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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도 죽음도 超脫한 깊은 울림 속 젖은 溪谷|新東亞

슬픔도 죽음도 超脫한 깊은 울림 속 젖은 溪谷

하덕규 ‘寒溪嶺’

  • 글·김동률 | 西江大 MOT大學院 敎授 yule@empas.com 寫眞·권태균 | 寫眞作家·신구대 敎授 photocivic@naver.com

    入力 2014-12-19 15: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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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여덟 살 정덕수. 初等學校를 나온 뒤 서울의 茶房을 轉轉하며 詩를 쓰던 그가 노랫말을 지었다. 집 나간 어머니를 기다리던 情 詩人의 눈에 비친 寒溪嶺. 音樂茶房 DJ가 朗讀하던 詩를 들은 ‘詩人과 村長’ 하덕규가 曲을 붙였다.
    슬픔도 죽음도 초탈한 깊은 울림 속 젖은 계곡
    열여섯 살 겨울, 煉炭을 때는 工夫房은 冷氣로 가득 찼다. 나일론 洋襪을 신었지만 발은 시렸고 窓戶 門風紙 틈으로 겨울바람이 매서웠다. 바늘구멍에 황소바람이란 말이 實感났다. 한겨울에도 더운 물이 콸콸 나오는 아파트에 사는 只今의 世代가 果然 이 말이 던지는 意味를 알겠는가.

    大入 工夫를 하다가 지칠 때쯤이면 나는 房구석에 덩그러니 서있는 筒기타를 들었다. “너의 沈默에 메마른 나의 입술/ 차가운 내 얼굴에 얼어붙은 내 발자국….”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양희은의 노래였다. 서투르게 어쿠스틱 筒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瞬間만큼은 入試 스트레스도 추위도 몰랐다. 끝자락인 “저엉녕 저엉녕 너를 사랑했노라”를 부를 때쯤이면 문득 나의 未來를 想像하곤 했다. 或是나 노래 題目처럼 悲劇的인 사랑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나는 純眞한 十代 高校生일 뿐이다.

    양희은스러운 클래식 포크

    양희은, 只今 世代에게는 그저 TV에 나와 수다나 떠는 펑퍼짐한 아줌마로 보일지 몰라도 이 땅의 旣成世代에게는 無限한 意味를 던지는 이름 석 字다. 靑바지를 입고 기타를 들쳐 멘 淸純하고 늘씬한 靑年文化의 象徵으로 떠오른다.

    靑春의 時節, 工夫房 구석에는 세고비아 기타가 우두커니 서있고, 洗鑛出版社에서 나온 노래冊들은 ‘城門綜合英語’와 ‘數學의 定石’ 사이에 當然히, 그리고 보란 듯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때 노래冊에는 기타 코드가 明記됐는데 386世代 大部分이 그 冊들을 보며 혼자 기타를 익혔다.



    그 中心에 있는 노래가 양희은이 부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다. C-A min-D min-G 코드 네 個만 알면 別 어려움 없이 칠 수 있어 其他 初步者들이 가장 選好하는 練習曲. 슬로 록으로 分類되는 노래는 단출한 코드 德分에 기타를 배우기에는 딱 들어맞았다. 마치 골프에 入門할 때 레슨 프로의 指示에 따라 달랑 7番 아이언 클럽만 한 달 내내 휘두르는 것과 같은 理致다.

    양희은이 부른 노래는 아주 많다. 이 面에 紹介했던 김민기의 ‘아침이슬’도 大衆에게는 양희은 노래로 認識된다. 헤르만 헤세의 글에 曲을 붙인 ‘작은 蓮못’과 ‘하얀 木蓮’ ‘한 사람’ ‘들길 따라서’, 美國 民謠 ‘Merry Hamilton’을 飜案해 부른 ‘아름다운 것들’ 等이 생각난다. 그는 포크 音樂이 主流音樂으로 자리매김하던 1970~80年代를 代表하는 女歌手였다.

