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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大統領, 갈수록 宋時烈에 가까워진다”|신동아

“文 大統領, 갈수록 宋時烈에 가까워진다”

‘金堉 評傳’ 著者 이헌창 敎授가 본 ‘改革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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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재석 記者

    jayko@donga.com

    入力 2020-12-2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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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堉, 大同法 完成한 朝鮮 最高 改革家

    • 所信 갖춘 朝鮮 官僚, 權力者에 直言

    • 獨善的 宋時烈의 浮上, 朝鮮 後期의 不幸

    • 文, 처음엔 金堉 가깝다 여겼으나 아니었다

    • 尹과 旅券 사이 葛藤 보면 己卯士禍 떠올라

    • 朝鮮은 司憲府 等 司正 機關 健在해 長壽

    • 송시열 財政支出, 金堉 財政健全性 擇했을 것

    이헌창 고려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홍중식 기자]

    이헌창 고려대 經濟學科 名譽敎授. [홍중식 記者]

    時代를 不問하고 權力이 가장 愛用하는 말은 改革이다. 積弊淸算을 슬로건으로 내걸고 執權한 文在寅 政府는 唯獨 改革이라는 말에 執着한다. 初有의 現職 檢察總長 懲戒件으로 나라가 두 동강 난 時點에도 執權與黨 代表는 “民主化 以後 가장 많은 改革을 이뤄냈다”고 自評했다. 그러나 凡夫(凡夫)의 살림살이와 동떨어진 改革은 앙상하고 메마른 레토릭(rhetoric)에 不過하다. 

    이헌창(66) 고려대 經濟學科 名譽敎授를 떠올린 건 그 때문이다. 그는 經濟史를 專攻했다. 高談峻論에 沒頭한 學者 代身 不世出의 經世家를 硏究하는 데 穿鑿해 왔다. 陣營 論理와 根本主義 思考를 警戒하면서 實際 民生 改革을 이뤄낸 人物을 照明했다. 權府(權府)가 改革이라는 말을 速射砲처럼 쏟아내는 只今, 이 敎授에게서 얻을 智慧가 적지 않을 것이다. 

    그가 쓴 ‘金堉 評傳’을 읽다 보면 韓國 政治가 무엇을 해야 할지 밑그림이 그려진다. 윈스턴 처칠 前 英國 總理는 “歷史를 工夫하고 硏究하라. 歷史에는 國政運營 技術의 모든 祕密이 담겨 있다”고 썼다. 李 敎授는 처칠의 말을 받아 “이 冊에서 그 祕密을 發掘하고 싶다”고 했다. 

    冊의 副題는 ‘大同法을 完成한 朝鮮 最高의 改革家’다. 익히 알려진 政丞·判書가 많은데 唯獨 金堉을 ‘넘버 원’으로 꼽은 理由는 무엇일까. 2020年 12月 9日 동아일보 忠正路 社屋에서 李 敎授와 만났다. 

    -金堉은 一般人에게 生疏한데 朝鮮 最高의 改革家라고 評價하셨습니다. 

    “金堉은 大同法, 銅錢株化制度, 時憲曆(西洋式 曆法) 導入 等 政策 業績이 많습니다. 民生을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財政도 탄탄하게 만들어 朝鮮 後期 經濟成長에 이바지했죠.” 



    金堉은 1580年에 태어나 1658年 死亡했다. 그의 死亡을 傳하는 ‘朝鮮王朝實錄’ 졸기에는 金堉이 “平生 經濟를 自身의 任務로 삼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平生 經濟를 自身의 任務로 삼아”

    -普通 사람들은 朝鮮王朝 文身으로 退溪나 栗谷을 떠올립니다. 金堉 같은 官僚는 業績에 비해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學者를 優待하는 朝鮮 時代 文化 때문이죠. 朝鮮 時代를 支配한 留學은 누구나 安定된 일자리를 갖는 道德 社會를 志向합니다. 유토피아와 비슷한 理想鄕이죠. 政治를 아무리 잘해도 到達할 수 없는 以上이에요. 그러니 儒敎 文化圈에서는 孔子보다 偉大한 사람이 없고, 以上을 提示한 學者가 政治家보다 높게 評價받았습니다. 民生 安定과 富國强兵을 實現한 官僚·政治家도 (제대로) 評價해야 합니다.” 

