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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派는 데모할 때 왜 太極旗 안 드나”|신동아

“左派는 데모할 때 왜 太極旗 안 드나”

‘保守右翼 野戰司令官’ 장경순 前 國會副議長

  • 최호열 記者 │honeypapa@donga.com

    入力 2014-12-22 17: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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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韓民國 正統性 毁損 더는 坐視 못해
    • ‘豫備軍法’ ‘越南 派兵’ ‘高速道路 建設’ 날치기 通過 보람
    • 愛國運動과 癡呆 아내 看病이 天命
    光復 70周年을 맞는 장경순(94) 自由守護國民運動 常任議長의 感懷는 남다르다. 그가 걸어온 길 自體가 韓國 現代史를 貫通하기 때문이다. 日帝强占期 말에 學徒兵으로 끌려갔다 光復軍에 參與한 그는 6·25戰爭에서 赫赫한 功을 세우며 大韓民國을 지켜냈는가 하면, 5·16軍事政變에 參與해 革命政府의 農林部 長官을 지냈다. 民政 移讓 後에는 10代까지 5選 國會議員을 지내며 最長期間(1963~1971年) 國會副議長을 歷任했다. 1980年 新軍部의 政治 參與 要請을 拒絶하고 野人으로 돌아가 前職 國會議員들로 이뤄진 大韓民國헌정회 會長을 맡는 等 國家元老로 지내온 그는 2002年 自由守護國民運動을 結成하며 保守右翼의 先鋒에 나섰다.

    只今도 保守右翼 集會에선 그의 獅子吼 演說이 빠지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도 뒷짐 지는 法이 없다. 朴槿惠 大統領이 노무현 政府 時節 戰時作戰權 移讓을 主導했던 金章洙 前 國防部 長官을 靑瓦臺 安保室長에 임명하자 軍 將星 出身 모임인 성우회 總會에서 金 室長의 除名을 要求하는가 하면, 2014年 6月 문창극 總理指名者가 歷史觀 是非로 聽聞會場에 서지도 못한 채 落馬하자 홀로 光化門 四거리에서 與野 國會議員들을 糾彈하는 1人 示威를 벌이기도 했다.

    誘導 公認 10段

    서울市 中區 다棟 事務室에서 만난 張 議長은 94歲라고는 全혀 믿기지 않을 만큼 訂正했다. 砲兵將校 出身이라 일찍 聽力을 喪失해 補聽器를 끼지만 意思疏通에는 아무런 問題가 없다. 60~70年 前의 일도 날짜와 關聯者 이름을 細細히 言及할 程度로 記憶力도 좋았다. 健康은 問題가 없는 程度가 아니라 “只今도 是非 거는 不良輩 한둘 程度는 가볍게 메다꽂을 수 있다”며 豪宕하게 웃었다.

    大韓柔道協會는 2004年 그에게 公認 10段을 授與했다. 儒城(柔星·柔道의 별)으로 불리는 10段은 世界的으로도 몇 名 안 된다. 韓國人 中 生存한 10段은 張 議長과 美國에 居住하는 이방근 氏, 김정행 大韓體育會長뿐이다. 셋 中에서 張 議長이 가장 먼저 10段 班列에 올랐다.



    ▼ 光復은 어디서 맞았나.

    “日帝 末에 學徒兵으로 끌려갔다. 日本을 위해 싸울 수는 없었기에 同僚들과 함께 脫出해 獨立軍에 가기로 計劃을 세우고 機會를 엿보던 中, 中國 안후이省 狂더에서 光復을 맞았다. 우리는 卽時 상하이로 가서 光復軍에 合流, 學徒兵과 徵兵으로 끌려온 朝鮮人 1500餘 名을 糾合해 ‘光復軍 잠便紙臺(暫編支隊)’를 만들어 이끌었다.”

    ▼ 朴正熙 大統領과의 因緣은.

