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정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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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波 方定煥
作家 情報
出生 1899年 11月 9日 ( 1899-11-09 )
大韓帝國 漢城府 西部 적선방 夜珠現計
死亡 1931年 7月 23日 ( 1931-07-23 ) (31歲)
日帝 强占期 京城府 경성제국대학교 附屬 病院
國籍 大韓帝國
言語 韓國語
職業 兒童文學家 , 獨立運動家 , 社會運動家
學歷 日本 도요 大學校 哲學 과 中退
經歷 朝鮮少年少女聯合會 會長
宗敎 天道敎
筆名 雅號(雅號)는 소파(小波)
活動期間 1921年~1931年
장르 兒童文學 , 詩學
父母 방경수(簿), 손성녀(某)
配偶者 손용화( 손병희 의 3女)
子女 방운용(長男), 방하용(次男)
親知 방한룡(할아버지)
손병희 (匠人)
손병흠(妻叔父)
손천민(4寸 妻男)
웹사이트 韓國方定煥財團

방정환 (方定煥, 1899年 11月 9日 ~ 1931年 7月 23日 )은 日帝强占期 獨立運動家 , 兒童文化運動가 , 어린이 敎育인, 社會運動家 이며 어린이날 의 創始者이기도 하다.

槪要 [ 編輯 ]

大韓帝國 漢城府 西部 적선방 아주現計 出身으로, 本貫은 溫陽 (溫陽), 號는 小波(小波)이다. 日本 兒童 文學家인 이와야 獅子糯米 (?谷小波)를 尊敬해서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는 說도 있으나, 水雲 崔濟愚 의 著書인 《 東經大全 》의 "용담수류사해원 구악춘회일세화(龍膽의 물이 흘러 온 世上 바다를 이루는 根源이 되고 구미산에 봄이 다시 돌아오니 온 世上이 꽃이구나)"라는 絶句에서 가져온 것으로 용담의 작은 물결이 되어 온 世上에 퍼지고 이 땅 위에 地上天國인 봄동산을 이룩하자는 天道敎 思想을 담은 것으로 天道敎 信者 小春 (小春) 김기전 과 함께 ‘小春’ ‘소파’라는 號를 지었다는 說도 있다. [1] 以外에도 殘物, 잔물결, 勿忘草, 몽犬初, 몽중인, 三山人, 北極星, 雙S, 木星, 은파리, CWP, 길동무, 雲井(雲庭), 派英(波影), 깔깔博士, SP生이라는 이름 을 筆名으로 使用하였다. 이는 日本 의 言論 檢閱을 避하기 위한 것이었고, 少數의 筆者들이 잡지 의 紙面을 채워야 했기 때문이다. 1931年 7月 23日 ( 木曜日 ), 오랜 疾病 過勞 로 因한 腎臟炎 으로 死亡 했다.

一生 [ 編輯 ]

成長期 [ 編輯 ]

方定煥은 溫陽 方氏 判書共派(判書公派)의 後孫이며, 純祖 때 求禮 縣監 (求禮縣監)을 지내고 兵曹參判 에 追贈된 방우정(方禹鼎) 將軍 의 동생인 방우준(方禹準)의 5代孫이다. [2] 1899年 漢城府 西部 적선방(積善坊) 夜珠現計(夜珠峴契)(只今의 서울 鍾路區 당주동 신문로1街 警戒)에서 魚物廛과 米穀商을 經營하던 방한룡(方漢龍,?~1905年 後)의 아들인 방경수(兒名 방경주,1879年~1913年 後))와 손성녀(1873年~1917年)의 長男으로 出生하였으며, 親할아버지 방한룡에게 漢文 을 배웠다. 夜珠個의 큰 商人 집안에서 아들 로 태어나 개구쟁이 어린 時節을 보냈으며, 4代가 함께 사는 富裕한 大家族으로 어른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어린 時節 病弱한 어머니에게 자랐고, 집안이 亡한 後 일찍 出嫁한 누이에 對한 剛한 愛着이 있었다. 일곱 살 때인 1905年 3寸을 따라갔다가 偶然히 만난 김중환(金重煥) 敎藏의 說得으로 寶城小學校 幼稚班에 入學하였다. 그런데 寶城小學校에서는 入學生은 댕기를 자르고 머리를 깎아야 하였는데, 이를 본 親할아버지 방한룡은 傳統을 斷絶해야 할 舊習으로 보는 進步 知識人들의 急進性에 對한 拒否感으로 매우 火를 내었다. 하지만 工夫를 하고 싶어하는 손주의 뜻을 尊重하여 學校에 다니는 것을 默認하였다. 그러다가 1907年, 方定煥의 집안은 작은할아버지의 事業 失敗로 食糧을 꾸러 갈 程度로 한瞬間에 가난해졌다. 1908年에는 ‘少年立地會’를 組織하여 童話口演, 討論會, 演說會 等의 活動도 하였다.

