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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剩餘의 都市|新東亞

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剩餘의 都市

京 베이징을 바꾼 者가 天下를 바꾼다

  • 글·寫眞 김용한 | 中國硏究가 yonghankim789@gmail.com

    入力 2014-12-19 13: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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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베이징과 상하이, 어디가 더 좋아?”

    베이징이 故鄕인 親舊 제임스가 물었다. 中國에선 베이징 市民인 것만으로도 相當한 特權이다. 住宅, 敎育, 就業 等의 形便을 考慮하면 베이징 虎口(戶口)의 價値가 100萬 위안(藥 1億7000萬 원)에 達한다고 한다. 게다가 제임스는 英國 留學生이니 相當한 高位層 自制일 可能性도 높다. 後날 제9세대 共産黨 指導者가 될지도 모를 前途有望한 中國 靑年이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水準의 質問을 하다니.

    “둘 다 各自의 長點이 있지만 난 베이징이 더 좋더라. 베이징은 由緖 깊은 都市여서 가는 곳마다 歷史와 固有의 文化가 있잖아. 상하이는 物質的으로 풍요롭기만 할 뿐이고.”

    제임스는 洽足한 微笑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은 質問을 했다. 그러자,

    “只今 나한테 어디가 더 좋으냐고 묻는 거니?”



    아아, 그 倨慢한 웃음을 본 瞬間 切感했다. 이 녀석, 뼛속까지 베이징 사람이구나. 天下의 中心이자 世上에서 가장 좋은 곳이 베이징이라고 믿어 疑心치 않는구나. 萬若 내가 상하이가 더 좋다고 했다면, 적어도 3泊4日은 ‘精神敎育’을 받을 뻔했다. “그 따위 淺薄한 都市가 뭐가 좋다고? 悠久한 歷史와 빛나는 文化를 가진 中國의 中心, 베이징의 眞價를 모른단 말이야?”라는 핀잔을 들어가며.

    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慶山에서 굽어본 紫禁城의 前景.

    베이징의 略稱은 ‘서울 警(京)’ 자다. 京은 元來 沈水되지 않도록 人工으로 만든 언덕을 뜻한다. 意圖的으로 만든 터전 위에 都市가 誕生했고, 政治의 中心 宮闕이 세워졌다. 이제 京은 都市 中에서도 最高의 都市, 首都(首都)를 뜻한다. 베이징을 京으로 略稱한 데서 ‘베이징은 首都다. 더는 말이 必要 없다’는, 베이징 사람들의 自負心이 묻어난다.

    京이 말해주듯 베이징은 人工的으로 建設된 都市다. 都市 中의 都市인 首都이며, 中國의 中心이다.

    “이게 佛像이야, 마징가 제트야?”

    옹화궁 萬復刻(萬福閣)의 彌勒佛像은 너무나 컸다. 佛像의 키가 18m. 지나치게 크다보니 恰似 마징가 제트처럼 보였고, 萬伏角은 마징가 제트 格納庫 같았다.

    그러나 이건 藥果였다. 西太后의 別莊이었던 頥和園을 찾았다. 萬壽山 위의 불향각(佛香閣)에서 드넓은 湖水를 바라보니 절로 浩然之氣가 생기는 듯했다. 그런데 이 山과 湖水는 모두 假짜다. 純全히 人間의 손으로 平地를 파서 汝矣島公園 面積의 10倍(2.2㎢)에 達하는 곤명호를 만들었다. 파낸 흙은 쌓아올리니 높이 60m의 萬壽山이 됐다.

    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옹화궁 萬福角의 彌勒佛. 높이가 18m에 達한다.

    大陸의 氣像은 萬里長城에서 絶頂을 이룬다. 끝없이 이어지는 山줄기 위로 萬里長城이 쭉쭉 뻗어나간다. 巨大한 龍이 山 위에서 춤추는 듯하다. 그런데 이 높은 山으로 돌을 날라 와 하나하나 쌓아올렸다니! 내가 萬里長城의 人夫가 아님을 天地神明께 感謝드렸다.

