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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보다 슬픈 記憶 눈물보다 津한 獨白|新東亞

사랑보다 슬픈 記憶 눈물보다 津한 獨白

‘男子가 사랑할 때’와 全北 群山

  • 글·오동진 | 映畫評論家 寫眞·김성룡 | 捕討그래퍼

    入力 2014-12-19 15: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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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本式 敵産家屋과 中國式 짬뽕, 華麗함과 困窮함, 슬픔과 기쁨이 함께 섞인 都市, 群山. 이곳에서 찍은 映畫 ‘男子가 사랑할 때’는 사랑보다 슬픈 記憶을 멀찍이서 바라본 ‘낯선 新派劇’이다.
    사랑보다 슬픈 기억 눈물보다 진한 독백

    群山의 오래된 달동네.

    “내가 갑자기 눈물이 나는 건, 그대 내 생각하고 계신 거죠.

    함박눈 하얗게 온 世上 덮이는 날, 멀지 않은 곳이라면 차라리 오세요….

    사랑이란 맘이 이렇게 남는 건지, 記憶이란 사랑보다 더 슬퍼.”



    群山으로 向하는 길. 背景音樂으로 이문세의 ‘記憶이란 사랑보다’가 適格이다. 男女 間에 남겨진 아픈 記憶이라는 게, 그間 둘이 사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强烈하고 마음 아프다고 얘기하는 이 노래. 그의 목소리보다 훨씬 구슬프고 서럽다. 이문세 이 사람 참, 노래를 잘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노래를 가만히 따라가다보면, 내가 只今 어디를 向해 가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記憶이란 사랑보다’는 木浦나 麗水, 釜山 或은 全州 같은 곳이 아니라 群山으로 가는 길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 그건 分明, 황정민 主演의 映畫 ‘男子가 사랑할 때’ 때문일 수 있다. 이 映畫의 마지막 場面에서 이 노래가 나온다.

    女主人公 浩亭(한혜진)이 自身이 일하는 水協에서 退勤해 마을버스에 오르는 場面이다. 男子 太一(황정민)은 얼마 前 世上을 떠났다. 마을버스는 마침 太一의 아버지(남일우)가 몰고 있다. 浩亭은 버스에 오르면서 媤아버지가 될 뻔했던 男子에게 살짝 눈을 맞춰 人事한다. 어둠이 깔리기 始作하는 바깥 風景에 조금씩 눈발이 날리기 始作한다. 버스에 앉은 女子는 언젠가부터 조금씩 흐느낀다.

    사랑보다 슬픈 기억 눈물보다 진한 독백

    映畫 ‘男子가 사랑할 때’의 한 場面.

    ‘그 女子’의 눈물을 지켜보는 마음

    늙은 男子는 며느리가 될 뻔했던 女子를 위해 라디오의 볼륨을 높인다. ‘실컷 울어라, 아가야. 라디오에서 나오는 노래 소리로 감춰줄 테니 마음껏 울거라. 에그 불쌍하기도 해라’ 하는 것처럼. 異常하게도 흐느끼는 女子의 모습보다 우는 그女를 바라보는 老人의 無表情한 얼굴이 더 記憶에 남는다. 저 마음은 都大體 어떨까. 子息을 가슴에 묻은 後 그 子息을 사랑했던 女子를 바라본다는 것은 또 어떤 마음일까.

    映畫 ‘男子가 사랑할 때’는 지나치게 新派로 包裝된 映畫다. 主人公 태일은 群山의 허름한 市場과 商街를 돌아다니며 日數 利子를 받으며 살아가는 人物이다. 理髮師인 兄 영일(곽도원)은 그런 동생을 거의 怨讐처럼 對한다. 영일이 그러는 데는, 過去에 自身의 아내 美英(김혜은)과 동생 사이에 ‘뭔가’ 있었다고 嫉妬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싸움으로 집안은 늘 개판이다. 집보다는 바깥 生活이 더 개판인 太一에겐 率直히 未來가 없다. 그런 그는 어느 날 한 女子를 보게 된다. 아버지의 病院費 때문에 身體 抛棄 覺書까지 쓰고 私債 빚을 쓴 浩亭. 태일은 利子를 받는다는 名分으로 호정에게 다가서기 始作한다. 女子는 이 ‘쓰레기 같은’ 男子를 絶對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女子들은 나쁜 男子를 結局 좋아하게 된다고 했던가. 浩亭은 곧 거칠지만 眞率한 太一의 마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그를 眞心으로 사랑하게 된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만으로는 率直히 ‘右웩!’이다. 陳腐하기 이를 데 없고, 손발이 오그라들기에 充分하며, 얘기가 어떻게 進行될지 두 눈 감고도 充分히 斟酌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라면 TV드라마 같은 데서 數十, 數百 番은 봐온 탓이다. 뭐 이딴, 낡은 映畫가 있을까 싶을 것이다.