    그러나 1980年代 中盤 以後, 양희은은 조금 曖昧한 모습을 띠었다. 歌手라기보다는 TV에 뻔질나게 登場해 豪宕한 웃음소리와 함께 수다를 떠는 이웃집 아줌마 같은 모습을 보인다. 뒤늦게 아름아름 알려진 ‘사랑, 그 쓸쓸함에 對하여’는 勿論 疑心할 바 없는 名曲이지만, 1970~80年代의 淸雅한 톤은 사라지고 우스갯소리나 쏟아내는 그렇고 그런 大衆 演藝人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나 그런 양희은의 存在感을 維持해주는 노래가 있다. 바로 ‘寒溪嶺’이다. 노랫말이 주는 깊은 울림과 季節的인 쓸쓸함, 悲壯美까지 잘 버무려진 ‘寒溪嶺’은 양희은의 音色과 絶妙한 調和를 이루는 노래다. 그래서 大衆에게는 클래식 포크쯤으로 認定된다. 實際로 어느 調査에서 詩人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1位에 登極하기도 했다. 詩人들이 좋아한다는 말은 곧 노랫말이 旣成 時 못지않게 抒情的이라는 意味로 理解하면 되겠다. 양희은의 노래로 가장 有名하지만 無慮 40餘 名의 歌手가 리메이크해서 불렀다. 이 땅의 웬만한 歌手는 모두 이 노래를 불렀다는 意味다. 소프라노 신영옥 等 클래식 歌手까지 덩달아 부르고 있다. 그뿐 아니다. 小說家 양귀자는 同名의 小說 ‘寒溪嶺’을 發表했고, 이 作品은 中等 敎科書에 실려 그 威力을 더했다.

    老産 李殷相의 ‘피어린 육백리’

    元來 이 노래는 보컬 그룹 ‘詩人과 村長’의 하덕규가 불렀다. 노래의 誕生도 드라마틱하다. 깊은 感受性의, 웬만한 抒情詩를 뺨치는 노랫말은 無名 詩人 정덕수(51)의 作品이다. 놀라운 건 마치 生을 達觀한 듯한 沒我一體感의 이 詩를 情 詩人이 10代에 지었다는 事實이다.

    1981年 鄭 詩人이 고작 열여덟 나이에 故鄕 外雪嶽 山行을 하다 鉛筆로 끼적거린 市가 ‘寒溪嶺’이다. 조금 더 이야기를 하면 입이 딱 벌어진다. 是認 정덕수는 初等學校 學歷이 全部다. 雪嶽山 오색藥水터 入口 五色初等學校를 卒業한 以來 한줄기 구름처럼 떠돌았다. 어머니는 여섯 살 때 집을 나갔다. 어린 나이에 집 나간 어머니를 그리다가 젖은 눈으로 바라본 건너便 山마루가 寒溪嶺이다.

    困苦했던 그 時代가 그랬듯이 初等學校를 마치고 無酌定 서울에 올라와 縫製工場, 鐵工所에서 막일을 하며 고달픈 生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 가난한 靑年의 꿈은 詩人. 그래서 1980年代 서울市內 文人들이 다니는 술집과 茶房을 꿰뚫고 다녔다. 황금찬 詩人이 단골이던 을지로 入口의 菩提樹다방, 只今은 없어진 鷄林劇場 옆 靑瓷다방, 東大門野球場(只今의 東大門디자인 프라자) 맞은 便 山莊茶房이 그가 巡禮하던 곳들이다. 客地를 떠돌다가 열여덟 살 때 故鄕에 잠깐 들르는 길에 ‘寒溪嶺’이란 詩를 지었고, 그는 이 詩를 들고 音樂茶房 DJ에게 노래를 申請할 때마다 朗讀을 付託했다. 偶然히 이 詩를 接한 하덕규가 曲을 붙여 노래가 誕生하게 된다. 오랜 歲月 著作權 問題로 하덕규와 다툼을 벌였으며 只今은 歌詞 著作權의 折半을 自身이 받게 됐다고 정덕수는 說明한다. 이렇듯 悲感한 노랫말의 原作者가 정덕수로 밝혀지기까지 수많은 時間이 걸린 것이다.

