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亞日報

東亞日報
東亞日報
創立 1920年
創立者 金性洙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主要 株主 隣村記念會 24.14%
金在鎬 22.18%
그 外 株主 53.68% [1]
系列社 동아미디어그룹
東亞日報
國家 大韓民國
言語 韓國語
刊行週期 日刊
種類 全國版 綜合日刊新聞
板形 타블로이드倍版
創刊日 1920年 4月 1日
價格 1部 1,000원
月 20,000원
發行人 임채청
웹사이트 donga.com

東亞日報 》(東亞日報, Dong-A Ilbo)는 新聞 發行 業體인 동아일보사가 發行하는 大韓民國 의 日刊 新聞이다. [2] [3] [4] [5] [6]

歷史 [ 編輯 ]

創刊 [ 編輯 ]

동아일보 創刊號
동아일보 社屋 內部에 展示되어 있는 인촌 金性洙 銅像.

創刊 初期 [ 編輯 ]

區 동아일보 社屋 (the Old Dong-A Ilbo Company Office)

1919年 3.1 運動 以後 朝鮮總督府 는 이른바 文化 統治 의 一環으로 이듬해 1月 3個의 韓國人 民間新聞 發行을 許可하였는데 이 中 하나가 東亞日報이다. 동아일보는 1920年 4月 1日 , 金性洙를 비롯한 박영효 , 김홍조 , 장덕준 等을 中心으로 타블로이드 판 4面 體制로 發刊되었다. 當初 3.1運動 1周年인 1920年 3月 1日 創刊하려 하였으나 不足한 資金을 마련하느라 한 달이 늦어졌다. 創刊 當時 購讀料는 3錢(只今의 約 900원)이었으며, 社屋은 서울 종로구 화동 138番地 韓屋建物이었다. 設立者 金性洙와 初代 社長 朴泳孝를 비롯한 創刊 主導 人士들은 ' 民族主義 (民族主義)', ' 民主主義 (民主主義)', ' 文化主義 (文化主義)'를 斜視(社是)로 내걸었으며 이 3代 精神은 오늘날까지 동아일보의 核心價値로 내려오고 있다.

동아일보는 創刊 初期부터 强制定刊의 壓力을 當하기도 했다. 日帝 强占期 初盤 朝鮮總督府 의 武斷 統治를 非難한 技師는 隨時로 問題가 되어 新聞과 輪轉機가 押收되는 受難을 여러 番 겪기도 했다. 1920年 9月 25日 日本 3種 神技를 批判한 9月 24日과 9月 25日의 記事 內容이 問題視되어 제1차 武器停刊 處分을 當한다. 以後 4次 武器停刊 處分을 當하고 여러 番 輪轉機와 發行 新聞이 押收당하는 等의 일을 겪기도 했다. 이어 1920年 1月 10日 에 停刊이 解除되고 2月 21日부터 다시 發行한다. 1923年 6月 以後 山寺에서 벌인 忠淸北道 道知事 박중양 의 休養, 遊興行爲를 集中 報道, 批判하기도 했다. 1923年 부터 박중양은 報恩郡 俗離山 法住寺에 休養을 다녀온 뒤 繼續 自身의 私的인 休養地, 遊興地로 濫用하여 物議를 일으켰다. 동아일보가 이를 꾸준히 非難하고 기사화하여 非難하면서 一角에서 동아일보에 壓力을 行使하려 하자 이때 윤치호 가 나서서 朝鮮總督府 當局에 說得하여 事實대로 報道한 民族의 正論인 東亞日報를 處罰해서는 안 된다며 積極 庇護하기도 하였다.

民族運動 [ 編輯 ]

創刊 以來 동아일보는 韓民族의 3.1 精神을 이어가고자 各種 民族運動에 앞장서왔다고 主張한다. 1920年代의 國産品 愛用 運動, 言論集會壓迫 彈劾運動, 民立大學設立運動 等 國內 大衆的 民族運動과 民衆啓蒙運動을 積極的으로 報道하였다. 1931年 7月, 文盲退治와 한글 普及을 目標로 하는 브나로드 運動 乙 日帝가 禁하기 前까지 4年間 全國的으로 活潑히 展開하였고, 文學作品 公募(1925)를 통한 近代文學 啓發에도 힘썼다. 1933年 4月에는 한글맞춤法統一案 에 따른 새로운 綴字法을 採擇하는 等 여러 事業을 통해 民族精神을 强化하고 民衆 啓蒙에 熱中했다고 東亞日報 스스로 主張한다.

1926年 3月 7日 國際農民本部에서 '朝鮮農民에게' 보낸 3·1 萬歲運動 記念 記事들을 揭載하였다가 第2次 武器停刊 處分을 받았다. 同時에 이때 동아일보 主筆이자 3.1運動에 加擔한 民族代表 49人 의 한 사람인 송진우 와 發行人 김철중 等에 各各 懲役 6月, 4月 實刑이 言渡되기도 했다. 그 뒤 抗訴로 取消되면서 4月 21日 다시 續刊했다고 東亞日報側에서 主張한다.

