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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統一大박論’은 1層 안 짓고 2層 짓겠다는 것”|新東亞

“박근혜 ‘統一大박論’은 1層 안 짓고 2層 짓겠다는 것”

元老 言論人·政治人 남재희가 본 大統領들

  • 對談·구해우 | 未來戰略硏究院 院長 整理·송홍근 記者 | carrot@donga.com

    入力 2014-12-22 17:5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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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 카터 政府 홀부르크의 ‘朴正熙 除去論’과 10·26
    • 盧泰愚 北方政策·전작권 還收 推進은 時代 흐름 順應
    • YS가 하나회 剔抉 안 했다면 盧武鉉 때 일 났을 수도
    • 現 野黨 執權하려면 DJ의 連帶戰略 배워야
    • MB는 싱거운 사람… 哲學이 없었다
    • 參謀들이 받아 적기만 하는 건 漫畫 같은 일
    “박근혜 ‘통일대박론’은 1층 안 짓고 2층 짓겠다는 것”
    1934年 忠北 淸州에서 태어난 남재희 前 勞動部 長官은 現代史의 산證人이다. 言論人, 政治人으로 살면서 歷史의 激浪에 몸을 맡겼다. 1952年 서울대에 入學해 醫大 2年을 마치고 法대로 옮겨 1958年 卒業한 後 言論界에 投身했다. 조선일보 政治部長, 서울신문 編輯局長을 지냈다. 李承晩 政權 反對 示威에 앞장섰다. 1979年 10代 國會議員 總選擧 때 서울 강서구에서 공화당 公薦으로 當選돼 13代까지 4線했다. 전두환·노태우 政權에 參與했으며 1990年 3黨 合黨 以後 민정系 議員 中 가장 먼저 김영삼 前 大統領 支持를 宣言했다. 金永三 政府에서 勞動部 長官을 지냈다. 政界를 떠난 後에는 進步陣營 人士들과 疏通하면서 進步的 談論을 强調해왔다.

    東아시아가 搖動한다. 오바마의 피봇 투 아시아(Pivot to Asia·아시아로의 中心軸 移動), 시진핑의 中國夢(中國夢)李 衝突한다. 政經癒着 資本主義를 뒷배로 삼은 러시아 푸틴의 東進(東進)도 搖亂하다. 아베의 日本도 便 가르기 連帶, 셈法 外交에 血眼이다. 北韓의 3代 世襲 獨裁集團은 넋 나간 理念을 손에 쥐고 挑發을 일삼는다.

    그렇다고 韓國 政府가 機敏한 것도 아니다. 周邊 情勢가 急變하는데도 “統一은 大박”이라는 式의 설익은 搜査만 亂舞할 뿐 國家未來戰略에 對한 論議가 貧弱하다. ‘신동아’와 未來戰略硏究院이 2015年 年中企劃으로 ‘國家未來戰略을 묻는다’를 始作한 까닭이다.

    國家未來戰略을 올바르게 세우려면 現代史를 이끌어온 歷代 大統領의 功過(功過)와 關聯한 歷史的 敎訓을 正確하게 認識해야 한다. 첫 順序로 남재희 前 長官을 選定한 것도 이 같은 理由에서다. 11月 26日, 12月 4日 서울 中區 관훈클럽에서 그를 두 次例 만났다.

    李承晩과 金九의 엇갈린 行步



    ▼ 歷代 大統領의 功績과 허물 中 敎師(敎師)로 삼을 것과 反面敎師(反面敎師)로 삼을 것을 國家未來戰略과 聯關해 말씀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李承晩 前 大統領과 關聯한 것부터 여쭤보겠습니다. 現代史의 代表的인 家庭的 質問입니다만, 李承晩 前 大統領과 白凡 金九 先生이 協力해 大韓民國을 建國했다면 親日派 問題와 關聯한 論難 等을 克服해 只今보다 더욱 統合的인 社會가 構成됐을 것이라는 見解가 있습니다. 現代史의 巨人인 두 人物이 合作하지 못한 理由가 무엇이라고 봅니까. 또한 두 분을 어떻게 評價하는지도 듣고 싶습니다.

    “나 같은 사람이 答하기 어려운 質問입니다. ‘신동아’ 編輯長을 지낸 손세일 前 國會議員이 내 親舊입니다. 그 親舊가 쓴 ‘李承晩과 金九’라는 冊이 10卷 넘는 시리즈로 나와 있습니다. 孫 前 議員이 李承晩 博士와 金九 先生의 一擧手一投足을 徹頭徹尾하게 硏究했습니다. 팩트 調査를 徹底하게 했는데, 解釋은 다른 問題입니다.

