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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韓의 統進黨 掌握 試圖|新東亞

北韓의 統進黨 掌握 試圖

“將軍님의 영도를 實現하라”(北 勞動黨)
“將軍님 銃砲彈 돼 課業 完遂”(통진당 連繫 一心會)

  • 송홍근 記者 | carrot@donga.com

    入力 2014-12-23 09: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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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과 連繫性’李 違憲政黨 審判 爭點
    • 中央黨·서울市黨 掌握 主力
    • 北 勞動黨 指令 內容과 같은 黨職 人選
    • 北 “山岳會 指導方法 報告하라”
    • 統進黨 “極히 一部 黨員의 行爲일 뿐”
    북한의 통진당 장악 시도

    2013年 9月 5日 拘束令狀 發付 直後 拘置所로 向하면서 潔白을 외치는 李石基 統進黨 議員. 李 議員은 2014年 8月 11日 抗訴審에서 內亂煽動이 認定돼 懲役 9年, 資格停止 7年을 宣告받았다.

    통합진보당에 對한 憲法裁判所(以下 憲裁)의 違憲政黨 解散 審判이 臨迫했다. 지난 11月 25日 마지막 辯論이 끝나 決定만 남았다. 憲裁는 統進黨 綱領 및 活動이 憲法上 民主的 基本秩序에 어긋나는지 判斷한다.

    2013年 11月 政府가 統進黨 解散 審判을 請求한 後 18次例 辯論이 進行됐다. 法務部와 統進黨이 提出한 書面 證據가 各各 2900餘 件, 900餘 件에 達한다. 그中 法務部가 提出해 憲裁가 證據로 採擇한 一心會·王財産 事件 關聯 文書가 北韓과의 連繫性과 關聯한 核心 證據다. 搜査記錄의 證據 採擇을 놓고 法務部와 統進黨 間 攻防이 거칠었다.

    憲裁는 王財産 事件 對北 報告書와 北韓 勞動黨 指令文 等을 證據로 採擇했다. 統進黨 側은 最後辯論에서 “王財産이나 一心會 等 事件은 極히 一部 黨員의 行爲”라고 强調했다.

    그렇다면 搜査記錄에는 어떤 內容이 담겼을까. ‘신동아’가 入手한 搜査記錄과 對北 報告書, 指令文 等에 따르면 北韓은 統進黨(민노당)을 掌握하려고 다양한 試圖를 했다. 統進黨을 통해 ‘김정일의 領導를 實現’하려 한 것이다. 勞動黨의 指令과 똑같은 內容으로 統進黨 黨職 人選이 이뤄진 적도 있으며 綱領을 바꾸려는 試圖도 했다.

    “우리 黨의 要求에 符合하도록”



    北韓 勞動黨은 일심회를 통해 中央黨 및 서울市黨 掌握에 集中했다. 일심회는 美國 市民權者 마이클 張 氏가 主思派 運動圈을 包攝해 結成한 地下組織. 張氏는 1994年 勞動黨 對外連絡部(現 225國) 指令을 받고 1994年 密入北해 勞動黨에 入黨한 後 ‘牡丹峯’이라는 臺呼名(對號名·保安을 위해 이름 代身 使用하는 名稱)을 받았다. 유기순 當時 北韓 對外連絡部 副部長은 “統一事業을 위해 南韓 內 地下組織을 꾸리라”고 指示했다.

    張氏는 1997年 末 연세대 出身 손○○ 氏를 包攝해 主體思想을 指導理念으로 삼은 일심회를 結成했다. 일심회는 ‘將軍님의 唯一的 領導를 實現하려 한마음으로 뭉쳐 鬪爭한다’는 뜻이다. 張氏는 고려대 愛國學生會 副部長 出身 李○◇(2000年 末 包攝) 氏, 高麗大 삼민투 委員長 出身 李○○(2001年 6月 包攝) 氏, 전대협 事務局長 出身 崔起榮(2005年 2月 包攝) 氏로 指導部를 構成했다.

