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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精神 안 차리면 舊韓末 온다”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②]|新東亞

“精神 안 차리면 舊韓末 온다”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②]

  • 허문명 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0-12-02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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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성전자는 이미 亡한 會社

    • 不良은 癌이다

    • 先進國 門턱에 온 듯한 錯覺에서 벗어나라

    • 不眠症에 시달린 밤들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는 隔週 水曜日 連載합니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고 천명한 ‘신경영 선언’ 당시 모습. [동아DB]

    故(故) 이건희 三星그룹 會長이 1993年 6月 7日 獨逸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子息 빼고는 다 바꾸라”고 闡明한 ‘新經營 宣言’ 當時 모습. [東亞DB]

    李健熙 會長은 1993年 6月 프랑크푸르트 宣言에서 삼성전자를 向해 ‘이미 亡한 會社’ ‘2流 企業’이라고 酷毒하게 깎아 내렸다. 先進國과 日本 技術을 模倣하는 데만 汲汲하고 世界 市場에서 싸구려 取扱을 받는 現實을 뼈아프게 짚은 것이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한 말이다. 

    “國內에서 그래도 낫다는 三星電子를 보자. 商品 數는 數千 가지, 系列社는 30餘 個다. 이中 國際 競爭力이 있다고 할 수 있는 製品은 半導體, 그것도 메모리 하나다. 分明히 말하지만 三星은 國際的으로 2流다. 내가 會長이 되고 입버릇처럼 不良 없애라, 質(質) 爲主로 가자고 했는데 아직도 量(量)에 매달리고 있다. 만들기만 하면 팔 수 있다는 건 舊 時代的 얘기다. 오그라지고 망가지는 게 눈 앞에 보이는데 (여러분들은) 눈 하나 까딱 안 한다.”

    삼성전자는 이미 亡한 會社

    1980년 아버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 [동아DB]

    1980年 아버지 이병철 삼성그룹 創業主(왼쪽)와 함께 찍은 寫眞. [東亞DB]

    그러면서 삼성전자를 비롯한 系列社를 條目條目 重患者에 比喩했다. 

    “삼성전자는 3萬 名이 만든 物件을 6000名이 하루 2萬 番 씩 고치고 다닌다. 쓸데없이 資源浪費하고 페인트 浪費해 空氣 나쁘게 하고 나쁜 物件 만들어 나쁜 이미지를 갖게 한다. 이런 浪費的 集團은 이 世上에 없다. 癌(癌)으로 치면 2기다. 第一 急하게 손을 써야 한다. 機會를 놓치면 3期에 들어간다. 누구도 못 고친다.” 



    삼성건설은 營養失調라고도 했다. 

    “資金과 技術者를 投入시켜 努力해야 회생시킬 수 있다. 삼성건설은 營養失調에 糖尿病까지 겹쳐 있다. 綜合化學은 태어날 때부터 잘못 태어났다. 우리나라 油畫産業에는 제대로 된 經營者가 없다. 키워야 한다. 삼성물산은 삼성종합화학과 三星電子를 나눈 程度의 病이다. 三星生命이 相對的으로 經營을 잘해온 것 같지만 엉터리 契約들 많다. 三星 全體가 이렇게 重病(重病)에 걸려있다.” 

    李 會長은 “앞으로 남은 時間은 7年이다. 2000年까지 죽기 살기로 해야만 살아날 수 있다”며 “只今까지는 누구 責任도 아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고친다. 내가 責任者”라고 宣言했다. 

    그의 癌에 對한 言及은 單純한 엄포가 아니었다. 當時 이 會長은 父親 이병철 會長과 둘째 兄 唱戱 氏를 잇따라 癌으로 잃은 狀態였다. 只今 世上이야 不治病이 아니지만 當時만 해도 癌 診斷은 死刑宣告나 다름없었다. 李 會長 認識 속에서 癌이란 單語는 比喩的 言語가 아니라 經驗을 통해 認識된 실존적 言語였을 것이다. 

    어떻든 自身이 오너인 會社들을 向해 입에 올리기도 힘든 極端的 單語를 써가며 絶望感을 吐해낸 것은 그만큼 狀況이 深刻하다는 心境의 表現이었을 것이며 이제 自身이 直接 執刀醫가 되어 도려내겠다는 悲壯感을 드러낸 말이었을 것이다.


    電源이 꺼져버리는 三星TV

    그는 삼성전자가 만들어내고 있는 不良製品들도 癌細胞에 比喩했다. 

