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沙漠에 暖爐 팔고 아프리카에 스키 팔고|신동아

沙漠에 暖爐 팔고 아프리카에 스키 팔고

‘輸出韓國’ 尖兵 綜合商社맨의 追憶

  • 최호열 記者 | honeypapa@donga.com

    入力 2014-12-23 13: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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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年 政府 ‘輸出振興對策’으로 本格化
    • 當時 最高 新郞감…大企業 職員 1.5倍 月給
    • 敵對國? 戰爭터? 돈 냄새만 나면 달려간다
    • 技術 없어도 “배우면서 만들겠다” 배짱 說得
    사막에 난로 팔고 아프리카에 스키 팔고
    드라마 ‘未生’李 話題다. 職場人들의 서글픈 現實을 事實的으로 그려 재미와 共感, 感動을 줬기 때문이다. ‘未生’에 登場하는 職場人은 綜合商社 營業社員들이다. 主人公이 勤務하는 營業3팀은 中古 自動車를 輸出했다가 이란産 原油를 輸入하는가 하면 라면, 携帶電話 等 每番 새로운 品目을 다룬다.

    하지만 實際로 綜合商社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이제 그런 綜合商社는 存在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輸入을 擔當하는 部署와 輸出을 擔當하는 部署가 따로 있고, 輸出도 鐵鋼이면 鐵鋼, 플랜트面 플랜트 等 팀別로 專門化했다는 것. 그들은 “드라마 ‘未生’에서처럼 한 팀에서 이것저것 파는 것은 1990年代 以前 이야기”라고 했다.

    이야기를 더욱 興味津津하게 展開하려 假想의 綜合商社 營業팀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데 1970~80年代 綜合商社맨들은 ‘未生’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일을 했다. 不可能을 可能으로 바꿨고, 去來를 성사시키기 爲해서라면 오지, 舍知(死地)에 뛰어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제는 ‘傳說’李 된 옛 商社맨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나, 바이어 만나야 돼”

    綜合商社는 1975年 政府의 綜合貿易商社 育成方針에 따라 登場했다. 1973年 1次 午日쇼크 影響으로 先進國의 經濟成長率이 急激히 鈍化하고 保護貿易主義가 剛해지면서 輸出이 큰 打擊을 받았다. 劃期的인 輸出振興 對策이 切實했고, 그 代案의 하나가 綜合貿易商社였다. 世界 最初의 綜合貿易商社는 1600年 英國 東印度會社로 알려졌고, 日本은 1873年 미쓰비시상사를 設立했다. 大規模 資本力을 가진 貿易業者를 뜻하는 綜合商社는 元來 돈이 되는 거라면 뭐든 다 하는 會社였지만, 우리나라는 制度를 만들 때부터 輸出에 傍點을 뒀다.



    1975年 下半期부터 世界景氣가 午日쇼크의 影響에서 벗어나면서 綜合商社는 엄청난 速度로 成長했다. 時間이 갈수록 各 그룹을 代表하는 會社로 자리 잡아갔다. 여기엔 商社맨들의 獻身的인 努力이 決定的 寄與를 했다. 이들은 5大洋 6大洲 地球村 구석구석을 누비며 ‘메이드 인 코리아’ 製品을 내다 팔았다. 輸出 韓國의 尖兵이었던 셈. 이들이 있었기에 韓國의 飛躍的 成長이 可能했다.

    1970~80年代 ‘綜合商社맨’은 젊은이들에게 羨望의 職業이었다. 當時 大企業 公開 採用 工高에 正裝을 차려입고 007 가방을 든 男子가 하늘을 나는 飛行機 아래에 서 있는 寫眞이 들어갔을 程度였다. 그 時節 綜合商社에서 勤務했던 박주원(65) 氏는 “그땐 綜合商社에 다닌다고 하면 最高의 新郞감으로 꼽혔다. 그만큼 綜合商社에는 有能하고 젊은 人材가 많았다”고 回顧했다.

