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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 도둑맞은 熱血 女人의 그림倉庫|新東亞

렘브란트 도둑맞은 熱血 女人의 그림倉庫

보스턴 이사벨라 美術館

  • 최정표 | 건국대 經濟學科 敎授 jpchoi@konkuk.ac.kr

    入力 2014-12-19 15:4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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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稀代의 盜難事件으로도 有名한 이사벨라 美術館의 設立者는 財閥家 며느리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다.
    • 그女는 死後에 自身의 뜻대로 美術館이 運營되지 않을 境遇 美術館 資産을 모두 하버드대에 寄贈하라고 했을 程度로 藝術에 對한 愛情이 남달랐다. 美術館 庭園도 一品으로 이탈리아 베니스 宮殿을 거니는 듯하다.
    렘브란트 도둑맞은 열혈 여인의 그림창고
    1990年 3月 18日 이른 아침, 美國 매사추세츠 州 보스턴 市 警察官 두 名이 美術館 門을 두드렸다. 警備員은 美術館 非常벨이 울려 急히 왔다는 警察官의 말에 卽刻 門을 열어주었다. ‘투캅스’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두 名의 警備員을 捕縛해 地下室에 가뒀다. 그러고는 展示室을 마음대로 휘젓고 돌아다니며 그림 13點을 훔쳐 悠悠히 사라졌다. 暫時 後 交代 警備員이 到着하고 眞짜 警察官이 서둘러 달려왔지만, 狀況은 이미 終了된 後였다. 보스턴의 이사벨라 美術館에서 벌어진 일이다.

    盜難當한 그림들은 값으로는 매길 수 없는 名品 中의 名品이었다. 全 世界的으로 34點만 남아 있다는 베르메르의 ‘콘서트(The Concert)’, 렘브란트 作品 3點, 마네 作品 1點, 드가의 드로잉 5點 等이 털렸다. 그中 렘브란트의 ‘갈릴리 바다의 暴風雨(The Storm on the Sea of Galilee)’는 렘브란트가 그린 唯一한 바다 風景이다. 全 世界 매스컴과 美術 愛好家들은 啞然失色했다.

    이 美術館의 正式 이름은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美術館(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 보스턴 펜웨이(Fenway) 距離에 자리 잡은 宮殿 같은 建物이기 때문에 펜웨이 宮殿(Fenway Court)이라고도 한다.

    그림 도둑은 많다. 하지만 이렇게 배짱 좋은 도둑은 없지 않을까 싶다. 盜難品의 市價 總額은 5億 달러(藥 5500億 원)로 世界 最大의 美術品 盜難 事件으로 記錄됐다. 이 事件은 25年이 지난 只今도 迷宮에 빠져 있다. 聯邦搜査局(FBI) 보스턴 支部는 現在도 搜査本部를 解體하지 않고 搜査 中이다. 美術館은 作品 回收에 도움이 되는 情報에 懸賞金 500萬 달러를 내걸었다. 그림 값의 1%다. 그래도 事件은 如前히 五里霧中이다.

    美術館은 누구든 이 作品들을 保管한다면 溫度와 濕度를 잘 調節해 作品이 損傷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呼訴한다. 사라진 그림들은 언젠가는 나타날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그랬고, 뭉크의 ‘絶叫’가 그랬다. 大作은 훔쳐 가도 돈이 될 수 없다. 아무리 대단한 富者라 한들 누가 敢히 이런 有名 作品을 사겠는가.



    렘브란트 도둑맞은 열혈 여인의 그림창고
    어둡고 散漫하고 不便하지만…

    렘브란트 도둑맞은 열혈 여인의 그림창고

    이사벨라 美術館은 아름다운 庭園으로도 有名하다.

