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일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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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권
1950년대 중반 당시의 현역 육군 대장 및 육참총장 역임 시절의 정일권 장군의 모습
1950年代 中盤 當時의
現役 陸軍 大將 및 陸參總長 歷任 時節의 정일권 將軍의 모습
大韓民國의 招待 튀르키예 主宰 大使
任期 1957年 5月 13日~1959年 4月 25日
大統領 李承晩
主席 젤랄 바야르 (튀르키예 大統領)
副統領 場面
受賞 아드난 멘데레스 (튀르키예 總理)
長官 조정환 ( 外務部 )
次官 김동조 ( 外務部 )

大韓民國의 第9代 國務總理
任期 1964年 5月 10日~1970年 12月 19日
前任 최두선
後任 백두진
大統領 朴正熙

이름
別名 兒名 (兒名)은 정일진 (丁一鎭)
(號)는 廳舍(淸史)
日本式 이름은 나카지마 잇겐 (中島一權)
蘇聯式 이름은 이켄 테이 (ИккЭн ТЭи)
身上情報
出生日 1917年 11月 21日 ( 1917-11-21 )
出生地 러시아 沿海州 니콜리스크 [1]
居住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死亡日 1994年 1月 17日 ( 1994-01-17 ) (76歲)
死亡地 美國 하와이주 호놀룰루
國籍 大韓民國
經歷 國會議長
民主공화당 最高委員
正當 無所屬
本館 靈光 (靈光)
父母 정기영(簿), 김순복(某)
兄弟姊妹 兄 2名(모두 어린 時節에 甁으로 腰絶)
配偶者 윤계원(死別), 박혜수(再婚)
子女 3男 4女
(長女 정영혜
次女 정성혜, 三女 정지혜
長男 정기훈, 士女 정희진)
親姻戚 정좌진(親祖父)
정도기 (再從祖父)
박종식 (契聚 丈人)
이훈(첫째사위)
이동휘(둘째사위)
최상규(셋째사위)
이형근 (査頓)
이상근 (査頓)
최경록 (査頓)
이창선 (査頓)
이응준 (査頓)
宗敎 改新敎
웹사이트 정일권 - 大韓民國헌정회
정일권 - 두산世界대백과사전
軍事 經歷
육군참모총장 시절의 정일권
陸軍參謀總長 時節의 정일권
服務 滿洲國軍
陸軍
服務期間 1940年 ~ 1945年(滿洲軍 陸軍)
1946年 ~ 1957年(大韓民國 陸軍)
最終階級 滿洲國軍 : 上位
大韓民國 陸軍 : 大將
指揮 陸軍本部
合同參謀本部
主要 參戰 太平洋 戰爭 (滿洲에서 主 活動)
韓國 戰爭
1975年 무렵의 정일권

정일권 ( 韓國 漢字 : 丁一權, 1917年 11月 21日 ~ 1994年 1月 17日 )은 大韓民國의 軍人 出身의 外交官 高位政治人 이었었다. 그는 大韓民國의 튀르키예 (터키)의 駐在 大使·大韓民國의 미합중국 (美國)의 駐在 大使 等을 거쳐 大韓民國의 國務總理 外務部 長官 等을 지낸 大韓民國의 軍人 出身의 外交官 高位政治人 이었다. 러시아 沿海州 니콜리스크 (只今의 러시아 프리모르스키 地域의 우수리스크 )에서 태어났다. 1940年 當時 5年 동안 一齊 時代 滿洲國 의 滿洲軍 陸軍 將校 와, 1945年 乙酉 解放( 8·15 光復 )을 비롯한, 1948年 8月 15日 大韓民國 政府 樹立 以來에 大韓民國 國軍의 陸軍 將星級 將校 等으로 服務를 하다가, 1957年 大韓民國 陸軍 大將 으로 豫編한 後 大韓民國의 第3·5代 駐美 大使 , 第11·13代 外務部 長官 , 第9代 國務總理 , 國政諮問會議 元老諮問委員 等을 지냈다. 本館 靈光 (靈光)이고, 1921年 改名 (改名)하기 以前까지의 兒名 (兒名, 어렸을 때의 이름.)은 정일진 ( 韓國 漢字 : 丁一鎭)이며, (號)는 廳舍(淸史)이고, 創氏名( 日本式 이름 )은 나카지마 잇겐 (中島一權)이었는데, 1930年代 中盤 當時의 소비에트 ( 蘇聯 )의 沿海州 領土에서는 이켄 테이 (이껜 쩨이, 러시아語 : ИккЭн ТЭи 이켄 테이 [ * ] )라 불리기도 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러시아 帝國 陸軍 에서 中尉 로 轉役한 정기영 先生이고, 이처럼 그는 러시아 沿海州 地域의 니콜리스크 로 移住한 大韓帝國 咸鏡北道 慶源郡 出身의 移住民의 子女로 出生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咸鏡北道 慶源 을 거쳐 咸北 淸津 에서 暫時 幼兒期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6歲 때 咸北 慶源 으로 다시 되돌아와 1924年 咸鏡北道 慶源에서 小學校를 다녔으나 不遇한 幼年期라는 小學校 時節을 보냈고, 1930年 滿洲 迎神中學校에 入學했다가 統合되어 光明中學校로써 卒業하였다. 光明中學校 在學 當時 成績이 優秀, 學校 先輩이자 英語 敎師인 장내원 의 勸誘와 敎鍊 敎官의 推薦을 받아 奉天軍官學校 로 進學한다. 結局 그는 1937年 9月 奉天軍官學校 第5期로 卒業하고, 成跡優秀者라는 名目으로써, 日本陸軍士官學校 留學生으로 編入學했으며, 1940年 日本陸軍士官學校 55期를 卒業하고 滿洲軍 將校로 任官하였다.

1945年 8月 15日  ( 1945-08-15 ) , 光復(乙酉 解放) 後 歸國, 大韓民國 陸軍 에 參與하였고, 1949年 陸軍 准將 으로 智異山 共匪 討伐 에 參與하였다. 軍 服務時 第5·8代 陸軍參謀總長 等을 지내었고 韓國 戰爭 當時 大韓民國軍 主要 指揮官으로 參戰하였으며, 特히 仁川上陸作戰 等을 成功으로 이끈 숨은 主役이다. 1950年 第5代 陸軍參謀總長 在職 中 國軍 總司令官을 兼任하여 陸海空軍을 指揮하였으나 國民防衛軍 事件 , 居昌民間人 虐殺事件 等으로 인하여 國軍 總司令官 辭退를 했다. 1951年 陸軍 中將으로 昇進했으며, 1954年 大將 으로 進級했으나 休戰 後의 大韓民國 國軍 內部에서는 滿洲軍 人脈의 一員으로서 郡內 派閥 葛藤에 加擔하였다. 1957年 豫編 後 李承晩 에 依해 駐터키大使로 任命된 뒤 外交官으로 活動했다. 以後 駐프랑스大使, 美國 駐在 大使 로 任命된 뒤, 美國에서 4·19 等을 接하였으며, 윤보선 過渡 政府 場面 內閣(第2共和國)에서 駐美大使, 유엔總會 韓國代表를 거쳐 5·16 發生 後 朴正熙 를 支持하였다.