    두 人物을 評價할 때 光復 後 美軍이 南韓에 進駐했다는 팩트가 가장 重要합니다. 李承晩 博士는 美國에서 獨立運動을 했고, 金九 先生은 ‘國富 中國’에서 活動했어요. 젊은이들은 잘 모를 텐데 ‘장제스(蔣介石) 中國’을 國富 中國이라고 합니다. 國富 中國은 ‘마오쩌둥(毛澤東) 中國’과 內戰을 벌이느라 精神이 없었습니다. 美軍이 38度線 以南에 進駐하면서 모든 게 決定된 겁니다. 眞珠라는 表現을 썼지만 事實上 占領한 것이지요. 李 博士와 金九 先生의 라이벌戰은 그날로 끝난 겁니다.”

    ▼ 그렇더라도 두 분이 힘을 모았다면….

    “그게 現實的으로 어려웠어요. 두 분 다 훌륭하다는 데 異見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인호 KBS 理事長(서울대 名譽敎授)은 金九 先生이 大韓民國의 功勞者가 아니라는 式으로 말했더군요. 獨立運動만 했지 大韓民國과는 無關하다? 그건 詭辯입니다. 金九 先生도 李承晩 博士처럼 信託統治를 反對했습니다. 反共, 反託을 한 겁니다. 두 사람은 ‘南韓만 選擧하는 게 옳으냐’ ‘北韓과 對話 努力을 해본 後 選擧하는 게 옳으냐’는 節次的 問題를 놓고 다툰 것입니다. 金九 先生이 어떻게 大韓民國의 뿌리가 아닐 수 있습니까.”

    美 뉴딜러가 主導한 土地改革

    ▼ 李承晩 前 大統領을 强調해 現代史를 解釋하는 이들은 金九 先生을 깎아내리는 反面 金九 先生을 强調하는 이들은 이 前 大統領을 貶下합니다. 두 陣營의 다툼이 只今껏 現實 政治와 國民 生活에 影響을 미치고 있습니다.

    “거듭 말했듯 두 분 다 훌륭하다는 前提를 바탕으로 論議해야 합니다. 그런 偏頗的인 論法을 止揚해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 李承晩 前 大統領의 成果 中 하나가 朝鮮共産黨 出身 曺奉巖을 農林部 長官에 拔擢해 農地改革을 施行한 것입니다. 農地改革 德分에 共産化를 막아낼 수 있었다는 評價가 적지 않습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가 美國 大統領으로는 前無後無하게 4選을 했습니다. 네 番째 任期 때 死亡했는데, 大恐慌 때 뉴딜政策은 아주 改革的이었습니다. 루스벨트의 이 政策을 뒷받침한 官僚, 知識人을 ‘뉴딜러’라고 일컫습니다. 日本을 占領하고 南韓에 進駐하면서 뉴딜러들이 함께 왔어요.

    日本의 農地改革은 우리와 거의 같은 方式으로 이뤄졌습니다. 日本의 戰後 改革은 뉴딜러 哲學에 따라 進行됐습니다. 뉴딜러들은 于先 日本의 財閥을 解體했고, 이어 勞動組合을 育成했어요. 民主主義를 하려면 勞組를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게 農地改革입니다.

    要컨대 韓國의 農地改革은 뉴딜러들의 프레임에 따라 執行된 거예요. 또한 解放 空間은 革命的 雰圍氣였습니다. 뉴딜러들이 要求하지 않았더라도 土地改革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李承晩 博士는 土地改革과 關聯한 美國의 方針을 잘 알았고요. 共産黨 出身인 曺奉巖이 補償 比率을 낮춰야 한다고 主張해 農林部 長官을 시킨 겁니다. 李 博士의 先見之明이라느니, 曺奉巖이 役割을 했다느니 하는 式으로 보는 것은 좁은 所見입니다.”

    ▼ 李承晩 前 大統領의 意志로 1953年 10月 韓美相互防衛條約이 締結됐습니다. 韓國이 産業化, 民主化를 成就하는 데 이 條約이 도움이 됐다는 評價가 많습니다.

    “李承晩 博士가 잘 誘導했습니다. 6·25戰爭 中 作戰權을 美軍에 넘긴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李 博士가 反共 捕虜를 釋放하는 强手를 두자 美國에서 特使가 옵니다. 複雜한 狀況을 잘 整理해 相互防衛條約으로 나아갔으니 外交를 아주 잘한 거죠. 이 대목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展示作戰統制權을 只今껏 美軍에 맡기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事實입니다. 거의 60萬에 達하는 大軍을 가졌으며 莫大한 豫算을 쓰는 國軍이 戰作權을 맡지 못한다는 것은 時代錯誤的 事故입니다. 李 博士와 關聯해 하고 싶은 얘기가 하나 더 있습니다.”

    權力을 大衆에게 넘기다

    ▼ 말씀하십시오.

