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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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
龍雲
1937年 當時의 한용운
법명 용운(龍雲)
出生 1879年 8月 29日 ( 1879-08-29 )
朝鮮 忠淸道 결성현 현내면 박철리 잠方骨
入寂 1944年 6月 29日 ( 1944-06-29 ) (64歲)
日帝强占期 京城府 東大門區 城北定 심우장
入籍原因 中風
居住地 日帝强占期 京城府 東大門區 城北定 심우장
國籍 大韓民國
俗名 한정옥(韓貞玉)
經歷 新幹會 中央委員長
宗派 曹溪宗
稱號 兒名 한유천 (韓裕天)· 한봉완 (韓奉玩)
萬海(萬海·卍海)
職業 僧侶 , 是認 , 獨立運動家
配偶者 유숙원(再婚), 전정숙(離婚)
子女 한보국(아들), 한영숙(딸)
父母 한응준(簿), 방숙영(某)
親戚 한윤경(兄)
웹사이트 萬海 記念館

한용운 (韓龍雲, 1879年 8月 29日 ( 陰曆 7月 12日 ) ~ 1944年 6月 29日 )은 日帝强占期 是認 , 僧侶 , 獨立運動家 이다. 本貫은 淸州 . 號는 萬海(萬海)이다. 佛敎 를 통한 言論, 敎育 活動을 하였다. 從來의 無能한 佛敎를 改革하고 佛敎의 現實參與를 主張하였으며, 그것에 對한 代案點으로 佛敎社會改革論 을 主張했다. 3·1 萬歲 運動 當時 民族代表 33人 의 한사람이며 光復 1年을 앞둔 1944年 6月 29日 中風 兵士(入寂)하였다. 獨立宣言書의 "公約 3張"을 追加補完하였고 [1] 獄中에서 '朝鮮 獨立의 서'(朝鮮獨立之書)를 지어 獨立과 自由를 主張하였다.

1910年 日本이 主張하는 韓日佛敎同盟을 反對撤廢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等의 獨立志士(志士)들을 만나 獨立運動을 協議하였다. 1918年 11月부터는 佛敎 最初의 雜誌인 《 유심 》을 發行하였고 1919年 3.1 萬歲 運動 當時 獨立宣言을 하여 체포당한 뒤 3年間 西大門 刑務所 에서 服役하다 풀려났다. 1920年代 에는 帶妻僧 運動을 主導하여 中에게도 結婚할 權利를 달라고 呼訴하기도 하였다. 1926年 詩集 《 님의 沈默 》을 出版하여 抵抗文學에 앞장섰고, 佛敎를 통한 靑年運動, 言論活動에 參與하였다. 1927年 2月부터는 新幹會 에 參與하여 中央執行委員과 이듬해 新幹會 京城支部腸을 지냈다.

1918年 《有心》에 詩를 發表하였고, 1926年 님의 沈默 〉等의 詩를 發表하였다. 님의 沈默에서는 旣存의 市와, 時調의 形式을 깬 散文詩 形態로 詩를 썼다. 小說家로도 活動하여 1930年代 부터는 長篇小說《黑風》(黑風),《後悔》,《薄明》(薄命), 短篇小說《죽음》等을 비롯한 몇篇의 長篇, 短篇 小說들을 發表하였다. 1931年 김법린 等과 靑年僧侶祕密結社體인 晩唐(卍黨)을 組織하고 黨首가 되었으나 1937年 佛敎關係 抗日團體를 摘發하는 過程에서 萬黨事件(卍黨事件)의 背後로 逮捕되었다가 풀려났다. 著書로는 詩集 《 님의 沈默 》을 비롯하여 《朝鮮佛敎維新論》,《佛敎大展》,《十玄談註解》,《佛敎와 考慮帝王》 等이 있다.

親日 로 變節한 최남선 에 關하여서는 1937年 自身에게 최남선 을 言及한 김홍규 에게는 "아직도 崔南善이 살아 있소?"라고 하는가 하면, 최남선 이 塔골公園에서 人事를 하자, 처음에는 알은체도 하지 않다가 崔南善이 自身을 못 알아보겠냐면서 繼續 이름을 말하자 "내가 아는 六堂은 이미 죽었소."라면서 차갑게 對했다.

生涯 [ 編輯 ]

幼年期 [ 編輯 ]

한명회 동생으로 典廏署勝(典?署丞)을 지낸 서원군 한명진 의 後孫이었다.

沒落한 兩班 士大夫 家門 出身으로 아버지 한응준은 忠勳府 種5品 道士(都事)를 지냈고 東學農民革命때 招討使 이승우의 參謀官으로 從事하다 戰死하였다. 幼年時代에 關해서는 本人의 술膾도 없고 側近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6歲부터 성곡리의 서당골 書堂에서 漢學을 배웠다.

少年 時節 [ 編輯 ]

14살이 되던 해인 1892年 風俗에 依해 地主 집의 딸 전정숙과 結婚했으나 그는 家庭에 疏忽하였다고 한다. 16살 되던 해인 1894年 부터는 홍성읍 내 書堂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전정숙에게서 아들 한보국을 두었으나 그는 出嫁하였다. 後日 한보국이 父親인 그를 보러 왔을 때 그는 外面하였다.

1894年에 家出하여 東學 農民 運動에 加擔하였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는 紅酒監營 官軍의 中軍이 되어 農民軍을 討伐하는데 參與한다. 1895年 또는 1897年 에 故鄕 洪城을 떠나 麟蹄郡 百潭寺 等을 轉轉하며 數年 間 佛敎書籍을 읽었다고 한다.

放浪 生活 [ 編輯 ]

靑年期의 萬海

建陽 1年인 1896年 에 그는 雪嶽山 오세암 에 들어갔다. 後日 그는 '나는 왜 중이 되었나'라는 그 自身의 述懷에 簡略下에 言及하기를 世上에 對한 關心과 生活의 方便으로 집을 떠나 오세암에 入山하여 처음에는 머슴으로 일하다가, 出家하여 僧侶가 되었다고 한다. 出家의 原因은 正確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當時 故鄕 洪城郡 紅酒에서도 東學 農民 運動 과 義兵運動이 展開된 것으로 미루어 歷史的 激變期의 狀況에 影響을 받은 것으로 推定된다. 東學 運動이 失敗한 뒤 한동안 오세암에 隱身해 있다가 다시 故鄕 洪城郡으로 되돌아왔다.

오세암에 머무르면서 그는 佛敎의 基礎知識을 涉獵하면서 선(禪)을 닦았다. 佛敎 에 入門한 뒤로는 主로 敎學的 關心(敎學的關心)을 가지고 大藏經 을 閱覽하였다. 1896年 下山하여 더 큰 世上을 배우고자 시베리아行을 決心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 에서 죽을 고비를 겨우 謀免하고 1897年 에 歸鄕하였으나 居處가 없던 그는 1901年 妻家에서 2年間 隱身하다가 家出한 後 나중에 다시 再出嫁를 한다.