    흔히 中國을 ‘地帶물朴(地大物博)의 나라’라고 한다. 땅은 넓고 物資는 豐富하다. 그러나 더 重要한 事實은 ‘인다(人多)’,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中國의 底力은 바로 사람, 많고도 많은 사람에서 나온다.

    부수고 새로 만든다

    베이징은 ‘사람의 힘’을 如實히 보여주는 人工 都市다. 燕巖 朴趾源은 “(베이징) 都城이 바로 서자 天下가 바로잡힘을 볼 수 있었다”고 했다. 이는 너스레가 아니다. 매우 意味深長한 말이다. 儒學者 朴趾源은 베이징에서 儒敎의 秩序를 읽어냈다. 孔子는 平生 主禮(周禮)의 回復을 念願했고, 儒敎는 예(禮)가 實現되는 社會를 理想으로 삼았다.

    周나라 禮法인 主禮는 一種의 國政管理 매뉴얼이다. 6大 部處 傘下 360個 官廳의 人員과 職務를 明示했다. 오늘날의 企劃財政部, 國土交通部 等에 該當하는 各種 部處를 나누고 國家의 豫算 運用, 産業·物流 等 國政 全般을 體系的으로 論한다. 또한 主禮는 國家 運營과 인프라 構築을 强調한다. 主禮 考工記(考工記)는 都城의 設計를 說明한다. 城壁을 둘러 誠意 防衛에 萬全을 期하되, 원활한 物流 管理에도 蹉跌이 없도록 東西南北 네 方向마다 세 個의 城門을 뚫고 各 門을 넓은 길로 連結했다. 都城 中心에는 宗廟社稷, 市場, 調整을 두었다.

    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皇帝의 庭園이었던 北海公園은 오늘날 베이징 사람들의 쉼터가 됐다(왼쪽). 베이징 近郊에 萬里長城이 있다는 事實은 이 都市가 北方 邊境의 軍事都市에서 政治의 中心地로 變해왔음을 나타낸다.

    主禮 考工記의 法度에 맞게 都市를 建設하니 禮儀가 確立되고, 禮儀가 確立되니 秩序가 바로잡히고, 秩序가 바로잡히니 天下가 바로잡힌다…. 計劃都市 베이징이 具現한 儒敎 秩序에 燕巖 朴趾源은 感歎했으리라.

    베이징은 이처럼 人工(人工), 卽 사람이 만들었으며, 人爲的인 法度에 따라 움직이는 都市다. 하늘이 내린 게 아니라 사람이 만든 것은 얼마든지 부수고 새로 만들 수 있다. 사람을 움직이는 힘, 바로 皇帝의 意志만 있다면 말이다. 於此彼 사람은 넘쳐나니까.

    몽골族의 元나라는 金나라를 征服한 後 베이징을 사흘 동안 불태우고 쿠빌라이의 野心 찬 企劃 아래 새로운 베이징을 建設했다. 그 뒤 明나라는 원臺 城壁의 基礎 위에 明나라의 城壁을 쌓고 元나라의 연춘각이 있던 자리에 人工 土産 ‘鎭山(鎭山)’을 쌓았다. ‘累를 陳(鎭)’은 몽골族과 元나라의 기운을 누른다는 뜻이다. 한便 中華人民共和國은 明나라 때 建設된 紫禁城만 남기고 베이징誠意 內省과 外城을 모조리 破壞했다.

    現在 內省 자리엔 地下鐵 2號線, 外姓 자리엔 베이징市 이환道路가 들어섰다. 觀光客은 紫禁城만 보고도 그 엄청난 規模에 感歎하는데, 只今 內省과 外姓까지 存在했다면 얼마나 놀랄까.

    그러나 中國人은 스스로 世界 最高의 文化遺産을 破壞했다. 中國人에게 破壞와 再建設은 舊時代를 淸算하고 새 時代를 여는 歷史的 傳統이다. 베이징誠意 保存 與否를 둘러싸고 論爭이 불붙자 마오쩌둥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過去를 輕視하고 未來를 盲信한다’라고 批判하는데, 설마 纏足을 輕視하고 辮髮을 輕視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過去를 輕視하고 未來를 믿지 않는다면 무슨 希望이 있겠는가?”