    誕生의 世俗的인 迂餘曲折과는 달리 노래 ‘寒溪嶺’은 超脫的人 이미지를 지녔다. 어떤 이는 이 노래를 들으면 죽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게 하는 지나치게 肥壯한 노래라는 批判도 있다. ‘自殺 勸誘가’라는 좋지 않은 別名도 따라 다닌다. 實際로 鄭 詩人이 서울 生活에 고달픈 나머지 故鄕을 찾아 自殺을 試圖하려다 쓴 遺書라는 所聞도 있지만 作者는 事實이 아니라고 했다.

    寒溪嶺은 익숙하다. 雪嶽山 一帶의 風景이나 指名에 익숙지 않은 사람에게도 寒溪嶺(海拔 920m)은 이미 너무나 有名하다.

    “여기는 바로 雪嶽山 寒溪嶺으로부터 흘러오는 限界의 시냇가, 발길은 北쪽을 向하면서 눈은 連方 雪嶽山 들어가는 東쪽 골짜기를 바라본다. 30年 만에 다시 보아도 밝은 빛, 맑은 기운이 굽이쳐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가슴속의 티끌을 대번에 씻어 주기 때문이다. 얼마나 아름답고 시원하냐! 그래, 이런데서 그렇게 피비린내를 풍겼더란 말이냐! 親蘇(親疏)도 없이, 恩怨(恩怨)도 없이, 싸우다 말고 銃을 던지고 냇물에 발이라도 담그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싶은 데가 아니냐! (…)”

    이쯤 되면 아! 하고 이마를 탁 칠 사람이 많겠다. 바로 老産 李殷相 先生의 ‘피어린 육백리’다. 高校時節 熱工했던 國語冊에 登場하는 ‘피어린 육백리’의 舞臺가 바로 이곳이다. 더러는 그 時節, 까까머리 高校時節의 앨범을 끄집어내는 이도 있겠다. 老産이 休戰線 一帶의 激戰地를 둘러보며 民族의 悲劇을 鬱憤에 차서 쓴 紀行 隨筆이다. 글은 剛健하고 華麗하다. 느낌標가 군데군데 亂舞한다. 分斷 現場을 踏査해 歷史와 風景에 對한 생생한 描寫를 했다는 點, 永歎的 表現이 많다는 點이 特徵이다. 6·25戰爭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時節, 글 바닥을 貫通하는 基本 情緖는 本能的인 愛國心이다.

    이렇게 불타는 愛國 情緖가 겉으로 드러나는 글이 좋은 글인지는 모르지만 旣成世代는 밑줄 座아악 긋고 工夫했다. 사나운 國語先生은 全文을 달달 외우게 했다. 暗誦에 失敗하면 발바닥을 맞기도 한 記憶이 아련하다. 感歎符號 같은 것은 되도록 아끼는 게 格을 갖춘 글로 看做되는 只今의 글쓰기에 비하면 그야말로 感情이 철철 넘치는 老産의 글이다. 德分에 ‘피어린 육백리’는 只今의 中壯年層 가슴에 살아 펄떡이는 紀行文이 됐다.

    슬픔도 죽음도 초탈한 깊은 울림 속 젖은 계곡

    1971年 수많은 軍人이 거의 맨손으로 고갯길을 뚫었다. 寒溪嶺 公社로 숨져간 將兵을 기리는 慰靈碑가 正常 고갯마루에 서 있다.



    김재규의 길, 金壽根의 休憩所

    寒溪嶺(寒溪嶺)은 이름처럼 추운 겨울에 어울리는 고개다. 寒溪嶺의 本디 이름은 五色領이다. 그러나 이 一帶에서 軍生活을 한 只今의 中壯年層에게는 ‘김재규로(路)’로 알려졌다. 1979年 朴正熙 大統領을 弑害한 김재규가 이 一帶 4個 師團을 거느린 軍團長으로 있던 1971年 軍團 隸下 1102 野戰工兵團을 動員해 難工事 끝에 그해 12月 27日 눈보라 暴風 속에 開設한 道路이기 때문이다.

