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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不動産政策 뿌리는 農村共同體 꿈꾸던 主思派|新東亞

文不動産政策 뿌리는 農村共同體 꿈꾸던 主思派

[閔境遇 586칼럼⑧] 尖端 時代 逆行하는 復古主義 國家經營

  • 閔境遇 閔境遇數學敎育硏究所 所長

    mkw1972@hanmail.net

    入力 2020-12-17 10: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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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主體思想과 性理學의 親緣性(親緣性)

    • 1970~80年代 大學生, 農村·農民 聖域化

    • 전대협과 統一 行事, 主思派의 集團體驗

    • ‘貪慾의 先進國 vs 純粹한 社會主義’ 판타지

    * 586世代 NL(民族解放 系列) 理論家이자 祖國統一汎民族聯合(범민련) 事務處長 出身인 筆者가 文在寅 時代에 表하는 遺憾.

    2020년 12월 2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서울스카이에서 본 
서울 아파트 단지(왼쪽)와 1972년 3월 9일 경기 이천 풍경. [뉴스1, 동아DB]

    2020年 12月 2日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서울스카이에서 본 서울 아파트 團地(왼쪽)와 1972年 3月 9日 京畿 利川 風景. [뉴스1, 東亞DB]

    1986年 以後 學生運動 陣營에서 主體思想이 急激히 擴散했다. 筆者는 그 背景에 첫째 民族主義, 둘째 大衆運動·連帶·聯合 같은 戰略·戰術, 셋째 農村 共同體에 對한 復古的 熱望이 있었다고 본다. 이 中 農村 共同體에 對한 復古的 熱望이 이 글의 主題다. 

    韓國에서 都市와 農村은 오랫동안 論爭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1970年代 곳곳에서 都市와 農村이 衝突했다. 1970年代 農村과 都市의 關係가 變曲點을 이뤘다. 서울 종로구에서 10代 時節을 보낸 내게는 더욱 그랬다. 

    우리 집엔 大學生 누나들, 시골에서 올라와 집안일을 돕는 兄, 누나들이 있었다. 大學生 누나들은 팝송을 즐겨 들었다. 내가 世界的 팝 歌手 아바나와 김민기의 노래를 안 것은 大學生 누나들 德分이다. 시골에서 올라온 兄, 누나들의 愛唱曲은 이미자와 南進의 노래였다. 이렇듯 1970年代 종로구의 家庭집에는 너무도 다른 두 世界가 共存했다. 

    1970年代 中盤 韓國 社會는 또렷이 달라지고 있었다. 大都市에 居住하는 靑年들은 樂觀的이고 蒼蒼한 未來를 代辯하는 노래와 映畫를 大量으로 消費했다. 윤형주, 송창식, 김세환의 노래와 ‘바보들의 行進’ 같은 映畫가 있었다. 



    1970年代 後半 新世代 靑年文化가 本格的으로 發展하기 始作했다. 大學歌謠祭와 개그콘테스트가 떠오른다. 大學歌謠祭와 개그콘테스트가 나에게 준 느낌은 가벼움이었다. 나는 김민기나 양희은의 노래가 아니라 이수만·노사연의 노래, 심형래·최양락의 개그가 當時 大學生들의 생각과 處地를 더 正直하게 代辯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1980年代 民主化運動은 먼 後날 中産層이 될 大都市 靑年들의 情緖와 志向을 代辯하는 것이어야 했다. 金永三(YS) 金大中(DJ), 兩金氏의 路線이 그랬으나 民主化運動을 現場에서 主導한 靑年들은 全혀 다른 생각을 키워가고 있었다.

    主體思想은 頑固한 保守的 理念

    1993년 5월 28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출범식. [동아DB]

    1993年 5月 28日 서울 城北區 고려대학교에서 열린 韓國大學總學生會聯合(한총련) 出帆式. [東亞DB]

    韓國은 農民國家였다. 우리 世代는 농자천하지대본이나 身土不二와 같은 말을 듣고 자랐다. 農民은 推仰할 對象이거나 마음의 故鄕 같은 存在였다. 農村, 特히 農民에 對한 愛情은 經濟 問題를 넘어 韓國 社會 基底에 뿌리내려 있었다. 過去 小農을 基盤으로 한 經濟 시스템이 保守的 思想인 性理學으로 이어졌고, 性理學은 韓國人의 心性 깊은 곳에 자리했다. 