    “李承晩 博士가 國會에서 大統領을 選出하던 制度를 釜山 政治波動을 거치면서 直選制로 바꿉니다. 그것을 두고 이 博士를 아주 나쁜 사람으로 罵倒합니다. 直選制로 바꾼 것은 制度로서 좋은 겁니다. 戒嚴令을 宣布해 國會議員들을 半(半)拘束 狀態로 만들어놓고 通過시킨 탓에 獨裁 手法이라는 式으로 賣渡만 當하는데 나는 見解가 다릅니다. 李承晩 博士가 自由黨을 創黨할 때 처음엔 黨名을 勞動黨으로 지으려고 했습니다. 自由黨 政綱政策을 보면 無知하게 進步的입니다. 釜山 政治波動 때 깡牌짓 한 것만 빼놓으면 直選制로 바꾼 것은 韓國 政治史의 進一步 中 하나입니다. 釜山 政治波動은 再評價가 必要하다고 생각해요.”

    ▼ 節次的 問題를 일으켰으나 未來를 생각했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럼! 釜山 政治波動을 통해 權力을 封建貴族으로부터 大衆에게 넘긴 거예요. 勿論 直選制를 해야 大統領을 繼續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겠지만요. 李 博士에게 獨裁라는 表現은 어울리지 않아요. 別途의 表現을 써야 할 것 같아요. 獨裁보다는 ‘跳躍하는 前提(專制)’라고나 할까요. 朴正熙 大統領을 dictator(獨裁者)라고 規定한다면 이 博士는 authoritarian(獨裁的 權威主義者)에 가깝다고 할 수 있어요.

    李 博士 養아들 쫓아내는 示威를 主謀한 게 나예요. 先鋒에 서서 쫓아내버렸습니다. 李 博士를 別로 안 좋아하지만 獨裁者라고 부르는 것은 안 맞습니다. 分斷은 어쩔 수 없었던 일로 理解해야 합니다. 李 博士가 自己 좋으려고 分斷의 길로 邁進했다? 그건 아니란 말입니다. 大韓民國 樹立은 美蘇 冷戰 탓에 不可避했습니다. 金九 先生은 그 渦中에도 斷念하지 않고 民族 統合에 몸을 던진 것이고요.”

    ▼ 朴正熙 政權으로 話題를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張俊河 先生은 ‘사상계’ 1961年 6月號 卷頭言에서 “5·16軍事革命은 累卵의 危機에서 民主的 活路를 打開하려는 最後의 手段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評價했습니다. 1960年代 知識人 社會에서 5·16軍事政變에 對한 客觀的 評價는 어떠했는지요.

    “1963年 大統領選擧가 끝난 後 思想界에서 投票 結果를 總括하는 論文을 써달라고 付託했습니다. 題目을 ‘未知數 民主主義’라고 달았는데, 思想界에서도 그 題目을 그대로 실었습니다. 未知數 民主主義라고 명명한 것은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뜻이었습니다. 題目을 참 잘 단 것 같아요. 4·19 때 活躍한 進步的 政治人 一部가 誤判했어요. 張俊河 氏 亦是 그런 脈絡에서 支持한 것이고요. 널리 알려졌듯 美國에서도 朴正熙 前 大統領의 思想을 疑心하지 않았습니까.”

    김종인 ‘經濟民主化’의 속내

    ▼ 朴正熙 前 大統領은 産業化의 企劃者, 主導者로 評價할 수 있을 듯합니다. 1970年代 重化學工業 振興政策과 財閥을 集中的으로 育成한 것은 只今도 論難이 되고 있으나 우리가 누리는 繁榮의 엔진 구실을 했습니다. 이 같은 政策을 두고 當代에는 어떤 論爭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그건 複雜한 얘기인데, 經濟開發計劃의 生成過程을 먼저 살펴봅시다. 첫째, 朴正熙 大統領이 쿠데타를 했단 말이에요. 不道德한 일을 저지른 겁니다. 民主主義를 깨버렸잖아요. 그건 다른 것으로 補償해줘야 인정받을 수 있는 겁니다. 둘째, 場面 內閣이 쿠데타 以前에 經濟開發 5個年 計劃을 樹立해놓은 게 있었습니다. 셋째, 朴 大統領이 滿洲軍 將校로 勤務할 때 아베 신조 日本 總理의 外할아버지, 그러니까 기시 노부스케가 滿洲國 經濟計劃의 總責任者였어요. 滿洲國을 單純히 傀儡라고만 置簿할 수는 없는 게, 그 나름대로 새로운 國家 建設 異常이 있었습니다. 朝鮮族, 滿洲族, 韓族, 몽골族, 일본족의 5足이 새로운 理想鄕을 建設한다는 것이었습니다. 滿洲國 建設의 總責任者가 기시였고요. 朴 大統領은 滿洲國에서 國家 建設 過程을 봤습니다.

    이 세 要素가 結合해 經濟開發이 始作된 겁니다. 勞動者의 賃金을 搾取하면서 李秉喆, 정주영 氏 같은 사람을 據點으로 키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問題는 朴 大統領이 財閥이 適當히 큰 다음에 체크 앤드 밸런스(check · balance)를 할 裝置를 안 만들어놓은 狀態에서 10·26을 맞았다는 겁니다. 平生 執權할 줄 알았으니 서두르지 않았겠죠. 김종인 前 議員(2012年 大選 當時 새누리당 國民幸福推進委員長)李 나한테 밤낮 하는 얘기가 그겁니다. 지난 大選 때 김종인이 얘기한 經濟民主化라는 게 체크 앤드 밸런스를 하겠다는 거였어요. 朴槿惠 大統領과 함께 朴 前 大統領이 마무리하지 못한 걸 하고 싶었던 겁니다.”

