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위키百科, 우리 모두의 百科事典.

김두한
1949年에 찍힌 김두한 寫眞
出生 1918年 6月 23日 ( 1918-06-23 )
日本 帝國領 朝鮮 京城府 鍾路
死亡 1972年 11月 21日 ( 1972-11-21 ) (54歲)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城北區 정릉동
性別 男性  위키데이터에서 편집하기
國籍 대한민국 大韓民國
居住地 大韓民國 서울特別市 龍山區
學歷 京城校洞公立普通學校 2學年 1學期 中退 [1]
大韓民國 中學校 入學資格 檢定考試 合格
經歷 6.25 戰爭 永川 戰鬪 參戰
無所屬 再選 國會議員
自由黨 黨務委員 兼 常任委員
勞農黨 黨務委員 兼 代表最高常務委員
韓國獨立黨 常任顧問 兼 黨務委員
新民黨 黨務委員 兼 前任行政委員
父母 김좌진 (簿)
김계월 (生母)
오숙근 (嫡母)
나慧局 (繼母)
兄弟 김석출(異腹 누이同生)
김철한(異腹 男동생)
김강석(異腹 누이同生) [2]
配偶者 初配: 이재희 (李載熙, 1924年 出生~1987年 死亡, 1971年 再結合)
計杯: 김부미 (金富美, 1917年 出生~1999年 死亡, 1962年 離婚)
三聚: 박정인 (朴貞仁, 1933年 出生~, 1966年 離婚)
詐取: 김순옥 (金順玉, 1945年 出生~, 1971年 離婚)
子女 4男 2女
(長女 金乙東 , 次女 김영채, 長男 김경민 ,
次男 김현성, 3男 김주택, 4男 김범상)
軍服務 6.25 戰爭 當時 慶南 釜山 民間 從軍원
宗敎 佛敎
議員 選手 2
正當 無所屬
웹사이트 김두한 - 大韓民國헌정회

김두한 ( 韓國 漢字 : 金斗漢, 1918年 6月 23日 [3] ~ 1972年 11月 21日 )은 日帝强占期 獨立運動家 白夜 김좌진 將軍의 庶子 [4] [5] 出身이며, 日帝强占期 末期의 乾達 무리를 거느렸던 組織暴力輩 出身으로, 大韓民國의 再選 國會議員(第3·6代 議員)을 지낸, 解放 및 光復 以後의 前職 政治人 이었다.

本館 安東 이며 는 議送(義松)·歌頌(嘉松). 別稱 은 日本(一本)이다.

日帝强占期 末 18歲 約款(1935年)으로 서울에서 有力한 組織暴力輩의 우두머리로 君臨하였으며, 1945年 解放 後, 美軍政期 에서는 暫時 知人들의 蹂躪(유혹)으로 인하여 朝鮮共産黨 傘下의 朝鮮靑年前衛隊 大將으로 있었으나, 以內 脫退하고 右翼 으로 轉向하여 反託運動 等을 비롯한 狂亂의 左右 對立에서 反共 鬪爭과 政治 테러를 저질렀다. 韓國 戰爭 當時에는 事實上 釜山으로 避難을 내려가 乾達 活動을 繼續하였다.

3代 國會 · 6代 國會 國會議員 을 지내면서 李承晩 政權 , 朴正熙 政權 獨裁 를 批判하였다. 6代 國會議員에 當選 直後 韓國獨立黨 內亂陰謀事件 으로 獄苦를 치렀고, 韓國 肥料 株式會社가 사카린을 密輸 瑕疵 國會 에서 三星 朴正熙 政權을 批判하며 國務委員 정일권 國務總理 等에게 汚物을 投擲 하였다.

京畿道 水原 新民黨 候補로 大韓民國 第7代 國會 議員 選擧 遊說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의 電氣불 關聯 發言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을 讚揚했다는 嫌疑로 反共法 으로 獄苦를 치렀다. 以後에는 朴正熙 政權의 獨裁 를 批判했다. 1972年 11月 18日 에 갑자기 쓰러져 意識不明 이 되었고 診斷받았으며 11月 21日 에 오랜 持病으로 因해 享年 54歲로 死亡하였다.

아무리 獨裁에 抵抗하며 鬪爭하는 政治 活動을 하여 많은 苦楚를 겪은 것은 客觀的인 事實이나, 人間 김두한보다는 '將軍의 아들'이라는 父親의 後光에서 벗어나지 못한 限界가 있다. [6] 再次 아울러 또한, 《白夜 김좌진 將軍의 初配 本部인 오숙근 女史의 所生의 아들이 아닌 理由가 主된 主要 빌미로써, 金佐鎭 將軍의 아들이 아니라는 親子 論難》이 있으며, [7] 自敍傳 等을 통한 一方的인 主張으로 一部 內容은 歷史的 事實과 다르며 歪曲, 美化, 誇張된 部分이 多數라는 것이 一般的인 評價로써, 《그토록 誇張된 內容의 歷史的인 金斗漢의 歪曲된 이미지가 도드라진다》는 寸評의 範圍가 더 廣範圍하다.

生涯 初期 [ 編輯 ]

出生과 幼年 [ 編輯 ]

金佐鎭의 被殺 以後 아들 김두한 等 遺家族이 유린당하며 風前燈火 慘狀에 對한 1932年 12月 23日 中央日報

回顧錄 等을 통한 當事者의 主張에 依하면 金斗漢은 김좌진 庶子 로 서울 鍾路에서 태어났다. [8] 7살 되던해에 外祖母와 함께 江原道 束草를 出發하여 블라디보스토크 를 거쳐서 北間島 牧丹江驛에서 父親 김좌진 과 相逢한 적이 있다고 한다. [9] 며칠後 歸國하였고 그後 靑山裏 戰鬪 에서 光復軍이 큰 勝利를 거두었다.

