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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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보
1931年 뒷房 書齋에서
出生 1893年 6月 19日 ( 1893-06-19 )
性別 男性
國籍 大韓民國
本館 東萊

정인보 (鄭寅普, 1893年 6月 19日 ~ 1950年 9月 7日 警)는 日帝令 朝鮮 大韓民國 의 漢學者·歷史學者·言論人·政治人·作家이다. [1]

大韓民國 政府 樹立 時 無任所 長官室 招待 監察委員長이었으며, 1950年 韓國戰爭 때 拉北되었다. 本貫은 東萊 , 字는 경업(經業), 號는 爲堂(爲堂), 薝園(?園), 미소산인(薇蘇山人)이다.

生涯 [ 編輯 ]

나서부터 中國 留學까지 [ 編輯 ]

1893年 陰曆 5月 初엿새 서울 北丹齋의 外家에서 出生하였다. 父親은 정은조(鄭誾朝), 母親은 參判을 지낸 성건호의 딸 達成 徐氏(達城 徐氏)였다. [2] 11歲 때인 1904年 서울을 떠나 양근, 鎭川 等地를 轉轉하였다. 2年餘 後 서울로 돌아와 13歲 나이에 창령 姓氏 宅 同甲내기 규숙과 結婚하였다. 규숙은 1913年 9月 6日 雙둥이 딸을 낳고 9日만에 死亡했다. 後둥이 亦是 그를 따라 死亡하였다. [3]

祖父로부터 訓導를 많이 받았으며 집안 어른 中 정인표의 가르침이 컸다. 少年 정인보에게 精神的으로 影響을 끼친 사람 中에는 陽明學 强化學派의 경재 이건승 과 난곡 이건방 이 있다. [4]

1908年 16歲 때 이민웅을 따라 上海로 가서 2年餘 滯留하였다. 이때를 始作으로 戰後 다섯 次例 中國을 다녀왔으며 正確히는 1910年 18歲에 上海에 다녀오고 1911年 벽초 홍명희 와 生母 徐氏와 同行, 1912年 겨울에 生母를 모시고 안동현을 다녀왔고 1913年에 다시 滿洲를 거쳐 上海로 갔다. 이때 6-7個月間 머무르다 夫人 徐氏의 訃告를 듣고 歸國하여 以後로 繼續 朝鮮에 머물렀다. [5]

1912年 상하이에서 洞祭祀 設立에 參與하였다. [6] 鄭寅普가 中國에 머물던 時節 中國에서 배울만한 學者로 章炳麟 을 꼽은 바 있다. [7]

歸國하여 [ 編輯 ]

中國에서 돌아온 鄭寅普는 喪服으로 또한 亡國民의 票로서 검은 洋服과 검은 帽子 차림으로 一貫하였으며 이 때문에 警察에 불려다녔다. 歸國으로부터 6個月 무렵인 11月 24日 18歲 조경희와 再婚하였다. 셋째딸 정양완의 證言에 따르면 어린 딸을 위한 父母님의 뜻이었다고 한다. [8] 1914年 率家하여 忠淸道 鎭川으로 내려갔다. 서울 生活에서 意味를 찾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生活費를 堪當하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以後 4年餘間 鎭川에서 살다가 1919年 忠南 목천으로 率家하여 移徙하였다. 이 亦是 生活方便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9]

1922年 4月 연희전문학교 敎授로 招聘되었다. 어떤 經路로 하여 草野의 村婦가 敎授로 拔擢되었는지 記錄은 存在하지 않는다. [10] 當時 鄭寅普의 나이는 고작 30歲였으며 學校로서는 破格的 人事였다. 鄭寅普는 漢文과 朝鮮文學을 講義하였고 各 學年의 擔任도 여러次例 歷任하였다. [11] 演戱에서의 名講義로 有名稅를 타 李花女子專門學校 , 세브란스 醫學專門學校 , 中央佛敎專門學校 에 招聘되어 國學과 東洋史를 講義하였다. [12]