1964年 總理가 된 뒤 韓日 協定 等의 締結을 성사시키는데 努力하였으며, 1966年부터 이듬해 1967年에는 다시 外務部 長官이 되어 總理로 外務長官을 兼職하며 韓日協定 直後의 問題를 收拾하였다. 總理 在職 中 自身의 아이를 낳은 정인숙 殺害 事件 으로 社會的인 物議를 빚자 總理職을 辭退했다. 1970年 共和黨 總裁 常任 顧問을 지냈으며 1971年부터 第8·9,·10代 國會議員(3線)에 當選되었으며, 1973年부터 國會議長 等을 지냈고, 1980年 政界에서 隱退했다. 그 뒤 國政諮問委員 等을 거쳐 1989年 한국자유총연맹 總裁에 就任하였다. 韓日 會談 强行과 정인숙 事件 等으로 批判 輿論에 直面하기도 했으나 朴正熙 의 信任으로 政界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家庭 背景 [ 編輯 ]

廳舍 정일권은 1917年 11月 21日, 러시아 沿海州 니콜리스크 (現 우수리스크 )에서 移住民인 靈光 鄭氏 정기영(丁基永)과 金海 金氏 [2] 夫人 김순복(金順福)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咸鏡北道 慶源郡 敬遠邑이다. 할아버지 정좌진 (丁座鎭)의 臺에 滿洲 間島로 移住해갔다. 그가 태어난 이듬해 첫째 兄이 病으로 죽고, 1919年 둘째 兄이 夭折했다. 두 兄이 일찍 夭折하여 事實上의 4代 讀者가 되었다. [3]

學窓 時節 [ 編輯 ]

1922年 러시아 볼셰비키 暴動 等의 餘波가 極東 地域에까지 밀려와 極東革命委員會가 創設되면서 帝政 러시아 의 極東軍 通譯將校人 父親(정기영)李 러시아 陸軍 中尉 로 强制 轉役(免職)되고 監視받게 되자 母親(김순복)과 함께 咸鏡北道 慶源郡 으로 돌아왔다. 父親도 艱辛히 處刑을 謀免하고 慶源으로 돌아왔다. 1924年 봄 敬遠普通學校에 入學했다. 그러나 1926年, 3學年 在學 中 아버지 정기영이 失踪되었다. 1928年에는 아버지 정기영이 純全히度 不逞鮮人이라는 理由로 할아버지 정좌진이 開墾한 農耕地를 몰수당하고 豆滿江 便으로 건너가 荒蕪地를 開墾하게 되었다. 以後 敬遠普通學校 6年 過程을 어렵게 마치고 1930年 봄 滿洲 北間島 舂精의 迎神中學校(1921年 5月 開校)에 入學했다. 이때부터 정일권은 혼자서 學費를 벌었다. 新聞팔이와 牛乳配達 그리고 日本사람들 집에 물지게를 져 나르며 學費를 벌어 써야만 했다. [4]

1934年 5學年 在學 中 日本 官憲의 政策에 따라 迎神中學이 學校法人 光明學院에 吸收되었고, 이듬해 光明中學校를 卒業했다. 이때 만난 中學校 同窓 문익환 은 以後 第3共和國 , 第4共和國 當時 그의 反對便에서 싸우는 處地에 놓이게 된다. 抗日 是認 尹東柱 亦是 그의 光明中學校 同窓이 되었다.

軍人 活動 [ 編輯 ]

士官學校 生活 [ 編輯 ]

1935年 5月 光明中學校 의 英語敎師 장내원 의 勸誘와 敎鍊 敎官의 推薦을 받아 滿洲國 初級將校 養成機關인 中央陸軍勳런처( 奉天軍官學校 )에 合格했다. 같은 해 6月 1日子로 치치하얼 第3敎導隊에서 基礎 軍事訓鍊을 받은 後 中央陸軍訓鍊處에서 正式 課程을 履修했다.

만주군관학교 를 다니면서도 그는 種種 自身이 다니던 中學校에 찾아와 後輩들에게 軍人이 될 것을 積極 推薦하기도 했다.

1937年 9月 5期로 卒業한 뒤 成跡 優秀者로서 同期生 김석범 에 이어 [5] , 日本陸軍士官學校 留學生으로 推薦됐다. 兵科를 步兵에서 騎兵으로 바꾸었기 때문에 1年間 滿洲軍 騎兵訓鍊所 甲種候補 過程을 거쳤다. 그 뒤 홋카이도 에 있는 日本 陸軍士官學校 騎兵과 本科에 들어갔다.

滿洲軍 將校 活動 [ 編輯 ]

1940年 日本陸軍士官學校 55期를 卒業하고 다시 滿洲로 돌아와 滿洲軍 少尉로 任官해 滿洲軍 지린部隊 敎官에 補任되었다. 滿洲軍 憲兵 將校로 界印朱 , 최남근 等과 함께 日本이 시베리아 鐵道를 爆破하려고 만든 特殊部隊 突擊隊에서 3個月間 爆破訓鍊을 받은 뒤 獨立憲兵隊에 配置되어 랴오허 方面으로 出動했다. 1941年 신징(神經)에 있는 滿洲軍 總司令部 高級副官室에서 勤務하면서 3月에 憲兵中尉로 進級했다. 1942年 母校인 光明中學校를 訪問해 後輩들에게 滿洲國 軍官으로 入隊할 것을 勸誘했다.

滿洲國 奉天軍官學校를 首席으로 卒業하고 少尉로 있던 정일권은 繼續 自身이 다니던 中學校를 訪問, "앞으로 軍에 入隊하는 것이 將來를 保障받을 수 있는 가장 有望하고 賢明한 길이다."라며 光明中學校에 가서 卒業 豫定者들을 모아 놓고 卒業 後의 進學 指導를 하고 있었다. 1938年에 神經에 4年制 軍官學校가 生김으로서 士官學校에 進學하는 卒業生들이 늘어났다고 한다. 滿洲國 憲兵 上位(大尉)로 進級한 後 間島憲兵隊 大將으로 勤務했다. 1944年 滿洲國 高級將校 養成機關인 高等軍事學校(1943年 신징에 設立)에 第2期生 合格者 25名 가운데 唯一한 朝鮮人 으로 入敎했다. 卒業을 앞두고 日帝의 敗亡을 맞이했다.

日本軍 勤務 [ 編輯 ]

太平洋 戰爭 後半 日本軍 에 服務했다. 史學者 類演算 에 依하면 '그는 間島憲兵隊 大隊長으로 日本軍 中領이었고, 解放 前 滿洲國 軍隊에서 階級이 第一 높은 朝鮮人이었다. 그는 日帝로부터 勳章을 여러番 授與받는 '榮光'을 지니고 있다. [6] '고 主張하였다.

光復 前後 [ 編輯 ]

種展示 滿洲軍 憲兵 大尉였던 정일권은 時代의 흐름에 따라 재빨리 變身하였다. 僑民을 保護한다는 名目 아해 "滿洲僑民保安隊"를 만들어 司令官으로 活躍했던 것이다. 保安隊에는 이한림, 최장언(崔昌彦), 최주종, 김석범(金錫範) 等 滿洲軍 出身의 정일권 追從者들이 參與했으며, 며칠 後에는 滿洲軍의 古參 中敎(中領)인 원용덕(元容德)李 加勢했다. 保安隊 創設 直後 이들은 차라리 模樣床 光復軍으로 組織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데 意見을 모으고 卽刻 "東北地區 光復軍 司令部"로 看板을 바꿔 달기도 했다.

日帝 敗亡 後 1945年 8月 18日 蘇聯軍이 신징에 入城하자, 朝鮮人僑民會와 베이징에서 派遣된 獨立聯合民團長 信宿 , 그리고 軍官學校 出身인 이한림 , 최주종 , 김동하 , 윤태일 等과 論議해 過去 滿洲軍과 關東軍 出身 조선인 軍人 400餘名을 모아 '神經保安司令部'를 만들어 司令官을 맡았다.

蘇聯軍 捕虜生活과 越南 [ 編輯 ]

1945年 9月 정일권은 최창언과 최주종을 帶同하고 情勢를 살피러 서울로 들어와 建國準備委員會(以下 建準)의 朴勝煥(朴承煥)等과 接觸했지만, 建準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곧 滿洲로 되돌아가기도 했다. 같은 해 10月 中旬 中華民國 장제스 總統의 長男이자 國府軍 中將이며 靑年院政權 片戀摠監部 主任 兼 東北外交代表인 장징궈 를 만나 武器와 豫算을 支援받았다. 같은달 司令官 職位를 김석범 에게 넘겨주었으나 蘇聯軍 情報機關인 KGB 本部로 연행당했다. KGB本部에서 神經保安司令部를 卽時 解散시키고 武器를 返納하며, 滿洲軍 將校 出身인 만큼 모스크바 로 가서 6個月間 軍事敎育(再敎育)을 받고 北朝鮮 으로 가 軍隊 創設에 從事할 것을 要求받았다.

KGB本部의 調査官으로부터 蘇聯 留學을 勸誘받고 留學의 決心을 굳힌 정일권은 遊學 直前 資格試驗에서 不合格함으로써 시베리아行 肅淸길에 오르게 되었다. 當時 不合格의 事由는 "蘇聯軍 步哨를 죽이고 차라리 逃亡하자"는 中學 同窓 崔 아무개의 提議를 덜컥 受諾함으로써 反動分子로 몰리게 된 때문이었다. 이는 KGB의 祕密工作員이 된 그의 同窓이 속마음을 떠보기 위해 일부러 한 말이었고, 그는 蘇聯 情報部隊의 陷穽에 빠졌던 것이다.