靑山裏 戰鬪를 빌미로 外祖母와 生母가 日本 警察에 拘束되자 7살때 [10] 個性에 있는 外三寸집으로 보내졌다. [11] 10살이 되던해에 [12] [13] 父親 金佐鎭이 암살당한후 外三寸이 冷待하기 始作하였고, 그래서 獨立하고자 家出하여 홀로 서울로 왔다. [14] 처음에는 거지들과 함께 水標橋 아래에서 살았다. [15] 그러다가 13살 頃부터 파고다 公園 近處에서 설렁湯집을 運營하는 원영기라는 老人의 도움을 받으며 生活하게 되었다. [16] 衡平運動 을 했었던 원영기는 "倭놈의 工夫는 할 必要가 없다. 곧 우리나라가 獨立하게 되니 그때 工夫하라."고 하였고 그의 뜻에 따라 學校는 다니지 않고 運動에만 專念했다. [17] [18] [19]

靑年 時節 [ 編輯 ]

1944年 , 反도의용挺身隊를 이끌던 時節, 앞쪽 맨 왼쪽이 김두한.

원영기가 죽은후 서울에서 깡牌들을 때려눕히며 1935年 나이 18歲에 우미관 을 掌握하였다. [20] 또한 個人的으로 1930年 後半 俳優 김승호 , 동양극장 劇團에 紹介하고 困境에 處한 拳鬪選手 정복수 를 도와주었고 鐘閣의 술집에서 日本 憲兵將校들을 때려눕혀 목숨의 威脅을 받았던 레슬링 選手 황병관 을 求해주기도 했다. [21]

太平洋 戰爭 以後 1942年 朝鮮總督府 로부터 김두한에게 强制로 徵用 이 要求되었는데, 이 때 그는 朝鮮 總督府 와 協商하여 京城特別支援靑年團(反도의용挺身隊)이라는 靑年團體를 組織하였고 團長으로 在職, 徵用 代替 勤勞活動을 하였다. 한便, 1944年 이재희 와 婚姻하였다. [18]

解放 政局 活動 [ 編輯 ]

光復 直後 [ 編輯 ]

1945年 解放 以後 金斗漢은 建國準備委員會 等에 參與하여 용산의 日本軍 武器庫를 武力으로 占領하여 活躍하였다고 하나 이 時期 金斗漢의 活動에 對해서는 確實히 檢證되는 것은 없다. 하지만 곧 美軍政期 로 因해 建國準備委員會 等 團體들이 解體되자 金斗漢은 竹馬故友인 親舊 정진룡 의 付託으로 함께 朝鮮共産黨 傘下 組織인 朝鮮靑年前衛隊에 加入하였다. 金斗漢은 路邊野話 라디오 放送에서, 김일성도 自身을 눈여겨 보았으며, 人民軍 南朝鮮 司令官 ( 所長 )으로 임명하겠다는 提議도 있었다고 回顧하였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金斗漢은 朝鮮靑年前衛隊를 脫退하였는데 그의 轉向 原因은 只今도 明確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김두한 本人은 父親의 同志였던 이규갑 , 윤치성 , 유진산 , 염동진 , 박용직 이 父親 김좌진 의 죽음에 對해 알게 되어 脫退를 하였다고 밝혔는데 事實關係에 틀린 點이 많아 現在의 歷史學界에서는 認定하지 않는다. 父親의 同僚였던 이범석 , 신익희 等 右翼 人士들의 持續的인 說得과 本人에게도 右翼에서 活動하는 것이 背景的으로나 政治的으로나 더 좋은 環境이라는 判斷 下에 自發的으로 轉向하였다는 說이 優勢하며, 轉向 後 염동진 이 組織限 百意思 에서 非公式으로 活動하였다. [22] [23]

1946年 金九 , 李承晩 , 김규식 名譽會長, 유진산 會長, 그리고 金斗漢을 監察部長 兼 別動隊 大將으로 參謀總大將.문영철等을.조직하여(전국2만3천여명..부하.일정때부터만들어 진조職數字.)大韓民靑 이 組織되었다. 金斗漢은 大韓民靑 實質的 指導者 로서 反託運動 等 左右對立에서 右翼의 先鋒將 役割을 하면서 산정호수 金日成 別莊襲擊, 박헌영 拉致未遂, 國軍準備對 襲擊, 學兵同盟 襲擊, 錢評 本部襲擊, 沁營 · 신불출 襲擊, 過去 親日事業家들의 巨金 押收, 9月 總罷業 等에 活躍하였고, [24] 金元鳳 襲擊, 左右合作 妨害 ( 여운형 脅迫 벼랑에서 落下事件, 김규식 脅迫) 等에도 關與하였다고 뒷날 回顧錄에서 밝혔다. 左右合作 妨害 以後 京橋莊 에서 金九 의 激勵와 忠告 以後에는 臨時政府 系列 人物들과 對立이 없었다고 한다. [25] 남로당 總責이었던 박갑동 에 依하면 美軍政 警察 에 잡히면 安心했고 別動隊에 잡히면 죽는다며 恐怖의 對象이었다고 한다. 當時 別動隊의 活動半徑은 北으로는 漣川郡 , 南으로는 火星 , 水原 , 龍仁 에 이르렀을 程度로 前 京畿道를 통틀었다고 한다.

逮捕와 釋放 [ 編輯 ]

金斗漢은 大韓民靑의 實質的 指導者이자 右翼의 先鋒將으로서 活躍하였으며 靑年團體 資金을 마련하기 위해 後날 反民特委 의 逮捕對象이었던 박흥식 親日派 資本家들 집에 襲擊하기도 했다고 하며 1원도 사사로운 곳에 쓰지 않았다는 根據로 서울 鍾路區 삼청동의 自身의 집을 低糖 李承晩 의 親筆 揮毫를 보여주며 領收證 을 썼다고 回顧錄에서 밝혔다.