    그런데 아뿔싸. 映畫는 奇異하게도 사람들을 한 뼘 한 뼘 스크린 앞으로 다가서게 만든다. 마치 호정이가 太一에게 그랬던 것처럼. 처음에는 손사래를 치며 가깝게 못 오게 했다가 오히려 男子를 自身의 가슴속 깊이 안으로 끌어안는 女子처럼. 映畫는 스스로를 사람들 마음속 깊이 파고들게 만든다. 사람들은 映畫를 보면서 말 그대로 펑펑 울기 始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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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映畫, 陳腐하다. 그런데 사람들을 스크린 가까이로 다가서게 만든다.



    눈이 가려준 眞實

    가는 날이 場날이라고, 群山은 그야말로 ‘눈 爆彈’이 쏟아진 狀況이었다. 除雪作業을 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길 어딘가에 꽁꽁 갇히게 될 판이었다. 날씨는 零下를 한참 밑돌았다. 足히 무르팍까지 푹푹 들어갈 程度로 눈이 쌓였다. 나뭇가지들이 눈 무게 때문에 축축 늘어졌다. 群山은 그렇게 눈으로써, 自身의 본 모습을 急하게 가리려 하는 것 같았다. 눈이 아니었다면 倭色(倭色)이 짙은, 華奢하면서도 奇妙한 난(亂)개발의 都市를 만났을 테니.

    日本이 韓半島의 物資를 吸血(吸血)해 가기에 最適의 場所로 꼽은 곳은 仁川이 아닌 群山이다. 群山은 全羅北道의 穀倉地帶를 連結하는 港口다. 여기서 生産되는 쌀은 良質로 有名했고 只今도 그렇다. 日帝가 여기에 눈毒을 들이지 않을 理由가 없었을 것이다. 가깝게는 金堤의 쌀이 群山 장미동(藏米洞) 倉庫에 保管돼 있다가 日本으로 실려 나갔다. 日帝强占期에 群山에 산다는 것은 착취당하고 抑壓받는 것을 의미했다. 群山은 어찌 보면 그래서, 可憐한 洞네다. 收奪을 當하는 氣分. 참 더러운 것이다.

    군산이라고 하면 그래서 왠지 늙은 娼女가 생각난다. 그런 偏見도 相當 部分 映畫 탓일 수 있다. 이창동 監督의 ‘薄荷沙糖’에서 主人公 영호(설경구)는 運動圈 組織員을 잡으러 다닐 때 群山에서 하룻밤을 머문다. 潛伏勤務에 지친 영호는 내리는 비를 避해 酒店에 들어가고, 그곳 女主人과 關係를 갖게 된다. 삶의 찌든 때로 힘들어하던 女子는 自身과 하룻밤 몸을 섞은 關係에 不過하지만 男子가 참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女는 다음 날 群山港에서 그를 기다리겠다고 말한다. 그女는 이 男子와 다른 生을 다시 한 番 始作할 料量이다.

    숨고 싶은 都市

    하지만 男子는 그 하루 前 警察署 取調室에서 運動圈 學生에게 물拷問과 몽둥이찜질로 無慈悲한 暴力을 加해 ‘半 주검’을 만들었다. 그의 마음속은 여러 갈래인데, 現在까지는 야만스러운 짐승이 한 마리 웅크린 狀態다. 그의 實際를 이 늙은 女給은 알지 못한다.

    어쨌든 以後 群山 하면 불쑥불쑥 ‘薄荷沙糖’이 떠오른다. 비 내리는 港口. 축축하고 陰濕한 거리. 그곳을 쳐다보는 娼女 한 名이 窓가를 서성거릴 것 같은 遊廓의 都市. 頹落하고 退色해가지만 奇異하게도 적어도 하룻밤 程度는 포근하게 머물러 가도 될 것 같은 空間이 바로 群山이다. 그렇게, 여기는 異常하게도 숨을 곳이 많을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映畫 쪽에서 보자면 群山은 오래前부터 ‘핫 플레이스(hot place)’였다. 로케이션 撮影으로 群山만한 곳이 없다는 얘기가 많았다. 서울에서 比較的 가까운 데다 映畫를 찍기에 便利한 空間이 많다. ‘薄荷沙糖’을 비롯해서 ‘將軍의 아들’ ‘타짜’ 等이 群山에서 찍은 映畫들이다.