    나는 最近 主體思想이 性理學과 思想的 親緣性(親緣性)을 가졌다는 主張을 듣곤 한다. 酒邪派이던 내가 보기에 그 主張은 相當한 說得力을 갖는다. 主體思想이 農村에 뿌리박은 完固한 保守的 理念처럼 느껴진다. 

    1970~1980年代 大學生 運動家들을 農村과 都市의 觀點에서 살펴보자. 그들은 農村에서 자라 都市에서 大學을 卒業하고 都市에서 나이를 먹었다. 나처럼 都會地에서 태어난 사람도 勿論 있지만, 나 亦是 父母가 東大門市場에서 장사를 했기에 가난과 窮乏과 關聯한 情緖가 많이 배어 있다. 

    農村에서 자라 農村的 情緖를 잔뜩 가진 大學生들이 朴正熙의 維新과 만났다.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는 農村과 農民을 성역화하는 農民論과 性理學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들은 維新에 反對하는 過程에서 世上을 客觀的으로 보지 못하고 暗鬱하고 憂鬱한 展望에 빠져들었다. 當然하게도 그들은 이촌향도(離村向都)에 따른 農村의 疲弊相을 維新體制의 本質로 받아들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가 都市 인텔리와 勞動者의 이야기였다면 主體思想은 農民과 都市로 移住했어도 農村 情緖를 記憶하는 都市 貧民의 스토리가 中心이었다. 

    社會는 돌이킬 수 없을 만큼 都市化·産業化되고 있었다. 運動家들은 스티브 잡스의 컴퓨터 革命, 리처드 도킨스의 生物學 革命이 아니라 農村 色彩를 물씬 풍기는 復古主義를 受容하기 始作했다. 그 中心에는 그 나름의 經濟理論과 人間 共同體가 있었다. 

    農村 志向的 經濟理論을 代表하는 理論 體系가 이른바 內包的(또는 內生的) 發展論이다. 나는 1984年 大學에 入學해 學校 잔디밭에서 同僚들과 변형윤 敎授 等이 쓴 冊을 읽었다. 內包的 發展論은 農業과 農村을 基盤으로 中小企業과 連繫해 漸進的으로 發展하자는 戰略이다. 박현채의 民族經濟論, 김대중의 大衆經濟論, 1990年代 運動圈을 席卷한 박세길의 ’다시 쓰는 韓國現代史’ 等의 談論이 이를 基盤으로 한다.

    NL 經濟理論은 판타지

    簡單히 말해 이 浪漫的 經濟理論은 틀렸다. 只今 와서 틀린 게 아니라 1980年代 中盤, 아니 1970年代 後半 時點에 이미 잘못된 것이었다. 김대모(‘雇傭 및 賃金 構造의 變化와 所得分配’ ‘韓國의 所得分配와 決定要因’)에 따르면 1971~1977年 사이 전 職種 平均賃金을 100으로 했을 때 專門技術職은 179에서 203.2, 行政管理職은 270.9에서 328.7로 增加했다. 專門技術職과 行政管理職에 적합한 靑年들은 손쉽게 職場을 求했다. 賃金이 빠르게 올랐으며 後날 中産層이 돼 마이카와 서울 아파트를 所有하게 된다. 

    NL(民族解放) 系列 經濟理論의 뼈대가 된 內包的 經濟發展論은 經濟理論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판타지였다. 農村이나 農民이라는 巨大한 根源的 實體에 理論을 맞춰가는 構造였다. 이때 農村이나 農民이라는 存在는 社會·歷史 理論을 構成할 때 하나의 公理처럼 前提된다. 별다른 根據도 없이 그들과 그 共同體는 평화롭고 우애로운 人間 共同體인 것으로 描寫된다. 

    1980年代 中盤 現實과 理論 사이의 乖離가 매우 커진다. 酒邪派는 韓國社會의 주된 問題點이 地主-小作 關係라고 規定했는데, 나는 當時 地主-小作 關係는커녕 ‘農活’ 때가 아니라면 農民을 볼 일도 없었다. 그럼에도 主思派가 大勢가 된 것은 逆說的으로 그것이 理論이 아니라 虛構였기 때문이다. 