    “綜合商社 職員이 아니면 海外 나가는 건 꿈도 꾸기 어려운 時代였다. 같은 大企業이라도 綜合商社 職員 月給이 더 많았다. 내 記憶에 50% 程度는 더 많았다.”

    ‘輸出’이라면 모든 게 解決되던 時節이라 綜合商社맨들의 威勢는 대단했던 模樣이다. 通行禁止를 어기거나 輕犯罪로 警察署에 끌려갔더라도 “來日 아침 海外에서 온 重要한 바이어를 만나야 한다”고만 하면 풀려났다고 한다. 바이어를 接待하다보니 그룹 任員이나 갈 수 있는 高級 술집도 隨時로 드나들 수 있었다.

    이들이 取扱하는 品目은 바늘부터 船舶까지 가리지 않았다. 最初의 綜合商社인 삼성물산도 이쑤시개, 비누, ‘이태리타월’ 等을 팔면서 始作했다. 假髮, 旣成服, 玩具, 食器類, 運動用具 等이 草創期 主要 營業 品目이었다. 韓藥材도 輸出했다. 自動車用 배터리가 主要 重化學製品이었을 만큼 品目이 不足했지만 綜合商社맨들은 熱心히 팔았다.

    世界地圖 놓고 “여기 가보자”

    當時 營業戰略은 ‘無條件 나가고 보자’는 式으로 單純했다. 現代綜合商社 常務를 지낸 강정식 氏는 “世界地圖를 펼쳐놓고 보다가 그냥 ‘여기에 가보자’ 해서 나가는 式이었다”며 웃었다. 한 달 日程으로 出張을 갔다가 現地에 1年 넘게 머무는 일도 잦았다. 18泊19日 동안 10個國을 돌아본 적도 있다. ‘돈 냄새’가 나면 美國, 日本, 유럽, 東南亞는 勿論 아프리카, 中南美의 奧地, 甚至於 敵對國이나 戰爭터에도 달려갔다. 姜 前 常務는 브루나이 油田을 따내려 現地 密林 속으로 들어갔다가 食人種(?) 마을에 갇힌 적도 있다고 했다.

    1973年 29歲에 三星物産 런던 支社長이 된 김재우(71) 韓國코칭協會 會長은 1975年 中東支社長으로 發令을 받고 레바논 베이루트로 向했다. 當時 中東은 石油波動으로 原油값이 4倍나 뛰어 돈이 흘러넘쳤다. 거기서 뭐든 팔아보라는 게 會社의 指示였다. 하지만 國交樹立度 안 됐고 環境도 劣惡해 月給도 제때 傳達되지 않았다.

    “生活費가 다 떨어졌지만 돈을 빌릴 데가 없었다. 길을 가는데 美國系 銀行이 눈에 띄었다. 서울의 三星物産 本館 1層에 있는 것과 같은 銀行이었다. 無酌定 들어가 支店長을 만나 ‘나는 삼성물산 職員이다. 會社에서 月給 送金處理가 늦어져 돈이 없다. 三星物産 本館에 當身네 銀行 支店이 있으니 그곳에 連絡해 내 身分을 確認하고 1萬 달러를 빌려달라’고 했다. 支店長이 荒唐하다는 表情을 지었지만 며칠 後 돈을 빌려주겠다는 連絡이 왔다.”

    이 일을 契機로 支店長과 親해진 그는 支店長에게 이 銀行에서 信用狀을 開設한 貿易商 名單을 받아 그들을 一一이 찾아다니며 營業을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이름도 잘 모르는 나라, 들어본 적도 없는 會社로부터 物件을 사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그렇게 6個月쯤 지났을 무렵, 한 貿易商이 지나가는 말로 “軍服을 만든 經驗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때 삼성그룹의 제일모직은 原緞을 만드는 會社로 軍服 完製品을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貿易商에겐 無條件 ‘우리 本社에 軍服 專擔과까지 있으니 걱정마라’고 큰소리쳤다. 베이루트에 있는 KOTRA(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事務室에 軍服이 몇 벌 굴러다니는 걸 본 記憶이 났다. 그걸 가져다 샘플이라며 보여줬다. 軍服을 살펴본 貿易商은 마음에 들었는지 사우디아라비아 軍部의 軍服 納品 擔當者를 連結해줬다.”

