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有備無患 곱씹으며 謙遜하게 하늘에 묻다|신동아

有備無患 곱씹으며 謙遜하게 하늘에 묻다

  • 박종평 | 李舜臣 硏究가

    入力 2014-12-23 13: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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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李舜臣이 壬辰倭亂 7年間 쓴 ‘亂中日記’는 兵法書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亂中日記’에서 戰爭에 이기는 法만 보려 했다. 人間 李舜臣의 苦悶, 그 時代 朝鮮의 問題는 外面했다. 筆者는 數年間 亂中日記를 통해 李舜臣과 李舜臣이 살던 時代를 理解하려 努力했다. 두려움에 占을 치는 李舜臣, 그의 戀人들, 李舜臣을 만든 部下들은 우리가 몰랐거나 外面한, 偉人傳에선 볼 수 없었던 李舜臣의 또 다른 모습이다.
    유비무환 곱씹으며 겸손하게 하늘에 묻다
    누구도 否定할 수 없는 세 가지 欲望이 있다. 食慾, 性慾, 未來欲이다. 食慾과 性慾은 누구도 避할 수 없는 本能的 欲望이다. 未來辱은 理性을 갖고 있는 人間만이 지닌 欲望이다. 未來辱이 없었다면 自然의 變化를 읽고 豫測하거나 文明도 建設할 수 없었을 것이다. 點(占)은 未來欲을 채우는 하나의 行爲이자 手段이다.

    科學的 世界觀으로 보면 점치는 行爲는 原始的이고 非文明的 行爲다. 그러나 살아 있는 모든 사람은 느끼든 못 느끼든 每 瞬間 點을 치며 산다. 意思決定 瞬間마다 隨伴되는 豫測은 點과 다를 바 없다. 自身이 判斷하는 것도 點이고, 남에게 물어보는 것도 點이며, 神에게 물어보는 것 亦是 點이다. 그래서 ‘書經(書經)’의 ‘洪範(洪範)’은 이렇게 적었다.

    “賃金이 궁금症이 있다면, 먼저 임금 自身에게 물어보고, 다음은 大臣과 百姓에게 물어보고, 그런 다음에도 疑問이 풀리지 않으면 거북占과 蓍草占에 물어보라. 세 사람이 點을 쳤는데 두 사람의 結果가 같다면 그 두 사람의 結果를 따르라.”

    점친 記錄 17回

    ‘太宗實錄’에는 點을 쳐 首都를 定하는 場面이 나온다. 太宗은 高麗의 首都였던 開城에서 卽位하면서 漢陽에 朝鮮의 首都를 建設하려 했다. 그러나 昌德宮을 建設할 즈음, 水災와 가뭄이 연이으며 都邑 建設 否定論이 일어났다.



    그때 太宗은 高麗 太祖 王建이 開城에 都邑을 定할 때 擲錢點(擲錢占·돈을 던져 吉凶을 把握하는 點)을 쳐 그 結果에 따랐다며 漢陽·舞樂·開城 세 곳을 對象으로 擲錢點을 쳐 決定하라고 命했다. 結果는 漢陽은 2길(吉) 1凶(凶), 個性과 舞樂은 2凶 1길로 나타났다. 그에 따라 太宗은 漢陽을 都邑으로 確定짓고 昌德宮을 創建했다.

    李舜臣의 後援者이자 領議政이었던 류성룡(1542~1607)도 點을 자주 쳤다. 그가 남긴 ‘西厓集’에는 點을 친 事例가 나온다.

    臨津(1592年) 6月. 나는 宣祖를 따라 平壤에 避難해 있었다. 어머님은 倭敵을 被害 東쪽으로 가셨다고 하는데 길이 끊겨 消息을 듣지 못했다. 어머님이 걱정되어 占을 쳐 곤지乾卦를 얻었다. ‘楚氏歷臨’의 店肆를 보니, “아이가 활을 쏘니 어디로 떨어질지 모른다. 疑心을 풀려고 點을 쳐도 아무도 避한 곳을 알 수 없다. 나라가 平安하니 머물러 있는 것이 이롭다. 軍士와 盜賊이 이르지 아니하니 百姓이 시끄러움이 없다(?或射御, 不知所定. 問于蓍龜, 孰可避之. 國安土樂. 宜利止居. 兵寇不作, 民無騷憂)”라고 했다. 後에 어머님의 消息을 들었는데, 兄님이 어머님을 모시고 가평현에 있는 절인 操縱士로 避難했다고 한다. 倭敵이 그 周邊에서 四方으로 나왔지만 山이 깊어 그곳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가 卦를 얻은 날이고, 바로 어머님이 操縱士에 있을 때였다.