    보스턴은 뉴잉글랜드(New England)의 中心地이고 美國 속 英國으로 出發한 都市인 만큼 自負心이 類달리 剛하다. 보스턴의 自負心을 빛내는 것 中 하나가 보스턴 美術館(Museum of Fine Arts Boston)인데, 거기서 徒步로 5分 距離에 15世紀 베니스 宮殿처럼 보이는 古色蒼然한 4層짜리 建物이 하나 서 있다. 이사벨라 美術館이다. 距離가 가까워 자칫 보스턴 美術館의 分館 같지만 完全히 別個의 美術館이다. 이사벨라 美術館은 보스턴 美術館이 現在 자리로 옮겨오기 前부터 이미 그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建物은 ㅁ字形의 大邸宅으로 한가운데 아름답게 가꾸어진 中庭(中庭)이 있다. 層마다 庭園 쪽을 向해 回廊(回廊)을 만들어놓아 庭園을 내려다볼 수 있다. 展示室은 1~3層에 마련됐다. 그림에서부터 彫刻, 家具, 카페트, 陶瓷器 等 2500餘 點의 온갖 種類의 값진 骨董品이 展示됐다. 수두룩한 名品들은 컬렉터 이사벨라의 眼目을 雄辯한다.

    宮殿이라 해도 全혀 遜色없는 建物 構造와 內部 裝飾을 갖췄지만, 이곳의 展示室은 餘他 美術館과 어딘지 모르게 雰圍氣가 사뭇 다르다. 展示室 內部는 어두침침하고 깔끔하게 整理整頓이 돼 있지 않다. 作品들은 複雜하고 散漫하게 걸려 있어 故宅의 그림 倉庫 같은 느낌이다. 內部 照明도 果然 있을까 싶을 程度로 있는 듯 없는 듯 아리송하게 해놓았다.

    이런 生疏한 雰圍氣 탓에 觀覽하기가 便安하지 않다. 甚至於 各 作品에는 案內 標識가 없다. 冊받침 같은 것에 作品 配列 地圖만 그려 놨다. 이걸 들고 다니며 實際 作品과 連結해야 누구의 무슨 作品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點이 오히려 이사벨라 美術館의 魅力이고 品格이다. 이사벨라 美術館은 해마다 남부럽지 않은 觀覽客 規模를 자랑한다.

    2012年 이 美術館은 本館 옆에 새 建物을 지어 空間 問題를 解決했다. 建築費는 우리 돈으로 無慮 1300億 원에 達한다. 두 建物은 通路로 連結되는데, 새 建物에서 옛 建物의 外觀도 鑑賞할 수 있다.

    아들 잃고 世界旅行 나선 財閥 夫婦

    美術館을 設立한 이사벨라(Isabella Stewart Gardner·1840~1924)는 이름에서 보듯 스튜어트 家門에서 태어나 가드너 집안으로 시집간 女子다. 親庭과 媤宅 모두 拒否로 親庭아버지는 뉴욕, 媤아버지는 보스턴 財閥이었다.

    이사벨라의 아버지 데이비드 스튜어트는 뉴욕에서 亞麻布로 寢臺시트, 타월, 衣類 等을 만드는 리넨 事業으로 큰돈을 벌었다. 리넨은 當時 가장 重要한 生必品으로 收益性이 매우 높았다. 이사벨라의 아버지는 品質 좋기로 有名한 아일랜드産 리넨을 獨占해 많은 돈을 벌었고 鑛産業에도 投資해 크게 成功했다.

    이사벨라는 스무 살이 되던 1860年 보스턴 出身의 靑年 잭 가드너와 結婚했다. 親舊의 오빠였다. 媤아버지는 船團을 거느린 貿易商으로 나중에는 鐵道, 鑛山 等 投資에도 成功해 보스턴 財閥로 불렸다. 富者집 며느리 이사벨라는 美術品 蒐集과 藝術家 後援, 그리고 慈善事業에 많은 돈을 쓸 수 있었다. 그女는 美國 最高의 美術品 蒐集家로 君臨하며 많은 藝術家와 交友했고, 豁達한 性格 德分에 社交界의 女王으로도 불렸다.