    大同法으로 各種 貢物(貢物·特産物)李 쌀로 統一됐다. 課稅 基準도 從前의 加護(家戶)에서 土地의 結數로 바뀌었다. 

    -大同法이 그토록 重要한 改革입니까. 

    “金堉은 大同法이 全國으로 普及되는 데 突破口를 열었습니다. 大同法 改革으로 人民의 平均 세(稅) 負擔이 折半 程度로 줄었습니다. 5分의 1 以下로 줄어든 農民도 있었죠. 防納因果 官吏에 依한 中間 收奪을 막아 中央 歲入이 20%(쌀 10萬~20萬 席) 늘었고요. 單純 明確하고 公平한 課稅 基準으로 租稅制度의 成熟을 낳은 겁니다. 또 國家가 徵發하던 物資와 勞動力이 大同法 施行 後 市場에서 調達됐어요. 德分에 市場이 成長하고 經濟成長으로 이어졌죠.” 

    ‘金堉 評傳’에는 “大同法은 西人 栗谷이 처음 提案하고, 男인 柳成龍이 처음 制度化하고, 南人 李元翼이 처음 競技도·강원도에 정착시켰고, 西人 金堉이 忠淸·全羅道에, 이어서 男인 이원정이 慶尙道에 擴大했다”는 表現이 나온다. 

    -人民과 國家에 이로운 政策이라면 超黨籍으로 推進됐다고 했는데, ‘朋黨 亡國論’과 背馳되는 대목입니다. 

    “朝鮮을 理解하는 데 朋黨社보다 政策社가 重要하다고 생각해요. 朝鮮에서도 朋黨 間 政治 攻勢와 人身攻擊이 熾烈했는데, 오늘날 政黨政治도 마찬가지죠. 朝鮮의 政治家는 人民과 國家에 이로운 政策이라는 合意가 있으면 黨利黨略을 앞세우지 않습니다. 儒敎 社會에서 그렇게 할 수도 없었고요. 오늘날 官僚나 政治家보다 所信에 立脚한 政策을 推進했고, 權力者에게 直言(直言)하는 文化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朝鮮의 政策 效率性은 낮다고 主張했던데요. 

    “留學은 私的 利益 追求를 警戒했어요. 그래서 經濟的 合理性이 不足했고 지나치게 道德 志向的이었습니다. 富國强兵策을 두고도 利益을 앞세우고 人民의 負擔을 늘린다며 警戒했습니다. 公論을 重視하는 政治 文化가 順機能이 있지만, 大同法과 銅錢通用冊 推進 過程에서 드러나듯 政策 推進力을 약화시켰죠. 金堉은 이런 短點에서 자유로웠어요. 오늘날 感性的 道德 談論이 理性的 經濟 合理主義를 壓倒하거나, 代案 없는 批判이 政策 推進力을 弱化시키는 境遇를 볼 수 있습니다. 朝鮮 時代 文化의 影響이죠.”


    “柳成龍, 金堉 路線 酒類 됐더라면…”

    金堉을 起用한 건 孝宗이다. 孝宗이 金堉을 後援하지 않았다면 改革의 成果는 거두기 어려웠다. ‘金堉 評傳’은 “孝宗은 金堉을 觀察하여 믿은 다음에도 決코 盲信하지 않았고, 金堉의 提案을 다른 臣下들의 見解, 그리고 民心과 綜合하여 判斷했다”고 記錄한다. 

    -最高 意思決定權者의 役割이 重要하다는 대목으로 읽히더군요. 

    “君主나 大統領이 政策 成果를 내려면 有能한 長官을 起用해 力量을 發揮토록 해야죠. 孝宗과 金堉의 關係가 훌륭한 例입니다. 留學의 政治思想을 集大成한 ‘書經(書經)’에 依하면 고요(?陶)가 “모든 政治는 人材의 識別과 民生의 安定에 달려 있다”라고 말하자 禹(禹) 임금이 全的으로 同感하며 매우 어려운 課題라고 말합니다. 丁若鏞은 ‘書經’을 硏究하면서 이 句節이 政治의 要諦라며 歎服했고요.” 

    -經濟史學者로서 보기에 韓國現代史에서 有能한 人材를 登用해 業績을 남긴 事例가 있나요. 