1924年 《 時代日報 》에 이어 《 東亞日報 》 論說委員에 委囑되었다. 鄭寅普의 글은 매섭고 거침없기로 定評이 났으며 30代 初中盤에는 韓國의 代表級 文士로 알려졌다. 社會的으로 比重있는 일이 있으면 執筆依賴가 들어왔다. [13] 40代 中年期에 들어 鄭寅普는 國學(本國學(啓蒙期)-朝鮮學(日帝下)-韓國學(解放後))에 남다른 關心을 갖고 本格的으로 硏究에 突入하였다. 그리하여 〈國學인물론〉에서 松江 鄭澈과 茶山 丁若鏞, 丹齋 申采浩에 關한 값있는 論著를 남겼으며 特히 〈다산 先生의 生涯와 業績〉은 質量에 있어 刮目할만한 業績으로 評價된다. 畢生의 力作 《 陽明學年론 》 亦是 이 時期의 勞作이다. [14] 또한 적잖게 歷史 關聯 著述을 했으며 代表的인 것이 《 朝鮮史硏究 》이다. [15] 鄭寅普는 時調作家라는 呼稱에 걸맞게 많은 時調를 지어 남겼다. 鄭寅普가 처음으로 發表한 時調는 1926年 12月 《誡命》에 揭載된 〈가신 어머님〉이다. 以後로 數百篇의 時調를 지었으며 解放 後 1948年 12月 을유문화사 에서 《 薝園時調集 》을 刊行, 總 292首가 收錄되었다. [16] 鄭寅普의 始祖는 解放 後 한때 高等學校 國語敎科書에 실리기도 했으며 特히 〈梅花詞 三貼〉은 4回에 걸쳐 《高1 國語》의 敎材로 쓰였다. [17] 鄭寅普는 紀行文 作家로서도 훌륭한 作品을 몇 篇 남겼다. 代表的으로 金剛山 地域을 旅行한 《管東海山麓》과 南道地方의 紀行文 《남유기新》이 있다. [18]

獨也靑靑 [ 編輯 ]

1937年 봄 朝鮮總督府 에서 朝鮮語 使用을 禁하고 朝鮮歷史度 가르치지 못하게 하여 鄭寅普는 忽然히 연희전문大學을 退任하였다. [19] 많은 벗들이 毁折하는 가운데 鄭寅普는 외로움 속에서 1940年 가을 率家하여 京畿道 楊州郡 노해면 倉洞 733番地로 移徙하였다. [20] 鄭寅普는 창동의 陋屋에서 隱居生活에 들어갔다. 시골의 閑寂한 마을에서 鄭寅普는 外出을 삼가고 冊을 읽고 글을 썼으며 特히 이 時期에 많은 時調를 지었다. 1945年 京畿道 楊州에서 다시 全羅北道 益山郡 黃畵面 중기리 윤석오의 집으로 옮겨갔다. [21]

光復 後 [ 編輯 ]

1946年 3月 殉國3義士 遺骸奉還日 金九 , 啓礎 방응모 等과 함께

1945年 8月 光復을 맞아 〈選局先烈追念文〉을 發表, 殉國志士와 生存知事를 追念하였다. [22] 이어 臨時政府要因들을 歡迎하는 〈本領事〉를 지었다. [23] 1946年 11月 國學專門學校 에 招聘되어 熱誠을 다하여 經營과 講義에 臨하였다. [24]

1948年 8月 大韓民國 政府가 樹立되면서 8月 28日 監察委員長 (現 監査院長)에 任命되었다. 李始榮 副統領의 薦擧였다고 한다. 鄭寅普는 어수선한 官妓와 公職者의 淸廉을 위한 監督을 게을리 하지 않고 1949年 2月 2日 임영신 商工部 長官의 飛行을 國務會議에서 報告하였다. 임영신은 李承晩의 寵愛를 받는 側近 中의 側近이었기에 李承晩 政府와 拮抗關係가 되었다. 監察委員長으로서 所任을 다하기 힘든 狀況이 오자 鄭寅普는 1949年 7月 23日 監察委員長職을 辭任하였다. [25] 監察委員長을 내던진 以後 鄭寅普는 草野에서 글을 쓰고 各種 碑文을 지으며 悠悠自適히 生活하였다. [26]