大韓帝國 活動 [ 編輯 ]

出家와 文學 [ 編輯 ]

百潭寺 境內의 萬海記念館

1905年 乙巳勒約 直後 洪城 에서는 第2次 義兵運動이 일어났고 이때 아버지 한응준은 義兵들에 依해 殺害되었다. 그해 無酌定 家出하여 再入山, 百潭寺 에 가서 김연곡 을 恩師로 하여 正式으로 出嫁, 김연곡에게 得道한 다음 전영제 에게 戒(戒)를 받아 僧侶가 되었고, 漫畫(萬化)에게서 法을 받았다. 誡命은 봉완(奉玩)이며 法號는 萬海(萬海 또는 卍海)라 하였다. 以後 數年 間 佛敎活動에 專念했다. 이즈음에 佛敎 關聯 書籍뿐만 아니라 량치차오 의〈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等을 接하면서 近代思想을 다양하게 受容하였다.

1908年 朝鮮 全國 寺刹 代表 52人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元興寺)에서 원種宗務員(圓宗宗務院)의 設立에 參與한 뒤 1909年 5月부터 6個月間 원種宗務員 視察團의 한 사람으로 日本 各地를 돌아다니며 新文明을 視察하고 見聞을 넓혔다. 이러한 다양한 經驗이 그의 思想 形成에 큰 影響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日本을 旅行하던 中에 3·1獨立運動 때의 同志가 된 崔麟 等을 만나 交流하였다. 1909年 12月에 歸國한 뒤 1910年 以後 漢文으로 된 佛經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 卽 佛敎의 大衆化作業에 注力하였다. 1909年 初에는 朝鮮佛敎의 維新을 主張하는 論著《 朝鮮佛敎維新論 》을 著述하였다. 1910年 10月에 韓日 合邦 條約 이 締結되자 滿洲 東北三星(東北三省)으로 갔다. 이곳에서 滿洲地方 여러 곳에 있던 우리 獨立軍의 訓鍊場을 巡訪하면서 그들에게 獨立精神과 民族魂을 심어주는 일에 專力하였다. 獨立軍 軍官學校를 訪問, 이를 激勵하고 滿洲 , 몽골 , 시베리아 等을 訪問하고 歸國하였다.

僧侶들의 結婚 自由化 主張 [ 編輯 ]

1909年 初부터 그는 《 朝鮮佛敎維新論 》(朝鮮佛敎維新論)을 執筆하여 1910年 秒에 脫稿하였다. 同時에 그는 百潭寺 에서 거의 獨學하다시피하며 대장경을 暗誦하고 漢文과 印度語로 된 佛敎 經典들을 한글로 飜譯하는 作業을 하였다. 한便 1909年부터 그는 僧侶의 結婚을 許容해야 한다는 主張을 펼쳤다. 萬海는 1910年 5月 僧侶의 結婚을 公式的으로 許諾해 달라는 文件을 請願書 形式으로 大韓帝國 中樞院 韓國統監府 에 陳情書로 올렸다. 僧侶 에게 結婚을 禁止하라고 부처님 이 가르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見解였다.

부처님께서는 衆生들이 迷惑을 떠나 깨달음을 얻고 악을 고쳐 善을 行하도록 바라셨으나, 衆生의 끈氣가 各其 달라서 不得不 天下에서 情을 除去하고 欲望을 끊어 버린 事實들을 모두 演說하였던 것이니, 各其 좋아하는 것을 좇아 引導하시고자 希望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戒律에 있는 禁婚은 본디 方便의 하나에 不過한 것일뿐, 佛敎의 窮極의 경지와는 距離가 먼 것이니 이를 除去한들 어찌 損傷됨이 있겠습니까. [2]
 
— 建白書 中에서

大衆의 結婚生活, 家長이라는 짐을 理解하지 못하면서 衆生들의 마음을 理解한다는 것은 不可能하다는 것이 그의 主張이었다. 그러나 僧侶의 結婚을 許可해 달라는 그의 主張은 그대로 默殺당한다. 韓日合邦 直後인 1910年 11月에 韓龍雲은 다시 朝鮮總督府 에 僧侶의 結婚을 許可해 줄 것을 請하는 歎願 올렸으나 두 番째 歎願 亦是 묵살당하고 만다.

韓日合邦 直後 總督府가 朝鮮人을 차별대우하고 日本人을 優待하자 그는 不滿을 드러냈다. 萬海의 上佐였던 春城스님 에 依하면 萬海는 平素 朝鮮總督府의 朝鮮人 差別 政策에 對해 "倭놈의 머슴살이 같으니라구!"라며 不滿을 吐露하였다 한다.

日帝强占期 活動 [ 編輯 ]

佛敎 社會 革新 運動 [ 編輯 ]

1910年 12月 그는 日本이 主張하는 韓日佛敎同盟을 反對撤廢하고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等의 知事(志士)들을 만나서 獨立運動을 協議하였다. 1911年 松廣寺 에서 박한영 · 진진응 · 김종래 等과 僧侶蹶起大會를 開催하여 日本 의 曹洞宗(曹洞宗)과 韓國佛敎의 統合을 꾀한 이회광 等의 親日的인 佛敎行爲를 糾彈·沮止했다. 한便 1913年 會同書簡에서 다시 《 朝鮮佛敎維新論 》(朝鮮佛敎維新論)을 發行하였다. 1913年 佛敎學院 명진學校 의 敎師로 招待되어 敎鞭을 잡았다. 1912年頃 通度寺에 保管된 八萬大藏經 을 閱覽하고서 1914年 범어사에서《불교대전 (佛敎大典)》을 刊行하였다. 大乘佛敎 般若思想 (般若思想)에 立脚하여 從來의 無能한 佛敎 를 改革하고 佛敎界의 覺醒과 現實參與를 主張하였다.

1913年 석전 박한영 等과 함께 朝鮮 佛敎 宗務員을 創設하는데 參與했고 그는 寺刹을 돌며 講義와 談論을 主導하였다. 1915年 淸나라 僧侶 來臨(來琳)의 增補本에 依據하여 旌善江 의 《 菜根譚 》 國漢文 混用體 註解本을 著述하였다. 1917年 8月 朝鮮佛敎回 會長에 就任했다.


佛敎布敎 大衆化와 宣敎振興論 [ 編輯 ]

韓龍雲의 銅像

1914年 에는 佛敎 布敎의 普遍化 大衆化를 宣言하고 朝鮮佛敎靑年同盟(朝鮮佛敎靑年同盟)을 結成하였다. 朝鮮佛敎靑年同盟의 綱領을 손수 지었는데 이를 보면, 첫째로 政敎分離(政敎分離), 둘째로는 여러 佛敎 宗團의 統一 또는 聯合, 셋째 佛敎와 査察의 社會的 進出의 必要 等을 提示하였다. 이는 大衆佛敎의 擴散을 위하여 그 出發點을 靑年 運動으로 삼아야 한다는 그의 實踐行이었다. 그는 佛敎 布敎가 普遍化되려면 一旦 靑年들에게 浸透해야 함을 力說하였다. 天主敎 改新敎 의 宣敎 活動, 東學 의 布敎 擴散, 似而非 宗敎 等의 擴散에 緊張한 그는 佛敎 亦是 大衆에게 浸透하여야 함을 力說하고 佛敎가 衆生의 곁에 가장 쉽게 다가갈 수 있는 方法으로 靑少年과 靑年層을 攻掠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佛敎의 普遍化 運動의 實踐을 위하여 '僧侶에서 大衆에로', '山間에서 길가로' 等을 내걸었다.