    張氏는 中國 等에서 對外連絡部 人士와 接觸해 金正日 影島體系를 構築하라는 任務를 附與받았다. 韓國 內 情勢, 민노당 內部 動向 等을 勞動黨에 報告했다. 孫氏 等도 베이징 對外連絡部 安家(安家)를 訪問해 △민노당 指導方向을 學習하고 △忠誠決意 便紙를 作成 및 提出했으며 △민노당 主要 人物에 對한 評價 事業 任務를 附與받았다. 일심회는 ‘將軍님의 영도를 實現하라’는 指令에 따라 민노당 中央黨과 서울市黨을 掌握하는 데 注力했다. 崔氏는 統進黨의 2012年 執權戰略委員會에 核心 幹部로 들어가 影響力을 行使했다.

    북한의 통진당 장악 시도

    통합진보당 解散 審判 最終 辯論이 2014年 11月 25日 憲法裁判所에서 열렸다.

    搜査記錄에 따르면 일심회는 △민노당 黨代表 祕書室과 中央黨 基調室에 勤務하는 實務 幹部를 包攝해 政策 生産과 決定 過程을 實質的으로 掌握했고 △黨內 NL(民族解放)系 모임인 統一山岳會 地域組織을 擴大하는 方式으로 統一戰線을 構築해 黨內 支持를 擴大했으며 △當直選擧 때는 北韓 勞動黨이 指目한 人物을 當直에 選出되게 하고자 黨內 NL界 全國모임을 召集해 支持活動을 展開했다. 또한 △崔氏가 執權戰略委員會에 進出해 黨 綱領을 北韓의 要求에 맞게 바꾸려 했으며 △黨內에서 北韓에 對해 批判的인 汎左派(PD界)에 對해서는 孤立化를 試圖했다고 한다.

    指令文에 따르면 北韓 勞動黨은 “△민노당 政策 方向을 우리 黨의 要求에 符合하도록 할 것 △中央黨 幹部隊伍를 親北 NL 系列로 迎入·强化할 것 △민노당이 統一戰線的 政黨이 되도록 對外事業을 領導할 것” 等을 指示했다.

    일심회는 崔氏에게 “中央黨의 企劃 實務 部門에 對한 김정일의 領導를 具現해 민노당이 우리 黨(北韓 勞動黨)의 要求에 맞게 反美 民族 共助의 合法的 單位로 役割을 다하도록 해야 한다”고 要請했다. 또한 “NL契가 組織한 統一山岳會를 把握해 이를 指導할 方法을 報告하라”고 指示했다. 崔氏는 統一山岳會의 規模와 關聯해 京畿東部 200餘 名, 蔚山聯合 1000餘 名, 仁川聯合 2000餘 名이라고 報告했다.

    2005年 12月 6日 北韓 勞動黨은 민노당 黨職 選擧를 앞두고 約定된 e메일을 통해 일심회에 “當直 選擧를 契機로 黨 政策委員會를 完全 掌握하라” “政策委員長으로는 京畿東部의 이○△을 내세우고, 그 아래에 우리의 影響下에 있는 사람들을 넣어라” “當直·公職 兼職 禁止가 없어지는 境遇 ○○○만한 人物이 없으므로 그를 黨代表로 選出하라” “當直·公職 兼職 禁止 條項이 廢止되지 않으면 現 非對委 執行委員長을 黨代表로 밀고 나가라”고 指示했다.

    합정동 RO 모임과 ‘山岳會’

    2006年 1月 黨 代表에는 ○○○ 氏, 政策委員長에는 이○△ 氏가 選出됐다. 北韓의 指令 內容과 똑같은 結果가 나온 것이다. 偶然의 一致로 그렇게 된 것일 可能性 또한 적지 않다. 이○△氏는 한때 京畿東部의 實勢로 指目된 人物로 ‘首領’이라고 불리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事務總長에는 金善東 前 議員이 選出되는데 이때 京畿東部와 光州全南이 連帶해 汎(汎)京畿東部聯合이 誕生한 것으로 分析된다.

    北韓 勞動黨은 以後 “思想과 理念 宗敎의 差異를 넘어 單一隊伍를 이뤄야 한다” “우리 黨(北韓 勞動黨)의 單一前船體 建設 方針을 민노당의 公式 立場으로 貫徹시킬 것” 等을 일심회에 指示했으며, 일심회는 △黨 綱領의 大衆化 推進 △민노당 中央黨 內의 企劃力量 强化 △單一前船體 年內 建設 △上層 統一戰線 事業 强化 △左派(PD界)에 對한 對策 樹立을 5大課業으로 設定했다.