    南 前 長官은 이 대목에서 “오늘 내가 그間 안 나온 얘기를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라면서 웃었다.

    “우리 核武器가 어디를 向하겠소?”

    ▼ 朴正熙 前 大統領 時代에만 20年 가까이 言論人으로 살다 1979年 執權黨인 共和黨에 參與했습니다. 核武器 開發 試圖 等으로 韓美 間 葛藤이 尖銳하던 때입니다. 當時 韓美 葛藤과 그것이 朴 前 大統領 弑害 事件으로 이르는 過程 等과 關聯한 생생한 얘기를 듣고 싶습니다.

    “공화당에 參與한 게 아니라 徵發된 겁니다. 新聞社에 가만히 있는데 落下傘으로 公薦을 받았어요. 只今은 널리 알려졌지만 核武器를 開發하려 한 것은 틀림없는 얘기입니다.

    陸軍 參謀總長을 지내고 國會 國防委員長을 한 민기식이 1970年代 後半 日本 記者 댓 命하고 술을 마시는데, 記者들이 醉氣가 오르자 核과 關聯한 것만 繼續 물었다고 해요. 罷場할 즈음 민기식이 ‘當身네들이 우리가 核武器 開發하는 것에 이렇게 關心이 많은데 그래, 核武器 開發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 核武器가 어디를 向하겠소? 미쳤다고 같은 同胞인 平壤을 向하겠소? 核武器를 開發하면 도쿄나 베이징으로 向할 거요’라고 말하니 日本 애들이 魂飛魄散했다고 해요.

    어쨌거나 核武器 開發 탓에 美國과의 關係가 아주 시리어스(serious)했습니다. 나는 1979年 10月 26日의 슈팅(shooting)은 美國과 關係가 있다고 봐요.”

    ▼ 좀 더 仔細히 말씀해주십시오.

    “뉴욕타임스가 日曜日版에 뉴욕타임스매거진이라고 週刊誌 形態로 된 別途의 雜誌를 냅니다. 뉴욕타임스매거진은 水準이 아주 높은 媒體예요. 言論人 兼 外交官인 리처드 홀부르크가 이 매거진에 論文을 寄稿합니다. 1976年 美國 大選 때 카터 選擧運動本部에서 일한 人物입니다. 글을 아주 잘 써요. 홀부르크는 카터가 大統領에 就任(1977年 1月)하기 直前 “나도 ‘朴正熙 除去論’에 同意한다”는 內容이 담긴 論文을 뉴욕타임스매거진에 投稿합니다. ‘韓國 事態를 解決하려면 朴正熙를 除去하는 方法밖에 없다’는 美國 學者의 主張에 맞장구를 친 것입니다.

    홀부르크가 나중에 카터 政權에서 國務部 아시아太平洋 擔當 次官補가 되는데, 그 職責을 맡을지 모르고 글을 그렇게 剛하게 쓴 것 같아요. 中央情報部 海外 파트에서 홀부르크의 글을 체크했겠죠. 김재규(當時 中央情報部長)는 美國이 朴 大統領을 除去하고 싶어 한다고 여겼을 겁니다.

    홀부르크가, 朴 大統領 살아 있을 때는 韓國에 오지 않더니 10·26 以後에는 뻔질나게 들락거렸습니다. 朴 大統領이 그렇게 된 直後에도 韓國을 訪問했는데, 美國大使館에서 國會議員, 言論人 等을 招請해 大大的인 祝賀 파티를 열었어요. 나도 招請받았습니다. 파티場에서 홀부르크한테 ‘朴 大統領 除去에 同意한다는 글을 썼던데, 朴 大統領이 이렇게 되니 氣分이 어때요?’라고 물었더니 자리를 避해버리더군요.”

    ▼ 朴槿惠 大統領이 10·26을 겪은 後 美國과 關聯해 어떤 疑心을 했을 수도 있겠군요.

    “그건 내가 알 수 없지.아무튼 무슨 鬼神이 들렸는지, 용케 뉴욕타임스매거진을 읽은 거야, 내가.”

    ‘서울의 봄’과 二元執政府制

    ▼ 新軍部가 1980年 ‘서울의 봄’ 때 5·18光州民主化運動을 非常時의 通常的 鎭壓軍이 아닌 空輸部隊를 投入해 無理한 鎭壓作戰 끝에 많은 市民을 희생시킨 것은 전두환, 노태우 前 大統領을 비롯한 政治軍人들에 依해 企劃된 것으로 評價됩니다. 政治權이 왜 이 같은 흐름을 沮止하지 못했을까요.