또한 佛敎 布敎의 大衆化를 위해서는 敎團, 宗團肝의 葛藤을 줄이고 協力하자는 主張을 펼쳤다. 이는 宣敎振興論(禪敎振興論)으로 發表되었다. 그에 依하면 佛敎의 振興을 위한 必須不可缺의 要件은 隨行 異常을 確立하는 일이라 하였다. 이에 韓龍雲은 只今까지 朝鮮의 佛敎는 五敎區山 禪敎兩宗 이니 해서, 마치 敎義(敎義)와 종지(宗旨)가 다른 것처럼 잘못 認識되어 왔다. 善과 校의 本質은 하나이다. 왜냐하면, 善이란 佛敎의 마음이며, 攪亂 佛敎의 言語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兩者는 서로 背馳되는 槪念이 아니며, 兩者의 理論的 合一과 連帶의 實踐이 佛敎 振興, 布敎 擴散의 關鍵이라고 主張하였다. 同時에 韓龍雲은 船員(禪院)이나 江原(講院)의 指導 理念이나 理論, 失手(實修) 等에 있어 外傳(外典)도 添加해야 한다, 그리고 속된 것을 全的으로 排擊하지 말 것을 呼訴하였다. 그는 禪敎一致 를 主張해온 朝鮮 佛敎의 一乘精神(一乘精神)李 새로운 時代의 座標가 되어야 한다고 力說하였다.

또한 海外布敎에도 至大한 關心을 기울여서 美國 , 中國 等地에 海外法堂을 세워야 한다고 力說하였다. 그러나 中國은 朝鮮보다 먼저 佛敎를 받아들인 곳이고 美國人들은 大多數가 改新敎 天主敎 信者처럼 認識하던 當代의 僧侶들과 佛子들은 그의 海外 布敎 主張을 實現 不可能한 以上으로 取扱했다.

佛敎 經典의 한글化 [ 編輯 ]

萬海는 1910年 부터 大藏經 華嚴經 等을 비롯한 佛敎 經典의 內容을 한글 로 飜譯하여 紹介하였다. 1930年代 以後에도 그는 佛敎 經典의 한글化를 主張했다. 經典의 內容이 漢文 이나 산스크리트語 로서 一般 衆生이 읽기에는 너무 힘들다, 어렵다는 것이 그의 見解였다. 그가 가장 心血을 기울인 部分은 大藏經의 한글 飜譯이다. 現代布敎의 要諦는 文書에 依한 紅布였다.

그는 아무리 좋은 말씀도 理解를 하지 못하면 無用之物이라 主張하였다. 佛敎 經典의 大部分이 漢文으로 되어 있어서 一般人이나 文盲率 이 높던 當時에는 一般的으로 읽고 理解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厖大한 대장경을 쉽게 옮기는 일이 重要하다고 보았다. 그는 佛敎의 敎理와 活動, 高僧 等에 對한 內容을 한글로 表現했으며 《佛敎大展》에는 대장경 等의 內容을 한글로 解釋하였는데 이는 바로 그와 같은 試圖의 決定이다. 大藏經의 要旨를 拔萃하여 大義를 옮겨 적은 佛敎大展은 20世紀 韓國 佛敎理論書와 《佛敎聖典》들의 嚆矢가 되었다. 그밖에도 그는 佛敎學 振興과 布敎의 活性化를 위하여서는 各種 金石文(金石文)이나 社長된 資料들이 一般에 紹介되어야 한다고 主張하였다.

雜誌 發行 [ 編輯 ]

1918年 11月 弟子 春城 等과 함께 月刊 佛敎雜誌《有心 (惟心)》을 創刊했으며 이 雜誌를 통해 佛敎 論說만이 아니라 啓蒙的 性格을 띤 글을 發表했고, 또 新體詩를 脫皮한 新詩〈審 (心)〉을 發表하여 文學에 對한 關心을 보였다. 그는 當時 朝鮮佛敎의 沈滯와 落後性과 隱遁主義를 大膽하고 痛烈하게 分析과 批判을 한 著書 朝鮮佛敎維新論을 發表하여 思想界에 큰 衝擊을 주었다.

月刊 유심地에서 그는 詩 '審 (心)'과 隨筆 苦學生 , 남모르는 아이들 을 發表하는 等 佛敎의 普遍化와 親熟火를 꾀한다. 佛敎의 弘報, 布敎와 함께 啓蒙, 自覺, 自由精神, 民族精神을 鼓吹하는 論說들을 多數 실은 月刊誌 유심은 뒷날 그가 關係한《불교》잡지와 함께 가장 刮目할만한 文化事業의 하나가 되었다.

3.1 萬歲 運動과 投獄 [ 編輯 ]

서울 탑골 公園 에 位置한 3·1 運動 書板
1920年 7月 2日 東亞日報 에 실린 記事. 3.1 運動에 參加한 民族代表 48人 公判에 關한 記事, 다섯째 줄 왼쪽에서 네 番째가 한용운

1918年 12月에 發表한 우드로 윌슨 民族自決主義 에 感動하여 1919年 1月부터는 全國的인 萬歲 運動 準備에 參與하고, 백용성 等과 함께 佛敎 指導者들을 召集하여 손병희 天道敎 指導者들과 이상재 等 一部 基督敎 指導者들과 回合하였다. 그는 獨立宣言文의 內容을 둘러싸고 최남선 과 意見衝突을 하였다. 內容이 좀더 果敢하고 現實的이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으나, 崔南善 等은 萬海의 主張이 急進的이고 過激하다며 反對했고 結局 萬海가 提示한 條件들 中 마지막의 行動綱領인 公約 第3條 '最後의 一人까지 쾌히 우리의 意思를 發表하자' 만이 受容, 獨立宣言書에 收錄되었다.

1919年 3·1 運動 民族代表 33人 의 한 사람으로 參與했고, 獨立宣言書에 署名하였으며 一說에는 용성 船社 의 圖章도 그가 찍었다 한다. 京城 탑골公園 에서 獨立 宣言書 朗讀과 萬歲 運動에 加擔했다가 朝鮮總督府 警察에 逮捕되었다. 民族代表者들은 平和 示威를 企劃하였는데 示威는 激化되었고, 民族代表者들은 自首를 決心한다. 이종일 의 回顧에 依하면 "收監中 萬海는 日帝의 顧問 및 威脅에 벌벌 떠는 懦弱한 民族代表들에게 人糞을 퍼부었다."고 한다. [3]

그는 萬歲運動을 進行하던 中 塔골公園에서 總督府 警務局 巡査들에 依해 逮捕되었다. 이어 避身한 다른 民族代表者들이 自首함으로써 바로 西大門刑務所 로 넘겨지고 京城地方法院에서 懲役 3年型을 받고 服役하였다.