    一心會 組織員들은 “曺國의 同志들 安寧하십니까. 敵後(敵後)에서 보고 올립니다” “오직 將軍님의 安慰와 健康만을 생각합니다” “한 名 한 名을 守令의 決死擁衛로 만들고, 將軍님의 別動隊가 되겠습니다” “將軍님의 先軍영도가 唯一한 正答입니다. 새로운 世紀의 受領임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將軍님의 銃砲彈이 되어 課業을 完遂할 것” 等의 다짐을 했다. 勞動黨은 “將軍님이 同志들을 千金같이 여긴다”고 이들을 督勵했다.

    一心會 組織員 崔氏와 李○○ 氏는 민족민주혁명당(민혁당) 出身 李相奎 統進黨 議員과 함께 ‘서울모임’(2005年 8月 21日 結成, 構成員 10餘 名)에서 함께 活動했다. 서울모임은 統進黨 서울市黨을 背後 操縱하는 前衛組織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京畿東部로 分類되는 一部 人士가 一心會 間諜들과 交集合을 이룬 것이다.

    또한 “一心會 한 組織員이 2006年 3月 2日 中國 베이징에서 北韓 勞動黨 工作員을 만나 민노당 서울市黨에서 所謂 偉大한 將軍님의 영도를 實現하는 데 李相奎의 包攝 問題를 論議한 것”으로 一心會 判決文에 드러나 있다. 判決文에는 서울모임의 核心이 李 議員이라고 摘示됐다. 또한 判決文은 “京畿東部聯合은 200名의 活動家가 해마다 山行을 하며 同志愛를 다지는데, 이를 ‘山岳會’로 轉換해 運營할 수 있다고 北韓 指導部에 報告했다”고 밝힌다. 2013年 5月 합정동 RO 會合에서 內亂 煽動 行爲를 한 것으로 抗訴審에서 認定된 李石基 議員의 RO 또한 ‘山岳會’로 불리기도 했다. 합정동 RO 모임에 參席한 核心 隊伍는 130餘 名이다.

    革命論, 先軍政治 學習

    일심회는 서울모임을 통해 PD系列인 沈想奵 現 正義黨 院內代表 쪽의 前震그룹을 牽制하고, 또 다른 PD系列인 革新그룹 等과는 戰術的으로 提携하기로 했다. 이들은 ‘先軍政治 同志會’ ‘8·25 同志會’를 통해 서울市黨에 對한 掌握力을 높여나가기로 했다.

    또한 NL界 非公開 定期모임을 통해 ‘先軍政治와 統一情勢’ ‘黨 事業 理論과 思想論’ 等 革命論을 學習했다. “민노당 中央과 서울市黨에 (김정일의) 影島體系를 내오는 것은 黨內 NL界의 主體思想化가 없이 指導部 掌握만으로는 沙上樓閣에 不過하다”는 判斷에 따른 것이었으며 統進黨 ○○○, ○○○氏를 서울市黨 掌樂課 關聯해 各各 責任者, 地圖 核心 對象으로 推薦하기도 했다. 要컨대 北韓 勞動黨은 일심회를 통해 민노당의 中央黨과 서울市黨을 掌握해 김정일의 영도가 實現되도록 企圖한 것이다.

    李正姬 統進黨 代表는 2014年 11月 25日 違憲政黨 解散 審判 最後辯論에서 統進黨 側 代理人으로 나와 “黨 代表로 일하면서 어떤 사람으로부터도 北에서 받은 指令이니 實現시키라는 指示를 받은 바 없다”고 强調하면서 “平和와 和解의 歷史를 만들려 했을 뿐 移籍行爲도 남남(南南) 葛藤 助長 行爲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統進黨 側 代理人의 說明대로라면 北韓 勞動黨이 統進黨 掌握을 企圖했으나 實際로는 成果를 거두지 못했을 素地 또한 적지 않은 것이다. 일심회와 統進黨 黨權派의 交集合은 枝葉的인 事案인 것으로도 볼 수 있는 서울모임 外에는 찾기 어렵다.

