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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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옥
趙炳玉
出生 1894年 5月 21日 ( 1894-05-21 )
朝鮮 忠淸道 天安郡
死亡 1960年 2月 15日 ( 1960-02-15 ) (65歲)
美國 워싱턴 D.C. 월터리드 陸軍病院에서 兵士 [1]
性別 男性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國籍 大韓民國
本館 漢陽
學歷 와이오밍 大學校 學士 · 碩士
컬럼비아 大學校 經濟學 博士 [2]
職業 獨立運動家, 警察官, 政治가
經歷 高麗大學校 招聘敎授
民主黨 代表最高委員 兼 顧問
民主黨 大選候補
第5代 內務部 長官
父母 아버지 조인원 (趙仁元, 獨立運動家)
어머니 南陽 洪氏 夫人
兄弟 男동생 조병호(趙炳鎬, 獨立運動家)
配偶者 老正面(盧禎冕)
子女 조윤형 (次男), 조순형 (三南) 等 3男 2女
宗敎 改新敎 ( 長老會 )
議員 選手 2
正當 民主黨
地域區 서울 城東區 을
黨內 職責 代表最高委員 兼 顧問

조병옥 (趙炳玉, 1894年 5月 21日 朝鮮 忠淸道 天安 出生 ~ 1960年 2月 15日 美國 워싱턴 D.C. 에서 兵士.)은 大韓民國 의 獨立運動家, 敎育者, 警察官, 政治人이다. 日帝 强占期 初盤 都彌 留學과 獨立運動에 從事하였고, 안창호 에게 感化되어 그의 興士團 修養동지회 , 국민회 일에 積極 參與하였다. 그 뒤 太平洋 戰爭 무렵 修養同友會 事件 等으로 두 次例나 獄苦를 치렀다. 解放 政局에서는 한민당 創黨에 參與한 뒤 美軍政의 警察總帥를 지냈으며, 1948年 政府樹立 後에는 UN代表團, 內務部 長官 等을 거친 뒤 李承晩 과 訣別했다. 解放 直後 美軍政 致賀 第2代 警察 統帥權者였다.

한국민주당 민주국민당 에서 活動하였으며, 1954年 護憲同志會 에 參與하였으며, 民主黨 에 入黨, 신익희 · 윤보선 · 유진산 等과 함께 민주당 舊派 의 리더로 活動하였다. 1950年 大韓民國 의 第2代 情·副統領 選擧에 副統領 候補者로 出馬하였으나 落選하였고, 1960年 大韓民國 第4代 大統領 候補者로 出馬하였으나 選擧遊說 中 病으로 美國 워싱턴 D. C. 월터리드 陸軍病院에 入院했다가 急逝하였다. 第1共和國 後半 與野의 葛藤이 尖銳하게 對立할 때 장택상 , 이기붕 等과 隨時로 만나 會談, 折衝을 主導하였으며, 記者들이나 强勁鬪爭을 要請하는 野黨人士들에게 하던 “빈대잡기 위해 草家三間 태울 수는 없지 않느냐”는 말은 回者化되었다. 本貫은 漢陽 , 忠淸南道 天安 에서 태어났으며, 號는 維石(維石)이다.

生涯 [ 編輯 ]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家計 [ 編輯 ]

趙炳玉은 조재형(趙載衡)의 셋째아들인 獨立運動家 조인원 (趙仁元 또는 조택원(趙宅元))과 否認 南陽洪氏의 長男으로 태어났다. [3] 趙炳玉의 家計는 林泉조氏로 高麗 중서첨의 조지수(趙之壽)의 아들 摠管 朝暉(趙暉)의 23代孫이며 그 後孫 中 中始祖이자 趙炳玉의 直系先祖人 조인옥(趙仁沃)은 朝鮮의 開國功臣이었다. [3] 아버지 조인원은 氣骨이 壯大하고 義俠心이 强하여 不遇한 사람들을 자주 도와주곤 하였다 한다.

趙炳玉은 後日 아버지를 追憶하기를 아버지가 나와같은 學識이 있었다면 偉大한 政治家가 되었을 것이라고 回想하기도 하였다. [4] 1919年 아버지 조인원은 병천면의 속張으로 敎會設立을 主管하였으며 1919年 3.1 萬歲 運動 當時 아버지 조인원은 3月 24日 柳寬順 의 아버지 류중권 과 謀議하고 3.1萬歲運動을 한 뒤 鄕里로 내려온 柳寬順을 說得하여 3月 24日 萬歲運動을 指揮하였다. 萬歲 中 日本軍은 示威隊에 銃을 겨누고 쏘았고, 아버지 조인원은 心臟 附近을 銃에 맞아 관통당하였다. 조인원은 忠淸南道 鎭川에 있는 英國人 病院에서 治療를 받았으나 貫通傷으로 傷處가 甚하여 3~4個月間 入院했다가 4年型을 받고 公州矯導所에 收監되었다. 萬歲運動에 加擔했던 趙炳玉의 동생도 3年型을 받고 矯導所에 收監되었다가 出監하였다. [5] 趙炳玉은 美國에서 아버지와 동생의 拘束 消息을 接하였다. [6] 그에게는 庶母가 한 名 더 있어서 1945年 解放 直後까지 모신 일도 있다. [7]

幼年期 [ 編輯 ]

어려서 趙炳玉은 잔病치레를 하였다. 毒腫氣를 앓아 발에 甚한 고름을 앓던 무렵 그의 母親 洪氏는 아들을 데리고 外科醫師 도 없던 當時 農村 의 오솔길과 山길에 어린아들을 업고 이리 저리 韓醫院을 찾아다니며 을 놓기도 하였다. 熱病을 앓아 누운 일도 있는데 이때 그의 母親은 밤을 세워가며 아들의 病구완을 하였다 한다. [6] 幼年期에 童蒙先習을 40日 만에 讀破하고 暗誦까지 하게 되었다. [7] 7歲 되던 해 그의 아버지는 家內에 書堂 을 차리고 忠北 槐山 에 사는 申(辛)先生을 모셔다가 가르쳤다. 趙炳玉은 13歲때까지 申先生 밑에서 受學하였다. [8] 以後 國諺文( 한글 을 그는 諺文이라 表現하였다.)을 10日 만에 깨우쳤으며 資治通鑑 은 8卷까지 읽었고, 小學 , 大學 , 重用 , 論語 , 孟子 , 時前 , 서전 , 四書三經 主役 을 빼놓고 全部 讀破하였다. 그 後 綱目 75卷 中 26卷을 읽기도 하였다. [8] 아버지 조인원 은 15歲에 趙炳玉을 結婚시킬 생각이었으며 伯父의 東西뻘 되는 漢學者가 運營하는 書堂에 보낼 計劃이었으나 美國人 宣敎師 케블 牧師를 만나 基督敎宣敎에 同參하면서 속張이라는 敎職을 얻게 되었다 한다. [8]

靑年期 [ 編輯 ]

學窓 時節 [ 編輯 ]

1903年 趙炳玉은 케블 牧師의 推薦으로 公州郡 英明學校 에 入學하였다. [8] 英明學校는 5年制 小學校와 2年制 特別中學校가 있었는데, 趙炳玉은 特別 配慮로 英明小學校 4學年 過程에 編入하였다. 公州郡으로 留學하여 下宿하였으며 1908年 英明小學校 6學年을 卒業하였다. 1908年 이어 영명중學校로 進學하여 2年 課程을 마치고 1910年 英明中學校를 卒業하였다. [8] 旣往에 新學問을 배우게 한 以上 아들을 神學者 로 大聲시키려 한 아버지 조인원은 그를 숭실중學校 에 편입시킬 것을 決定하였고 [9] 조병옥 亦是 스스로 알아본 結果 崇實學校는 學年이 5百 名으로 學校 規律 이나 紀綱 이 嚴한 데다가 近處에 있던 안창호 의 大成學校의 影響을 받았다고 하며, 배재學堂과 경신학교의 學年 數는 2百名 未滿이며 두 學校에 對한 否定的인 所聞을 함께 接하게 되면서 그는 숭실學校 編入을 選擇하게 되었다. [10]

숭실중學校 時節의 그에게 修辭學과 論理學을 가르친 김규식

1910年 4年制 中學校인 숭실중學校 3學年 過程에 編入하여 1912年 봄 숭실중學校를 卒業하였다. 숭실중學校 在學 中에는 演說과 討論 大會에도 出戰하였다. [10] 숭실중學校로 編入學하러 가는 길에 京城 大漢門 앞에서 乙巳條約의 詔勅門을 듣고 激忿하여 痛哭하였다. [11] 숭실중學校 在學 當時 그는 英語敎師이자 修辭學敎師人 김규식 博士를 따랐다고 追憶하였다. [12] 英語 時間에 김규식 先生은 곧잘 英語詩를 읊어주곤 하였다고 하는데 셀리 , 키츠 , 테니슨 , 바이런 等等의 詩를 잘 읽어 주었다. 그러나 解放 뒤 中間路線을 걸으면서 失望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12]

敎育 活動 [ 編輯 ]

1912年 봄 숭실중學校를 卒業하고 서울로 上京하였다. 이때 1911年 美國 에서 프린스턴 大學校 를 卒業하고 博士學位를 받은 李承晩 의 歸國에 影響을 받아 美國 留學을 憧憬하게 되었고, 이어 신흥우 , 김규식 , 백상규 等의 美國 留學派의 感化를 받아 그는 美國 留學을 決心하게 된다. 美國 留學을 決心한 趙炳玉은 英語를 배우기 위해 1912年 배재專門學校에 入學하였다. [12] 배재학교에는 當時 숭실중學校 恩師였던 金奎植도 在職하고 있었다. [12]

배재學堂 在學 當時 趙炳玉은 '내가 가장 재미있게 聽講할 수 있었던 科目은 金奎植 博士의 修辭學(修辭學)이었다. 金奎植 博士는 英語에 能爛하였으며 또 漢文도 쉽게 習得해 縱橫으로 驅使하는데 그 재주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金奎植 博士는 授業 時間에 곧잘 英詩를 읊어주곤 하였던 것이다. 셀리, 키이츠, 테니슨, 바이런 等等의 詩들을 잘 읽어 주었다. 나의 先生이었던 金奎植 博士에 對하여 나는 누구보다도 많은 期待를 가졌던 것이다. 金奎植 博士는 國運이 기울어지자 다른 亡命知事들과 함께 蒙古에 亡命하였다가 上海 臨時政府 要因으로 파리 講和會議에까지 가서 國際的으로 活躍을 눈부시게 하였던 故로, 그가 歸國하였을 때는 많은 期待를 가졌으나 中間 路線을 걸어 나는 퍽이나 失望하였던 것이다. 何如튼 나는 1年 동안 그에게서 修辭學을 배우는 데 있어 많은 도움이 된 것만은 事實이다. [13] '라고 回想하였다.