收監과 釋放 [ 編輯 ]

한便 逮捕된 萬海는 東大門 市場 에 投獄되어 服役하며 裁判을 받았다. 이때 獄中에서 辯護士는 勿論 私食과 寶石을 拒否할 것을 決意하고 收監生活을 한다. 그리고 獄中에서 ' 朝鮮獨立의 서 '를 執筆하다가 發覺되어 結局 原本을 刑事에게 提出했다. 그러나 萬海는 한便으로 '朝鮮獨立의 서'를 日本人 서울地方法院 檢事 에게 提出하기 以前에 一部를 休紙에 작은 글씨로 옮겨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접어 刑務所 밖으로 나가는 衣服의 갈피에 집어넣었다. 이렇게 外部로 나온 그 宣言書는 上海까지 傳達되었다. [4] 人間의 權利와 自由와 平等에 對한 길을 가로막는 어떠한 形態의 武力, 軍事力, 壓制 政治는 結局 스스로의 덫에 걸려 스스로 敗亡하게 되리라는 內容이었다. 獄中에서 作成한 '朝鮮獨立의 서'는 종이를 노끈처럼 말아 唯一하게 그의 獄바라지를 하던 春城 스님 을 통해 상하이 로 보내져 大韓民國 臨時政府 의 機關紙인 獨立新聞 1919年 11月 4日 의 記事 附錄에 '朝鮮獨立에 對한 感想의 槪要'라는 題目으로 發表, 報道되었다.

그가 出獄하자 많은 面會客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가 人事를 하는 것을 보고 面會客들은 異常하게 여겼다. 이에 萬海는 自身을 마중하러 나온 人士들에게 "너희들은 이런 出獄의 人事를 할 줄은 알고, 人事를 받을 줄은 몰랐더냐?" 하고 大聲叱咤하였다. [5]

1922年 5月 出獄 後에는 言論에 칼럼을 發表하는 同時에 1922年부터 1923年 까지 民立大學 設立運動과 物産奬勵運動 等의 民族運動에도 參與했다. 이 期間 中 그는 金性洙 , 조만식 , 安在烘 , 이광수 , 방응모 等을 만나 人脈을 쌓기도 했다. 글 못지않게 演說家로서도 남다른 能力을 지니고 있던 그는 1922年 5月 全朝鮮學生大會 主催로 獨立思想을 鼓吹하는 講演會가 開催되자 3人의 宗敎 指導者의 한 사람이자 演士의 1人으로 招聘되었다. 大會가 열린 날 두 番째 演士로 나선 萬海가 講演하자 聽衆이 熱狂하여 結局 다음 사람이 講演을 抛棄하는 事態가 벌어지기도 했다. 1922年 9月 잡지《 開闢 》에 獄中詩 '無窮花 심으라'를 發表하였다.

한便 그의 俗家 兄 한윤경은 150섬 異常을 收穫하던 洪城郡 의 大地主였다 . [6] 한윤경의 아들이자 조카인 한창국은 일찍 죽고 한창국의 後孫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한다.

社會 團體 活動과 님의 沈默 [ 編輯 ]

1922年 出獄 後에도 日本警察의 監視 아래에서 講演 等 여러 方法으로 祖國獨立의 熱辯을 吐하였다. 1920年代 에 夫人이 있는 帶妻僧이 俗人들에게 似而非 中이라고 侮辱을 當하는 것을 보고 帶妻僧 運動을 主導하여 中에게도 結婚할 資格을 달라고 呼訴하기도 했다. 1924年 부터 朝鮮日報 東亞日報 의 論說委員을 겸하며 啓蒙, 社會 參與를 促求, 敎育의 必要性을 力說하는 칼럼을 送稿하였다.

1923年 1月 東亞日報 에 論說 '朝鮮 級(及) 朝鮮人의 煩悶(煩悶)'을 發表한다. 1924年 朝鮮佛敎靑年回 會長에 就任했고, 다시 朝鮮佛敎靑年回 總裁로 選任되었다. 1926年 詩集 《 님의 沈默 》을 出版하여 抵抗文學에 앞장섰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醫님은 갔습니다
푸른산빛을 깨치고 丹楓나무 숲을 向하여 나 있는 작은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7]

黃金(黃金)醫꽃가티 굿고빗나든 옛 盟誓(盟誓)는 차듸찬띠끌이되야서 한숨의 (微風)微風에 나러갓슴니다
날카로은 첫 키스의 追憶(追憶)은 나의 運命(運命)의 指針(指針)을 돌너노코 뒷거름處서 사러젓슴니다
나는 향긔로은 님醫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은 님의얼골에 눈멀었슴니다
사랑도 사람醫일이라 맛날때에 미리 떠날것을 鹽女下考警戒하지 아니한것은아니지만
離別은 뜻밧긔일이되고 놀난가슴은 새로은 슬븜에 터짐니다
그러나 離別을 쓸데없는 눈물의 源泉(源泉)乙만들고 마는것은 스스로 사랑乙깨치는것인줄
아는까닭에 것잡을수업는 슬븜의 힘을 옴겨서 새 希望(希望)의 精髓박이에 드러部엇슴니다
우리는 맛날때에 떠날것을염녀하는 것過가티 떠날때에 다시맛날것을 믿슴니다
아아 님은갓지마는 나는 님乙보내지 아니하얏슴니다 [8]
제곡조를못이기는 사랑義노래는 님의沈默을 휩싸고돔니다

님의 沈默 에서 그는 한글 標準語를 쓰지 않고 忠淸道 方言과 土俗語가 洗練되지 않은 表現으로 다양하게 使用되고 있다. 이러한 鄕土的 情感의 方言 및 土俗語 愛用과 庶民的인 詩語의 活用은 님의 沈默에 民衆精神을 反映한 것으로 보인다. 1925年 부터 百潭寺 에서 執筆하여 1926年 京城 安東西關에서 發行한《 님의 沈默 》은 當時 自由主義 敵, 男女間의 戀愛를 爲主로 하던 韓國文壇의 影響을 받지 않고 生産되었음에도 不拘하고 民族의 現實과 以上, 그리고 그것을 實現하기 위해 要求되는 主體的 姿勢에 對해 노래했으며, 더욱이 그것을 豐富한 詩的 이미지로 아름답게 形象化해 水準 높은 民族文學의 境地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朝鮮의 獨立, 或은 自然을 '님'으로 表現하여 解釋하기에 따라서는 部處 로도 解釋되고 離別한 戀人으로도 解釋되는 話法을 驅使하여 總督府 學務局의 檢閱 彈壓을 避하였다.

新幹會 創設에 參與 [ 編輯 ]

1927年 2月에 異人 , 김병로 , 허헌 , 조병옥 , 허정숙 等과 함께 宗敎, 社會團體를 網羅한 社會團體 新幹會 의 結成에 佛敎 界 代表者의 한사람 兼 京城府 西部 地域 代表者의 한 사람으로 積極 參與하여 中央執行委員의 한 사람이 되었다. 新幹會 組織을 結成하는 主導的으로 參與한 그는 1928年 다시 新幹會 中央執行委員의 한사람에 選出되고 新幹會 京城支會 會長(京城支會會長)에 被選되어 허정숙 等과 新幹會 京城支會에서 活動하였다.