光復 後 鄭寅普가 지은 노랫말에는 〈3·1節 노래〉, 〈光復節 노래〉, 〈制憲節가〉, 〈開天節가〉의 4代 國慶節 歌詞가 있으며 그 밖에 〈國學大學가〉, 〈고려대학교가〉, 〈동국대학교가〉, 〈德性女子中學校가〉, 〈聖神女子中學校가〉, 〈國立圖書館第〉, 〈大韓婦人會가〉, 〈學徒特別訓鍊所가〉, 〈公務員의 노래〉 等을 作詞하였다. [27]

韓國戰爭에 휘말리다 [ 編輯 ]

1950年 韓國 戰爭 이 일어난 그해 7月 31日 서울에서 共産軍에 依하여 拉北된 以後 死亡 時期가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한동안 신경완 의 證言에 依하면 北韓政權에 依해 '反動'으로 分類되어 國軍 北進中 적유령 山脈에서 10月 23日에서 25日 사이 放置되었다가 그 後 病院으로 後送되어 結局 그해 11月 死亡한 것으로 敍述되어 있으나, 北韓에서는 公式 死亡日은 9月 7日 로, 北行 直後 黃海道 에서 爆擊을 받아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拉北者들 죽음의 責任을 美國에 돌리기 위함이다.

그의 拉北과 죽음에는 當時 北韓 部首相이었던 洪命憙의 次男으로 間諜으로 南派되었던 둘째사위人 홍기무(洪起武)가 [28] 相當히 關聯되었다는 것이 넷째 아들 정양모 前 국립중앙박물관長의 證言이다. [29] [30]

洪命憙는 越北할 때 둘째 아들 홍기무를 데리고 갔는데 그는 爲堂 鄭寅普(爲堂 鄭寅普) 先生의 둘째 사위였습니다. 다음 爲堂 先生의 子弟분人 정양모(鄭良謨) 前 국립중앙박물관長의 證言,

“아버님과 벽초 先生이 切親해 벽초의 둘째 아들 홍기무와 둘째 누이의 婚事가 이루어졌다. 벽초가 1948年 南北連席會議에 가며 둘째 아들을 데리고 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 後 둘째 妹兄(홍기무)李 南派間諜으로 내려왔다 붙잡혔다. 當時 아버님은 監察委員長이었다. 6·25街 나자 刑務所를 脫出, 서울이 점령당하자 큰 車를 타고 우리 집에 왔다. 丈人에게 큰 절을 하더니 ‘丈人께서도 저와 같이 革命 事業을 하시지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너는 唯物論者高 나는 唯心論者인데 어떻게 같이 革命 事業을 하느냐’고 反問했다. 그러자 다시 큰 절을 하더니 ‘丈人이 節槪를 지키는 건 尊敬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人民政府에 協力 안하시면 反動입니다’라고 하고 갔다. 그 며칠 後 保安署員 몇 名이 와서 아버지를 데리고 갔다.” [29] [30]

6.25 當時 査頓 洪命憙는 南侵 主犯 金日成 의 丈人이었고, [31] 사위 홍기무는 김일성의 妻男이었다. 洪命憙는 當時 北韓 副首相이자, 戰爭의 最高 指導部였던 7人 軍事委員會의 委員으로 김일성의 南侵 準備와 修行에 積極 協力하는 等 6.25 主要 戰犯 中 한名이었다.

事後 [ 編輯 ]

1983年 연세대학교出版部에서 유고 等을 모아 《薝園 정인보 全集》 前6卷을 묶어냈다. [32]

1990年 建國訓長 독립장을 追敍받았다.

2001年 延世大學校 는 民族史觀 定立과 國學 振興에 獻身한 先生을 기리기 위해 第2人文館을 爲堂館(爲堂 鄭寅普 先生 記念館)으로 指定하였다.