1947年 大韓民靑에서 朝鮮共産黨 所屬 前衛大將 정진룡 을 殺害한 事件이 契機가 되어 美軍政 依해 布告令 違反 및 殺人罪로 逮捕되었고 死刑 을 宣告받았다. 3審 判官이 辭退提出하는 等 裁判 過程에서도 左右間에 對立이 極甚하였고, 1948年 3月 21日 金九 는 "近日에 김두한 君의 事件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敎訓이 많다. 金 君이 自己犯行에 對해서 法的 制裁를 받는 것은 當然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犯行이 愛國的 動機에서 나왔다고 看做할 수 있으며, 또 그가 偉大한 愛國者 金佐鎭 將軍의 領事(令嗣)라는 點에서 보면, 그에 對한 救命運動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果然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26] 1948年 3月 24日 지청천 , 이범석 等이 존 하지 에게 鎭靜하는 等 그의 救命運動을 벌였다. [27]

政治 活動 [ 編輯 ]

第1共和國 [ 編輯 ]

死刑宣告를 받고 執行을 기다리는 中이었던 金斗漢은 1948年 8月 15日 大韓民國 第1共和國 出帆으로 인해 事件이 美軍政에서 大韓民國 檢察 로 移管되었고, 곧 釋放되었다. 그 後 大韓靑年團 의 監察局長 兼 建設局長을 歷任하였다. 以後 勞動運動에 投身하여 勞動運動家로서도 活動했으며 右翼 活動 또한 繼續되었다. 李承晩 政府 에 依해 暗殺 對象의 標的 이 되기도 했다. 金九 의 暗殺 時期 以前인 1949年 6月 17日 에는 國家保安法 違反 嫌疑 等으로 投獄되어 獄苦를 치렀다. [28] [29]

韓國 戰爭 [ 編輯 ]

韓國 戰爭 이 勃發하자 金斗漢은 過去 別動隊의 隊員으로 推定되는 4名에게 劇的으로 배를 求해 漢江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29] [30] [31] 以後 人民軍 과 戰鬪를 벌이며 [32] 繼續 南下하여 釜山에 到着하였는데, 그의 回顧錄에는 그 當時에 釜山에 避難해 있던 高位層이나 社會 有力人士들의 行態에 큰 失望을 느끼고 그들을 膺懲했다고 하는 部分이 보인다. 그後 勞動者 人權 增進 關聯 活動에도 關心을 步였다고도 傳해진다. 路邊野話 라디오 證言에 따르면 李承晩 이 그에게 內務部長官을 주겠다는 提議를 하였으나 本人이 拒絶했다고 한다. 또한 李承晩이 學徒兵 을 이끌고 洛東江 戰鬪 에 크게 活躍한 金斗漢을 國民防衛軍 司令官(陸軍 准將)으로 提議하고 任命해주겠다고 했으나 김두한 本人은 士官學校 出身도 아니고 軍隊 經驗이 없다고 해서 拒絶했다. 또한 戰爭 中에 戰線에 젊은 軍人들이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신나는 노래를 틀고 男女가 춤을 추는 카바레는 있을 수 없다며 모든 釜山의 카바레의 暴力輩들을 毆打하고 카바레를 廢業을 했다.

政治活動 [ 編輯 ]

四捨五入 改憲 波動 무렵의 이야기하고 있는 민관식 , 이철승 , 김두한
1956年 7月 27日 , (앞) 김두한, (뒤) 조병옥 비롯해 野黨議員들
이정재 師團의 國會 에 亂入 金斗漢 議員 脅迫事件에 對한 東亞日報 1956年 2月 16日
1954年 서울 정동 배재學堂에서 열린 與野 國會議員 親善 野球競技를 마치고 選手들이 記念寫眞, 왼쪽은 민관식 , 오른쪽 첫 番째는 김두한, 두 番째는 金永三

金斗漢은 1954年 5月 20日 第3代 國會議員 選擧에 鍾路區 乙區 4選擧에서 無所屬 으로 出馬하여 法曹人 한근조 와의 僅少한 差異로 勝利, 當選되었다. 그러나 自由黨 에서 李承晩 의 終身制를 위한 無所屬 議員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金斗漢은 李承晩 政府 를 批判한 嫌疑로 選擧法 違反과 政治權力으로 멋대로 行悖부리는 負荷 김관철 殺害未遂로 拘束되었는데, 自由黨 入黨 條件으로 釋放되었다. 하지만 李承晩 , 이기붕 과는 政治路線을 달리 하였으며, 自由黨 議員總會에서는 李承晩 終身執權 推進 核心人物에 한 名이었던 장경근 에게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33]

그 後 1954年 7月 16日 에 板子집撤去에 關한 請願에 參與하였다. [34] 李承晩 3選 改憲韓 때는 改憲韓 公告 署名을 拒否하였고 國會 에서 1954年 11月 27日 祕密投票를 한 結果, 在籍議員 203名, 參席 議員 202名 中, 贊成이 135票, 反對가 60票, 棄權이 7票로 1票 差로 否決을 宣布했으나, 自由黨 四捨五入 改憲 을 일으켰다. 이 事件에서 改憲 反對 投票를 던진 議員들은 自由黨 에서 除名措置되어 脫黨당하였고, 以後 金斗漢은 無所屬 으로 活動하였다. [35]

1956年 1月 進步黨推進委員會에 組織部로 參與하였다. 그러나 復興住宅垈地 2重 賣買 嫌疑로 時頃에 內査받았고 進步黨을 脫退하였고, 곧 勞農黨으로 옮겼다. [36] [37]

繼續 李承晩 政府 에 對해 批判하였고 그 過程에서 이정재 에게 國會 休憩室에서 拳銃으로 脅迫을 當했으나 [38] 金斗漢은 이정재 를 호통쳤다고 한다. [39] 이 事件으로 野黨은 테러事件을 調査하기 위해 調査委員會를 結成하려고 했으나 當事者 金斗漢은 野黨의 結成을 反對하였고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고 主張했던 後聞이 傳해진다.

1956年 7月 27日 地方選擧 立候補 妨害에 對한 野黨 國會議員들이 거리示威를 한 7.27 데모事件에서 김종원 治安局長의 指揮下에 거리示威를 鎭壓하는 警察 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40] [41]

市街行進 以後 김두한 等 野黨 議員 15名은 이기붕 議長 辭職勸告決議案을 提出하였다. [42] 繼續해서 李承晩 政府 를 批判하였고 [43] 그 일로 1956年 10月 5日 李承晩 을 民族反逆者라고 批判한 國家元首冒瀆罪로 議員懲戒處分을 받았다. [44] 1956年 10月 13日 배재學院 運動場에서 열린 第1次 여야 民議員 親善 野球大會에 參加하였다. [45]

1957年 5月 25日 奬忠壇 公園 에서 열린 野黨 時局講演會에서 警護總責任者를 맡았다. 第4代 國會議員 選擧에서 第3代 國會 當時 韓國佛敎태고종 , 大韓佛敎曹溪宗 對立에서 比丘僧을 擁護하여 鍾路區 帶妻僧 의 本部를 두고 있던 宗敎 人士들에게 彈壓을 받았으며 게다가 自由黨을 한 經歷, 자잘한 暴行 事件과 말失手 等으로 區民들의 信賴를 잃어 大韓民國 第4代 國會 종로구에서 勞農黨 候補, 大韓民國 第5代 國會 忠南 洪城에서 無所屬, 6代 國會 종로구에서 無所屬 等 연이어 落選하였다.

