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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富者집 ‘곡간 風水’와 운조루 ‘물 風水’|新東亞

崔富者집 ‘곡간 風水’와 운조루 ‘물 風水’

富者가 좋아하는 財物 名當

  • 안영배 | 東亞日報 出版局 戰略企劃팀 企劃委員·風水學 博士 ojong@donga.com

    入力 2014-12-19 16: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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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富者만큼 風水地理에 關心 많은 集團도 찾기 힘들다. 땅을 통해 富(富)를 일군 사람이 많아서일까. 富의 源泉이 自身이 사는 터에 있다는 傳統 時代의 믿음은 우리나라 富者들 사이에 如前히 有效하다. 富를 부르는 地理의 世界는 어떤 것일까.
    최부잣집 ‘곡간 풍수’와 운조루 ‘물 풍수’

    全南 求禮의 운조루 蓮못.

    世上 사람 大多數는 富者가 되고 싶어 한다. 一旦 財物이 豐足해야 自身이 願하는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富者學이라는 多少 生疏한 學問이 생겨났고, 富者가 되는 ‘祕法’을 알려준다는 冊도 不知其數다.

    脫身公開闡明(脫神功改天命)! 神의 뜻을 거스르고 千名마저 바꾸겠다는 人間의 强力한 意志를 表明하는 風水地理의 世界에서 사람을 幸福하게 해준다는 富貴論을 外面할 순 없을 터. ‘明堂에 들어가면 地獄門度 바꾼다’는 말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事實 傳統 時代엔 風水地理를 富貴를 누리기 위해 硏磨해야 하는 ‘必須 科目’으로 여겼다. 스스로 工夫할 與件이 못 되면 아예 實力 있는 地官을 집안 風水 專擔用으로 모시기도 했다.

    韓國의 傳統 富者로 빼놓지 않고 擧論되는 慶州 교동 崔富者집의 境遇를 보자. 400年 동안 9代 進士와 12代 萬石꾼을 排出해 慶尙道를 代表하는 富者로 첫손에 꼽히는 崔富者집은 ‘財産을 萬 석 以上 모으지 말라, 凶年에 남의 논과 밭을 사지 말라, 四方 100里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等 6個의 家訓(六訓)을 代代로 實踐해온 名門家로 有名하다.

    그런데 韓國版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象徵이라고도 할 수 있는 崔富者집의 家訓엔 바깥에 알려진 陸勳 外에 내밀히 傳해온 家訓이 하나 더 있다는 口傳도 있다. ‘명지(明地)가 있으면 값은 高下(高下) 肝에 求해 쓰라’는 것이다. 좋은 明堂이 있으면 땅값에 求愛하지 말고 求해 쓰라는 意味인데, 事實 與否를 떠나 崔富者집이 慶州 교동에 터를 잡은 來歷이나 이 집안 사람들이 墓를 쓴 자리를 보면 名當 吉地를 애써 求했음직한 痕跡을 어렵지 않게 確認할 수 있다. 非但 崔富者집뿐 아니라 韓國 傳統 富者집들의 境遇 저마다 風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因緣과 事緣을 갖고 있다.

    風水에서 말하는 富者 或은 富의 條件은 뭘까. 이에 對한 言及은 朝鮮 後期 實學者 이중환(1690~1752)이 지은 ‘擇里志’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은 再錄(財祿)을 맡은 것이므로 큰 물가에는 富裕한 집과 有名한 마을이 많다. 비록 山中이라도 市內와 溪谷물이 모이는 곳이라야 여러 代를 이어가며 오랫동안 살 수 있는 터가 된다”고 씌어 있다. 터에서 물을 봐야 富를 누릴 수 있다는 ‘擇里志’의 論理는 朝鮮 士大夫들이 집터를 고를 때 빠뜨리지 않은 指針이었다. 中國 唐나라 때 人物인 服膺千(卜應天)이 지은 風水地理서 ‘說深部(雪心賦)’도 ‘많은 물이 모인 곳이 名當(衆水聚處是明堂)’이라는 말로 물의 重要性을 强調했다.



    財物 기운은 물에서 나온다?