1911年 6月 배재학교 校長이 베카 博士에서 신흥우로 바뀌면서 新任 신흥우 敎藏의 要請으로 學校 學生으로 時間講師職을 맡게 되었다. 나이가 어린데다가 學生들의 나이가 많아, 學生들로부터 아이先生에 어른學生이라는 놀림을 當하기도 하였으나, 1年間 時間講師職을 遂行하였다. [14]

趙炳玉이 맡은 科目은 漢字 科目으로 論語 , 孟子 等을 流暢하게 解釋瑕疵 그를 놀리던 나이많은 學生 들도 더 以上 그를 놀리지 않았다고 한다. [14] 배재學堂 時間 講師 로 있을 무렵 仲媒 請婚이 들어왔는데, 公主 英明學校 擔任인 윤성열(尹聲烈) 恩師의 母親의 紹介로 大韓帝國 政府에서 高等官 의 벼슬을 지낸 노병선 (盧炳善)의 딸 老正面 (盧禎冕)을 紹介 받았다. [14] 가톨릭교 信者인 老正面은 當時 小學校 敎師로 勤務했는데, 趙炳玉은 윤성열의 母親에게 진명여학교를 卒業하고 小學校 에서 敎鞭을 잡던 老正面을 만나게 해달라고 付託하여, 윤성열의 母親과 祕密裏에 길목에 숨어 있다가 小學校 로 가는 길목에 숨어서 老正面이 出勤하는 모습을 지켜본 뒤, 노병선 과 吳氏 內外를 찾아가 請婚하여 承認을 얻었다. [15]

1914年 배재學堂 大學部 를 마치고(졸업생 有無가 確實치 않아서), 美國 와이오밍 大學校로 留學을 떠났다. 1918年 와이오밍 大學 學士課程을 卒業하고 뉴욕 컬럼비아 大學校 經濟學 大學院으로 進學하였다.

儒學과 獨立運動 [ 編輯 ]

儒學과 3.1運動 前後 [ 編輯 ]

1919年 4月 , 美國 現地에서 3·1 運動 의 消息을 接하였다. 한便 3·1 運動 消息을 接한 李承晩 은 萬歲運動에 呼應하기 위해 4月 初에 公知하여 4月 13日 , 필라델피아 에서 第1次 韓人聯合會의 (The First Korean Congress)를 召集하였다. 趙炳玉은 4月 13日 부터 4月 15日 까지 3日間 필라델피아에서 開催된 韓人聯合會議에 參席하였다. 이 大會에서 조병옥度 演士로 參與하였다.

한便 아우내 場터 萬歲 示威에서 아버지 조인원과 동생 조병호가 逮捕, 投獄됐다는 消息을 接하였다. 萬歲 示威 中 柳寬順의 아버지 류중권(柳重權), 柳寬順의 어머니 이소제(李少悌) 等 19名이 現場에서 死亡하고 30餘名이 負傷했으며 柳寬順 等은 投獄되었다. 이에 함께 萬歲를 부르던 아버지 조인원은 옆구리에 銃알이 貫通하여 쓰러졌다. 나중에 아버지 조인원은 氣力을 回復, 現場에서 死亡한 屍身들을 敎會堂으로 옮기고 日本 警察에 抗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동생 조병호(趙炳鎬), 류중권의 동생 類中무(柳重武) 等과 憲兵駐在所로 달려가 웃옷을 벗어 제치고, 주재소장과 憲兵들에게 强力히 抗議하다가 逮捕되었다. 結局 利害 9月 11日 아버지 조인원과 동생 조병호 等은 高等法院에서 懲役 3年刑이 確定되어 獄苦를 치렀다.

1925年 美國 컬럼비아 大學校 에서 〈韓國의 土地制度〉라는 論文으로 經濟學 博士 學位를 받았다. [16] 이어 美國 留學過程에서 만난 老正面과 結婚을 約束하였다. 承政院 左承旨를 지낸 光州盧氏 노병선(盧炳善)의 딸로 老正面은 진명여고와 뉴욕의 드류 學院을 卒業했다.

神父를 만난 뒤 趙炳玉은 結婚前 神父될 사람에게도 新式敎育이 必要하다며 自身과 같이 都彌留學을 할 것을 勸告하였다. 新郞될 自身만이 高等敎育을 받는다면 平等하지 못한 일이며, 新婦가 高等敎育을 받지 못한다면 當身은 아래層에 있고 홀로 위層에 있는 것과 같다. 이는 家庭의 밸런스가 맞지 않고 非民主的인 家庭은 幸福을 期待할 수 없으니 美國으로 건너간 後 神父 亦是 美國으로 건너오도록 說得하였던 것이다. [17] 한便 아버지의 旅費負擔으로 그는 約婚者 老正面과 함께 美國 留學길에 올랐다. [17] 當初 日本 留學을 決定하였으나 日本 에 對한 敵愾心과 美國 에 對한 憧憬心으로 美國留學길을 擇하게 되었다. [18] 조인원은 논밭 120斗落을 팔아 費用 3千원을 마련하여 아들과 며느리의 學費 兼 旅費로 주었다. [19]

獨立運動과 言論 活動 [ 編輯 ]

島山 안창호 . 安昌浩의 人品에 感動한 그는 興士團과 修養同友會에 加入하여 活動한다.
1929年 겨울, 光州學生運動 背後操縱 嫌疑로 逮捕되었을 무렵

美國 滯留 中 안창호 와 面談한 後 그의 思想에 感化된 趙炳玉은 歸國 後 윤치호 를 찾아뵌 뒤, 이광수 를 찾아가 함께 興士團 修養同友會 의 國內 支部 結成을 推進한다.

歸國 後 연희전문에서 5年 동안 敎鞭을 잡았고, 以後 獨立運動의 길에 들어섰다. 基督敎여자靑年會(YWCA)理事와 祕密獨立團體인 基督신우회 會員으로 活動했다. 1925年 新幹會 (新幹會)의 創立委員으로 參加하고 參與하여 新幹會 財政部長·總務部長 等을 지냈다.

1929年 光州學生運動 을 擁護하는 民衆大會를 열어 光州學生運動의 背後操縱嫌疑로 한용운 等과 함께 3年型을 言渡받고 監獄에 收監되었으며, 3年 동안 獄살이를 하였다. [16] 그 뒤 島山 安昌浩 가 指導하는 興士團 에서 活動하다가 또다시 獄苦를 치렀다. 1932年 釋放되었으나 이番에는 안창호 尹奉吉 義擧 關聯者로 指目되어 投獄된다. 그는 안창호 의 釋放과 寶石을 위해 努力하였다. 그는 이광수 等과 國內에 興士團 支部를 結成하려 했으나 修養同友會 事件으로 失敗하고 만다.

日帝 强占期 後半 [ 編輯 ]

조병옥(1932年)
修養同友會 事件으로 收監된 조병옥 (1938年)

1932年 조만식 과 함께 經營難에 시달리는 朝鮮日報 引受運動에 參與하여, 조만식 이 四柱가 되고 그는 朝鮮日報 專務 兼 營業局 局長이 되었다. 1937年 修養동지회 事件으로 逮捕되었다.

修養동지회 事件으로 그는 2年間 服役하였다. [16] 1937年부터 1945年까지 보인鑛業會社를 經營하기도 했다. [20] 그 뒤 3審에서 無罪가 確定되어 1939年 釋放되었다.

當時 趙炳玉의 回顧에 依하면

洋酒에 쌀을 얻으러 서울에서 고무신을 신고 아내와 갔다. 발바닥이 부르텄다. 쌀 두말을 밀가루 푸대에 넣어 가지고 새끼로 묶어 내 등에 지고 다시 서울로 떠났다. 어깨가 아픈 것을 잊기 위해 우리 夫婦는 '옛날에 金잔디 동산에 메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을 合唱하며 돌아왔다. 밤 12時에 到着하였다. 집에 와서 貰房 조그만한 門을 열어 보니 아이들은 우리를 기다리다 못해 지쳐서 옹기종기 쪼그리고 자고 있었다. 나의 막내아들 脣形이는 잠을 깨어 우리를 보더니 울음을 터뜨리면서 배고프다고 하소연하였다. 그 다음날 살 두말을 오래 木器 위해 우리 夫婦는 뚝섬으로 무시래기를 얻으러 갔었다.

以後 그는 돈이 없어 旅館房과 親舊 집 舍廊房을 轉轉했다. 夫人 老正面은 삯바느질과 食母살이를 하였다. 出監 後 여러番 사람을 보내 協力을 바라는 朝鮮總督府 와 日帝의 要求를 一切 拒否하였고, 1940年 代 以後 創氏改名 을 강요당하였으나 創氏改名도 하지 않는 等 朝鮮總督府 統治에 對한 非妥協的인 態度로 一貫했다. 日帝의 壓力과 監視가 더욱 심해지자 서울生活을 그만두고 移徙, 故鄕인 天安郡 용두리로 내려가 解放이 될 때까지 지냈다.

光復 以後 [ 編輯 ]

光復 直後 活動 [ 編輯 ]

警察 總帥 就任 [ 編輯 ]
軍政廳 警務部長 時節 최동오 , 김우평 , 존 貿草 等과 함께

1945年 光復 直後 金性洙 , 장덕수 等과 한민당 을 組織하여 反共, 反託을 旗幟로 내걸었다. 以後 美軍政下에서 1945年 (發令은 1946年 1月 13日이었지만, 이미 1945年 10月부터 그 자리에 內定돼 있었다)부터 1948年 까지 美軍政廳 警務局 局長을 맡아 首都警察廳長 장택상 , 檢察總長 異人 , 大法院長 김용무 와 더불어 左派 剔抉을 主導하였다. [21] 反共精神이 剛하고 배짱이 두둑해 解放政局 治安을 제대로 維持해 나가는데 適任者라고 보았던 것이다.

警務部長 在職 中 그는 李承晩 하지 사이의 葛藤을 仲裁하였고, 臨政 의 美軍政 顚覆 計劃에 對해 政府 僭稱이라며 自制할 것을 促求하기도 했다. 신익희 , 지청천 , 이범석 과 같이 麾下 靑年團體는 없었으나 警察權을 손에 쥐면서 武力을 動員할 수 있는 몇안되는 政治人이기도 했다. 軍政廳 警務部長으로 在職하면서 特定 政黨을 편들어준다는 이미지를 심어주지 않으려고 일부러 한민당 의 일은 忌避하였다.

