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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佛像과 羅漢像의 人間的 魅力에 對해…|신동아

어느 佛像과 羅漢像의 人間的 魅力에 對해…

[名作의 祕密?] 蒼嶺寺터 羅漢像, 水鐘寺 石塔 佛像

  • 이광표 西原大 敎養大學 敎授

    kpleedonga@hanmail.net

    入力 2021-01-09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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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잘생기지 않고 平凡한 羅漢像

    • 庶民의 얼굴 닮아 共感 불러일으켜

    • 王家 女人들 家族 걱정 담다 보니

    • 世俗的 表情 지을 줄 아는 佛像 誕生

    강원 영월군에서 출토된 창령사터 오백나한상은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실에 자리를 잡았다. [국립중앙박물관]

    講院 寧越郡에서 出土된 蒼嶺寺터 五百羅漢賞은 國立中央博物館 常設展示室에 자리를 잡았다. [국립중앙박물관]

    風光 좋기로 有名한 京畿 南楊州市 운길산의 水鐘寺(水鐘寺). 北漢江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엔 담백한 雰圍氣의 8角5層石塔이 있다. 이 石塔에서 1957年 解體 修理할 때와 1970年 移轉할 때 두 次例에 걸쳐 金銅佛像 27具, 木造佛像 3具가 發見됐다. 하나의 塔 속에서 이렇게 많은 佛像이 發見되기는 처음이다. 都大體 누가 왜 이리도 많은 佛像을 塔에 넣은 것일까. 나온 佛像의 模樣도 아주 特異하다. 하나같이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리고 있다. 

    머리와 上體가 지나치게 크고 代身 下體는 貧弱하다. 매우 異例的이다. 宗敎 彫刻 特有의 理想的인 崇高美라고는 全혀 찾아볼 수가 없다. 궁금症이 가시지 않던 次에, 興味로운 石佛을 만났다. 江原道 寧越의 羅漢像(羅漢像)이다. 


    甲男乙女의 얼굴을 닮은 羅漢像

    2018年 8月, 江原 春川市 國立春川博物館에서 ‘蒼嶺寺터 五百羅漢, 當身의 마음을 닮은 얼굴’이란 展示가 열렸다. 講院 寧越郡에서 發掘된 羅漢像 돌조각들을 선보이는 자리였다. 흔하디흔한 羅漢像이려니 했던 觀客들은 新鮮한 衝擊과 함께 깊은 感動을 받았다. 五百羅漢의 모습이 너무나 素朴하고 너무나 人間的이었기 때문이다. 

    羅漢(羅漢)! 羅漢은 佛敎에서 깨달음을 얻은 聖子를 뜻한다. 부처의 弟子 500名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해서 흔히 ‘五百羅漢’이라 한다. 羅漢像은 一般的인 佛敎彫刻像보다는 素朴하고 便安한 便이다. 그럼에도 展示에 나온 蒼嶺寺터 羅漢들은 좀 더 특별했다. 그 素朴함과 투박함이 他의 追從을 不許할 程度였기 때문이다. 

    微笑 띤 羅漢, 슬픈 表情의 羅漢, 입술을 꽉 다문 羅漢, 고개 들어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羅漢, 수줍어하는 羅漢, 合掌하고 있는 羅漢, 바위 뒤에 숨어 살짝 고개만 내민 羅漢, 생각에 잠긴 羅漢…. 그 表情은 모두 달랐지만 하나같이 우리의 얼굴이었다. 蒼嶺寺터 羅漢像들은 얼굴과 上體가 集中的으로 表現되고 下體는 果敢하게 省略됐다. 그래서 좀 더 투박하고 素朴해 보인다. 花崗巖의 거친 質感이 이런 雰圍氣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蒼嶺寺터 羅漢像의 얼굴은 저 멀리 있는 高尙한 宗敎的 얼굴이 아니라 우리가 오다가다 만나는 至極히 平凡한 얼굴들이다. 그렇기에 喜怒哀樂이 담겨 있으며, 그럼에도 얼굴은 맑고 天眞하다. 슬퍼하는 表情조차 便安하다. 觀客 反應은 뜨거웠다. 國立春川博物館 展示는 몇 個月 더 延長돼 2019年 初까지 繼續됐다. 展示는 2019年 5月 서울 龍山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어졌다. 