2008年 8月 學術誌 ‘韓國史 市民講座’ 下半期號(43號)에서 大韓民國 建國 60周年 特輯 ‘大韓民國을 세운 사람들’을 選拔, 建國의 基礎를 다진 32名을 選定할 때 敎育,學術 部門의 한 사람으로 選定되었다. [33]

2005年 太學士에서 鄭寅普의 딸 정양완의 飜譯과 註釋으로 《담원門錄》 賞·中·下 3卷이 發行되었다. [32]

史上 [ 編輯 ]

鄭寅普의 家門이 朝鮮後期 少論 學者 官僚系로 分類되는바 또한 生母가 達成 徐氏로서 小論 名門家의 훈손이었던바 그의 學問的 背景은 朝鮮後期 小論界의 學風이었다. 小論系 知識人들은 歷史學을 重視함과 아울러 富國强兵·군신지의 等을 强調하여 왔으므로 鄭寅普가 漢學者로서 近代期 朝鮮學 硏究를 先驅했던 것은 이러한 小論學風의 傳統의 影響이었다고 생각된다. [34]

鄭寅普의 學問·思想에서 가장 根幹되는 것은 陽明學이다. 정인보 스스로가 가장 큰 스승으로 여겼던 사람이 곧 이건방이었다. 1910年 곧 나라가 亡하던 해 鄭寅普는 이건방을 찾아가 師弟之間을 맺었다고 한다. 이건방은 强化陽明學 學者로서 當時 國內에서는 唯一하게 唐學의 脈을 잇던 사람이었으며 이건방은 정인보에 對하여 自身을 唯一하게 알아주는 이라는 한時까지 써 그를 寵愛하였다. [35]

亡國을 맞은 鄭寅普는 民族의 主體的 精神을 되살리는 것을 1次 課題로서 생각하였다. 그가 생각기에 우리의 正體性을 잃어버리고 남을 좇기만 하였던 것이 反省할 우리나라의 歷史이자 亡國을 맞은 原因이었던 것이다. 이를 위하여는 바깥(남)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는 失心을 回復하는 것이 매우 重要하다고 보았다. 그 失心을 찾기 위하여 鄭寅普는 옛것을 考察하고자 하였다. 옛것을 돌아보아 우리의 病弊의 뿌리와 民族의 보배를 찾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렇게 우리 것에서부터 나라 再生의 原動力을 찾음으로써 民族的 自負心·主體性을 되찾고자 하였다. [36]

鄭寅普는 漢文과 國文(한글)을 아울러 썼으며 同時代의 다른 文人과 比較되게 量文字를 上下關係에 있다거나 從屬的 關係에 있다거나 생각지 않았다. 오히려 漢文과 國文이 對等한 價値가 있으며 狀況·必要에 따라 自由롭게 쓸 수 있다고 보았다. [37]

評價 [ 編輯 ]

文章에 對해 [ 編輯 ]

황원구 는 鄭寅普의 文章을 評하되 "典型的인 선비다운 獨特한 筆體로 많은 文庫를 執筆했다. 더러는 壁者를 골라서 쓰기도 했고, 까다로운 文體를 驅使하기도 했지만, 文字銀 大體로 傳統的인 八家文 의 世界를 攄得한 것이었다. 아울러 韓國의 옛 말을 골라서 流暢한 글과 아름다운 時調를 짓는 데도 一品이었고, 漢詩의 境地도 脫俗하면서 現實的인 經世의 呼訴力이 있었다."고 했다. [13] 다만 鄭寅普의 글은 어렵다는 評을 받았으며 國文學者 天台山人 김태준 은 "鄭寅普의 글이 어려워 筆者와 新聞社 校正者와 總督府 檢閱者 세 사람만이 읽을 것"이라 酷評했다. 김태준은 또한 "文獻學的 貢獻은 크다"고 認定하면서도 "論理의 飛躍은 그 貢獻보다 더 크다."고 했다. [38] 백낙준 은 《薝園時調集》의 〈序言〉에서 "爲堂은 時調 作家로 自處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한 그러한 일컬음을 받기도 願하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爲堂은 時調를 짓고 또한 훌륭히 짓는 것이 事實이다."라고 했다. [16]

家族 [ 編輯 ]