이때 親日派 警察의 採用이 問題가 되었다. 親日派 警察의 採用은 警務部長 조병옥과 [21] 首都警察廳 장택상 等에 依해 推進되었다. [22]

장택상 과 趙炳玉은 서로 相對方의 業務能力을 認定하였고, 최능진 이나 김규식 等이 軍政廳 警察 治安을 攻擊할 때는 서로를 極口 辯護하기도 했다. 그러나 個人的으로는 사이가 別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元來부터 장택상 과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는 陳述도 있다. 當時 軍政廳 警察에 勤務하던 박병배 에 依하면 '元來 滄浪 先生과 維石 先生은 人間的으로 볼 때 남이 부러울 程度로 더할 나위 없는 多情한 親舊였다. 그러나 두 분의 性格上의 差異를 逆利用한 一部 部下들의 阿諂은 霸權 다툼의 樣相을 띠어 數十年에 걸친 두 분의 友情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23] '고 回想하였다.

反託運動을 反對 [ 編輯 ]

信託統治 反對 會議에 參席한 趙炳玉은 反託運動을 反對하였다. 그는 '나는 當時의 國際情勢에 비추어 軍政段階를 通過하여아만 自由獨立을 實現할 것이라 믿고, 臨時政府에서의 美軍政 協調의 必要性을 力說하면서 軍政의 接受, 美軍 逐出은 不當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24] ?

그러나 그의 建議는 默殺되었고 1945年 12月 30日 부터 全國的으로 임정의 指令에 따라 反託運動이 開始되었다. 趙炳玉은 바로 警務部 管轄 下에 있는 警察官 및 公務員들은 輕率한 行動을 取하지 말라고 示達하였음에도 不拘하고 서울市內 8個區 警察署長이 總辭職을 表明하였다는 報告를 듣고 나는 卽時 罷免하였다. [24]

下肢의 臨政要人 追放 事態 [ 編輯 ]

臨政 主催의 反託 運動이 極致에 達한 1945年 12月 31日 下午 하지 中將은 조병옥에게 連絡官을 보내 司令官室에서 요담할 것을 要請해 왔으므로 卽時 하지를 만나러 갔다. 하지 中將은 말하기를 軍政을 接受하려는 臨時政府 要因들을 卽時 處置해야 되겠다고 말하면서 그날 저녁 臨政 要因 處置에 對한 放送을 하겠다고 조병옥에게 原稿 專門을 보여주었다. [24]

元來 重慶에 있었던 大韓民國 臨時政府 要因 33名은 韓國에 入國할 때 美軍政 의 法과 秩序維持에 服從하겠다는 盟約을 하였음에도 不拘하고 信託統治 反對運動을 憑藉하여 美軍政을 接受하고 美軍들을 逐出하려고 劃策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劃策과 軍政 接收運動의 餘波로써 公共 安寧秩序를 維持하기가 不可能하므로 오늘밤 0時를 期하여 仁川 所在 前 日本 捕虜收容所에 受容하였다가 中國 으로 追放하겠다. [25]
 
— 原稿 內容

趙炳玉은 卽時 이 原稿를 다 읽고 난 뒤 驚愕하면서 下之中長에게 말하기를 臨政 要因들은 우리 民族史에 찬연히 빛나는 3.1 運動 以來 自由獨立의 赫赫한 經歷을 가진 분으로 民族의 自由全治運動의 烽火를 든 民族運動의 透寫이므로 이 愛國者들의 國外追放은 美軍政 에 協助하는 韓國人의 民心을 離脫시키는 結果를 招來하는 同時에 美軍政은 韓國에 있어서 失敗로 끝나는 結果를 가져올 것이니 그런 措置는 中止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25]

하지 中將은 趙炳玉의 말을 듣고 있다가 그러면 放送을 中止하겠다고 하였다. 趙炳玉은 卽席에서 金九 와 下肢의 面談을 約束받았다. 趙炳玉은 하지 中將에게 "나에게 金九 主席과 協商할 全權을 맡겨 달라."고 要請하였다. 하지 中將은 이를 쾌히 承諾하였다. [25] 12月 31日 저녁 趙炳玉은 西大門에 있는 京橋莊을 訪問하여 金九의 宿所를 訪問하게 되었다. [25] 趙炳玉은 金九 와 여러 時間 面談하였다. 趙炳玉은 金九 에게 進言하기를

註釋께서 入國하실 때에 獨立軍 한 名도 帶同하지 못하고 政治資金도 한 푼도 없이 美軍政에 協力하겠다고 盟約한 以上 現在의 臨政이 計劃하고 있는 美軍政 接受 運動은 抛棄하여야 할 것입니다. 只今 北韓 共産主義 治下에 붉은 물이 들어가고 그에 따라 韓半島는 全域에 걸쳐 共産主義 鐵製에 휩쓸려 갈지도 모르는 이 歷史的 段階에 있어서 우리 民族은 美軍政 의 段階를 通過하지 않고는 到底히 自由獨立을 完遂하지 못할 것이오니 主席께서는 그 點 愼重히 深思熟考하시어 한番 하지 將軍과 만나 기탄없는 意見을 交換해 보심이 어떻습니까? [25]

趙炳玉의 말에 金九 는 하지 中將을 만나 보겠다고 受諾, 그의 眞言을 들어주었다.

臨政·右翼團體와 美郡政 間 仲裁 活動 [ 編輯 ]
書齋에서

1945年 12月 臨時政府 의 反託 쿠테타 試圖에 火가 난 軍政廳 司令官 존 하지 는 臨時政府 要因들을 强制追放하려 했다. 하지는 12月 31日 0時를 期해 臨政 要因들을 仁川에 있는 前 日本軍의 美軍 收容所에 受容했다가 中國으로 追放할 計劃을 세웠다. [26] 그러나 軍政廳 警務部長 趙炳玉의 說得으로 追放計劃은 取消되고 46年 1月 1日 반도호텔의 하지 事務室에서 臨時政府側과 軍政廳 側의 協商을 進行했다. [26]

信託統治 反對 會議에 參席한 조병옥 亦是 反託運動을 反對하였다. 그는 '나는 當時의 國際情勢에 비추어 軍政段階를 通過하여아만 自由獨立을 實現할 것이라 믿고, 臨時政府에서의 美軍政 協調의 必要性을 力說하면서 軍政의 接受, 美軍 逐出은 不當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24] 그러나 그의 建議는 默殺되었다. 趙炳玉은 바로 '警務部 管轄 下에 있는 警察官 및 公務員들은 輕率한 行動을 取하지 말라고 示達하였음에도 不拘하고 서울市內 8個區 警察署長이 總辭職을 表明하였다는 報告를 듣고 나는 卽時 罷免하였다. [24] '

以後 日帝 强占期의 警察 實務陣을 採用하여 論難이 되기도 했다. 조병옥과 장택상 의 親日警察 採用 所信이 드러난 것은 1946年 1月 에 있었던 서울市內 8署長 任命이었다. 서울市內 8個 警察署의 序章으로 새로이 任命된 이들은 모두 前職 一齊 警察官 들이었다. [27] 警務局長으로 그는 國立警察 組織을 構成한다. 道에는 警察廳을, 詩와 郡에는 警察署를, 洞과 面에는 支署를 2個를 두게 하여 警察組織의 系統을 作成하였고 警察專門學校를 淸雪해 警察 幹部들을 길러내기 始作했다. 그의 提案은 美軍政廳에 卽時 收容되었고, 英語를 잘하는 點 亦是 그의 아이디어의 採擇에 도움이 됐다. 以後 國立警察의 全體 兵力을 2萬5千 名 規模로 擴大하였다.

1947年 右翼團體의 行動이 民族的 愛國團體의 共同防衛적 立場에서 出發한 行動이라는 談話를 發表했다. 美軍政廳 軍政長官 러치 가 西北靑年會 等 熱烈한 反共 右翼團體를 解體를 指示했지만 조병옥과 美軍政廳 韓人 副處長들은 西淸과 같은 熱烈한 反共右翼團體를 解體시켜서는 안 된다고 主張해 實行되지 않았다. [28] [29]

親日 警察 採用 波動 [ 編輯 ]

1946年 10月 大邱 10月 事態의 早速한 收拾과 左右合作파들을 立法委員會로 끌어들이기 위해 美軍政廳은 朝美共同委員會를 構成했다. 助味共同會談은 10月 23日부터 會談을 開始하여 12月 10日까지 總 27回의 會談을 開催하였다. 總 會議時間 84時間 中 75時間이 警察 問題에 焦點이 맞추어졌다. [30] 趙炳玉은 朝美共同委員會에 出席하여 親日警察의 採用原因을 陳述하였다. 親日警察을 登用하여 民心이 離脫하여 大邱事態가 發生한 것은 알고 있으나 그는 親日은 두가지로 區分되어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하나는 職業的인 親日이고 다른 하나는 家族과 生命을 保護하기 위한 延命策으로 區別해서 다루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30] [31]

한便 朝美共同委員會에 出席한 搜査局長 최능진 은 反駁聲明을 내고 國立警察을 北韓에서 共産主義者들에 依하여 逐出된 腐敗한 警察官들을 包含해서 日本의 訓鍊을 받은 警察과 反逆者들의 避難處라며 反駁하였다. [30] [32] 12月 2日 趙炳玉은 助味共同委員會에서 自身을 誹謗한 최능진 에게 國立警察의 協和와 命令系統의 確保에 有害하기 때문이라는 理由를 들어 辭職을 要求하였다. 최능진 은 辭職한 뒤 趙炳玉을 非難하는 公開書翰을 發表했다. [30]

최능진 은 公開書翰에서 趙炳玉은 民族運動者를 잡아주던 사람을 高官大爵에 採用하고 純粹한 獨立運動者를 無經驗者라고 排斥한 사람이라 批判하고 解放前의 趙炳玉으로 돌아가라고 促求했다. 장택상 이 趙炳玉의 便을 들어 최능진 을 非難하는 聲明을 내자 최능진 12月 13日 이에 答하는 聲明을 냈다. 聲明에서 日帝 走狗가 一朝一夕에 愛國者가 되어 民衆 指揮者는 될 수 없으므로 幹部級에서 이들을 除去하고 下部 陣營에만 警察技術者들을 存置시켜 民主警察陣을 强化하고자 하였으나 趙炳玉은 끝내 나와 意見이 對立되었다. 只今의 警察은 親日警察이 아니고 무엇일까 하며 恨歎하였다. [33] [34] 46年 11月 29日 朝美共同委員會는 하지에게 警察改革의 方案을 提示한 報告書를 提出하였는데, 報告書에는 警察에 對한 怨恨과 軍政廳 내 親日派의 殘留 問題를 擧論하면서 警務部長 조병옥에 對한 引責 罷免을 要求하였다. 그러나 軍政廳은 趙炳玉의 罷免 要求를 拒否하였다. [33]

中道派, 左派와의 葛藤 [ 編輯 ]

大邱 10月 事態 直後 大邱暴動의 原因이 親日派 警察을 登用한 것이라는 中間派들의 批判 [35] 後 趙炳玉은 日帝時代의 警察官 實務 登用을 두고 軍政廳에서 批判 輿論이 나오자 聽聞會에 參席한 軍政廳 高位 官僚들과 그 家族 側近들의 親日 前歷을 批判하면서 김규식 의 아들의 日本軍 服務 經歷을 指摘하였다. 趙炳玉은 김규식 에게 '日帝때 上海에서 日本의 海軍 스파이로 8年間 活躍한 責任을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36] '라며 아들의 日本 海軍 服務에 對한 疑惑을 提起하였다.