    국립중앙박물관 展示는 한발 더 나갔다. 展示의 한 軸은 國立春川博物館 展示의 틀을 維持했고, 다른 한 軸은 破格을 試圖했다. 設置美術家 김승영의 作品 ‘Are you free from yourself?’를 五百 羅漢과 함께 演出한 것이다.

    21世紀 庶民 表情도 담은 羅漢像

    2019년 5월 30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실에 
오백나한상이 스피커 구석구석 자리 잡고 앉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2019年 5月 30日 서울 龍山區 국립중앙박물관 展示室에 五百羅漢賞이 스피커 구석구석 자리 잡고 앉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김승영은 어둡고 寂寥한 空間에 스피커 700餘 臺를 塔처럼 쌓아올리고 그 사이사이 羅漢像과 부처像 20餘 點을 配置했다. 空間은 구석구석 魅力的이었다. 展示 空間에 들어선 觀客들은 저마다 소리 없는 歎聲을 질렀다. 

    김승영은 疏通과 記憶을 主題로 다양한 設置美術을 演出해 왔다. 特히 스피커 設置美術로 注目을 받아왔다. 그는 靑銅 模型을 쓰기도 한다. 1970, 1980年代 使用했던 스피커를 靑銅으로 形態를 떠내 製作한 뒤 數百 個를 높이 쌓아 塔처럼 만드는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展示에서는 靑銅 模型이 아니라 實際 오래된 옛날 스피커를 動員했다. 花崗巖 羅漢像과의 調和를 위해 아날로그 實物의 맛을 살린 것이다. 

    김승영의 스피커 美術은 羅漢像의 魅力을 限껏 드높였다. 스피커와 羅漢像의 組合은 觀客이 思索에 빠지도록 도왔다. 觀客들은 熱狂했다. “아 나는 누구인가”라고 되뇌는 사람도 있었다. 누군가는 스피커 塔이 都市의 빌딩을 象徵하고 그 사이사이의 羅漢은 빌딩 숲에서 省察하는 人間을 形象化한 것이라고 分析했다. 그렇다. 스피커 사이에 있는 羅漢像들은 都市 속의 우리들이었다. 

    아날로그 스피커와 羅漢像의 만남은 都市와 人間이라는 圖式的 이미지에 局限되지는 않는다. 스피커 美術 作家의 直觀的인 感覺은 蒼嶺寺터 羅漢像을 效果的으로 鑑賞할 수 있게 해주었다. 김승영이라는 作家의 創意性도 돋보였지만 展示의 主人公은 蒼嶺寺터 羅漢像이었다. ‘素朴하고 볼품없는’ 羅漢像이 없었다면 觀客의 感情을 刺戟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불타는 蒼嶺寺에서 살아남은 羅漢들

    이 羅漢들은 2001年 5月 江原道 寧越郡에서 한 個人이 庵子 建立 工事를 하던 途中 偶然히 發見됐다. 正式 發掘이 進行됐고, 돌조각 羅漢像 317點을 發掘했다. 이 가운데 穩全한 形態를 維持한 緩刑은 64點이었다. 몸體만 發掘된 것은 135點, 머리만 發見된 것은 118點이었다. 

    이곳에선 ‘창령(蒼嶺)’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기와가 함께 出土됐다. 이를 통해 高麗 때 蒼嶺寺라는 절이 있었음이 밝혀졌다. 專門家들은 蒼嶺寺가 高麗 때 創建돼 朝鮮 電氣로 이어진 뒤 壬辰倭亂 直後 斃死(廢寺)된 것으로 推定한다. 