그러나 監獄에서 정일권은 蘇聯 人民軍을 誹謗한 事實이 發覺되어 '惡質分子'로 規定되어 시베리아 類型이 決定되었다. 같은 해 12月 中旬 國府軍 出身 및 滿洲國 官僚 出身 等과 함께 新懲役에서 汽車를 타고 蘇聯 과 滿洲 國境을 向해 移動하던 途中, 隱身해 있다가 劇的으로 脫出에 成功했다. 바로 하얼빈 으로 가 滿洲軍 時節부터 알고 있던 같은 故鄕(咸鏡北道 慶源) 出身 阿片장수 김만옥을 偶然히 만나, 그의 도움으로 汽車를 타고 平安南道 平壤 으로 들어왔다. 平壤에서 조선민주당 黨首 조만식 의 祕書室에서 奉天軍官學校 後輩인 白善燁 을 만나고, 며칠間 머문 뒤 다시 競技도 開城 을 거쳐 서울로 들어왔다.

光復 以後 [ 編輯 ]

解放 政局 [ 編輯 ]

서울로 온 뒤, 1945年 12月 15日 美軍政廳에서 創設한 軍事英語學校에 入敎했다. 1946年 1月 15日 軍事英語學校 1期生 中 1車路 卒業하고 定位(大尉)로 任官하여(군번 第5番) [7] 國防警備隊 第1聯隊 中隊長을 거쳐 第4聯隊長 兼 警備隊 總參謀長을 歷任하였다. [8] 1946年 5月 1日 設置된 朝鮮國防警備隊가 正式 編成되면서 그는 正式으로 大尉가 되었다. 1946年 12月 少領으로 進級, 南朝鮮國防警備隊 第4聯隊의 臨時 聯隊長이 되었다. 1947年 中領으로 昇進하고, 朝鮮警備隊 總參謀長을 거쳐 朝鮮警備士官學校長을 歷任했다.

大韓民國 軍人活動 [ 編輯 ]

陸軍 將校 任官 [ 編輯 ]
智異山地區 戰鬪司令部 開設 直後( 1949年 3月 1日 )
韓國 戰爭 前 빨치산의 出沒地域

1948年 1月 滿洲 神經軍官學校 4期生 出身이자 神經保安司令部에 함께 있었던 예관수 와 함께 '共産軍의 遊擊戰法과 經費와 討伐'이라는 冊을 發刊했다. 그해 大韓民國 國軍으로 正式 發足되면서 國軍 陸軍 中領이 되었고, 바로 大領으로 昇進했다. 이어 陸軍本部 作戰參謀部 部長(副長, 1948年 6月 보임) [9] 等을 거쳐 陸軍參謀學校 副校長을 歷任했다.

그 뒤 1949年 2月 陸軍 准將으로 昇進, 1949年 3月 1日 智異山 地區 戰鬪 司令部가 設置되고 司令官에 任命되었다. 以後 智異山 地區 戰鬪司令官에 任命되어 智異山 과 畿湖地域의 野山에 隱身하던 남로당 빨치산 討伐作戰에 參加했다.

1949年 12月 陸軍參謀次長 兼 行政參謀部 部長이 되었다. 1950年初 美國 陸軍參謀大學에 留學하였으나 [10] 6.25 戰爭 勃發로 歸還하게 된다.

韓國 戰爭 以後 [ 編輯 ]
海軍本部에서 3軍合同作戰協議를 마치고 나란히 선 장경근 國防部 次官, 신성모 國防部 長官, 정일권 所長 (왼쪽부터). 정일권은 陸海空軍 總司令官 兼 陸軍參謀總長 發令을 받은 얼마後였다.(1950년)
韓國 戰爭 中(1951年), 정일권(왼쪽에서 세 番째), 白善燁 (오른쪽에서 세 番째 맨뒷줄), 아이젠하워 將軍 (맨 오른쪽)

歸還命令을 받고 飛行機를 기다리던 中 韓國戰爭 開戰 消息을 듣고 急히 돌아왔다. 1950年 6月 30日에는 解任 當한 채병덕 陸軍參謀總長을 代身하여 第5代 陸軍參謀總長에 就任하였으며 同時에 大統領 李承晩 의 特別 指示로 7月 부터 3軍總司令官(三軍總司令官)을 兼任하여 大韓民國 陸海空軍에 對한 指揮權을 行事, 總指揮하였다. 陸軍參謀總長 在職 時節 國民防衛軍 事件 , 居昌民間人 虐殺事件 等이 問題가 되자 1951年 6月 參謀總長職과 國軍 總司令官職을 辭任했다.

1951年 參謀總長 離就任式 때(左側은 李鍾贊 , 가운데는 정일권, 右側은 國防部長官 이기붕

그 뒤 1951年 陸軍 中將으로 進級과 同時에 美國 으로 硏修, 美國 陸軍 參謀大學을 修了한 뒤 歸國하였다.

김창룡과의 葛藤 [ 編輯 ]
김창룡

1954年 2月, 이형근 과 함께 陸軍大將으로 進級하였다. [11] 以後 李承晩 政權 當時 白善燁 , 이형근 等과 所謂 '3大將 派閥定立構圖'를 形成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國軍 內의 滿洲軍閥, 日本軍閥, 光復軍 出身 等이 競爭할 때 滿洲軍 人脈의 리더의 한사람이기도 했다. 1954年에는 白善燁 參謀總長을 代身하여 다시 第8代 陸軍參謀總長에 就任했다. 이어 1956年 合同參謀本部 總長(合同參謀本部總長)에 發令되었다. 그러나 郡內 派閥問題로 結局 1957年 豫備役 陸軍 大將으로 豫編하게 된다. 豫編과 同時에 株 터키大使로 任命되었다.

1954年 5月 정일권 參謀總長은 그와 親密한 사이에 있던 공국진 을 陸軍 憲兵司令官 으로 임명하여 軍內 腐敗의 剔抉과 搜査機關 사이의 葛藤 解決 等을 主要 課題로 指示한 바 있다. [12] 공국진은 이 課題들을 遂行하는 過程에서 職務限界를 自意로 無視하는 김창룡 特務隊長과 잦은 葛藤을 빚게 되었고, 金昌龍은 이 過程에서 공국진 이 彈皮를 日本 에 密輸出하려 하였다는 嫌疑를 씌워 解任을 祈禱했다. 所謂 景武臺 諭示를 根據로 하는 金昌龍의 攻勢 앞에 정일권 參謀總長도 力不足으로 그가 임명한 憲兵司令官의 解任을 命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12]

李承晩 大統領과 나란히 선 정일권(1955年)
정일권(1955年)

以後 공국진이 강문봉이 軍團長으로 있는 2軍의 參謀長으로 發令되는 것도 김창룡 의 妨害로 霧散되었고, 이 過程에서 金昌龍은 參謀總長 정일권의 命令을 正面으로 無視하고 공국진의 補佐官을 逮捕, 連行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김창룡 의 越權行爲에 憤怒한 정일권과 강문봉은 1955年 10月 鎭海에 머물고 있던 李承晩 에게 直接 찾아가 金昌龍의 轉勤 乃至는 留學을 建議하기도 했다. [13]

그러나 李承晩은 이들의 建議를 受容하지 않음으로써 김창룡에 對한 信賴를 再確認하였다. 金昌龍은 정일권과 강문봉의 非理에 對한 集中 搜査로 이에 對應하였고, 이는 정일권과 강문봉의 김창룡 暗殺陰謀와 敎師 라는 極端的인 對應으로 이어졌다. [13] 이 過程에서 注目할 것은 李承晩 은 金昌龍에게 정일권의 非理를 搜査하게 했고, 정일권에게는 逆으로 김창룡 의 非理를 搜査하라는 密旨를 내렸다는 것이다. [13]

轉役 [ 編輯 ]

1956年 6月 合同參謀本部 議長에 選出되었다. 그해 프랑스共和國 名譽勳章과 미합중국 總司令官 功勞勳章을 授與받았다. 56年 末 李承晩 大統領 의 特使로서 남베트남 을 訪問하고 歸國, 1957年 5月 豫編되었다.