先生님은 내가 1年 동안 배재專門學校에서 배운 까닭에 師弟之間입니다. 그리고 先生은 學識이 豐富하고 人格이 高邁한 분으로 저는 重慶의 臨政 要因들 가운데서 博士님을 가장 尊敬하였으며 國際情勢에 該博한 분이라 가장 屬望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先生이 解放 以後 歸國해서 政治活動을 하는 것을 볼 것 같으면 左도 아니고 于도 아닌 中間 路線을 걷는다고 하여 韓國民의 路線을 曖昧하게 하고 混亂을 일으키게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先生의 子弟自身(子弟自信)은 日帝時代에 무엇을 하였습니까? 日帝때 上海에서 日本의 海軍 스파이로 8年間 活躍한 責任을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愛國者요 領導者를 自處하고 계시는 書生이 이런 矛盾된 生活態度를 가지고 있었거늘 하물며 나와 다른 많은 韓國의 普通 凡夫들이 어찌 太平洋 戰爭이 미리 일어날 줄로 알고 日帝 協力을 용감히 拒否할 수가 있었을 것이며 또 나 自身은 抗日鬪爭을 한 一員이지만 亦是 凡夫인지라 내 子息의 運命을 내 運命課똑같이 할 수가 없어서 日本 東京에 있는 경응大學(게이오기주쿠 大學)에 留學시킨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學兵에는 斷然코 拒否하는 態度를 取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나이면서도 警務部의 人事方針은, 故意로 自己의 영달을 위하여 民族運動을 妨害하였거나 民族運動者를 殺害한 者 以外에는 一般警察에 前職經驗이 있는 警察官 出身者들을 Pro Job(프로 잡, 專門 職業인)으로 認定하고 國立警察官으로 登用하였던 것입니다. [37]

한便 김규식 은 이에 對한 별다른 對答이 없었다고 한다. 그는 '元來 警務部長 趙炳玉 博士는 내가 가르친 사람이요. 그리고 美國에 가서 博士學位까지 받은 훌륭한 學者로서 知識이 豐富하고 人格과 德望이 있는 사람이며 走馬加鞭格(走馬加鞭格)으로 軍政 行政에 있어서 더 잘 해달라고 付託할 따름입니다. 그리고 더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36] ' 하고는 退場하였다 한다. 結局 親日警察 採用 波紋은 不文律에 붙여졌다. 그러나 조병옥과 中道派, 左派와의 葛藤은 激化되었다.

1947年 5月 장택상 과 함께 右翼 陣營이 美蘇共委 破綻을 위해 關聯者 暗殺을 計劃中이며 첫 對象者로 꼽힌 人物은 여운형 김규식 , 허헌 이었다고 報告하였다. [38] 趙炳玉은 김석황 臨政 系列이 이들 外에 微笑共委 蘇聯 側 代表를 暗殺하고 조병옥· 장택상 의 暗殺 計劃도 꾸미고 있다고 主張했다. [38]

政府 樹立 直前 [ 編輯 ]

UN 韓國委員團 代表 바비돌 싱과 面談中인 조병옥 (1948年 4月)

그는 李承晩 의 單獨政府 樹立에 支持하여, 김규식 을 擁立하려는 美 軍政 司令長官 하지 의 意見에 反對, 장택상 과 함께 李承晩 을 支持하였다. 1948年 1月 14日 유엔 韓國 委員會(UN Commission on Korea)가 韓國 에 到着하자, 서울 運動場에서 열린 유엔 代表 歡迎式에 參席하여 祝辭를 發表하였다.

1948年 6月 22日 大韓民國警察 管 追悼式 招請狀을 서재필 , 뮤리엘 等에게 보냈다. 6月 25日 午前 10時 1947年 1月 1日 ~ 1948年 1月 1日 의 期間동안 殉職한 大韓民國警察官 追悼式을 主管하였다. 趙炳玉은 解放 以後 李承晩 을 줄곧 支持해왔다. 그러나 李承晩은 그의 性格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外交官으로 外國으로만 돌게 하려 하였다.

3月 趙炳玉은 배재전文學當 修辭學, 英語 科目 恩師였던 김규식 을 찾아가 南北協商은 無理手이며 政治生命을 끊는 自害行爲라며 北行길을 挽留하였다. 大韓民國 臨時政府 要因에 對해 否定的이었지만 그는 김규식 에게는 愛憎이 交叉하는 妙한 態度를 보여왔다. 그는 3月 부터 4月 4日 까지 繼續 三廳長 에 電話하여 같은 內容을 反復하였으나 김규식 은 結局 北行길에 오르게 된다.

1948年 4月 김규식 南北協商 에 參與하려 할 때 周邊에서는 그에게 北韓 에 가지 말 것을 여러番 勸告하였다. 南北協商 이 政治的 自殺 行爲임을 김규식 銀 잘 알고 있었다. 趙炳玉은 '南北協商을 한다고 하더라도 結局은 何等의 結論도 못 얻고 그대로 돌아올 것이라고 確信하였다. [39] ' 그래서 趙炳玉은 金奎植을 찾아가 北韓 에 가지 말 것을 說得하였다. 趙炳玉은 김규식 을 訪問하여 3時間 동안 面談하면서 現存 國際情勢 下에 있어서 共産主義 者들과 獨立政府 樹立을 協商한다는 것은 無益한 일이며 協商을 하기 위하여 北行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虛行(虛行)李 될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政治的 自殺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39] 김규식 도 그의 意見을 존중히 여기고 北行하지 않을 것을 말하였던 것이다. [39] 그러나 4月 14日 文化藝術人 108名의 南北協商 支持聲明과 一部의 北行 慫慂으로 結局 김규식 은 北行하고 만다. 趙炳玉은 이를 두고 金奎植 博士는 그의 家庭環境과 民族自主聯盟의 中間派 幹部들의 策動과 熱源에 依支하여 不幸하게도 以北의 땅을 밟게 되었던 것이라 [39] 며 안타까워하였다.

7月 22日 李承晩 大韓民國 國會 의 間接選擧에 依해 初代 大統領에 選出되었다. 趙炳玉은 李承晩에게 문교부 長官職을 提議받았으나, "나는 私生活에 있어서 一般 民衆에게 좋지 못한 非難을 받고 있는 處地이므로 其他의 長官을 알 수 있으나 靑年學徒들의 師表가 되는 문교부 長官은 할 수 없다."라며 拒絶한다. 內心 內務長官이나 國防長官을 願했다. 그러나 李承晩 은 조병옥에게 문교부나 外務部를 擇하게 했다. 自身의 希望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李承晩에게 南侵威脅과 그에 對備한 軍事援助의 必要性을 主張하고 美國에 特使로 派遣해 줄 것을 要請했다.

政府 樹立 以後 [ 編輯 ]

建國과 政治活動 [ 編輯 ]

1948年 12月 파리 UN總會에 派遣된 大韓民國 政府 代表團. 맨 앞줄 왼쪽이 조병옥, 가운데는 代表團長 場面 , 왼쪽은 장기영 , 뒷줄은 왼쪽부터 정일형 , 모윤숙 , 金活蘭 , 姓名 未詳, 김우평
1948年 12月 , 파리 샤오宮에서 열린 第3次 유엔 臨時總會에서 總會 結果가 다가오자 焦燥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大韓民國 政府 代表團. 앞줄 왼쪽부터 時計方向으로 남궁염 , 한사람 건너 모윤숙 , 조병옥, 場面 .

1948年 8月 15日 , 大韓民國 政府 樹立 後, 제3차 國際 聯合 總會 (1948年 12月 7日~ 12月 12日, 프랑스 파리)에 韓國 代表團에, 大韓民國 에 對한 國際 聯合 의 承認을 위한 弘報使節로서 場面 (團長), 장기영 , 金活蘭 , 정일형 , 전규홍 , 김우평 , 김준구 , 모윤숙 과 함께 參席하였다.

1949年 第4次 國際 聯合 總會 에서는 趙炳玉이 韓國 代表團 團長으로서, 場面 과 함께 參席하였다. [40] 1949年 2月 10日 한국민주당 大韓國民黨 신익희 , 지청천 系列이 統合하여 민주국민당 을 創黨, 結成할 때 參與하였다.

1949年 3月 24日, 딘 애치슨 을 만나고 나온 조병옥 特使는 美國 記者들에게 韓國에 對한 美國의 軍事援助가 切實하다는 點을 이같이 說明했다.: "우리는 한名의 美國軍人度 要求하지 않는다. 戰鬪가 必要하게 되면 우리 自身이 하겠다. 그러나 우리는 20萬名의 兵力을 갖고있는 北韓共産主義者들보다 모든 面에서 劣勢를 면치 못하고 있다. 우리가 願하는 것은 共産主義侵略을 막을 수 있는 物質的인 援助뿐이다." [41] 3月 趙炳玉은 뉴욕타임스에 訪問하여 '萬若 美國의 對한 軍事援助가 없다면 韓國은 共産化 된다.'는 要旨의 演說을 하였다.

48年 8月 10日 內務部 長官 윤치영 은 警察機構 再編에 對한 談話를 發表하였다. [42]

完全한 組織이 될 때까지는 當分間 現在의 機構와 人員을 그대로 쓰겠으나 앞으로는 地方管區警察廳第는 없애고 서울 안에는 警視總監部(假稱)같은 것을 두어 仁川 開城 서울을 包含한 京畿道 一圓의 强力 治安確保에 對備하고자 한다. 그밖에 方今 訓鍊中에 있는 特務機關 精銳들의 活動에 依하여 犯罪의 科學的인 搜査의 未然防止에 이바지하려고 하고 있다. [42]

以後 內務長官 윤치영 은 警察權을 掌握하려고 했으나 윤치영의 바람과는 달리 警察 中央集中化는 實現되지 못하였고, 中央警察廳 傘下 地方警察廳 體制로 定着되었다.

윤치영 이 警察을 掌握하려 하자 이미 警察權을 掌握한 장택상 , 趙炳玉 等은 反撥했고, 隨時로 葛藤, 摩擦하는 原因이 된다. 윤치영 日帝强占期 當時 警察官으로 있던 者들을 登用했다며 警察廳을 攻擊하자, 趙炳玉은 Pro-job과 Pro-jap은 區別해야 된다는 論理로 맞섰다. 內閣 彫刻 때부터 윤치영과 軋轢을 빚던 장택상 은 趙炳玉의 손을 들어주었고, 內務部의 警察權 掌握은 失敗로 돌아간다. 1948年 10月 9日 旅順 事件 이 發生하자 그는 이범석 의 强勁 鎭壓論에 同調하였다.