    日本 적산가옥과 그에 準하는 距離가 남아 있는 群山이야말로 映畫가 追求하는 엑소티시즘(exoticism)을 具現하기에 安城맞춤이다. 日本式 家屋과 韓國의 傳統家屋이 섞여 있어 舊韓末부터 1970~80年代 狀況까지 表現하는 데 群山만한 곳이 없다. 게다가 撮影地로 적합한 地域은 大槪가 車로 30~40分이면 오갈 수 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경암동 鐵길 마을은, 막상 가보면 ‘도무지 여기에 뭐가 볼 게 있다고 이렇게들 몰리나’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건 單純히 鐵길만 보려 하기 때문이다. 모든 空間에는 歷史가 깃들어 있고, 過去와 現在가 오버랩 되면 느낌이 아주 달라진다.

    경암동에 鐵길이 들어선 것은 1944年이라고 한다. 그때도 只今처럼 鐵길 바로 옆으로 住宅이 들어섰다고 했다. 그래서 汽車가 이곳을 지나갈 때면 速度를 줄이고 驛務員이 호루라기를 불며 周邊의 빨래를 걷게 하고 열어둔 門을 닫게 했다고 한다. 只今도 그곳에 가서 鐵길을 마주해 쳐다보고 있으면 사람들이 右往左往 거리를 整理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저 鐵路와 집들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바꿔가며 歲月을 보내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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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群山 곳곳에 있는 日本式 家屋은 日帝强占期 收奪의 歷史를 간직한 空間이다.

    ‘申派 멜로 組暴 드라마’ 답지 않게도

    群山은 仁川과 함께 開港地 中의 하나였으며 이 두 곳을 통해 日本으로 舊韓末의 모든 物資가 빠져나갔다. 日帝 收奪의 現場인 만큼 日本人이 살았던 生活의 痕跡이 곳곳에 남아 있다. 日本式 家屋, 흔히 말하는 敵産家屋이 가장 많이 남은 곳이 바로 群山이다. 特히 신흥동과 월명동에 集中돼 있다.

    그中 신흥동에 있는 히로쓰 家屋은 大韓民國 近代文化遺産 第183號로 登錄됐을 만큼 保存이 잘돼 있다. 日帝 强點 當時 群山에서 布木店과 小規模 農場을 하던 히로쓰가(家)의 住宅이다. 住宅의 規模나 構造 等으로 봐서 當時 群山에서 지週給으로 꽤나 호화롭게 살았음을 斟酌할 수 있다. 只今은 한국제분의 所有로 군산시가 賃借해 觀光資源으로 活用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제분의 前身은 1956年 設立된 湖南製粉이다.

    ‘ㄱ字’로 이루어진 家屋 두 채가 나란히 붙어 있고, 木造建物인데 나무들을 끼워 맞추는 形式으로 建築돼 있어 이들 住宅이 오랫동안 原形 그대로 保存된 理由를 알게 해준다. 家屋 두 채 사이에는 日本式 庭園이 아름답게 構成돼 있다. 家屋 안에는 여러 칸의 다다미방과 도코노마(日本式 美術品 展示 空間)가 設置돼 있다. 히로쓰가의 富(富)가 어느 程度임을 斟酌할 수 있게 해주며 同時에 이들의 農村 收奪이 얼마나 惡辣했는지를 逆算하게 해준다.

    群山에서 만나는 수많은 敵産家屋 風景은 觀光의 맛있는 눈療飢이자 日帝 收奪期의 피눈물 나는 現場이기도 하다. 그런 兩面을 함께 吸收하는 것을 가리켜 歷史라고 한다. 群山은 歷史의 奧妙한 산證人 같은 都市다.

    ‘申派 멜로 組暴 드라마’라는, 事實은 가장 常套的인 장르만을 結合한 映畫치고 ‘男子가 사랑할 때’는 ‘답지 않게도’ 큰 그림, 곧 풀 쇼트를 즐겨 使用하는 映畫다. 아마도 그것은 監督의 藝術的 欲心이었을 것이다. 新派 映畫는 事實 클로즈업 技法을 많이 쓴다. 우는 演技가 많고 캐릭터의 表情이 더 重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男子가 사랑할 때’는 種種 그것을 抛棄하고 反對로 간다.