    以後 한동안 김재규로, 五色路로 불리다가 只今은 寒溪嶺으로 統一돼 불린다. 그래서 只今도 寒溪嶺 頂上에는 當時 軍團長 김재규를 기리는 竣工 記念碑가 칼바람에 외롭게 서 있다. 零下 20度를 밑도는 날씨에 볼펜 잉크마저 얼어붙었다. 글이 써지지 않은 무서운 날씨다. 겨울 山行이 禁止돼 頂上으로 가는 階段은 鐵門에 굳게 잠겼다. 國立公園 事務所의 도움으로 찾아본 고개 頂上의 慰靈塔 兼 竣工記念碑에는 裝備도 없이 맨손으로 고갯길을 만들다 發破 事故로 죽어간 兵士들의 이름이 커다란 花崗巖에 새겨져 있다. 그러나 憎惡心에 가득 찬 一部 探訪客이 김재규 이름을 情으로 찧어 놓아 그의 이름 자리에는 痕跡만 남아 悲感함을 더한다. 亡者의 이름까지 情으로 쪼아버릴 程度의 極端的인 憎惡感에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저 山은 내게 우지마라 우지마라 하고

    달 아래 젖은 溪谷 疊疊山中

    저 山은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山 저 山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山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네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山 저 山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山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저 山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노래 ‘寒溪嶺’과 더불어 寒溪嶺을 빛나게 하는 또 하나는 寒溪嶺休憩所다. 金壽根의 作品으로 굳이 무슨 무슨 建築對象 等 華麗한 受賞履歷을 言及하지 않더라도 보는 瞬間 大韓民國 最高의 休憩所 作品임을 느낄 수 있다. 鐵骨構造에 자리한 木材建物 全體가 모두 그을린 量 검은色으로 配置돼 背景이 되는 설악의 아름다움을 限껏 돋보이게 한다. 그러나 節制와 觀照美의 極致인 休憩所 안은 粗惡한 記念品과 魚묵 파는 空間으로 變해 있다. 어디 나직이 앉아 ‘달 아래 젖은 溪谷 疊疊山中을 바라보며 이 山 저 山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을 느낄 最小限의 餘裕조차 없는 騷亂함, 그 自體다. 流麗한 外觀만 보고 室內는 찾지 않는 것도 한 方法이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깨 떠미는 겨울山

    外雪嶽 寒溪嶺 아랫동네가 바로 오색약수다. 藥水터 入口에 五色初等學校가 있다. 情 詩人은 學校 官舍에 산다. 이 學校는 情 詩人의 아이 2名과 親戚아이 2名을 包含해 全校生이 모두 6名인 超미니 學校다. 하지만 校長, 擔任敎師, 專擔敎師, 行政室長, 主務官 等 敎職員만 無慮 8名이라는 說明은 듣는 이를 깜짝 놀라게 한다.

    한겨울 설악을 찾는 이는 많지 않다. 겨울 저녁은 너무 빨리 왔고 펜션과 食堂은 칼바람에 움츠린다. 눈 덮인 溪谷의 겨울나무들은 외롭고, 나무들이 부르는, 아무도 듣지 않는 겨울 노래가 휘파람처럼 들린다. 노래房이 없던 時節, 언젠가 會食자리에서 나는 이 노래를 불렀다. 이 땅에서 避할 수 없는 게 노래 順序다. 爆彈酒에 半쯤 醉해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를 부르려고 생각한 건 아니었는데 그냥 나도 모르게 덜컥 나왔다. 그땐 내가 只今보다 많이 純粹했나 보다. 그러나 會食자리는 一瞬間 고요해지고 많이 醉한 사람은 더욱 醉했다. 그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只今은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는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고 있을까.

    나는 이 노래를 들으면 時間이 거꾸로 흘러 스물한두 살의 그때로 돌아가고 싶어 눈시울이 젖어 온다. 그때로 돌아가면 幸福할 수 있을까. 어둠에 물든 山은 내게 내려가라며 어깨를 떠민다. 겨울 寒溪嶺에 어둠이 내려앉았고 車窓에는 中年이 된 한 靑年이 가만히 노래를 부른다. 아, 한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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