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次 서울 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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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1次 서울 戰鬪
6.25 戰爭 의 一部

開戰 極初期 北韓軍 의 進擊路
날짜 1950年 6月 26日-28日
場所
서울 및 隣近 地域
結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勝利와 서울 陷落
交戰國
대한민국 大韓民國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指揮官
대한민국 李承晩
대한민국 채병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金日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金策
兵力
約 65,000名 (逐次 投入 包含) 約 107,000名
被害 規模
戰死者 및 失踪者 約 44,000名 死傷者 約 1,112名

第1次 서울 戰鬪 ( 文化語 : 서울 解放, 英語 : First Battle of Seoul )는 6.25 戰爭 初期에 일어났던 戰鬪 中 하나이다. 國境에서의 戰鬪에 이어 1950年 6月 26日부터 28日까지 舊 서울市를 中心으로 하여 中部 地域 前範圍에서 일어난 大韓民國 國軍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朝鮮人民軍 사이의 交戰이다. 交戰 結果 朝鮮人民軍 이 서울을 占領하였으며 國軍은 漢江 以南 地域으로 밀려났다.

背景 [ 編輯 ]

1950年 6月 25日 새벽 3時 30分 朝鮮人民軍 T-34 를 앞에 두고 曲射砲로 掩護하는 電擊戰 의 方式으로 38線 電線을 越境하면서 韓國 戰爭 이 始作되었다. 北韓은 暴風 作戰 構想 때 서울이 陷落되면 事實上 勝敗가 결정지어 끝나게 될 것이라고 計算하고 있었다. [1] 이런 前提 下에 朝鮮人民軍은 部隊를 2個 軍團으로 나눠 1軍團을 主攻으로 서울 方面으로 全面戰을 펼치고, 2軍團을 朝貢으로 하여 1軍團의 攻擊을 掩護하기로 하였다. 大韓民國은 大規模 攻勢를 생각하지 못하고 一部 部隊가 獨自的인 判斷으로만 警戒態勢를 取하고 있었기 때문에 朝鮮人民軍은 거의 完全한 奇襲攻擊을 이뤄냈다. [2]

大韓民國軍 은 朝鮮人民軍에 비해서 兵力, 裝備, 訓鍊等 모든것이 劣勢했다. 特히 國軍이 有效한 對戰車 武器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戰車 의 優勢는 韓國軍 內에 恐怖感까지 불러들어왔으며 밀러내려갔다. 하지만 韓國軍은 士氣가 높았고 [1] 肉薄攻擊으로 人民軍 戰車를 破壞하는 境遇도 있었다. [2] 또한 前方 防禦部隊 中 相當數는 河川 障礙物과 여러 地形을 利用해 巧妙한 防禦戰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에 障礙物이 全혀 없는 議政府市 方面을 除外하고는 韓國軍의 防禦線이 完全히 崩壞되지 않았다. 하지만 議政府 方面에서 機甲部隊의 衝擊力을 利用한 人民軍의 攻勢로 의정부시는 매우 危險한 狀態에 빠져 있었다.

經過 [ 編輯 ]

1950年 6月 25-28日 사이 戰況 地圖.

문산-봉일천 方面 [ 編輯 ]

문산 附近을 守備하고 있던 大韓民國 第1步兵師團 은 25日 開城-문산 戰鬪 에서 第12聯隊가 後退해 臨津江 地域 鐵橋를 잃었으나 臨津江 隣近 陣地들을 死守하고 있어 人民軍은 臨津江을 도하하지 못하고 있었다. [3]

6月 26日 [ 編輯 ]

前날인 25日 午後부터 增援部隊가 到着하기 始作해 次例대로 戰鬪에 投入되었다. 步兵學校敎導隊는 第11聯隊에, 陸軍士官學校敎導隊는 第13聯隊에 配屬되어 州 防禦線을 强化하였고, 第15聯隊(連帶本部 및 第3大隊)는 第20聯隊 第3大隊에 配屬되어 最後防禦線人 위전리(現 坡州市 월롱면 )-봉일천 선(현 坡州市 조리읍 봉일천里)에 配置되었다. [4] 第1師團長인 白善燁 大領 은 祠堂 防禦線 中心을 1號線 接近路에 두면서 週 防禦線이 뚫리는 때에 對備해 위전리線에서 株 防禦線 部隊의 後退를 掩護하고 逆襲을 하는 方案을 두었다.

26日에는 社團 東쪽 方面의 坡州 坡平山 正面에 人民軍의 戰車部隊가 出現하였다. 連帶는 于先 2.36인치 M9 바주카 로 攻擊하였으나 效果가 없자 迫擊砲 彈과 手榴彈 을 묶은 急造爆藥으로 攻擊하는 肉薄攻擊戰을 펼쳤다. 肉薄攻擊에 戰車部隊가 後退하였으며 이어 來襲한 人民軍 步兵部隊度 近接戰으로 擊退되었다.