外交官 活動 [ 編輯 ]

터키, 프랑스 大使 時節 [ 編輯 ]

豫編 後 駐터키 大使( 1957年 1月 )를 지냈다. 1959年 4月 17日, 大韓民國 政府는 空席 中이던 駐프랑스 初代 大使에 當時 主 터키 大使 정일권을 임명하였다. [14] 駐프랑스 大使 (1959年 6月 16日 ~ ), 週美國 大使等 지냈다. 1960年 1月, 정일권은 副無關(附武官) 윤응렬 大領 等과 함께 에티오피아 를 訪問하여 외상署理와 會談하였다. [15]

4.19 革命 前後 [ 編輯 ]

1960年 4.19 革命 直後, 6月 22日로 豫定된 아이젠하워 美國 大統領의 韓國 訪問을 契機로, 過渡政府는 空席 中이던 駐美 大使에 정일권 駐프랑스 大使를 임명하기로 決定한 것이 5月 30日 밝혀졌다. 韓國의 許政 過渡 政府는 5月 30日 以前에 美國 政府에 아그레망을 發送하였다. 過渡政府는 當初, 空席中이던 駐美 大使에 對한 任命을 新政府가 樹立될 때까지 하지 않으려고 하였으나 外國의 國家元首가 訪問할 때는 그 나라에 主宰하는 臺 工事가 遂行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公式 訪問에 앞서 本國으로 歸國하여 歡迎準備와 그 節次에 關하여 報告하게끔 되어 있는 것이 慣例인 點, 그런데 當時 駐美大使館에는 한표욱이 代理大使로서 公館長職을 代行하고 있는 形便으로 臺詞없이 代理大使가 國家元首를 맞는 것은 友邦國家인 美國政府에 對한 禮遇가 되지 못하리라는 點으로, 不得已 過渡政府는 新政府가 樹立되기 前에라도 美國大使에 한하여 任命을 하게 된 것이었다. [16]

정일권은 6月 5日 唐只에 到着하였는데 6月 7日에는 許터 美國 國務長官을 訪問하고 信任狀 寫本을 傳達하였다. 1960年 6月 8日 上午10時30分(韓國時刻 9日 子正) 白堊館에서 아이젠하워 大統領에 對해서 信任狀을 制定하였다. [17] [18] 또한 南美 各國 大使를 兼任하다가 張勉 政權 出帆 後 辭任했다.

以後 野黨 人士로 있다가 1961年 美國 으로 留學, 하버드 大學 國際問題硏究所에서 硏修하였다. 하버드大學 留學 中이던 1961年 5.16 軍事쿠테타 가 일어나자 朴正熙 의 指示를 받아 美國 朝野를 다니며 軍事政府의 支持를 이끌어 냈다. 1961年 12月, 駐美 兼 週 브라질 韓國大使 정일권은 婦人과 1名의 補佐官을 同伴하여 브라질 멕시코 를 旅行하였다. 멕시코에서는 4日間을 滯留하였고 12月 20日, 韓國-멕시코 兩國間의 經濟的 및 文化的 關係를 增進하는 問題에 關하여 마누엘 텔로 外傷(外相)과 會談을 가졌다. 12月 21日, 워싱턴으로 歸任하였다. [19]

美國大使로 있으면서 브라질·콜롬비아·칠레·아르헨티나·파라과이·에쿠아도르 等의 兼任大使를 겸하기도 했다. 한便 그가 駐美大使로 在職할 當時 大使館에는 박보희(朴普熙)가 中領으로서 無關 일을 맡고 있었다. 朴 中領은 김종필이 그 當時 매콘 美 CIA局長, 맥나마라(McNamar) 國防長官 等을 만날 때 通譯을 맡는 等 殘務를 거들어 주었는데, 이때를 전후하여 박보희와 통일교의 關係, 김종필과 정일권의 統一敎 關聯 與否가 먼 後날 美國 매스컴의 是非의 對象이 되는 첫 契機를 만들기도 했다.

各國 大使와 유엔總會 韓國代表等을 지낸 뒤 朴正熙 政權 支持를 宣言하고 1963年 12月 12日 第3共和國 이 出帆할 때 外務部 長官에 任命됐다.

政治 活動 [ 編輯 ]

國務總理 在職 [ 編輯 ]

1963年 朴正熙 로부터 召喚, 도와달라는 付託을 받고 바로 그해 12月 外務部長官이 되어 立脚하였다. 이때 共和黨의 新進 黨僚들과 최두선 總理間의 葛藤을 仲裁하려 努力했으나 失敗했다.

1964年 朴正熙 政權에서 强行한 韓日協定 會談에 對한 國民들의 反對가 이어지고 1964年 5月 9日 최두선 國務總理가 辭任하자 5月 10日부터 國務總理 에 任命되어 1970年 12月 20日까지 6年 7個月 동안 在任했다. 就任 初 演說에서 國務總理로 就任한 정일권은 韓日會談의 早期 妥結, 食糧 增産및 確保, 物價 安定, 公開 및 迅速한 行政 等을 公約으로 내걸고 빠르면 6個月 늦어도 1年 안에는 國民이 願하는 모든 일을 果敢하게 實踐하겠다고 公約하였다. 그 뒤 아무도 外務部長官職을 선뜻 맡으려 하지 않아 그가 2個月間 外務部長官職을 兼職하였다. 1964年 8月 13日 아리앙스 프랭세즈 프랑스聯合會 韓國委員會 名譽會員에 委囑되었다. 그해 6月 前 副統領 場面 國民葬 에 參席하여 追悼辭를 朗讀하였다.

그 뒤 1966年 12月부터 1967年 6月까지 다시 外務部長官이 되어, 總理職과 外務部 長官 을 兼任했다. 1965年 2月 이른바 '불도저內閣','突擊內閣'이라 불리면서 日本을 訪問해 사토 에이사쿠 首相과 會談을 마무리하고 6月 韓日協定 을 調印하는데 앞장섰다. 韓日協定 反對와 三星 사카린 密輸 事件 으로 國會 에서 財閥과 政府를 批判하면서 本會議 途中에 김두한 議員의 國會汚物投擲事件 當時 汚物 洗禮를 맞았다. [20]

정인숙과의 醜聞 [ 編輯 ]
정인숙

자주 만나던 內緣女 정인숙 이 妊娠하였다. 정일권은 정인숙을 만난 뒤 그와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는데, 정인숙 을 唯獨 좋아했던 정일권은 그女의 집에 隨時로 出入하다가 住民들의 눈에 目擊되어 입에서 입으로 所聞이 流布되었다. 그 뒤 그女가 妊娠事實을 알리자 정일권은 落胎를 勸誘하려다가 代身 애를 낳으라고 하였다. 정인숙 은 家族들의 反對를 무릅쓰고 出産하였다.

以後 아들의 아버지는 朴正熙 大統領이라느니, 鄭 前 總理라느니, 이후락 前 中情部長이라느니 하는 所聞들도 茂盛하기도 했다. [21]

한동안 先雲閣 의 얼굴마담으로 株價를 높이던 정인숙은 1968年 6月 아들 성일을 낳았다. 그리고 이 해에 그女는 海外로 나가기 위해 갑자기 手續을 밟는다. [22] 死後 屍身 解剖에서도 드러났듯이 그女는 妊娠中絶 手術을 받은바 있다. 遊興業所에서는 普通 接待婦가 아이를 낳는 것은 禁忌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정인숙은 아기를 낳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有力 人士였고,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 하는 것은 그女 自身만이 알고 있었다.

그女가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입을 열지 않는 가운데 所聞이 擴散되었다. 當時 정인숙이 낳은 아들의 아버지는 정일권 當時 國務總理 或은 朴正熙 大統領 이라는 所聞이 播多했다. [23] 정인숙은 정일권이 自身을 서운하게 할 때마다 自身이 정일권 總理의 아이를 낳았다는 말을 떠벌리고 다녀 정일권을 難處하게 한다. 이 事實이 野黨 人士들과 朴正熙 大統領 의 귀에 들어가게 될까봐 정일권은 不安해했고, 서둘러 不法 與圈 두 個를 만들어 정인숙을 海外로 내보내고 生活費를 豐足하게 줄테니 아이를 키우며 海外에서 조용하게 살라고 當付한다.