    북한의 통진당 장악 시도

    통합진보당 解散 審判 最終 辯論이 열린 2014年 11月 25日 憲法裁判所 앞에서 進步團體 會員들이 解散 反對 示威를 했다.

    한便 法務部가 憲裁에 提出한 文書에 따르면 統進黨은 一心會 事件의 ○○○ 氏를 비롯해 過去 利敵團體 活動으로 處罰받거나 이에 加擔한 18名에게 黨員 敎育을 맡긴 것으로 돼 있다. 황장엽 前 北韓 勞動黨 祕書에게 손도끼와 함께 “背信者는 반드시 罪값을 치른다. 다음엔 警告가 아니라 罪값에 맞는 處罰을 할 것”이라고 쓴 脅迫文을 보낸 金○○ 氏가 黨員敎育委員會 敎育部長을 맡기도 했다. 一心會 事件으로 收監돼 服役을 마친 崔起榮 氏는 現在 統進黨 附設 進步政策硏究院 企劃室長이다. 이○○ 氏는 統進黨 中央委員을 지냈다. 出所한 後 統進黨에서 다시 活動하는 것이다.

    “進步 大統合 政黨 構成하라”

    王財産 事件은 민노당 仁川 組織과 關聯이 있다. 1980年代 主思派 勢力 中 一部가 當時 北韓 勞動黨 社會文化部(現 225國)에 包攝돼 政治權 浸透 工作을 벌인 것.

    王財産 總責 김덕용 氏의 大湖名은 ‘管덕봉’이다. 金氏는 1993年 8月 26日 김일성을 만나 이른바 接見校時(김일성과 直接 面談)를 받았다. 北韓 勞動黨이 金氏에게 내린 指令은 △組織 안에 唯一的 領導體系 構築 △指導 核心을 育成해 重要 地域과 部門에 포치(北韓 조선말대사전에 따르면 ‘포치(布置)’는 事業 擔當에게 일을 分擔해주면서 修行方法 等을 일러줘 앞으로 事業이 達成되게 짜고 드는 것을 뜻한다) △革命思想과 偉大性 普及 및 宣傳 △統一戰線的 方法으로 革命力量 造成 △組織의 安全을 徹底히 保障하며 合法的 貿易 空間을 통해 祖國과의 連繫·連絡 實現 等이다.

    金氏는 以後 ‘反美救國學生同盟’ 出身 임○○ 氏와 大學 同窓인 李○○氏를 包攝해 北韓이 김일성 抗日 遺跡地로 宣傳하는 咸北 穩城郡의 王財産을 名稱으로 삼은 地下組織을 結成했다.

    勞動黨 225國은 王財産을 통해서도 韓國의 各種 選擧 때 指令을 下達했다. “進步 勢力, 改革民主 勢力의 力量을 擴大하고 민노당을 中心으로 進步 大統合政黨을 構成하라고 指示했다. 2006年 地方選擧 때는 ”2007年 大選을 내다보고 地域 運動團體를 網羅해 動員하라”고, 2011年 4月 再·補闕 選擧 때는 “勝利의 成果를 土臺로 進步 大統合을 蹉跌 없이 推進하라”고 指令했다. 2011年 5月에는 “進步新黨의 統合反對 勢力은 ○○○○科 協同해 統合으로 이끌고, 統合이 破綻되면 枯死시켜라” “國民參與黨은 이라크 派兵 主張 等을 反省할 境遇 統合에 參與케 하라”며 進步新黨, 國民參與黨과의 合黨과 關聯한 指針을 내놓았다. 2010年 6月 地方選擧 때 王財産 構成員들은 “組織員들이 熱心히 鬪爭해 민노당 候補 中 旣往의 包攝 對象인 ○○○科 ○○○을 당선시켰다”고 北韓 勞動黨에 報告했다.