    그女 人生이 늘 華麗했던 것은 아니다. 夫婦는 오랜 기다림 끝에 아들을 얻었으나 어려서 죽고 말았다. 夫婦는 슬픔을 달래기 위해 世界旅行에 나섰고, 이 旅行은 世界 美術品 蒐集으로 이어졌다. 그 後에도 夫婦는 유럽은 勿論 中東과 아시아 等地로 자주 旅行을 다녔다. 이사벨라는 特히 이탈리아 베니스를 좋아해 그곳에 오래 머물며 베니스 藝術家들과 交流하고 作品도 購入했다.

    1891年 親庭아버지가 죽고 많은 遺産을 물려받은 이사벨라는 本格的으로 美術品 蒐集에 나섰다. 도난당해 아직도 行方이 杳然한 베르메르의 ‘콘서트’는 1892年 프랑스 파리의 競賣에서 購入한 것으로 그女의 收集品 中 가장 有名한 作品이다.

    1896年 즈음에는 더 以上 집에 保管할 수 없을 程度로 蒐集品이 쌓여갔다. 집을 한番 擴張했음에도 늘어나는 所藏品을 堪當할 수 없었다. 그런 渦中에 1898年 男便이 갑자기 死亡했다. 이사벨라는 平素 男便과 함께 꿈꿔왔던 美術館 建立을 實踐에 옮겨야겠다고 다짐한다. 마침내 펜웨이에 땅을 買入하고 有名 建築家인 月러드 토머스 시어스에게 “르네상스 時代의 베니스 宮殿 같은 建物을 지어달라”며 設計를 依賴했다. 그女는 設計 全 過程에 自己 생각을 貫徹해나갔다. 시어스가 할 일은 이사벨라의 아이디어를 圖面에 옮기는 程度였다. 建物 한가운데 中庭을 만든 4層짜리 建物은 當時만 해도 前例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建物이 完工된 뒤 所藏品 展示를 完了하기까지 1年 가까이 所要됐을 程度로 이사벨라는 美術館에 온 精誠을 쏟았다.

    드디어 1903年 美術館이 門을 열었다. 이사벨라는 美術館 4層에 居住 空間을 마련하고 藝術家 및 學者들을 집으로 招待해 自身의 所藏品에서 많은 靈感을 얻도록 했다. 이 空間은 只今 美術館 事務室로 使用한다.

    그림 한 點 걸려고 美術館 뜯어고쳐

    이사벨라는 많은 藝術家와 交遊하면서 지냈는데 존 사전트(John Singer Sargent·1856~1925)와 特히 因緣이 깊다. 사전트는 美國人이지만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美國에선 거의 活動하지 않은 人物임에도 美國의 有名 美術館엔 거의 例外 없이 그의 作品이 걸려 있다. 이사벨라 美術館의 所藏品 中 가장 큰 比重을 차지하는 것이 사전트의 作品이다.

    이사벨라 美術館에 들어서면 스페인 플라멩코 劇場에 온 것 같은 幻想에 젖는다. 入口 바로 왼쪽에 기다란 스페인式 回廊(Spanish Cloister)이 있고, 그 끝壁 가득히 力動的으로 플라멩코를 추는 스페인 집시 舞姬의 大型 肖像畫(237×352cm)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舞姬 뒤에서 男子들은 音樂을 연주하고, 다른 舞姬들은 춤에 歡呼한다. 나는 1998年 스페인 歲費아 旅行 때 본 플라멩코 公演을 잊지 못하는데, 여기서 바로 그 場面을 다시 만났다.

    이 그림은 사전트의 1882年 作 ‘엘 잘레오(El Jaleo)’다. 사전트가 音樂에 造詣가 깊고 特히 스페인 音樂과 춤을 좋아했던 만큼, 그림은 演奏 소리가 들리는 듯 生動感이 넘친다. 그는 스페인 旅行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와 곧바로 作業에 着手했는데, 構成과 準備에만 1年 以上이 所要됐다. 하지만 막상 그림을 그려나가는 데는 며칠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 作品은 파리 살롱에 出品돼 好評을 받았고, 보스턴의 컬렉터 T 제퍼슨 쿨리지에게 팔렸다. 이사벨라는 1888年 보스턴에서 公開 展示된 이 그림을 보자마자 반했다. 1914年 이사벨라는 이 그림을 自身의 美術館에 展示하기로 맘먹고 建物 改造 工事까지 해서 스페인式 回廊을 만들었다. 이사벨라의 姻戚이던 쿨리지는 이런 精誠에 感服해 이 그림을 아예 그女에게 줘버렸다. 사전트는 이 消息을 듣고 ‘엘 잘레오’를 그리기 위해 作業했던 스케치와 드로잉을 모두 이사벨라에게 膳物했다.