以後 第4代 大統領 選擧에서 조병옥 選擧運動에 參與하였고 全國高學生聯盟 等 苦學生들을 支援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하며 신기범 [46] , 이찬오 [47] [48] 等 學生들과 交流하였다. 4.19革命 以後 南山 李承晩 銅像을 撤去하였다. [49]

第2共和國 時節 [ 編輯 ]

1960年 8月 場面이 次期 總理로 有力視되자 그가 親日派 였다는 所聞이 다시 擴散되었다. 8月 19日 國會에서 場面의 總理 指名同意案 票決이 있기 前 金斗漢은 汝矣島 國會議事堂 에 나타나 場面 의 親日經歷을 問題삼았다. 金斗漢은 張勉에게 歷史的인 貴한 票를 던져서는 안된다는 內容과 場面의 創氏改名을 적은 文件을 뿌리고 [50] [51] , 場面을 國務總理로 뽑는다면 議事堂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외쳤으나 [50] :80 [51] 事前 制止당했고, 場面의 總理 認准案은 無難히 通過되었다. 總有效得票數 225票 中, 贊成 117, 反對 107, 棄權 1로 定足數를 채우고 總理에 被選되었다. [52]

第3共和國 [ 編輯 ]

5·16 軍士政變 以後 1962年 3月 1日 獨立有功者들에게 建國訓長 을 授與式이 있었는데 金斗漢은 父親 김좌진 을 代身해 建國訓長 대한민국장 을 授與받았다. [53] 一角에서는 그 亦是 獨立運動家라는 主張이 提起되기도 하였지만, 以後에 金斗漢은 5·16 軍士 政變에 對해 觀望하는 立場이었으나 軍의 原隊 復歸한다는 公約을 믿고 애국단을 組織하였으나 곧 解體되었다.

韓獨黨 內亂陰謀事件 [ 編輯 ]

1965年 6月 22日 韓日協定 이 締結되자 이에 反對한 民衆黨 議員 8名이 8月에 議員職을 自進辭退하였다. 민중당 서민호 議員이 辭退로 [54] 闕席이 된 龍山區 補闕選擧 가 같은해 11月 9日 치루어졌는데 金斗漢은 韓國獨立黨 候補로 出馬하여 當選되었다. [55] [56] 그러나 1966年 1月 8日 에 金斗漢은 國家保安法 違反 및 內亂陰謀 嫌疑로 拘束되었다. [57] [58] 中央情報部는 金斗漢을 비롯한 韓國獨立黨 黨員들이 主導하여 5段階 革命 計劃을 樹立하고 司祭爆彈을 만들어 郊外에서 實驗하는등 政府 顚覆을 企圖하였다고 發表하였다. [59] [60]

1月 29日 國會 에서 金斗漢 議員 釋放 決議案이 通過되어 [61] 19日만인 1月 31日 釋放되었다. [62] 不拘束 狀態에서 搜査와 裁判이 進行되어 4月 28日 에 5年을 求刑받았으나 5月 10日 에 關聯 嫌疑者 全員 無罪가 宣告되었다. 拘束되어 있던 19日間 金斗漢은 健康이 惡化될 程度로 많은 拷問을 當하였다. [63] 以後 金斗漢은 龍山 에서 罹災民이 發生했을 때 서울市長과 만나 봉천동에 터를 마련해서 移住시켰으며 板子집 撤去 問題와 葛藤이 發生할 때마다 앞장서기도 했다고 한다.

國會 汚物 投擲 事件 [ 編輯 ]

1966年 9月 22日 韓國 肥料 株式會社가 사카린 密輸 한 事件으로 國會에서 對政府 質問 中 無所屬 金斗漢은 國會發言臺에서 發言했는데 發言 內容은 아래와 같다.

李秉喆 密輸 를 할 수 있었던 것은 政府가 犯罪를 저지를 만한 環境을 造成해 줬기 때문이다. 民族主義 를 破壞하고 財閥과 癒着하는 不正한 歷史를 되풀이하는 現 政權을 膺懲하고자 한다. 國民의 財産을 도둑질하고 이를 合理化시키는 當身들은 總理나 內閣이 아니고 犯罪 被告人에 不過하다. 그러니 于先 너희들이 密輸한 사카린 맛을 봐라.
 
— 國會會議錄 中 [64]

라고 批判하며 國務委員 等에게 미리 準備한 똥물을 投擲하였다.

以後 李秉喆 韓國肥料 社長(三星그룹 會長)은 사카린 密輸事件과 關聯 韓國肥料를 國家에 獻納하고 言論 및 學院 事業에서 손을 뗄 것을 宣言하였다. 그 後 李秉喆 社長은 獻納 交涉을 맡았던 장기영 副總理가 解任되자 改閣 1週日 만인 1967年 10月 11日 韓國肥料 株式의 51%를 國家에 獻納했다.

金斗漢은 國會議員職을 잃고 拘束起訴당하였고 政府는 金斗漢을 强하게 批判하였다. 하지만 金斗漢의 便을 드는 輿論이 絶對多數였으며 이 氣勢로 그는 第2黨인 新民黨에도 迎入되었다.