    北韓이 이른바 從北 性向 勢力에 選擧資金을 댔다는 證言도 憲裁 審判過程에서 나왔다. 1980年代 大學街를 붉게 물들인 主思派 팸플릿 ‘鋼鐵書信’ 著者로 北韓과 直接 連繫된 地下黨(민혁당)을 最初로 組織한 김영환 氏가 2014年 10月 21日 16次 辯論에 出席해 “李石基 議員을 中心으로 한 민혁당 傘下 京畿南部委員會는 1990年代부터 只今까지 한番도 解體한 적이 없다. 이들이 민노당에 加擔하는 過程을 보면 민혁당 때의 路線과 方針을 따르지 않나 推測된다”면서 “1995年 地方選擧 때 城南과 구로 地域에 金美希·李相奎 候補(現 統進黨 議員)가 各各 出馬했는데, 민혁당에서 한 名當 500萬 원씩 資金을 支援했다. 이 資金 中에는 北韓에서 支援받은 40萬 달러도 있다”고 主張했다.

    金美希·李相奎 議員은 10月 22日 金氏의 選擧資金 關聯 主張은 “明白한 虛僞事實 流布면서 名譽毁損이다. 法的인 모든 責任을 물어 强力히 對應하겠다”고 밝혔다. 李 議員은 “從北魔女사냥이 벌어진다.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덧붙였다.

    “李石基가 反撥해 解體 안돼”

    북한의 통진당 장악 시도

    “主體思想을 信奉한 민혁당 再建 그룹이 京畿東部의 核心”이라고 가장 먼저 報道한 ‘신동아’ 2012年 5月號.

    김영환 氏는 1991年 5月 16日 江華島 海岸에서 北韓이 보낸 半潛水艇을 타고 北韓에 들어가 김일성을 만난 後 민혁당을 結成했다. 1997年 中央委員會(김영환 하영옥 朴○○) 票決에서 2對 1로 解體를 決定했다. 京畿南部委員長이던 李石基 議員과 首都南部事業部 李相奎 議員 等이 하영옥 氏와 함께 이에 反撥해 민혁당을 再建했다. 李石基 議員 等이 金氏를 變節者로 規定하고 민혁당 傘下 京畿南部委員會, 영남위원회를 維持한 것이다. 다음은 김영환 氏와의 一問一答.

    ▼ 민혁당을 解體하면서 왜 組織을 確實하게 整理하지 못했나.

    “解體 宣言만 했을 뿐이지…. 하영옥, 李石基가 反撥했다. 結束이 안 됐다. 그렇게 하기 어려웠다.”

    ▼ 돈과 線(線)은 어떻게 했나.

    “돈은, 1991年 김일성에게 딱 한 番 40萬 달러를 받았다. 돈은 남아 있는 게 없다고 말했다. 남은 게 있어도 넘겨줄 수 없다고도 했다. 내가 同意하지 않는 活動에 쓰일 게 분명하니 돈을 넘겨줄 수는 없었다. 先導 마찬가지다. 내가 反對하는 方向의 일에 活用될 것이 分明해 넘겨주지 않았다. 생각이 바뀐 뒤에도 1997年까지 北韓 接觸望을 維持했다. 線을 끊어버리면 北韓이 다른 組織員에게 接近할 素地가 있다고 봤다.

    說得할 수 있는 사람은 모두 轉向했고, 나머지는 說得하는 것이 短期間엔 不可能하다고 여겨 線을 完全히 끊어버린 게 1997年이다. 北韓에서 工作員을 다시 派遣해 하영옥을 만났다. 善하고 돈은 그즈음 復元됐을 것이다. 하영옥이 拘束된 後 線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른다.”

    李石基 議員이 象徵하듯 민혁당 殘存 勢力이 現在 統進黨 黨權派의 核心이다.

    一心會 判決文에는 組織員들이 2006年 서울市黨 選擧 때 민혁당 出身의 ○○○을 事務處長으로 出馬시키기로 했고 實際로 當選된 것으로 돼 있다. 統進黨 內 代表的 企劃通으로 꼽히며 19代 總選에서 共同選擧對策本部長을 맡은 이○○氏도 민혁당 釜山地域委員長 出身이다.

    國會 本會議場 催淚彈 投擲으로 議員職을 喪失한 金善東 前 議員은 一心會 組織員 崔起榮 氏가 北韓 勞動黨에 報告한 人物資料에 “事實上 京畿東部聯合 性向, 뚝심 있는 運動家로 한다면 하는 스타일, 버럭 性質과 邊方 出身(光州全南聯合)이라는 劣等意識” 等의 文句가 담겼다. 2006年 黨職 選擧 때 京畿東部와 提携해 事務總長에 當選된 것으로 알려졌다.