    “전두환 前 大統領은 光州 虐殺의 責任者이지만 김재익이라는 有能한 官僚가 力量을 펴도록 支援하고 保護했어요. 德分에 1980年 經濟危機를 克服했고, 1986~1988年 大好況의 길을 닦았죠. 걱정스러운 건 君主나 大統領이 所信과 哲學을 밀어붙이기만 하는 겁니다. 牽制力이 作用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金堉은 ‘配享功臣’(宗廟에 王과 함께 모시는 功臣)에 들지 못했는데요. 

    “王朝實錄에 따르면, 1661年 大臣과 六卿 및 三社의 長官이 모여 孝宗의 廟庭(廟庭)에 配享할 臣下를 論했습니다. 金堉을 包含해 7名이 對象에 올랐는데, 金尙憲과 金集이 選定돼 顯宗(孝宗의 아들)李 따랐어요. 儒學者를 尊重하는 文化 때문에 金集이 들어간 겁니다. 現實的 成果보다 理想主義를 追求하는 儒敎 文化의 影響이죠. 그렇더라도 金堉은 配享功臣이 될 資格이 充分했는데, 老論의 前身인 山堂(山黨)李 政權을 掌握하고 輿論을 主導해 탈락했어요. 孝宗의 配享功臣은 山堂 입맛에 맞게 定해졌죠.” 

    그는 朝鮮에서 最大의 政策 業績을 거둔 人物로 世宗과 유성룡, 金堉을 꼽는다. 

    -柳成龍의 富國强兵策이나 金堉의 안민부國論은 朝鮮王朝 政策 路線의 主流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사이 日本과 朝鮮의 經濟 隔差가 벌어졌고요. 

    “柳成龍과 金堉이 推進한 政策이 主流가 됐다면 朝鮮은 植民地로 轉落하지 않았을 겁니다. 朝鮮이 儒敎를 統治理念으로 삼은 건 合理的 選擇이었지만, 儒學이 支配 學問이 되면서 朱子學의 나라가 되는 건 避할 수 없었습니다.” 

    -金堉 以後 朝鮮은 朱子性理學 이데올로그들이 主導한 나라가 됐습니다. 

    “留學은 農耕社會와 專制君主가 이끄는 官僚制 國家에 잘 어울리는 學問입니다. 留學을 學問的으로 가장 발전시킨 게 朱子學입니다. 朱子學者人 退溪와 栗谷은 柔軟하면서 合理的인 學問 姿勢를 가졌어요. 根本主義 思考가 剛한 朱子性理學 이데올로그의 典型은 송시열입니다. 宋時烈은 朱子와 조금만 解釋을 달리해도 斯文亂賊으로 罵倒하는 獨善的 態度를 보였어요. 그가 老論의 精神的 地主이고, 老論은 1694年 甲戌換局 以後 1863年 大院君 執權 以前까지 大部分 時期의 政權을 掌握했고요. 

    朱子學과 實學의 中間 地帶에 있던 官僚도 적지 않았어요. 朝鮮이 朱子學을 偏食한 點은 아쉬우나, ‘朱子性理學 이데올로그가 主導한 나라’라는 表現까지 使用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朝鮮 後期는 ‘宋時烈의 時代’라고도 불립니다. 

    “宋時烈의 獨善的 態度는 陣營 論理로 連結됐지만, 大學者로서 氣槪가 剛했습니다. 長點이 훨씬 크죠. 宋時烈이 學者로 남지 않고 1694~1863年 사이 影響力이 가장 큰 政治家가 된 것은 朝鮮 後期社의 不幸입니다.”


    陣營 論理와 ‘宋時烈의 時代’

    -韓國에서 道德主義의 힘이 도드라진 까닭이 무엇일까요. 

    “儒學의 影響이죠. 勸善懲惡의 道德主義야말로 世界 代表的 宗敎예요. 道德은 社會에 必要합니다만, 道德主義가 社會를 支配하면 黑白論理를 낳습니다. 유럽에선 宗敎改革 以後 勢속 世界에 對한 敎會의 影響力이 갈수록 줄었어요. 또 市場이 發達하면서 經濟 合理的 思考가 퍼졌습니다. 中國과 日本에는 宗敎改革에 相應하는 思想革命이 없었으나, 朝鮮보다 市場과 商業 文化가 發達해 經濟 合理的 事故가 생겼어요. 儒學의 道德志向性을 强化한 朱子學의 影響力이 朝鮮에서 가장 剛했습니다.” 