    “三星이 파는 電子製品, 重工業 製品에는 會社 로고가 分明히 박혀 있다. 그런데 故障이 나면 鬱火통이 터진다. 내가 直接 經驗한 것이다. VTR 같은 境遇 아끼는 테이프를 넣었는데 故障이 나 다 갉아먹었다. TV에서 재미있는 映畫를 보는데 휴즈가 똑 떨어져나가 꺼진다. 이러면 當然히 그 會社 辱이 나오지 않겠는가. (消費者들은) 안 잊어버린다. 그 會社 製品 絶對 안 산다. 안 사는 게 重要한 게 아니라 ‘나쁘다’고 떠들고 다닌다. 이것이야말로 몸에 癌細胞가 번지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三星電子 製品 不良率이 現在 水準(3~6%) 이라면 罔措다.” 

    平素 專門 엔지니어에 버금갈 程度로 機械에 該博하던 그의 叱咤는 매우 具體的으로 이어진다. 

    “전자렌지 部品은 500個가 안 된다. 마그네트론을 빼면 鐵板하고 琉璃조각만 붙이는, 當然히 不良 ‘0’으로 가야 하는 單純 産業이다. 그런데도 不良이 繼續 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VTR 部品은 아무리 많아도 800個가 안 되고 컬러TV는 500~600個 程度 된다. 日本의 혼다, 도요타 自動車에 들어가는 部品은 1萬5000個, 2萬 個로 次元이 다르다. 그런데도 不良은 거의 제로다. 自動車같이 움직이고 衝擊 받고 비바람 맞고 아침저녁 溫度差가 甚한 環境에서도 不良率이 제로에 가까운데 집안에만 있는 電子製品 不良率이 3%, 5%, 6%씩 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나는 日本 製品들을 보면 三星은 이대로 門 닫아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명예롭게 닫아야 하나 이런 생각까지 든다. 三星電子가 6%씩 不良을 내면서도 昨年에 250億 利益이 났는데 不良率을 2%로 내릴 境遇 얼마나 利益이 날지 한番 생각해 보라. 不良을 줄이는 건 ‘經營을 잘 해라’ ‘利益을 더 내라’는 次元의 問題가 아니다. 生存과 良心 不良의 問題다.” 

    李 會長 말 中에 ‘보다가 全員이 나가는 TV나 테이프를 갉아먹는 비디오 機器(只今은 機器 自體를 찾아볼 수 없지만)’를 요즘 젊은 世代들은 想像할 수 없을 것이다. 當時 ‘메이드 인 코리아’ 水準이 그랬다. 李 會長이 新經營 宣言을 하기 2年 前인 1991年 駐韓 日本大使館 經濟參事官으로 갓 赴任한 시모告知 슈지라는 사람이 쓴 ‘韓國 家電製品 體驗記’에는 이를 象徵的으로 보여주는 대목이 나온다. 

    그가 經驗한 製品이 三星 것이라는 言及은 없지만 當時 國內 一流企業들의 家電製品 製造 水準이 얼마나 粗惡했는지가 생생하게 담겨있는 에피소드라서 引用한다. 이런 製品을 사는 外國人들이 속으로 우리를 얼마나 우습게 보았을까 하는 생각에 낯이 뜨거워지다가도 그로부터 不過 數十 年 만에 世界 最高 製品을 만들어낸 韓國 企業人과 勞動者들의 勞苦가 새삼 傳해져와 뿌듯한 마음도 든다. 內容을 要約하면 이렇다. 

    “日本에서 가져온 洗濯機가 낡아 韓國 一流 企業 洗濯機를 購入했는데 全혀 움직이지 않았다. 配達해준 사람에게 付託했더니 自己는 배달만 하는 사람이니 서비스 센터에 連絡하라고 했다. 며칠 뒤 서비스센터 사람이 와서 여러 가지 試圖를 해보았는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販賣店에 이야기했더니 바꿔주겠다고 해서 새 것이 왔다. 그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結局 다시 또 서비스센터 사람이 와서 苦生韓 끝에 겨우 움직이게 됐다. 나의 至極히 個人的인 經驗을 갖고 韓國 製造業體 不良率이 높다거나 店員들의 知識이 不足하다거나 애프터서비스가 나쁘다고 一般化할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韓國의 家電製品 製造業體는 顧客을 한 사람 잃었다는 것이다.’(유순하, ‘三星은 없다’에서 再引用) 

    製品 不良이 但只 不便함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企業 이미지는 勿論 나라 이미지까지 갉아먹는다는 點에서 癌細胞와 다를 바 없다는 이 會長의 뼈아픈 指摘에 百分 共感하는 內容이 아닐 수 없다. 