    “學徒兵과 光復軍 잠便紙臺에서 小隊長을 한 經驗이 있어 1948年 陸士 7期로 特別 入校해 小委에 任官했다. 當時 中隊長이 朴正熙 大統領이었다. 그 뒤에도 因緣이 이어졌다.”

    “여기서 주저앉을 겁니까”

    “좌파는 데모할 때 왜 태극기 안 드나”
    ▼ 5·16軍事政變에도 參與했는데.

    “1961年 5月 15日 朴 將軍이 急히 만나자고 해서 갔더니 딱 한마디 했다. ‘來日 擧事다.’ 平素 함께 나라 걱정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 말뜻을 금세 알아들었다. 그래서 ‘그럼 저는 祖國을 위해 뭘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장도영 將軍을 說得해달라’고 하더라. ‘알았다’고 하고, 集合 場所인 미도호텔로 갔다. 巨事를 내게 直接 말한 것은 그날이 처음이지만, 그前에도 몇 次例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었다.”

    그는 5·16의 숨은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미도호텔에서 待機하고 있는데, 急히 모두 집으로 오라는 連絡이 왔다. 가니까 深刻한 表情으로 ‘괜찮으니 신발 신은 채 그냥 들어오라’고 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巨事가 發覺됐다고 했다. 모두 아무 말을 못했다. 그때 내가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겁니까. 그냥 갑시다’ 하며 일어서자 朴 將軍도 決心을 굳히고 따라 일어섰다. 그렇게 歷史가 만들어진 것이다. 只今도 當時 내 選擇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革命政府에서 農林部 長官을 지냈다. 別名도 ‘農林部 長官’이었을 만큼 農村 現實에 關心이 많았던 그는 特히 山林綠化事業의 礎石을 다졌다. 當時 全國의 山이 풀 한 포기 없는 민둥山이었다. 國會議員 時節엔 새마을金庫 事業을 主導해 全國에 擴散시키기도 했다.

    “朴正熙 政權에 對해 批判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린 共産主義로부터 大韓民國을 지키고, 國民을 배불리 먹게 해주고 싶은 熱情뿐이었다. 國會副議長을 하면서 野黨 指導部에게 자주 한 말이 있다. ‘個人보다는 黨, 黨보다는 나라가 더 重要하다’는 것이었다. 그게 愛國이다. 國會副議長으로 있으면서 野黨이 反對하는 法案을 딱 세 番 날치기 通過시켰다. 하나는 豫備軍法이다. 언제 北韓이 쳐들어올지 모르니 安保를 위해 꼭 必要하다고 判斷했다. 越南 派兵과 高速道路 建設도 野黨이 反對했지만 밀어붙였다. 只今 보라. 두 가지 모두 우리나라가 눈부신 經濟發展을 이루는 데 決定的 土臺가 되지 않았나.”

    1980年 전두환 政權이 들어서면서 함께하자고 勸誘했지만, 그는 拒絶하고 政界 隱退를 宣言했다. 헌정회와 國家元老會議에 參與하는 程度였다. 1991年 社會 各界 元老와 指導者 33人으로 創立한 國家元老會議는 現在 강영훈, 서영훈, 李賢在, 정원식, 이수성, 李漢東 前職 國務總理를 비롯해 김재순 前 國會議長, 백선엽 前 合同參謀本部 議長, 이상훈 前 國防部 長官 等 내로라하는 元老 400餘 名이 參與한다.

    “保守團體, 差別받고 있다”

    “좌파는 데모할 때 왜 태극기 안 드나”

    光化門廣場에서 1人示威를 하는 장경순 議長.

    ▼ 2002年 80歲가 넘은 高齡에 自由守護國民運動을 結成하며 保守右翼의 代辯者로 나선 理由는.

