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戰爭 捕虜 交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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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濟捕虜收容所 入口

6.25 戰爭 捕虜 交換 (六二五戰爭捕虜交換)은 韓國 戰爭 停戰 協定 締結 條件에 따라 國軍 및 유엔軍 그리고 北韓軍 및 中共軍의 兩 側 捕虜를 交換한 事件을 意味한다.

槪要 [ 編輯 ]

捕虜 送還 列車, 巨濟捕虜收容所

韓國戰爭 이 漸漸 國際電話하면서 世界大戰의 徵候에 보이자 이에 休戰協定을 맺고자, UN과 共産軍側 사이에 休戰會談이 이루어졌다. 이中에 休戰 協定에서 가장 큰 爭點 가운데 하나가 捕虜交換 問題였는데, 共産軍 側은 無條件 모두 交換하자는 自動送還을 主張하였고, 유엔軍側은 砲로 各 個人의 自由 意思에 따라 決定하자는 自由送還을 主張하여, 兩側의 立場은 팽팽하게 줄달리기를 하였다.

마침내 1953年 6月 8日 , 捕虜 送還 協定을 맺어 歸國을 願하는 捕虜는 休戰 後 60日 內에 送還하기로 했다. 1953年 7月 27日 停戰 協定 이 締結되었고, 1953年 8月 5日 부터 9月 6日 사이에 于先 送還 希望者 9萬 5千餘 名이 板門店에서 送還되었다. 送還拒否 砲로 2萬 2千餘 名은 中立國 送還 委員會에 넘겨져 自由 意思에 따라 行先地를 決定하게 하였다.

그런데 李承晩 大統領은 “韓美 防衛條約 締結 前에는 休戰할 수 없고, 反共 愛國 同胞를 北韓으로 보낼 수 없다.”라고 하면서 6月 18日 0時에 永川 , 大邱 , 論山 , 馬山 , 釜山 , 巨濟島 等 7個의 捕虜 收容所에 있던 反共捕虜 2萬 5千餘 名을 한꺼번에 석방시켰다. 나아가 韓國 側의 要求가 貫徹되지 않으면 休戰 交涉 破棄를 위해 보다 强力한 措置를 取하겠다는 態度를 보였다.

이 事件은 國際的으로 적지 않은 問題를 일으켰고, 北韓 側에서는 捕虜들을 再受容하라고 要求했다. 이에 美國은 〈 韓美相互防衛條約 〉을 締結, 經濟援助, 韓國軍 增强 等을 條件으로 하여 李承晩에게 休戰同意를 얻었다. [ 出處 必要 ]

各 軍에서 砲로 最高位 階級者는 다음과 같다.

리틀 스위치 作戰 [ 編輯 ]

리틀 스위치 作戰 (Operation Big Switch)은 1953年 4月과 5月에 걸쳐 아프거나 負傷 當한 捕虜들을 交換한 作戰이다. 유엔軍 側에서는 6,670名의 北韓軍과 中共軍을 送還했으며, 共産 陣營에서는 韓國軍 471名, 美軍 149名을 包含한 684名의 유엔軍을 釋放하였다. 물라 作戰 이 同時에 施行되면서 이에 影響을 받은 共産 陣營 捕虜들은 本國으로의 歸還을 拒否하였다.

빅 스위치 作戰 [ 編輯 ]

빅 스위치 作戰 (Operation Big Switch)은 韓國 戰爭 의 모든 殘留 捕虜들을 送還한 作戰이다. 1951年 進行된 共産 陣營과 UN君 間의 休戰 會談에서는 共産 陣營이 모든 捕虜를 本國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主張하는 한便, UN은 繼續 남길 願하는 捕虜가 있을 境遇 이를 許可해야 한다고 主張하여 捕虜 送還이 主要한 難題가 되었다.

會談이 이어진지 2年 後, 中華人民共和國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 한 발 물러서면서 1953年 7月 27日에 休戰 協定이 締結되었다.

빅 스위치 作戰은 1953年 8月 始作하여 같은 해 12月까지 進行되었으며, 共産 陣營 砲로 75,823名( 北韓軍 70,183名, 中共軍 5,640名)과 유엔軍 砲로 12,773名( 韓國軍 7,862名, 美軍 3,597名, 英國軍 946名)李 本國으로 送還되었다. 共産 陣營 軍人 中 22,600名 以上이 送還을 拒否하였는데, 이들 中 大部分은 過去에 共産 陣營에 反對하여 國共 內戰 에서 싸웠던 中華民國 軍人이었다. 유엔軍 側에서도 23名의 美軍과 한 名의 英國軍, 333名의 韓國軍 兵士가 送還을 拒否하였다.

送還을 拒否한 捕虜들에게는 90日 동안 醫師를 바꿀 期間이 주어졌다. 이 期間 동안에는 中國 兵士 137名이 中國으로 돌아갔고, 美軍 2名과 韓國軍 8名이 西方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韓國軍 325名과 美軍 21名, 英國軍 1名은 自由 意思에 따라 共産 陣營에 머물게 되었다. [2] [3]

砲로 統計 [ 編輯 ]

  • 1953年 休戰協定에 依據 送還된 砲로 數値

(出處: 國防部 發刊 國軍捕虜의 實相과 對策, 單位 名)

區分 共産側 => 유엔側 유엔側 => 共産側
小計 韓國軍 유엔軍 小計 北韓軍 中共軍
負傷兵 捕虜 送還
(리틀 스위치 作戰)
684 471 213 6,670 5,640 1,030
一般 捕虜 送還
(빅 스위치 作戰)
12,773 7,862 4,911 75,823 70,183 5,640
追加 捕虜 送還 12 10 2 765 296 469
總計 13,469 8,343 5,126 83,258 76,119 7,139

1953年 6·25 戰爭 停戰 協定 會談 當時 유엔軍司令部는 捕虜가 되었을 可能性이 높은 國軍 失踪者를 8萬 2,000 餘名으로 推算했으며 北韓 亦是 戰爭 期間 大略 10萬名 의 捕虜를 잡았다고 宣傳했지만,막상 送還 時點이되자 數字를 터무니없이 줄이고 統計 圖表에 記載된 8,343 名의 國軍 捕虜만 送還하였다. [4]

未送還된 實際 國軍 捕虜 推定 數値 [5] 는 推計(推計) 方式에 따라 달라지는데 많게는 6萬9000~9萬4000名 , 적게는 2萬~4萬1000 名으로, 大略 4萬~5萬名 으로 推定한다. 6.25 戰爭 當時 유엔軍司令部 는 捕虜가 되었을 可能性이 높은 國軍 失踪者를 8萬 2000餘名 으로 推算했다.

2014年 유엔 北韓人權調査委員會(COI) 特別報告官의 〈유엔北韓人權賞歲報告書〉에서는 北韓이 抑留한 國軍 捕虜의 數를 5萬~7萬名 으로 推定하였다. 한便 休戰協定 當時 유엔軍司令官 마크 클라크 大將은“공산 側은 韓國戰爭 初期에 5萬名 의 韓國軍 捕虜를 戰線에서 釋放하여 共産軍에 强制 편입시킨 바 있었다”고 '回顧錄 다뉴브江에서 鴨綠江까지'에서 摘示하였다.

또한 共産軍 側 亦是 休戰會談에서 5萬餘名 에 達하는 國軍 捕虜들의 行方을 追窮하는 유엔軍 側에게“인도적 次元에서 現場에서 釋放했다”고 主張했다.

各州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