野黨化 [ 編輯 ]

以後 그는 李承晩 內閣의 半 한민당 政策에 反撥하기 始作한다. 1949年 김규식 , 신익희 , 安在烘 , 윤치영 , 趙素昻 等을 中心으로 民族陣營强化推進委員會가 推進되자 그는 雜동사니가 모인 利害團體라며 否定的인 視角을 드러낸다.

1950年 5月 初 故鄕 天安을 後輩에게 讓步하고 서울 성북구에서 出馬하게 된다.

1950年 5月 30日 에 치러진 國會議員 選擧에서 城北區 地域에 出馬하여 南北協商 파 政治人 趙素昻 과 맞붙었다. 이 選擧는 趙炳玉이 警察 들을 動員하여 趙素昻 側 選擧運動員 83名을 警察署에 拘禁하는등 警察을 動員한 壓力과 테러 行爲들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選擧 前날인 5月 29日 에는 "趙素昻이 共産黨의 政治資金을 받아쓴 것이 綻露나 投票日을 하루 앞두고 越北했다."라는등 根據도 없는 事實無根의 壁報와 傳單을 성북구 一帶에 뿌렸으나 選擧 結果 趙素昻 에게 相當히 크게 敗하고 落選했다. [43]

韓國 戰爭 戰後 [ 編輯 ]

1952年 김두한 과 함께

1950年 第2代 大統領 當時 그는 민주국민당 의 事務總長으로 大統領 選擧 關聯 業務를 擔當하고 있었다. 그러다 拔萃改憲에 따른 鄭·副統領 直接選擧 實施 公告가 나오자 黨首였던 신익희와는 아무 相議 없이 스스로를 副統領 候補로 登錄하였다. [44] 한便으로 한민당 부터 줄곧 함께 해온 一派는 그를 積極 支持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같은 舊派인 신익희 와의 關係는 틀어지게 된다. 5月의 選擧에 副統領 候補者로 立候補했으나 落馬했고, 6月 25日 韓國 戰爭 이 發生하자 그는 家族들을 避身시킨 뒤 바로 大戰 으로 내려갔다. 以後 避難가는 政府를 따라 大邱와 釜山으로 함께 移動하였다.

1950年 7月 內務部 長官 에 任命된다. 內務長官 在職 時 大邱 撤收 方針을 示達한 워커 美8軍司令官을 說得해 大邱 撤收를 保留시켜 洛東江 戰線을 防禦하도록 計劃을 修訂하게 한다. 그러나 趙炳玉은 1951年 5月 居昌良民虐殺事件에 責任을 지고 신성모 國防長官, 김준연 法務長官과 함께 內務長官職에서 물러난다. 이는 居昌 事件과 國民防衛軍 事件에 責任을 지지 않으려는 신성모 를 糾彈하는 過程에서 李承晩 의 노여움을 사서 辭表쓰라는 提議를 받게 된다. 趙炳玉은 물러나면서 居昌 事件과 國民防衛軍 餓死의 責任者로 신성모 를 指目하고 辭職書를 提出했고 李承晩은 改閣을 斷行한다.

1951年 6月 부터 1952年 9月 까지 제16대 大韓體育會 會長과 第5代 大韓올림픽委員會 委員長을 歷任했다. [16] 1953年 內務部 長官 이 되었다. 1954年 5月 大邱 에서 第3代 民議院議員 選擧에 立候補, 出馬하여 當選되었다. 當時 內務部長官으로 在職하면서 大邱 防衛戰線에 陣頭指揮를 擔當해 이 地域을 死守하는 데 크게 寄與했다. 以後 李承晩 과의 意見 衝突로 長官職을 辭任하게 되었다. [45]

뉴델리 密使 事件 前後 [ 編輯 ]

1953年 10月 민주국민당 代表 신익희 英國 女王 엘리자베스 2歲 의 戴冠式에 參席하고 印度 뉴델리 를 巡訪하던 中, 北朝鮮 趙素昻 을 만나 零細中立化 陰謀를 꾀했다는 疑惑이 提起되었다. 신익희 1953年 5月 金東聖 과 함께 大韓民國 代表로 英國 女王 엘리자베스 2歲 의 戴冠式에 參席하고 돌아왔다. 그가 歸國했을 때 印度 에서 趙素昻 과 만났다는 疑惑이 提起되었다. 이는 민주국민당 所屬 함상훈 의 聲明書에 依해 公開되었다. [46] 함상훈 민주국민당 의 宣傳部長이었다.(조소앙은 當時 越北해있던 狀態였다.)

이와 같은 爆彈的인 聲明은 민주국민당 에 依해서 積極的으로 否定되고 [46] , 內務長官 백한성 함상훈 을 불러 疑惑을 告한 사람을 追窮하였으나 함상훈 은 疑惑을 提報한 사람을 具體的으로 明示하지 못했다. 그러나 趙炳玉은 함상훈 의 意見에 同調하며 신익희 를 疑心하였다. 大韓民國 國會 眞相調査團의 調査 結果 신익희 趙素昻 이 만났다는 具體的인 證據資料가 提示되지 못하자 結局 함상훈 은 黨에서 除名措置되었다. 조병옥과 김준연 等은 함상훈 을 斗頓했으나 黜黨을 막지는 못했다.

그러나 趙炳玉은 繼續 신익희 를 疑心하였다. 이듬해인 1954年 3月 16日 趙炳玉은 신익희 최두선 을 除外한 민주국민당 의 幹部들을 召集했다. 그리고 그는 신익희 가 만났다고 確信하였다. 當初 英國 을 訪問하고 3月 16日에 돌아온 최두선 亦是 招請하였으나 최두선은 疲勞를 理由로 拒絶했다.

1954年 3月 16日 當時 東亞日報社 社長 최두선 英國 視察을 마치고 돌아왔다. [47] 趙炳玉은 이날 저녁 민국당 幹部들을 召集했다. 그날 저녁 趙炳玉의 집에서 민주국민당 幹部級 사람들이 많이 모였다. [47] 6.25 戰爭 中 釜山에 있을 때에도 이 무렵 趙炳玉의 집에 모여 會食 [47] 을 儀禮的으로 하였다.54년 3月 16日에도 會食을 하였다. [48] 김준연 최두선 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으나 疲勞하다고 死絶하였다. [48] 趙炳玉은 서랍에서 한 張의 圖表를 꺼내서 說明하며 말하기를 [48] 신익희 가 틀림없이 만났다고 하였다.

내 判斷에 依하면 신익희 氏가 印度 뉴델리 에서 趙素昻 을 만난 것이 틀림 없다고 생각된다. [48]

趙炳玉은 신익희 를 疑心했고, 김준연 은 그에게 '잘 알아봐야겠다'며 應酬했다. 그 자리에는 신각휴 (申珏休), 송필만 (宋必滿) 等도 있었다. [48] 민주국민당 內에서는 함상훈 이 누군가의 使嗾를 받은 것이라고 判斷했지만 조병옥 亦是 신익희 뉴델리 에서 趙素昻 을 만났다고 確信하자 아무도 이 問題에 異議를 提起하지 않았다.

護憲同志會와 民主黨 [ 編輯 ]

1954年 李承晩 政權과 訣別하고, 汎野 新黨 創黨 準備組織人 護憲同志會 創設에 參與하였다. 이때 그는 곽상훈 , 김도연 , 김준연 , 場面 , 박순천 等과 함께 조봉암 의 新黨 參與에 反對하였다. 조봉암 의 新黨參與를 剛하게 反對하였고, 장택상 , 서상일 , 박기출 , 金性洙 等의 贊成에도 不拘하고 조봉암 의 參與는 霧散되었다.

在野 政治人 [ 編輯 ]

1956年 7月 27日 7.27 示威에서 앞줄이 김두한 뒤側 왼便 半쯤 가려진 人物이 조병옥

1955年부터 그는 곽상훈 , 場面 , 정일형 等과 大聲빌딩에서 민주당 創黨 準備 會議를 하였다. 1955年에는 民主黨 을 組織하여 最高委員이 되고 1955年 民主黨 最高委員에 選出되었다. [49] 1956年 3月 大選 直前 신익희 의 急逝로 黨 代表最高委員職을 맡았다. [16] 7月 27日 自由黨 의 選擧 妨害와 金權 政治에 抗議하는 集會에 參席했다.

1956年 8月 自由黨 의 選擧妨害에 抗議하여 윤보선 , 김도연 , 현석호 , 양일동 等과 서울 태평로에서 連坐示威를 벌였다. 1958年 第4代 民議院議員 選擧에 서울 成東乙에 出馬하여 當選되었다. [16] 當時 민주당은 舊派와 新派로 나뉘어 있었다. 趙炳玉은 신익희 · 유진산 · 김도연 · 윤보선 · 金永三 等과 함께 민주당 舊派로 活動했고 舊派의 리더로 活動하였다. [50]

1956年 民主黨 鄭副統領 候補者 競選에서 大統領 候補로 舊派 신익희 (申翼熙), 副統領 候補로 新派 場面 (張勉)李 落點되었다. 5.15 第3代 正副統領選擧에서 新派인 場面 民主黨 舊派(舊 한민당 系列)에서 支持하는 김도연 을 누르고 副統領 候補者로 指名되었다. 民主黨 舊派의 反撥이 있었으나 舊派인 趙炳玉이 같은 舊派라고 김도연 을 支持하지 않고 中立的인 態度를 보였기 때문에, 그는 無難히 副統領 候補로 落點될 수 있었다.

56年 10月 13日 배재學院 運動場에서 열린 第1次 여야 民議院議員 親善 野球大會를 參觀하였다. [51]

1957年 장택상 의 招待를 받고, 장택상 京畿道 始興 別莊에서 이기붕 과 與野 領袖會談을 하였다.

萬年 [ 編輯 ]

1960年 1月 出國 直前 인터뷰

1958年 10月 열린 민주당 慶南道黨大會에서는 怪漢이 闌入하는 等 新·舊派間 葛藤이 暴力으로 對應하면서 流血劇을 빚게 되었다. 이 事件은 黨 中央黨까지 飛火되어 新派側 最高委員인 곽상훈, 박순천은 道義的 責任을 지고 辭退하였고 조병옥度 大統領 候補 競爭抛棄를 宣言한 뒤 자취를 감추었다. [52]

1959年 2月 日本 의 在日僑胞 北送反對 全國民 蹶起大會에 參席하였다.