末年과 死亡 [ 編輯 ]

總選 出馬와 拘束 [ 編輯 ]

國會 汚物 投擲 事件 으로 獄苦를 치르다 病保釋으로 釋放된 金斗漢은 1967年 6月 8日에 實施된 第7代 總選 京畿道 水原 에서 신민당 候補로 出馬하였다. [65] 유세중 大韓民國 北韓 의 電氣불 比較 發言이 北韓 을 讚揚했다는 嫌疑로 反共法 違反으로 拘束되었고 選擧에도 落選하였다. 西大門 刑務所 矯導官 서윤환은 " 反共法 違反으로 拘束된 그날 저녁 김두한 氏가 비에 젖은 채 監房에 왔는데 손과 발에 手匣이 채워져 있었다. 온몸이 피멍 투성이였다."고 하며 그 다음 날 南山 中央情報部에 끌려가 甚한 拷問을 當했지만 돌아와서는 "徐 同志, 나 죽을 뻔했어"라며 웃을 뿐 不滿은 吐露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66] 以後 釋放된 金斗漢은 朴正熙 政權의 獨裁 를 持續的으로 批判하였다. [64]

在野 活動과 死亡 [ 編輯 ]

末年에는 鑛山事業과 정릉觀光事業等에 손을 댔으나 失敗하였다. [67] 아울러 勞動運動을 했으며 大學生들과 交流 等 在野人士로 活動하였다. 金斗漢은 1972年 11月 18 日, 電話를 받고 外出했다가 淸溪川3街 센추럴호텔 客室 302號에서 쓰러진채 發見되었다. [68] 急히 西大門 高麗病院 應急室로 옮겨졌다. 當時 診察을 했던 醫師는 1年次 레지던트 손관수氏로, 患者의 狀態는 意識不明의 昏睡狀態였으며 특별한 外傷은 없었고 오랜 持病이라는 診斷을 내렸다. [69] 重患者室에 入院은 했으나 狀態가 매우 안좋아 可望性이 없다는 醫療陣의 判斷下에 保護者와 相議後 20日 午前에 退院하였다. 金斗漢은 11月 21日 午前 9時 5分 서울特別市 城北區 정릉동 無許可 自宅에서 享年 55歲에 오랜 持病으로 世上을 떠났다. [70] 공교롭게도 그가 죽은 1972年 11月 21日은 朴正熙 政府가 維新憲法 贊反 與否를 묻는 國民投票를 實施하여 壓倒的인 支持로 維新憲法을 確定한 날이다.

葬禮와 言論報道 [ 編輯 ]

當時 大部分의 言論에는 金斗漢의 一代記에 對하여 '俠客' 等의 表現을 써가며 肯定的인 論調로 쓰여진 記事들이 揭載되었다. 그리고 윤치영 , 민관식 等 與野를 가리지 않고 많은 政治界 人士들이 조문하였다. 膝下에는 탤런트 金乙東 等 2男 1女를 두었다. [71] 葬禮는 조시원 이 葬禮委員長으로 光復張으로 進行되었으며 [72] [73] [74] 京畿道 楊州市 장흥면 신세계공원묘지에 安葬되었다. [75] 後날 長女 金乙東을 비롯한 遺族들과 知人들 그리고 言論에 依해 金斗漢의 他殺疑惑이 提起 되곤 하였다. [76]

親子 論難 [ 編輯 ]

金斗漢이 金佐鎭 將軍의 아들인가에 對한 論難이 있다. [77] [78] [79] [7] 이런 疑惑을 公開 紙面을 통해 提起했던 사람은 檮杌 金容沃이다. 김용옥은 1990年 신동아에 寄稿한 글에서 [80] '金斗漢은 金佐鎭의 아들이 아니다'라고 主張했다. 또한 김용옥은 그의 著書 《檮杌世說》을 통해 같은 主張을 하고 있다. 김용옥의 主張을 要約하면 '金斗漢은 開城出身의 父母를 모르는 孤兒이고, [81] 當事者의 一方的인 主張만 存在한다' [82] 는 것이다. 이러한 主張의 根據로는 《명인옥中企》 [83] 와 金斗漢의 自敍傳 內容等을 提示하고 있다.

自敍傳을 통해 金斗漢이 밝힌 自身의 出生에 關한 에피소드는 大略 이러하다. [84] 김좌진 將軍이 서울 近郊 野山에서 모임을 가진후 日本警察에게 쫓기던중 社稷洞 어느 住宅의 담을 넘어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는데, [85] 그 집은 宮廷 朴尙宮의 집이었고 그곳에 숨어지내는 동안 尙宮의 딸(박계옥) [85] 과 情을 나누었다고 한다. 金佐鎭이 그곳을 떠나면서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頭汗, 딸이면 斗屋으로 지으라" 했다고 한다. [86] [8] 論難이 생기자 日帝時代의 新聞 記事들이 發掘되기는 했으나 [87] [88] 이 또한 證據가 不足한 一方的인 記者의 主張뿐이다.

金斗漢의 一生을 바탕으로 한 映畫와 드라마가 製作, 放映되는등 [89] 大衆的인 認知度가 있음에도 不拘하고 그의 出生과 日帝時代의 行跡은 거의 大部分이 檢證되지 않은데다 深層的인 硏究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5年 光復前 그의 行跡의 相當한 部分은 1963年 에 出刊한 自敍傳 <피로 물들인 建國 前夜>와 동아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路邊野話 - 김두한 便" [90] [91] 等 當事者의 證言이 大部分이다. 金斗漢의 自敍傳 <피로 물들인 建國 前夜>는 絶版되었다가 2002年에 <김두한 自敍傳>이라는 題目으로 再出版되었다. 自敍傳 床에 一部가 歷史的인 事件과 一致하지 않는 部分이 있어 內容에 對한 信賴性은 떨어지는 便이다.