    -只今도 蔓延한 政治權의 善惡 二分法은 根本主義 思考의 殘滓로 보입니다. 

    “善惡 二分法과 獨善的 事故는 對話와 妥協의 政治 成熟을 沮害합니다. 그렇다고 儒學의 影響을 否定的으로만 評價하는 건 아니에요. 金堉이 偉人이 된 건 修己治人(修己治人)과 經世濟民을 追求한 儒學의 順機能입니다.” 

    -우리 社會에는 朝鮮王朝를 貶下하는 雰圍氣가 있습니다. ‘支配層이 百姓 膏血을 짜는 나라니 亡할 만했다’는 겁니다. 

    “支配層이 百姓의 膏血을 짜는 건 유럽과 日本에서 더 甚했어요. 朝鮮처럼 法定稅率을 낮게 策定하려 努力한 前近代 國家는 찾기 어렵습니다. 大同法처럼 人民을 위한 改革을 장구히 推進한 事例도 世界史에 드물어요. 그런데 19世紀에 中央財政이 惡化하자 地方財政을 끌어옵니다. 財源이 不足해진 地方官이나 衙前들이 百姓의 膏血을 짰는데, 中央政府는 알면서도 事實上 傍觀했어요.” 

    그는 “西유럽과 日本은 租稅 負擔이 무거웠지만 自治 力量을 强化한 村落共同體가 영주의 租稅 增加에 制動을 걸었다”면서 이렇게 敷衍했다. 

    “西유럽에서는 議會가 國王으로부터 財産權을 保護했습니다. 그래서 近代化에 앞서게 된 겁니다. 卽 制度의 差異 탓이지, 朝鮮 支配層이 特別히 搾取辱이 甚해 나타난 問題가 아닙니다.” 

    -執權者의 善意에 기댄 政策이 百姓에게 좋은 結果를 가져오는 건 아니라는 解釋도 可能한데요. 

    “世宗이 愛民(愛民) 精神을 품고 農地稅率을 낮췄어요. 識見을 갖춘 臣下들이 反對했지만 推進했죠. 結局 半世紀 後 人民의 苦痛을 늘린 結果로 나타납니다.”


    尹錫悅과 士林 政治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7월 25일 청와대 충무실에서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함께 환담장으로 이동하고 있다. 문 대통령은 윤 총장에게 “권력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 자세로 엄정하게 처리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文在寅 大統領이 2019年 7月 25日 靑瓦臺 忠武室에서 尹錫悅 新任 檢察總長에게 任命狀을 授與한 뒤 함께 歡談場으로 移動하고 있다. 文 大統領은 尹 總長에게 “權力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 姿勢로 嚴正하게 處理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靑瓦臺 寫眞記者團]

    -문재인 政府가 經濟政策을 推進하는 過程과도 겹쳐 보입니다. 

    “文 大統領도 弱者를 위하는 善意를 갖고 있지만, 冷靜한 理性의 뒷받침이 없으면 逆效果를 낼 수 있어요. 最低賃金을 지나치게 올리면 그 以前에 最低賃金도 못 받던 勞動者는 일자리를 잃고, 그러면 全般的으로 失業者가 늘어납니다. 또 貰入者 保護를 强化하면 傳貰 供給이 줄어 價格이 上昇합니다. 이것도 經濟原論의 需要·供給 理論을 工夫하면 알 수 있고요.” 

    그의 말套는 조곤조곤하다. 平生 經濟史 硏究者로 鍛鍊된 사람에게 엿보이는 內功이 있다. 門外漢이라 생각하는 分野의 質問이 나오면 “專門家가 아니다”라는 말로 갈음한다. 單語도 매우 愼重히 고르는 便인데, 말 속에 뼈가 있다. 直接的인 質問을 건넸다. 

    -文 大統領은 金堉과 송시열 中 누구에 가깝습니까. 陣營 論理에 빠져 있다는 指摘을 考慮하면 宋時烈을 닮았고, 脫原電 等 政策 所信을 끝까지 追求하는 面을 보면 金堉이 떠오릅니다. 