한便 1師團 西쪽에서 攻擊하던 人民軍 第6師團 은 26日 새벽 戰車 5臺를 先頭로 臨津江鐵橋를 건너 攻擊하기 始作했다. 國軍 第11聯隊는 抵抗하였으나 午前 9時 頃 門山役 北쪽의 高地가 人民軍에게 占領되었다. 이 高地는 競技街道를 잇는 重要한 地域으로 國軍 第11聯隊와 第13聯隊는 退路가 끊기게 되었다. 하지만 이곳을 占領한 人民軍은 進擊을 멈춘 채 後續部隊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제1사단장은 卽刻 逆襲을 命令하여 陸軍士官學校 敎導隊는 午前 10時 頃 高地帶를 奪還하였다. 이 때 確保한 人民軍 捕虜의 情報를 통해 白善燁 大領은 人民軍이 半쯤 건넌 狀態라고 判斷, 13時 頃부터 11聯隊 및 聯隊에 配屬된 步兵學校敎導隊 等 總 3個 大隊를 動員하여 反擊 作戰을 始作하였다. 反擊 作戰은 順調롭게 이뤄져 第1師團은 州 防禦線 奪還에 成功하였다. [5]

하지만 이 무렵 議政府 人民軍에게 점령당한 狀態였고 , 議政府를 지키던 第7步兵師團 이 後退하면서 제1사단의 右翼이 完全히 露出되었다. 人民軍 第1師團은 가여울(현 漣川郡 백학면 노곡리)- 適性 方面으로 進出해 電車를 앞세우고 國軍 第13連帶를 再次 攻擊하였다. 第13聯隊는 攻擊을 沮止하지 못하고 人民軍 第1師團 住公이 제320호선 道路를 따라 西쪽으로 進出하면서 문산을 威脅하였다. [6] 또한 國軍 第11聯隊 後方에도 人民軍 戰車部隊가 나타나 正面에서 攻擊이 活潑해졌다. [5] 結局 白善燁 大領은 週 防禦線 維持를 抛棄하고 26日 19時 警 最終抵抗線인 位戰 防禦線(봉일천選)으로 後退를 命令했다. 위전리 隣近에 配置된 第15聯隊의 掩護 下에 主 防禦線의 部隊는 成功的으로 後退하여 位戰 防禦線에 配置되었다. [6]

6月 27日 [ 編輯 ]

位戰 防禦線에는 第15聯隊(第20聯隊 第3大隊)가 1號線 道路의 위전리에, 제13연대는 307號線 道路에 있는 도내리(現 坡州市 월롱면 )에, 제11연대는 豫備部隊로 最後 防禦線을 編成하였다. 또한 國境 戰鬪 以後 不可避하게 흩어저서 撤收한 第12聯隊는 衿川(舊 시흥군 地域)에서 再編成하고 있었다. [7]

27日 10時 頃부터 電車를 主力으로 한 人民軍 第6師團 主力 部隊가 韓國軍 第15聯隊 正面을 攻擊하기 始作했다. 15聯隊는 57 mm 無反動砲와 2.36인치 바주카 砲로 對戰車 防禦線을 갖추고 있었으나 이 對戰車 武器는 T-34 電車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 確認되었다. 結局 제15연대 第3大隊長은 스스로 特攻隊를 이끌고 肉薄攻擊을 하여 戰車 6臺를 擊破하였다. 人民軍은 攻擊을 抛棄하고 後退하였으며, 國軍 第15聯隊는 戰車에 對한 恐怖를 解消하였다. [7]

位戰 防禦線 交戰 途中 第1師團 右翼의 第13聯隊 戰線은 小康 狀態를 維持하다가 19時 頃부터 人民軍 第1師團의 제병協同攻擊 으로 防禦線이 끊어질 危機에 處했다. 하지만 2.36인치 바주카砲로 人民軍 戰車 2臺를 擊破하는 데 成功하자 人民軍의 攻擊은 弱化되었으며 連帶는 防禦線을 奪還하였다. [7]

6月 28日 [ 編輯 ]

前날인 27日 밤, 비가 내리는 틈을 타 人民軍의 夜間 攻擊으로 第1師團의 最後防禦線이 崩壞되었으며 聯隊 兵力은 夜間에 봉일천에서 撤收하였다. 같은 時期 第1師團長 白善燁 大領은 陸軍本部 에서 派遣된 金弘一 所長이 이끄는 作戰指導班에게 미아리 方面 防禦線의 狀況 惡化에 對해 듣고 最惡의 事態에 對備하여 漢江 都下 撤收를 準備하라고 勸告하였다. 하지만 最終 命令을 바꿀 수는 없어 제1사단은 一旦 現 位置를 固守하라는 命令을 받았다.

28日 8時 頃, 第1師團은 旣存의 命令에 따라 反擊 作戰을 始作하였다. 第11聯隊는 最後 防禦線을 거의 奪還하였으나 右翼의 第13聯隊의 攻擊은 人民軍의 攻擊과 서로 부딪쳐 進展이 없었다. [5] 白善燁 大領은 서울特別連帶와 第20聯隊 第3大隊를 投入해 防禦線을 連結하였다. 이 날 人民軍의 抵抗은 强하지 않았으며, 第1師團은 州 防禦線의 奪還도 可能할 것이라고 判斷했다. [8]

하지만 같은 날 28日 1時 頃 이미 미아리 고개에 있던 國軍의 最後 防禦線이 人民軍 戰車에게 突破당했으며, 28日 午後 第1師團은 後方이 遮斷되었고 陸軍本部와의 連絡도 끊겼다. 彈藥 殘量도 不足해 白善燁 大領은 더 以上의 現 位置 固守는 不可能하다고 判斷하고 後退를 決心하였다. 이어 김포반도 戰鬪 오류동 戰鬪 로 이어진다.