評價 [ 編輯 ]

肯定的 評價 [ 編輯 ]

  • 굿피플 選定 政治界 101人 中 한 사람으로 選定되었다. [92] [93] [94]
  • 前 統一副總理 권오기 는 "粗惡하고 거칠기는 했지만 決코 野卑하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人間 金斗漢은 시원시원한 말套와 禮儀를 지닌 好感이 가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95]
  • 바른 社會 밝은 政治 市民聯合(常任代表 전득주 숭실대敎授)에서 調査한 歷代 가장 훌륭한 國會議員으로서 신익희 , 조병옥 , 제정구 等과 함께 選定되었다. [96]

否定的 評價 [ 編輯 ]

  • 歷史學者인 한홍구 는 金斗漢에 對해 "우리 歷史에서 참으로 惡役을 많이 맡았지만, 分明히 그 어딘가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나름대로 自己 立場을 갖기 위해 熱心히 살았지만, 그는 周邊의 模寫들에 依해 利用되는 境遇가 많았고, 끝내 自身의 이름보다 將軍의 아들이란 아버지의 後光 속에 들어가야만 빛을 發하는 存在가 되고 말았다."라고 評價했다. [97]

기타 [ 編輯 ]

  • 와싱톤이라는 藝名을 쓰는 俠客이 獨立運動 嫌疑로 日帝 警察에게 모진 拷問을 當해서 刑務所에 쓰러져 瀕死狀態가 되었다. 이 때 金斗漢은 이 와싱톤을 살리기 위해 돌아다니면서 닥치는대로 돈을 求해와서 結局 와싱톤을 病院에 입원시켜 살려냈다. 實存人物 와싱톤은 性이 '鄭氏'인 것만 밝혀진 狀態이다. [ 出處 必要 ]
  • 차지철 朴正熙 政府 에서 4選 議員을 지낸 國會議員이다. 차지철은 國會에서 自身의 發議에 對해 否定的인 反應을 보이는 國會議員을 毆打하는 매우 나쁜 버릇이 있었는데 이를 보다 못한 金斗漢이 上衣를 脫衣한 뒤 차지철 앞에 서서 네가 그렇게 힘이 쎄다며? 그럼 힘 없는 다른 議員들 말고 나와 맞붙는 건 어떠한가? 라고 말하자 차지철은 김두한에게 지레 怯을 먹고 바로 退勤했다. [98]

學歷 [ 編輯 ]

  • 서울 교동普通公立學校 1年 中退
  • 中學校 入學資格 檢定考試 合格
  • 高等學校 入學資格 檢定考試 合格
  • 경성제국대학 2年 中退

略歷 [ 編輯 ]

  • 全國學生聯盟拷問
  • 大寒學徒義勇軍參謀長
  • 大韓勞動組合聯合會最高委員
  • 大寒復興建設團長
  • 國民聯合前線議長
  • 佛敎養老院副院長
  • 大寒拳鬪總聯盟理事
  • 全國高學生總聯盟委員長

家族 關係 [ 編輯 ]

4名의 副因에서 4男 2女의 子女를 뒀으며 戶籍上으로는 本妻 이재희 의 子女로 入籍되었다.

조카 송대한 송민국 송만세

金斗漢이 登場한 作品 [ 編輯 ]

드라마 [ 編輯 ]

映畫 [ 編輯 ]

小說 [ 編輯 ]

漫畫 [ 編輯 ]

音盤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參考 資料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歷代 選擧 結果 [ 編輯 ]

實施年度 選擧 臺數 職責 選擧區 正當 得票數 得票率 順位 當落 備考
1954年 總選 3代 國會議員 서울 鍾路區 을 無所屬 8,762票
28.63%
1位 初選
1958年 總選 4大 國會議員 서울 鍾路區 을 勞農黨 8,987票
23.93%
2位 落選
1960年 總選 5大 國會議員 忠南 洪城郡 無所屬 9,593票
18.37%
2位 落選
1965年 11.9 再補選 6大 國會議員 서울 龍山區 韓國獨立黨 12,048票
28.4%
1位 再選
1967年 總選 7代 國會議員 京畿 水原市 新民黨 21,770票
44.97%
2位 落選

各州 [ 編輯 ]