    예컨대 種種 癡呆氣를 보이는 아버지를 警察署에서 艱辛히 찾아낸 後, 온 家族이 집으로 돌아가는 場面 말이다. 精神이 若干 없는 아버지가 뭐라고 중얼거리며 걸어가면, 그 옆으로 며느리 微影과 孫女딸 松枝(강민아)가 터덜터덜 걸어간다.

    그 뒤로는 영일, 太一 兄弟 둘이 티격태격 뒤따라간다. 동생은 兄에게 “너 같은 人間도 兄이냐?”고 하고, 兄은 동생에게 “이 새끼야, 너 언제 兄 待接 제대로 해봤어?”라며 박박댄다. 그 모습을 카메라는 옆에서 트래킹(tracking)으로,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따라간다. 異常하게도 평화롭게 보이고 달이 떠 있다. 이 家族도 어떤 面에서는 幸福한 것이 아니냐고 自慰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쨌든 只今은 食口 모두 같이 있는 거 아니냐며.

    太一에게 極端的 背信感을 갖고 떠났던 浩亭이 太一을 다시 만나는 場面도 풀 쇼트로 處理됐다. 그 場面, 別것 아닌데 異常하게도 사람들을 많이 울린다. 태일은 이제 죽어간다. 自己가 唯一하게 사랑했던 女子 호정에게 그 事實을 알리지 않았다. 그러나 號艇은 우연한 機會에 그걸 알게 됐다.

    태일은 해성食堂(군산시 금암동 1-21)에서 自暴自棄하는 마음으로 燒酒를 마신다. 그가 거기 있을 것을 豫見한 號艇은 바쁘게 발길을 옮긴다. 둘은 해성食堂을 옆으로 두고 멀찌감치 서로 마주친다. 距離感 때문에 말을 나눌 수가 없다. 그래도 안다. 태일은 浩亭이 왜 왔으며, 號艇은 태일이가 그女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태일은 비죽비죽 울기 始作하고 浩亭은 그렁그렁 눈물이 고이기 始作한다. 街路燈은 이들의 머리 위에서 그늘진 빛을 던지며 둘을 포근히 감싼다. 둘은 멀리 떨어져 있지만 가깝게 다가서 있음을 안다.

    사랑은 그렇게 멀리 있는 듯 가까운 데서 소리 죽여 눈물을 흘리는 法이다. 그 사랑을 記憶하는 것이, 이문세의 노랫말처럼 더 슬프고 외롭고 힘든 法이다. 풀 쇼트의 藝術은 그 點을 加減 없이 說明해낸다. 이 映畫에서 풀 쇼트는 人物들의 感情을 表現해내는 데 매우 重要한 技法으로 使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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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月 4日, 初겨울부터 눈이 많이 쌓인 群山 거리.

    마냥 쌓이는 눈처럼

    ‘男子가 사랑할 때’를 보면서 실컷 울고 나면 群山에 가고 싶어진다. 癡呆氣로 自身의 말을 알아듣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며 태일은 아버지에게 告白한다.

    “아버지, 그 女子 참 착한 애야. 自己 아버지 죽어갈 때 病 수발 다 하고 그랬어. 그런 女子한테 어떻게 나까지 돌보라고 하겠어. 나 같은 놈을 말이야. 그렇게 못하겠더라고. 그러니까 나 죽으면 아버지가 그 女子 좀 잘해줘. 아버지, 내 말 알아들어?”

    라면을 꾸역꾸역 먹으며 獨白으로 이 場面을 演技하는 황정민은 眞實로 사람들을 라면 模樣으로 꾸역꾸역 울린다. 그러나 이 場面 亦是 황정민보다, 그 얘기를 無表情하게 듣는 아버지 남일우의 뒷모습이 壓卷이다. 그동안 얼굴을 잘 비추지 않던 元老俳優 남일우는 이 映畫에서 自身이 劇中 人物처럼 世上일에 對해 안 듣는 척, 事實은 모든 것을 듣고 살아왔음을 알려준다.

    그렇게 모르는 척하지만 事實 마음으로 울고 있을 이 여위고 늙은 아버지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만들며 가슴을 자꾸 때린다. 언제나 그렇지만 안으로 집어삼키는 눈물이 더 견디기 힘든 法이다. 그래서일까. 이 場面을 보고 있으면 다시 한 番 群山에 가고 싶어진다.

    그리고 다시 群山을 떠날 때는 노래를 바꿔보는 것이 좋다. 이때는 ‘When a man loves woman’李 제格일 것이다. 마이클 볼튼의 느끼한 목소리보다는 퍼시 瑟레지의 呼訴力 넘치는 元曲이 좋다.