    李舜臣 市場(諡狀·임금에게 諡號를 建議할 때 그가 살았을 때의 일을 적어 올리는 글)을 쓴 택당 移植(1584~1647)도 點을 아주 잘 쳤다. “공(移植)은 性質이 安定되어 마음에 妄想이 없었으므로 어른들이 擲錢點을 시켜 壬辰倭亂 時 避難할 곳을 물으면 그 吉凶을 맞히지 못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李舜臣보다 한 世代 위의 人物로 ‘宣祖實錄’의 資料로 活用된 ‘眉巖日記’를 남긴 미암 유희춘(1513~1577)도 點을 자주 쳤다.

    戰爭터에서 豫測할 수 없는 運命의 수레를 돌리며 살았던 人間 李舜臣도 例外가 아니었다. ‘亂中日記’에는 李舜臣이 스스로 點을 친 記錄, 다른 사람이 點을 친 內容이 總 17番 登場한다. 李舜臣 自身이 直接 隻字點(擲字占)을 친 것이 14回, 다른 사람이 친 것이 3回다. 點을 친 時期는 日記가 相對的으로 많이 남은 1594年, 1596年, 1597年이다. 1594年은 3日間 隻字點 10回, 1596年은 2日間 隻字點 4回, 1597年은 3日間 秋收(推數) 2回와 主役店 1回의 記錄이 나온다. 1597年의 點들은 李舜臣이 아니라 盲人 임춘경과 신홍수가 各各 秋收와 主役點을 친 境遇다.

    아들, 류성룡, 비 걱정

    유비무환 곱씹으며 겸손하게 하늘에 묻다

    斥邪點(擲柶占·윷占)이 들어 있는 ‘京都雜志’ 表紙(柳得恭 지음, 韓國學中央硏究院 所長)와 隻字點 (筆者 所長,‘小康隻字點’).

    李舜臣이 直接 친 隻字點은 아내나 아들이 危篤하다는 消息을 들었을 때, 或은 戰鬪에 對한 豫測과 敵의 動向 豫測, 領議政 류성룡에 對한 걱정이 主要 主題였다. 戰爭을 비롯한 갖은 시름 속에서 不確實性을 克服하고자 했던 것이다. 善한 사람, 하늘을 감동시키고자 努力한 李舜臣이기 때문인지 그가 친 占의 結果는 언제나 正確하게 들어맞았다.

    오늘날 一部 사람들은 그가 친 隻字點을 ‘李忠武公全書’ 編纂에도 參與했던 유득공( 1748~1807)의 ‘京都雜志(京都雜誌)’에 나오는 斥邪點, 卽 윷을 利用한 點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亂中日記’에는 윷놀이 記錄이 全혀 나오지 않고, 게다가 그 時期에 윷으로 ‘周易’을 活用한 作卦點을 친 記錄이 없는 것을 보면, 윷占이 아니다. 李舜臣이 ‘亂中日記’에 記錄해놓은 種程度(從政圖) 놀이가 5回 登場하는 것으로 볼 때 種程度 놀이 道具인 輪木(輪木)을 活用한 點으로 보인다. 卽 隻字點은 尹목을 던져(擲) 얻어낸 數字를 隻字點을 解說하는 텍스트, 例를 들면 ‘土亭祕訣’과 같은 冊에서 찾아 읽는 方式이다.