女性 地位 向上 運動 [ 編輯 ]

동아일보는 創刊 初期부터 植民地 朝鮮社會의 因習에 얽매여 집안에 갇혀 있던 女性을 일깨우고자 했다. 當時 동아일보는 '女性'面을 固定으로 두고 '新女性과 敎育', '女性解放과 大家族制度', '女性과 職業' 等 女性의 權益 向上과 社會 參與를 督勵하는 企劃記事와 寄稿를 실었다.

또한 1933年 1月 日刊 新聞社로서는 最初로 女性 月刊誌 ' 新家庭 '(' 여성동아 '의 前身)을 創刊했다. '新家庭'은 女性 讀者를 考慮해 題目만 國漢文을 섞어 쓰고, 그 外 모든 記事는 純 한글로 製作했다. 新家庭은 女性誌라는 特徵을 살려 料理, 編物, 染色 等에 關한 各種 講習會를 열었다. 또한 夫人 밤줍기 大會, 主婦 野遊會, 否認 古宮巡禮團 等 多樣한 이벤트를 열어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主婦들의 숨筒을 열어 주었다.

동아일보는 啓蒙活動뿐만 아니라 各種 大會를 열어 女性들의 社會的인 參與를 誘導하였다. 1923年 열린 最初의 全國女子庭球大會 는 女性의 權利 伸張과 機會 均等을 主張하기 위해서 열린 大會였다. 只今도 全國女子庭球大會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는 이 大會는 동아일보가 主催한 가장 오래된 事業이자 國內 스포츠를 통틀어 最長壽 大會李祈禱 하다. 첫 大會가 열릴 當時는 儒敎的 傳統이 굳어져 있었기에 이 大會는 單純한 스포츠의 次元을 넘어 女性의 地位 向上을 위한 社會的 캠페인이었다. 이 外에도 1925年 3月 朝鮮 最初로 女性들의 公開的인 登場의 발板을 마련한 ‘ 前朝鮮女子雄辯大會 ’가 열리기도 했다.

브나로드運動 [ 編輯 ]

1928年 4月 부터는 特輯 記事를 내어 文盲 退治 運動을 提唱하였으나, 反日感情을 鼓吹시킨다는 理由로 朝鮮總督府의 檢閱과 禁止로 中斷되었고, 3年 만인 1931年부터 브나로드運動을 積極 弘報, 報道함으로써 文盲 退治 運動을 다시 展開한다.

브나로드(Vnarod)란 러시아語로 '民衆 속으로'라는 뜻이다. 동아일보는 1931年 7月 "配偶者,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旗幟를 내걸고 브나로드運動이라 불리는 農村 啓蒙 運動을 主導했다. 이 運動이 沈熏 의 代表小說 상록수 의 主要 內容이 되기도 했다. 브나로드運動에 對한 積極的인 報道와 弘報는 意識 있는 靑年層으로 하여금 브나로드運動, 農村 啓蒙 活動, 文盲 退治 活動에 自發的으로 參與하는 契機를 마련했다.

無期停刊과 廢刊 [ 編輯 ]

第2代 使嗾를 歷任한 인촌 金性洙 는 總督府의 創氏改名 要求를 끝내 拒否했고, 創氏改名 아이디어를 낸 總督府 鶴舞局長이 直接 創氏改名 을 慫慂했으나 끝내 應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동아일보는 創刊 以後 1940年 8月 强制 廢刊될 때까지 20年 동안 朝鮮總督府로부터 停刊 4回, 發賣禁止處分 2,000回 以上을 받았고, 新聞 全體가 押收되는 押收處分 89回와 記事削除 年 2423回 等 制裁를 當하는 苦楚를 겪었다. [7]

1939年 9月 第2次 世界 大戰 勃發 後, 朝鮮總督府는 朝鮮民族의 皇國臣民化 를 내세워 民族抹殺政策 을 實施했고, 동아일보는 1940年 8月 强制廢刊되었다. 이때까지 總 4次例의 無期停刊을 當했고, 그밖에 數 次例의 檢閱과 押收 削除 等의 受侮를 겪기도 했다.

1936年 8月 25日子 동아일보에 실린 ' 日章旗 抹消 事件 '

1936年 第11回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優勝한 손기정 選手의 寫眞을 동아일보 記者 이길용 이 主導하여 1936年 8月 25日 者에 揭載하면서 가슴 部分의 日章旗를 지워버려 停刊 當한 日章旗 抹消 事件 은 有名한 逸話 中 하나라고 主張하고 있으나 이는 呂運亨의 朝鮮中央日報의 記事에서 日章旗를 抹消한 寫眞을 싣고 그 記事의 寫眞을 동아일보에서 그대로 記事에 올렸을뿐 동아일보가

손기정 選手의 유니폼에서 日章旗를 抹消하는 役割을 했다는 것은 동아일보의 一方的인 主張일 뿐이며, 事實과 다르다.

