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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番도 겪지 못한 精神的 危機 온다”|신동아

經濟思想家 李健熙 探究③

“한 番도 겪지 못한 精神的 危機 온다”

  • 허문명記者

    angelhuh@donga.com

    入力 2020-12-16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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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끓는 냄비 속 개구리 身世

    • 나는 속아 살아왔다

    • 精神的 危機가 第一 큰 問題

    • 한 番도 겪지 못한 어려움 온다

    2012년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전시회 ‘CES 2012’를 찾은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2012年 1月 美國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世界 最大 家電展示會 ‘CES 2012’를 찾은 故(故) 이건희 三星그룹 會長.

    삼성그룹은 四史(社史)인 ‘三星 60年史’에서 1993年을 ‘分岐點이 되는 해’로 記錄한다. 李健熙 會長의 新經營 宣言이 나온 해이니 그럴 만하다. 그렇다면 왜 何必 1993年일까. 

    돌아보면, 韓國 社會에서 1993年은 未曾有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分岐點이 되는 해였다. 國際 政治·經濟 秩序가 大變革의 한가운데 서 있었기 때문이다. 2年 前인 1991年 옛 蘇聯, 東유럽 等 社會主義가 沒落하면서 理念과 冷戰의 時代가 幕을 내렸다. 韓國은 1992年 臺灣과 斷交하고 中國과 修交했다. 

    무엇보다 큰 變化는 世界 貿易 秩序의 大變動이었다. 우루과이라운드 協商 妥結로 農産物 市場이 開放되는 等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었다. 第2次 世界大戰 以後 自由貿易을 目標로 設立된 GATT(가트·關稅 및 貿易에 關한 一般 協定) 體制를 이어받은 우루과이라운드는 原資材나 工産品 次元의 開放을 넘어 農産物, 서비스 分野, 知的財産權, 投資까지 門을 여는 전(全)방위 貿易 開放 協商이었다. 우루과이라운드의 法的 土臺는 世界貿易機構(WTO)였다. 有名無實하던 나라 間 貿易紛爭 調停 過程에 介入해 判決權과 判決에 對한 强制執行權을 갖는 名實相符 世界貿易司法府가 出帆한 것이다. 市場經濟와 社會主義經濟로 兩分됐던 世界市場은 理念과 國境이 없는 無限競爭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韓國도 이때 쌀을 비롯해 映畫, 流通市場 等 全方位的 開放 壓力에 直面했다. 言論과 知識人들은 1993年 12月 15日 우루과이라운드 協商 妥結을 ‘第2의 個國’이라고 했다. 韓國 社會는 이런 急進的 變化를 ‘世界化’로 이어지는 談論으로 끌어올리지 못하고 連日 쌀 市場 開放에 反對하는 農民을 어떻게 달랠 것인지에만 政治·社會的 에너지를 쏟고 있었다. 

    政治는 只今도 그렇듯 허둥댔고 支離滅裂했다. 大統領 候補 時節 ‘쌀 市場 開放 反對’를 외친 김영삼 大統領은 그해 年末에 가서야 對國民 談話를 통해 “孤立보다 競爭과 協力을 選擇할 수밖에 없었다”며 비록 猶豫期間을 두긴 했지만 쌀 市場 開放을 公式化했고, 1994年 11月에 가서야 ‘世界化’를 宣言했다. 그것도 海外 巡訪 中에서였다. 大統領 參謀들은 갑자기 나온 김영삼 大統領의 ‘世界化’ 宣言에 英語에 적합한 말이 없으니 ‘SEKYEHWA’로 表記해 달라고 言論에 付託했을 程度였다.




    끓는 냄비 속 개구리 身世

    이건희 회장이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라”고 천명한 ‘신경영 선언’ 당시 모습.

    李健熙 會長이 1993年 6月 7日 獨逸 프랑크푸르트에서 “마누라와 子息 빼고는 다 바꾸라”고 闡明한 ‘新經營 宣言’ 當時 모습.

    企業人들은 苦悶이 클 수밖에 없었다. 李健熙 會長이 프랑크푸르트 會議에서 말한 ‘냄비 속 개구리論’은 그런 危機意識을 象徵的으로 槪念化한 것이다. 

    “우리가 맞을 經濟戰爭은 武力戰과 다르다. 自己가 戰爭을 하고 있는지, 戰爭에 지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亡해간다. 끓고 있는 냄비 속에 갇힌 개구리처럼 죽는 줄도 모르고 無氣力하게 當할 수 있다는 거다. 이 戰爭의 敗者(敗者)는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다.” 