    戰場에 있는 軍人이며 리더였던 李舜臣도 한 家族의 家長이다. 스스로가 選擇한 業에 最善을 다하는 삶을 살았던 李舜臣도 그 業으로 인해 家長의 役割을 다할 수 없는 苦惱로 시름에 잠겼다. 特히 自身이 돌볼 수 없는 狀態, 함께 곁에 머물지 못하는 狀態에서 아내와 子息들의 疾病 消息을 듣고, 占을 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594年 7月 13日. 비가 繼續 내렸다. 홀로 앉아 아들 面(?)의 病勢가 어떤지 隻字點(擲字占)을 쳤다. 結果는 “임금을 만난 것과 같다(如見君王)”는 卦였다. 아주 좋았다. 다시 쳐보니, “밤에 燈불을 얻은 것과 같다(如夜得燈)”였다. 두 卦가 다 좋았다. 마음이 조금 놓였다. 또 流 政丞(領議政 류성룡)에 對해 點을 쳤다. 結果는 “바다에서 배를 얻은 것과 같다(如海得船)”는 卦였다. 다시 占쳐보니, “疑心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如疑得喜)”는 卦였다. 아주 좋았다. 아주 좋았다. 저녁 내내 비가 내렸다. 홀로 앉아 있으니 마음을 가눌 수 없었다. … 비가 올지 갤地 점쳤다. 結果는 “뱀이 毒을 뿜어내는 것과 같다(如蛇吐毒)”는 卦가 나왔다. 앞으로 큰 비가 내릴 것이다. 農事가 아주 걱정된다. 밤에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이 日記는 세 가지 理由로 點을 친 記錄이다. 셋째 아들 麵의 危篤, 領議政 류성룡 걱정, 벼가 익는 時期에 連日 퍼붓는 비에 對한 걱정 때문이었다. 아들 面의 病 消息을 들은 뒤 李舜臣은 “애타고 답답하다”(6월 15日), “매우 걱정스럽다”(6월 17日), “病勢가 다시 심해지고 또 피를 吐하는 症勢까지 있다”(7월 10日), “病이 어떠한지 궁금했다”(7월 11日)고 적었다. 점치기 前날인 7月 12日의 記錄은 이러하다.

    “저녁에 探候線이 들어왔다. 어머니께서 平安하신 것은 仔細히 알았는데, 面(?)의 病이 重하다고 했다. 아주 애가 타지만 어찌하랴. 領議政 류성룡이 죽었다는 訃告가 巡邊使가 있는 곳에 왔다고 한다. 이는 미워하는 者들이 말을 지어 誹謗하는 것이다. 憤怒가 치밀었다. 이날 어두울 무렵(昏)에는 마음이 아주 어지러웠다. 홀로 빈 東軒에 앉아있으니, 마음을 걷잡을 수 없었다. 온갖 걱정으로 밤이 깊도록 잠을 잘 수 없었다. 流 政丞이 萬若 일찍 죽었다면 나랏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아들 面과 ‘後援者’ 류성룡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와 같은 걱정 속에서 李舜臣이 기댈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늘뿐이었을 것이다.

    李舜臣의 占卦는 모두 肯定的이었다. 日記와 歷史的 事實로 確認해보면, 實際로 아들 面은 그 後 病에서 回復했고, 류성룡度 所聞과 달리 큰 問題없이 自身의 자리를 지켰다. 날씨는 그가 다음 날인 14日 日記에 “비가 繼續 내렸다. 어제 저녁부터 빗발이 三代같이 내려 지붕이 새어 마른 곳이 없다. 艱辛히 밤을 보냈다. 占卦를 얻은 그대로였다. 아주 至極히 絶妙했다”고 쓴 것처럼 正確히 맞았다.

    유비무환 곱씹으며 겸손하게 하늘에 묻다
    아내 거의 못 만나

    1594年 9月 1日. 맑았다.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잠들지 못했다. 촛불을 밝힌 채 뒤척였다. 이른 아침에 손을 씻고 고요히 앉아 아내의 病勢를 점쳤다. “중이 還屬하는 것과 같다(如僧還俗)”는 占卦를 얻었다. 다시 쳤더니 “疑心하다가 기쁨을 얻은 것과 같다(如疑得喜)”는 卦가 나왔다. 아주 좋았다. 아주 좋았다. 또한 病勢가 좋아질지 어떨지에 對한 消息이 올지를 점쳤다. “귀양 땅에서 親戚을 만난 것과 같다(如謫見親)”는 卦가 나왔다. 이 또한 오늘 안에 좋은 消息을 들을 徵兆였다.

    한 女人의 男便 李舜臣이 點을 친 日記다. 8月 27日 日記에는 “아침에 아들 蔚(蔚)李 보낸 便紙를 보았더니 아내의 病이 危篤하다고 했다. 그래서 아들 回(?)를 내보냈다”고 한다. “이날 아침 探候線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病이 아주 危篤하다고 했다. 이미 生死가 決定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랏일이 이러니 다른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나 아들 셋, 딸 하나가 將次 어떻게 살 수 있을까.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다… 밤 9時부터 마음이 어지러워 잠을 들 수 없었다.”8월 30日의 日記다.