    “그때 3金이 서로 싸우느라 정신없었잖아요. 金鍾泌(JP) 氏가 軍 出身이란 말이에요. JP는 當時 大統領 直選에만 一路邁進했어요. 中央情報部를 만들었고, 陸士 8基의 代表選手였고, 하나회의 存在도 알았을 텐데, 흐름을 잘못 읽은 것 같아요. 김종필 氏가 워치도그(Watch Dog) 노릇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鄭昇和 勢力이 딴마음을 먹은 것도 影響을 미쳤습니다. 최규하-鄭昇和- 신현확 라인이 김종필 氏를 아웃시킨 겁니다. 신현확이 TK(大邱·慶北)의 代父 아닙니까. 鄭昇和 軍部와 신현확이 김종필은 안 된다 여긴 겁니다. 그런데 鄭昇華가 전두환이한테 나가자빠진 거지. 金鍾泌度, 정승화도 新軍部의 動向을 체크했어야 하는데 못한 겁니다. YS(김영삼 前 大統領), DJ(김대중 前 大統領)는 軍을 잘 몰랐고요.”

    ▼ 윌리엄 글라이스틴 當時 駐韓 美國大使와 親分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나하고 親했는데, 글라이스틴이 罪스러워했어요. 辨明하고 다녔습니다. 저녁食事를 여러 番 했는데, 繼續 謝過하는 거야. 自己는 박준병의 20師團만 兵力 移動을 承認했다는 겁니다. 글라이스틴 얘기가, 空輸部隊 投入은 承認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박준병은 젠틀하고 사람 自體가 괜찮아요. 5·18 裁判 때도 박준병만 無罪를 宣告받았습니다.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해 起訴된 사람 中 唯一하게 無罪예요.”

    ▼ 3金이 힘을 합쳤으면 쿠데타를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좋은 말씀인데, 合쳐도 어려웠을 거예요. 앞서 말했듯 신현확, 정승화가 딴마음을 먹었어요. 그리고 최규하 氏는, 正確하지는 않지만, 慇懃슬쩍 거기에 발을 담근 것 같아요. 신현확 氏가 二元執政府制를 하려고 謀事를 꾸미다가 일이 안 된 겁니다. 최규하 氏는 二元執政府制를 하면 大統領을 自己가 繼續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고요.”

    二元執政府制는 얼마 前에도 政治權에서 이슈가 됐다. 김무성 새누리당 代表가 2014年 10月 오스트리아式 二元執政府制 改憲을 言及한 것.

    “박근혜 ‘통일대박론’은 1층 안 짓고 2층 짓겠다는 것”

    12月 4日 서울 中區 관훈클럽에서 大膽하는 남재희(왼쪽) 前 勞動部 長官과 구해우 未來戰略硏究院 院長.

    “486線 指導者 안 나올 듯”

    ▼ 1980年代 學生運動이 1987年 6月 民主抗爭으로 發展합니다. 一部에서는, 逆說이지만 全斗煥 政權의 歷史的 寄與가 이른바 486世代를 만들어낸 것이라고도 합니다. 當時 두 따님이 學生運動에 參與해 與黨 國會議員으로서 곤혹스러운 處地에 놓이기도 했는데, 韓國 社會에서 486世代의 歷史的 意味와 肯定的·否定的 側面은 무엇일까요.

    “이것도 어려운 主題인데, 그 사람들이 只今 政治權에서 問題가 되는 것 아닙니까. 그 親舊들이 野黨에서 役割도 제대로 못하면서 밤낮 問題 되는 거잖아요. 政治的 主導權은 못 잡고 끝나는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해요. 리더가 안 나올 것 같습니다. 金富謙, 金榮春이 젊은 軸 中에선 第一 나은 것 같은데…. 人氣는 忠南知事(안희정)가 많은 것 같아요. 만나는 사람마다 第一 낫다더군요.

    아무튼 國家 指導者는 하나의 時代를 만드는 사람인데, 그들 中에선 그런 사람이 안 나올 것으로 보여요. 한숨 나오는 사람이 많아. 野黨의 몇몇 運動圈 出身 議員을 보면 寒心해요. 濟州知事(元喜龍)와 京畿知事(남경필)도 大選走者로 擧論되던데, 知事만 하면 大權候補가 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

    ▼ 따님이 拘束됐을 때 心境은 어땠는지도 궁금합니다.

    “둘 다 拘束됐어요. 只今은 博士學位 받고 둘 다 敎授예요. 하나는 美國에서, 하나는 이화여대에서. 데모꾼들이 머리가 좋아요. 이건 餘談인데, 둘 다 그렇게 됐을 때 脫黨하고 鬪士가 돼 한番 붙어보려고도 했어요. 曖昧한 事案으로 잡아넣은 겁니다. 性醜行 저지른 前職 國會議員이 當時 둘째딸 擔當檢事였는데, 平凡한 것을 아주 그냥 凶惡한 犯罪者로 만들어버립디다. 서울大 法大 새카만 後輩인데 나한테도 顔面을 바꾸고 訓戒를 하더군요.”