    李 會長으로서는 于先 三星부터 살리는 게 急했다. 1993年만 해도 삼성전자는 國內 1等 企業이긴 했지만 獨步的이지는 않았다. 主力인 家電 分野에서 금성사(LG電子)와 엎치락뒤치락하며 熾烈한 競爭을 벌이고 있었고 世界市場에서도 ‘世界經營’을 앞세운 大宇와 建設과 重化學工業으로 跳躍하고 있던 現代에 비해 力動性 面에서 뒤처지고 있었다. 

    三星電子는 當時 家電製品, 情報通信, 컴퓨터, 半導體 4個 分野로 構成돼 있었다. 이 中 家電製品은 우루과이라운드에 따른 流通市場 開放으로 危機에 逢着해 있었다. 소니, 山腰 等 日本 家電 業體들이 東南아시아 工場에서 만든 低價品으로 韓國 市場을 攻略해 들어왔다. 

    이윤우 前 三星前者 副會長은 2012年 每日經濟 11月 20日子에서 이렇게 말한다. 

    “當時 三星이 處한 經營 環境은 全般的으로 어수선했다. 三星電子는 그런 저런 會社 中 하나였다. 會社 이름으로 製品을 못 내고 注文者 商標 附着 生産 方式(OEM)으로 내기도 했던 時節이었다.” 

    농심 會長을 지낸 손욱 前 三星綜合技術院長은 40年間 ‘三星 맨’으로 살았다. 三星電子 엔지니어로 始作한 그는 1993年 이 會長의 ‘프랑크푸르트 宣言’ 當時 隨行팀長으로서 經營哲學 構築 過程을 지켜봤다. 京畿 용인시에 살고 있는 그를 만나 當時 三星電子의 位相에 對해 물으니 그는 이렇게 回顧했다. 

    “1970年代 末까지는 三星이 斷然 財界 톱이었다. 三星은 農事짓던 사람들을 産業化 일꾼으로 만드는 데 成功했다. ‘管理의 三星’이란 말은 그래서 나온 거였다. 그 德澤에 1970年代 末까지는 毛織, 製糖, 家電 分野에서 莫强한 1等이었다. 그런데 1980年代로 들어오면서 現代家 朝鮮과 自動車를 武器로 떠올랐고, 待遇가 世界經營 旗幟를 내걸었다. 當時 大學生 入社 選好度를 調査하면 현대와 大宇가 1, 2等, 三星이 3等이었다. 그룹 賣出 規模도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다. 外部的으로는 우루과이라운드 妥結에 따른 無限 競爭, 內部的으로는 任職員들이 過去 成功의 記憶에 安住해 變化의 기운을 알아차리지 못하던 즈음에 이 會長이 就任한 거다. 先代 이병철 會長 時節만 해도 이 會長은 丈人 홍진기 會長과 아버지 옆에 앉아서도 웬만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內心으로는 ‘三星이 漸漸 내려간다. 이 文化와 體質로는 안 된다. 바꿔야 한다’고 苦心했던 것 같다.” 

    李健熙 會長은 1987年 會長 就任 後부터 變化와 改革을 注文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답답해하고 있었다. 1993年 9月號 ‘신동아’ 인터뷰에서는 “(職員들에게) 속았다”고까지 했다.


    나는 속아 살아왔다

    1980년 아버지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왼쪽)와 함께 찍은 사진.

    1980年 아버지 이병철 삼성그룹 創業主(왼쪽)와 함께 찍은 寫眞.

    “只今 생각해 보니 나도 普通 錯覺한 게 아니에요. 1979年인가 公式的인 後繼者로 定해지고 令監(이병철 會長) 돌아가시고 會長 자리에 앉으면 當然히 선대 令監하고 事務室이 늘 붙어 있었으니까 任職員들이 나를 따라올 줄 알았어요. 그러나 그게 아니었어요. 臟器 移植 手術 拒否 反應 같은 거였죠. 요새 내가 비로소 고함지르고 하는데 지난 5年間은 完全히 속았어요.” 

    프랑크푸르트 會議에서는 “일하기가 어렵다”는 하소연까지 한다. 

    “三星의 일에 내가 손댄 이래, 나는 數百 番도 더 속았다. 이番이 마지막이다. 지난 5年間 쌔가 빠지게(입이 닳을 만큼) 無盡藏 얘기를 했는데도 變化의 要因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會長인데도 모든 組織이 微動도 하지 않는다. 왜 이렇게 일하기가 어려운가.” 

    그가 느꼈던 緊張感은 空虛한 메아리로 會議室에서만 맴돌 뿐 제대로 傳播되지 못하고 있었다. 