議政府-미아리 方面 [ 編輯 ]

議政府市 方面을 守備하던 第7步兵師團 은 開戰 當日인 25日부터 크게 後退하였으며, 部隊는 흩어진 채 議政府는 威脅받고 있었다. 韓國軍 參謀總長 채병덕 은 議政府는 이른바 回廊 地域으로 電車의 衝擊力이 그대로 發揮되는대다 防禦에 적합한 地形이 없어 防禦部隊가 壓倒的 劣勢에 있었다. 이 時點 韓國軍이 가진 가장 큰 問題는 議政府 軸線 防禦 問題였다. [9]

6月 26日 [ 編輯 ]

抱川에서부터 송우리, 內村으로 進擊하는 人民軍 進擊도.

채병덕 參謀總長의 反擊 計劃은 第2步兵師團 이 26日 아침까지 議政府 隣近에 集結할 수 있고 第3步兵師團 第5步兵師團 도 26日 戰鬪 中 集結 可能할 것이라는 判斷 下에 세운 것이었다. [10] 하지만 後方의 게릴라전 으로 後方部隊의 移動과 集結에 큰 障礙가 있어 第2師團 中 26日 아침까지 議政府로 集結된 兵力은 겨우 司令部와 第5連帶 中 2個 對臺灣 있었다. 또한 第7師團이 26日 새벽까지 使用 可能한 兵力은 總 5個 大隊였으나 이는 增强된 1個 連帶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狀況에서 제7사단장인 유재흥 准將은 命令에 不滿을 表示했고 제2사단장인 이형근 准將은 師團이 全部 集結된 後 戰鬪力을 結集한 다음에 反擊을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하면서 防禦에 유리한 漢江 防禦線을 지켜야 한다고 力說하였다. [11] 하지만 政治的인 理由로 채병덕 參謀總長은 反擊 作戰을 決行하라고 命令하여 第2師團은 抱川 方面으로, 第7師團은 東豆川 方面으로 反擊을 始作하였다. [12] [13]

國軍 第2師團長은 現在의 戰力으로는 抱川을 奪還하기 어렵다는 點을 勘案해 前날 25日부터 第7師團 第3聯隊가 축석령 (現 抱川市 소흘읍 )에서 整備를 마친 後 축석령을 발板으로 抱川을 攻擊하기로 決心하였다. 위에서 敍述한 것과 같이 이 時點에서 제2사단이 使用할 수 있는 部隊는 第5聯隊 2個 對臺灣 있었으나 第5聯隊 聯隊長은 駐日美軍 에 派遣되었던 中이라 없었으며, 副聯隊長度 釜山으로 外出 中이라 指揮部가 全部 部材인데다가 大田에서 師團이 出發할 때 充分한 彈藥을 받지도 못했다. 이 때문에 축석령에서 普及推進을 받기로 決定하고 26日 午前 3時부터 第5聯隊가 前進을 始作하였다. 하지만 이 때 축석령을 지키고 있던 제3연대가 이미 축석령을 抛棄하고 撤收 中이었다. [14] 第5聯隊는 축석령 到達 直後 人民軍의 機甲部隊와 만나 2.36인치 바주카와 迫擊砲로 攻擊하였으나 影響이 없었고 交戰한 지 10分도 채 지나지 않아 議政府 防禦의 蟯蟲眞摯인 축석령의 防禦線은 人民軍에게 突破당했다. [15] [16]

한便 第7師團의 攻擊은 처음에는 順調롭게 進行되어 제1연대 右翼의 混成大隊는 東豆川 奪還에 成功하였다. 이 때 엇갈린 人民軍 第4師團 의 師團長 利權무 는 西쪽의 봉암리(現在의 楊州市 은현면 봉암리)-덕정리(現在의 楊州市 회천동 )의 迂廻路를 向해 攻擊하기 始作했다. 人民軍 第4師團은 하패리( 은현면 봉암리 隣近)에서 韓國軍 第1聯隊 左翼의 第3大隊와 交戰하였으나 第3大隊는 實質的으로 中臺에 못 미치는 兵力만 가진 탓에 交戰 30分 後 흝어진 채 뚫였다. 더 나아가 人民軍 第4師團은 덕정리를 包圍하였다. [17] 이때 國軍 第7師團 左翼에서 봉암리를 攻擊하던 제18연대는 축석령이 陷落되자 덕정리 西北쪽의 은현면 에서 防禦戰을 펼치라는 命令을 받았다. [18] 第18聯隊는 人民軍 機甲部隊와 한 次例 交戰하였으나 곧이어 그냥 뚫렸다. 以後 聯隊 正面에 出現한 人民軍 兵站部隊를 擊破하였으나 以後는 敵과의 接觸도 없었으며 師團 司令部와의 連絡도 끊겨 27日 새벽부터 次例대로 삼송리(現在의 高陽市 삼송동 ) 方面으로 後退하였다.