    “나라가 곧 亡할 것 같았다. 우리나라가 共産化된다는 말이 나올 程度였다. 越南은 共産黨員이 全 國民의 5%도 안 됐는데도 共産化됐다. 그런데 우리는 左派 理念이 그보다도 훨씬 넓게 퍼져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大韓民國 正統性을 毁損하는 것을 더는 坐視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뜻을 같이하는 元老들과 함께 만들었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只今 光化門에 가면 左翼도 데모를 하고, 保守도 데모를 한다. 그런데 둘 사이엔 엄청난 差異가 있다. 保守들은 하나같이 太極旗를 든다. 그런데 左派들이 데모하는 곳에는 太極旗가 없다. 그게 뭘 의미하겠나, 大韓民國을 否定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國民은 이런 事實을 모른다. 甚至於 保守團體가 差別까지 받는다. 서울市가 左派 데모대에는 隣近 地下鐵 電氣를 끌어다 쓰게 하면서 保守團體에는 못하게 한다. 隣近 建物에다 돈을 낼 테니 電氣만 끌어다 쓰자고 해도 거절당한다. 그래서 集會를 하려면 自家發電機를 가져와서 使用해야 한다. 이게 大韓民國의 現實이다.”

    ▼ ‘光復節’이냐 ‘建國節’이냐 하는 論難이 如前하다.

    “歷史를 바로 봐야 한다. 光復度 우리에게 아주 重要한 意味를 갖지만 建國 亦是 그 못지않게 重要하다. 當時 大韓民國 建國은 유엔의 決定에 따른 合法的인 일이었고, 무엇보다 大韓民國 建國을 안 했다면 韓半島는 共産化됐을 것이다. 그걸 認定해야 남남 葛藤을 解決할 수 있다. 光復節이 重要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建國節度 意味가 크니 함께 祝賀해야 한다는 것이다.”

    ▼ 얼마 前 서북청년단再建委員會가 結成돼 衝擊을 줬다. 이들은 甚至於 金九 先生을 暗殺한 안두희를 愛國者라고 하는데….

    “내가 거기에 直接 參與하지 않아서 그 問題는 잘 모르겠다. 時代 狀況을 勘案하면 서북청년단의 功勞도 認定해야 한다. 그 正統性을 只今 以北5道民會가 이어받았다. 그런데 채병률 以北5道民會長이 서북청년단再建위를 認定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도 할 수 없다. 그리고 金九 先生은 當時 行動에 問題가 있었지만 個人的으로 尊敬하는 분이다.”

    大韓民國 憲法 第4條

    ▼ 이젠 理念 論爭에서 벗어나 産業化 勢力과 民主化 勢力의 和合이 必要하다는 主張에 對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나도 國民大統合은 重要하고 꼭 必要하다고 본다. 그런데 大韓民國 正統性을 否定하는 勢力과는 함께할 수 없는 것 아닌가. 例를 들어 大韓民國 憲法 第4條에 ‘大韓民國은 統一을 志向하며 自由民主的 基本秩序에 立脚한 平和的 統一政策을 樹立하고 이를 推進한다’고 돼 있다. 그런데 野黨은 韓明淑 黨 代表 時節 進步左派 政黨과 함께 ‘韓美FTA 反對’ ‘韓美聯合司 解體’ ‘國家保安法 廢止’ ‘聯邦制 統一’을 내세웠다. 그건 大韓民國을 抛棄하자는 것이다. 내가 只今 野黨에 要求하는 건 單 하나다. 自由民主主義 統一을 願하는지, 聯邦制 統一을 願하는지 正確하게 밝히라는 것이다.”

    추운 날씨에도 統進黨 解散 促求 示威에 參與하는 等 右翼保守 목소리를 높이는 데 앞장서는 그는 午後 3~4時면 서둘러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아내를 看病하기 위해서다. 그는 “아내가 많이 아프다”고 했다. 癡呆가 심해진 지 6年이 넘었다.

    “내가 차려주는 飮食이 아니면 아예 입에 대지도 않는다. 그래서 아침을 차려 같이 먹고 愛國運動을 하러 事務室에 나온다. 午後에도 다른 約束을 안 잡고 일찍 집으로 들어간다. 그때까지 아내가 點心을 안 먹고 있기 때문이다. 힘들지 않으냐고? 어쩌겠어. 愛國運動과 아내의 看病 둘 다 내 天命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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