    發掘團은 놀랍게도 一部 羅漢像이 불길에 露出된 痕跡을 確認했다. 羅漢像들을 모셨던 金堂은 火災로 무너진 痕跡이 歷歷했다. 이것은 무슨 狀況일까. 이런 推論이 可能하다. 壬辰倭亂 때에 毁損됐거나, 그 무렵 누군가가 蒼嶺寺를 意圖的으로 斃死시키면서 羅漢像度 함께 毁損한 것이다. 말이 毁損이지 破壞였을 可能性이 濃厚하다. 推論이 이즈음에 미치자 이런 생각이 몰려온다. 저 素朴한 羅漢像들이 뜨거운 불길을 견디느라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蒼嶺寺터 羅漢像을 볼 때마다 水鐘寺 8角5層石塔에서 나온 자그마한 佛像들이 떠오른다. 表情과 外形이 蒼嶺寺터 羅漢像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서글퍼 보이기도 하고, 壅塞해 보이기도 하다. 1957年과 1970年 두 次例에 걸쳐 水鐘寺 8角5層石塔에서 發見된 佛像은 30具. 以後 4點이 紛失됐고 現在는 26點이 서울 종로구 曹溪宗 佛敎중앙박물관에 所藏돼 있다. 

    水鐘寺 石塔에서 나온 佛像들은 大部分 등이 굽었다. 堂堂하고 성스러운 法悅(法悅)의 모습이 아니라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佛像이 어떻게 이런 모습일 수 있을까.


    王家 女人들이 바친 등 굽은 佛像

    경기 남양주시 수종사 8각5층석탑(왼쪽). 이 탑 내부에 30점의 불상이 들어 있었다. [동아DB]

    京畿 南楊州市 水鐘寺 8角5層石塔(왼쪽). 이 塔 內部에 30點의 佛像이 들어 있었다. [東亞DB]

    調査 結果, 佛像들은 두 次例에 걸쳐 奉安됐다. 1493年에 淑容 洪氏(淑容 洪氏), 淑容 鄭氏(淑容 鄭氏), 宿願 金氏(淑媛 金氏)가 6點을 石塔에 奉安했고, 1628年에 仁穆大妃가 金銅佛像 23點을 奉安했다. 1493年 發願文(發願文)을 보니 佛像의 발原子들은 모두 後宮(後宮)이었다. 發願文에 이런 대목이 있다. “1493年 계축년 6月 7日에 淑容 洪氏, 淑容 鄭氏, 宿願 金氏는 主上殿下가 萬歲를 누리고 子息들이 福을 받고 오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釋迦如來上 1具와 觀世音菩薩上 1具를 造成하옵니다.…임금의 德을 稱頌함이 해나 달과 나란히 하고, 先大王의 壽命이 天地와 같이 永遠하며, 兩쪽 두 분 大妃媽媽, 王后, 世子 큰 福을 받아 태어나셨으니 모두 다 壽命長壽에 오르고…모든 아들과 사위들이 잘 자라 健康하고 마음 便安하며 福과 壽命이 더욱 높아지고 머무르는 곳마다 主上의 聖스러운 못에 잠기며 世世生生토록 恒常 主人으로 모시겠사옵니다.” 成宗의 後宮들이 住商 殿下가 萬歲를 누리게 해달라고 祈願하는 內容이다. 아울러 自身들의 子息이 福을 누리게 해달라고 했다. 이게 무슨 意味일까. 그 무렵 成宗은 健康이 좋지 않았다. 病患을 앓고 있었다. 當時 成宗의 後宮들에게 모두 어린 子息들이 있었다. 後宮들은 成宗의 健康이 늘 걱정이었다. 그러나 더욱 근심되는 點은 子息들의 安慰와 未來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後宮들의 處地에서 보면 成宗은 오래 살아야 했다. 