文學 登壇 [ 編輯 ]

1913年 서울微動初等學校 卒業 한 方定煥은 아버지 의 뜻에 따라 善隣商業高等學校 入學 하였으나 適性이 맞지 않아 商業學校 工夫 보다는 新文化 吸收를 위한 讀書 에 注力하였다. 이 時期를 前後로 최남선 이 日本 留學을 마치고 올 때에 가지고 온 印刷 字母(필름 印刷 以前에는 子音과 母音 글字板으로 印刷했고, 只今도 쓰이고 있다.)와 印刷 勞動者 2名과 함께 서울에서 運營한 出版社에서 發刊한 어린이 雜誌인 《소년》, 《붉은 저고리》를 耽讀했다고 한다. 1917年 최남선 이 펴내던 잡지 《靑春》에 보낸 이 現象文藝 選外佳作에 뽑힘으로써 登壇하였다.( 韓國방송통신대學校 出版部에서 3學年 2學期 國語國文學科 敎科書로서 펴낸 《韓國近現代文學社》에서도 1917年 을 方定煥의 登壇 時期로 보고 있다.) 그러던 中 卒業 을 1年 앞두고, 當時 擔任敎師와 父親 의 挽留에도 不拘하고, 適性에 맞지 않는 선린상業苦等 學校 中退 하고, 某處(鄕吏 隣近 到處)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며 獨學의 뜻을 품었다고 한다. 서울大學校 國語敎育學 과 이재승 敎授와 初等學校 敎師인 김대조 敎師가 같이 쓴 敎科書 偉人傳記 방정환(施工주니어)에 依하면, 後날 소파가 "善隣商業學校를 繼續 다녔다면 朝鮮銀行 書記가 되었을 것"이라고 記憶할 程度로 그의 人生을 바꾼 決定이다. 只今에 比喩하면, 特性化高等學校에서 成績이 좋은 學生이 職業敎育이 爲主인 工夫가 適性에 맞지 않아 韓國銀行 高卒 事務職 入社推薦을 約束한 敎師의 挽留에도 그만두고, 文學 工夫에 沒頭했다는 뜻이다.

天道敎와의 만남 [ 編輯 ]

1915年 生活費 調達을 위해 朝鮮總督府 土地 調査局에서 就職하여 書類 筆師 業務를 하였는데(일급으로 賃金을 셈하여, 한 달에 한 番 賃金을 受領函), 이때 함께 일했던 柳光烈 과 뜻이 맞아 以後 鏡城靑年俱樂部를 組織해 活動한다. 1917年 아버지와 義兄弟를 맺었던 天道敎 人 권병덕의 薦擧로 天道敎 3代 敎主인 義菴 손병희 의 셋째 딸인 손용화 女史와 仲媒 結婚 하였다. 그 뒤 孫秉熙가 敎主로 있던 天道敎에서 引受한 보성전문학교 法學科 에 入學하고(의암 孫秉熙 先生은 同德女學校 보성전문학교 를 後援하여 民族敎育에 많은 熱心을 보였다. [3] ), 天道敎靑年會의 核心 活動家로 浮刻되면서 삶의 새로운 轉換을 맞게 된다. 그 무렵 靑年 團體인 京城靑年俱樂部(여기서 俱樂部는 Club의 日本式 音譯이다.)를 組織하여 活動하면서 文藝誌 新靑年 (1919~1920)을 編輯 發行하는 데에 關與했으며(당시 朝鮮 文學界에서 尊敬을 받던 萬海 한용운 詩人이 申請年에 글을 실어서 連帶를 函), 靑年運動家이자 善隣商業學校 學生 때부터 마음에 두고 있던 文學家로서 熱誠을 보였다.