동아일보는 創刊 以後 1920年 ~ 1929年 9年間 280日間의 停刊處分을 받았고 300回의 差押과 販賣禁止處分을 當하였으며 隨時로 警告, 譴責을 當하였다. 송진우 , 장덕수 는 거의 每日같이 朝鮮總督府 警務局에 出頭하여 差押된 技士가 어디가 나쁘냐고 抗議하고 論爭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8] 그러나 1941年 廢刊 直前에 漸漸 親日 路線으로 變해갔다.

光復 以後 [ 編輯 ]

1975年 1月 東亞日報 白紙廣告 事態 로 텅 빈 廣告欄이 실린 自社 新聞을 보는 동아일보 記者

廢刊 以後 5年 4個月이 지나고, 光復 3個月 半 만인 1945年 12月 1日 復刊되었다. 1945年 12月에 열렸던 모스크바 3賞 會議 內容 中 '信託統治' 問題를 놓고 事前에 誤報를 내기도 하였다. 光復 以後에 동아일보는 創業主 金性洙 의 影響으로 한국민주당 의 代表的인 言論 機關紙이기도 하였다. 1955年 3月 新聞의 誤植(誤植, 틀린 글字)李 問題가 되어 停刊당하기도 하였다. 5.16 軍事政變 으로 登場한 軍事獨裁 勢力은 事前檢閱을 없앤 代身 特殊犯罪處罰에 關한 特別法을 만들어 事實上 記者의 取材와 報道를 極度로 制限하여, 言論의 自由 를 深刻하게 侵害하였다. 또한 朴正熙 軍事獨裁政權은 當時 兆·夕刊制로 運營되던 新聞 發行 體制를 단간制로 바꿀 것을 强要하여, 동아일보는 夕刊制로 바꾸어 刊行하였다.

1972年 維新憲法 을 制定한 維新獨裁政權의 言論彈壓이 심해지고, 1973年 김대중 拉致事件 과 關聯해 요미우리 新聞 이 非難하자 동아일보 記者들은 1974年 10月 24日 自由言論實踐宣言을 發表하고 鬪爭에 나섰다. 그러자 維新政權은 동아일보 廣告主들에 壓力을 넣어 무더기로 廣告를 解約시켰다.( 東亞日報 白紙廣告 事態 ) 漸漸 동아일보사의 經營이 어려워지자 讀者들은 維新獨裁政權에 抵抗하는 意味로 自身의 돈을 들여서 廣告 解約으로 비어있는 廣告面에 白紙廣告 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1975年 3月 12日, 經營陣은 結局 政府에 屈服하였고, 維新政權 을 批判하던 記者들을 解雇하였다. 記者들은 社屋에서 籠城에 나섰으나 3月 17日 내쫓겼다. 以後 동아일보는 親政府的 性向으로 돌아서게 되며, 解職된 記者들은 동아自由言論守護鬪爭委員會를 만들어 民主化 鬪爭을 벌였다. 그 後 그들은 創刊委員會에 加入하여 1988年 에 ' 한겨레 '를 出帆시켰다. 1990年代 에 들어서 增面 競爭이 크게 늘어나고, 1993年 4月 1日 夕刊에서 朝刊化 體制로 바꾸었고, 朝刊化 斷行 6個月 만에 發行部數 200萬部를 記錄하였다. 1998年 1月 부터 新聞 前面에 가로쓰기를 施行했다. 2011年 에는 동아방송 의 後身으로 綜合編成채널 채널A 를 開局했다. 2020年 동아일보 創刊 100周年을 맞이했다.

文化·스포츠 事業 [ 編輯 ]

1923年 7月 女子庭球大會 , 1924年 10月 學生雄辯大會, 1925年 동아新春文藝, 1926年 8月 4俱樂部(排除, 中央, 휘문, 更新) 野球聯盟戰, 1929年 9月 水營競技大會 및 男女學生作品 展覽會 1931年 東亞마라톤大會 等 各種 年例 스포츠와 敎育文化 行事를 主催했다.

日帝 時代에는 文盲打破와 한글普及을 目標로 한 브나로드運動 , 李忠武公 遺跡保存運動 을 비롯한 大大的인 民族主義 啓蒙運動을 展開하였으며, 光復 以後에는 1947年 黃金獅子機 高校野球 爭霸戰 , 1956年 바둑 國手戰, 1961年 동아音樂콩쿠르 , 1962年 名唱名人大會, 1964年 東亞演劇大會, 1985年 東亞國樂콩쿠르 等을 마련해 多樣한 分野의 發展에 寄與하였다.

各種 콩쿠르를 通한 人材 支援, 마라톤 1m當 1원 積立運動 等 慈善事業度 벌이고 있다. 高麗大 에 敎育財團을 두고 있다.