    ▼ 노태우 政府 때이던 1990年 民政黨, 統一민주당, 신민주공화당이 合當해 민자당을 創黨합니다. 3黨 合黨은 韓國 政治史에서 嶺南 産業化 保守勢力과 嶺南 民主化 勢力의 聯合이라는 獨特한 性格을 지녔지만 地域主義를 深化한 元兇으로도 評價받습니다.

    “湖南만 싹 빼버렸지.”

    ▼ 與黨 國會議員으로서 3黨 合黨에 參與했습니다.

    “김정례(前 國會議員) 氏가 道士인 것 같아요. 인사동에 ‘向精’이라고 밥집이 있어요. 3黨 合黨이 이뤄진 날 김정례가 나, 李鍾贊(前 國精院長), 이기택(前 민주평통 副議長), 金相賢(前 議員) 이렇게 저녁을 먹자는 겁니다. 工巧롭게도 저녁 約束 直前 3黨 合黨이 發表됐습니다. 김정례가 모르고 約束을 그렇게 잡은 거였어요. 3黨 合黨이 自然스레 話題가 됐습니다. 湖南 孤立인데, 어떻게 對處해야 하느냐는 얘기가 나왔어요. 이기택 氏는 中間에 4·19 同志들이 찾는다면서 빠졌고요. 그쪽도 對策會議에 들어간 거죠.

    김정례는 女子니까 집에 가고, 나, 李鍾贊, 金相賢 셋이 새벽 2時까지 술을 마셨습니다. 내가 언젠가 그날의 일을 글로 쓴 적이 있어요. ‘一生一大의 決斷을 내릴 瞬間에 決心하지 못했다’고요. 李鍾贊, 金相賢, 나, 이기택이라도 湖南 孤立은 不可하다는 名分으로 獨立 部隊를 形成했으면 政治史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北方政策? 變化에 順應한 것”

    ▼ 노태우 政府가 한 일 가운데 保守·進步 兩側으로부터 肯定的 評價를 받는 것으로 北方政策이 있습니다. 이 政策은 옛 蘇聯과 東歐 社會主義圈 崩壞라는 世界史的 大變革期의 客觀的 條件에 依해서 推進됐다는 見解도 있고, 박철언 前 議員 等이 全斗煥 政權 때부터 國家安全企劃部에 特別 팀을 꾸려 고르바초프 蘇聯 共産黨 書記長 登場 以後 社會主義圈의 變化를 分析하면서 準備해오다 노태우 政府 때 權力 核心으로 登場하면서 積極的으로 推進했기에 可能했다는 見解도 있습니다.

    “世界史的 變化에 順應한 겁니다. 흐름을 拒否하지 않고 따른 거예요.”

    ▼ 政策이라는 게 客觀的 背景도 重要하지만, 主體的 努力을 投入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主體的인 것은 거의 없었다고 봅니다. 國際 情勢의 큰 흐름에 거역하지 않고 順應한 겁니다. 돌대가리들은 逆行할 수도 있어요. 박철언만 머리 좋은 게 아니라 駐美大使, 유엔大使를 지낸 현홍주가 頭腦가 아주 스마트합니다. 當時에 國際 情勢 흐름을 탄 것은 아주 잘한 겁니다.

    一例로 中國이 浮上하는 狀況에서 駐韓美軍에 사드(THAAD·高高度미사일防禦 體系)가 配置되는 것은 驛으로 가는 겁니다. 노태우 氏의 北方政策과 比較해보면 戰作權 轉換을 延期한 것도 逆行하는 겁니다. 노태우 氏는 흐름에 順調롭게 따라갔습니다. 약았다고 할 수 있어요. 노무현 氏처럼 美國에 어깃장 놓고 말썽부리면 안 되지만, 美國과 中國 사이에서 아는 듯 모르는 듯 흐름을 타야 합니다.”

    그는 YS 政權의 가장 큰 功績으로 하나회 肅正을 꼽았다

    “YS가 하나회를 除去하지 않았다면 保守的인 YS 政權에서는 別일이 없었을 테지만, DJ나 노무현 政權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릅니다. 쿠데타 危險이 存在하면 統治가 제대로 되기 어렵습니다.”

    ▼ 말씀하신 대로 김영삼 前 大統領은 ‘하나회’ 剔抉을 통해 쿠데타의 可能性을 없앴다고 評價받습니다. 南北統一 過程에서 軍事的 問題가 發生하거나 中國, 日本 간 葛藤 等으로 인해 軍의 役割이 要求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쿠데타가 일어날 素地가 全혀 없다고 봅니까.

    “長期的으로는 可能性을 排除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分斷國家이기 때문입니다. 情勢라는 게 簡單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이 忘却합니다. 하나회가 肅正된 게 겨우 20餘 年 前 얘기입니다. 노무현 政府 때 어떤 極右 言論人이 軍이 왜 가만히 있느냐고 쿠데타를 부추기는 듯한 言動을 한 적이 있습니다. 政治가 深刻한 混亂에 빠지면 어떤 일도 排除할 수 없어요.”