    다시 이 會長의 말이다. 

    “過去에는 1等부터 5等까지 다 살 수 있었다. 2等은 2燈臺로, 3等은 3等의 몫이 있었는데 이제는 1軍에 못 들어가면 모든 것이 0이 되는 時代다. 全國 體典 金메달과 올림픽 金메달은 다르다. 全國體典 1等 했다고 자랑하는 소리 들으면 火가 난다. 이제는 世界 챔피언이라야 챔피언이다. 三星은 只今 狀態로는 當場 問題없다. 하지만 21世紀 初盤까지 이런 狀況으로는 못 간다. 電子 建設 重工業 油化는 危險水位다. 4個社가 흔들리면 그룹이 흔들린다. 그룹이 흔들리면 누구도 못 도와준다. 새 政府에서는 더 그렇다. 우리가 스스로 서로 도와 살리고 키워야 한다. 銘心하라. 마음으로는 變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이제는 行動으로 實踐해야 한다.” 

    이 대목에서 궁금해지는 건, 但只 不良製品을 없애자는 程度의 改善이라면 國內에서 任職員들을 모아놓고 하는 叱責만으로도 充分했을 터인데 왜 굳이 이 會長은 獨逸 프랑크푸르트까지 任員들을 모두 불러내는 破格的인 方式을 썼을까. 여기에는 그의 複雜하고 깊은 內面이 자리하고 있었다.


    精神 안 차리면 다시 舊韓末 온다

    1993年 7月 이인길 동아일보 經濟部 次長은 日本 후쿠오카로 날아가 이 會長을 直接 만난다. 프랑크푸르트에서 新經營을 막 宣言하고 日本으로 날아온 이 會長을 單獨으로 取材했다. 세 時間에 걸친 長時間 인터뷰를 마친 記者는 長文의 記事를 그해 신동아 9月號에 싣는다. 

    李 會長은 新經營 宣言 背景을 묻는 記者에게 이렇게 答한다. 

    “會長이란 사람이 비싼 돈 써 가며 任職員들을 海外에 불러내 새벽 3時, 4時까지 講演을 하고 있다는 것 自體가 우리 企業의 危機 狀況을 말해주는 겁니다. 

    國家로 보나 三星으로 보나 現在가 普通 危機狀況이 아닙니다. 精神 안 차리면 舊韓末 같은 悲慘한 事態가 올 수 있습니다. 李完用이 逆賊임은 분명해요. 그러나 그때 李完用이 없었어도 김완용, 박완용이 나왔을 거요. 狀況이 그렇게 돼 있었다는 거죠. 政治도 썩어 있었고 國力도 제로에 가까웠잖아요. 職員들에게 計算시켜보니 當時 우리 國力은 耕作地 基準으로 1000億 원이 안 됐어요. 

    언제까지 日本 辱만 하고 뭉개버리고 있을 겁니까. 世界에서 生産力이 第一 높은 곳이 日本입니다. 우리가 요대로 조금만 가면 3流 4流로 떨어지고 맙니다. 엔高가 돼도 數値上으로는 좋게 나오지만 生産, 機械 모두 日本에 依存하고 있으니 플러스 마이너스하면 없어요. 

    過去에 韓日合邦이 하드的인 것이었다면 앞으론 소프트的 經濟的 合邦이 눈앞에 보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時代에 또 다른 李完用이 나오는 걸 저는 볼 수가 없습니다. 

    日本을 보세요. 機械 로봇 할 것 없이 主要 部門에서 最小 30%에서 70~80%까지 世界 生産을 獨占하고 있어요. 日本은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왜 못합니까. 저는 어릴 때부터 外國을 자주 다녀와서 一流가 뭐고 質이 뭔지 느낌으로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10年 程度가 重要한 時期인데 또 機會를 喪失할 수는 없는 일이죠.” 

    -國內에서 해도 될 텐데 왜 何必이면 海外에서 會議를 하게 됐습니까. 

    “아무리 말을 해도 듣지를 않아요. 一流 先進國이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나 自己 눈으로 直接 보고 느끼라는 거지요. 海外支社에 몇 年씩 있는 사람들이 通譯 하나 제대로 못해요. 原子力 發電所를 봐도 그냥 지나치고 말아요. 建設에는 몇 年이 걸리는지, 電力單價는 얼마고 環境은 어떤지, 直接 보고 危機意識을 느껴 變化의 必要性을 感知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海外에서 會議를 한다고) 數十 億 쓰는 것이 問題가 아닙니다. 先進國의 基礎가 뭔지 보고 刺戟 받으면 1席5條의 效果가 나와요. 