그女는 아이를 낳은 後부터는“내 말 한마디면 안 되는 일 없다”혹은“서교동 집도 아기아빠가 사준 거야” 等의 말을 公公然히 했다. 그러나 周邊의 發說에 依해 國務總理 정일권이 아이의 아버지라는 說이 流布되었고, 이는 新民黨 議員들이 國會와 言論에 言及하면서 알려지게 됐다. 繼續된 質問 攻勢에 家族들은 그 아이가 정인숙의 아이가 아니고 정인숙의 배다른 동생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身元朝會는 當時 中央情報部長 이던 김형욱 의 祕書 [22] 室長인 문학림 이 맡았고, 高位層만이 가질 수 있었던 回收與圈은 國務總理 정일권의 祕書官 신성재 가 周旋하였다. [24] 旅券 發給 날짜는 1968年 12月 30日 이고, 以後 정인숙은 1969年 3月 큰오빠를 만난다는 名分으로 日本 에 다녀왔고, 10月 에는 워싱턴 D.C. 韓人會長 노진환 의 案內로 美國에서 3個月 동안 머물다가 1970年 1月 21日 歸國했다. [24]

정인숙 事件과 辭退 [ 編輯 ]

1970年 3月 17日 밤 11時頃 정인숙 이 서울 麻浦區 합정동 切頭山 近處 道路에서 發生한 交通事故를 假裝한 事故에 依해 疑問의 最後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搜査 過程에서 정인숙의 自宅에서 發見된 포켓用 手帖과 帳簿에 적힌 이름과 日時, 場所, 名單 때문에 稀代의 政治스캔들은 더욱 擴大되었다. 當時 警察 檢察 職員의 不注意로 言論에 드러난 정인숙의 手帖에는 朴正熙 大統領 , 정일권 國務總理 , 김형욱 中央情報部長 , 박종규 大統領 警護室長 , 長官, 次官級 人士들, 大韓民國 國軍 將軍, 5大 財閥그룹 會長, 國會議員 等 主要 人士 27名을 包含한 權力 實勢들 數十餘 名 이름과 連絡處가 적혀 있었던 것이다.

事件 直後에는 羅勳兒 의 노래 눈물의 씨앗 을 諷刺한 노래가 擴散되기도 했다.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 靑瓦臺 미스터 情이라고 말하겠어요

萬若에 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 永遠히 우리만이 알았을 걸 / 죽고 보니 抑鬱한 마음 限이 없소

성일이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 / 高官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
그대가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 / 그렇게 모두가 밉지는 않았을 걸 / 죽고 나니 抑鬱한 마음 限이 없소 [25]

朴正熙 大統領 은 自身은 勿論 平素 거느리는 周邊 사람들의 女子問題에도 寬大한 便이었다. 甚至於 김형욱 中央情報部長 이 職員을 시켜 政敵이었던 金大中 , 金永三 等의 私生活을 캐서 報告書로 提出하자 火를 내며 찢어버렸다. 그러나 自身과도 술자리 또는 잠자리를 같이 한 정인숙이 國務總理 정일권이 關係를 맺어 子息까지 두었다는 事實에 크게 憤怒한다. 朴正熙 大統領은 이 事件 直後 “鄭 前 總理를 물러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周圍의 建議에 “男子가 女子 만나는 것은 例事”라며 事件을 撫摩했다는 後聞이다. [26] 그러나 新民黨 의 政治 攻勢는 繼續되었다. 정일권은 朴正熙를 찾아가 무릎까지 꿇었다고 했고, 바로 解任을 시키면 世間의 루머만 커질 것을 憂慮한 朴正熙는 정일권을 불러 自進 辭退를 勸告한 뒤, 정종욱이 拘束된 以後 潛潛해질 무렵 정일권을 解任하고 바로 美國 으로 내보냈다.

장기영과의 葛藤 [ 編輯 ]

정일권-정인숙 스캔들 當時 그는 정인숙 事件 이 大韓民國 國內 言論에 공론화됐다. 中央情報部 에서는 卽刻 言論統制에 들어갔지만 장기영 은 中央情報部의 壓力에 屈하지 않고 言論界를 庇護下였다. 이것을 두고 그가 정일권 失脚工作을 벌이는 것이라는 所聞이 돌았다. 副總理 在職 時 장기영 殷 나라의 經濟政策을 거의 도맡아서 料理했다. 정일권이 總理라고 해도 經濟政策에 關한 限 一切의 容喙를 하지 못했다. [27] 장기영은 大統領 朴正熙 에게 直接 報告했고, 정일권이 經濟問題에 干涉하지 못하게 事前에 쐐기를 박아두었다.

정일권과 장기영 은 사이가 썩 좋았다고 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하여 서로 으르렁댈 나쁜 사이도 아니었다. [27] 비록 장기영 이 經濟 問題에 對해서는 獨走를 했을망정 정일권 自身이 經濟에는 門外漢이요, 그보다는 정일권의 天性的인 謙遜함이 두 사람 사이를 그렇게 나쁜 關係로까지 몰고 가지는 않았다. [27] 싸움을 싫어하는 정일권의 性格과 정일권 스스로도 自身은 經濟에 對해서는 門外漢이라고 認定하였으므로 장기영 과 直接的인 葛藤은 없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間隔이 있었고, 結局 장기영 은 丁總理보다 3年 앞서 자리를 물러나게 되었다. [27]

事情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當時 言論界에 復歸해 있던 장기영 이 次期 總理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고 傳한다. [27] 그리고 정인숙 事件 이 터지자 장기영 은 이것을 問題삼아 朴大統領을 相對로 정일권 失脚工作을 벌였다는 것이다. [27]

生涯 後半 [ 編輯 ]

政治 活動 [ 編輯 ]

1970年 민주공화당 總裁 常任顧問이 되었다가 渡美했으나 一時 歸國, 1970年 부터 1971年 까지 民主공화당 議長 常任顧問을 지냈으며, 1971年 7月의 第8代 國會議員 選擧에서 民主공화당 全國區 議員으로 當選, 第8代 國會議員 에 在職했다. 1972年 5月 朴正熙 에 依해 民主공화당 黨議長 署理에 任命되었다. 그 뒤 1972年 10月 維新 憲法이 通過될 때 民主공화당 議長을 맡았으며, 協力委員會 第8回 合同委員會 韓國 側 會長으로도 活動했다. 1973年 2月 의 第9代 國會議員選擧에서 江原道 束草·麟蹄·固城·襄陽 選擧區에서 民主공화당 候補로 立候補하여 9代 國會議員에 當選, 再選하였다.

1975年頃

維新體制 아래 立法府가 行政府의 侍女노릇을 해 國會가 '通法部'나 '行政府의 侍女'라고 世間의 嘲弄을 받을 때 1973年 부터 1979年 까지 國會議長을 지냈다. 73年 國際議員聯盟(IPU), 아시아議員聯盟(APU) 韓國支部 會長에 選任되었다.

1979年 2月의 第10代 國會議員 選擧에 束草·麟蹄·固城·襄陽 選擧區에서 民主공화당 候補로 立候補하여 國會議員에 再選되었다. 1979年 民主공화당總裁 常任顧問과 한일의원연맹會長에 任命되었다. 그러나 10月 26日 10·26 事態 以後 정일권은 하와이에서 쓸쓸한 末年을 보내게 된다.

政界 隱退 以後 [ 編輯 ]

1980年 5月 5·17 非常戒嚴 全國擴大措置 以後 內査를 當했으나 別 嫌疑點이 없어서 內査終結되었다. 그해 8月 新軍部 執權 以後 政治一線에서 물러났으나 以後 第5共和國 國政諮問會議 委員으로 委囑되었다. 政界에서 隱退한 뒤에는 政治元老이자 市民社會團體 元老로 自由守護救國總聯合會 會長 等을 歷任하였으며, 第6共和國 時節 1988年 國政諮問委員, 1989年 韓國自由總聯盟 初代 總裁가 되었고, 民主自由黨 出帆 後 常任顧問을 지냈다. 그 뒤 1990年 한국자유총연맹 總裁에 再選되었으며, 그해 初 美國으로 건너갔다.

그의 書齋에는 늘 朴正熙의 寫眞이 걸려 있었고, 朴正熙를 指稱할 때에는 꼭 閣下라는 尊稱을 쓰며, 朴正熙를 民族主義者라고 稱頌했다 한다. 또한 朴正熙가 自身에게 말을 놓지 않고 先輩님이라고 늘 指稱했던 것도 半쯤 자랑삼기도 했다. 1991年 3月 淋巴腺 腫瘍 을 治療하기 위해 美國 하와이 에서 療養하였다.