1929年 光州抗日學生運動 이 일어났을 때는 學生 示威를 보고 그것을 民族的·民衆的 運動으로 擴散시키고자 民衆大會를 計劃했으나, 朝鮮總督府 密偵에게 發覺, 總督府 警務局에 依해 霧散되었다. 1931年 朝鮮佛敎靑年回 (朝鮮佛敎靑年會)를 朝鮮佛敎靑年同盟 (朝鮮佛敎靑年同盟)으로 改稱, 佛敎를 통한 靑年運動을 强化하였다. 以後 많은 論文과 論說을 發表하여 佛敎의 大衆化와 獨立思想 鼓吹에 힘썼다. 特히, 固陋한 傳統에 安住하는 佛敎를 痛烈히 批判하였으며, 僧侶의 資質 向上, 佛子에게 生計를 依存하지 않기, 紀綱確立, 生活佛敎 等을 提唱하였다.

또한 酒量 調節만 可能하다면 僧侶들도 飮酒를 하게 해야 한다고 力說하였다. 1930年 잡지《불교(佛敎)》의 筆陣이 되었다. 1931年 6月 雜誌 《佛敎》를 引受하여 社長으로 就任했다. 그前까지는 권상로(權相老)가 맡아오던 이 雜誌를 引受하여 佛敎의 紅布에 온 精力을 기울였다. 같은 해 김법린 · 최범술 · 김상호 等이 組織한 靑年法侶祕密結社인 晩唐(卍黨)의 黨首로 推戴되었다. 1931年 6月부터 2年 남짓 동안은 親日로 轉向한 권상로에게 引受한 《佛敎》를 發刊하는 일에 專念한다. 그러나 經營難으로 1933年 9月 結局 권상로에게 재인계하고 만다.

反日 講演 活動 [ 編輯 ]

그는 朝鮮 佛敎가 日本 佛敎에 隸屬되지 않고 獨立해야 함을 力說하였다. 한便 한 講演에서 그는 朝鮮總督府 나 日本 佛敎에 阿諂하는 一部 僧侶들을 叱咤하기로 했다.

그間 "世上에서 第一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고 묻자 아무도 그 물음에 對答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世上에서 第一 더러운 것은 똥이올시다. 똥! 그런데 그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라고 하자 亦是 아무도 對答을 하지 못했다. 가난한 佛子들의 屍身을 殮襲해본 적이 있는 한 사람은 屍體라고 하였다. "내 經驗으로는 똥보다 더 더러운 것이 송장 썩는 것이올시다. 똥 옆에서는 食飮을 할 수 있어도 송장 썩는 옆에서는 차마 飮食이 입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이다.

그의 말을 듣고 一部는 座席을 離脫하려 하였으나 座中에 압도당해 움직일 수 없었다. 이어 萬海는 "屍體보다 더 더러운 것이 있으니 그것이 무엇일까?"하고 물었다. 아무도 答을 하지 않자 韓龍雲은 굳은 表情으로 강연대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그건! 바로 여기 앉아 있는 31본산 住持 네놈들이다!"라고 一喝하고는 卽時 壇上에서 내려와 退場해버렸다. 反日 或은 日本 佛敎에의 吸收를 反對하는 그를 두고 不逞鮮人이라는 指摘이 繼續되었고 그는 結局 朝鮮總督府 刑事들의 監視下에 놓이게 된다.

한便 總督府로부터 生計費와 硏究費를 支援받는 條件으로 轉向한 六堂 최남선 이 탑골公園 近處에서 마주쳤을 때 "오랜만이오. 萬海."라고 먼저 人事하자 그는 "當身이 누구요?"며 冷靜하게 答하였다. 崔南善이 "나는 六堂이오. 나를 몰라보겠소?"라고 하자 萬海는 "뭐, 六堂? 그 사람은 내가 葬禮 지낸 지 오랜 故人이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生涯 後半 [ 編輯 ]

小說 執筆 活動 [ 編輯 ]

1931年 53歲의 나이에 再婚에 뜻이 있어 同志들의 紹介로 21살 年下의 유숙원과 再婚하였다. 유숙원은 結婚하기 前까지 團成社 옆에 位置했던 진성당病院의 看護師로 일하였다. 다음 해에 딸 영숙이 태어나고 1933年 심우장 을 지으면서 餘生을 보내며 作品活動을 持續하였다.

1935年 長篇小說 《黑風》을 朝鮮日報 에 連載하였다.《흑풍》에서는 檢閱을 避하기 위해 背景을 淸나라 를 舞臺로 하고, 抑壓에 對한 鬪爭精神을 描寫하여 朝鮮總督府 에 對한 抵抗性을 慇懃히 보여주고 女性解放問題에 對한 自身의 見解를 揷入하여 反封建 精神 및 女性도 人格體라는 見解를 說破하였다. 1936年 丹齋 신채호 의 屍身이 祕密裏에 入國한 것을 接하고 방응모 와 함께 申采浩의 墓碑建立과 정약용 逝世100年記念會 開催에 參與했다. 1936年 《조선중앙일보》에 長篇 《後悔 後悔》를 連載하였다. 이러한 小說을 쓴 까닭은 原稿料로 生活에 보탬을 얻기 위한 까닭도 있지만 그보다도 小說을 통하여 民族運動을 展開하려는 意圖가 더 큰 것으로 理解된다. 1937年 佛敎關係 抗日團體人 萬黨事件(卍黨事件)의 背後者로 檢擧, 西大門刑務所 에 재투옥되었다가 釋放되었다.

1937年 에 獨立軍 戰爭 中 死亡한 김동삼 의 屍身이 朝鮮으로 到着하였다. 아무도 그의 屍身을 거두거나 收拾하려 하지 않았는데 韓龍雲이 홀로 찾아가 痛哭하며 屍身을 收拾하였다.

太平洋 戰爭 戰後 [ 編輯 ]

釋放 後 佛敎 革新과 作品活動을 繼續하였고 1938年 에는 長篇 《薄明(薄命)》을 發表하였다. 1938年 부터는 中日戰爭 , 太平洋 戰爭 에 反對하여 學徒兵 拒否 運動을 벌였다. 作品으로는 여러 長篇 外에 長篇小說 人 《薄明(薄命)》이 있고, 著書로는 詩集《 님의 沈默 》을 비롯하여《조선불교유신론(朝鮮佛敎維新論)》,《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불교대전》,《불교와 考慮帝王(高麗諸王)》等이 있다.

그는〈 님의 沈默 〉 外에도《신인 文學》과《삼천리》에 詩 '꿈과 근심', '實際 (實際)',《趙匡》에 隨筆 '最後의 5分間', 朝鮮日報 에 長篇小說 黑風, 薄明, 조선중앙일보 에 小說 後悔 와 中篇小說 죽음 等을 發表하였다.

中日戰爭 以後로도 그는 繼續 徵用 이나 報國隊 또는 日本軍을 讚揚하는 글을 쓰지 않으며 講演도 하지 않았다. 또한 講演 協助 等도 拒否하였다. 또한 1937年 부터 强要된 神社 參拜 日章旗 揭揚을 拒否하고, 朝鮮總督府 日本 戶籍 에 이름조차 올리지 않았다.