칼럼 [ 編輯 ]

漫畫
  • 고바우 令監 》(1955年 2月 1日부터 1980年까지 連載)
  • 나대로 先生 》(1980年 11月 12日부터 2007年 12月 28日까지 連載된 네컷 漫畫)
  • 386C 》(漫畫)
  • 食客 》(2002年부터 2008年까지 連載된 漫畫)
  • 》(2008年부터 連載된 漫畫)
外部 寄稿者

歷代 使嗾 & 不使嗾 [ 編輯 ]

名譽會長
會長
副會長
社長
副社長

論難 [ 編輯 ]

信託統治 關聯 論難

KBS 미디어포커스는 2003年 12月 放送에서 동아일보가 모스크바 3賞 會議 에 關聯 國內 言論 中에서 唯一하게 이 外信記事를 大書特筆한 것처럼 報道하면서 外信 引用 報道가 反託運動을 격화시켜 結局 南北 分斷의 빌미를 提供했다고 主張하였고 一部 學者도 東亞日報 1945年 12月 27日子 記事가 單獨 報道했다고 主張하거나, 甚至於 造作해 報道하는 바람에 反託運動이 거세진 것이라고 主張하였다. [15]

그러나 當時 美國 워싱턴에 特派員을 두고 있지 않던 國內 言論들은 外信記事를 全載하는 것이 慣行이었다. 實際로 東亞日報뿐만 아닌 朝鮮日報 도 같은 날 1面 머리에 '信託統治說을 排擊함'이라는 社說을 싣고 바로 옆에 合同通信 記事를 4段으로 轉載했다. 當時 左翼의 影響을 크게 받고 있었던 서울新聞 도 1面에 合同通信의 記事를 받아 2段으로 報道했다. 左右翼 系列을 莫論하고 大部分의 新聞에 이 記事가 실린 것이다. [15]

問題가 된 最初로 報道된 記事는 美國의 通信社인 AP와 UP로 알려졌으나 當時 記事 原文은 남아 있지 않다. 동아일보에서 UP의 後身인 UPI 側에 問議한 結果 美國 現地 新聞도 當時 UP 記事를 轉載해 國內 言論과 같은 內容을 報道한 것으로 確認됐다. 워싱턴 타임스 헤럴드는 1945年 12月 26日子 7面에 UP 記事를 前載한 'May Grant Korea Freedom'이라는 記事를 통해 "美國의 번스 國務長官이 蘇聯의 信託統治案을 反對하고 韓國의 卽時 獨立을 主張하라는 訓令을 받고 러시아로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고 報道했다. [15]

美軍 機關紙인 聲調 太平洋板(日本 도쿄發行)도 1945年 12月 27日 AP, UP 記事를 綜合한 記事를 1面에 싣고 問題의 UP 記事와 該當 記者 이름을 報道했다. [15]

信託統治에 對한 反應은 北韓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만식 을 中心으로 한 조선민주당 의 主導로 廣範한 反託運動이 展開되었고, 共産主義者들도 反託의 뜻을 明白히 하였다. 그러나 蘇聯이 '三相會議의 決定에 反對하는 勢力은 後에 大韓民國 臨時政府 樹立에 參與할 수 없다'고 主張하자 共産主義者들은 饌卓(贊託)으로 나서게 되었다. [16] 니콜라이 레베데프 蘇聯 民政責任者는 조만식 反動主義者 이며 反人民的인 人物이라고 非難하였다. [17]

鄭鎭奭 한국외국어대 名譽敎授는 "解放空間에서 言論界는 左翼이 機先을 掌握하고 있었다"고 說明한다. 이런 狀況에서 本報의 報道가 反託運動을 격화시켰고, 이 反託運動이 南北 分斷으로 이어졌다는 主張은 事實과 다를 뿐 아니라 非論理的 解釋이라는 것이다. [15]

東亞日報 大量 解雇 事態

朴正熙 政權期間 中 동아일보는 京鄕新聞 과 함께 野黨性向을 보여왔다. 이는 동아일보의 創始者인 송진우 , 金性洙 等이 主動的으로 創黨한 한민당 민국당 , 民主黨 等으로 바뀌면서 親민주黨적 性向을 띈 것에서 연유한다.

데모, 人權 回復 祈禱會, 勞動 者들의 爭議, 野黨의 體制批判 發言, 改憲問題 等 금기시되어 있던 여러 가지 維新反對 記事를 싣자 朴正熙 政權은 1974年 동아일보의 記事에 對한 檢閱 等을 통해 동아일보 廣告主에 對한 壓力을 넣었고, 1974年 12月 30日부터 政權의 壓力을 받은 廣告主들의 廣告撤回事態가 벌어지기 始作했다. 1974年 12月 26日 者 記事부터는 一部 廣告欄이 白紙로 나갔는데, 이는 1975年 7月 中旬까지 繼續되었다. 이 期間 동안 一般 國民 讀者들은 수많은 '自由言論 激勵 廣告'를 내며 東亞日報를 支持했다. 그 外 知識人, 學生, 宗敎人은 勿論 一般 市民들과 主婦들까지도 東亞日報 白紙廣告에 參與하여 激勵를 보냈다. 政府는 繼續 言論에 壓力을 넣었고 維新 政權 의 壓力을 받은 經營主들은 記者를 비롯한 社內 言論人들을 解雇하게 되었다.