美國에 있을 때 정인숙 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 정성일 이 찾아와 親子임을 認定해 줄것을 要求했으나 結局 辭讓했고, 以後에는 아예 만나는 것을 차라리 拒否했다. 1992年에는 民主自由黨 常任顧問에 任命되었다. 1992年 第14代 大統領 選擧 期間 中 그는 金永三 을 公式 支持하여 直接 全國 支援遊說를 다니기도 했으며 1993年 1月 民主自由黨 을 脫黨하였다. 1993年 정성일 은 다시 서울家庭法院에서 그를 相對로 親子確認訴訟을 提訴했다. 그러나 持病의 惡化로 身病 治療次 出國, 1994年 1月 美國 하와이 스트라웁병원에 入院하였다. 그는 生前 6.25 戰爭 때에 活躍한 功勞로 金星 및 은성 太極武功勳章, 一等修交勳章 等을 받았으며 같은해 19日 하와이州 스트라웁병원에서 享年 77歲를 一期로 世上을 떠났다.

事後 [ 編輯 ]

遺骸는 飛行機便으로 歸國, 1994年 1月 22日 午前 國會議事堂 앞 廣場 앞에서 國會議員 이만섭 의 主導로 永訣式과 路祭를 擧行한 뒤, 警察兵力의 護送下에 서울特別市 동작구 동작동 산44-7 銅雀洞 국립서울현충원 將軍 第3 墓域에 묻혔다. 한便 그의 光明中學校 東門인 문익환 이 같은 날 世上을 떠났는데, 문익환 牧師의 永訣式은 한신大에서 始作해, 大學路, 東大門에 이르기까지 數十萬名이 參與한 路祭로 치러진 反面 정일권의 葬禮式은 現充員에서 政治人들이 參加한 가운데 이루어져 TV뉴스에서 對比되었다. 그들은 태어난 해도 같고, 같은 中學校를 다녔으나 서로 다른 人生을 살아갔으며, 같은 날 死亡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印象을 남겼다.

기타 履歷 [ 編輯 ]

  • 1970年 공화당總裁 常任顧問
  • 1971年 聲優俱樂部 會長
  • 1983年 英國 국제전략문제연구소 硏究
  • 1983年 英國 옥스포드大 交換敎授
  • 1983年 韓國 在鄕軍人會 顧問
  • 1984年 프랑스 DECORSE臺 招請敎授
  • 1986年 汎民族올림픽誘致推進中央協議會 拷問
  • 1987年 自由守護 舊國聯合 會長
  • 1988年 新民主공화당 常任顧問
  • 1989年 ~ 1989年 第22代 韓國反共聯盟 理事長
  • 1989年 ~ 1991年 初代 韓國自由總聯盟 總裁
  • 1992年 民主自由黨 常任顧問
  • 1992年 安重根義士 旅順殉國遺跡 聖域化事業推進委員會 顧問
  • 1993年 民主自由黨 脫黨(1993年 1月)

學歷 [ 編輯 ]

非學位 修了 [ 編輯 ]

名譽 博士 學位 [ 編輯 ]

受賞 經歷 [ 編輯 ]

6.25 戰爭 中 參謀總長으로 1軍團 巡視, 1軍團 司令官 白善燁 과 함께 ( 1951年 6月 12日 )

6.25 戰爭 當時 國軍 指揮官으로 活動한 功勞로 여러 番 武功勳章을 授與받았다.

著書 [ 編輯 ]

  • 回顧錄 - 戰爭과 休戰
  • 정일권 回顧錄 (1991)

論難과 疑惑 [ 編輯 ]

정성일의 生父 설 [ 編輯 ]

1991年 訴訟 當時 정성일은 "어릴 때부터 外할머니와 外三寸으로부터 정일권 氏가 1967年 어머니와 交際해 다음해 나를 낳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親子確認 訴訟을 提起했다. [28] 정성일은 정인숙의 死亡 以後 外家에서 살다가 高等學生 때인 1985年 美國 으로 건너갔다 1990年 에 歸國했다. [28]

1989年 假釋放된 정인숙의 오빠 정종욱 은 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 틀림없다고 말한다. [29] 그에 依하면 '정일권이 한 달에 한 番 꼴로 서교동 집으로 찾아왔지요. 그리고 동생이 '그이가 아들 하나만 낳아달라고 한다'며 相議를 해 처음엔 家族들이 極口 反對를 했지요. 出産 後에는 一 週日에 한番 꼴로 찾아와 성일이를 안고 즐거워했으며, 늘그막에 아들을 얻어 所願을 이뤘다는 뜻에서 성일이란 이름까지 直接 지어왔어요. 성일이도 自己 아빠가 TV에 비치면 '아빠'라고 소리치며 좋아했지요. [30] '라는 것이다. 정종욱은 兄을 마치고 矯導所에서 出監한 뒤에 記者 인터뷰에서 自身은 犯人이 아니라며 抑鬱함을 呼訴하였다. [31] "나는 犯人이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내 동생을 죽일 수는 없다. 그리고 내 동생 아들 성일이는 정일권 前 國務總理의 아들이 確實하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陋名을 벗을 것이다. [31] "는 것이다.

朴正熙 大統領의 祕書官이었던 선우련 도 정성일이 정일권의 아들이라고 主張한다. 그는 "정일권氏가 1971年 봄, 兄님인 鮮于煇 氏를 찾아와 '이동원 外務長官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鄭 女人을 알게 되었으며, 내 아들을 낳았으나 公開할 수가 없다'고 털어놓았다. [32] "고 말했다. [29] 그러나 鮮于煇 가 정일권을 만난 1971年 과 같은 해에 정일권을 만난 在美言論人 文明者는 정일권에게 "文 記者, 나는 정인숙과 딱 한番 같이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 니가 없소. 나는 이미 不妊手術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33]

2000年 代 以後 정성일의 生父가 정일권이라는 見解들이 나오고 있다. 2007年 初 言論의 取材 結果 當時 周邊 關係者들의 證言을 통해 숨겨진 事件의 眞相이 조금씩 實體를 벗고 있다. 日曜新聞은 정성일의 判事 拉致事件을 取材하는 過程에서 朴正熙 政權 當時의 與野 國會議員을 찾아다녔고, 이들에 따르면 鄭 氏의 親아버지는 정일권 前 總理일 可能性이 높으며 鄭 前 總理는 鄭 氏 側의 要求로 生前에 적잖은 金錢的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鄭 女人의 殺害犯은 그 家族들조차 넷째오빠로 確信하고 있는 것으로 傳해졌다. [21]

日曜新聞 記者는 골프場 社長 拉致 事件을 契機로 정성일 氏의 周邊을 取材하던 中 前職 國會議員 等 여러 關係者들로부터 入手한 證言 [21] 에 依하면 정성일의 親아버지는 鄭 前 總理일 可能性이 높으며 94年 他界하기 前까지 적잖은 金錢的 도움을 줬음에도 鄭 氏 側이 자주 손을 벌려 關係가 相當히 멀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鄭 女人의 殺害犯은 넷째오빠가 거의 確實하다는 것이 共通된 陳述이었다. [21]

60~70年代 중정에 몸담았던 이 아무개 前 議員은 “정인숙의 둘째오빠와 高校 同窓生으로 아주 親한 사이여서 比較的 그 집안 事情을 잘 안다. 先親은 大邱副市長을 지낼 程度로 집안이 괜찮았고 兄弟들도 모두 똑똑했다. 그런데 다른 兄弟들에 比해 넷째가 변변한 職業이 없었고 그래서 兄弟들 사이에서 좀 따돌림을 當했던 것 같다. 그런 오빠를 안되게 여겨 정인숙이 運轉技士로 自身의 일을 돕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돈 씀씀이가 헤퍼 兄弟들은 勿論 女同生과도 不和가 잦았다고 한다”고 傳했다. [21] 李 前 議員은 “事故 當時는 勿論 只今까지도 親舊를 비롯한 그 家族들 모두 넷째오빠를 犯人으로 確信하고 있다. 家族들이 그렇게 確信하는데 무슨 다른 疑問이 있을 수 있나. 그래서 只今도 넷째는 家族들과 往來조차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내 親舊는 ‘어떻게 우리 집안에 이런 일이 생기나. 오빠가 동생을 돈 때문에 쏴 죽이다니. 正말 집안 亡身이다’라며 甚하게 自愧했다”고 傳했다. [21]