    한 벌에 12달러씩 3萬 腸을 契約했다. 赴任 後 첫 契約이었다. 이를 契機로 사우디 軍部에 287個 品目을 輸出해 年賣出 1億 달러 實績을 올리게 됐다. 因緣이 이어져 시리아에도 野戰점퍼를 600萬 달러어치나 팔았다.

    그뿐 아니다. 그 後 바레인에서 活動할 때 이라크에도 팔 게 없을까 살펴보려고 旅券도 없이 數次例 이라크에 密入國했다. 걸리면 監獄行은 勿論이고, 國交樹立度 안 된 狀態인 데다 이란과 戰爭 中이어서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生死의 갈림길

    사막에 난로 팔고 아프리카에 스키 팔고

    綜合商社를 背景으로 한 드라마 ‘未生’.

    “그렇게 이라크 商人들과 顔面을 넓혀가던 中 사담 후세인 軍部에서 ‘武器를 사고 싶다’며 만나자는 連絡이 왔다. 本社에 連絡했더니 國防部 職員과 安企部 要員이 날아왔다. 이들과 함께 이라크로 協商을 하러 갔는데, 砲彈이 날아다니는 戰爭터를 自動車로 通過해야 하는 危險한 瞬間이었다. 그걸 뚫고 갔더니 이라크 副總理가 直接 나와 當時 우리나라에서 生産하는 가장 큰 武器였던 155mm 曲射砲를 要求했다. 美國의 同意 아래 2000萬 달러어치를 輸出했다. 우리나라 最初의 武器 輸出이었다. 이 去來를 契機로 兩國이 修交까지 갔으니, 내가 꽤 寄與한 셈이다.”

    서울산업진흥원(SBA) 海外輸出專門委員으로 活動하는 김달호(70) 氏도 戰爭터에서 ‘貿易 神話’를 일궜다. 1980年 1億 달러를 輸出한 功勞로 産業勳章을 받기도 했다. ‘즐기는 輸出 돈 버는 貿易’이라는 冊을 펴내기도 한 그는 只今도 全 世界를 돌며 自身의 營業 노하우를 傳受한다.

    “삼성물산에서 일하던 1976年 리비아 트리폴리 支社長으로 發令받았다. 우리와 國交 樹立도 안 됐을 뿐 아니라 北韓과 더 가까웠다. 게다가 카다피 革命政府 時節이라 反美示威가 잦았고 治安도 不安했다. 언제 北韓 工作員에게 拉致될지, 언제 示威隊가 집이나 事務室로 들이닥칠지 모르는 不安感을 안고 지내야 했다. 反美示威가 한창 甚할 때는 外國商社 職員들은 다 빠져나가고 달랑 혼자 남은 적도 있다. 風土病에 걸린 部下 職員이 제대로 治療도 받지 못하고 死亡하는 안타까운 일도 겪었다. 그렇다고 營業을 안 할 수는 없었다. 每日같이 輸入 業務를 擔當하는 機關들을 드나들며 팔 만한 物件이 없는지 苦悶했다.”

    ‘北極 에스키모인들에게 冷藏庫를 파는 게 眞짜 세일즈맨’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지만, 그는 反對로 沙漠에 暖爐를 판 것으로 有名하다. 리비아는 國土의 90%가 沙漠이다. 흔히 ‘沙漠’ 하면 덥다고만 생각하지만 밤엔 꽤 춥다. 特히 겨울은 우리나라 初겨울 날씨와 비슷하다. 그는 카다피 政權이 沙漠에 사는 住民에게 暖爐를 配給하려 한다는 情報를 入手하고는 入札에 積極的으로 뛰어들었다.