이때 抑鬱하게 해고당한 記者와 任員들의 處遇에 동아일보사가 無關心했던 것에 對한 批判이 있다.

보천보 戰鬪 金 原版 金正日에 膳物

동아일보 取材團이 1998年 10月 26日에 김정일 國防委員長에게 膳物로 준 ‘보천보 戰鬪 金 印刷 原版’이 事實로 確認됐다. [18]

보천보 戰鬪는 1937年 김일성 前 主席이 中國에서 抗日運動을 하다가 國內에서 처음으로 日本軍과 싸운 것으로 北側에서는 “祖國 땅에서 울린 첫 銃聲”이라며 큰 자랑으로 여기고 있다. 國內에서는 金 前 主席이 抗日運動을 했느냐의 與否로 論難이 있지만, 동아일보는 보천보 戰鬪 消息을 다룬 自社의 新聞記事를 金 1.2킬로그램을 들여 原版으로 製作해 膳物로 바친 것이다. 보천보 戰鬪가 規模가 큰 게 아니었지만 當時 동아일보가 보천보 戰鬪를 다룬 號外를 2番이나 發行하면서 김일성이 全國的으로 有名人士가 됐다. 日帝 彈壓이 極甚하던 當時 滿洲에 根據地를 둔 빨치산 部隊의 첫 國內 眞空作戰이었으니 그만큼 朝鮮民들의 마음에 크게 다가왔고 日帝에 衝擊을 준 話題가 된 戰鬪였던 것이다. 그 時點에 右派 民族主義 陣營은 有名人士들이 相當數 親日로 變節하던 時期였다.

全敎組 名單 不法 公開 問題

2010年 4月 法院은 전교조 加入 敎師들의 名單을 公開한 조전혁 議員에 對한 名單公開 禁止 假處分 申請을 받아들여 名單을 公開하지 말라고 決定했지만 조전혁 議員은 이를 無視하고 名單을 公開했으며, 이러한 不法的인 名單 公開에 동아일보의 인터넷 사이트인 東亞닷컴度 加擔했다. [19] 전교조 所屬 敎師들은 조전혁 議員과 동아일보社에 對해 不法行爲에 따른 損害賠償 請求 訴訟을 提起했고, 法院은 2011年 7月 26日 조전혁 議員은 一人當 10萬 원씩 모두 3億 4千萬 원을, 동아일보사는 一人當 8萬 원씩 모두 2億 7千萬 원을 賠償하라고 判決했다. [19]

新聞告示 違反

新聞販賣考試는 新聞購讀者를 募集하는 過程에서 年間 有料新聞 代金(18萬 원)의 20%(36,000원)를 超過하는 額數의 無料 新聞이나 景品을 提供하는 行爲를 不公正去來行爲로 規定하고 있다. 民主言論市民聯合 2008年 5月 서울地域 支局 中 40곳을 對象으로 新聞告示 違反 實態를 調査한 結果 中央日報와 동아일보의 違反率은 100%, 조선일보는 97.5%에 達했다고 發表했다. [20]

콜트악기 勞組 鬪爭 歪曲報道

동아일보는 2008年 8月 2日 "7年 罷業의 눈물"이라는 題目의 記事에서 "콜트악기 勞動者들의 强勁 鬪爭 때문에 職員 120餘 名이 平生 職場을 잃고 모두 거리로 나앉게 됐다"는 會社 關係者의 말을 引用하면서 "勞組의 罷業으로 生産性이 떨어져 輸出 納期를 맞추지 못하는 일이 反復되자 海外 바이어들이 고개를 돌렸다"고 勞組에 廢業의 責任을 돌렸다. 勞組는 이에 反撥해 訂正 報道와 損害賠償 請求 訴訟을 냈다. 이에 對해 서울高等法院은 2010年 6月 동아일보에 訂正報道 揭載와 함께 慰藉料 500萬 원을 支給하라는 判決을 내렸고 2011年 9月 判決이 確定되었다. 法院은 判決文에서 "콜트악기의 廢業에는 原稿의 罷業으로 壓縮해서 表現하고 있는 勞使問題뿐만 아니라 生産基地의 海外 移轉이라는 經營上의 判斷 等 다양한 原因이 複合的으로 作用했다고 보이는데도 콜트악기의 廢業이 純全히 勞組의 잦은 罷業 때문이라는 記事는 虛僞라고 보는 게 맞다"고 밝혔다. 또한 "記事를 作成한 記者는 使用者의 陳述을 들었으나 勞組에 事實 關係 確認을 하지 않았다"면서 "記者가 確認할 수 있었던 콜트악기 및 關聯 會社들의 資産 狀況과 賣出, 當期純利益 等 經營狀態에 對한 資料들만이라도 客觀的으로 引用했더라면 이 記事에 나타난 誤謬는 쉽게 避할 수 있었을 거라고 보이는 等의 事情에 비춰볼 때 被告가 이 記事의 內容을 眞實이라고 믿을 相當한 理由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힘으로써 記者가 最小限의 客觀的 事實確認조차 하지 않고 惡意的으로 記事를 作成했음을 認定했다. . [21]