    1980年代 後半은 如前히 美蘇 冷戰體制였다. 蘇聯과 社會主義圈이 健在했고 北韓은 未知의 世界였다. 學生들은 半(反)獨裁鬪爭에 나서면서 社會主義圈에 對한 幻想을 가졌다. 탐욕스러운 西方 先進國과 純粹하고 조화로운 社會主義라는 판타지에 빠진 것이다. 

    ‘사이공의 흰옷’ ‘中國의 붉은 별’ ‘鋼鐵은 어떻게 鍛鍊되었는가’가 人氣를 끌었다. 마르크스-레닌주의의 都市的 感受性과 中國·베트남·北韓의 農村型 情緖가 優劣을 겨뤘다. 그中 後者가 强力한 民族主義 傳統, 農村的 感受性과 맞물려 霎時間에 運動圈을 席卷했다. 1990年代 初盤에는 베트남·中國·蘇聯을 담은 文學作品이 大部分 사라지고 北韓을 聯想케 하는 藝術作品만 살아남았다. 代表的인 게 ‘太白山脈’이다. 

    主思派에 對한 硏究와 檢討는 이제껏 거의 없었다. 그 많던 主思派도 自身들의 時代를 正直하게 돌아볼 마음이 없는 듯하다.

    急進的 統一運動, 主導權 쥐다

    1993년 2월 24일 서총련(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소속 대학생들이 서울 중구 명동성당 앞에서 ‘민주대개혁 촉구대회’를 가졌다. [동아DB]

    1993年 2月 24日 서총련(서울地域總學生會聯合) 所屬 大學生들이 서울 中區 鳴動聖堂 앞에서 ‘民主大改革 促求大會’를 가졌다. [東亞DB]

    내가 볼 때 酒邪派는 1988年頃부터 1997年頃까지 每年 5~6月 전대협 出帆式과 8月 統一 行事에 參與해 集團的 體驗과 信念을 共有한 이들이다. 

    1988~1997年은 特異한 時期다. 1987年 6月 抗爭을 契機로 民主主義가 發展했지만 노태우, 김영삼 政權이 잇따라 執權했다. 따라서 反獨裁鬪爭이 相當한 大衆性을 가졌다. 사람들은 理念이 아니라 民主化鬪爭에서 學生들의 役割에 注目했다. 이런 狀況에서 大學은 思想的 解放區에 가까웠다. 結局 急進的 統一運動이 運動圈을 主導하기 始作한다. 

    統一 行事는 過激한 政治的 主張을 담고 있었다. ‘駐韓美軍 撤收’ ‘國家保安法 撤廢’ 主張이 亂舞했다. 勿論 大學 低學年이 參加하는 行事는 文化的이고 어느 程度 大衆的이었다. 運動圈에서 活動하면 試鍊과 挫折을 經驗하게 마련이다. 그러한 試鍊과 挫折은 集團的 成就感의 根源이 됐다. 各種 行事 때 警察을 뚫고 矯正 밖으로 나가면 뜻을 같이하는 數萬 名의 群衆과 마주했다. 우리는 밤새워 춤추고 노래 부르며 集團的 一體感을 確認했다. 文在寅 政權의 强力한 支持 基盤인 40代 中 相當數도 이 같은 大學 時節을 보냈다. 

    이러한 過程을 거치면서 農村과 農民에 뿌리 둔 革命理論 主體思想이 大衆的으로 공유됐다. 分明히 할 것은 主體思想이 공유됐다는 게 어떤 意味인지다. 主體思想을 理論的으로 받아들인 集團은 主思派 안에 거의 없다. 팸플릿 ‘鋼鐵書信’을 쓴 김영환 等 草創期 主思派 集團, 地下組織에서나 理論으로서 主體思想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는 主思派 核心 程度로 分類되는데도 主體思想을 놓고 周邊 사람과 討論한 적이 거의 없다. 甚至於 나는 主體思想의 核心 ‘革命的 首領官’에 對해 疑問을 갖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主體思想은 農民 共同體가 帝國主義 侵略에 맞서 自身들의 敍事를 만들어간 이야기다. 帝國主義 侵略 以前의 農業共同體는 純潔하고 조화로운 社會로 描寫된다. 帝國主義에 맞선 鬪士들의 삶은 同志的 人間關係로 構成된다. 이러한 思想과 생각, 文化, 感受性이 1980年代 後半 靑年들과 어떤 地點에서 어울렸던 것이다. 