    지난 20年間 三星은 賣出이 450億 원 規模에서 35兆 원으로 늘었습니다. 熱心히 일해서 그런 줄 알지만 錯覺입니다. 1970~1980年代 高度成長은 半導體, 株式會社, 컴퓨터의 出現에다 生産大國 日本에 隣接한 地理的 利點이 있었고 소 팔고 논 팔아 敎育을 시킨 結果가 한데 어우러진 것입니다. 그런데 三星을 包含해 너나없이 제 잘난 德으로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니 이걸 깨우치려는 겁니다.” 

    -우리가 果然 先進國 隊列에 올라설 수 있을까요. 

    “只今 世界는 業(業)의 槪念이 急速度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過去 10年 동안 世上이 바뀐 것보다 앞으로 10年 동안 더 빨리 더 많이 바뀔 것입니다. 自動車를 한番 봅시다. 自動車에서 電氣·電子 比重이 只今은 25%~30% 程度지만 앞으로 10年 뒤엔 50% 以上이 돼 電氣·電子 硏究 안 하면 外國과 競爭하기 힘들게 됩니다. 日本의 도요타 닛산 혼다에서 每年 300~500餘 名씩 電氣·電子 技術者 뽑아 훈련시키고 있어요. 그러니 只今부터 三星이 어디에 와 있고 얼마나 모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동안 모르고 사는 게 便했는지 모르죠. 

    인프라를 보세요. 陸英修 女史 狙擊 事件(1975) 以後 인프라에 投資를 全혀 안 했습니다. 向後 2, 3年 놓치면 今世紀의 變化는 마지막입니다. 政府와 國民, 企業이 三位一體가 돼 뛰어야 합니다. (…) 只今 半導體 메모리, 핸드폰 初期 段階, 팩시밀리 程度를 앞서가고 있는데 이것도 投資 안 하면 몇 年 넘기기 힘들어요. 完全히 2流, 3流가 되지 않으려면 港灣 空港 道路 投資 서둘러야 합니다. 얼마 前 아시아나 事故가 왜 났습니까. 操縱士 過失도 勿論 크죠. 그러나 基本 問題는 인프라예요. 보잉 737期면 最短 滑走路 길이가 2000m, 幅 40m 以上이에요. 外國 가면 木浦 같은 飛行場은 제트 戰鬪機用 外엔 없어요.” 

    홍콩에서 發刊되는 아시아위크 1994年 6月 1日子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新經營 宣言은) 미리 생각하거나 計劃한 戰略이 아니었다. 變化 없이는 2流 企業으로 轉落할지 모른다는 危機意識이 衝擊療法을 쓰게 했다. 冷戰時代 終熄과 함께 經濟戰爭 時代가 本格 始作됐으나 三星은 勿論 韓國民 全體가 深刻함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不眠症과 食慾不振에 시달렸다

    2012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 ‘CES 2012’를 찾은 이건희 회장. [삼성전자 제공]

    2012年 1月 美國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世界 最大 家電展示會 ‘CES 2012’를 찾은 李健熙 會長. [三星電子 提供]

    生前에 그가 唯一하게 펴낸 冊인 ‘생각 좀 하며 世上을 보자’(1997)에는 新經營을 宣言하기 直前까지 얼마나 不安과 緊張의 나날을 보냈는지가 淡淡하게 記錄돼 있다. 

    “87年 會長에 就任하고 나니 寞寞하기만 했다. 79年에 副會長이 된 以後 經營에 部分的으로 關與해 왔지만, 그때는 ‘先親’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었다. 이제는 내가 모든 걸 짊어져야 하는데, 世界 經濟는 低成長 幾微가 보이고 있었고 國內 經濟는 3低 好況 뒤의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이런 狀況인데도 三星 內部는 緊張感이 없고 ‘내가 第一’이라는 錯覺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50年 동안 굳어진 體質이 너무도 단단했다. 系列社 間, 部署 間 利己主義는 눈에 보일 程度가 되어 消耗的 競爭을 부채질하고 있었다. 이런 三星의 現實과 世紀末的 變化에 對한 危機感에 등골이 오싹해질 때가 많았다.” 

    李 會長은 甚한 不眠症과 食慾不振에도 시달렸다고 告白한다. 

    “92年 여름부터 겨울까지 不眠症에 시달렸다. 이대로 가다가는 事業 한두 個를 잃는 것이 아니라 三星 全體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危機感이 掩襲해 食慾도 사라졌다. 불고기를 3人分은 먹어야 直星이 풀리는 大食家인 내가 食慾이 떨어져서 하루 한 끼를 艱辛히 먹을 程度였다. 그 해에 體重이 10㎏ 가까이 줄었다.”