  • 曾祖父 : 정원용 (鄭元容, 1783~1873)
    • 祖父 : 정기년(鄭基年, 1816~1865) [39]
      • 아버지(生父) : 정은조(鄭誾朝, 1856∼1926) [40] - 鄭寅普는 生父 정은조의 膝下 2男 3女 中 長男.
      • 어머니(生母) : 大邱 徐氏(大丘 徐氏) 否認 : 眞사(進士) 서상진(徐相眞)의 딸 [40]
      • 養父(本來 伯父) : 正墨詔(鄭?朝, 1847 ~ 1866) [41] - 정인보 生父 정은조의 親兄. 正墨詔는 定期年의 長男.
      • 養母(本來 큰어머니) : 慶州 李氏 [41] 否認
        • 否認 : 성계숙(成癸淑) : 死別 初配
          • 長女 : 정정완(鄭貞婉, 1913~2007) : 重要無形文化財 第89號 針線匠(針線匠) [42]
        • 否認 : 조경희 (趙慶姬, 1897 ~ 1979.10.13) : 再婚 計杯
          • 次女 : 정경완(鄭庚婉, 1920~ ) [43]  : 벽초 홍명희 의 아들 홍기무 와 結婚하여 越北. [44] [45]
          • 長男 : 정연모(鄭淵謨, 1923~ ) : 敎師 歷任
          • 次男 : 정상모(鄭尙謨, 1926~ ) : 서울 西部警察署長歷任
          • 三女 : 정양완 (鄭良婉, 1929~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敎授 歷任 [46] 後 現在 淑明女子大學校 名譽敎授. 男便은 강신항 成均館大學校 名譽敎授.
          • 三南 : 정흥모(鄭興謨, 1931~?) : 韓國 戰爭 詩 第 5師團 一員으로 鐵原地球에서 戰士
          • 사남 : 정양모 (鄭良謨, 1934~ ) : 국립중앙박물관長 歷任
          • 士女 : 정평완(鄭平婉, 1935~ ) : 敎師 歷任, 男便은 문국진 한양대학교 名譽敎授.

單行本 [ 編輯 ]

續刊이나 飜譯物은 따로 記入하지 아니한다.

  • 《朝鮮史硏究》(1946年, 서울新聞社, 賞·下, 《東亞日報》에서 連載한 《五千年間 朝鮮의 얼》을 묶음)
  • 《薝園時調集》(1948年, 을유문화사)
  • 《?園國學散藁》(1955年, 文敎社)
  • 《?園文錄》(1967年, 연세대학교 出版部)
  • 《?園 鄭寅普全集》(1983年, 연세대학교 出版部, 1-4卷은 한글로 쓴 글과 限時 隨便, 5·6卷은 漢文으로 쓴 글)

같이 보기 [ 編輯 ]

各州 [ 編輯 ]