거슬러 올라가 26日 午前에는 國軍 參謀長 金弘一 所長, 豫備役 金錫元 准將(前 第1師團長) 等 元老級 軍事經驗者가 모인 國軍 諮問會議가 열렸다. 會議가 始作될 때 國防部 長官 신성모 와 參謀總長 채병덕이 議政府에서의 反擊 作戰의 進展 狀況을 報告하며 樂觀論을 펼쳤으나 議政府 方面에서의 無理한 攻擊 作戰을 危險하다고 생각했던 金弘一 所長은 漢江 以南에서의 決戰을 主張하였으며 金錫元 准將도 이 主張에 同調하였다. 하지만 이 會議는 서울 死守라는 國防部 長官과 參謀總長의 方針을 바꾸지 못했다. 會議가 끝난 後 열린 非常國會에서 國防部 長官 및 參謀總長은 다시 樂觀論을 펼쳤다. [19] 하지만 이날 낮 12時쯤 人民軍 第3師團이 國軍 第16聯隊 防禦線을 뚫고 議政府로 繼續 南下하였으며, 人民軍 第4師團은 덕정리를 占領한 뒤 西北쪽으로 議政府를 向해 協同 攻勢를 準備하며 前進하고 있었다.

韓國軍 第2師團 第16聯隊는 師團司令部 및 第5連帶보다는 조금 늦게 議政府로 到着하여 議政府 東北쪽의 금오리(現 議政府市 자금동 )에서 축석령으로 進出하는 人民軍을 沮止하고자 했다. 第16聯隊는 2.36인치 바주카砲 射擊을 통해 戰車 1臺를 破壞하는 데에는 成功하였으나 勝算이 없어 後退하였다. 또한 금오리에서는 陸軍砲兵學校 第2敎導隊長人 김풍익 이 直接 脯를 照準하여 人民軍 電車를 沮止할 程度로 激烈하게 抵抗하였으나 6月 26日 13時 警 議政府가 人民軍에게 占領되었다.

參謀總長은 백석천 에서 後退한 部隊를 收拾하고 議政府 陷落의 責任을 물어 第2師團長 이형근 准將을 解任하였으며 第7師團長 유재흥 准將을 議政府地區 戰鬪司令官으로 임명하여 두 師團을 統一指揮海 倉洞 으로 後退하도록 하였다.

議政府 陷落으로 26日 저녁 參謀總長은 漢江다리 爆破 準備에 萬全을 다하도록 命令하였으며 陸軍工兵感 최창식 의 監督 下에 26日 15時 30分까지 漢江에 있는 5個 橋梁 [a] 의 爆藥 設置를 끝냈다. [20]

6月 27日 [ 編輯 ]

27日 午前 1時 警, 中央廳 에 召集된 臨時國務會議에서 政府 首都의 水原 移轉이 決定되었다. 서울 市民에 對해서는 當初부터 避難 計劃이 없었으며 臨時國務會議에서도 아무런 言及이 없었다. 以後 深夜國會에서 "國會議員은 百萬 서울市民과 함께 首都를 結社 死守한다"라는 決議案을 通過하였다. [21] 午前 5時부터 召集된 國防頂上會議에서 채병덕 參謀總長은 "政府는 南쪽으로 내려가더라도 軍은 서울을 固守하겠다"라는 決意를 밝혔으나, 會議가 끝난 直後 電線으로부터 "오늘 밤을 버티기 어렵다"라는 悲觀的인 狀況 報告를 받았다. [22]

새벽 3時 頃, 李承晩 大統領은 周圍의 說得으로 서울에서 避身하기로 決定을 내렸다. 午前 6時 政府의 水原 遷都 發表로 그동안 樂觀的인 報道만 들어 왔던 서울 市民들은 처음으로 首都의 危機를 認知하였다. 한강인도교와 서울驛 에 待避路를 찾는 市民들이 몰려들었으며 增援部隊 車輛은 繼續해서 北上하면서 서울은 混亂에 빠졌다.

한便 倉洞에서는 一部 部隊가 빠진 제25연대의 掩護 아래 議政府에서 後退하던 將兵들을 收拾하고 防禦線을 세우기 爲한 努力을 하고 있었다. 第25聯隊는 人民軍 戰車 3臺를 破壞하는 等 激烈한 抵抗 끝에 제7사단 第1, 第3, 第9聯隊, 第2師團 第5, 第16, 第25聯隊, 第3師團 第22聯隊 殘餘部隊가 總 6個 大隊 規模로 再編成되었다. 하지만 道峯山 水落山 사이 回廊 地域은 機械化 部隊가 起動하기 좋은 地形으로 韓國軍에게 不利한 條件이었다.

10時 卿 韓國軍 防禦部隊는 防禦陣地가 채 完成되지도 않은 채 40餘 臺의 戰車, 自走砲로 增强된 人民軍의 攻擊을 받았다. 防禦軍은 陸軍砲兵學校 第2敎導隊의 105 mm 曲射砲 支援을 받으며 頑强히 抵抗하였으나 電車를 막지 못해 防禦線이 뚫렸으며 1聯隊長 함준호 大領도 人民軍의 銃擊度 死亡하는 等 混亂으로 國軍은 미아리 태릉 地域으로 나뉘어 後退하였다.

國軍의 서울 撤收는 낮 12時 30分 頃부터 始作되었으며 陸軍本部는 시흥군 으로 移動하였다. 하지만 이 때 美軍 의 參戰消息이 알려지자 韓國軍 參謀總長이 決心을 다시 바꿔 陸軍本部는 18時 警 龍山 으로 다시 移動하였다.