    물이 왜 部와 連結되는 걸까. 이는 風水의 基本 原理와도 그 脈絡이 이어지므로 暫時 짚어보기로 하자. 흔히 장풍得水(藏風得水)의 줄임말로 理解되는 風水는 ‘바람길을 갈무리하고 물길을 얻는 것’을 가리킨다. 이런 條件을 갖춘 곳에선 富貴나 無病長壽 같은 좋은 生氣(生氣)를 穩全히 누릴 수 있다는 게 風水의 原理다. 問題는 得水, 卽 江가나 海岸가 等 물길과 가까운 곳에서 사는 것과 장풍, 卽 바람길을 막아주거나 갈무리해주는 山속 或은 山기슭에서 사는 것은 삶의 質에서 確然히 差異가 난다는 點이다.

    傳統 時代부터 物價는 物資의 交易과 交通 要衝地 구실을 해왔다. 물길을 따라 道路網이 펼쳐지면서 사람이 모여들고 自然스레 交易과 商業이 發達하는 模樣새를 갖추게 된 것이다. 물길은 이처럼 富를 創出하는 土臺를 마련하는 데 유리하다. 反面 山속은 감추거나 막는 特性이 있기 때문에 交通과 交易이라는 側面에선 相對的으로 물길에 비해 不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俗談에 ‘海邊 개가 山골 富者보다 낫다’는 말이 생겨났다. 江가나 바닷가에 비해 산골은 貧窮하므로 아무리 山골에서 富者라 하더라도 實狀은 사는 게 보잘것없다는 이야기다.

    이처럼 물길을 財物 기운의 確保 手段으로 보는 觀念은 더욱 ‘鎭火’해 나중엔 아예 물 自體를 部와 한 짝으로 묶어 取扱하기도 했다. 陽宅(陽宅)이나 陰宅(陰宅) 앞으로 물웅덩이나 蓮못, 貯水池 따위가 形成돼 있으면 그 물만큼 財物이 保障된다는 中國의 風水理論도 물을 財物과 同一視한 것에서 생겨난 事故다.

    한便으로 風水에서 말하는 수(水)는 물길 같은 外形的 側面 말고도 터에서 形成된 生氣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制御하는 內部的 機能도 갖고 있음을 알아둘 必要가 있다. 代表的 風水 古典인 ‘藏書(葬書)’에선 生氣가 ‘물을 만나게 되면 멈춘다(界水則止)’라고 表現했다. 그러니까 明堂이 되려면 사람에게 富貴(富貴)의 기운을 傳해주는 生氣를 保護하는 役割로서의 물 또한 必要하다는 說明이다.

    이를테면, 살고 있는 터를 向해 물길이 휘감아 들어오는 形象이면 生氣가 保護돼 財物이 쌓이고, 터에서 물길이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이면 그 물길을 따라 생기 또한 빠져나간다고 보는 것이다. 萬若 물길이 빠져나가는 모습이 보일 境遇 터 앞에다 키 큰 나무를 심어 물길이 보이지 않도록 遮斷하기도 한다.

    물에 對한 이 같은 風水的 觀念을 念頭에 두고 韓國을 代表하는 富者집들을 살펴보자. 먼저 財物 기운을 갖춘 生氣가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물을 利用한 風水 造形物은 全南 求禮의 ‘운조루(雲鳥樓)’(重要民俗資料 第8號) 家屋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世紀에 지어진 운조루는 智異山 西南端 地域에 位置하는데, 智異山 老姑壇에서 이어지는 형제봉(一名 삼태봉)李 珠算(主山)을 이루고 넓게 펼쳐진 들 앞으로는 蟾津江이 幻泡(環抱)하며 흘러 典型的인 背山臨水(背山臨水)의 財物 明堂 터로 일찌감치 名聲을 누려왔다. 一角에선 운조루를 처음 지은 유이주(1726~1779)가 집 자리를 닦을 때 거북처럼 생긴 돌이 나왔다고 해서 金俱沒니(金龜沒泥)형 財物 明堂이라 부르기도 한다.