    박근희 CJ대한통운 代表理事 副會長(前 三星生命 副會長)은 1978年 삼성전관에 入社했다. 1987年 會長 祕書室 運營팀에서 課長으로 勤務할 때 이 會長이 就任하면서 ‘李健熙 會長 祕書室 1期’ 멤버가 됐다. 그는 “當時 三星 任員들은 緊張感은커녕 會長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理解하지 못하고 있었다”며 이렇게 말했다. 

    “한두 발 앞서가는 內容을 말한 탓도 있었지만 생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程度가 아니라, 아예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모르는 狀況이었다. 1980年代 末부터 디지털 人力이나 소프트 經營이란 表現을 자주 썼는데 ‘디지털’이라는 말은 글로벌 市場에서 製品들이 막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요즘 人工知能(AI) 時代를 準備하는 것처럼 ‘디지털 時代를 準備해야겠구나’ 程度의 생각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프트 經營이라는 말은 相當히 生疏해 ‘大體 무슨 말이지’ 하는 雰圍氣였다. 우리 같은 ‘卒兵’들은 ‘(現場 經驗 없이) 副會長에서 바로 會長에 就任했으니 뭐 現實性 없는 이야기를 하시나 보다’ 程度로 생각했고, 當時 社長들도 ‘저러시다가 말겠지’ 했던 것 같다.” 

    손욱 前 院長도 비슷한 말을 했다. 

    “1980年代 末 ‘소프트웨어 人材 1萬 名을 養成하라’는 指示를 받고 人事팀에 强制로 命令해 소프트웨어 人力을 잔뜩 採用했는데, 몇 年 뒤 追跡해 보니 다들 엉뚱한 部署에서 일하고 있었다. 會長의 意圖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몰랐던 거다. 돌이켜보면 會長은 4次 産業革命을 이미 1980年代부터 내다보고 있었던 거다. 앞을 내다보는 叡智力이 뛰어났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런 點에서 企業家 以前에 思想家이자 哲學者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잠깐 이 會長이 생각했던 ‘소프트’의 槪念은 무엇이었을까 짚고 넘어가자. 只今이야 누구라도 어렴풋하게 感이 오는 말이지만 이 會長의 말을 듣다 보면 只今 時點에도 생각의 幅을 넓혀주는 키워드들이 있어 引用해 본다. 

    生前에 펴낸 그의 冊 ‘생각 좀 하며 世上을 보자’(1997)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美國 ‘비즈니스 위크’라는 雜誌를 읽다 보니 技術이나 生産力 같은 하드(Hard)의 價値는 앞으로 제로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한다. 놀랄 이야기도 아니다. 技術 進步가 빠르다는 컴퓨터만 해도 5年 사이 價格이 40% 떨어졌다.” 

    이 句節을 읽으며 于先 드는 느낌은 이 會長이 生前에 가졌던 洞察力과 叡智力의 土臺가 漠然한 感이 아니라 他의 追從을 不許하는 ‘工夫力(力)’이었다는 말이 實感 난다. 

    그는 ‘(向後 競爭力을 잃어갈) 하드의 價値를 補完할 것이 바로 소프트 競爭力’이라며 이렇게 말한다. 

    “소프트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서 價値를 찾아내거나 그것을 企劃 加工해서 附加價値를 높이는 것이다. 요즘 TV에는 VCR라는 소프트 機能이 當然히 附加되고 있는데 VCR는 테이프가 있어야 한다. 테이프를 만드는 데 重要한 것이 映畫라는 소프트다. 映畫를 만들려면 作家의 創意力이라는 소프트가 또 있어야 한다. 이렇게 소프트를 찾아 들어가면 갈수록 投資費보다 利益이 더 커지고 그만큼 創意力도 더 많이 要求됨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소프트의 實體다. (…) 소프트 産業은 製造業과 달리 後發 走者라도 핸디캡이 없다. 核心 競爭力을 模倣당하거나 쉽게 잃지도 않는다. 새로운 市場을 創出할 可能性이 높고 그만큼 高附加價値를 가져다준다. 이런 時代에 無形의 價値를 제대로 모르면 時代 흐름에서 落伍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 소프트的 想像力을 이렇게 摘示한다. 

    “電子製品을 홈오토메이션과 結合해 패키지 商品化한다든지 카메라를 팔면서 필름을 생각하고 오디오를 生産하면서 音盤을 생각하는 것이 소프트를 重視하는 出發點이다.” 