    “IMF 殘虐上이 論爭 核心 돼야”

    ▼ 金永三 政府에서 勞動部 長官을 지냈습니다. YS 政府의 가장 큰 傷處는 外換危機를 맞았다는 것입니다. 患亂(換亂)과 關聯한 YS 政府의 責任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經濟 分野는 내가 仔細하게 모릅니다. YS도 失敗의 한 축이지만 經濟 官僚들이 구멍 낸 것 아닌가요? 官僚들이 펀더멘털(Fundamental·經濟基礎)李 튼튼하다고 헛소리하다 庫間이 비는 것을 몰랐단 말이에요. 只今 하고 싶은 말은 IMF(國際通貨基金)가 우리나라를 지나치게 苛酷하게 다뤘다는 點입니다. 2008年 글로벌 經濟危機 狀況과 比較해보세요. IMF의 殘虐上이 論爭의 主題가 돼야 할 겁니다.

    DJ는 工夫는 熱心히 하는데 매크로한 것을 잘 몰랐거든요. 마이크로한 것은 시시콜콜 잘 아는데 큰 그림의 經濟는 잘 몰랐다는 말이에요. DJ에게도 잘못이 많아요. IMF 處方대로 막 팔아먹었어요. YS는 複雜한 狀況을 單純化해 突破하는 能力이 뛰어난 反面 DJ는 1960年代부터 證券市場까지 빠삭할 만큼 디테일에 剛했습니다. 建設業者를 만나도 시시콜콜 質問하며 工夫합니다. 디테일이 蓄積돼 있었으나 經濟哲學까지 形成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 金大中 前 大統領은 進步陣營에 屬했으나 執權을 위해 保守主義者인 JP와 連帶했습니다. 또한 이른바 新自由主義的 改革도 受容하는 等 悠然한 政治 戰略을 驅使했습니다. DJ의 그런 行步를 어떻게 評價합니까.

    “김영삼 氏는 어느 곳에 位置하든 늘 主流에 섰습니다. 樂天的인 데다 嶺南의 富者집 아들로 태어나 多數派이기도 했고요. 김대중 氏는 타고난 少數派예요. 少數派가 살아남으려면 連帶를 통해 貰를 불릴 수밖에 없습니다. 朴正熙 전두환 노태우는 共히 YS는 別로 안 건드렸어요. 같은 嶺南 出身이라는 點도 影響을 미쳤을 겁니다. DJ가 黨을 여러 番 만드는데 그때마다 무슨 派, 무슨 파를 보태잖아요. 7~8回 勢를 불렸을 겁니다. 마지막에 울며 겨자 먹기로 JP와 손잡은 거죠. 대단한 사람입니다. 現在의 野黨이 執權하려면 DJ의 戰略을 배워야 합니다.”

    純眞한 盧武鉉, 싱거운 李明博

    ▼ 金大中 前 大統領에 對한 報酬·進步陣營의 評價는 크게 엇갈립니다. 進步陣營에서는 韓半島 平和의 메이커로서 높게 評價하는 反面 保守陣營에서는 北韓 核武器 開發費用을 支援해준 責任을 묻기도 합니다.

    “1964年, 1965年께 김대중 氏하고 단둘이 밥을 먹으면서 長時間 얘기한 적이 있어요. 좋은 말을 하고 헤어져야 할 것 같아 ‘金 議員은 내가 보기엔 韓國의 빌리 브란트가 되셔야겠습니다. 韓國의 빌리 브란트가 되십시오’ 이렇게 말했습니다.

    第2 共和國 場面 內閣 때 DJ가 國會議員도 아니면서 執權黨 代辯人을 맡았습니다. 院外가 代辯人이 된 것은 엄청난 事件이었어요. 그만큼 머리가 좋았던 거죠. 그즈음 DJ가 取材를 마친 내게 흰 封套를 하나 건네더군요. ‘代辯人, 살림이 궁하지 않습니다. 必要 없습니다’라고 答했어요. 얼굴이 하얗게 되더군요. 院外라고 無視하는 것 아니냐는 表情이었습니다. 30年 後 어느 商街에서 DJ를 만났는데, ‘南 議員, 그때 내가 준 寸志 안 받았지?’ 이러는 거예요. DJ가 記憶力이 그 程度였어요.

    DJ에게 ‘빌리 브란트가 되십시오’라고 말한 사람이니, 내 評價는 뻔한 거지. 김대중 氏의 對北政策을 肯定的으로 評價합니다. 朴槿惠 大統領의 ‘統一大舶’은 率直하게 말하면 1層은 안 짓고 2層만 짓겠다는 거예요. 朴 大統領이 지어야 할 1層은 南北 間 軍事的 緊張 緩和 아닙니까. 그것을 안 하고 統一大박을 얘기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 盧武鉉 前 大統領은 旣得權 改革의 象徵 같은 이미지를 갖고 登場했습니다. 財閥改革을 외쳤으나 거꾸로 財閥에 捕獲됐다는 評價도 있습니다. 또한 “進步는 無能하다”는 指摘이 나오는 契機를 提供했다는 視角도 있고요.