    앞서 紹介한 1993年 9月號 新東亞 인터뷰에서도 이런 熾烈한 內面의 一端을 보여준다. 

    -普通 때 宅으로 가시면 뭘 하십니까. 

    “會社에서도, 집에서도 일뿐입니다. 그리고 TV뉴스를 每日 2時間씩 꼭 봅니다. ‘東亞’ ‘朝鮮’ 等 4代 日刊紙의 三星 關係 記事를 모조리 읽고 특별한 이슈가 있으면 적어도 2個 新聞의 論說과 解說을 꼭 읽죠. 經濟雜誌 7個, 日刊經濟誌 2個를 보고, 골프雜誌 1個, 自動車雜誌 2個 健康雜誌, 技術雜誌, 그 外 國內 TV放送과 日本 NHK 技術 關係 다큐멘터리, 動物 關係 프로그램까지 보다 보면 時間이 많이 걸립니다. 하루 睡眠時間을 4時間 程度로 줄인 게 1年이 됐습니다. 요즘은 緊張이 되니 하루 3時間, 어떨 때는 24時間도 잠 안 자고 견딥니다.” 

    그런데 이 會長의 이런 危機意識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었다. 그는 就任 直後인 1987年 以後부터 機會가 있을 때마다 危機意識을 强調했다. 

    新東亞 1988年 3月號는 ‘李 會長 就任 以後 매스컴 單獨인터뷰’라는 題目으로 그의 育成을 실었는데, 이 會長이 新經營 宣言 5年 前부터 大韓民國의 未來를 巨視的 眼目으로 보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게 하는 메시지를 내놓는다. 

    “歷史的으로 보면 世紀末에는 반드시 큰 變化가 있었습니다. 18世紀, 19世紀가 다 그랬어요. 이제 20世紀末을 우리가 보내는데, 느낌으로 무언가 대단한 變化가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變化에 겁먹을 必要는 없지요. 果敢히 맞서 對處해 나가야 합니다.” 

    事實 그의 不安은 現在에 對한 밑도 끝도 없는 不滿足이나 걱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變化하는 안팎의 國內外 狀況에 對한 綿密한 洞察에서 나온 것이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했던 그의 말이다. 

    “世界는 國境 없는 戰爭에 突入했다. 先代(先代)가 經營했던 1987年 以前과 現 經營 狀況에는 엄청난 差異가 있다. 政治 外交 尖端技術 等 모든 分野가 急變하고 있다. 過去 50年의 變化보다 向後 10年에 있을 變化의 量과 質이 훨씬 더 많고 클 것이다. 企業組織, 硏究所, 生産方式, 思考의 틀 모든 게 바뀌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世上이 다가오고 있다. 全 世界가 市場開放을 要求하고 있고 中國 같은 後發 開途國이 追擊해오고 있다.” 

    李 會長은 이대로 가다가는 三星을 넘어 大韓民國이 3流로 떨어질지 모른다는 危機感까지 갖고 있었다. 

    “우리는 60年代에 經濟基礎를 닦았고, 70~80年代에 經濟의 틀이 잡혔다. 80年代 中盤까지는 모든 것이 쉬워서 單純 組立 事業으로 輸出도 하고 먹고 살았다. 後進國에서 開發途上國으로 成功한 代表 나라가 韓國이었다. 옛날에는 行政府와 全 國民이 危機意識과 헝그리 精神을 가지고 눈이 반짝반짝했는데 요즘은 모든 게 어려워졌는데도 그저 잘 되겠지, 몇 가지만 改善하면 옛날같이 되겠지 安易한 생각을 하고 있다. 이제는 모든 製品이 複合化 시스템化 差別化되지 않으면 팔기도 어렵지만 팔 수도 없다. 物件 하나 팔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國家 生産性을 높이는 일이 國家·國民·財界 다 合쳐도 될동말동 어려워졌는데 (狀況을) 아주 우습게 보고 있다. 조금만 精神 차리면 된다고 생각하고 錯覺하고 있다. 三星은 勿論 나라 全體가 이 時點에서 精神 안 차리면 인도네시아처럼 3流局으로 떨어진다. 난 이것이 눈에 보인다.” 

    27年 前 育成인데도 바로 오늘날의 狀況을 보고 말하는 듯 생생하게 들린다. 當時 그의 눈에 비친 것은 果然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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