    男子는 女子를 사랑해야 사람이 되는 法이다. 요즘 男子들은 眞情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아는가. 群山에 暴雪이 내렸다. 올해는 西海岸 港口에 눈이 많을 것이라고 했다. 눈처럼, 男子들의 眞正한 사랑이 쌓여가는 世上이 되면 좋겠다.

    中國飮食店 ‘빈解冤’

    3代가 이어온 異國的 空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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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미동 中國飮食店 빈解冤은 中國系 出身 家族이 3代째 함께 經營한다.

    映畫를 보다보면 “저건 分明 세트日 거야” 했는데 놀랍게도 現地 撮影으로 進行된 것이 있는가 하면, “저건 分明 어디 現地 撮影일 거야” 하면 어김없이 세트 撮影인 境遇가 許多하다. 그만큼 分揀이 안 될 程度로 映畫美術 分野가 精巧해졌다는 얘기다.

    ‘男子가 사랑할 때’에서 賭博場 兼 組織의 本據地로 쓰이는 中國飮食店은 영락없이 人工 세트로 보인다. 日常에서 저런 中國飮食店을 찾아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場面은 完璧하게 實際 中國飮食店에서 撮影됐다. 群山의 名物로 꼽히는 ‘빈解冤(濱海園)’이 바로 그곳이다.

    군산시 장미동 21-5番地. 긴 回廊으로 크고 길게 이어진 中央 홀과 그 옆으로 別室이 죽 配置돼 있는 것이 普通 中國飮食店과는 確然히 다른 모습이다. 天障은 建物 3層 높이는 족히 돼 보여서 웬만한 映畫 撮影의 必要條件인 照明 높이를 充分히 만족시킬 수 있도록 돼있다. 마치 映畫를 위해 意圖的으로 製作된 建築物처럼 느껴질 程度. 이곳에서 ‘男子가 사랑할 때’ 外에도 ‘빛과 그림자’ 같은 各種 TV 드라마 撮影이 隨時로 이어진 건 그 때문이다.

    빈解冤은 ‘바다가 가까이 있는 동산’이라는 意味로 實際로 港口가 가까이에 있다. 빈解冤은 1952年 開店했다. 1942年 中國 산둥에서 살던 蘇秦童, 王政 夫婦는 흘러흘러 韓國에 定着해 仁川 차이나타운에서 胡떡집을 하며 살았다. 그러다 戰爭이 터졌고 1·4 後退 때 木浦나 釜山으로 避亂을 갈 料量이었으나 그만 배가 故障을 일으켜 難破할 危機에 處하고 말았다. 그 배가 艱辛히 海岸에 到着한 곳이 바로 群山이다. 배 안에는 蘇秦童 夫婦 같은 中國人이 많았는데 結局 이들 中 90%가 群山에 定着했다고 한다.

    이들 夫婦는 群山 港口 近處에서 작은 국밥집을 열었다. 飮食 솜씨가 남달라서인지 국밥집은 今方 門前成市를 이뤘다. 이들 夫婦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는데 素服産科 소복자가 그들이다. 딸 소복자는 왕조석이라는 男子와 結婚했고, 아들 小복산은 주숙금이라는 女子를 얻었다.

    두 夫婦, 다섯 아이

    어려운 時節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함께 모여 살았으며 국밥집에 사람들이 자꾸 몰려들자 사위인 왕조석의 提案으로 只今 이곳 장미동에 있는 日本式 家屋을 사들여 中國飮食店으로 改造했다. 장미동은 漢字로 ‘藏米洞’이다. 쌀을 貯藏하는 洞네라는 意味다. 當時 全羅道 穀倉地帶에서 나는 쌀이 群山港을 통해 日本으로 얼마나 많이 搬出됐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장미동 빈解冤은 그 숱한 歲月 동안 세 番 改築돼 只今의 形態가 됐다. 日本式 家屋은 中國式 傳統家屋 形態와 섞이게 됐다. 韓國食道 끼어들었다. 딸 夫婦는 아이를 낳지 못했지만 아들 夫婦는 다섯 아이를 낳았다. 이들은 함께 아이를 기르며 살았다. 사위는 飮食店의 카운터 일을 맡아 가게를 키웠고, 아들은 廚房을 包含한 모든 勞動을 맡았다. 只今은 아들의 큰아들인 소란정(62)-刑民의(60) 夫婦가 飮食店을 經營한다. 이들은 膝下에 1男 2女를 뒀다. 아들과 딸은 모두 群山을 떠났다. 빈解冤 家族 經營은 이番 3臺가 마지막이 될 公算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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