권병덕 先生과의 만남 [ 編輯 ]

小波 方定煥 이 天道敎에서 少年運動 活動家로 일할 때에 권병덕 先生은 성실함과 똑똑함을 눈여겨보고, 孫秉熙 先生이 셋째 따님인 손용화 女史의 사위를 고를 때에 孫秉熙 先生에게 방정환 靑年을 勸했다고 한다. 손용화 女史에 따르면, 仲媒가 들어오자 天道敎 信者와 結婚을 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한 孫秉熙 先生에게 권병덕 先生이 推薦한 人物이 곧 紹介한 人物이 小波 方定煥 先生이었다. 孫秉熙 先生은 소파의 마른 體型을 보고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지만, "사람은 똑똑하나 어릴 적에 너무 굶주려서 마른 것이니 잘 먹으면 괜찮을 것입니다."라고 說得하고, 부지런함, 앞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指導力 等의 長點들을 말하여 孫秉熙 先生이 소파를 사위로 들였다고 한다.

권병덕 先生을 天道敎 活動家로 迎入할 程度로 깊이 信任한 孫秉熙 先生인 터라 권병덕 先生의 말씀을 듣고 사위로 소파를 定한 것이었다. 當時는 방정환 19歲, 손용화 17歲였고, 1917年 陰曆 4月 初八日(義菴 先生의 生辰)이었다.

小波 方定煥을 義菴의 사위로 推薦한 일은 소파의 人生에 肯定的인 影響을 준 일이다. 沒落한 商人의 집안이라 貧困에 허덕이던 소파가 丈人丈母의 配慮를 받아 柳光烈이 "나와 土地調査局에 다닐 때에는 바싹 말랐더니, 몸에 살이 찌고 肥大해졌으며"라고 記憶할 程度로 健康해졌고, 보성전문학교 高麗大學校 에서 工夫를 해나갔기 때문이다. 妻家의 配慮로 삶이 安定되자, 소파는 靑春 雜誌에 短篇小說 隨筆 (小波 方定煥 隨筆 選集(知識을 만드는 知識 펴냄)을 參考하라.)을 投稿하는 等 作家로 活動했으므로, 소파가 兒童文學家 로 자라는 흙을 권병덕 先生이 만들어주신 셈이다. [4] [5]

[6]

獨立新聞 發行 [ 編輯 ]

1919年 3月 1日 己未獨立運動 이 일어나자 寶城學校 校長 윤익선(尹益善)李 天道敎 普成社에서 印刷한 朝鮮獨立新聞 을 내다 逮捕되자 直接 螣蛇旗 로 찍은 朝鮮獨立新聞 2號를 찍어 中學生들의 도움으로 돌리다 日本 警察에 逮捕되었으나, 日警이 들이닥치기 前에 螣蛇旗 를 우물에 버린 德에, 一週日 만에 證據不充分으로 풀려나왔다. 하지만 같이 獨立新聞 發行에 同參한 靑年俱樂部 同僚들은 日警의 拷問 으로 獄死하였으며 方定煥도 拷問을 當하였다.