    사전트는 이탈리아 플로렌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美國 필라델피아의 眼科 醫師였는데, 사전트의 누이가 어려서 죽자 夫婦는 그 衝擊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 獨逸, 이탈리아 等地를 떠돌며 放浪者 生活을 했다. 그 渦中에 사전트를 妊娠한 어머니는 當時 유럽에 流行하던 콜레라를 避해서 플로렌스로 避身해 거기서 아들을 出産했다.

    렘브란트 도둑맞은 열혈 여인의 그림창고

    스페인 舞姬의 플라멩코 댄스를 그린 존 사전트의 ‘엘 잘레오(El Jaleo)’



    렘브란트 도둑맞은 열혈 여인의 그림창고

    존 사전트가 그린 두 點의 이사벨라 肖像畫, 'Isabella Steward Gardner'(1888)와 'Mrs. Gardner In White'(1922)

    사전트의 어머니는 아마추어 藝術家였고 아버지는 醫師이자 熟達된 醫學 일러스트레이터였다. 이처럼 사전트는 父母에게서 藝術的 DNA를 물려받았고, 어려서 美術 敎育도 받았다. 파리에서는 正式으로 美術學校度 다녔다. 자연스럽게 그의 主要 活動舞臺는 프랑스를 中心으로 한 유럽이 될 수밖에 없었다. 美國人이지만 유럽에서 태어나 유럽에서 活動하는 畫家가 된 것이다. 그는 特히 肖像畫에 能해 當代 最高의 肖像畫家로 認定받았다. 이사벨라는 사전트의 作品을 즐겨 購入했을 뿐 아니라 그의 諮問에 따라 다른 作家 作品도 많이 購入했다.

    사전트가 그린 이사벨라의 肖像畫는 두 點인데, 同一한 모델임에도 對照的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點에서 意味가 깊다. 하나는 1888年 作品으로 매우 活動的인 48歲 中年 女人의 完熟美를 보여준다. 다른 하나는 그로부터 34年이나 지나, 82歲 할머니가 된 이사벨라의 꺼져가는 촛불 같은 모습의 作品이다. 3層 고딕展示室(Gothic Room)에 걸린 48歲 때의 肖像畫 ‘Isabella Stewart Gardner’는 이사벨라가 購入한 사전트의 첫 番째 作品이기도 하다.

    사전트는 이 그림을 1887年 9月부터 1888年 2月까지 보스턴에서 그렸다고 한다. 이사벨라는 검은 원피스 차림으로 兩손을 모은 端正한 姿勢로 서 있다. 목걸이와 허리에 걸친 寶石이 매우 돋보이지만, 全體的인 雰圍氣는 素朴하고 適當히 나이 든 中年 女人의 모습이다. 가는 허리에 豐滿한 엉덩이, 그리고 背景은 마치 아우라를 넣은 듯 莊嚴하게 裝飾돼 있다. 그女의 입술은 말을 하려는 듯 살짝 벌어졌다. 여느 肖像畫에서는 잘 觀察되지 않는 모습이다.

    죽을 때까지 公開 안 한 肖像畫

    사전트는 이 肖像畫를 8番이나 다시 그렸고 마침내 9番째에 成功했다. 이사벨라度 滿足했다. 그런데 얼굴이 바보 같다느니, 姿勢와 寶石이 잘못 設定됐다느니 하는 批判이 쏟아졌다. 이사벨라의 男便은 火가 나서 이 그림을 展示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 때문에 이 作品이 걸린 고딕展示室은 그女가 죽을 때까지 觀覽客에게 開放되지 않았다. 하지만 現在 이 그림은 이사벨라의 强靭한 靈魂과 意志를 그 어떤 自敍傳보다도 더 잘 보여준다고 評價받는다.