    소프트的 創意力은 事物이나 어떤 狀況을 깊게 보려는 努力에서 出發한다는 그의 말을 靑少年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


    한 番도 겪지 못한 어려움 온다

    흔히들 李 會長에 對해 ‘危機 經營’의 話頭를 던진 企業人이라고 한다. 生前에 故人이 내놓은 한마디 한마디가 뉴스가 되고 社會的 共鳴을 불러일으킨 것은 그가 但只 三星의 危機만을 말한 것이 아니라 産業界의 危機, 더 나아가 大韓民國의 未來까지 苦悶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93年 8月 5日子 조선일보 ‘三星의 新思考 經營’ 題目의 社說 한 대목을 읽어보자. 

    “지난 30餘 年의 企業社와 經濟開發 過程에서 우리 經濟가 빠져버린 最大의 艦艇은 ‘成長의 幻覺’이었다. 物産(物産)은 더없이 豐盛하고 入城(‘옷’을 속되게 이르는 말)은 날마다 더욱 華麗하게 變貌했지만 産業과 企業을 活氣 있게 끌어갈 東人(動因)은 하나씩 사라져가고 있다. 世界市場 곳곳에서 우리 商品이 밀려나도 그것을 뛰어넘을 技術도, 솜씨도, 그나마의 意志도 바닥난 形局이 바로 赤裸裸한 現實이다. 政府는 옛날式의 ‘하면 된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企業은 政府만 쳐다보거나 좁아터진 집안 마당에서 서로 다투고 勤勞者는 제 몫 늘리기에 熱中하고 있다. 眞正한 改革은 危機와 限界의 實體를 바로 보는 데서 出發돼야 한다. 三星의 新經營이 그런 認識의 反映이라면 적어도 問題의 核心에 한발 다가선 것으로 看做될 수 있다.” 

    李 會長은 프랑크푸르트 宣言에서 “한 番도 겪어보지 못한 危機가 닥쳐올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經濟에 對한 期待와 樂觀이 너무 지나치다. 1990年代는 1980年代와는 環境이 아주 다르다. 이番에 對備를 못하면 아주 深刻하다. 具體的으로 ‘數値上 뭐다’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지만, 企業家的 六感으로 볼 때는 深刻해 보인다. 한두 個 市場을 開放하고, 한두 가지 生産性을 改善하고, 한두 가지 外交 政策만으로는 이 難局을 打開하기 힘들 것 같다.” 

    冊 ‘생각 좀 하며 世上을 보자’에는 半導體를 例로 든 이런 句節도 나온다. 

    “過去 5000年의 變化보다 最近 100年의 變化가 더욱 無雙했고 그 100年보다는 只今부터 5年, 10年 동안의 變化가 더욱 甚할 것이다. 半導體 革命이 急激한 變化의 좋은 例라고 할 수 있다. 앞으로 數年 내 1기가 半導體가 商用化된다. 1기가는 트랜지스터 10億 個에 該當하는 것으로 여기에 드는 電力量은 10w밖에 안 된다. 하지만 이 容量을 眞空管으로 連結해 稼動하려면 230萬kw가 消費된다. 萬若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個人用 컴퓨터나 携帶電話에 1기가 半導體가 들어간다면 原子力發電所 2基를 들고 다니는 것과 같다. 이러한 變化를 具體的으로 理解하고 있는 사람은 意外로 적다. (…) 重要한 것은 우리를 둘러싼 經營環境과 競爭 相對者들은 이 變化를 느끼고 거기에 適應하기 위해 超音速으로 變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世界 一流企業들에 비해서 競爭力이 턱없이 弱한데 이제 그들과 正面으로 競爭해야 하는 時點이 時時刻刻 다가오고 있다.” 

    그러면서 가장 큰 問題를 “精神的 危機”로 꼽고 있었다. 

    “只今 우리는 精神, 環境, 制度, 時間의 危機라는 四面楚歌에 處해 있다. 그中에서도 精神的 危機가 第一 큰 問題다. 企業家는 投資意欲을, 勤勞者들은 勤勞意欲을 잃고 있다. 未來에 對한 꿈과 비전이 없기 때문이다. 政府나 社會의 리더들은 앞장서서 問題를 풀어나가지 못하고 求心點 없이 漂流하고 있다. (…) 時代는 急變하는데 아직도 낡은 옷을 걸치고 過去의 制度와 慣行에 얽매여 未來를 내다보지 못하고 있다.” 

    李 會長은 1993年 1月 11日 社長團 會議에서 “21世紀를 對備하기 위한 마지막 機會를 맞고 있다는 覺悟로 새로운 出發을 하자”고 宣言한다. 그리고 이를 行動으로 옮긴다. 美國 LA로 날아간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몇 달 뒤 나올 프랑크푸르트 宣言의 前哨戰이 될 事件들과 맞닥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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