    求禮 운조루의 風水 비보

    아무튼 湖南의 代表的 富者집 中 하나인 운조루의 主人은 베풂과 나눔의 美學을 實踐해왔다. 이를 象徵的으로 보여주는 게 운조루의 쌀독이다. 舍廊채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空間엔 나무로 만든 쌀독이 있는데, 쌀독 下段에 한 주먹만큼 들어갈 크기의 구멍이 뚫려 있고, 거기엔 ‘他人能해(他人能解)’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다른 사람도 열 수 있다’는 意味로, 周邊의 배고픈 사람들이 아무 때나 와서 쌀을 퍼가도록 하고 가을에 秋收를 하면 다시 되돌려놓을 수 있도록 한 裝置다. 게다가 쌀독이 있는 곳은 쌀을 가지러 온 女人네들이 안채의 主人집 女子들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中門을 잠가놓는 細心한 配慮까지 해놓았다.

    이처럼 眞正한 財物 明堂은 터의 主人뿐 아니라 그 周邊 사람에게도 넉넉한 기운을 베푸는 特徵이 있다. 또 그래야만 財物의 明堂 기운이 오래도록 維持된다. 富者나 貴族 家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精神은 그 家門의 永續性을 위해서도 必要한 行爲인 것이다.

    운조루를 具體的으로 살펴보자. 운조루엔 財物 기운을 누리려는 目的으로 造成한 風水 비보(裨補) 裝置가 여럿 있다. 風水的 眼目을 갖추고 바라보면 운조루 主人의 才致 넘치는 風水 感覺에 혀를 내두를 程度다.

    먼저 운조루가 있는 오미동 마을의 뒷山인 屛風山에서 내려오는 知己(地氣)는 1000餘 坪에 達하는 운조루 터를 둥그렇게 감싸면서 커다란 財物 기운을 이룬다. 이러한 財物 기운이 바깥으로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운조루는 매우 巧妙한 비보 裝置를 마련해놓았다. 운조루에 剛하게 깔린 財物 기운이 空中으로 솟구쳐 올라 사라지지 않도록 一旦 數十 칸에 이르는 집들이 처마가 다닥다닥 붙을 程度로 密集돼 造成된 것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함을 느끼게 할 만큼 配置한 것은 집과 집 사이의 처마를 利用해 知己가 空中으로 사라지지 않도록 考慮한 것이다.

    또 집의 솟을大門 바로 앞으로는 東쪽에서 西쪽으로 물이 흐르도록 人爲的으로 꽤 깊은 도랑을 만들었다. 얼마 前 筆者가 踏査할 當時에도 도랑엔 물이 相當히 빠른 速度로 흐르고 있었다. 이를 風水에선 ‘繫留수’라고 하는데, 正確히 운조루의 財物 기운은 이 溪流手까지 뻗쳐 멈추는 形局이었다. 卽 물을 만나 生氣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計數卽地’의 風水理論을 考慮한 것이다.

    그런데 운조루 主人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繫留수가 흐르는 도랑 더 바깥쪽(南쪽)으로는 아예 蓮못(同壻 45m× 南北 15m)을 造成했다. 蓮못 가운데엔 조그만 섬 形象을 만들고 소나무, 배롱나무 等을 심어 아름다운 水經 空間을 演出했다. 언뜻 보면 觀賞用 空間으로 置簿됨직한 이 蓮못엔 演出者의 風水的 計算이 깔려 있다.

    그 하나는 운조루의 뒷山, 卽 北쪽에서 뻗어 내려온 知己가 或如 1次 境界線인 물 도랑을 넘어설 境遇 2次 境界線인 南쪽의 蓮못에서만큼은 完璧히 遮斷하겠다는 計算이다. 다른 하나는 운조루의 安山이라 할 수 있는 五峯山 쪽에서 내려온 살기(殺氣)가 운조루를 向해 正面으로 치고 들어오는 形局인데, 이를 蓮못의 물 기운을 利用해 막아주고자 한 것이다. 물을 利用한 비보 風水로 운조루만큼 智慧롭게 使用한 境遇는 다른 곳에선 찾기 힘들다.

    現在 운조루는 過去의 財物 明堂이라고 하기엔 多少 衰落한 느낌이 든다. 운조루의 後孫은 운조루를 出入하는 觀光客의 觀覽料金으로 옛 名聲을 잇는 듯하다. 事實 운조루의 財物 明堂은 ‘돈’이 아니라 ‘穀食’의 기운이다. 傳統 時代엔 穀食이 富의 源泉이었기에 父子로서의 名聲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現在는 貨幣의 時代요, 金融의 時代이기에 穀食의 明堂 기운으로는 옛날과 같은 富를 이루긴 힘겹다고 解釋해야 할 것 같다.