    成宗이 世上을 떠난다면, 權力 다툼의 소용돌이에서 後宮의 子息들은 政治的으로 탄압당할 可能性이 濃厚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後宮들의 親庭이 風飛雹散 날 수도 있다. 끔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子息을 둔 어머니로서는 너무 當然한 걱정이었다. 그런 緣由에서 成宗의 健康 回復과 無病長壽를 祈願하며 佛像을 發源해 塔 속에 奉安한 것이다. 

    主上에게 큰일이 닥치지 않게 해 오래오래 살게 해주시고, 그래서 우리 後宮들의 子息들도 別 頉 없이 無事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이다. 至極히 現實的인 念願이었고 그들에겐 매우 切迫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494年 成宗은 38歲의 젊은 나이로 끝내 世上을 떠났다. 後宮들의 懇切한 期待가 散散조각 나버린 것이다.

    仁穆大妃 죽은 血肉 생각하며 羅漢像 바쳐

    좀 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仁穆大妃(仁穆大妃)가 1628年 發源한 佛像 23點이다. 宣祖의 繼妃이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生母이며 光海君의 繼母인 仁穆大妃가 發源한 佛像이다. 仁穆大妃는 1628年 23點의 佛像을 造成해 水鐘寺 8角5層石塔을 열고 內部에 奉安했다. 光海君에 依해 목숨을 잃은 아버지와 아들 영창大君의 極樂往生을 祈願하기 위해서였다. 

    仁穆大妃는 1602年 19歲의 나이에 宣祖의 繼妃가 돼 1606年 영창大君을 낳았다. 하지만 1608年 光海君이 卽位하면서 아버지 金霽南(金悌男)과 아들 영창大君을 잃고 廢庶人(廢庶人)李 되고 말았다. 1618年에는 딸 정명공주(貞明公主)와 함께 서궁(西宮·當時 慶運宮이자 現在의 德壽宮)에 갇히는 身世로 轉落했다. 狀況은 絶望的이었다. 그런데 드라마틱한 反轉이 찾아왔다. 1623年 仁祖反正(仁祖反正)으로 復位된 것이다. 復位는 됐지만 이미 아버지와 아들을 잃은 뒤였다. 

    仁穆大妃는 幽閉 期間 佛經을 製作하는 等 佛敎와 함께 憤怒와 외로움을 달랬다. 復位된 以後에는 査察을 重唱하고 不和, 佛像을 製作하는 데 積極的으로 힘을 보탰다. 그렇게 佛敎에 依支하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極樂往生을 빌었다. 圓筒함을 풀어내고 同時에 살아남은 者들의 無事 安危를 祈願했다. 水鐘寺 8角5層石塔에 奉安한 佛像이 그 證據다. 

    仁穆大妃가 發源한 佛像에는 “1628年 小成正義大王大妃(昭聖貞懿大王大妃)가 發源하고 23존을 鑄造하여 보탑에 安置하오니 後世에 衆生을 救濟하여 주시옵소서. 花園(?員) 成人(性仁)”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좀 壅塞하다. 全體的으로 웅크린 姿勢로 허리를 若干 구부리거나 뒤로 젖히고 있다. 上體에 비해 下體는 貧弱하고 그로 인해 佛像의 比例感이 많이 떨어진다. 부자연스럽다. 어깨는 좁고 처져 있으며 목을 앞으로 내밀었다. 勿論 微笑를 짓기도 하지만 왠지 쓸쓸해 보인다.

    切迫함과 罪責感이 빚어낸 페이소스

    수종사 8각5층석탑에서 출토된 30점의 불상 중 26점이 서울 종로구 조계종 불교중앙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불교중앙박물관]

    水鐘寺 8角5層石塔에서 出土된 30點의 佛像 中 26點이 서울 종로구 曹溪宗 佛敎중앙박물관에 展示돼 있다. [佛敎中央博物館]

    1493年 成宗의 後宮들이 發源한 佛像은 그렇지 않지만, 仁穆大妃가 發源한 佛像들은 이렇게 하나같이 壅塞하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이를 두고 17世紀 前半期 佛像의 特徵이라고 評價하는 見解도 있다. 朝鮮 後期의 淳朴한 佛像으로 이어지는 過程에서 나타난 佛像이라는 말이다. 그런 說明에도 不拘하고 世人들의 눈에는 자꾸만 안쓰럽다. 