    過激한 마오쩌둥이 아니라 穩健派 指導者라고 해도 別로 다르지 않다. ‘永遠한 人民의 總理’라 稱頌받는 저우언라이는 베이징 宮城 保護論者인 량쓰청과 두 時間 對話를 나눴다. 량쓰청은 노을 지는 牌樓(牌樓)가 먼 山과 어우러지는 風景을 詩로 읊었다. 그에 對해 저우언라이는 考試의 한 句節을 빌려 和答했다. “노을은 더없이 좋지만 黃昏에 가깝구나.”

    이 말은 當時 共産黨의 時代精神을 보여준다. 中華人民共和國은 勞動者와 農民을 위한 社會主義 國家를 志向했다. 따라서 首都 베이징은 皇帝들의 絶對 權力이 아닌, 社會主義의 理想을 表現해야 했다. 더욱이 베이징性 保存 論爭이 共産黨 贊反論으로 變하자 더 以上 合理的인 討論이 어려워졌다. 結局 베이징은 모스크바 方式을 따르기로 한다.

    이처럼 베이징은 中國의 首都가 된 以來 時代가 變할 때마다 變身을 反復했다. 베이징의 새 主人은 旣存 베이징을 破壞하고 再建해 새로운 世上이 始作됐음을 天下에 알렸다. 베이징을 바꾸는 者가 天下를 바꾼다.

    40%가 입과 붓으로 먹고살아

    都市는 剩餘의 産物이다. 스스로 生産하지 않는다. 다른 地域으로부터 먹을거리 等 온갖 物資가 流入되지 않는다면 都市는 죽어버린다. 그러나 政治·經濟·社會·文化를 掌握한 都市人들은 거꾸로 都市 밖 世上이 自身들을 위해 存在한다고 생각한다.

    베이징은 都市의 剩餘的 特性이 極大化한 곳이다. 이 千字(天子)의 都市엔 皇族, 財力家, 官僚, 선비가 모여들었다. 淸나라 末期인 1908年 베이징 人口 70萬 名 中 28萬 名이 直接 生産 活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人口의 40%가 公文書를 꾸미고 諫言하는 等 입과 붓으로 먹고산 셈이다.

    베이징은 生産하지 않으나 君臨한다. 一例로 料理를 보자. 베이징만의 料理나 特産物은 없다. 하지만 全國 各地의 料理를 죄다 불러들여 맛이 있네, 없네 品評하며 料理를 발전시켜왔다. 八字 좋고 입맛 까다로운 나리가 많아서 어지간해서는 合格하기 어려웠다. 그 結果 最高만 살아남았다. 그 有名한 ‘베이징德’도 산둥省의 오리 料理를 몽골族 宮中 料理師 흘思慧(忽思慧)가 발전시킨 것이다.

    要컨대 베이징은 스스로 땀 흘려 일하지 않으면서 生色은 다 내고 特惠는 다 누리며 好衣好食하는 大監 같은 都市다. 好意와 特惠가 繼續되면 當然한 權利인 줄 아는 法. 天下가 있기에 베이징이 있는 것이지만, 800餘 年 동안 이어져온 特惠는 베이징이 天下의 中心이라는 歪曲된 認識을 낳았다.

    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베이징 뒷골목 後퉁의 人力車꾼과 그의 딸. 베이징의 明洞 格인 왕푸징의 布帳馬車 거리에는 全蠍, 海馬 꼬치 等 온갖 料理를 판다. 베이징의 이태원이라 할 싼리툰(三里屯)의 살사 바 公演 모습(왼쪽부터).