이렇게 戰爭指導部가 混亂에 빠진 가운데 미아리 - 회기동 防禦線에는 미아리地區 戰鬪司令官을 兼任하게 된 제5사단장 이응준 所長이 傘下 第15聯隊 第2大隊, 第20聯隊 第1大隊, 首都師團 第8聯隊 第2大隊를 指揮하여 防禦線을 꾸리고 後退하는 部隊를 收拾하고 있었다. 미아리 防禦線에는 第5師團이 3號線을 包含한 西쪽을, 第7師團이 東쪽을 맡아 防禦하게 되었다. 창동을 占領한 人民軍은 一時的으로 進軍을 멈춰 미아리 方面 戰線은 小康 狀態가 되었으나 태릉 方面에서는 一部 部隊가 빠진 제9연대 및 學徒兵 大隊가 對峙하고 있었다. 27日 午後까지 미아리-회기동 防禦線에는 2個 師團 3,000名 假量의 兵力의 混成部隊가 있었으나 美軍의 參戰 消息에다가 서울을 지키는 最終防禦線으로 首都를 死守해야 한다는 意味에 部隊의 士氣는 높았다. 防禦線은 唯一한 外郭道路가 있는 곳으로 防禦에 유리하여 [23] 道路만 막으면 電車를 막을 수 있었으며, 工兵大隊 및 民間人의 努力으로 미아리 隣近에는 여러 塹壕 , 散兵壕와 道路를 막은 障礙物 等 防禦물이 갖춰져 있었다. [24]

27日 밤, 비가 내리는 가운데 人民軍의 攻擊이 始作되었다. 19時 警 騎馬偵察隊와 戰車 10代의 人民軍이 먼저 攻擊하였다. 工兵의 爆藥 設置를 통한 沮止 試圖는 失敗했으나 105 mm 曲射砲 3門을 包含한 重火器 射擊 集中으로 한 次例 攻擊을 擊退하였다.

하지만 같은 날 24時 警 步兵의 支援을 받은 戰車 數 臺가 비를 틈타 急襲하면서 戰況이 바뀌었다. 視野가 좋지 않은 狀況에서 國軍 防禦部隊는 흩어졌고 이 渦中 人民軍 戰車部隊는 障礙物을 뚫고 前進, 28日 午前 1時 經 第105戰車旅團에서 나와 人民軍 第4師團을 支援하던 電車 部隊가 미아리를 넘어가면서 서울 最終防禦線이 突破되었다. [25]

회기동에 있던 제8연대 第2大隊는 彈藥 不足으로 後退하였으며 태릉의 部隊는 28日 아침까지 人民軍과 交戰하다 順次的으로 退却을 始作하였다. 미아리 防禦線의 部隊는 人民軍 電車가 市內에 進入한 事實을 모르고 防禦線을 繼續 維持하고 있었으나 이른 새벽부터 人民軍의 步兵部隊 攻擊을 받고 後退하기 始作했다. [26]

金浦 方面 [ 編輯 ]

6月 28日, 人民軍 戰鬪機에 擊墜되어 불타고 있는 美國 空軍의 더글러스 C-54 스카이마스터 .

서울 北쪽의 防禦線이 議政府와 봉일천 地域에서 威脅해 處한 그 때, 漢江 河口 地域인 김포반도 地域에서도 人民軍이 서울을 側面에서 威脅하고 있었다. 김포반도 北壇의 漢江 河口는 姜 幅이 넓고 潮水 干滿의 差異도 높아 渡河 作戰도 어려워 國軍은 防禦 準備를 하지 않았다.

25日 當日 開城市 를 占領한 人民軍 第6師團 은 그대로 南下하여 漢江에 到着하자 渡河 作戰을 開始, 다음 날인 26日 午前 6時 30分까지 2-3個 大隊와 聯隊級 砲兵 2門이 渡河하여 3 km 길이의 橋頭堡를 確保하였다. [27] 27日에는 第13聯隊와 第15聯隊 主力 部隊, 砲兵聯隊 2個 砲隊, 第17獨立砲兵聯隊 2個 包袋가 渡河하여 橋頭堡를 5-6 km 길이만큼 더 넓혔다. [27]

人民軍의 渡河를 報告받은 陸軍本部는 急히 南山學校長 界印朱 大領을 金浦地區 戰鬪司令官에 임명하고 渡河하여 後退해 온 國軍 第12聯隊 第2大隊를 包含해 남산학교, 步兵學校, 工兵學校 學生들과 報國隊臺 等 各地의 部隊, 또한 金浦에 投入된 獨立機甲連帶 一部를 統合하여 人民軍의 渡河를 막으라 命令하였다.

26日 16時 卿 韓國軍 防禦部隊가 진지 編成을 마칠 무렵 人民軍의 都下 偵察이 눈에 보이기 始作했고 2時間 뒤에는 人民軍 船舶 수 隻이 金浦半島 北쪽 끝에 있는 康寧包에 接近하였다. [b] 電線 正面의 第12聯隊 第2大隊 第5中隊는 下船하기 始作한 人民軍을 向해 射擊하면서 人民軍을 殲滅하였으며, 裝甲車 1個 小隊는 M8 그레이하운드 에 달린 M3 37 mm 對戰車砲 射擊으로 人民軍 貨物船 을 擊沈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날 밤 人民軍은 小規模 部隊를 康寧抛 一帶 告知 地域에 隱密하게 投入시키는 한便 1個 中隊 規模의 部隊를 江華島 로 上陸시켜 報國隊代의 背後를 攻擊하였다.