    “改革을 못했지. 側近이 大企業과 엮여서…. 盧武鉉 大統領과 國會 勞動委員會에 함께 있었는데, 自己主張을 하다 脾胃에 안 맞으면 書類를 팍 팽개치고 辱하면서 나가곤 그랬습니다. 性格이 아주 唐突한 데가 있었어요. 강원용 牧師가 開催한 한 세미나에서 大統領 候補이던 노무현 氏에게 ‘反美면 어떠냐고 했던데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孫悟空이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입니다. 漸進的으로 問題를 解決해야 합니다’라고 말한 적도 있습니다.

    盧 大統領과 김정일의 對話錄을 보면 말이에요, 참 純眞해. 民族 精氣도 있고, 自主性도 다 좋은데, 나이브해요. 人權·勞動辯護士로 일할 때 急進思想이 머리에 잘못 入力돼버린 겁니다. 眞情性은 있었어요. 그거 하나는 높이 살만한 사람입니다.”

    ▼ 李明博 政府는 汎(汎)保守政權이라고 봐야 하는데….

    “싱거운 사람이야, 그 사람은.”

    ▼ 李明博 前 大統領은 샐러리맨 神話, 淸溪川 成功 等을 背景으로 新保守의 심벌로 登場했으나 側近 非理 等으로 인해 保守의 道德性 및 腐敗 問題가 提起되기도 했습니다.

    “아주 싱거운 사람이에요. 新保守의 힘으로 大統領이 됐는데, 結果的으로는 4大江, 資源外交, 側近 非理로 형편없게 됐습니다. 哲學 없는 장사꾼이라고나 할까.”

    梅菹스티 없는 指導者

    ▼ 朴槿惠 大統領은 統一大박論을 내놓으면서 北韓 問題 解決에 나섰습니다. 이 過程에서 앞선 어느 政府보다도 中國과의 協力을 强化하면서 中國의 役割을 통해 北核 問題, 北韓 問題 解決을 圖謀합니다. 어떻게 評價하는지요.

    “統一大박論은 앞뒤가 안 맞는 소리예요. 韓中關係가 좋다는 것도 現象일 뿐입니다. 本質은 그렇지 않아요. 11月 末 駐中大使를 지낸 정종욱(統一準備委員會 副委員長) 氏가 講演하는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정종욱 氏가 똑똑한 사람이에요. 講演의 95%를 統一準備委員會 構成 等 別 볼일 없거나 問題 될 게 없는 얘기만 합디다.

    그런데 講義 막판에 重要한 얘기를 하나 했어요. 中國 高位職에 오른 人士가 副局長級日 때 마음을 터놓고 얘기한 적이 있다면서 그 高位 人士가 한 말을 紹介하는 겁니다. 첫째, 南北統一 反對 안 한다. 둘째, 北韓만 앞세우지 않는다. 셋째, 統一韓國이 中國에 軍事的 威脅이 되면 안 된다…. 셋째가 核心이에요. 한마디로 駐韓美軍이 存在하는 限 中國은 韓半島의 統一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겁니다. 정종욱 氏가 學者的 良心을 가진 터라 남의 얘기를 빌려오는 形式으로, 眞實을 藥은 方式으로 얘기한 겁니다.”

    ▼ 次期 指導者가 가져야 할 가장 重要한 德目은 무엇일까요.

    “노태우 氏는 參謀들이 써준 것만 5年 내내 읽었어요. 한番도 本人 생각을 얘기한 적이 없다고 보면 됩니다. 育成이 없는 大統領이었던 겁니다. 朴槿惠 大統領도 主로 누군가 써준 것을 읽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大統領이 말하는 대로 參謀들이 받아 적기만 하는 것은 漫畫 같은 일입니다.

    월터 리프먼(美國 言論인· 1889~1974)의 ‘퍼블릭 필로소피’(public philosophy·公共哲學, 民衆道德)가 괜찮은 冊입니다. 只今은 그 冊이 나왔을 때와 時代가 다르기는 하지만 리프먼은 大統領에게 梅菹스티(majesty·威風堂堂함)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梅菹스티를 가지려면 道德的 權威를 갖춰야 한다는 겁니다.

    이명박 氏에겐 道德的 權威가 없었습니다. 정윤회 文件 事件과 關聯해 朴槿惠 大統領도 그런 처지고요. 國民, 庶民이 요즘 벌어지는 일과 關聯해 어떻게 얘기할까요. 梅菹스티가 없는 겁니다. 道德的 權威에 基盤을 둔 梅菹스티가 있는 指導者가 登場해야 합니다.”

    그는 對談을 마치면서 “只今껏 길게 얘기했는데, 어떤 大統領을 가장 높게 評價한 것 같아요?”라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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