1959年 11月 26日 민주당 鄭·副統領 選擧 指名大會 票決結果 總投票者 966名 中 조병옥 484票, 場面 481票, 棄權 1票로 趙炳玉이 3票差로 勝利하여 大統領 候補가 되었다. [52] 이날 大會는 또 場面을 副統領 候補로 選出했다. [52] 1959年 말 趙炳玉은 民主黨 大選候補로 選出되어 候補登錄을 마쳤다. 그러나 趙炳玉은 갑자기 疾病이 생기게 되었다. [50] 1960年 第4代 大統領 選擧에 出馬하였으나 新兵으로 掉尾하여 美國 월터리드 陸軍醫療센터에 入院한 지 23日 만에 選擧를 不過 며칠 남겨두지 않고 身柄으로 世上을 떠났다. 그러나 이 選擧에서 李承晩 이 이끄는 自由黨 選擧 當日인 3月 15日에 不正選擧 를 저질러 4.19 革命 을 불러일으켰다.

野黨指導者 時節 與黨과의 協商에서 "빈대를 잡기 위해 草家三間(草家三間)을 태울 수 없다"는 基本的인 姿勢를 堅持, 野黨內에서 一部 反撥을 사기도 했으나, 協商과 妥協이 民主主義의 基本 原則이라는 態度를 조금도 누그러뜨리지 않았다 [45] 고 한다.

事後 [ 編輯 ]

趙炳玉 博士의 國民葬 (1960年 2月 25日)

屍身은 飛行機 篇으로 大韓民國 에 운구되었고, 1960年 2月 25日 葬禮式은 國民葬 (國民葬)으로 擧行되었으며 運柩行列은 市街行進과 서울運動場을 들러서 서울特別市 城北區 水踰洞 (뒤에 道峰區 를 거쳐 江北區 에 編入)에 安葬되었다.

1962年 3月 1日 建國功勞勳章 團長(뒤에 독립장으로 改正)李 追敍되었다. 後에 生家가 復元되었고, 記念碑를 세웠다.

2008年 8月 學術誌 ‘韓國史 市民講座’ 下半期號(43號)에서 大韓民國 建國 60周年 特輯 ‘大韓民國을 세운 사람들’ 을 選拔, 建國의 基礎를 다진 32名을 選定할 때 政治 部門의 한사람으로 選定되었다. [53]

詳細한 年譜 [ 編輯 ]

  • 1946年 12月 2日 助味共同委員會에서 自身을 誹謗한 최능진에게 國立警察의 協和와 命令系統의 確保에 有害하기 때문이라는 理由를 들어 辭職을 要求함.
  • 1947年 7月 7日 右翼에 依한 테러 事件이 民族的 愛國團體의 共同防衛적 立場에서 出發한 行動이라는 談話 發表.
  • 1948年 4月 , 5·10選擧 를 앞두고 宣傳과 動員을 위해 警察補助대인 鄕土保衛團(略稱: 香보단)을 百萬名 規模로 組織하였다.
  • 1948年 5月 5日 , 軍政長官 윌리엄 F. 딘 의 主導로, 民政長官 安在烘 , 警務部長 조병옥, 警備隊司令官 准將 송호성 等이 濟州를 訪問해 濟州 4.3抗爭 에 對한 祕密會議를 가졌다.
  • 1948年 9月 1日 大統領 特使 團長으로 17個 自由友邦國에 派遣되어 大韓民國 政府 承認을 要請하였다.
  • 1953年 李承晩 이 反共 捕虜를 一方的으로 釋放瑕疵 趙炳玉은 李承晩이 유엔 政策에 反하는 지나친 行動을 했으며 外交上의 큰 損失을 가져올 것이라고 評價했다. 이 發言이 널리 알려지면서 趙炳玉을 糾彈하는 壁報가 나붙었다. 趙炳玉은 及其也 深夜에 테러까지 當했다. 그는 쇠뭉치로 머리를 맞아 失神했다. 趙炳玉은 應急 治療를 받은 뒤 水原 으로 避身했으나 6月 25日 에 連行되어 西大門 陸軍刑務所에 收監되었다. 約 한 달만인 7月 20日 풀려나긴 했지만 治療를 제대로 받지 못함으로써 記憶力을 거의 喪失해 한때 廢人이 될 危機마저 겪었다. [54]

吸煙館 [ 編輯 ]

趙炳玉은 27歲에 담배를 처음 피워 死亡 直前까지 吸煙하였다. 그러나 그는 感氣 呼吸器 疾患 에는 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愛煙家이기도 했다. 趙炳玉은 '담배를 피기 始作한 以後부터, 나는 무슨 罪惡感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것이 내가 基督敎 信者라는 潛在意識에서 빚어지는 心理的 作用일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으나, 한 番 피우기 始作한 담배를 끊는 것은 퍽 힘든 일이라 생각하였다. [55]

고요한 달밤에 밤늦게까지 工夫하다가, 한 대 피우는 담배 맛이란 正말로 眞味日 뿐만 아니라 재떨이에 놓은 담배煙氣가 한 圓을 그리며 天障으로 올라가는 것을 멀끔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깊은 山中의 절間에서 佛供 을 드리다가 스님 (僧)李 무슨 無我之境 에 到達한 感을 주는 것 같이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나의 담배 哲學일는지는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담배 禮讚者는 決코 아니다. 卽 담배는 사람에게 해는 될지언정 利로운 것이 못되는 까닭이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55] 그러나 나는 寂寂할 때, 심심할 때, 무슨 생각이 머리에 잘 떠오르지 않을 때, 으레 習慣化되어 담배 를 피우게 되는 것이다. [55]

그는 담배의 妙味와 함께 基督敎人인데 敎理를 어기지는 않나 하는 생각 사이에서 갈등하였다. 그는 27歲에 담배를 피우기 始作하여 [56] 趙炳玉은 달밝은 밤에 발코니 나 베란다에 나와서 달을 바라보며 담배 를 피우는 것을 平生의 樂으로 삼았다. 그는 平生 愛煙家가 되었다.

評價 [ 編輯 ]

肯定的 評價 [ 編輯 ]

解放 以後 政府樹立에 對한 功勞와 內紛 收拾, 民主主義 確立에 寄與했다는 評價가 있다. 그는 自身이 생각하고 믿는 바를 거리낌없이 말하고 行動하는 性格이었다. 또한 남에게 굽히거나 阿諂하는 性格이 아니었다. 老鍊한 協商家로 能力을 發揮하였다는 點이 높이 評價되기도 한다.

否定的 評價 [ 編輯 ]

美軍政 當時 親日派 警察을 採用한 點에서 최능진 으로부터 批判을 받아왔고, 濟州 4·3 事件 當時 警察部分 指揮와 過剩鎭壓에 關聯된 것도 批判받고 있다.

左派 및 中道派 勢力으로부터 "美軍政의 앞잡이"라는 非難을 받았고, 민주당 新派와 自由黨 으로부터는 "酒色風流客이 大統領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攻擊을 받았다. 公公然히 酒色에 빠졌다는 批判을 露骨的으로 들으면서도 그는 泰然히 웃었다 한다.

解放 장택상 과 더불어 親日 警察들을 再登用한데에 크게 寄與하였다.

기타 [ 編輯 ]

戰時體制機 活動 論難 [ 編輯 ]

親日 疑惑 [ 編輯 ]

2003年 12月 金希宣 이 그를 親日派, 앞잡이 等 原色的으로 非難했다가 波紋이 일기도 했다. [57] [58] [59] 조병옥記念事業會에서는 謝過를 要求하였으며. [60] 親日派 설의 反駁 資料로 1929年 光州學生運動의 背後操縱嫌疑로 獄中收監된 寫眞을 公開했다. [60] [61] [62] 事態는 金希宣 國會議員 의 謝過로 終結되었다. [62]

文學評論家 임중빈氏는 〈한겨레〉 2001年 3月26日치에 ‘조병옥과 親日, 조순형과 조선일보 關係의 源流’라는 글에서, 그 一週日 前에 실린 신경림 詩人의 칼럼 中 “個人的으로 親日行脚이 別로 보이지 않는 趙炳玉을 汎親日派로 分類하는 것은 甚하지 않은가 하는 反撥도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대목에 對해 反駁하였다. [62] 임중빈은 寄稿에서 “1941年 8月25日 三千里社 主催 臨戰對策協議會에서 죽음으로써 日本에 報答한다는 各界 名士 120名의 決意 아래 親日 巨頭들과 자리를 함께한 趙炳玉은 자못 悲壯한 語調의 所信發言으로 府民館 中講堂을 制壓했다”고 主張했다. 다음은 趙炳玉이 했다는 發言의 一部다. “우리는 오늘 帝國의 臣民으로서 이 마당에 모였습니다. … 朝鮮民衆은 아무 要求도 없이 無條件으로 協同하여 傳承해서 東亞共榮圈 建設에 邁進함으로써 爲政者에게 安心을 줄 것입니다.” [62] 라 하였다.

反面, 趙炳玉이 自身의 親日(비호) 疑惑에 對해 生前에 直接 解明한 記錄도 남아 있다. 그는 自身의 著書 〈나의 回顧錄〉(民敎師, 1959)이라는 冊에서 1946年 3月6日 〈大邱市步〉와의 인터뷰 內容을 述懷했다. [62]

反論 [ 編輯 ]

愼重論으로는 2000年 8月 〈죽은 者들을 위한 辯護-21世紀의 親日問題〉라는 冊을 펴낸 小說家 복거일 의 主張으로 “이番 論難은 ‘親日派 斷罪’의 單純論理의 危險性을 드러낸 것”이라고 主張했다. 그는 “유석의 民族主義 運動에 對해서는 常識 水準에서 알고 있으며, 故鄕(忠南 牙山) 어르신들로부터 維石이 天安·牙山 地域에 꾸린 民族運動 組織의 活動에 對한 말을 들은 적이 있으나 親日 疑惑에 對해서는 잘 모른다”고 밝혔다. [62] 그는 " 親日派 問題를 自己 主張에 利用하는 사람들이 많고 客觀的으로 다루기도 쉽지 않다. 例컨대, 反民特委 裁判에서 無罪로 나온 사람들에 對해서도 繼續 親日派 名單에 올려놓고 물고 늘어지는 것은 옳지 않다”며 “이제는 歷史學의 領域에 맡기고 그 硏究 結果와 評價를 尊重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62] 2001年 3月 民族問題硏究所 의 한 關係者는 "親日 與否를 評價하는 嚴格한 基準이 만들어진 以後 公聽會 等을 거쳐 '친일인명사전'을 發刊할 計劃"이라 하였고 "趙炳玉 博士의 境遇도 몇가지 親일행的이 있지만 只今 段階에서 ‘親日派’ 與否에 對한 斷定的 評價를 내리기는 이르다"며 조심스런 反應을 보였다. [62]