27日 새벽부터 人民軍 第14連帶는 江 건너에서 支援 射擊을 받으면서 本格的으로 都下 作戰을 始作하였다. 韓國軍 防禦部隊가 苦戰에 빠지고 報國隊臺 戰線이 뚫리면서 退路가 遮斷되자 防禦線이 무너지기 始作했다. 陸軍本部는 第3步兵師團에서 第22聯隊 第3大隊를, 首都經費司段에서 제8연대 第3大隊, 獨立機甲連帶 徒步搜索隊 第8中隊를 金浦地區 戰鬪司令部로 配屬시켜 兵力을 增强하였다. 金浦地區 司令部는 後退해 온 部隊를 收拾하며 新規 兵力을 創設하였고 金浦 防禦의 最終防禦線으로 김포읍에 있는 韻遺産 第73高地 防禦線을 指定해 防禦陣地를 세웠다. 장림 一帶(現 金浦市 通津邑 장림)를 掌握한 人民軍 主力部隊는 追擊을 中斷하고 再編成에 들어갔다.

28日 이른 아침, 人民軍은 量 正面으로 同時에 攻擊을 始作하였다. 도하部隊를 가득 실은 漁船으로 漢江을 거슬러 올라가 大廳 北쪽에 上陸하는 한便 戰車 2臺를 앞세워 金浦로 向하는 道路를 向해 人民軍 住公이 韓國軍 第22聯隊 第3大隊 防禦線을 攻擊하였다. 韓國軍은 2.36인치 바주카에다가 裝甲車의 37 mm 砲 射擊을 집중시켰으나 電車를 막진 못했다. 結局 金浦地區 戰鬪司令官은 곧바로 豫備部隊였던 第12聯隊 第2大隊(一部 部隊가 없음)를 投入해 反擊을 試圖하였으나 古典하였고 金浦 市內에서도 人民軍의 砲가 떨어지는 가운데 防禦 部隊가 後退하기 始作했다.

서울 市街戰 및 漢江 撤收 [ 編輯 ]

다리 爆破 當時 撮影한 航空 寫眞. 찍었을 當時 人道橋(오른쪽)는 이미 破壞되었으며, 鐵橋 3個(왼쪽)가 爆破되고 있다.

1950年 6月 28日 새벽 1時 미아리에서 韓國軍의 最終 防禦線이 뚫리면서 서울을 막는 마지막 防禦線이 무너졌다. 1時 45分 警 人民軍 電車가 當時 서울 市內였던 돈암동 에 進入했다는 消息이 들려오자 韓國軍의 채병덕 參謀總長은 곧바로 漢江 人道橋 의 爆破 命令을 내리고 漢江을 건너 시흥군 으로 向했다. [29] 한便 參謀總長이 떠난 直後 陸軍本部에 到着한 第2師團長 이형근 准將, 第5師團長 이응준 少將, 第7師團長 유재흥 所長은 爆破 命令을 듣고 一線 部隊가 後退 消息을 듣지 못한 채 戰鬪를 繼續하는 中이니 部隊를 후퇴시킨 뒤에 爆破해야 한다고 建議하였다. 行政參謀部長인 金白一 大領도 이에 同意했으며 作戰局長인 장창국 大領에게 橋梁 爆破를 中止하라고 命令하였다. 장창국 作戰局長은 南漢江派出所 爆破指揮所로 急히 向했으나 서울 市內, 特히 漢江 北쪽은 避亂民과 將兵들로 大混亂에 빠져 도로 通行이 어려웠다.

爆破指揮所에서는 參謀總長의 爆破 命令을 받고 28日 2時 20分 頃 工兵監 최창식 大領은 爆破 命令을 내렸다. 이 때 橋梁에서 陸軍 憲兵 과 警察이 命令 없이 後退하는 車輛들을 沮止하러 했으나 力不足이었다. 點火 信號와 함께 人道橋와 3個 鐵橋가 爆破되었다. 爆破 中止 命令을 내리기 위해 急하게 가고 있던 장창국 大領은 爆破指揮所까지 얼마 남지 않은 곳에서 큰 爆音을 들었다. [30]

漢江 人道橋 爆破로 大略 500-800名에 達하는 사람들이 死亡하였다. [31] [c] 또한 北漢江派出所 附近에서는 破片으로 40餘臺의 車輛이 破壞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負傷을 입었다. 또한 韓國軍 主力部隊의 退路가 遮斷당했고 國軍을 支援하던 車輛 1,318臺와 裝備, 補給品 等이 漢江 北岸에 放置되어 人民軍에게 占領當했다. 하지만 裝藥 不發로 京釜線 複線鐵橋와 京仁線 單線鐵橋가 完全히 破壞되지 않았으며, 以後 漢江 戰鬪 에서 人民軍 電車의 漢江 渡河를 許諾하여 作戰에도 큰 影響을 미쳤다. [33]