정성일은 '저는 當身의 아들이었습니다'라는 冊에서 1991年 11月 美國 에서 정일권과 對話를 나눈 狀況을 描寫하고 있다. 門을 사이에 두고 한 對話에서 정일권은 정성일에게 "아가야, 나는..... 나는 只今 가슴이 떨려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구나. 來日 아침에 電話를 하고 다시 와주련?"이란 말을 했다고 한다. [34] 그러나 1993年 SBS 주병진 쇼에 出演한 정성일은 "最近 鄭氏(정일권)가 나와의 直接 通話에서 '當身은 나의 아들이 아니며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이라고 밝혔다."고 말해 自身이 朴正熙 의 아들일 수 있음을 示唆했다. [34]

정성일의 親아버지 論難 亦是 정일권日 可能性이 높다는 證言이 이어졌다. 李 前 議員은 “우리 親姻戚 中의 한 분이 鄭 前 總理 夫人과 이웃에 살며 둘도 없는 親舊였다. 事件이 터지기 前부터 鄭 前 總理 夫人이 親舊에게 自己 집 男便을 가리키며 ‘어디서 아들 하나를 만들었다’고 한숨짓고는 했다고 한다. 實際 4代 讀者였던 鄭 前 總理에게는 딸만 셋뿐이었기에 生前에 그 母親의 아들 督促이 아주 成火였다고 한다”고 傳했다. [21] 또 다른 한 關係者는 “鄭 前 總理의 側近인 金 아무개 前 議員과 얼마 前 食事를 함께했는데 이 자리에서 그가 最近 拉致犯으로 報道된 鄭 氏에 對해 고개를 흔들더라. ‘(金錢的으로) 그렇게 많이 도와줬는데도 툭하면 손을 내밀고 하더니, 그 못된 버릇을 못 버리고 이런 凶惡한 犯罪까지 저질렀다’고 憤慨하더라”고 傳했다. [21] 記者와의 電話通話에서 金 前 議員은 앞서의 關係者가 傳한 ‘金品 支援說’에 對해 “내가 直接 한 것이 아니니 나 말고 鄭 前 總理의 祕書를 지냈던 神 아무개 前 議員이나 金 아무개 前 議員 等에게 물어보라”며 卽答을 避했다. [21]

祕書를 지낸 또 다른 金 前 議員 亦是 記者의 質問에 “어쨌거나 正確한 DNA 檢査 를 하지 않았으니 (親아들이라고) 斷定할 수는 없다. 다만 當時 鄭 氏가 넷째外三寸과 함께 돈을 얻을 料量으로 鄭 前 總理를 直接 指目하면서 親子確認訴訟을 하느니 騷動을 벌여 相當히 곤혹스러웠다”고 말했다. [21] 또한 그는 “鄭 氏(정성일)는 適切치 못한 處身으로 外家는 勿論 鄭 前 總理 側과도 完全 訣別하다시피 했다. 91年 그가 韓國에 와서 親子確認訴訟을 한다고 했을 때 鄭 前 總理 側에서 巨額을 주고 一旦 撫摩시켰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또 韓國에 나타나서 放送 인터뷰니 뭐니 여기저기 말하고 다녀 鄭 前 總理 側에서 아주 고개를 흔들 程度로 不快해 했다고 한다. 甚至於는 ‘相從해선 안 될 놈’이라는 막말까지 나올 程度였다고 한다”고 傳했다. 또 다른 鄭 前 總理의 側近인 申 前 議員은 外遊 中이어서 通話가 안됐다. [21]

한便 정성일은 2005年 12月 歸國하기 前까지 15年 以上 美國 LA에 머물렀는데 當時 韓人社會에서는 比較的 鄭 氏의 存在를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韓人僑胞社會의 한 關係者는 “이곳 現地 名門大 出身으로 話術이 좋고 생김새가 번듯했던 鄭 氏는 自動車 세일즈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하는 일에 비해서 씀씀이도 컸고, 스캔들도 제법 많았다. 自身을 ‘鄭 前 總理의 아들’이라고 자랑삼아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巷間에는 鄭 前 總理로부터 많은 金錢的 支援을 받았다는 所聞이 茂盛했다”고 傳했다. [21]

정성일 關聯 疑惑 [ 編輯 ]

정일권은 문명자 에게 自身은 不妊手術을 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정일권은 딸의 親舊이기도 했던 한양대학교 敎授 姨母 와 再婚, 그로부터 6年 뒤 1男 1女를 얻게 된다.

1971年 과 같은 해에 정일권을 만난 在美言論人 文明者는 정일권에게 "文 記者, 나는 정인숙과 딱 한番 같이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 니가 없소. 나는 이미 不妊手術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오"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33] 그러나 정일권이 不妊 手術을 한 狀態였는지는 確實하지 않다. 1977年 再婚한 夫人 사이에 2男妹가 出生했기 때문이다. 문명자 는 이 글에서 정일권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정일권이 먼저 不妊手術을 풀었다고 말해 그만두었다고 밝히고 있다. [35]

정성일은 '저는 當身의 아들이었습니다'라는 冊에서 1991年 11月 美國 에서 정일권과 對話를 나눈 狀況을 描寫하고 있다. 門을 사이에 두고 한 對話에서 정일권은 정성일에게 "아가야, 나는..... 나는 只今 가슴이 떨려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구나. 來日 아침에 電話를 하고 다시 와주련?"이란 말을 했다고 한다. [34] 그러나 1993年 SBS 주병진 쇼에 出演한 정성일은 "最近 鄭氏(정일권)가 나와의 直接 通話에서 '當身은 나의 아들이 아니며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34]

정인숙 暗殺 疑惑 [ 編輯 ]

정인숙 殺害 事件 以後 그는 정인숙 의 暗殺 背後로 疑心받기도 했다.

評價와 批判 [ 編輯 ]

生涯 2等에 滿足한 處世(處世)의 達人(達人)으로, 權力의 核心에 있었지만 最高權力을 넘보지 않고 現實에 挑戰하기보다는 順應했다는 評價가 있다. [36]

家族 關係 [ 編輯 ]

  • 첫째 夫人 : 윤계원 (死別)
    • 첫째 딸 : 정영혜
    • 첫째 사위 : 이훈
    • 둘째 딸 : 정성혜
    • 둘째 사위 : 이동휘
    • 셋째 딸 : 정지혜
    • 셋째 사위 : 최상규
  • 둘째 夫人 : 박혜수
    • 長男 : 정기훈 (정세훈)
    • 넷째 딸 : 정희진

기타 [ 編輯 ]

정약용 追慕 行事 [ 編輯 ]

그는 茶山 정약용 의 追慕 行事에 積極 參與하였다. 1975年 에는 京畿道 楊州郡 조안면 능내리(現在의 南楊州市 조안면 능내리)에 있던 정약용 의 墓所와 楊州郡 조안면 팔당호 邊에 있던 與猶堂 (與猶堂, 茶山 정약용 先生 生前 居處) 周邊을 整理하고 성역화하는 事業을 主管하였다. 또한 與猶堂에 揮毫를 새로 作成하기도 했다.

1974年 10月 에는 當時 京畿道知事 와 함께 與猶堂 정약용 遺跡地 整備를 記念하여 自然石에 親筆로 새긴 記念碑 與猶堂 (與猶堂) 入口에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與猶堂 入口에 새겨진 정일권의 親筆 記念碑는 2000年 누군가에 依해 情으로 쪼아져 毁損당했다.

정인숙 事件 [ 編輯 ]

그의 아들 정성일 을 낳았던 妖精 職員 정인숙 (鄭仁淑)李 갑작스럽게 被殺된 背景은 疑問이다. 1967年 警 以後 大韓民國 政界에는 高級 料亭집 아가씨가 妊娠했는데 그 아버지가 大統領 朴正熙 또는 정일권이라는 說이 퍼졌다. 정인숙 정인숙 의 遺族들은 아이 아버지로 정일권을 指目했다.