親日派 論難은 끊이지 않고 있다. 2005年 9月 30日 東國大學校 敎授 강정구 서울大學校 에서 열린 ‘民主化를 위한 全國敎授協議會’ 主催 討論會에서 "韓·美同盟이 없었다면 親日派 後裔들이 政治史에 발붙일 수 없었다"고 하였다. [63] 그리고 親日派 後裔의 代表的 事例로 조 前 代表와 박관용(朴寬用) 前 國會議長, 한나라당 박근혜(朴槿惠) 代表, 열린우리당 신기남(辛基南) 議員 等을 言及했다. [63]

趙炳玉 等이 親日派로 言及되자, 2005年 10月 16日 趙炳玉의 아들 조순형 은 社會學者 강정구 를 相對로 父親인 維石 趙炳玉(維石 趙炳玉) 博士를 親日派로 擧論한 동국대 강정구 敎授를 死者(死者) 名譽毁損 等의 嫌疑로 서울中央地檢에 告訴하겠다고 言論에 發表 [63] , '趙炳玉 先生 記念事業會'와 함께 17日 提出할 告訴狀에서 "高 趙炳玉 博士는 日帝强占期에 光州學生 抗日運動과 興士團 事件 等으로 5年餘의 獄苦를 치러 建國訓長 독립장을 받았다"며 "姜 敎授의 虛僞 發言으로 그의 名譽를 毁損했다"고 言論에 發表했다. [63] 民族問題硏究所 側 立場에 따르면, '親日派로 分類되는 基準은 自發性과 積極性을 評價했고, 反復·持續性 與否도 參照한다'는 原則을 固守하고 있다. [64] 趙炳玉이 戰時體制機 活動 疑惑을 받는 指摘은 臨戰對策協議會 에서 1次例 參與해 講演했다는 것 程度인데, 그런 1~2件 程度로 指摘하기는 지나친 指摘이다. 따라서, 이러한 疑惑과 論難은 客觀的 事實 與否따지기보다 政治的인 側面에서 提起되는 性格이 剛하다.

4·3 事件 鎭壓會議 關聯 主犯 [ 編輯 ]

5月 5日 美軍政廳 軍政長官 兼 駐韓美軍 副司令官 윌리엄 F. 딘 , 民政長官 安在烘, 警備隊 總司令官 송호성 准將, 警務部長 조병옥, 濟州道 軍政長官 맨스필드 大領 等이 飛行機 篇으로 濟州道 에 着陸했다. 5日 午前 12時부터 4·3 事件의 解決을 놓고 濟州中學校 美軍政廳 會議室에서 열렸다. 參席者는 美軍政長官 딘 將軍, 民政長官 安在烘 , 警備隊 總司令官 송호성 准將, 警務部長 조병옥, 濟州道 軍政長官 맨스필드 大領, 濟州道知事 유해진, 警備隊 第9聯隊長 김익렬 中領, 濟州道 警察監察廳長 최천(崔天), 딘 將軍 專用通譯官 金氏(牧師出身) 等 9名이었다. [65] [66]

會議의 主題는 4·3의 鎭壓에 對한 것이었고, 最高首腦會議에서 合意點을 찾지 못하면서 김익렬 과 趙炳玉의 亂鬪劇이 發生한다. 會議에서 첫 番째로 發言하게 된 최천 警察監察廳長은 4·3暴動은 國際共産主義者에 依한 事前에 組織 訓鍊?計劃된 暴動이며 軍?經 大甁(大兵)을 投入하여 合同作戰으로 徹底하게 討伐할 것을 主張하고, 이어 發言한 김익렬 聯隊長은 武力 威壓과 說得, 宣撫歸順 工作을 竝用하는 作戰을 建議하였다. 그러면서 김익렬은 直接的인 導火線은 密貿易子 或은 남로당 共産主義者와 警察 間의 摩擦이나 仔細한 經緯를 알기 어렵다고 發言한다. 暴動者 數가 增加된 것은 빨치산이 右翼 人士들을 虐殺했지만 警察이 제대로 對應하지 못하고 樵童의 對策과 作戰에 失敗한데서 起因된 것이며, 이 作戰의 妨害要素는 警察의 紀綱紊亂이므로 前 濟州道警察을 自己의 指揮 下에 달라는 要求를 한다.

김익렬 이 證據로 提出한 寫眞帖을 들여다보던 윌리엄 F. 딘 長官은 興奮하여 寫眞 資料들을 조병옥 警務部長에게 던져주며 조병옥에게 火를 낸다. 그런데 火가 난 趙炳玉이 김익렬 을 共産主義者로 몰면서 會議場은 亂場판이 된다. 趙炳玉은 聯隊長의 說明과 寫眞帖 等 證據物이 全部 虛僞造作된 것이며, 맨스필드 大領과 드루스 大尉에게 提出한 資料는 警察에 對한 中傷謀略이라고 極口 否認했다. 그러다가 김익렬 을 손가락으로 指目하며 “저기 共産主義 靑年이 한 사람 앉아 있소. 나는 오늘 처음으로 國際共産主義가 무서운 組織力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소. 헝가리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等地에서 그랬듯이 처음에는 民族主義를 앞세워 各地에서 暴動으로 政府를 顚覆하고 나중에는 本色을 드러내는 것이 國際共産主義者들의 常套手段이요”라고 指摘했다. [65] [66]

火가 난 김익렬 은 “닥쳐라!”하고 高喊을 질렀다. 딘 將軍은 김익렬을 制止하며 演說 妨害를 하지 말라고 命令하였다. 그러나 趙炳玉은 繼續해서 김익렬 을 가리키며 “民族主義의 假面을 쓴 靑年들이 먼 外國에서만 있는 줄 알았더니 現在 우리나라에도 있소. 바로 저 聯隊長이 그런 靑年이요. 우리 警察의 調査에 依하면 저 靑年의 아버지는 國際共産主義者이며 蘇聯에서 敎育을 받고 現在 以北에서 共産黨 幹部로 熱烈히 活躍하고 있소. 저 者는 自己 父親의 敎化를 받고 共産主義者가 되었으며 自己 父親의 指令에 依하여 行動하고 있는 것이요”라며 共産主義者일지도 모른다며 疑惑을 提起했다.

딘 將軍은 趙炳玉이 김익렬의 父親이 共産主義者라고 그럴싸하게 說明하자 깜짝 놀라며 疑心에 찬 눈초리로 김익렬을 쳐다봤고, 맨스필드 大領도 疑心하기 始作했다. 激忿한 김익렬 은 理性을 잃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壇上에 뛰어올라 演說하는 조병옥에게 달려들었다.

김익렬은 當時 27歲로 元來 日本豫備陸軍士官學校出身의 日本軍 少尉로 任官했다가 解放 後 國軍少尉로 任官해 2年만에 中領이 된 젊은이였다. 이 날 趙炳玉은 濟州 武裝隊 大將인 김달삼이 김익렬과 日本 福祉山 陸軍豫備士官學校 同期生인것과 김익렬의 아버지가 北韓에서 活動中인 黨 幹部임을 暴露하였는데 暴露 當時 趙炳玉이 50歲가 넘었는데도 쉽게 넘어지지 않아 壇上에서 格鬪가 벌어졌다.

誘導 3段이던 김익렬 中領은 興奮한 나머지 주먹으로 趙炳玉을 끌어내 실랑이를 벌였고, 趙炳玉의 腹部를 친 後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趙炳玉은 김익렬 의 表現에 依하면 '意外에도 힘이 장사였다. 내가 손에 잡히는 대로 조 博士의 넥타이를 당기니까 그는 목을 졸리게 되었다.'고 한다. 넥타이로 목이 졸린 趙炳玉은 숨을 못 쉬고 悲鳴을 지른다. 최천 濟州警察廳腸이 말리러 올라왔으나 김익렬 의 발길질에 急所를 次여서 그도 悲鳴을 지르며 쓰러졌다. 딘 將軍이 송호성 將軍에게 싸움을 말리라고 高喊을 질렀고, 맨스필드 大領과 安在烘 이 달라붙어 김익렬 과 趙炳玉을 떼놓으려 하였으나, 김익렬 亦是 高喊을 지르며 조병옥에게 辱說을 퍼부었다. “當身이 日帝時代에 獨立運動을 하였다기에 愛國者인 줄 알았더니 自己의 罪狀이 드러나니까 無辜한 나를 何必이면 共産主義者로 모느냐. 取消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하며 必死的으로 덤벼들었다. [65] [66]

송호성 將軍은 일어서지도 않고 앉은 채로 “이 놈 聯隊長! 누구에게 暴行을 하느냐. 네 놈이 죽으려고 換腸했느냐. 손을 놓고 말로 하라”하며 高喊을 친다. 그러나 말릴 뜻은 없는 듯 입으로만 號令號令했다. 돌아가는 內容의 大綱을 눈치챈 安在烘 民政長官은 손을 놓고 “聯隊長! 손을 놓으시오. 暴行을 멈추시오. 外國사람들이 우리를 野蠻人이라고 흉을 보니 어서 손을 놓고 말로 하시오”라며 制止했다. 유해진 知事가 壇上에 달라붙어 다시 김익렬 의 손을 떼어 놓으려고 하였으나 老齡이라 力不足이었다.

김익렬과 趙炳玉의 몸싸움은 激化되었고, 5月 5日 의 會議는 瞬息間에 會議場은 亂場판이 되고 말았다. 火가 난 딘 將軍은 通譯官 金某 氏를 불러 安在烘 民政長官과 송호성 將軍이 只今 무어라 말하고 있느냐며 불러 물었다. 그런데 通譯官이 딘 將軍에게 安在鴻 氏와 송 將軍이 聯隊長에게 “너는 共産主義者이며 나쁜 놈”이라고 辱을 하고 있다고 通譯하였다. 理性을 喪失한 김익렬 은 趙炳玉의 넥타이를 붙잡고 通譯官에게 달려가 발길질로 陰囊을 걷어 찼다. 놀란 딘 長官과 安在烘 , 송호성 은 會議室을 빠져나갔고, 通譯官은 悲鳴을 지르며 쓰러졌다. 딘 將軍은 待機 警護 中이던 美軍憲兵을 불러들여 場內 秩序를 整理하라고 命令했다. 數 名의 MP가 달려들더니 그 中 2名의 MP가 兩쪽에서 김익렬 의 팔을 붙잡아 비틀고, 조병옥에게서 떼어놓고는 强制로 椅子에 앉혀놓고는 두 팔을 結縛하여 꼼짝 못하게 했다. 騷亂은 끝이 났고, 鎭壓 會議는 結末을 보지 못한 채 終結되었다. [65] [66]

일화 [ 編輯 ]

1950年 美國 國務省 에서 李承晩 을 除去하려 하자 李承晩 은 自身이 大統領職을 내놓을 境遇, 自身 代身 大統領이 될 人物로 場面 과 趙炳玉을 꼽았다. [67] 그러나 李承晩 은 이 두 사람의 道德性과 能力, 그리고 愛國心, 特히 美國 에 對한 獨立的인 姿勢를 가질 수 있는지 疑心하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위태로운 狀態에 놓여 있는 나라를 맡기느니 차라리 辱을 더 먹더라도 自己가 좀 더 오래 執權하면서 나라를 保衛하고 그 基盤을 다지는 것이 大韓民國 을 위해 낫다고 判斷했다 한다. [67]

李承晩 이 主宰한 國務會議에서 담배를 피운 唯一한 長官은 조병옥뿐이었다. 李承晩 은 國務會議 主宰 時 國務委員들의 吸煙을 禁止하였고 會議 中 담배를 피우는 조병옥에게도 吸煙하지 말라고 여러番 警告를 주었다. 그러나 趙炳玉은 泰然히 會議場에서 담배를 피웠다.