    사전트가 1922年에 그린 82歲 때의 肖像畫는 1層 脈나이트실(Macknight Room)에 展示돼 있다. 할머니가 된 이사벨라는 온몸을 하얀 천으로 감쌌다. 그림 全體가 매우 蒼白한 느낌이다. 題目도 ‘Mrs. Gardner in White’다. 1919年에 重病을 앓고 나서인지 매우 懦弱해진 모습이다. 이사벨라는 이 作品이 完成되고 2年 後에 死亡했다.

    또 하나 꼭 짚어봐야 할 이사벨라의 肖像畫가 있다. 스웨덴 畫家 조른(Anders Zorn·1860~1920)이 그린 ‘베니스에서의 이사벨라 가드너(Isabella Gardner in Venice)’다. 이 그림에서 이사벨라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兩손을 옆으로 쭉 뻗으며 뭔가 소리친다. 매우 動的인 그림이다. 10點이 넘는 이사벨라의 肖像畫 中에서 가장 生動感 있게 그려진 作品이라고 한다.

    이사벨라가 1894年 여름을 베니스에서 보낼 때, 조른이 夫人과 함께 파티 中인 그女를 訪問했다. 파티場에는 音樂이 흘렀고, 이사벨라는 바깥 불꽃놀이를 보기 위해 門을 열고 발코니로 나가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女가 갑자기 뒤돌아서며 兩팔을 뻗어 “여러분, 나와보세요!” 하고 외쳤다. 畫家 조른에게 그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고 한다. 베니스의 깜깜한 그랜드 커낼(Grand Canal) 蒼空에는 불꽃놀이가 한창이었고, 이 光景에 感激한 이사벨라가 親舊들에게 感歎詞를 連發했다고 한다. 異常은 이사벨라의 男便이 自身의 日記에서 밝힌 內容이다.

    이사벨라 生日엔 無料 開放

    조른은 自身을 後援하는 이사벨라를 畫幅에 담고 싶었다. 그래서 誕生한 그림이 이 肖像畫다. 이사벨라가 54歲 때다. 이틀 만에 그림을 完成했다고 하니 매우 卽興的으로 그린 셈이다. 조른은 스웨덴 畫家 中에서 國際的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作家다. 그는 스톡홀름에서 美術學校를 다녔으며 英國, 프랑스, 발칸, 스페인, 이탈리아, 美國 等을 旅行하며 이름을 널리 알렸다. 人物의 個性을 잘 끌어내는 肖像畫 作家로 評價받는데, 美國 大統領 肖像畫만 해도 루스벨트 等 세 名을 그렸다.

    렘브란트 도둑맞은 열혈 여인의 그림창고
    최정표

    1953年 慶南 河東 出生

    美國 뉴욕주립대 博士(經濟學)

    公正去來委員會 非常任委員, 建國大 상경大學長

    著書 :‘財閥들의 特別한 外道’ ‘韓國財閥社硏究’‘公正去來政策 虛와 실’‘韓國의 그림價格指數’等

    現 건국대 經濟學科 敎授, 經實聯 共同代表


    이사벨라는 生前에 美術館에 100萬 달러의 現金과 數億 달러의 收益資産을 남겼다. 다만 여기에 몇 가지 要求 條件을 걸었다. 그中 하나가 自身의 所藏品을 一般人에게 永久히 公開하되, 徹底히 自身의 美的 價値觀에 맞추도록 했다. 萬若 이 條件을 지키지 않는다면, 美術館 所藏品과 資産을 모두 處分해 하버드대에 寄附하라고 했다.

    美術館은 設立者와 이름이 같은 ‘이사벨라’들에게는 入場料를 받지 않는다. 2009年부터는 이사벨라의 生日인 4月 14日에 全面 無料로 開放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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