    “처음 契約한 게 720萬 달러어치였다. 只今 價値로 換算하면 1億 달러가 넘는 額數다. 컨테이너 273個 分量의 莫大한 量이었다. 納期를 맞추기 위해 當時 暖爐 製造社들이 總動員됐다. 暖爐를 대한항공 貨物機에 실어 날랐는데, 우리 國籍 航空機가 처음으로 리비아로 날아가는 瞬間이었다. 着陸 許可가 나지 않아 마지막까지 苦生했다. 그 뒤 3年 동안 暖爐만 約 2000萬 달러어치를 팔았다.”

    그는 每年 1億 달러어치 以上의 物品을 리비아에 輸出했다고 했다.

    “洋襪부터 船舶까지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았다. 껌도 年間 數十萬 달러어치를 팔았다. 스테인리스 洋食器, 茶盞 세트, 衣類가 特히 잘 나갔다.”

    危險을 무릅쓰고 營業을 하다보면 때로 生死의 갈림길에 놓일 때도 있다. 박찬법 아시아나그룹 顧問도 그랬다. 금호실업에 勤務하던 1970年代 레바논에 갔을 때다. 베이루트 市內에선 基督敎 民兵隊와 이슬람 民兵隊가 交戰을 벌이며 對峙했다. 現地 駐在員과 함께 食事를 하러 英國 食堂으로 向하던 그는 갑자기 얼큰한 飮食이 생각나 길 건너 스페인 食堂으로 발길을 옮겼다. 스페인 食堂에서 수프를 막 한 숟갈 떠먹으려는 瞬間, ‘꽝’하는 爆發音과 함께 바로 눈앞에 있던 英國 食堂이 통째로 날아갔다. 爆彈테러였다. 한瞬間의 選擇이 生과 死를 갈랐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안 되면 되게 하라’는 게 商社맨들의 不文律이었다. 박찬법 顧問은 금호실업에 勤務하던 1975年, 國際博覽會 參席을 위해 이란에 머물다 本社로부터 한 通의 電文을 받았다.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 있는 바이어가 鐵筋 1萬t을 購買하겠다고 하니 가서 契約을 締結하라는 內容이었다. 그에겐 사우디아라비아 비자가 없었다. 비자를 받으려면 몇 달을 기다려야 했다.

    그는 사우디 航空社 機長의 도움을 받아 無作定 飛行機를 탔다. 하지만 中間 寄着地인 리야드에서 不法 入國 嫌疑로 逮捕돼 監獄에 갇혔다. “製茶를 거쳐 베이루트로 갈 豫定이어서 비자가 없어도 되는 줄 알았다”고 우긴 끝에 機長에게 旅券을 맡기는 條件으로 第多幸이 許容됐다. 겨우 바이어를 만나 2500萬 달러짜리 契約을 성사시켰지만 이番에는 사우디를 어떻게 빠져나오느냐가 問題였다. 事情을 알게 된 바이어가 外務省에 善處를 付託해 베이루트로 强制出國당하는 線에서 마무리됐다.

    現代綜合商社 理事를 지낸 정동학 氏는 印度에 鐵鋼을 輸出했다. 그러다 1984年 印度 政府가 주화(鑄貨)를 入札한다는 情報를 入手했다. 그때까지 韓國은 海外에 돈을 輸出한 事例가 없었다. 그래도 無作定 入札에 參與하기로 하고 內部 關係者를 통해 情報를 빼내는 한便 引渡 實務陣에 對한 로비에 들어갔다.