黃色 저널리즘

2006年, 동아일보는 文化日報와 함께 黃色言論 性格이 짙다는 指摘을 받았다. 민언련의 調査에 따르면, 동아일보는 같은 期間 동안 29次例 性商品 關聯 廣告를 紙面에 내보냈고 ▲女性을 性的 對象으로 描寫(2件) ▲企業製品 弘報에 利用된 煽情的 女性寫眞(2件) ▲性犯罪와 有害藥물 等에 對한 表現(2件)을 내보내었다. [22]

김정남의 天安艦 發言 誤報

朝鮮日報 는 2012年 1月 17日子 1面에서 김정남 이 日本 <도쿄新聞>의 苦味 要旨 編輯委員과 지난 7年 동안 주고받은 電子郵便 對話錄을 <월간조선>이 入手했다며 이를 土臺로 김정남의 發言을 報道했다. 그런데 이 記事에서 조선일보는 '(김정남이) 天安艦 沈沒 事件에 對해서는 "北朝鮮 立場에서는 西海 5도 地域이 交戰 地域이라는 이미지를 强調할 必要가 있다. 그래야 核, 先軍政治 모두 正當性이 附與되는 것"이라고 했다'고 傳했다. 國內에서 天安艦 事件의 眞相에 關한 論難이 持續되고 있는 渦中에 나온 이러한 報道는 天安艦 事件이 北韓의 所行이라는 決定的 證據의 하나로 받아들여졌고, 實際로 동아일보는 조선일보의 이러한 報道內容을 土臺로 한 18日子 社說에서 "國內 從北(從北) 左派 勢力은 北韓 權力 內部 事情을 잘 알고 있는 김정남의 이런 暴露를 듣고도 "天安艦 爆沈이 北韓 所行이라는 證據가 없다"고 繼續 主張할 것인가."라고 쓰기도 했다. [23] [24] 하지만 이 記事가 나간 以後 김정남과 電子郵便을 주고 받은 當事者인 苦味 要旨 編輯委員은 自身이 김정남으로부터 받은 이메일의 어디에도 천안함에 關한 發言은 存在하지 않는다고 밝혀왔다. 結局 조선일보는 天安艦 事件에 關해 그것이 北韓의 必要에 依해 이루어진 일이라고 김정남이 主張했다는 報道는 誤報였음을 認定했다. 하지만 社說을 썼던 동아일보는 誤謬를 바로잡지 않고 있다. [25] [26]

최영해 칼럼 波紋

2013年 9月 17日子 동아일보에 실린 최영해 論說委員의 "채동욱 아버지 前上書"라는 題目의 칼럼에 對해 各界로부터 批判과 嘲弄, 抗議가 잇따르는 等 커다란 波紋을 일으켰다. 최영해 論說委員의 칼럼은 蔡東旭 檢察總長의 婚外 아들이 蔡東旭 總長에게 보내는 便紙 形式으로 되어 있다. 崔 委員은 칼럼에 "제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뇨? 저는 아버지가 檢察總長이 됐을 때 뛸 듯이 기뻤어요", "저한테 피 檢査 하자는 얘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萬에 하나 피檢査가 잘못돼 가지고 저하고 아버지하고 다르게 나오면 그땐 어떡해요?" 等의 內容을 담았다. [27]

이에 對해 言論學 敎授인 金昌龍은 미디어오늘 칼럼을 통해, 최영해의 칼럼은 兒童의 人權을 蹂躪하는 것으로 言論의 暴力行爲에 該當하며, 眞實을 追求하는 言論이 疑惑을 事實로 斷定하여 內容을 展開하는 것은 저널리즘 에서 容納하기 힘든 行爲이고, 무엇보다 內容이 너무 殘忍해서 權力에 對한 正常的인 監視와 牽制機能을 넘어 人間 蔡東旭에 對한 人身攻擊이며 아이와 아이 어머니에 對한 人權 蹂躪이라고 批判했다. [28]