한便 민주국민당 民主黨 全黨大會에서 윤보선 은 徹底하게 野心을 감추었지만 趙炳玉은 윤보선이 크게 드러날 것이라면서 그의 속에 뭔가 있다고 하였다. 윤보선 은 大統領이 되자마자 權力慾을 드러냈다.

李承晩 歸國 直後의 이벤트 [ 編輯 ]

1945年 10月 16日 李承晩의 歡迎會를 할 때 趙炳玉은 李承晩 을 맨 앞의 座席에 앉게 하도록 建議하였다. 10月 16日 李承晩은 事實上 平民의 資格으로 歡迎會에 參席하기로 되었는데 어떻게 앞자리에 앉게 할 수 있겠느냐 하고 하지 將軍이 抗議를 하자 趙炳玉은 對答하기를 " 李承晩 博士는 비록 平民의 資格으로 歡迎會에 參席하게 될 것이지만 그는 獨立運動의 院訓이므로 當然히 앞자리에 앉아 여러분을 歡迎해야 한다."고 이틀 동안이나 主張하여 貫徹시켰다. [68]

하지 將軍은 結局 趙炳玉의 말에 首肯하고 自己 스스로가 李承晩 博士를 紹介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하지 將軍이 踏査를 마치고 下端하자 李承晩 博士는 滿面에 웃음을 띄우고 하지 將軍과 정답게 握手하는 光景을 볼 수 있었다. [68] 이어 趙炳玉은 直接 李承晩 歡迎辭를 朗讀했다.

이제 우리 韓民族의 解放을 위하여 太平洋 戰爭에서 英雄的으로 勇戰奮鬪한 力戰勇士 美軍을 歡迎하는 이 마당에 우리는 40年間 우리 韓民族을 搾取하고 壓迫하던 이 伯牙殿堂(白亞殿堂) 앞에 우리의 自由獨立의 象徵인 白髮이 星星한 李承晩 博士가 바로 이 자리에 나와 계십니다."하고 李承晩을 紹介하였더니 덜漁船 會長의 수만은 聽衆들에게서 우레같은 拍手소리와 함께 感激의 울음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퍼져나왔다.

拍手소리가 끝나는 것을 기다려 趙炳玉은 演說을 繼續하였다. "이 伯牙殿堂은 희고 깨끗이 丹粧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 일보던 總督府의 日本人 官吏들은 우리 韓民族을 어떻게 해야만 많이 搾取하고 日本에 隸屬되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을 計劃하고 執行한 詛呪받은 牙城입니다. 그러나 이 伯牙殿堂의 흰 것과는 달리 우리民族의 自由獨立의 象徵인 李承晩 博士의 白髮은 40餘年 間의 海外의 모진 風霜을 다 겪어가면서 검은 머리가 흰 머리가 되도록 오직 조九그이 光復만을 위하여 鬪爭한 人生의 산 歷史를 말하는 白髮의 記錄이며 象徵일 것입니다. [69]

趙炳玉이 말을 맺었을 때 다시 우레같은 拍手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 將軍은 直接 踏査와 함께 李承晩 의 略歷을 直接 紹介하였다. 조병옥에 依하면 '하지 將軍도 이 우레같은 拍手 소리에 壓倒되어 自己가 踏査를 하지 않을 수 없어 結局 李承晩의 紹介를 하였다고 생각한다.'고 評하기도 했다. [69]

參考 文書 [ 編輯 ]

  • 康俊晩 (2004). 《 韓國現代史散策 1940年代篇 2 - 8.15 解放에서 6.25 前夜까지》. 서울: 人物과사상사. 54,106,123,147쪽쪽. ISBN   978-89-5906-045-0 .  
  • 동아일보 社說(橫說竪說) 홍찬식/維石 趙炳玉, 2003-12-17字
  • 康俊晩 , 韓國現代史散策:1960年代篇 1(人物과사상사, 2006)
  • 民族運命의 岐路(서울 警務部 警察公報室, 1948)
  • 나의 回顧錄(解凍出版社, 1986)
  • 民主主義와 나(英신문화사/1959年)
  • 조병옥, 나의 回顧錄
  • 조병옥, 民主主義와 나
  •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1(人物과사상사, 2006)
  •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40年代篇 2(人物과사상사, 2006)
  •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50年代篇 1(人物과사상사, 2006)
  •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1950年代篇 2(人物과사상사, 2006)
  • 李兄, <조병옥과 이기붕> (삼일서적, 2002)
  • 紅友出版社, 政界野花 (前2卷) (紅友出版社, 1966)
  • 브루스커밍스, 韓國戰爭의 起源(김자동 飜譯, 일월서각, 1986)
  • 브루스커밍스, 브루스커밍스의 韓國現代史(커밍스, 創批(창작과비평사), 2001)
  • 신태양사,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걸어갈 길(나의 政治白書) (신태양사, 1957)

家族 [ 編輯 ]

美國 뉴욕에서 承政院 左承旨를 지낸 光州盧氏 노병선(盧炳善)의 딸 老正面과 結婚하였으며 盧正面은 진명여고와 뉴욕의 드류 學院을 卒業했다. 5男妹가 있으며 國會 副議長을 지낸 조윤형 새千年民主黨 代表를 지낸 조순형 이 그의 아들들이다.

著書 [ 編輯 ]

  • 《民族運命의 岐路》 (서울 警務部 警察公報室, 1948)
  • 《나의 回顧錄》 (民敎師, 1959)
  • 《民主主義와 나》 (英신문화사/1959年)

趙炳玉을 演技한 俳優들 [ 編輯 ]

텔레비전 드라마 [ 編輯 ]

라디오 드라마 [ 編輯 ]

演劇, 映畫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50年 總選 2代 國會議員 서울 城北區 민주국민당 13,498票
26.41%
2位 落選
1952年 大選 2代 副統領 大韓民國 민주국민당 575,260票
8.1%
3位 落選
1954年 總選 3代 國會議員 慶北 大邱市 을 민주국민당 29,805票
67.32%
1位 初選
1958年 總選 4大 國會議員 서울 城東區 을 民主黨 27,428票
75.44%
1位 再選
1960年 大選 4大 大統領 大韓民國 民主黨
0%
死亡

各州 [ 編輯 ]

  1. 手術 後遺症
  2. 조병옥:知識百科
  3. 조병옥 《나의 回顧錄》(趙炳玉, 圖書出版 解凍, 1986) 39페이지
  4. 조병옥 《나의 回顧錄》(趙炳玉, 圖書出版 解凍, 1986) 39~40페이지
  5. 조병옥 《나의 回顧錄》(趙炳玉, 圖書出版 解凍, 1986) 40~41페이지
  6. 조병옥 《나의 回顧錄》(趙炳玉, 圖書出版 解凍, 1986) 41페이지
  7. 조병옥 《나의 回顧錄》(趙炳玉, 圖書出版 解凍, 1986) 42페이지
  8. 조병옥 《나의 回顧錄 》(趙炳玉, 圖書出版 解凍, 1986) 43페이지
  9. 조병옥 《나의 回顧錄》(趙炳玉, 圖書出版 解凍, 1986) 44페이지
  10. 조병옥 《나의 回顧錄》(趙炳玉, 圖書出版 解凍, 1986) 47페이지
  11. 조병옥 《나의 回顧錄》(趙炳玉, 圖書出版 解凍, 1986) 46페이지
  12. 조병옥 《나의 回顧錄》(趙炳玉, 圖書出版 解凍, 1986) 48페이지
  13. 조병옥, 《나의 回顧錄》 (圖書出版 解凍, 1986) 48페이지
  14. 조병옥 《나의 回顧錄》(趙炳玉, 圖書出版 解凍, 1986) 49페이지
  15. 조병옥 《나의 回顧錄》(趙炳玉, 圖書出版 解凍, 1986) 50
  16. iMBC.com, More Click Better Life!
  17. 조병옥 《나의 回顧錄》(趙炳玉, 圖書出版 解凍, 1986) 51페이지
  18. 조병옥 《나의 回顧錄》(趙炳玉, 圖書出版 解凍, 1986) 52페이지
  19. 조병옥 《나의 回顧錄》(趙炳玉, 圖書出版 解凍, 1986) 53페이지
  20. 브루스커밍스《韓國戰爭의 起源》(브루스커밍스, 김자동 驛, 일월서각, 1986) 13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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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部 링크 [ 編輯 ]

前任
(美軍 24軍 憲兵 司令官, 現役 美陸軍准將) 로렌섬
第2代 警務局長
1945年 10月 21日 ~ 1946年 1月 15日
後任
(警務部長)조병옥
前任
(警務局長)조병옥
招待 警務部長
1946年 1月 16日 ~ 1949年 1月 6日
後任
(內務部 治安局長) 二號
前任
백성욱
第5代 內務部 長官
1950年 7月 ~ 1951年 4月 24日
後任
(署理) 장택상
前任
신흥우
第16代 大韓體育會 會長
1951年 6月 17日 ~ 1952年 9月 27日
後任
이기붕
前任
(大邱市 甲) 조경규
(大邱市 을) 박성하
(大邱市 病) 이갑성
第3代 民議院議員(大邱市 을)
1954年 5月 31日 ~ 1958年 5月 30日
민주국민당 民主黨
(大邱市 甲) 서동진
(大邱市 病) 이우줄
後任
(大邱市 甲) 신도환
(大邱市 을) 이병하
(大邱市 病) 임문석
(大邱市 情) 조재천
(大邱市 무) 조일환
(大邱市 基) 최희송
前任
(성동구 甲) 임흥순
(성동구 을) 김재황
第4代 民議院議員(성동구 을)
1958年 5月 31日 ~ 1960年 2月 15日
民主黨
(성동구 甲) 유성권
後任
(성동구 甲) 유성권
(성동구 을) 홍용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