    當時 李舜臣의 夫人 尙州 方氏는 牙山에 있었다. 李舜臣과는 戰爭 中 거의 만나지 못했던 듯하다. 李舜臣은 南쪽 바닷가에서 日本軍과 戰鬪를 하거나 對峙하며 軍士와 百姓들을 먹여 살리기 바빴다. 方氏는 男便 李舜臣을 나라와 百姓에게 빼앗겼고, 李舜臣은 사랑하는 아내 代身 軍事와 百姓을 사랑하며 지냈다.

    그런 中에 들려온 아내의 病 消息은 李舜臣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未安한 마음과 죄스러운 마음이 가득했다.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自身을 탓하며 李舜臣은 하늘에 기댔다. 李舜臣의 至極 精誠이 통했는지 占卦는 좋았다. 點을 친 다음 날인 9月 2日 日記에는 “저녁에 探候線이 들어왔다. 아내의 病이 조금 나아졌는데, 元氣(元氣)가 아주 弱하다고 했다. 매우 걱정되었다”며 占卦처럼 아내가 回復되고 있는 事實이 나온다.

    不殆(不殆)의 長壽, 不敗의 長壽 李舜臣이 될 수 있었던 理由는 많다. 그 中 代表的인 것의 하나가 有備無患의 行動方式이다. 些少한 徵候까지 細心하게 미리 살피고, 徹底히 警戒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李舜臣은 장수로서 戰鬪를 對備하기 위해 占을 치기도 했다.

    1594年 9月 28日. 흐렸다. 새벽에 촛불을 밝히고 홀로 앉아 倭敵을 討伐할 일에 對한 吉凶을 점쳤다. 첫 番째 點에서는 “활이 화살을 얻은 것과 같다(如弓得箭)”였다. 다시 쳤더니, “山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如山不動)”였다. 바람이 順하지 않았다. 흉도(胸島) 안 바다에 陣을 치고 잤다.

    1596年 1月 10日. 맑았으나 西風이 크게 불었다. 이른 아침에 적이 다시 나올지 어떨지 점쳤다.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과 같다(如車無輪)”가 나왔다. 다시 占을 쳤더니, “임금을 만난 것과 같다(如見君王)”는 卦가 나왔다. 모두 吉한 卦라고 기뻐했다.

    戰鬪 豫測하는 點

    이 두 事例는 戰鬪를 앞두었거나 敵의 動向을 把握하려 할 때 친 點이다. 1594年 9月 28日의 點은 都元帥 權慄과 都體察使 윤두수가 主導해 陸軍과 水軍이 合同으로 展開할 장문포 戰鬪 前날 친 것이다. 李舜臣은 戰鬪를 앞둔 狀態에서 點을 통해 戰鬪를 豫測하고, 準備 狀態나 豫想할 수 없는 問題點에 對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占을 쳤다.

    神奇한 것은 이날 첫 番째 點射다. ‘활이 화살을 얻은 것과 같다(如弓得箭)’는 戰鬪가 聯想된다. 李舜臣이 친 隻字點 텍스트의 店肆는 모두 ‘周易’의 64卦처럼 64個다. 그런데 이 店肆처럼 戰鬪를 直接 聯想케 하는 店肆는 ‘罪가 있는데 功을 세우는 것과 같다(如罪成功)’ ‘활은 있지만 화살이 없는 것과 같다(如弓無箭)’ ‘虎狼이가 소와 싸우는 것과 같다(如虎鬪牛)’ ‘활에 활시위가 없는 것과 같다(如弓無弦)’ 程度다. 그런데 그中 하나인 女弓得展(如弓得箭) 店肆가 나온 것이다. 그 意味를 살펴보면, 활에 화살까지 더해졌다는 것은 徹底한 準備를 뜻한다. 22日 以後의 日記를 보아도 水陸合同作戰은 徹底하게 準備된 狀態다. 壬辰亂의 英雄인 權慄·李舜臣·元均은 勿論 義兵 英雄 郭再祐·김덕령까지 參戰했기 때문이다.

    店肆는 戰鬪 準備가 完全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李舜臣은 戰鬪 結果까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點을 쳤다. ‘山이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如山不動)’는 店肆가 나왔다. 직접的인 解釋이 어렵기에 聯想을 해보면 成果가 없을 듯한 意味로 解釋된다. 戰鬪 結果를 記錄한 日記인 9月 29日부터 10月 8日까지 日記를 보면, 日本軍은 ‘山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山속에 숨어 戰鬪를 回避했다. 曖昧模糊하긴 하지만 店肆가 的中한 것이다.