    崔富者집 곡간의 祕密

    한便으로 지나친 財物 기운은 그 터에 사는 사람들의 健康을 해치기 十常이다. 特히 財物 기운에 直接的으로 露出될 境遇 問題는 深刻해진다. 그런데 바로 이런 部分까지 勘案해 터를 조성한 富者집이 慶州 교동의 崔富者집이다.

    崔富者집은 元來 新羅 요석公主가 살던 요석궁이 자리했던 터라고 傳하는데, 事實이라면 元曉大師와 요석公主 사이에서 태어난 新羅의 大文章家 薛聰의 誕生地가 된다. 이 터를 風水的으로 살펴보면 집 앞으로는 文川이라고 불리는 물길이 흘러 林藪(臨水)의 模樣새는 갖췄는데, 집 뒤를 받쳐주는 배산(背山)은 엉성하다. 뒤쪽이 야트막한 둔덕으로 거의 平地에 가깝다. 大體로 慶州 市內가 다 이런 模樣새다.

    최부잣집 ‘곡간 풍수’와 운조루 ‘물 풍수’

    慶北 慶州 교동의 崔富者집 곡간.

    집 主人도 집 뒤가 虛하다고 봤던지 아름드리 나무들을 심어 그 허전함을 補充하고자 했다.

    그런데 崔富者집 舍廊채와 안채 等 사람이 居住하는 곳의 風水的 기운은 生氣(生氣)가 머무는 明堂 터이긴 하지만, 그 名聲에 어울릴 만큼 特出하다고 評價하기엔 不足한 느낌이다. 더욱이 財物 기운과는 別 상관없는 곳이다.

    當初 이 터를 고른 최언경(1743~1804)은 以前에 살던 곳(흔히 게무덤이라고 函)에서 5代째 엄청난 富를 蓄積한 뒤, 새롭게 富를 擴張하려는 目的으로 요석궁터와 이 一帶를 사들여 99칸에 이르는 大邸宅을 지었다고 한다. 최언경은 요석公主가 머물던 宮으로 權力의 기운을 가졌으면서도 薛聰 같은 大學者를 輩出한 學問의 기운을 갖췄다고 믿어지는 이곳을 왜 選擇했던 것일까. 代를 이어오는 崔富者집 家訓 中에 ‘過去는 보되 進士 以上의 벼슬은 하지 말라’고 警戒한 것을 보면 집터의 기운을 利用해 權力이나 學問 等을 追求하려는 意圖는 全혀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이 터는 財物을 願하는 目的으로 選擇한 자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實際로 이곳에 터를 잡은 後 내리 7代 萬石꾼의 富를 維持한 걸 보면 分明 이곳을 財物 名當이라고밖에 달리 부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財物 明堂이라고 하기엔 사람들이 居住하는 터의 財物 기운이 굳세지 못한 이 現象을 어떻게 解釋해야 할까.

    筆者는 崔富者집을 살펴보면서 現在 唯一하게 남아 있는 한 채의 곡간(穀間·뒤주)에서 그 風水的 乖離感의 實體가 풀리는 걸 確認할 수 있었다. 마당 한 켠에 자리한 이 倉庫는 正面 5칸, 側面 2칸 規模인데, 個人집 곡간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한다. 이런 곡간이 몇 個 더 있었는데 다 없어지고 남아 있는 건 이것뿐이라고 한다. 興味롭게도 崔富者집의 安山(案山) 구실을 하는 도당산에서 뻗어오는 財物 기운은 舍廊채도 안채도 부엌도 아닌 곡간으로만 그 기운이 集中되고 있었다. 卽 崔富者집 富의 源泉 기운은 곡간에 있었던 것이다.

    최부잣집 ‘곡간 풍수’와 운조루 ‘물 풍수’

    權力과 財物 기운을 품고 있는 ‘毒花로사도’.