    ‘中(中)’을 崇尙하는 中國人에게 ‘天下의 中心’, 베이징은 가장 높고 貴한 存在다. 天下는 마땅히 베이징을 따라야 한다. 베이징語는 中國의 標準語 普通火(普通話)가 됐고, 베이징의 放送局 베이징뎬스타이(北京電視臺)는 中國의 中央放送 CCTV(China Central Television)가 됐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다. 베이징은 사실 오랫동안 邊方이었다. 베이징은 베이징原人(北京原人)의 痕跡이 發見될 만큼 일찍부터 人類가 살던 곳이지만, 歷史에 큰 足跡을 남기진 못했다. 베이징은 周나라 諸侯國인 燕나라의 首都 燕京(燕京)이었고, 北方遊牧民族 요·금나라의 宋나라 攻略基地였다. 卽 周나라부터 요·금나라까지 2000餘 年 동안 地方 政權의 首都에 不過했다.

    칭기즈 칸의 元나라가 아시아 一帶를 席卷한 뒤에야 베이징은 帝國의 首都가 됐다. 그러다 明 太祖 朱元璋이 元나라를 물리치고 난징(南京)에 都邑을 定하자 베이징 時代는 끝난 듯했다. 하지만 朱元璋이 죽고 난 後 조카의 皇帝 자리를 빼앗은 永樂帝가 自身의 根據地인 베이징으로 都邑을 옮겼다. 이로써 베이징은 다시 中心을 차지했다. 한족 文化를 尊重한 女眞族의 淸나라는 明나라의 베이징과 紫禁城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歲月이 흐르고 淸나라가 西歐列强과 民衆의 손아래 무너졌다. 그 渦中에 野心家 위안스카이는 中華帝國을 새롭게 세워 스스로 皇帝가 됐고 베이징을 首都로 삼았지만, 장제스에게 討伐된다. 장제스의 國民黨은 난징을 中華民國의 首都로 定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이끈 中國 共産黨은 國民黨을 물리치고 首都를 다시 베이징으로 돌린다.

    이처럼 中國 歷史를 되짚어보면 베이징은 正統性을 가진 修道라고 하기엔 어딘가 찜찜하다. 베이징은 邊方 都市였고, 異民族의 經營 基地였으며, 簒奪의 根據地였다. 그러나 이제 中國 政府와 歷史學界는 ‘칭기즈 칸도 中國人’이라며 元나라를 中國 안으로 끌어들인다. 永樂帝는 카리스마와 能力을 兼備한 明나라 最高의 君主로 손꼽힌다. 마오쩌둥은 現代 中國의 아버지다. 오늘날 베이징은 ‘天下의 中心’과 同義語가 됐다. 時間은 새것을 오래된 것으로 만들고 强力한 權力은 假짜를 眞짜로 만든다. 베이징의 아이러니를 보며 사람과 時間의 힘을 느낀다.

    5月 35日

    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茶山쯔(大山子) 798 藝術區에서 만난, 해태를 타고 天下를 號令하는 人民解放軍 彫刻像. 政治의 中心地답게 藝術도 强한 政治性을 띤다.

    “손님, 이 신발을 사십시오. 신발의 壽命이 先生님의 壽命과 같을 겁니다.”

    “제가 그렇게 빨리 죽을 거라고요?!”

    베이징의 신발가게에서 主人과 손님이 나눈 對話다. 말로 먹고사는 사람이 많던 베이징답게, 베이징 사람들은 言辯이 뛰어나고 유머感覺이 있다. 그리고 政治에 關心이 매우 많다. 政治의 中心地로서 온갖 政治談論을 生産하던 곳답게, 베이징 사람들은 男女老少를 不問하고 政治 이야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政治를 자유롭게 批判할 수는 없다. 言論의 自由가 있지만 半쪽에 不過하다. 黨과 國家, 政府機關 等에 對해 根本的인 批判을 할 순 없다. 이런 狀況에 對해 小說家 위화는 獨逸 記者에게 才致 있게 말했다.

    “어느 國家든 間에 言論의 自由는 相對的인 것입니다. 獨逸에서는 國民이 總理를 辱할 수 있지만 이웃 사람을 辱해선 안 될 겁니다. 中國에서는 總理를 辱해선 안 되지만 이웃은 辱할 수 있지요.”