    “入札 成功 可能性을 確認하기 爲해 素筌(正式 주화를 印刷하기 前 狀態) 샘플을 보여줬다. 當然히 退字를 맞았다. 銅錢 옆面을 보면 우리나라 주화는 줄무늬만 있는데 印度 주화는 무늬가 들어가 있어 만들기가 쉽지 않다. 鑄貨 製造業體에서도 못 하겠다고 몇 番이나 抛棄하려는 것을 說得해 겨우 基準에 맞춰 入札에 參與했다. 結局 우리가 20萬 달러어치 程度를 受注하는 데 成功했다.”

    그런데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正式으로 供給할 주화의 샘플을 만들어야 하는데 到底히 그 基準에 맞출 수 없었다. 그가 妙案을 짜냈다. ‘現地 샘플 承認’이라는 名目으로 印度 造幣廳長과 專門技術者들을 韓國으로 招請해 그들로 하여금 直接 우리 技術者들에게 製造技術을 가르치도록 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基準에 맞춰 供給할 수 있었고, 이 일을 契機로 技術이 쌓여 더 많은 種類의 印度 주화를 受注하게 됐다. 그 額數가 數千萬 달러에 達했다.

    固定觀念을 뒤집어라

    김달호 專門委員은 오늘을 살아가는 職場人들도 綜合商社맨의 姿勢로 固定觀念을 뒤집고 市場을 보는 眼目을 길러야 한다고 助言한다.

    “아프리카에 스키 裝備를 輸出한다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모로코에 스키場이 여러 個 있다. 實際 스키 裝備 輸出도 이뤄진다.”

    현대중공업에서 船舶 파는 業務를 맡아 하다 綜合商社맨이 된 강정식 前 現代綜合商社 常務도 固定觀念을 뒤집어 成功한 事例다.

    “1973年부터 始作된 石油波動으로 契約됐던 船舶 輸出조차 取消되던 時節이었다. 뭔가 代案이 必要했다. 美國을 살펴보니 大型 建物 工事, 高速道路 擴張工事가 한창이었다. 그때 우리에겐 배를 만들려고 쌓아둔 鐵鋼이 많았다. H빔 같은 鐵 構造物을 만들어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無酌定 덤벼들어 뉴올리언스 미시시피강 鐵橋 2個 工事에 들어가는 鐵 構造物 輸出에 成功했다. 以後 휴스턴 컨벤션센터, 시카고 스타디움 公使의 鐵 構造物 納品權度 따냈다.”

    美國에서 營業을 하던 그는 멕시코灣에서 石油를 試錐하는 海洋플랜트를 보게 됐다.

    “그것도 따지고 보면 鐵로 만든 構造物이니 우리가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바로 關聯 資料를 蒐集했다. 當時 海洋플랜트는 美國 會社들이 獨占했다. 石油 試錐는 中東뿐 아니라 印度 봄베이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서도 이뤄졌다. 마침 말레이시아의 油田會社에서 海洋플랜트 入札 公告가 났다. 入札書類로 뭘 만들어야 하는지, 價格 見積을 어떻게 내야 하는지도 모른 채 挑戰에 나섰다.”

    會社에 損害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該當 部署에서 産出한 價格에 50%를 더 얹어 入札價格을 써냈다. 그런데도 美國 會社들이 提示한 價格의 折半밖에 안 됐다. 價格競爭力이 있다는 걸 確認한 江 常務는 油田會社에 “우리에게 技術을 가르쳐주면서 만들면 너희는 建設費用을 낮출 수 있어 서로 利益 아니냐”고 說得했다. 그렇게 受注에 成功하자 일감이 몰려왔다. 只今도 海洋플랜트는 우리나라 主要 輸出 業種 中 하나다.

    勿論 受注가 처음부터 쉬웠던 것은 아니다. 姜 前 常務는 “처음엔 擔當者들이 만나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抛棄할 수는 없었다. 일이 있든 없든 자주 찾아갔고, 갈 때마다 女祕書에게 韓國에서 가져온 액세서리나 초콜릿을 膳物하며 歡心을 샀다. 그렇게 親해지니까 女祕書가 面談 約束을 잡아주기도 하고, 重要한 入札이 있을 때 情報를 슬쩍 흘려주기도 했다. 門前薄待하던 擔當者도 나중엔 ‘茶나 한盞 하자’며 마음의 門을 열었다”고 노하우를 들려줬다.