  1. 2學年 途中 다니지 못했다.
  2. MBC 뉴스 데스크 報道 資料 리스트
  3. [동양방송 DBS] 路邊野話 -- 김두한 便.....陰曆으로 1918年 5月 15日이라 하였으니 陽曆으로는 6月 23日이 된다.
  4. 獨立運動家 김좌진 將軍의 庶子(側室 蘇生 아들)로 여겨지나 親子論難이 持續的으로 提起되고 있다.
  5. 1990年에 김용옥은 그의 著書 《檮杌世說》을 통하여 金佐鎭 將軍의 後孫이라는 證據는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2020年에는 유투브 放送人 《서울의 소리》가 親子論難을 提起하였다.
  6. [한겨레 21] 荒唐한, 그러나 미워하기 힘든…... 將軍의 아들, 그것은 金斗漢을 象徵하는 말이다. 한 個人을 論할 때 그 사람 個人이 아니라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이 그 사람을 象徵하는 修飾語가 된다는 것은 그 人物이 끝내 아버지의 後光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그만큼 김두한 關聯 神話에서 김좌진 의 位置는 차라리 더더욱 絶對的이다. 아버지의 後光이 없었다면 金斗漢은 그저 차라리 구석진 뒷골목 깡牌의 보스나 解放 뒤 白色테러의 行動大將의 하나로밖에는 記憶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7. [머니투데이] "내가 將軍의 孫女가 아니라고?" 金乙東 발끈
  8. 김두한 <김두한 自敍傳 1>메트로新聞社 2003.1.15 p42
  9. 김두한 <김두한 自敍傳 1>메트로新聞社 2003.1.15 p47
  10. 김두한 <김두한 自敍傳 1>메트로新聞社 2003.1.15 p19
  11. 김두한 <김두한 自敍傳 1>메트로新聞社 2003.1.15 p44
  12. 김두한 <김두한 自敍傳 1>메트로新聞社 2003.1.15 p19
  13. 靑山裏 戰鬪는 1920年에 있었고 金佐鎭은 陽曆 1930年 1月 24日에 암살당했다. 따라서 7살(1920年)에 靑山裏 戰鬪가 있었고 10살 되던해에 父親이 암살당했다는 이야기는 앞뒤가 않맞는 이야기 展開다.
  14. 김두한 <김두한 自敍傳 1>메트로新聞社 2003.1.15 p48
  15. 김두한 <김두한 自敍傳 1>메트로新聞社 2003.1.15 p49
  16. 김두한 <김두한 自敍傳 1>메트로新聞社 2003.1.15 p50
  17. 路邊野話 (1969年 10月 19日 放送). “第6話 少年時節과 우미관 뒷골목 이야기” . 동아방송 . 2016年 3月 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18. “金乙東 議員 홈페이지 나의가족 김두한” . 2012年 2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19. 路邊野話 (1969年 10月 17日). “第4話 父親 金佐鎭將軍을 滿洲에서 만나고 온 얘기” . 동아방송 . 2018年 3月 12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8年 3月 11日에 確認함 .  
  20. “우리나라 最初의 映畵館 優美館 없어진다” . 東亞日報 . 1982年 11月.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1. “흔들리는 職業倫理 (3)「代價第一」에 무너지는 프로精神” . 京鄕新聞 . 1989年 10月 18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2. 路邊野話 (1969年 11月 11日 放送). “第25話 解放後 大韓民靑 母體에 對해” . 동아방송 . 2016年 4月 1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23. 조한필 記者 (2009年 11月 16日). “(名文家를 찾아서)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 덕수 李氏家” . 조인스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24. “漢江河口 軍事史3-韓國戰爭期(綜合)” . 統一뉴스 . 2006年 11月 3日. 2016年 3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25. 路邊野話 (1969年 12月 6日). “第43話 金九先生과의 關係” . 동아방송 . 2016年 4月 1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26. 金九 (1948年 3月 21日). “祖國 興亡의 官斗(關頭)에 臨하여 南下한 以北 同胞에게 基(奇)艦” . 白凡金九先生記念事業回. 2012年 1月 2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27. “金斗漢 減刑을 量 李將軍이 陳情”. 自由新聞 . 1948年 3月 24日.  
  28. “金斗漢 大韓靑年團 建設局長, 國家保安法 違反 等으로 서울地檢에 送廳”. 漢城日報. 1949年 9月 10日.  
  29. “第67話 白凡 金九先生 暗殺에 관계됨” . 동아방송 . 1949年 9月 10日. 2013年 12月 13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30. “6.25를 回想(回想)한다 (5) 三統士(三統社)는 只今 어디에…” . 京鄕新聞 . 1980年 6月 27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1. “4) 맥아더 將軍의 一線 視察과 中共軍 所屬 北韓 義勇軍-김웅수將軍回顧錄” . 2016年 4月 1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32. “第68話 6.25渡江 避難”. 1970年 1月 12日 放送.  
  33. 政界野花 (1970年 12月 11日 放送). “金斗漢의 장경근 毆打 事件·改憲烈風” . 동아방송 .  
  34. [第3代國會 第19回 第25次 國會本會議 11. 板子집撤去에관한청원] 大韓民國 國會 會議錄
  35. “그때 그일들 <255> 閔寬植(민관식) (3) 四捨五入改憲(四捨五入改憲) 運命(운명)의 날” . 東亞日報 . 1976年 11月 3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36. 韓國日報 1956年 4月 21日
  37. 서중석 (1999年 12月 15日). “曺奉巖과 1950年代(上)(逆比韓國學硏究叢書 15)”. 역사비평사. 199面.  
  38. 박재균 記者 (2000年 1月 2日). “(김영삼前大統領 回顧錄 脫稿)"58年 否定總選때 唯一한 落選 " . 東亞日報 .  
  39. “YS "野人 너무 보고 싶다" 김두한 長男 警敏氏 招待 祕話 公開”. 굿데이. 2003年 4月 22日.  
  40. 路邊野話 (1970年 1月 20日). “第76話 7.27 議員 데모” . 동아방송 . 2016年 4月 1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41. “그때 그일들 <161> 朴炳培(박병배) (5) 7.27民議員(民議員)데모事件(事件) 失敗(失敗)韓 强壓策” . 東亞日報 . 1976年 7月 3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42. 차윤경 記者 (2005年 12月 14日). “歷代 國會議長 不信任 決議案 事例…” . 世界日報 .  
  43. 조성관 (2005年 9月 10日). “實物로 만나는 우리들의 歷史”. 熊進씽크하우스. 120面.  
  44. “歷代國會(歷代國會) 議員(議員)懲戒 事例(事例)” . 京鄕新聞 . 1974年 12月 17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45. 조성관, 實物로 만나는 우리들의 歷史 (熊進씽크빅, 2006) 122페이지
  46. “김두한氏 寫眞 公開” . 聯合뉴스 . 2003年 4月 30日.  