    京畿東部의 뿌리 格은 1991年 12月 結成된 NL界 全國聯合의 地域組織 中 하나로 京畿 城南을 基盤으로 삼은 ‘城南聯合’이다. 이들은 1990年代 初부터 城南의 靑年團體에 進出해 活動하면서 勢를 넓혔다. 1989年 組織한 ‘터사랑 靑年會’에서 李石基 議員, 金美希 議員, 우위영 前 統進黨 代辯人, 민혁당 下部組織員이던 ○○○ 氏 等이 活動했다. 前 민노당 京畿道黨委員長 정형주 氏는 ‘城南靑年會’에서 活動했다. 1995年 성남시에 분당新都市가 建設되면서 윤원석 前 ‘民衆의소리’ 代表는 ‘盆唐靑年會’를 結成했다.

    ‘신동아’는 2012年 5月號에서 “主體思想을 信奉한 민혁당 再建 그룹이 京畿東部의 核心”이라고 가장 먼저 報道했다(‘국회 進入한 마지막 主思派 實體’ 題下 記事 參照). 李正姬 代表 等 統進黨 黨權派 人士들이 京畿東部의 實體를 모른다고 主張하던 때다.

    “戰略的 地位 正當 따로 있다”

    조현연 正義黨 進步正義硏究所 所長은 2009年 내놓은 冊에 이렇게 썼다.

    “自主派 系列의 헤게모니 그룹인 從北派가 自主派 全體를 掌握하고 있다. (…) 自主派, 特히 從北派에게 민노당은 自主的 民主政府 樹立을 위한 統一戰線的 性格을 지닌 政黨으로, 그것은 ‘戰略的 地位의 正當’李 別途로 存在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統一戰線的 性格의 戰術 政黨이기에 그들에게 민노당은 掌握해야 할 對象에 不過했고 黨을 掌握하면 鐘北派 路線의 霸權主義的 貫徹이 우선시되었다. 卽 從北注意 때문에 霸權主義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들의 基本路線과 宿願事業은 2001年에 마련된 59쪽 分量의 ‘3年의 計劃! 10年의 展望!’이른바 9月 테제 文件에 잘 드러나 있다.”(조현연 ‘韓國 進步政黨 運動史’ 參照)

    조현연 所長은 민노당 政策위 副委員長, 進步新黨 政策위 議長을 지냈다. 앞서의 引用文에서 ‘戰略的 地位의 正當’은 北韓의 統一戰線 戰術을 援用하면 2012年 4月 11日 黨代表者會에서 김정일을 ‘永遠한 總祕書’로 推戴한 北韓의 勞動黨으로 解釋할 수 있다.

    한때 主體思想을 信奉한 이들이 PD系列 中心으로 創黨된 민노당에 本格的으로 入黨하기 始作한 때는 2001年 9月 忠北 槐山의 군자산에 모여 이른바 ‘9月 테제’(군자산 決議)를 決意하면서부터다. 9月 테제의 核心은 “3年 內에 廣範圍한 大衆組織化를 통해 民族民主政黨을 建設하고 10年 內에 自主的 民主政府 및 聯邦制 統一을 實現한다”는 것이다.

    盆唐(分黨)되기 前 統進黨은 민노당과 國民參與當, 進步新黨 脫黨派(새進步統合連帶)가 2011年 12月 創黨한 政黨이다. 이 같은 3者 統合構圖는 2012年 總選 통진당 比例代表 否定競選 事件을 거치면서 國民參與黨과 進步新黨 系列이 떨어져나가는 分黨 事態를 거치면서 깨졌다. 민노당 盆唐(민노당과 進步新黨으로 나뉨)과 統進黨 盆唐(통진당, 正義黨으로 나뉨)을 거치면서 從北 是非를 겪는 勢力의 影響力이 더욱 强化된 것이다. 統進黨을 나와 正義黨을 創黨한 심상정 議員, 노회찬 前 議員 等이 黨權派를 牽制할 때와는 性格이 크게 다르다. 京畿東部로 象徵되는 黨權派가 霸權을 오로지韓 가운데 李石基 議員의 RO 事件이 터진 것이다.