日本 留學 [ 編輯 ]

1920年 9月 中旬, 개벽사 도쿄部 特派員이자 天道敎 靑年會 도쿄 支會長의 任務를 띠고 日本 으로 건너가 活動했고 1921年 4月 도요 大學 에 新設된 文化學科에 普通聽講生으로 正式 入學하여 哲學 과 新文化, 兒童 文學 , 兒童 心理學 等을 工夫하였다. 方定煥이 쓴 隨筆 ?尾行당하던 이야기?를 보면 當時 日本 警察은 獨立 運動 經歷이 있는 留學生 방정환에게 刑事 를 보내 監視하였는데, 詳述한, 이대승 敎授가 쓴 小波 方定煥 電氣(施工주니어)에 依하면, 日本 警察 刑事들도 指示를 받고 일하는 處地인 터라 이들에게 尊重하여 對해서 刑事들도 소파를 尊重했다고 한다. 1920年 ~ 1923年 사이 留學 期間에 天道敎에서 文化事業을 위해 펴내고, 社會主義者들인 金基鎭, 朴英熙가 發行한 잡지 人 《 開闢 》에 隨筆, 飜譯童話, 民族的·階級的 色彩가 剛한 諷刺機 等을 發表하였다. 1920年 《開闢》 3號에 飜譯 同時 ‘어린이 노래: 불 켜는 이’를 發表하였는데 이 글에서 ' 어린이 '라는 말을 使用하였으며(중세국어시기에는 訓民正音 혜례본에서 어린 百姓이라는 말이 나옴에서 알 수 있듯이 어리다는 어리석다를 뜻했지만, 近代國語時期부터 젊다는 저므다, 나이가 어리다는 어리다라고 했다. 小波 方定煥은 近代國語 以後에 어린 사람을 뜻하는(어린+-이) 어린이를 어린이들을 固有의 個性과 人格을 가진 사람으로서 尊重하는 뜻으로 使用한 것이다.), 社會主義者 가 쓴 글을 紹介하기도 하였다. 中國 留學 期間인 1921年 에 外國 童話를 飜譯하여 1922年 7月 개벽사에서 飜譯童話집 《사랑의 膳物》을 出版하였다.《사랑의 膳物》은 方定煥이 살아있을 때 出版한 唯一한 單行本이며., 다음과 같은 飜案 童話 10篇이 실렸다. [7]

# <사랑의 膳物> 收錄作

  1. 難破船(이탈리아 童話)
  2. 산드룡의 琉璃구두(프랑스)
  3. 王子와 제비(英國 童話, 오스카 와일드가 쓴 幸福한 王子를 飜案, 脚色함)
  4. 妖術王 아아(시리아 童話)
  5. 한네레의 죽음(獨逸童話)
  6. 어린 音樂家(프랑스 童話)
  7. 잠자는 王女(프랑스 童話)
  8. 天堂 가는 길(獨逸 童話)
  9. 마음의 꽃(中國童話)
  10. 꽃속의 작은 이(덴마크 童話)

方定煥이 《사랑의 膳物》을 만든 理由는 當時 朝鮮의 어린이들이 누릴 만한 文化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日本 에서는 이미 메이지 維新 의 影響으로 인하여 제법 어린이 文學이 發展하여 어린이冊들이 書店에 깔렸는데, 朝鮮 의 어린이들은 그러한 惠澤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難破船, 산드룡의 琉璃구두 等 外國의 童話들을 飜案하되 一部 內容은 脚色하여 朝鮮 어린이들이 읽기 좋도록 한 童話集을 펴내었다. 編輯部, 小波 方定煥 童話集, 에세이 出版社(2014年)에서는 사랑의 膳物에 收錄된 10篇의 童話와 傳來童話를 脚色한 創作童話를 1922年 펴낸 처음 冊의 文體를 尊重하되, 現代 어린이들이 읽기 좋도록 復刊했다.