晩年에는 京城府 성북동의 심우장 을 親히 지어 居處했는데, 심우장은 後日 서울記念物 第7號로 指定되었다. 1939年 慶尙南道 泗川郡 다솔사 (多率寺)로 내려가 回甲을 맞으면서 몇몇 同志들과 함께 自祝宴을 가졌다. 다솔사는 當時 民族獨立運動을 主導하던 本據地였다. [ 出處 必要 ]

死亡 [ 編輯 ]

1940年 5月부터는 創氏改名 反對運動을 하였고 1943年 에는 朝鮮人 學兵出征 反對運動을 展開했다. 末年에는 방응모 , 정인보 , 安在烘 , 홍명희 , 金性洙 , 滿空 等과 交流하며 그들이 보내주는 生活費로 어렵게 生活하였다. 日帝의 極甚한 彈壓 속에서도 屈하지 않고 非妥協的인 獨立思想을 堅持하다가,성북동 집인 심우장 에서 冷房으로 生活하였다.

中風 으로 擧動이 不便한 萬海의 生計는 그의 親舊인 安在烘 , 방응모 , 金性洙 , 송진우 , 조만식 , 최남선 , 이광수 , 윤치호 等이 十匙一飯으로 負擔해주었다. 末年에 中風으로 苦生하였지만 1944年 6月 28日 朝鮮總督府의 特別 訓鍊으로 空襲警報가 發令되었을 때 昏睡狀態에 빠졌다. 以後 繼續 昏睡狀態로 있다가 1944年 6月 29日 심우장에서 僧臘 49歲, 稅收 66歲로 涅槃에 들었다.

그가 死亡하였던 1944年은 日本 帝國 이 敗亡하기 1年 前利子 光復을 1年 앞두고 있던 때라 그토록 念願하던 祖國의 獨立은 끝내 生前에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가 死亡한지 1年 後인 1945年 8月 15日에 第2次 世界大戰에 參戰한 日本 帝國이 敗亡하게 되면서 大韓民國이 光復을 맞이하게 되었다.

事後 [ 編輯 ]

萬海의 胸像
  • 死亡한지 1年 後인 1945年 8月 15日 日本 帝國 이 第2次 世界大戰에서 敗亡하면서 朝鮮은 光復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한용운 本人은 1年 前에 故人이 되었기 때문에 그토록 念願하였던 光復의 모습은 보지 못하였다.
  • 同志들에 依하여 京畿道 楊州郡 노해면 미아리 社說 火葬場에서 茶毘된 뒤 망우리 共同墓地에 遺骨이 安置되었다. 後日 그 옆에는 夫人 유숙원 女史의 墓所가 오른便에 埋葬되었다.
  • 그는 文學을 專門으로 하지는 않았지만 님에 對한 그리움과 곧은 志操를 表現한 作品들을 통해 解放後에도 人氣를 끌게 되었다. 그後 文人, 抵抗 詩人, 帶妻僧, 出家 僧侶로만 認識되다가 1960年代 부터는 그의 獨立運動 歷史가 學者들에 依해 再照明 받기 始作했다.
  • 大韓民國 政府 는 그의 貢獻을 기려 1962年 3月 1日 建國訓長 대한민국장을 追敍하였다.
  • 1967年 그가 獨立 宣言書를 朗讀하던 탑골公園 에는 後에 僧侶 耘虛에 依해 《용운當 萬海 大選私費》(龍雲堂 萬海 大禪師碑)가 세워졌다.
  • 故鄕인 忠淸南道 洪城郡 홍성읍 남산공원에 銅像이 세워졌고 洪城邑內 場터에도 그의 銅像이 세워졌다.
  • 1973年 신구문화사에서 《萬海 全集》6卷이 刊行되었다.
  • 그의 결성면 성곡리 박철동 잠방굴마을 生가지는 1989年 12月 24日 忠淸南道 記念物 第75號로 指定되었다.
  • 1990年 에 生家가 復元되고 記念館이 建立되었다.
  • 1991年 에는 萬海의 業績을 기리는 萬海學會가 設立되었다.
  • 그밖에 萬海記念館, 萬海思想宣揚會 等이 세워졌다.
  • 江原道 麟蹄郡 北面 용대리에는 萬海文學博物館 이 建立되었다. [9]
  • 後에 洪城郡 결성면 성곡리 萬海 生가지에는 生家復元에 이어 祠堂을 建立하고 案內板을 設置하였다.

作品性 [ 編輯 ]

市와 作品에 있어 頹廢的인 抒情性을 排擊하였으며 朝鮮의 獨立 또는 自然을 부처님 에 빗대어 佛敎的인 '님'으로 形象化했으며, 高度의 隱喩法을 驅使하여 朝鮮總督府 나 日帝 政治에 抵抗하는 民族精神과 佛敎에 依한 衆生制度(衆生濟度)를 노래하여 朝鮮總督府 學務局의 檢閱을 巧妙하게 避하였다. 여기에서의 님은 보는 觀點에 따라 朝鮮의 獨立, 自然, 부처님 或은 離別한 戀人 等으로도 解釋이 可能한 語法을 驅使하였다.

그는 代表作 님의 沈默 을 비롯한 媤집, 作品集에서 中心을 이루고 있는 '님'은 戀人·祖國·部處 等 多義的인 意味를 지니며 그에 따라 '님의 沈默'이라는 表現은 當時의 民族的 狀況을 은유적으로 象徵하였다. 또한 世俗的인 情感의 眞率性이 불러일으키는 人間的 說得力과 함께 世俗的인 사랑을 表出하면서도 世俗事의 陳腐함에 떨어지지 않으며 목소리 높여 民衆精神을 强調하지도 않는다는 作品評度 있다.

그는 當時 狀況을 詩的 主體인 '나'가 님과 離別하여 님이 不在하고 沈默하는 時代로 規定하면서도, 님은 이 자리에는 存在하지 않지만 '나'는 眞情으로 님의 存在를 깨닫게 된다는 辨證法的인 眞理 또는 부처에 對한 믿음, 離別한 戀人에 對한 愛情을 確信, 재다짐하는 것을 드러내고, 새로이 '나'는 이 자리에는 계시지 않는 님 또는 돌아올 님과 다시 合一될 수 있다는 뜻을 노래한다. 또한 내가 님과 새로이 만나기 위해서 나는 님이 存在하지 않지만 님에 對한 義理와 節槪를 지키고 님에 對한 徹底한 服從이 要求되는데, 그 節槪와 義理, 服從을 통해서 비로소 '님'에 對한 信義도 지키면서 한便으로 '나'는 자유로워진다는 '服從과 自由의 辨證法'을 노래한 것은 歷史의 必然性의 認識을 통해 眞正한 自由를 獲得할 수 있다는 結論에 導出한다. 그는 植民地下에 있는 祖國의 運命과 獨立의 必然性 또는 오지 아니한 極樂世界와 다시 만나게 되는 그 날, 그리고 그 날을 위한 實踐, 변함없는 믿음을 통해 眞正한 깨달음에 到達할 수 있다는 眞理를 作品들을 통해 形象化, 승화시켰다.