    批判조차 자유롭지 않은데, 集團行動이 容認될 理 없다. 1989年 6月 4日, 톈안먼廣場에 學生을 비롯한 수많은 人民이 모였다. 韓國의 1987年 6月 抗爭을 모델 삼아 中國의 民主化를 促求했지만, 덩샤오핑은 탱크까지 動員하며 示威隊를 强勁하게 鎭壓했다. 오늘날까지 中國에선 톈안먼 事件을 자유롭게 言及할 수 없다. 中國 政府가 ‘6月 4日’을 인터넷에 올릴 수 없게 막자 中國 네티즌은 ‘5月 35日’이라는 말을 만들었다. 위화는 “우리에겐 6月 4日의 自由는 없고 5月 35日의 自由만 있다”고 말한다.

    인터넷은 檢閱받고, 톈안먼廣場에는 자유롭게 모일 수 없다. 中國 人民에게 唯一하게 許容된 길은 ‘上팡(上訪)’뿐이다. 베이징의 中央 官僚에게 自身의 抑鬱함을 아뢰고 政府에 善處해달라고 하소연하는 것으로, 朝鮮 時代의 申聞鼓와 類似하다. 베이징 南驛 周邊에는 실낱같은 期待를 걸고 상팡하러 온 사람이 넘쳐나고, 상팡인을 위한 쪽房村이 門前成市를 이룬다. 賃金滯拂, 公安非理, 土地補償, 醫療事故 等 事緣은 各樣各色이다.

    하지만 中國이 어떤 나라인가. ‘위에 政策이 있다면, 아래에는 對策이 있다(上有政策 下有對策)’는 나라다. 地方公務員들은 賞팡을 沮止하는 第팡(截訪) 組織을 만든다. 上팡을 가는 사람을 곧장 쫓아가 갖은 懷柔와 脅迫을 해서 賞팡을 막는다. 市 單位 以上 地方政府는 第팡을 위해 베이징 出張所를 恒常 잡아둔다고 한다.

    設令 上팡에 成功했다 해도 상팡인은 맘 便히 살 수 없다. 故鄕 公務員들이 事事件件 트집 잡고, 甚至於는 賂物收受 等 抑鬱한 陋名을 씌워 가둬버리기 때문이다. 唯一하게 許容된 言路人 상팡마저 挫折되면서 中國 네티즌은 “얼빠진 新聞들이 ‘上팡이 줄었다’고 써대는데, 事實은 이런 式으로 賞팡 自體를 막는 것”이라며 鬱憤을 吐한다.

    13億 個의 꿈

    中國의 政治는 如前히 共産黨의 政治다. 그래서 ‘베이징’의 또 다른 同義語는 ‘中國 共産黨’이다. 中華‘人民’共和國에서 眞正한 人民의 政治는 언제쯤 實現될 수 있을까. 人類學者 김광억 서울대 名譽敎授는 2008年 베이징 올림픽 때 베이징 뒷골목 ‘後퉁(胡同)’을 찾아갔다. 中國 政府는 世界에 초라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고 後퉁에 담牆을 쳐놨다. 담牆에는 ‘하나의 世界, 하나의 꿈’이라는, 올림픽 標語가 붙어있었다. 後퉁에 살던 허난省 出身 農民功은 그에 對해 “저건 후진타오의 꿈이지, 내 꿈은 아냐”라고 말했다.

    아직도 하나를 꿈꾸는 잉여의 도시
    김용한

    1976年 서울 出生

    연세대 物理學科, 카이스트 Techno-MBA 專攻

    前 하이닉스반도체, 國防技術品質院 硏究員


    中國 共産黨은 하나의 天下를 꿈꾼다. 획일화한 天下를 베이징이, 中國 共産黨이 統治하기를 바란다. 하나가 아닌 것은 곧 分裂이요, 分裂은 大混亂을 가져온다고 人民에게 恐怖를 注入한다. 하지만 13億 個의 꿈을 품에 안는 姿勢가 中國에 眞正한 安定을 가져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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