어린이 運動 [ 編輯 ]

어린이들을 위해 1922年 5月 1日에 어린이날 行事를 主催하였다. 소파가 勞動節 人 5月 1日에 어린이날 行事를 色동會 會員들과 開催한 理由는 當時 어린이들이 抑壓받고, 이기영 先生이 쓴 農民小說 故鄕(1935年)에서 農民이 마을 祭祀工場에서 일하다가 그만 둔 理由가 靑少年들이 勞動을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資本主義 의 오랜 惡習인 兒童勞動 을 하고 있어 이들을 抑壓과 搾取로부터 解放하고자 함이다. 實際 當時 어린이 人權宣言을 보면 어린이에게 낮춤말을 쓰지 말고 높임말을 쓸 것, 沐浴 等의 衛生을 위할 것, 어린이가 잘못을 했더라도 알아듣기 쉽게 차근차근 說明할 것, 잡지 를 읽도록 해서 健康한 情緖를 갖도록 할 것, 遠族을 자주 하도록 할 것( 逍風 으로써 어린이들이 健康한 몸과 精神을 가지도록 함)을 말하고 있다. 實際 方定煥 先生이 組織하여 活動한 少年俱樂部 活動도 1週日에 한 番은 文化財 를 보기, 演劇 防穀令 公演(1918年) 및 觀覽, 밤 줍기 行事, 서로 높임말을 쓰기 等의 活動과 規則이 있었다. 어린이 文學歷史를 工夫하거나 하려는 이들이라면 어린이 文學의 고갱이가 어린이 人權, 어린이들이 健康한 情緖를 가지고 살도록 하려는 人權 運動이므로 參考할 만한 重要한 歷史이다.

어린이 雜誌 創刊 [ 編輯 ]

1921年 서울 에서 어린이의 倫理的, 經濟的, 民族的 獨立(解放)을 主張하며 "天道敎 少年會"를 만들었다. 한便 方定煥은 全國 巡廻講演을 통해 뛰어난 이야기꾼으로 活躍했는데, 講演 內容은 어린이들을 위해 그들의 人格을 尊重하자는 것이었고, 民族의 未來, 希望을 살리기 위해서는 어린이를 잘 키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1923年 에는 어린이 雜誌(어린이 以前에도 붉은 저고리, 아이들보이를 崔南善이 펴냈기 때문에 最初의 純粹 어린이雜誌는 아님)인 月刊 어린이 ( 1923年 3月 20日 創刊, 1934年 3月 通卷 122號를 마지막으로 發刊 中止)를 創刊하였다. 하지만 처음에는 葉書에 이름과 住所를 적어서 보내 주면 돈을 받지 않고 보내 준다고 宣傳해도 不過 18名이 申請할 만큼 큰 人氣를 끌지 못했다. 하지만 方定煥은 어린이의 內容에 學父母님들과 讀者인 어린이들이 共感을 하도록, 童話, 獨自 應募 等을 실었고, 그의 創發性은 學父母와 어린이들의 共感을 받아 널리 읽혔다. [3] 實際 尹東柱 是認도 어린 時節에 《어린이》를 읽었다고 한다. 《어린이》는 色동會의 同人이었던 마해송 , 고한승 , 정순철 , 尹克榮 뿐 아니라 讀者였던 李元壽 , 윤석중 是認, 윤복진, 최순애 等이 作品을 投稿하면서 以後 兒童文學家 로 이름을 알리는 機會가 되어, 韓國 兒童文學界의 發展에 貢獻하였다. 實際 윤석중 詩人은 글字繡가 일정한 拍子를 이루도록 하는 刺繡率로써 어린이들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同時 를 지었고, 정순철 作曲家가 曲을 붙여 童謠 '새나라의 어린이는', '卒業式 노래', '짝짜꿍' 等을 지었다.

色동會 [ 編輯 ]

1923年 5月 1日 에는 日本 도쿄 에서 어린이 問題를 硏究하는 團體인 色동會 를 創設하였는데, 色동會라는 이름은 後에 動搖作家로 活躍하게 되는 尹克榮 先生이 예쁜 色동 저고리 를 떠올리며 提案한 이름이다. 1927年 어린이 團體를 統合한 ‘조선소년연합회’ 委員長을 歷任하며 〈兄弟별〉等의 童謠 , 童話 , 《 七七段의 祕密 [8] 等의 少年 小說 , 童劇 等의 創作과 外國 童話 飜譯에 힘썼으며,1928년에는 世界 어린이 들의 作品을 展示한 世界兒童藝術展覽會를 열기도 하였다. 當時 그가 企劃한 展示會는 地方에서 修學旅行 을 올 만큼 큰 人氣를 끌었다고 한다.