陳重權 敎授는 최영해의 칼럼에 對해, "그로테스크합니다. 小說로 칼럼을 代身하는 發想의 荒唐함과 그 文學的 想像力의 幼稚燦爛한 水準이 자아내는 우스음. 거기에 初等學校 5學年 아이까지 政治鬪爭의 道具로 利用해 먹는 人性의 殘酷함이 콘트라스트를 이루며 하나로 結合하죠"등의 批評을 트위터에 남겼다. [27]

國際 兒童人權 團體인 세이브더칠드런은 聲明을 통해, "아무리 '創作物'이라는 說明을 붙였을지언정 該當 아이가 現實에 存在하는 以上 本人의 私生活과 家族, 甚至於 本人 以外에 그 누구도 알 수도, 干涉할 수도 없는 感情과 생각을 推測하여 公的 輿論의 張에 내어놓는 것은 아이에 對한 深刻한 侮辱이자 暴力"이라고 批判했다. 言論界에선 '同時代 言論人 모두에 對한 테러'라며 글을 쓴 論說委員뿐 아니라 동아일보가 中央日刊紙로서 뭔가 責任 있는 措處를 내놓아야 한다는 意見도 나왔다. 최영해 칼럼에 對한 네티즌들의 嘲弄과 패러디도 續出했다. 누리꾼들은 "끝까지 읽기가 憫惘하다", "참으로 못되고 못났다" 等의 反應을 보였다. 무엇보다도 어린아이 時點으로 아이의 人權을 짓밟고 嘲弄하는 것은 理解할 수 없다는 意見들이 많았다. 또한 온라인에서는 아이에 崔 委員을 代入해 패러디한 '최영해 아버지 前 相서'라는 글들도 올라왔다. [29]

雙龍驛 虛僞報道

2013年 12月 26日子 동아일보는 "하루 乘客 15名인 驛에 驛務員 17名"이라는 題目의 記事에서, 雙龍驛 에 對해 "2010年 한 해 鐵道 運送輸入이 1,400萬 원에 그쳤다. 反面에 같은 해 이 驛에서 일하는 職員들에게 支給된 人件費는 11億 3,900萬 원으로 驛 收入의 81.3倍였다."고 報道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役을 構造調整하지 못하는 理由를 强性勞組 탓으로 돌렸다. [30] 하지만 노컷뉴스 取材 結果 이는 事實과 달랐다. 鐵道廳統合情報시스템에 依하면 雙龍役의 2010年 輸入은 1,400萬 원이 아니라 96億 1,500萬 원이었다. 貨物 輸入 95億 9,600萬 원에 旅客 輸入 1,900萬 원을 合한 金額이다. 동아일보의 記事는 100億 원에 가까운 貨物 輸入은 漏落시킨 채 旅客運送 輸入만을 雙龍役의 收入인 것처럼 報道한 것이다. 또한 2014年 基準으로 15名이 勤務 中이지만 3兆 2交代로 運營되므로 實際 投入人員은 5名이라는 事實도 漏落시켰다. [31]

지면 [ 編輯 ]

  • 週 6日制 新聞을 發行한다.
  • 每週 日曜日 新聞 發行하지 않고 [32] , 온라인 서비스를 繼續한다.
    • A: 綜合뉴스 섹션은 平日 土曜日 에 싣는다.
    • B: 經濟 섹션은 동아經濟 에서 平日 에 싣는다.
    • C 以上: 기타·生活 情報 섹션은 別途로 싣는다.

沿革 [ 編輯 ]

  • 1920.04.01. 創刊號 發行.
  • 1931.07.21. 民衆啓蒙運動人 브나로드 運動 展開.
  • 1936.08.29. 손기정 選手 日章旗 抹消事件 으로 無期 停刊.
  • 1940.08.10. 民族抹殺政策으로 因한 强制 廢刊.
  • 1945.12.01. 光復 以後 復刊.
  • 1946.09.26. 鐵道罷業에 因한 休刊.
  • 1946.06.27. 경성일보사 印刷工 罷業으로 인한 休刊.
  • 1950.06.28. 韓國戰爭으로 인한 發行 中止.
  • 1950.10.04. 타블로이드 2個面으로 復刊.
  • 1951.01.10. 1.4後退에 인한 釜山에서 屬間.
  • 1956.04.01. 國手戰 主催.
  • 1963.04.25. 동아방송 個國.
  • 1964.07.15. 少年東亞日報 創刊.
  • 1967.01.28. 洞亞鉛감 創刊.
  • 1974.12.20. 軍事獨裁政權의 廣告彈壓으로 白紙廣告 始作.
  • 1975.03.08. 동아일보 解職 事態(5月 1日까지 順次的으로 記者 및 寺院 113名 解職).
  • 1980.11.30. 言論統廢合 으로 동아방송 한국방송공사 에 賣却.
  • 1981.10.02. 동아문화센터 開設.
  • 1990.07.20. 週末特輯版 東亞마당 發行.
  • 1992.10.27. 本社를 忠正路 社屋으로 移轉.
  • 1993.04.01. 夕刊新聞에서 朝刊新聞으로 轉換.
  • 1994.04.01. CTS(컴퓨터 製作 시스템) 導入.
  • 1996.10.01. 인터넷 電子新聞 "마이다스 東亞日報"出帆.
  • 1998.01.01. 가로쓰기 發行.
  • 2000.01.13. '마이다스 東亞日報', '동아닷컴'으로 社名 變更.
  • 2000.12.15. 新聞博物館 開館.
  • 2002.01.01. 東亞日報 모바일 서비스 開始.
  • 2005.01.01. 오피니언面 後進 配置, 社會面 前進 配置.
  • 2005.04.25. 온?오프라인 統合뉴스룸 出帆.
  • 2005.08.17. 忠正路 32面 컬러 印刷 體制 完了.
  • 2011.12.01. 綜合編成채널 채널A 個國.