    現實과의 乖離는 뚜렷했다. 韓國 社會는 急激히 發展했다. 後輩들의 證言에 따르면 이를 劇的으로 보여준 것이 NL 總學生會長의 옷차림이다. 1980年代 後半 NL 總學生會長은 두루마기나 치마저고리를 입는 境遇가 많았다. 典型的으로 NL的 發想이다. 1990年代가 되면 正裝 차림으로 바뀐다. 1990年代 中盤 치마저고리는 骨董品에 가까운 遺物이 된다. 

    옷차림새가 아니라 생각과 思想을 바꿨으면 어땠을까 싶다. NL式 集團主義와 農村型 感受性은 現在에도 많이 남아 있다. 局地的 領域에서는 그러한 集團主義와 農村型 感受性이 그 나름대로 價値가 있을 수 있으나 國家를 그렇게 經營하면 深刻한 問題가 露呈될 수밖에 없다. 發展의 核心인 理由 動機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波瀾의 震源地는 社會·經濟 政策이다. 不動産 對策을 보자. 생각의 뿌리에 農村 共同體가 있다면 離農(離農) 自體가 잘못된 것이거나 故鄕을 背信한 行爲다. 都市로 몰려든 淺薄한 것들이 精神的 高尙함을 잃어버리고 돈잔치를 벌이며 세운 都市가 서울이다. 李海瓚이 實際로 이와 類似하게 發言했는데 그 基底에 깔린 생각은 離農 自體를 不穩視하는 것이다.

    幽靈처럼 徘徊하는 復古的 史上

    1970年代 大學生들은 農村型 共同體에 버금가는 代案的 未來를 꿈꾸기 始作한다. ‘전태일 評傳’이나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그 같은 생각이 담겨 있다. 素朴하고 人間的인 삶에 對한 追求는 1980年代 後半~1990年代 初盤 社會 雰圍氣와 맞물려 社會主義的 人間型의 追求로 發展한다. 

    社會主義가 崩壞했으며 그들 自身이 나이를 먹고 中産層이 됐다. 그러자 새로운 觀點에서 自身들이 가진 志向을 實現하기 始作했다. 

    農村共同體를 志向하던 靑年들이 政權을 잡았을 때 벌어지는 일을 劇的으로 보여준 事例가 文在寅 政府의 不動産 政策이다. 그 사람들에게 不動産은 衣食住 中 住居라는 人間的 權利의 問題인 것이지, 그것을 利用해 돈을 버는 일을 할 수는 없다. 文在寅 大統領의 發言 中 不動産 投機를 뿌리 뽑겠다는 句節이 唯獨 많은 것은 그런 理由다. 

    사람들이 願하는 것은 서울에 位置한 쓸 만한 아파트다. 그런데 그들은 限死코 서울은 아니고 期於코 아파트는 안 된다고 主張한다. 아파트가 들어설 수 있는 곳에서 稀罕한 都市再生 事業을 벌이고 있다. 都市 再生事業은 서울 不動産 供給을 構造的으로 위축시킨 原因 中 하나다. 

    더 큰 問題는 自身이나 自己 子息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만 그런 삶을 强要한다는 것이다. 내가 볼 때 문재인 政權을 두고 ‘내로남不’이라는 表現을 쓰는 것은 高尙하다. 그들의 머릿속은 心理學的 硏究 對象일지도 모른다. 

    이 글을 쓰고자 農民의 規模를 찾아봤다. 1980年 1082萬 名이던 農村 人口는 2019年 225萬 名으로 줄었다. 앞으로는 過去의 農民國家 韓國을 支撐한 農民이 아닌 尖端 機械로 武裝한 新世代가 農業을 꾸려갈 것이다. 

    事情이 이런데도 2020年代의 韓國에 農民과 農村을 發源地로 하는 復古的 思想이 幽靈처럼 徘徊하고 있다.


    ● 1965年 出生
    ● 서울대 國史學科 卒業
    ● 서울대 人文大 學生會長
    ● 祖國統一汎民族聯合 事務處長·進步連帶 政策委員會 副委員長
    ● 著書 : ‘數學 工夫의 再構成’ ‘새로운 保守의 아이콘’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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