人間 關係 [ 編輯 ]

雜誌와 新聞 等에 寄稿 活動을 하면서 小說家 염상섭 (廉想涉), 小說家 현진건 (玄鎭健), 是認 李相花 (李相和), 小說家 沈熏 (沈熏), 文學評論家 백기만 (白基萬) 等과 文友(文友) 關係를 맺기도 하였다. 그 外에도 金性洙 (金性洙), 허경호 (許鏡湖), 이범석 (李範奭) 等의 民族主義者(李 中 金性洙는 나중에 親日派로 變節함)뿐 아니라 박헌영 (朴憲永), 정지용 (鄭芝溶) 是認, 三千里 雜誌를 創刊하기도 한 김동환 (金東煥), 김영랑 (金永郞) 是認, 강영석 (姜永錫), 전영택 (田榮澤) 監理敎 牧師, 김동인 (金東仁) 小說家, 주요한 (朱耀翰) 小說家, 홍사용 (洪思容)劇作家와 박태원 (朴泰遠) 小說家 等 當時의 社會主義者 나 부르주아 關聯 階級主義 文人들, 特定 制度圈 系派 文人들, 文段과 言論界, 敎育界의 人士들과도 폭넓게 交流하며 다양한 人脈을 쌓았다. 민윤식이 쓴 《어린이 人權運動家 방정환》(스타북스,2021年 改正出版)에 依하면, 小波 方定煥은 어린이 讀者投稿, 童話口演 等으로써 兒童文學家들을 찾아서 編輯部員으로서 活動하도록 했다. 소파는 社會主義 系列 戱曲作家인 송영 , 兒童文學家 李元壽 等을 發掘하였고, 社會主義 文人인 八峯 金基鎭 이 《開闢》에서 編輯者 로 일하도록 하기도 했다.

腰絶 [ 編輯 ]

방정환

1931年 7月 23日 ( 木曜日 ) 잡지 의 發行·編輯, 童話 舊緣과 少年問題 講演會 및 執筆 中 日帝의 加重되는 彈壓과 개벽사의 財政難, 民族運動과 社會主義로 갈라진 少年運動 陣營의 分裂 等 過勞 스트레스 , 肥滿 으로 健康 이 惡化된 方定煥은 累積된 疲勞 로 쓰러져 경성제국대학 附屬病院(現. 서울대학교病院 )으로 옮겼으나 腎臟炎 高血壓 으로 享年 33歲의 젊은 나이 腰絶 하고 말았다. 病院 에 入院해서도 醫師 看護師 들에게 童話 를 들려 줄 만큼 性格이 밝았던 그는 '門間에 검은 말이 끄는 검은 馬車가 날 데리러 왔으니 떠나야겠소. 어린이를 두고, 떠나니 잘 付託하오.'라는 遺言 을 남겼다고 한다. [9]

기타 [ 編輯 ]

事後 [ 編輯 ]

1957年 方定煥의 精神을 기리기 위해 '小波賞'이 制定되었다. 1958年 高麗大學校 에서 名譽 卒業狀이 追敍 되었으며 以後 1978年 金冠文化勳章, 1990年 建國訓長 愛國章( 1980年 建國褒章 )이 追敍 되었다.

1971年 에는 色동會가 主管하고 또 全國 어린이들의 誠金을 基金으로 하여 2年間 製作한 銅像이 南山 어린이會館 옆에 세워졌다. [10] 1983年 어린이날 망우리 墓所에 「小波方定煥 先生의 碑(碑)」가 세워졌으며, 1987年 에는 獨立記念館에 그가 쓴 "어른들에게 드리는 글"을 새긴 語錄비가 建立되었다.