  1. 韓國歷代人物綜合情報시스템
  2.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16쪽.  
  3.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18-19쪽.  
  4.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20-23쪽.  
  5.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28쪽.  
  6.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39쪽.  
  7.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43쪽.  
  8.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61쪽.  
  9.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63-64쪽.  
  10.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67쪽.  
  11.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68쪽.  
  12.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77쪽.  
  13.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72-74쪽.  
  14.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112쪽.  
  15.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173쪽.  
  16.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193-194쪽.  
  17.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206쪽.  
  18.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259쪽.  
  19.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287쪽.  
  20.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291쪽.  
  21.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294-297쪽.  
  22.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320쪽.  
  23.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326쪽.  
  24.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341쪽.  
  25.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352-356쪽.  
  26.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379쪽.  
  27.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8쪽.  
  28. 홍기무(洪起武) 等 起訴 自由新聞 1949年 12月 25日
    傀儡(傀儡) 앞잡이 홍명희(洪命熹) 아들 等(等) 送廳(送廳) 1949.12.25 京鄕新聞 2面 : 以北 傀儡集團 副首相 홍명희(洪命熹)의 둘째아들 大議事 홍기무(洪起武)와 番一兵(?一炳)外 3名
    民國(民國)의 機密(機密)을 노리는 第五列(第五列)에 注意(注意)하자 1950.02.16 京鄕新聞 2面
  29. D-story 44 : 朝鮮의 3大 天才와 東亞日報-홍명희 便(3) 2010.08.09 洞네(동아미디어그룹 블로그) : 次男 홍기무(洪起武)는 爲堂 鄭寅普의 사위인데, 間諜으로 南派되었다가 6.25 때 丈人 爲堂을 拉北했다.
    D-storyⅡ 100 : 拉北된 東亞日報 人士들 洞네(동아미디어그룹 블로그) 6月 - 19 - 2013
  30. 4男 정양모(鄭良謨) 前 국립중앙박물관長의 父親 拉北 當時 일에 對한 證言 (動映像) 6.25戰爭拉北眞相糾明委員會 揭示일: 2013. 12. 11.
  31. 홍명희(洪命熹) 맏딸과 金日成(金日成) 再婚(再婚) Archived 2017年 3月 18日 - 웨이백 머신 연합신문(聯合新聞) 1950.01.25
    金日成(金日成)李 再婚(再婚), 홍명희(洪命熹) 맏딸 영숙(永淑)과 自由新聞 1950年 1月25日 2面 10段
    金日成(金日成) 再婚(再婚) Archived 2018年 3月 16日 - 웨이백 머신 漢城日報(漢城日報) 1950.01.25
    깨여지는 傀儡(傀儡)의 白日夢(白日夢) 熾烈化(熾烈化)韓 反訴反共運動(反蘇反共運動) 1950.01.25. 京鄕新聞 2面
    金日成(金日成) 專屬 看護婦 조옥희(趙玉姬), 逮捕 後 記者會見 釜山日報 1951年 3月 1日
  32.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9쪽.  
  33. 混沌의 解放空間서 自由民主主義 礎石을 놓다 東亞日報 2008年 8月 22日子
  34. 여희정 (2019年 9月 30日). “鄭寅普의 글쓰기와 民族文化의 企劃”.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13-15.  
  35. 여희정 (2019年 9月 30日). “鄭寅普의 글쓰기와 民族文化의 企劃”.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17.  
  36. 여희정 (2019年 9月 30日). “鄭寅普의 글쓰기와 民族文化의 企劃”.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359-360.  
  37. 여희정 (2019年 9月 30日). “鄭寅普의 글쓰기와 民族文化의 企劃”. 韓國學中央硏究院 韓國學大學院: 360-361.  
  38. 김삼웅. 《爲堂 정인보 評傳》. 蔡倫. 221-222쪽.  
  39. 정기년(鄭基年, 1816~1865) 眞사 放牧 韓國歷代人物 綜合情報 시스템, 韓國學中央硏究院
  40. 정은조(鄭誾朝, 1856∼1926) 門過放牧 韓國歷代人物 綜合情報 시스템, 韓國學中央硏究院
  41. 正墨詔(鄭?朝, 1847 ~ ?) 眞사 放牧 韓國歷代人物綜合情報시스템, 韓國學中央硏究院
  42. 정정완(鄭貞婉, 1913~2007) 韓國歷代人物綜合情報시스템
  43. 金日成-홍명희家에 얽힌 因緣 조선닷컴 2004.02.10
    金日成, 벽초 洪命憙에 特別禮遇 / 重責 주고 세간살이 보내줘 며느리, 北 통일신보에 紹介 벽초, 本紙에 ‘林꺽정’ 連載 朝鮮日報 2004.02.11 A26面
  44. 北韓 副首相을 지낸 홍명희 와 鄭寅普는 査頓間이다.
  45. 신준영 (2002年 7月 1日). " 누워서도 南쪽하늘만 보십니다" - 平壤時 신미리 在北桶協 特設墓地” . 民族21. 2014年 4月 20日에 原本 文書 에서 保存된 文書 . 2008年 5月 15日에 確認함 .  
  46. 인터뷰 "生前에「보상없는 愛國」强調"? 爲堂(爲堂)의 셋째딸 정문연(精文?) 정량완(鄭良婉) 敎授 1993.06.23 東亞日報 9面

參考 資料 [ 編輯 ]


前任
(初代)
無任所 長官室 監察委員會 初代 委員長
1948年 8月 28日 ~ 1949年 7月 21日
後任
노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