人民軍이 서울 市內에 突入한 것은 28日 午前 11時 30分 頃이었다. [2] 韓國軍은 組織的인 市街戰을 치를 狀況이 되지 않아 市內에 있던 首都警備司令部 및 第1工兵團 一部, 또한 서울로 後退한 部隊가 各 部隊別로 戰鬪를 펼쳤다. 三角紙 麻浦 方面에서 境界를 서던 首都警備司令部 隸下 第18聯隊 第1大隊는 人民軍 電車를 向한 57 mm 對戰車砲 및 肉薄攻擊은 成果가 없었으나 對空射擊半이 人民軍 戰鬪機를 擊墜하는 데 成功하였다. 한便 미아리 防禦線에서 後退한 第5聯隊 第3大隊 一部 部隊는 淸凉里 에서 人民軍 戰車 12臺와 步兵 部隊가 市內로 侵入한 것을 確認하고 肉薄戰을 펼쳤으나 戰車 被害는 確認되지 않았으며 10名의 特攻隊 中 3名만이 歸還하였다. 南山 에서는 參謀學校의 이용문 大領 아래 모인 中隊 規模의 兵力이 '白虎部隊'라는 名稱으로 最後까지 抗戰하였으며 生存者들은 遊擊戰으로 돌아섰다. 서울대학교病院 에서는 警備小隊가 最後까지 抵抗하다 全部 戰死하였고 100餘名의 入院 患者 中 80餘名도 病院 뒷山에 올라가 抵抗하였으나 모두 戰死하였으나 以後 侵入한 人民軍이 入院患者들을 虐殺 하는 일을 벌였다. [34] 이들 部隊의 抵抗은 組織的이진 않았으나 매우 頑剛하였으며, 서울 外郭의 防禦線에서도 組織的으로 抵抗을 繼續하여 미아리 防禦線 突破에서부터 다시 漢江 防禦線까지 進出하는 데 10時間 程度가 所要되었다.

餘波 [ 編輯 ]

漢江 人道橋가 爆破된 時點에서 韓國軍의 主力이 제2사단, 第3師團, 第5師團, 第7師團과 首都防衛司令部 部隊는 如前히 서울 外郭 防禦線에서 交戰中이었으며 第1師團은 坡州 南쪽 防禦線을 지키고 小規模 反擊을 통해 人民軍의 進擊을 沮止하고 있었다. 하지만 橋梁이 爆破되고 人民軍이 서울 市內로 進入했음을 認知한 各 部隊는 急激하게 崩壞되며 後退하기 始作하였다. 이 狀況에 對해 日本 陸上自衛隊 幹部學校 (舊 日本 陸軍大學校 ) 戰士敎官들의 肉煎史硏究普及會에서는 "韓國軍 主力部隊가 人民軍의 攻擊은 勿論이고 스스로 너무 이른 時期에 退路를 遮斷해 버린 것이 決定的 要因으로 믿을 수 없는 速度로 崩壞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35]

문산 方面에서 防禦中이던 第1師團 및 增援部隊는 봉일천里 西南쪽의 이散脯 나루터와 金浦空港 隣近의 행주에서 分散 渡河를 하였으나 이散脯에서는 上陸 地點에서 人民軍의 攻擊을 받아 큰 被害를 입었다. 第1師團 및 倍速 部隊는 國境 戰鬪에서 서울 戰鬪에 이르기까지 戰死者 및 失踪者 [d] 가 總 3,500名이나 나왔는데 이 中 大部分이 都下 過程에서 發生하였다. [5] 都下 以後 第1師團은 兵力이 5,000名 規模로 줄어들었으나 兵士들은 運搬 可能한 裝備를 最大限 들고 渡河하였다.

미아리 方面에서 防禦戰을 펼치던 混成部隊는 麻浦 , 下중리(現在의 西江洞 ), 西氷庫 , 漢南洞 , 뚝섬 , 광나루 等 漢江의 各 나루터에서 渡河하였다. 國境 戰鬪 初期부터 戰鬪를 繼續하던 제7사단은 漢江을 건너면서 總 兵力 1,200名으로 줄어들었고 携帶한 重裝備는 機關銃 4定만 있었다. 광나루를 渡河한 部隊는 바로 水原 으로 集結하였으며 西氷庫, 漢南洞, 뚝섬에서 渡河한 部隊는 水原과 始興에, 행주, 下중리, 麻布에서 渡河한 部隊는 大部分 始興으로 集結하였다. 撤收 部隊는 28日 밤에서 29日 아침 사이에는 거의 集結을 完了하였다. 하지만 以後에도 서울 市內에서는 脫出 機會를 놓친 韓國軍 將兵들이 숨어있었고, 個人 單位로 原隊 復歸를 試圖하다 人民軍에게 잡힌 兵士들도 있었다. 7月 29日에는 서울을 脫出하지 못한 안병범 准將이 서울 市內의 仁王山 에서 割腹自殺을 하기도 하였다. [36]

한便 人民軍도 서울의 戰略的 價値를 過大評價하여 서울 占領 以後 進擊이 한동안 遲滯되었고, [5] 이 틈을 利用해 韓國軍은 必死的으로 再編成하여 漢江 防禦線 을 樹立하였다. 또한 6月 27日에는 美國이 韓國에 對한 武力 支援에 나서면서 28日부터 美國 空軍 이 本格的으로 介入하기 始作했으며 29日에는 美國 海軍 巡洋艦 의 地上 砲擊戰度 始作되었다. [2]

6月 30日, 해리 트루먼 大統領은 北韓의 南侵이 太平洋 地域과 美國에 對한 共産主義의 威脅을 증가시켰음을 나타내는 證據라는 趣旨의 聲明을 發表했다. 또한 侵略에 對應해 大韓民國의 空軍과 陸軍을 支援할 것을 指示했다. 또한 美 7艦隊에 臺灣 을 굳건히 防禦하도록 命令하고 필리핀의 美軍을 强化시켰다. [37]