그 後 1998年에는 韓國方定煥財團이 設立되었고 韓國方定煥財團은 小波 方定煥 精神의 具現을 위해 올바른 어린이 文化地平을 넓히는 事業을 展開하고 있다. 方定煥의 精神과 價値를 硏究하고(방정환연구총서), 飼料를 蒐集 整理하는 史料編纂事業(正本 방정환全集), 그리고 韓國 어린이 靑少年 幸福指數 國際比較調査硏究와 함께 다양한 작은물결 프로젝트(冊 支援事業인 작은물결文庫, 미디어 隔差解消 支援事業인 작은물결미디어꿈나무, 작은물결 奬學金, 작은물결책나눔터, 작은물결 어린이 人文圖書出版事業 等)를 통해 創意的인 어린이 靑少年 公益活動 展開하고 있다. 이는 오로지 '나라와 民族의 將來를 위해 어린이에게 10年을 投資하라'고 했던 小波 方定煥 先生의 遺訓을 繼承하는 것이다.

評價 [ 編輯 ]

《신동아》 1967年 5月號에 실린 尹克榮 의 글에 따르면 日本 高等係 警察官 美와 와사부로 (ミワワサブロ)는 方定煥에 對해 다음과 같이 評價하였다고 한다. [11]

방정환이라는 놈, 凶測한 놈이지만 밉지 않은 데가 있어... 그놈이 日本 사람이었더라면 나 같은 京釜 나부랭이한테 불려다닐 爲人은 아냐... 日本 社會라면 든든히 한 자리 잡을 만한 놈인데... 아깝지 아까워...
 

方定煥의 作品들 [ 編輯 ]

  • 어린이날
  • 兄弟별
    • 개똥벌레(童謠)
  • 어린이 讚美(수필)
  • 七七段의 祕密 (어린이探偵小說), 동생을 찾아서(어린이 探偵小說). 四季節 에서 四季節 兒童文庫로 펴냄.
  • 그 外 萬年셔츠 等 '어린이'에 連載한 創作童話 . 民譚 卽, 民衆들이 創作하여 입으로 입으로 傳한 傳來童話 를 脚色하거나 소파 先生이 어린이들이 읽기 좋도록 創作한 童話들이다. 圖書出版 에세이에서 펴냄.

方定煥文學賞 [ 編輯 ]

같이 보기 [ 編輯 ]

外部 링크 [ 編輯 ]

各州 [ 編輯 ]

  1. =이상금, 《사랑의 膳物-소파 方定煥의 生涯》, 한림출판사, 2005年 12月)
  2. 1860年 溫陽 方氏 大同譜
  3. 민윤식 (2021). 《어린이 人權運動家 小波 方定煥》. 스타북스.  
  4. 이재승, 김대조 씀; 이슬기 그림 (2019年). 〈第5張 人生의 길 위에서 뜻을 세우다,〉. 《방정환》 初版. 施工주니어. 71-72,73쪽.  
  5. 민윤식 (2021). 〈第2部:靑年獨立〉. 《어린이 人權運動家 小波 方定煥》 初版. 스타북스. 103-104,106-109쪽.  
  6. 이재승, 김대조 씀; 이슬기 그림 (2019年). 〈第5張 人生의 길 위에서 뜻을 세우다,〉. 《방정환》 初版. 施工주니어. 71-72,73쪽.  
  7. 方定煥 編 「사랑의 膳物」, 《경향신문》, 1973.5.5.
  8. 四季節出版社 에서 펴냄.
  9. “朝鮮의 어린이를 어떡하나…”가 마지막 이었다고도 한다. 「氷水를 좋아하던 小波」, 《 京鄕新聞 》, 1962年 5月 3日 參考.
  10. 方定煥先生銅像 除幕, 《경향신문》, 1971.7.23, 1987年에 能動 어린이大公園 으로 옮겨졌다.
  11. “童話처럼 떠나 간 植民地 아이들의 산타 小波 方定煥” . 新東亞.