    1493年, 나이 어린 子息을 둔 後宮들은 成宗의 甁이 하루빨리 治癒돼 長壽하고 그 德分에 子息들이 無事하기를 바랐다. 1628年 仁穆大妃는 悲鳴에 목숨을 잃은 아버지와 아들의 冥福을 비는 일 그리고 自身과 아들과 親庭의 怨恨을 푸는 일이 무척 懇切했을 것이다. 水鐘寺 石塔 佛像은 모두 王室의 女性들이 發源한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다른 佛像보다 華麗하고 아름다워야 할 텐데, 意外로 壅塞하고 볼품없다. 佛像을 發源한 成宗의 後宮들과 仁穆大妃에게는 이런 가슴 아픈 事緣이 숨어 있었음을 看過할 수 없다. 子息을 지켜내야 한다는 어미로서의 切迫함, 子息을 지켜내지 못한 어미로서의 悽絶한 罪責感. 

    金銅佛像을 製作한 사람은 조각勝 成人(性仁)이다. 仁穆大妃가 그에게 어떤 말을 傳했고 그가 佛像을 만들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佛像에서 仁穆大妃와 王室 女性들의 힘겨움과 서글픔을 만나게 된다. 威嚴이라고는 全혀 없는, 壅塞하고 볼품없는 차림새로 自身의 아픔과 憤怒, 罪責感을 드러내고자 했던 건 아닐까. 水鐘寺 石塔에서 나온 金銅佛像들은 모두 높이 10cm 內外의 小型불이다.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아들 영창大君의 모습을 이렇게 가슴에 묻으려고 했던 것 아닐까. 자꾸만 이런 想像을 해본다.

    壅塞함과 볼품없음, 世俗의 또 다른 美學

    蒼嶺寺터 羅漢像 展示는 人氣에 힘입어 釜山으로 이어졌고, 2020年엔 故鄕 寧越의 동강寫眞博物館에서 特別展이 열렸다. 이를 두고 “20年 만의 歸鄕”이라고 했다. 國立春川博物館은 蒼嶺寺터 羅漢像을 展示하는 常設展示室을 만들었다. 展示室에 이름까지 붙였다. ‘蒼嶺寺터 五百羅漢, 나에게로 가는 길.’ 素朴하고 볼품없는 羅漢像이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그것도 아주 切切하게 말이다. 스피커 美術家 김승영의 말처럼, “當身은 當身으로부터 자유롭습니까(Are you free from yourself)”라고 묻는 것 같다. 

    아름다운 佛像은 많다. 國寶로 指定된 石窟庵 佛像도 있고, 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度 있다. 그러한 佛像에서는 말 그대로 高潔한 法悅의 美, 宗敎的 事由를 發見하게 된다. 이에 비하면 蒼嶺寺터 羅漢像과 水鐘寺 石塔 佛像들은 至極히 素朴하다. 石窟庵 佛像, 半跏思惟像과 다른 魅力을 느끼게 된다. 

    우리 삶은 高潔하지만, 한便으로는 초라하고 壅塞하다. 憤怒와 怨望이 가득하기도 하다. 그래서 볼품없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돌아보면 또 맑고 純粹하다. 그것이 삶이 아닐까. 蒼嶺寺터 羅漢像과 水鐘寺 石塔 佛像에서 우리네 世俗의 美學, 볼품없음의 美學을 만난다.


    이광표
    ● 1965年 忠南 豫算 出生
    ● 서울대 考古美術史學科 卒業
    ● 高麗大 大學院 文化遺産學協同過程 卒業(博士)
    ● 前 동아일보 論說委員
    ● 著書 : ‘그림에 나를 담다’ ‘손 안의 博物館’ ‘韓國의 國寶’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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