形式的인 側面에서도 그의 詩는 五言絶句나 七言絶句, 3.4兆 等 當時 朝鮮 의 始祖, 詩의 形式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散文詩 의 典型이 되었다. 隱喩와 逆說의 자유로운 驅使를 보여주며, 定型的인 틀을 完全히 벗어난 散文的 開放 속에서도 內在律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近代 自由詩의 完成에도 크게 寄與한 것으로 評價된다.

著書 [ 編輯 ]

2019年 6月 이달의 獨立運動家 에 選定된 포스트.
  • 《佛敎大展 (佛敎大典)》(1913年)
  • 朝鮮佛敎維新論 (朝鮮佛敎維新論)》(1913年)
  • 詩集 《
  • 詩集 《 님의 沈默
  • 《유마힐小說京江의 維摩詰所說經講義》( 1933年 )
  • 《十玄談註解 (十玄談註解)》
  • 《佛敎와 考慮帝王 (高麗諸王)》
  • 《朝鮮獨立의 서 (朝鮮獨立之書)》

飜譯書 [ 編輯 ]

  • 《旌善江 菜根譚》

小說 [ 編輯 ]

[ 編輯 ]

  • 時 '꿈과 근심'
  • '實際 (實際)'
  • '나룻배와 行人'
  • 님의 沈默
  • 數의 祕密
  • 사랑하는 까닭

隨筆 [ 編輯 ]

  • 《最後의 5分間》

思想과 信念 [ 編輯 ]

그는 모든 衆生은 佛性을 가지고 있다는 佛經의 思想을 引用하여 이를 現代的 自由思想에 聯關시켜 생각하였다. 그는 이것이 萬人의 平等思想을 說破하였다.

佛敎 社會革新主義와 普遍化 [ 編輯 ]

萬海의 佛敎 思想은 흔히 佛敎社會革新主義로 要約된다. 그는 朝鮮의 民衆이 歷史 以來로 支配者들로부터 抑壓과 收奪을 當해왔음을 認識하고 佛敎 가 民衆을 救濟하거나, 아니면 現實에서 民衆들을 慰勞해야 하는 것이 當然하다고 主張하였다. 著書인 《朝鮮佛敎維新論》에서 그는 佛敎革新論을 主張, 山寺로 들어가 高潔한 理想만을 追求하는 點을 批判하고, 韓國佛敎의 沈滯와 落後性을 痛烈하게 批判하고 改革을 主張하였다. 그는 佛敎 思想이 自由主義, 平等主義, 救世主의, 進步的 立場에 서야 함을 力說했다.

佛敎는 크고 圓滿한 가르침이어서 무슨 일이나 禁함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根氣가 淺薄한 衆生들을 考慮한 까닭에 臨時方便으로 設定한 것뿐이건만, 後의 사람들이 이를 몰라, 金言人 양 잘못 만들어서 넋을 잃은 나머지 다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實情입니다. [10]
 
— 獻議書 中에서

그는 어떠한 眞理와 眞實을 大衆에게 强要하지 않는 佛敎 가 未來의 人類文明에 가장 적합한 敎理임에도 不拘하고 當時 朝鮮 에서는 高潔한 理想만을 追求하거나 山에 들어가 落後性을 면하지 못하고 있음을 批判하였다. 그는 寺院運營의 革新을 主張하는 內容에서 佛敎의 大衆化·民衆化라는 基本思想이 導出되어 나온다. 그는 佛敎의 民衆化를 위해 佛敎 敎理와 制度, 佛敎 財産을 一部 高位層 僧侶들, 幹部 僧侶들이나 宗團이 獨食하지 말고 民衆化, 社會化해야 한다고 主張했다.

그는 靑年佛敎를 提唱하고 젊은이들의 佛敎 布敎 및 佛敎 復興을 위해 努力했고 《佛敎大展》 等 佛敎經典의 한글 飜譯作業에 着手했으며, 金剛經 , 華嚴經 等 佛敎 書籍의 한글 飜譯과 佛敎 書籍의 해석서, 解釋 칼럼과 論文 等을 發表하였다. 한便으로 《佛敎敎育 佛敎漢文讀本》, 《旌善講義 菜根譚 (精選講義菜根譚)》의 編纂에 參與하고 佛敎雜誌인 《有心》, 《佛敎》 等의 雜誌 刊行에 힘쓰며 佛敎學校와 講演會를 主催하는 等 佛敎의 大衆化, 普遍化를 위해 努力했다.

帶妻僧 運動 [ 編輯 ]

또한 그는 生活佛敎가 되려면 瀆神이 아니라 生産的인 夫婦關係가 되어야 한다고 力說하였다. 僧侶는 結婚하면 안된다는 것이 偏見이라 主張하고, 僧侶의 娶妻(聚妻)를 許諾할 것 等을 主張했다. 大衆의 結婚生活, 家長이라는 짐을 理解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大衆의 立場을 理解하겠느냐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衆生들이 迷惑을 떠나 깨달음을 얻고 악을 고쳐 善을 行하도록 바라셨으나, 衆生의 根機가 各其 달라서 不得不 天下에서 情을 除去하고 欲望을 끊어 버린 事實들을 모두 演說하였던 것이니, 各其 좋아하는 것을 좇아 引導하시고자 希望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의 戒律에 있는 禁婚은 본디 方便의 하나에 不過한 것일뿐, 佛敎의 窮極의 경지와는 距離가 먼 것이니 이를 除去한들 어찌 損傷됨이 있겠습니까. [2]
 
— 建白書 中에서

그는 僧侶의 結婚이 佛敎 敎理에 어긋나지 않음을 主張하였고, 元曉 等 帶妻僧의 事例를 紹介하기도 했다. 結婚의 妥當性을 立證하기 위하여 그는 倫理的·生物學的 여러 論據를 提示하였다.

한便 그의 帶妻僧 許容 運動, 僧侶의 結婚 許可 主張에 對해 佛敎 界에서는 否定的으로 바라봤다. 解放 直後에도 曹溪宗 段에서는 萬海가 僧侶의 結婚 自由化를 主張하고, 그 自身도 그것을 實踐하였기에 더욱 거북스러운 存在였다. 다만 一部 佛敎改革을 追求하였던 運動圈 僧侶의 그룹에서, 佛敎靑年運動을 하는 裁可佛敎靑年團體에서 萬海를 찾았을 뿐이다. [11]

佛敎 社會 革新 注意와 都市化 [ 編輯 ]

寺院運營에 있어서 그는 念佛堂(念佛堂)의 廢止와 都市에 寺刹 建立을 할 것을 主張하였다. 根本敎理에 비추어볼 때 宇宙에 偏在(遍在)韓 法身佛(法身佛)李 信仰의 對象이 되는 것이지, 決코 特定한 信仰對象이 따로 없는 것이라 보았다.

그는 特히 法堂은 山寺라는 槪念에 反對하였다. 寺刹은 사람이 사는 곳에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點이 韓龍雲의 指摘이었다. 旣存의 念佛堂 等과 敎理에 얽매이는 虛禮的人 意識들을 打破하고 山中에 있는 절이 都市로 나올 것, 都市로 나와서 여러 國民들과 直接 만나고 直接 面談할 것을 主張했다. 그는 僧侶들도 勞動을 할 것을 主張했다. 最小限 査察 周邊에 땅을 마련하여 自己가 먹을 쌀과 穀食은 스스로 만들며 佛子들의 施主에만 依存하는 그릇된 思想을 버리라고 促求했다. 그는 僧侶들도 詐取(詐取)와 동냥질을 그만두고 스스로 生産活動에 參與할 것을 呼訴했다.