    “저는 文 大統領이 金堉과 宋時烈 사이에 位置한다고 봅니다. 처음에는 金堉에 가깝다고 생각해 期待가 컸는데, 갈수록 宋時烈에 가까워지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金堉은 열린 마음, 合理性, 實用的 姿勢를 가졌기 때문에 잘못된 見解에 빠져들지 않았습니다. 文 大統領에게는 그런 點이 不足해요. 金堉은 政策에 對해 熟考하며 努力한 經驗이 있는데, 文 大統領이 품은 政策 所信은 그에 미치지는 않습니다. 金堉은 政派를 超越해 政策的 協力을 얻었는데, 文 大統領 在任期에는 陣營 論理가 政治를 支配하고 있고요.” 

    -陣營 論理가 發現되는 事例로 秋美愛 法務長官과 尹錫悅 檢察總長 間 葛藤이 생각납니다. 

    “尹 總長과 與圈의 葛藤을 보면 己卯士禍(己卯士禍)와 士林 政治의 成立이 생각나요. 世祖 때 以後 旣得權層이 問題로 떠오르자 走者가 主唱한 道學(道學) 政治의 理想을 追求하는 士林이 出現했습니다. 道學 政治란 儒敎 道德이 具現되는 政治죠. 奇妙士林은 道學 政治에 立脚한 改革을 追求하다 1519年 士禍로 犧牲됐어요. 그렇지만 以後 道學 政治를 追求하는 士大夫가 漸漸 늘었죠. 結局 宣祖가 卽位한 直後인 1570年代에는 士林 政治의 時代가 열렸습니다.” 

    -尹 總長이 後날 歷史的 成果를 거둔다는 뜻인가요. 

    “尹 總長이 懲戒받는다 해도 己卯士禍가 士林의 成長을 막지 못했듯 獨立性·中立性을 志向하는 檢察의 覺醒은 이어지지 않을까 操心스레 展望합니다. 그러면 檢察 文化도 成熟하겠죠. 朝鮮王朝는 司憲府·司諫院·弘文館이라는 事情(司正) 機關이 健在해 政治에서 道德性을 强化하고 長壽했습니다. 그런 點에서 보면 최재형 監査院長이 脫原電 政策을 感謝(監査)韓 일은 印象的이에요. 後날 文 大統領이 尹錫悅·崔在亨 두 사람을 임명해 法治 確立에 寄與했다는 (歷史的) 評價가 나올지도 모르죠. 歷史의 아이러니예요.” 

    그는 “檢察이 權力에 萎縮되고 高位公職者犯罪搜査處(公搜處)가 政治的 獨立과 中立을 지키지 않으면 法治는 後退할 것”이라는 憂慮도 덧붙였다.


    持續 可能한 福祉와 經濟成長

    世上의 關心이 權力놀음에 埋沒된 사이 民生經濟는 絶壁에 내몰렸다. 雇傭은 얼어붙고 貧者의 所得은 줄었으며, 非正規職은 急增했다. 뛰어난 經世家가 必要한 時代지만 그만한 그릇의 人物이 좀체 눈에 띄지 않는다. 김육이라면 ‘只今, 여기’의 韓國에 어떤 處方을 내렸을까. 李 敎授가 말했다. 

    “宋時烈을 비롯해 朱子學者 大部分의 생각은 失業과 不平等 對策으로 財政支出을 통한 福祉 擴充을 主張하는 立場에 통해요. 反面 金堉은 民生 安定을 優先 課題로 삼으면서도 財政健全性을 考慮한 支出을 主張했을 겁니다. 또 持續 可能한 福祉制度를 追求했을 거예요. 良質의 일자리를 늘릴 수 있도록 經濟成長을 圖謀하는 政策開發에도 힘썼을 테고요.”



    고재석 기자

    고재석 記者

    1986年 濟州 出生. 學部에서 歷史學, 政治學을 工夫했고 大學院에서 映像커뮤니케이션을 專攻해 碩士學位를 받았습니다. 2015年 下半期에 象牙塔 바깥으로 나와 記者生活을 始作했습니다. 流通, 電子, 미디어業界와 財界를 取材하며 經濟記者의 文法을 익혔습니다. 2018年 6月 동아일보에 入社해 新東亞팀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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