金을 賦課하도록 規定에 對해 違憲 決定을 했다. [4]
  • 濟州 4.3 事件 을 다룬 映畫 레드헌트를 上映한 嫌疑로 起訴된 서준식이 口齒疳 需用者의 手匣着用에 對해 "法務部가 올 3月 戒護勤務準則(訓令)을 改正, 口齒疳 需用者에 對해 手匣.捕繩 等 戒具 使用을 原則的으로 禁止한 만큼 앞으로 例外的인 境遇를 除外하고는 手匣着用 行爲가 反復될 危險이 없다"며 "實益이 없다"며 却下했다. [5]
  • 5級以上 公務員으로 5年以上 在職한 稅務職 經歷者에게만 稅務士 資格을 주도록 한 稅務士法 3兆 2號에 對해 "一線 實務者인 6級以下 稅務職은 獨自的인 業務決定權을 갖고 있지 않아 稅務業務 및 稅法에 關한 理論的 基盤과 總括處理力 等 稅務士 業務能力을 充分히 갖췄다고 볼 수 없다"는 理由로 合憲 決定을 내렸다. [6]
  • 區 外國換管理法第18條 1項 等이 申告.許可 對象 外換支給方法을 具體的으로 定하지 않아 罪刑法定主義에 違背된다며 서울地法의 違憲法律審判 提請 事件에서 "새로운 決濟方法이 繼續 생겨나 이를 一一이 法律에 規定하는 것은 不可能하기 때문에 일정한 定型을 規定하고 時代的 狀況에 맞춰 規律對象이 될 類型을 多少 包括的인 用語로 定할 수 있다"며 "이 事件 法律 條項의 境遇 法官의 補充的 解釋으로 그 意味街具體化될 수 있고 健全한 常識과 通常的인 法感情을 가진 사람이라면 規制되는 行爲를 充分히 알 수 있으므로 罪刑法定主義에 違背되지 않는다"며 合憲決定을 했다. [7]
  • 民主社會를 위한 辯護士모임이 對北接觸視 統一部長官의 承認을 얻도록 한 南北交流協力法 第9條3項이 統一主體人 南韓住民의 統一에 對한 權利를 지나치게 制約하는 것이라며 請求한 事件에서 "北韓과의 接觸이나 交流가 일정한 原則이나 制限없이 放漫하게 이뤄진다면 國家 安全保障이나 自由民主的 基本秩序 維持에 어려움을 가져올수 있을뿐아니라 平和統一을 이뤄 나가는 데 支障을 招來하고 當事者들의 安全에도障礙를 가져올 수 있다"며 合憲 決定을 했다. [8]
  • 酒稅法은 自由競爭 原則을 違反한다며 酒類販賣業者에게 道內 酒類業體가 生産하는 燒酒 製品을 50%以上 義務的으로 購入하여 流通하게 한 酒稅法은 違憲이라고 했다. [9]

各州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한병채
憲法裁判所 裁判官 ( 國會 選出· 大統領 任命)
1994年 9月 15日 ~ 2000年 9月 14日
後任
권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