佛敎思想의 側面에서 中觀論(中觀論)에 기초해 小乘的인 消極主義나 現世否定的인 佛敎를 批判하고 衆生의 삶에 參與하고 뛰어들라고 促求했다. 韓龍雲은 곧 衆生의 삶과 日常에서 淨土를 救하고, 淨土로 引導하자고 力說하였다.

佛敎組織 革新論 [ 編輯 ]

日帝强占期 後半 朝鮮總督府 의 朝鮮寺刹令 發表에 反對하였다. 總督府는 寺刹들이 無分別하게 運營된다는 것을 핑계로 朝鮮寺刹令의 發表 以後 거의 모든 社員의 運營權이 總督府의 直屬 管理下에 들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統一宗團의 組織, 規約, 財政確保 等을 一元化시켜 朝鮮總督府 의 管理 監督과 干涉 意圖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依하면 現行의 本末寺制度(本末寺制度)를 그냥 두되 中央에 統制機構를 新設하자는 것이었다.

김법린(金法麟) 等을 中心으로 하는 革新佛敎派가 세운 佛敎總務院에서는 이를 그대로 受容하였다. 비록, 當時 僧侶들의 改革 意志가 뒷받침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反對와 誹謗에 時達理렸지만 이는 佛敎行政組織의 座標를 提示한 것이었다.

朝鮮佛敎 獨立 運動 [ 編輯 ]

그는 朝鮮 佛敎가 日本 佛敎에 編入되는 것을 反對하고 抵抗하였다. 1910年 말 元宗(圓宗) 宗務員 이회광 이 佛敎擴張이란 美名下에 日本에 가서 朝鮮의 原從이 日本 曹洞宗과 完全히 聯合, 同盟할 것 等을 協約하고 오자, 1911年 韓龍雲은 석전 박한영 , 백용성 等과 이회광 糾彈 및 僧侶蹶起大會를 開催해 이회광을 종문難敵(宗門亂賊)으로 規定하면서 原從에 對應되는 臨濟宗(臨濟宗)을 創立한 것은 그의 代表的인 佛敎自主化運動이다.

그의 佛敎自主化運動은 1931年 結成된 朝鮮佛敎靑年總同盟의 裏面團體였던 萬黨活動 等으로 이어졌다. 그는 朝鮮佛敎靑年總同盟의 緊急한 使命으로서 精巧分立(政敎分立)과 佛敎統一의 促進, 佛敎 의 社會的 進出을 强調하였다. 한便으로 그는 精巧分立을 主張하기도 했는데, 이는 宗敎를 政府 或은 體制의 下手人으로 삼으려는 朝鮮總督府 學務局 政策에 反對하는 意味가 담겨 있다.

年譜 [ 編輯 ]

家族 關係 [ 編輯 ]

子女는 첫 番째 아내 전정숙 사이에서 얻은 아들 한보국과 두 番째 아내 유숙원 사이에서 얻은 딸 한영숙이 있다. 한보국 은 故鄕인 洪城 에서 社會主義 運動을 하다가 韓國 戰爭 때 越北하였다. [12] 14歲에 早婚 風習에 따라 結婚한 전정숙과는 離婚하고 後에 僧侶 生活 途中인 1931年 53歲에 21歲 年下의 유숙원과 結婚하여 帶妻僧 이 되었다. 越北한 한보국은 膝下에 2男 5女를 두었으나 아들 1名은 어릴 때 夭折하였다. 한보국의 다른 夫人은 1960年代 무렵 仁川에 居住하던 것으로 알려졌다.

評價와 批判 [ 編輯 ]

{未完成 文壇} 民族獨立, 佛敎維新, 自由文學의 3大 思想家로서 節義의 行跡을 남겼다. 强烈한 現實批判 等 現世에서의 實踐을 强調한 그의 革命思想을 가졌다는 評價가 있다. 그가 佛敎理念에 依한 自由, 平等의 國家社會가 이루어지기를 所望하였다는 評價도 있다. 한便 自由民主主義, 非暴力 無抵抗主義, 民族自決主義 等에 立脚한 消極的, 觀念的인 次元에 머물렀다는 視角도 있다.만해 韓龍雲은 대단한 獨立運動家다. 스님이면서 獨立運動에도 힘썼다. 또 獨立 運動을 할 때 같이 했던 同志들이 創氏改名 等 日本이 억지로 勸誘한 것을 하기라도 하면 차갑게 外面했다.

기타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萬海 韓龍雲을 演技한 俳優들 [ 編輯 ]

各州 [ 編輯 ]

  1. “한용운:洪城넷” . 2013年 12月 1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3年 5月 22日에 確認함 .  
  2. 김광식, 《韓龍雲 硏究》 (東國大學校出版部, 2011) 109쪽
  3. 김광식, 《萬海 硏究》 (東國大學校出版部, 2011) 315쪽
  4. 김광식, 《萬海 硏究》 (東國大學校出版部, 2011) 332쪽
  5. 김광식, 《萬海 硏究》 (東國大學校出版部, 2011) 322쪽
  6. "獨立運動家 萬海 船社 俗家 後孫들 날품팔이 生活", 京鄕新聞 1986年 6月 2日子 10面, 社會面
  7. 강승원, 編輯. (2009年 1月 5日). 《EBS 修能特講 言語領域》 初版. 韓國敎育放送公社. 8쪽. 푸른 山빛의 希望的 이미지가 丹楓나무 숲의 喪失의 이미지를 對備하여 만남→離別의 意味를 形象化하고 있다.  
  8. 강승원, 編輯. (2009年 1月 5日). 《EBS 修能特講 言語領域》 初版. 韓國敎育放送公社. 8쪽. 우리는 맛날때에~: 會者定離(會者定離)와 거자필반(去者必反)의 精神을 逆說的으로 表現하고 있다.  
  9. 네팔 民主化·文學의 뿌리는 佛敎?
  10. 김광식, 《韓龍雲 硏究》 (東國大學校出版部, 2011) 106쪽
  11. 김광식, 《萬海 硏究》 (東國大學校出版部, 2011) 24쪽
  12. 외아들 한보국은~: 《民族21》 萬海와 외아들 한보국 Archived 2007年 10月 26日 - 웨이백 머신 (2004年 1月號)

參考 文獻 [ 編輯 ]

  • 김광식, 《韓龍雲 硏究》 (東國大學校出版部, 2011)
  • 윤재근, 《님의 沈默 硏究》 (民族文學史, 1985)
  • 金在洪, 《韓龍雲文學硏究 1》 (일지사, 1982)
  • 송욱, 《님의 沈默:前篇解說》 (科學史, 1973)
  • 박노준·인권환, 《韓龍雲 硏究》 (通文館, 1960)
  • 이 文書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 (現 카카오 )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配布한 글로벌 世界대백과사전 의 內容을 基礎로 作成된 글이 包含되어 있습니다.

外部 링크 [ 編輯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