이는 當時 손석 作詞, 유현석 作曲이며 歌手 羅勳兒 가 부른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는 노래의 歌詞를 開寫하여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를 諷刺하여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청와대 미스터 情이라고 말하겠어요'라고 戱畫化하여 부르면서 널리 퍼졌고, 世人들의 입과 입을 통해 아이가 정일권을 닮았다는 所聞이 播多하게 퍼지게 되었다. 朝鮮日報 東亞日報 , 京鄕新聞 等 一部 言論에서 이를 報道했다가 强制로 記事檢閱, 削除를 當하기도 했다. 이때 朴正熙 는 그에게 問責性 辭退를 慫慂하였으며, 그 中 1970年 3月 17日 밤 11時頃, 서울 麻浦區 합정동 切頭山 近處에서 오빠 정종욱의 車輛을 타고 가던 정인숙 이 暗殺되면서 疑惑은 迷宮으로 남게 되었다.

以後 정일권度 12月 20日 總理 職을 辭退하면서 事件은 묻혀지게 되었다. 後에 정인숙의 아들 정성일이 그에게 面談을 要請했으나 그는 面談을 拒否하였다.

정일권을 演技한 俳優들 [ 編輯 ]

TV 시리즈 [ 編輯 ]

關聯 資料 [ 編輯 ]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71年 總選 8代 國會議員 全國區 民主공화당 6,254,921票
48.8%
全國區 2番 初選
1973年 總選 9代 國會議員 江原 束草市·襄陽郡·麟蹄郡·高城郡 民主공화당 57,994票
64.03%
1位 再選
1978年 總選 10代 國會議員 江原 束草市·襄陽郡·麟蹄郡·高城郡 民主공화당 58,251票
60.28%
1位 3選

各州 [ 編輯 ]

  1. 出生地는 러시아 沿海州 우수리스크 地域이지만, 親家 先代의 본적은 咸鏡北道 慶源郡 .
  2. 母親 金海 金氏 夫人 김순복(金順福)의 改名 (改名)하기 以前의 兒名 (兒名)은 김복순(金福順).
  3. 族譜
  4. 退役大將(完)- 丁一權 〉《경향신문》(1963年 9月 3日) 7쪽.
  5.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滿洲의 親日派"(2004年 3月 7日)
  6. 類演算, 일송정 푸른 솔에 先驅者는 없었다 (아이필드, 2004) 1페이지
  7. 退役大將(完)- 丁一權 〉《경향신문》(1963年 9月 3日) 7쪽.
  8. 1946年 1月 15日~: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 (1940年代篇 1卷) 196쪽.
  9. “統衛部發表” . 東亞日報. 1948年 6月 19日.  
  10. “參謀副長에 金大領就任” . 京鄕新聞. 1950年 4月 23日.  
  11. 退役大將(完)- 丁一權 〉《경향신문》(1963年 9月 3日) 7쪽.
  12. 유영익, 李承晩 大統領 再評價 (연세대학교出版部, 2006) 271페이지
  13. 유영익, 李承晩 大統領 再評價 (연세대학교出版部, 2006) 272페이지
  14. “駐佛代使 정일권氏 任命” . 東亞日報. 1959年 4月 17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5. “李大統領書翰傳達...에티오피아 皇帝에” . 東亞日報. 1960年 1月 21日.  
  16. “駐美大使 丁一權氏內定” . 京鄕新聞. 1960年 5月 31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7. “八日信任狀提呈” . 東亞日報. 1960年 6月 9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8. “韓國繼續支持” . 東亞日報. 1960年 6月 9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19. “丁大使워싱톤歸任” . 東亞日報. 1961年 12月 23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0. (週末探訪) 國會 速記士들의 世界 서울新聞 2006年 11月 11日 作成
  21. { http://www.ilyo.co.kr/news/articleView.html?idxno=61889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미스터리 追跡) 정인숙과 그아들, 眞實은 이것} 日曜新聞 2007年 4月 8日子
  22. 김환표 外, 《스캔들에 갇힌 靈魂들:示唆人物事前 16》 (人物과사상사, 2002) 104페이지
  23. ( 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art_id=201003191712273&sec_id=560101 정인숙 미스테리···最大 權力 섹스스캔들) 스포츠傾向 2010年 3月 19日子
  24. 김환표 外, 《스캔들에 갇힌 靈魂들:示唆人物事前 16》 (人物과사상사, 2002) 105페이지
  25. 김환표 外, 《스캔들에 갇힌 靈魂들:示唆人物事前 16》 (人物과사상사, 2002) 98페이지
  26. [第584號] 다시 떠오른 ‘정인숙의 追憶’疑問의 被殺 미스터리 全貌 Archived 2008年 3月 6日 - 웨이백 머신 日曜示唆 2007年 3月 20日子
  27. 이상우, 《비록 朴正熙 時代 (2)》 (中原文化社, 1984) 211페이지
  28. 김환표 外, 《스캔들에 갇힌 靈魂들:示唆人物事前 16》 (人物과사상사, 2002) 107페이지
  29. 김환표 外, 《스캔들에 갇힌 靈魂들:示唆人物事前 16》 (人物과사상사, 2002) 109페이지
  30. 임은순, <오빠 정종욱 氏가 밝힌 '정인숙 事件'의 眞相>, 京鄕新聞 1991年 1月 16日, 14面
  31. (정홍택의 只今은 말할 수 있다) <16>정인숙 事件과 나 Archived 2011年 12月 24日 - 웨이백 머신 韓國日報 2008年 7月 8日子
  32. "정성일이는 내 아들, 정일권氏 71年 告白", 京鄕新聞 1993年 2月 20日子, 23面
  33. 김환표 外, 《스캔들에 갇힌 靈魂들:示唆人物事前 16》 (人物과사상사, 2002) 110페이지
  34. 김환표 外, 《스캔들에 갇힌 靈魂들:示唆人物事前 16》 (人物과사상사, 2002) 108페이지
  35. 문명자, 문명자 回顧錄:내가 본 朴正熙와 金大中 (2), 대한매일 1999年 10月 6日子
  36. 1994.01.19日子 東亞日報, 5面

參考 文獻 [ 編輯 ]

  • 정일권, 《정일권回顧錄1~2》 (고려서적, 1996)
  • 廳舍정일권記念事業會, 《廳舍 정일권을 그리며》 (廳舍정일권記念事業會, 1996)
  •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60年代篇1》 (人物과 思想史, 2006)
  •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60年代篇3》 (人物과 思想史, 2006)
  •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70年代篇1》 (人物과 思想史, 2006)

參考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최두선
第9代 國務總理
1964年 5月 10日 ~ 1970年 12月 20日
後任
백두진
前任
백두진
第9代 大韓民國의 國會議長
1973年 3月 12日 ~ 1979年 3月 11日
後任
백두진
前任
백남억
第8代 民主공화당 議長
1972年 7月 26日 ~ 1973年 3月 8日
後任
이효상
前任
채병덕
第5代 陸軍參謀總長
1950年 6月 30日 ~ 1951年 6月 22日
後任
李鍾贊
前任
(新設)
招待 陸海空軍 總司令官
1950年 7月 6日 ~ 1951年 6月 22日
後任
(廢止)
前任
白善燁
第8代 陸軍參謀總長
1954年 2月 14日 ~ 1956年 6月 26日
後任
이형근
前任
이형근
第2代 聯合參謀本部總長
1956年 6月 27日 ~ 1957年 5月 18日
後任
유재흥
前任
(初代)
招待 週 터키 大使
1957年 5月 ~ 1959年 4月
後任
신응균
前任
양유찬
第3代 週 美國 大使
1960年 5月 ~ 1960年 9月
後任
장이욱
前任
장이욱
第5代 週 美國 大使
1961年 6月 ~ 1963年 4月
後任
김정렬
前任
김용식
第11代 外務部 長官
1963年 12月 17日 ~ 1964年 7月 24日
後任
이동원
前任
이동원
第13代 外務部 長官
1966年 12月 ~ 1967年 6月 29日
後任
최규하
前任
(束草·襄陽·固城) 한병기
(洪川·麟蹄) 이교선
第9代 國會議員(束草市·襄陽郡·麟蹄郡·高城郡)
1973年 3月 12日 ~ 1979年 3月 11日
民主공화당
김인기
後任
정일권, 함종빈
前任
정일권, 김인기
第10代 國會議員(束草市·襄陽郡·麟蹄郡·高城郡)
1979年 3月 12日 ~ 1980年 10月 27日
民主공화당 無所屬
함종빈
後任
(江陵·溟州·襄陽)
이범준 , 이봉모
(束草·楊口·麟蹄·固城)
허경구 , 정재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