    1596年 1月 10日의 隻字點은 1月 7日 日本軍 5名이 降伏해 오고, 그들로부터 日本軍의 動向을 確認한 結果에 따른 點이라고 推定된다. 店肆는 ‘수레에 바퀴가 없는 것과 같다(如車無輪)’였다. 바퀴 없는 수레는 움직일 수 없다. 店肆는 日本軍이 움직이지 않을 것을 聯想케 해준다. 李舜臣이 다시 點을 친 結果는 1594年 7月 13日, 아들 麵의 病을 걱정하면서 쳤을 때 얻은 點死因 ‘임금을 만난 것과 같다(如見君王)’와 같다. 좋은 店肆였다. 그 後의 日記를 보아도 日本軍은 朝鮮 水軍을 攻擊하지 않았다.

    李舜臣이 새벽에 洗手를 하고 端正히 앉아 占을 치는 모습은 富貴榮華를 꿈꾼 그 時代의 다른 兩班이나, 오늘날의 世俗人과는 큰 差異가 있다. 그는 出世와 橫財를 꿈꾸지 않았다.

    李舜臣의 點에는 家族을 扶養하고 책임져야 할 家長이 自身에게 주어진 召命에 充實하고자 不可避하게 家長의 責任을 다하지 못하는 것에 對한 自責感이 담겼다. 또 그 어떤 狀況에서나 도망치지 않으며 가장 먼저, 맨 앞에서 熾烈하게 싸운 리더의 모습이 投影됐다. 部下에게 때로는 嚴하고, 때로는 仔詳했던 最高 指導者였지만, 自身의 자리에 돌아와 홀로 있을 때는 孤獨에 시름에 잠기고, 눈물 흘리며 밤을 지새우는 平凡한 한 人間의 모습이 드러나는 地點이기도 하다.

    每 瞬間을 熾烈하게

    그 무엇보다도 그는 點(占)까지도 積極 活用해 豫測 不可能한 未來, 不確實性을 克服하고자 했던, 眞正한 有備無患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 때문인지 李舜臣의 點은 100% 的中했다. 게다가 그의 點은 언제나 肯定的 結果에 이르렀다.

    이는 ‘至誠이면 感天’이라는 말의 實證이기도 하다. 心理學者 카를 융이 ‘周易’을 갖고 精誠을 다해 點을 친 뒤 얻어낸 答이 自身을 恒常 놀라게 만들었고 洞察力을 주었다는 것과 같다. 나폴레옹도 點을 活用해 軍士들의 士氣를 올리기도 했고, 李舜臣처럼 戰鬪를 앞두고 成敗와 進退를 豫測하기도 했다.

    李舜臣, 융, 나폴레옹은 모두 點을 出世와 幸運을 얻기 위한 手段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有備無患을 위해 스스로의 想像力을 키우고 最善을 擇할 수 있는 手段으로 點을 活用했다. 보기에 따라 無視해도 될 些少한 徵候조차 날카롭게 觀察하고 이를 活用하려는 데서 每 瞬間을 熾烈하게 사는 至毒한 努力家의 모습이 보인다.

    유비무환 곱씹으며 겸손하게 하늘에 묻다
    박종평

    서강대 政外科 卒業, 고려대 碩士(政治學)

    著書: ‘흔들리는 마흔, 李舜臣을 만나다’‘그는 어떻게 李舜臣이 되었나’ ‘李舜臣, 꿈속을 걸어 나오다’‘이순신 이기는 原則’ 等


    占을 치는 이들의 行爲는 結局 自身에게 묻고, 다른 이에게 묻고, 謙遜하게 하늘에 물으며 하늘의 뜻을 따라 살려는 行動이다. 李舜臣은 그 點에서 나폴레옹이나 카를 융과도 다르다. 조금도 私心 없이 戰爭터에서 家族과 나라 걱정에 點을 치고, 그런 自身의 所望이 이뤄지기를 懇切히 熱望한 人物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點은 受信(修身)과 謙遜을 위한 手段이기도 했다. 日記를 쓰면서 하루하루 自身을 돌아보고 反省하는 人物, 저 높은 하늘에 限없이 謙遜한 人物임을 그의 點이 證明한다.

    李舜臣의 點은 私利私慾을 위한 低級한 點이 아니라, 아버지와 男便의 點, 하늘을 恭敬하며 마음을 닦던 선비의 點, 國家와 百姓의 生存을 책임진 將帥의 點이었다. 李舜臣처럼 그런 마음과 姿勢로 點을 친다면 그 어떤 點이라도 確實하게 肯定的인 應答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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