  47. 김유경 記者 (2010年 5月 3日). “高麗大, 5日 開校 105周年 記念式” . 아주經濟.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48. “김두환氏 祕書官出身 이찬오氏 起亞車顧問으로 컴백” . 交通新聞. 2003年 10月 14日. 2016年 3月 5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49. 鄭雲鉉 記者 (2000年 11月 7日). “銅像 撤去와 歷史的 評價” . 오마이뉴스 , 대한매일 .  
  50. 康俊晩, 《韓國現代史散策: 1960年便 1卷》(人物과사상사, 2004) 80
  51. 『場面 總理의 悲劇』,『신동아』, 1984年 2月號
  52. 『場面 總理의 悲劇』,『신동아』, 1984年 2月號 54
  53. “43年前(連戰)의感激(감격)되살아” . 京鄕新聞 著者 =. 1962年 3月 1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54. 이만섭 <5.16과 10.26 朴正熙, 김재규 그리고 나> 羅南 2009.8.15 p107
  55. 서병구 <朴政權 19年> 漢城出版社 1986.9.10 p40
  56. 京鄕新聞 1965年 11月 10日子 報道
  57. “金斗漢議員(金斗漢議員) 拘束” . 京鄕新聞 . 1966年 1月 10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58. “國家 保安法 違反, 內亂陰謀 嫌疑의 金斗漢 議員 拘束에 對해 "金斗漢 議員 釋放하라"는 懸垂幕을 들고 街頭行進하는 市民들” . 民主化運動記念事業會 . 2014年 4月 7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4年 4月 5日에 確認함 .  
  59. 김두한 <김두한 自敍傳 2>메트로新聞社 2003.1.15 p206
  60. 京鄕新聞 1965年 11月 20日 報道
  61. “金斗漢議員(金斗漢議員) 釋放(釋放)決意” . 京鄕新聞 . 1966年 1月 29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62. “金斗漢議員(金斗漢議員)出監” . 東亞日報 . 1966年 1月 31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63. 김두한 <김두한 自敍傳 2>메트로新聞社 2003.1.15 p207
  64. “百萬弗 미스터리” . SBS . 2003年 9月 1日. 2013年 12月 1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65. 이만섭 <5.16과 10.26 朴正熙, 김재규 그리고 나> 羅南 2009.8.15 p111
  66. “김두한 '별' 星條旗 보다 많은 51個”. 굿데이. 2002年 10月 29日.  
  67. 김두한 <김두한 自敍傳 2>메트로新聞社 2003.1.15 p220
  68. 김두한 <김두한 自敍傳 2>메트로新聞社 2003.1.15 p223
  69. 김두한 <김두한 自敍傳 2>메트로新聞社 2003.1.15 p224
  70. 김두한 <김두한 自敍傳 2>메트로新聞社 2003.1.15 p225
  71. “聯作 에세이 어머니 탤런트 金乙東 糟糠之妻 便” . KBS . 2003年 8月 25日. 2008年 12月 28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72. “故(高) 金斗漢(金斗漢)氏 葬禮式(葬禮式) 來日 光復同志葬(光復同志長)으로” . 東亞日報 . 1972年 11月 24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73. “金斗漢(金斗漢)氏 光復會葬(光復會長) 嚴修(嚴修)” . 京鄕新聞 . 1972年 11月 25日.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74. “路祭때 어린이들이 절을 올리고 있는 모습” . 2016年 3月 4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10年 10月 10日에 確認함 .  
  75. [네이버 知識百科] 김두한 [金斗漢] (韓國民族文化大百科, 韓國學中央硏究院)
  76. 김두한 <김두한 自敍傳 2>메트로新聞社 2003.1.15 p222
  77. [미디어스] 金乙東, 김좌진-김두한 親子 疑惑글 削除 要請
  78. [한겨레 新聞] 候補들 잇따라 인터넷서 ‘疑惑 글’ 지우기
  79. [경향신문] 金乙東 “난 正말 將軍의 孫女”…도올에 憤痛
  80. [신동아] 1990年 8月號, p370 ~ 390
  81. 金容沃 <檮杌世說> 통나무 1990.6.20 p282
  82. 金容沃 <檮杌世說> 통나무 1990.6.20 p280 ~ 283
  83. [주간한국] 將軍 아들 아니면, 族譜엔 왜 실렸나..... 김용옥 敎授가 金斗漢이 金佐鎭의 아들이 아닐 수 있다고 疑心한 理由는 뭘까? 工巧롭게도 金斗漢의 回顧錄이 실린 冊 명인옥中企(名人獄中記ㆍ1968年)가 실마리를 提供했다. "나는 事實上 孤兒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일곱 살 때까지, 그러니까 교동 普通學校 2學年에 다니던 때까지는 그래도 外祖母님과 어머님의 알뜰한 사랑 속에서 클 수 있었다. 그러나, 저 世界 戰史上 稀貴한 靑山裏 大捷이 있자 一警은 卽刻 外祖母님과 母親을 投獄했다. 그래서 나는 말 그대로 天涯 孤兒가 됐던 것이다. 그리고 열살 되던 해에 不忘義 獨立軍 大將인 父親의 別世를 傳해 듣고 울었다.(김두한)" 靑山裏 戰鬪가 벌어진 1920年에 金斗漢의 나이는 滿 2歲였다. 우리 나이로는 세 살. 金佐鎭 將軍이 世上을 떠난 1930年에는 滿 12歲였다. 金斗漢이 記憶한 어린 時節은 歷史와 맞질 않는다. 回顧錄에는 甲申政變의 主役 金玉均을 할아버지라고 紹介하고, 金日成이 解放 直後 南半部 人民司令官을 맡아달라고 付託했다는 等 理解할 수 없는 대목도 꽤 많다.
  84. 김두한 <김두한 自敍傳 1>메트로新聞社 2003.1.15 p38 ~ p42
  85. 김두한 <김두한 自敍傳 1>메트로新聞社 2003.1.15 p40
  86. 金容沃 <檮杌世說> 통나무 1990.6.20 p281
  87. “己未年에 군정사 創立, 軍事運動의 基礎, 己未年 滿洲로 亡命한 同志와 握手, 놀라운 消息을 傳하던 運動의 基礎, 長逝한 김좌진 一生(4)”. 中外日報 . 1930年 2月 18日.  
  88. “亂中生活 1年餘 故國와서 또 琉璃, 風前燈火같은 古阜生命, 白癡 김좌진遺族 慘景”. 中外日報 . 1932年 12月 23日.  
  89. 임권택 監督의 < 將軍의 아들 >, SBS 大河드라마 < 野人時代 >
  90. [동아방송 DBS 1963 ~ 1980] 路邊野話 -- 김두한 便
  91. [FilmKo] 故 議送 金斗漢 議員 育成 路邊野話 1
  92. (굿피플 101人) 政治·經濟·演藝·體育·文化界 굿데이 2003年 9月 17日
  93. 굿피플 101人 選定過程 2003年 9月 17日 굿데이
  94. 굿피플 101人 뽑고보니… 굿데이 2003年 9月 17日
  95. “朝鮮 第一의 俠客 김두한이오” .   [ 깨진 링크 ( 過去 內容 찾기 )]
  96. 천영식 記者 (2003年 9月 25日). “16代 議政活動 조순형,김근태 1位” . 文化日報 .  
  97. “荒唐한, 그러나 미워하기 힘든…” . 한겨레21 . 2002年 11月 14日 第433號.  
  98. "金斗漢은 正義派 政治人"
  99. 意見이 이상희와 이중규로 나누어져 있음
  100. 박정인이 野人時代 의 박인애라는 一部 言論에서 記事化되기도 했으나 朴氏 女性과 박정인은 別個의 人物이다.
  101. 주성철 記者 (2008年 8月 27日). “故허장강, 自己만의 色깔로 記憶된 最初의 俳優” . 스타뉴스.  
  102. 朝鮮日報 에 連載됐다가 뒤에 "將軍의 아들"(8卷)로 題目이 바뀌어 發刊되었다.
  103. 지은식 記者 (2009年 11月 6日). “第5回 웹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최종선정작 發表” . 財經一步.  
  104. 김지영 記者 (2002年 9月 9日). “他카피의 '金斗漢', 輕快한 리듬 人氣” . 韓國日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