    김영환 氏의 主張이 事實이라면 北韓 勞動黨은 現在의 統進黨 黨權派 人士들의 選擧 資金을 支援한 셈이다. 또 一心會·王財産 搜査記錄, 北韓의 指令文, 判決文 等에 따르면 北韓은 持續的으로 進步政黨에서 ‘김정일 影島’를 實現하려 했다.

    김영환 氏는 그러나 “李相奎 議員은 민혁당 中央幹部였기에 ‘이게 민혁당 資金이다’ 이렇게는 알고 있었다”면서도 “그런데 그 돈이 北韓 資金이라는 것은 몰랐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일심회와 統進黨 黨權派가 直接으로 交集合을 이루는 地點 또한 앞서 言及한 ‘서울모임’ 外엔 찾아보기 어렵다. 민노당 黨職 選擧, 進步政黨 統合 等과 關聯해 北韓이 一心會, 王財産을 통해 圖謀한 것이 實際로 實現된 듯 보이는 몇몇 事例도 偶然의 一致이거나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格’일 수 있다.

    統進黨 違憲政黨 解散 審判 決定의 核心 爭點인 北韓과의 連繫性은 이렇듯 模糊해 보이는 側面이 있다. 또한 統進黨의 目的, 活動이 民主的 基本秩序를 具體的으로 威脅했는지도 論難의 對象이다.

    “비슷하게 主張하면 다 不穩?”

    11月 25日 違憲政黨 解散 審判 最後辯論에서 政府 側 代理人들은 “主體思想을 追從하는 민혁당 殘存 勢力이 統進黨 黨權을 掌握해 活動했다. 統進黨의 進步的 民主主義와 낮은 段階의 聯邦制 淵源이 김일성과 北韓에 있다”면서 “統進黨은 우리 社會를 植民地 反資本主義 社會라고 表現하는데 이는 北韓에서 傳播된 槪念으로 北韓의 對南革命 戰略과 差異가 없다”고 主張했다.

    統進黨 側 代理人들은 “黨 綱領의 進步的 民主主義는 北韓과 無關하다. 비슷하게 主張하는 것만으로 그 政黨을 不溫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면서 “(違憲政黨 解散 審判 請求는) 勞動者 農民 庶民의 政治的 意思表現 權利를 完全히 빼앗는 것으로 解散 請求가 받아들여지면 政府 批判을 不許하는 全體主義 社會가 될 것”이라고 辯論했다. 또한 李石基 議員에 對해서는 “黨을 代表하는 地位에 있은 적이 없는 所屬 國會議員 한 名에 不過하다”고 線을 그었다.

    ‘9人의 賢者(賢者)’라고 불리는 憲法裁判官들이 어떤 決定을 내릴지 注目된다. 統進黨이 大韓民國 憲法의 核心 價値를 否認하는 ‘組織化된 적’인지, 憲法 테두리 안에 存在하는 政黨인지 판가름 나는 瞬間이다.

    抗訴審에서 內亂煽動 嫌疑 等에 對해 有罪를 宣告받은 李石基 議員의 上告審 宣告도 1月 末께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憲裁 決定과 大法院 判決로 統進黨 中央委員會 暴力 事態(2012年 5月), 李石基 議員 內亂煽動 嫌疑 拘束(2013年 9月 5日) 等으로 나라를 混亂케 한 一連의 事件이 一段落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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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의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
    - "漢字路" 한글한자자동변환 서비스는 전통문화연구회 "울산대학교한국어처리연구실 옥철영(IT융합전공)교수팀"에서 개발한 한글한자자동변환기를 바탕하여 지속적으로 공동 연구 개발하고 있는 서비스입니다.
    - 현재 고유명사(인명, 지명등)을 비롯한 여러 변환오류가 있으며 이를 해결하고자 많은 연구 개발을 진행하고자 하고 있습니다. 이를 인지하시고 다른 곳에서 인용시 한자 변환 결과를 한번 더 검토하시고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변환오류 및 건의,문의사항은 juntong@juntong.or.kr로 메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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