    김달호 專門委員도 나름의 營業 노하우 한 가지를 들려줬다.

    “아랍語를 어느 程度 배우고 리비아에 갔다. 하지만 去來 파트너와 協商할 때는 無條件 英語로만 했다. 그들은 내가 아랍語를 모르는 줄 알고 協商 中에도 自己네끼리 아랍語로 意見을 調律하곤 했다. 相對方의 意圖를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어떤 狀況에도 바로 對處할 수 있어 協商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었다.”

    着眼大局 着手小局

    韓國貿易協會 資料에 따르면 綜合貿易商社가 國內 全體 輸出에서 차지하는 比重은 1975年 9%에서 1980年代엔 30%臺로, 1999年엔 51%까지 增加했다. 1980年代에는 東南亞, 中東, 中南美 企業人들이 ‘韓國 綜合商社를 배우자’며 우르르 訪韓하기도 했다.

    하지만 綜合商社의 疾走는 거기까지였다. 以後 綜合商社들은 下降曲線을 그리기 始作했다. 企業 環境이 急變했기 때문이다. 2000年代 들어서면서 財閥의 系列分離가 이어지고, 남은 系列社들도 自體 海外 네트워크를 擴充하면서 直接 輸出을 챙기기 始作했다. 무엇보다 인터넷 等 情報通信技術의 發展으로 綜合商社의 가장 큰 長點이던 ‘情報力 優位’를 維持하기 힘들어졌다. 規模가 작은 會社들도 綜合貿易商社를 거치지 않고 直接 輸出入하기 始作했다. 事情이 이렇다보니 全體 輸出에서 綜合貿易商社가 차지하는 比重이 2~3%까지 낮아졌다.

    結局 政府는 對外貿易法을 改正하고 2009年 綜合貿易商社 制度를 廢止했다. 中小企業 輸出을 支援하는 專門貿易商社 制度가 運營되지만 그 規模는 綜合貿易商社보다 작다. 旣存 綜合貿易商社 7곳(三星物産, GS글로벌, 대우인터내셔널, 曉星, LG商事, SK네트웍스, 現代綜合商社)도 輸出入 業務보다는 資源開發 等 事業 多角化를 통해 活路를 摸索한다. 대우인터내셔널은 石油·가스 等 資源開發, 發展投資(IPP)와 같은 인프라 事業에 重點을 둔다. SK네트웍스는 石炭鑛物 事業에서 石油製品 販賣(注油所), 自動車 輕整備(스피드메이트), 패션 事業, 호텔 事業까지 展開한다. 綜合商社가 아니라 ‘綜合事業會社’로 變身한 것.

    하지만 綜合商社맨들의 挑戰 精神은 成功神話를 꿈꾸는 많은 이의 가슴에 龜鑑으로 새겨져 있다. 平生을 綜合商社맨으로 산 김재우 韓國코칭協會長은 “綜合商社맨의 姿勢는 바둑을 두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着眼大國 着手小國(着眼大局 着手小局).’ 바둑을 둘 때 눈은 班常 全體의 큰 形局을 보고, 돌을 놓을 때는 눈앞의 작은 形勢를 정확히 살피는 것처럼 營業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김달호 專門委員은 “綜合商社맨들이 그랬듯이 只今도 挑戰하면 機會는 얼마든지 있다”고 말한다. “韓國에서 요즘 就業이나 再就業이 어렵다고 하는데, 靑年이든 中年이든 國內만 보지 마라. 海外 나가면 할 게 많다. 特히 코스타리카 같은 中美 地域은 機會의 땅이다. 勇氣만 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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