參考 事項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조중동의 持分 構造를 알 수 있을까요?
  2. '東亞日報'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송민순事件 그리고 偏頗起訴 . 金於俊의 파파이스. 2016年 10月 22日 .
  4. 김신용. ‘보천보戰鬪 金印刷原版’ 膳物 . 기자협회보. 2007年 12月 4日 .
  5. 김남권. 警察, 김병관會長 夫人 自殺 暫定結論 . 聯合뉴스. 2001年 7月 16日 .
  6. 박주호 記者 (2001年 10月 25日 12:49). “[한겨레 記者 'DJ는 왜…' 冊 波紋] 言論稅務調査 正當性 또 도마에” . 國民日報 . 2001年 10月 25日 12:49에 確認함 .  
  7. [1] Archived 2011年 2月 14日 - 웨이백 머신 donga.com[뉴스 ] -인촌 金性洙 先生, 各界 指導者들의 證言
  8. 大韓民國의 起源(이정식, 일조각, 2006) 138페이지
  9. 國民의 政府 當時 稅務調査 結果에 責任을 지고 引責 辭退했었다.
  10. 金炳官 名譽會長 辭退 背景·展望
  11. 本社 金炳官 名譽會長-理事職 辭任…臨時理事會서
  12. 동아일보 會長 金炳官氏/社長엔 오명氏를 再選任 서울新聞 1997.02.27.
  13. 동아일보 會長에 오명氏·社長兼 發行人 김학준氏
  14. 동아일보 김병건 副社長 辭任 韓國經濟
  15. (모스크바 3商會의 60周年)左翼 '贊託突變' 南北分斷 불러 2005-12-29 東亞日報
  16. 信託統治反對運動 두산百科
  17. KBS特別企劃 韓國戰爭 10部作 Archived 2014年 10月 29日 - 웨이백 머신 第2篇 戰爭의 시그널
  18. “東亞日報, 김정일에게 ‘보천보 戰鬪 金印刷原版’ 膳物” . 기자협회보. 2007.12.04.  
  19. `全敎組 名單 公開' 조전혁 議員 3億 賠償 聯合뉴스, 2011年 7月 26日
  20. 조선일보 ‘딱걸린 現場’…商品券에 無料購讀까지 《傾向닷컴》2008年 6月 12日 18:37:15
  21. "동아일보는 取材의 基本을 지켜라" 미디어오늘 2011年 9月
  22. 이젠 新聞도 '19禁' 달고 팔아야 하나?
  23. 천안함은 北韓 挑發? "김정남 조선일보 報道는 거짓" 미디어오늘, 2012年 1月 19日
  24. <社說>'天安艦 北 所行' 김정남度 認定했는데… 東亞日報, 2012年 1月 18日
  25. 朝鮮日報 '김정남 天安艦 言及' 報道, 김정남 이메일엔 없다 한겨레新聞, 2012年 1月 19日
  26. <바로잡습니다> 日記者의 김정남 關聯 冊에 '天安艦' 言及 없어 朝鮮日報, 2012年 1月 19日
  27. 陳重權 "'婚外아들 칼럼', 變態度 이런 變態가…" 京鄕新聞, 2013年 9月 18日
  28. 東亞 칼럼은 韓國言論의 바닥, 人身攻擊 넘어 人權蹂躪 미디어오늘, 2013年 9月 18日
  29. "韓國 新聞史上 最高 問題作"…東亞日報 '채동욱 칼럼' 波紋 한겨레新聞, 2013年 9月 17日
  30. 하루 乘客 15名인 驛에 驛務員 17名 東亞日報, 2013年 12月 26日
  31. '하루乘客은 15名, 驛務員은 17名' 雙龍驛 記事의 眞實 노컷뉴스, 2014年 1月 28日
  32. 설날 · 秋夕 에 限定
  33. 創刊號부터 現在까지 閱覽을 볼 수 있으나, PDF 有料 서비스가 되어 있음
  34. 1999年 12月 31日까지 無料 閱覽을 볼 수 있음.
  35. “The Original - 디오리지널” . 2021年 10月 18日에 確認함 .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