유엔 安全 保障 理事會 는 北韓의 侵略으로 인해 유엔 安全保障理事會 決議 84號를 통과시키는데, 骨子는 北韓軍 및 北韓의 同盟軍에 對한 作戰에서 유엔旗의 使用을 許可하는 것이었다. 유엔 安保理는 會員國들에게 北韓의 攻擊을 擊退하고 世界 平和와 安保를 回復하는데 있어 韓國을 支援하도록 勸告했다. [38]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參考週
  1. 1950年 當時 漢江 에 놓여 있던 다리는 鷺梁津과 용산을 잇는 漢江大橋 (漢江 人道橋) 1個, 京釜線 漢江鐵橋 3個, 廣津橋 (當時 人道橋) 1個 이렇게 總 5個 橋梁이 있었다.
  2. 이는 韓國軍이 刊行한 戰爭史에 따른다. [8] 이 時點에서 이미 人民軍은 約 3 km 길이의 橋頭堡를 構築할 程度의 兵力을 도하시켰으나 人民軍은 都下 後 特別한 戰鬪 行動을 하지 않았고 韓國軍도 이 地域에 兵力을 거의 두지 않아 實際 都下 時點의 認知가 많이 늦어진 것으로 推定된다. [28]
  3. 漢江 人道橋 爆破 事件으로 500에서 800餘名에 達하는 사람들이 死亡하고 80餘臺의 車輛이 被害를 입었으나, 爆破 犧牲者들이 民間人이 아니라는 硏究도 存在한다. [32]
  4. 다만 失踪者 中 大部分은 漢江 戰鬪 以後 續續 원 部隊로 復歸하였다.
出處週
  1. 萩原(1997)
  2. 陸?史?究普及?(1970)。
  3. Korea Institute of Military History (2000年 1月 1日). 《The Korean War》 . U of Nebraska Press. 170쪽. ISBN   978-0-8032-7794-6 . 2011年 8月 25日에 確認함 .  
  4. 軍史?究所 2000 , 161쪽.
  5. 白(2000)。
  6. 軍史?究所 2000 , 162쪽.
  7. 軍史?究所 2000 , 197쪽.
  8. 軍史?究所 2000 , 198쪽.
  9.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Archived 2017年 8月 29日 - 웨이백 머신 》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戰史編纂委員會) (1977, 改訂版) 317쪽.
  10.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Archived 2017年 8月 29日 - 웨이백 머신 》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戰史編纂委員會) (1977, 改訂版) 356쪽.
  11. 軍史?究所 2000 , 154쪽.
  12.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Archived 2017年 8月 29日 - 웨이백 머신 》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戰史編纂委員會) (1977, 改訂版) 358쪽.
  13. “6ㆍ25를 回顧한다-이형근” . 東亞日報. 1975年 6月 25日.  
  14.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Archived 2017年 8月 29日 - 웨이백 머신 》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戰史編纂委員會) (1977, 改訂版) 368쪽.
  15.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Archived 2017年 8月 29日 - 웨이백 머신 》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戰史編纂委員會) (1977, 改訂版) 368쪽.
  16. 軍史?究所 2000 , 157쪽.
  17. 軍史?究所 2000 , 156쪽.
  18. 韓國戰爭史 第1卷(改訂版) 北傀의 南侵과 緖戰期 Archived 2017年 8月 29日 - 웨이백 머신 》 〈第3章 北傀의 全面南侵 4. 抱川-東豆川-議政府地區 戰鬪〉 國防部 戰史編纂委員會(戰史編纂委員會) (1977, 改訂版) 365쪽.
  19. 軍史?究所 2000 , 159쪽.
  20. 軍史?究所 2000 , 200쪽.
  21. “(7)가장 길었던 3日(7)” . 中央日報 . 1970年 4月 15日. 4面 . 2020年 6月 26日에 確認함 .  
  22. 軍史?究所 2000 , 189쪽.
  23. 理由주현 記者 (2005年 2月 15日). ““미아리에는 處女菩薩 없습니다”” . 한겨레21 . 2010年 6月 27日에 確認함 .  
  24. 軍史?究所 2000 , 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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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6. 軍史?究所 2000 , 196쪽.
  27. 정상혁 2019 , 3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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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석희열 記者 (2007年 6月 28日). " 漢江다리 爆破責任者 歷史의 審判臺에 " . 데일리中央 . 2020年 6月 26日에 確認함 .  
  30. 韓國戰爭史 1, p.547
  31. Joseph C. Goulden (2002年). 《韓國戰爭飛火》. 飜譯 金炳朝. 청문각.  
  32. 신기철 (2016年 10月 21日). “記錄과 記憶, 그리고 眞實” . 금정굴 人權平和硏究所. 6-7쪽 . 2020年 6月 26日에 確認함 .  
  33. 軍史?究所 2000 , 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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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 陸?史?究普及?編(1970: 67)。
  36. “朴正? 逝去30周年記念連載⑫ ― 企てられたク?デタ?” . 《統一日報》. 2009年 6月 6日 . 2010年 4月 24日에 確認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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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Resolution 84” . History and Public Policy Program Digital Archive, United Nations. Department of Public Information. 1950年 7月 5日.  

參考 文獻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