    結局 이 터를 조성한 최언경은 도당산의 財物 기운을 알아봤고, 그 기운이 集中되는 곳에 穀間을 造成함으로써 富를 蓄積하려고 했다. 이 强力한 財物 기운을 사람이 起居하는 房으로 포커스를 맞출 境遇 健康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이 사는 터만큼은 부드러운 生氣를 쐬어 健康을 챙기도록 하면서 穀間을 통해 强力한 財物 기운을 利用하려 했던 것이라 解釋해야 할 것 같다.

    勿論 崔富者집에서도 ‘물=財物’이라는 等式은 作動한다. 그것은 집 앞을 흐르는 시냇물이라기보다 안채 마당에 造成해놓은 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우물은 물맛 좋기로 有名했고, 또 이 물로 崔氏 집안 傳統의 ‘慶州法主’를 빚었다. 이 우물이 崔氏 집안의 富를 維持하는 데 한 구실을 했음은 分明하다.

    現代에 와서도 물은 父子 或은 財物과 連結된다는 風水的 믿음은 如前하다. 이는 서울 소공동 웨스틴朝鮮호텔 앞에 設置된, 물을 담는 돌확 裝置나 서울 서린동 SK社屋의 물을 찾는 거북形 風水 裝置를 비롯해 서울 主要 빌딩들 앞에 人工的으로 造成한 蓮못 等에서 確認할 수 있다. 이런 風水的 裝置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홍콩, 臺灣, 싱가포르 等地에서 더욱 流行한다.

    富者는 누드畫를 좋아해?

    最近 筆者가 訪問한 中國 베이징의 主要 新築 建物에서도 물이 흐르게 하는 分數나 물레방아 等 財物 기운을 끌어당기려는 비보 風水 裝置들을 심심찮게 目擊할 수 있었다.

    한便 華僑가 많이 모여 사는 싱가포르나 홍콩에선 富者들이 女性 누드畫를 書齋 等 私的 空間에 즐겨 비치한다고 한다. 이 亦是 財物 기운을 끌어들이려는 一種의 ‘名利風水’的 行爲로 볼 수 있다. 四柱八字로 個人의 吉凶을 豫測하는 命理學에선 男性의 境遇 財物 기운과 女性을 같은 기운으로 解釋한다. 그러니까 女性 그림은 그 自體가 財物 기운을 代表하는 것으로, 富者들은 누드 그림에서 財物 기운을 얻으려는 것이다. 韓國에서도 이런 風潮가 一部 富者들 사이에 流行하는 것으로 傳해진다. 어떤 이는 누드畫의 官能的인 女性 身體가 力動性과 生動感의 기운을 품어 보는 이로 하여금 陽의 기운을 增强시키기 때문이라 解釋하기도 한다.

    實際로 效果가 있는 걸까. 누드畫가 財物 기운을 북돋우는 機能을 하는지에 對해선 筆者도 經驗한 바 없어 뭐라고 斷定的으로 말하긴 힘들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비롯한 東洋圈에선 그림에다 生動하는 기운을 담고자 했고, 그것이 보는 이에게 그대로 傳達되는 것을 最上으로 쳤다. 동양 藝術史를 살펴보면 風水에서 所重히 여기는 산(山)과 수(水)를 畫幅에 담아 表現한 山水畫는 風水를 淵源으로 한다고 說明한다.

    말하자면 옛사람들은 그림을 單純한 鑑賞用에 그치지 않고 그 그림의 기운까지 取하길 願했던 것 같다. 最小限 中國의 송·金·元나라 時代, 그리고 우리의 高麗時代 山水畫에서는 露骨的으로 그림 기운을 利用하려 했음이 分明히 나타난다. 이는 高麗 山水畫로 公開된 ‘毒花로사도(獨畵鷺圖)’의 權力과 財物 기운에서도 充分히 確認할 수 있다.

    그런 意味에서 집에다 財物 기운을 북돋울 그림 한 點쯤 걸어둬도 좋을 성싶다. 비싼 그림이 아니라도 좋다. 마음에 드는 山水畫를 하나 장만해 집에 걸어두고 자주 그 기운을 느껴보자. 혹 山水畫의 물에서 財物 기운이 어디선가 쑥 날아올지도 모를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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